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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그대, 사랑의 증폭자, 화해의 확장자”
    저희 교인이라면 다 아는 사실인데요, 저의 개척 시절은 정말 처절했습니다. 개척 멤버 한 명 없이 맨손, 맨몸으로 맨땅에서 시작하여 오직 불타는 소명감 하나로 온 몸을 바쳐 영혼 구원을 위해 뛰었습니다. 가락동 23평 지하상가에서 교회를 시작하여 교인 한 명 전도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오죽하면 제가 교회 전도지를 돌리기 위해 새벽에 신문 배달까지 하며 뛰고 또 뛰었겠습니까? 그야말로 처절한 맨발의 소명자의 절규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우리 교회 바로 앞 사거리에서 여의도순복음교회 버스가 와서 성도들을 다 데려가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자 갑자기 공허하고 허전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저는 한 명이라도 전도하기 위해 밤낮으로 몸부림치고 있는데 대형교회 버스가 가락동까지 와서 사람들을 다 데려가 버리니 너무 허탈한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 저는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왜냐면 제가 신학교를 다니던 시절 무등산기도원에서 조용기 목사님을 마음속 아이돌로 삼고 기도하던 때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 버스를 향하여 축복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바꾸었습니다. 또 분당 정자동으로 왔을 때는 교회 바로 앞에 명성교회 버스가 와서 성도들을 가득 채워 데려가는 것입니다. 그래도 저는 단 한 마디도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명성교회가 더 부흥하여 한국교회와 나라를 위해 크게 쓰임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 이후로도 조용기 목사님에 대한 부정적 루머와 김삼환 목사님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들어도 전혀 마음에 새겨놓지도 않았습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시는 모습만 보며 저도 귀하게 쓰임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저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저도 어느새 한 시대를 위해서 쓰임 받는 위치에 서게 되었습니다. 요즘 ‘인포데믹(infodemic)’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보(information)’와 ‘전염병(epidemic)’을 조합하여 만든 신조어인데, 잘못된 정보가 미디어나 인터넷 등의 매체를 통해 급속도로 퍼져나가 사회적 혼란을 야기시키는 ‘정보 전염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일 나쁜 사람은 거짓 정보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의 잘못된 정보에 전염되어서 퍼나르는 사람들은 불행한 사람들이고요. 이 분들은 의식구조가 선택적 지각이나 확증편향에 빠져 자신들이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합니다. 자기만 교회를 사랑하는 것처럼, 정의를 외치지만 사람들 사이에 미움과 증오, 분노와 파괴를 증폭시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사랑과 용서를 증폭시키고 화해와 평화를 확장시키는 종교입니다. 아니, 사랑과 정의가 입맞추게 하는 종교지요. 그런데 왜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달리 분노와 증오를 부추기고 분열과 파괴에 앞장서려는지 모르겠습니다. 우군끼리도 조소와 비난의 총질을 끊임없이 합니다. 그것이 한국교회의 이미지에 상처를 입히는 일인데 말입니다. 저도 누구 못지않게 정의감이 강한 사람입니다. 길을 가다가도 싸우는 걸 보면 끝까지 말리고 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말했듯이, 몇 계단만 올라가도 온도가 다르고 공기가 다르고 풍경이 다릅니다. 하물며 더 높은 곳에 올라가서 보면 바람의 온도가 다를 뿐만 아니라 사방 전체가 다 보이게 되지요. 예수님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비판을 하면 그 비판으로 다시 비판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려고 하지 말고 우리 눈 속에서 있는 들보부터 빼어야 한다”고 하셨지요.(마7:1-5) 예수님께서는 모든 미움과 증오, 파괴를 멈추고 사랑과 용서, 섬김으로 세움의 역사를 일으키신 분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고 진정한 기독교의 정신입니다. 지금 우리는 남을 비판하고 총질하는 ‘냉장고 언어’를 버려야 합니다. 자신의 가슴을 따뜻하게 할 뿐만 아니라 남의 가슴도 따뜻하게 하는 ‘화덕 언어’를 취해야 합니다. 우리의 목적은 파괴가 아니라 세움입니다. 교회를 섬기고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는데 방법은 다를 수 있습니다. 방법이 다르다고 서로 증오하고 분노를 부추겨서는 안 됩니다. 파괴에 앞장서서도 안 됩니다. 사랑과 섬김의 자세, 화덕의 언어로 서로가 서로를 세워가야지요. 비록 우리의 삶의 터전이 사막 같을지라도, 우리가 꽃밭여행자만 된다면 사막을 푸른 숲으로, 아름다운 꽃밭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 이런 닉네임을 선물하고자 합니다. 그대는 ‘사랑의 증폭자’, ‘화해의 확장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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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1-08-15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저도 여전히 저항하고 있습니다”
    제가 쓴 ‘외로운 선율을 찾아서3’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코로나 이후 우리는 동선을 잃었다 아침마다 핸드폰에 뜨는 확진자 문자 누군가의 동선 매일 우리의 식탁에는 불안과 우울, 의심과 회의가 오른다 혼자 있고 싶은 외로움마저 통제하는 낭만과 방랑의 소멸 사회 밤 11시 산에 오른다 그 누구도 나의 동선을 추적할 수 없는 외로운 선율을 찾아서. 이 시는 코로나로 인해 일상의 자유와 관계마저 통제 받아야 하는 시대를 향한 정서적 저항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한교총 대표회장으로서 끊임없이 방역본부와 소통하고 협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너무 정부에 협조적인 것이 아니냐고 비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 교단에한 어른이 계시는데 이 분이 걸핏하면 “소 총회장 뭐하느냐, 정부와 좀 싸워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어르신, 제가 싸울 테니까 어르신이 대신 가서 협상하세요. 그렇게 해 주시면 제가 당장 피켓 들고 나가겠습니다.” 그랬더니 “꼭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나도 화가 나서 그런 거지...” 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그동안 해 온 사역을 설명 드렸더니 나중에는 오히려 그 분이 제 팬이 되셨습니다. 그 후론 다른 사람이 저를 공격하면 오히려 “소 총회장이 지금까지 한국교회 공적 사역을 위해 얼마나 힘들게 일해 왔는데 당신들이 그런 고충과 노력을 알기나 하느냐”고 대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정말 감동을 받았습니다. 사실 코로나 상황에서 누군들 저항하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최근에 와서 윤동주를 저항시인이라 하지요. 그런 면에서 볼 때 저항에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만주나 상해로 가서 직접 몸을 바쳐 독립투사가 되기도 하고, 윤동주 같은 시인은 심미적 저항시를 썼습니다. 저 역시 합동 총회장이나 한교총 대표회장이 아니면 모르겠지만 어차피 방역본부와 대화 채널을 갖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잘못된 방역대책에 반대하고 저항하면서도 계속 소통하고 합의점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4차 대유행만 아니었다면 거의 50% 가까이 한국교회의 예배를 회복할 수 있는 협상의 성과를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연일 1800명, 1900여명에 달하는 확진자들이 나오면서 무산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럴지라도 저는 제 위치를 지키면서 교회의 내적, 외적 결집력과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생산적 저항, 전략적 저항, 미래적 저항의 길을 택했습니다. 저는 방역 4단계로 예배 인원이 20명 이내로 제한되자, 바로 그 주부터 예배를 총 7번 드렸습니다. 예배마다 1000여명의 성도들이 화상줌과 라이브 톡으로 참석하였고 유튜브는 평균 4천~5천여 명의 성도들이 함께 하였습니다. 모든 예배를 제가 직접 인도했습니다. 사실 유튜브로 예배를 송출하면 두세 번만 해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화상줌을 통해서 한 성도라도 더 ‘페이스 투 페이스’를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4주 연속 특별새벽기도회와 특별저녁기도회를 인도하였습니다. 코로나의 심각성과 위기감을 알기 때문에 온 성도들을 더 강력하게 묶고 거룩한 부족공동체, 초연결 슈퍼 처치를 이루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제가 작년에 핸드폰 문자를 확인 못한 것이 1600개 정도 됩니다. 작년 연말에 핸드폰을 교체해서 올해 1월부터 온 문자 중에 읽지 못한 것이 900개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다 읽어봤는데 불특정 다수로부터 오는 문자는 거의 보지 않습니다. 저도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문자를 보면 분노가 생기고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평정심을 잃고 돌아오지 못할 과격한 판단과 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익스트림하게 나가는 사람은 잠시의 포퓰리즘은 일으킬 수 있지만 시대를 바꾸거나 시대의 중심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스스로 자제하고 컨트롤을 하면서 저의 위치에서 저항하며 새로운 길을 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옛말에 “산토기 잡으려다 집토끼를 잃는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총회장, 한교총 대표회장으로서의 다양한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4주 연속 7번의 주일예배와 특별새벽집회, 저녁집회를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저와 우리 교회가 보여준 생산적, 전략적, 미래적 저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정부의 일방적 방역대책에 저항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저항을 하더라도 생산적, 전략적, 미래적 저항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중에 코로나가 종식되고 나면 어느 교회가 가장 회복탄력성을 가지고 부흥하며 시대를 선도하게 될지 역사가 말 해 줄 것입니다. 결코 아군끼리 서로 총질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이어령 교수님의 말처럼, 우리는 END가 아니라 스토리와 다양한 간증을 머금은 꽃봉오리 하나를 피워야 합니다. 코로나의 폐허 위에 영적 역설적 부족공동체라는 꽃봉오리 하나를 피워내는 것도 더 아름다운 저항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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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1-08-08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바람이 불면 불꽃은 더 타오른다
    지난번에 코로나19, 4차 대유행에 따른 방역대책 논의를 위해서 총리실에 갔을 때 다른 종교 지도자들과는 달리 저는 정부의 일방적, 획일적 방역조치에 강력하게 항의를 했습니다. 특별히 천주교 이용훈 주교회의 의장님께서 같은 의견을 이야기를 해 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주부터는 중대형교회 같은 경우는 100명이내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어느 정도 협의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무 협의에 참여를 한 한교총 사무총장으로부터 연락이 오기를, 이번 주에는 본당에 19명을 유지하되 다만 가용 가능한 공간별로 19명 이내로 더 드릴 수 있도록 협의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다음 주부터는 5% 이내로 드릴 수 있도록 세분화된 방역 조치를 발표하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제가 그 전화를 받고 너무 화가 났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누구보다 국민 보건을 위해서 정부의 방역에 협조하고 교회도 국민적 고통을 나누며 양보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입니다. 앞으로도 교회는 가장 낮은 자리에서 배려를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좀 더 유연한 조치를 하기로 했으면 다는 아니더라도 비슷한 조치라도 해 줬어야 하는데 다른 공간에만 들어갈 수 있도록 약간의 조치밖에 안 해 준 것입니다. 이런 방역 회의 결과를 몇몇 총회장님들께 알리니까 그 분들이 저에게 항의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화가 나서 주무 장관님께 전화로 강력하게 항의를 하니까 출국 전이라 공항에서 전화를 받으시며 오히려 장관님이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목사님, 저 자신도 이해가 잘 안 가는데 목사님은 얼마나 화가 나십니까? 다음에는 반드시 완화된 조치를 할 수 있도록 제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날 저녁에 너무 화가 나서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항의를 해 온 분들에게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도 개교회 목사라면 얼마든지 저만의 길을 갈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를 섬기는 대표자로서 한 번 판단을 잘못해 버리면 한국교회 전체에 엄청난 타격을 입히고 국민적 저항과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게 됩니다. 그래서 저도 매우 섭섭하고 분하지만 어쩔 수 없이 국민의 눈높이와 정서를 살피며 방역본부와 협의를 하는 것입니다. 원하시면 제 자리를 양보할 테니까 저를 대신해서 역량을 발휘해 보시겠습니까?” 그랬더니 이튿날 그분들로 부터 이런 격려 전화 및 문자가 왔습니다. “목사님, 사실 우리도 교단 목사님들로부터 항의를 받다보니 그랬습니다. 소 총회장님이 열심히 하는 것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정말 이번에 정부의 일방적이고 획일적인 조치는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무조건 현장예배를 강행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철저하게 방역을 지키면서 안전하게 예배를 드리겠다고 하는데 너무 일방적이고 획일적으로 방역조치를 하는 것은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됩니다. 법원에서는 오히려 한국교회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저도 그 분들의 말씀에 백번 찬성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상황에서 우리가 방역조치를 거부하고 우리만의 길을 가버린다면 사회적 비난과 부정적 여론의 역풍을 맞고 더 큰 상처를 입게 될 것입니다. 삼국지에서도 보면 싸움도 못하는 장수들이 전략도 없이 전공을 세우려고 함부로 나섰다가 오히려 자신도 죽고 패전을 하게 하는 빌미를 주었지 않습니까? 다음날 몇몇 대형교회 목사님들과도 전화로 논의를 했더니 “지금까지 잘 해 왔는데 조금만 더 인내를 합시다. 한 주 더 연장된다고 끝난 것은 아니니까요”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또 어떤 중형교회 목사님은 “그나마 이번 주에는 70명이라도 예배를 드리게 되었네요. 총회장님 덕분입니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위로인지 비웃음인지 분간이 안 되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코로나 확진자가 거의 1900명에 육박한 것입니다. 또 한 번 뒤통수를 맞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물론 다음 주에는 더 완화된 조치가 나올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원망하고 불평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엑시트라는 영화의 주인공처럼, 암흑의 상태에서도 새로운 길을 찾는 ‘루트 파인딩’을 해야 할 때입니다. 이어령 교수님께서도 삶은 END가 아니라 새로운 꽃봉오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바람이 불면 불꽃은 더 활활 타오릅니다. 코로나의 위기 속에서 오히려 더 강력한 부족공동체의 불을 타오르게 하며 주님의 제단에 꽃봉오리 하나를 피워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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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1-08-01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외로운가요? 헬퍼스 하이를 경험해보세요”
    “지금 외로우신가요?” “요즘 같은 때에 외롭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외롭다 못해 우울하기까지 합니다.” 어떤 사람과 주고 받은 대화를 요약한 것입니다. 코로나 상황은 우리를 자꾸 외로운 분위기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코로나는 반달리즘을 몰고 왔고 공동체를 여지없이 와해시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가족도 예전만큼 유대를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요즘 수도권의 상황은 더 그렇습니다. 외로움은 여러모로 폐해가 많다고 합니다. 혈압이 상승 되고 수면의 질이 떨어지며 일반인들에 비해 조기사망 가능성이 26%나 높다고 합니다. 또한 이 외로움은 우울증으로 가는 뇌 회로를 활성화 시켜 줍니다. 더욱이 이 외로움은 전염성이 강하다는 것이죠. 오죽하면 영국에서는 외로움 장관을 세웠을까요? 이러한 외로움의 속성과 분위기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영국의 작가 다니엘 튜더는 스스로 고독해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유대관계를 맺으라고 제안합니다. 외로울수록 누군가를 만나고 좋은 공동체에 들어가서 소속감을 가져야된다는 겁니다. 저는 그 글을 읽고 외로움을 극복하게 하고 이기게 하는 가장 좋은 공동체가 교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은 교회를 비방하고 혐오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교회 생활의 맛을 보지 못해서 그런 겁니다. 저희 교회 같은 경우는 일단 와 보면 훈훈한 분위기를 경험하고 따뜻한 사랑과 섬김의 냄새를 맡습니다. 그 냄새를 맡은 사람은 스스로 소속감을 갖고 유대의 차원을 높이며 거룩한 부족공동체의 응집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세상의 공동체에서도 자원봉사나 자선행위를 하면 유대의 질을 높이고 뇌에서 옥시토신이 분비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치매를 막을 뿐 아니라 ‘헬퍼스 하이’ 즉 정서적 만족감이나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교회이겠습니까? 교회 안에서는 거룩한 부족공동체를 경험하고 오토텔릭, 즉 자원제를 드리는 마음으로 하나님과 그 공동체를 위해 섬기고 헌신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거룩한 헬퍼스 하이, 즉 영혼의 포만감과 황홀감을 느끼게 되지요. 저는 목회자로서 이런 거룩한 헬퍼스 하이를 누리고 살아갑니다. 저는 전혀 외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언제나 관계적인 삶을 살고 부족공동체의 한 중앙에서 일종의 추장과 같은 존재로 살아가기 때문이죠. 그러나 지도자로서의 고독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앞장서서 일을 하면 반드시 외롭고 고독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 비난과 공격을 받을 때도 있어요. 그러나 그런 사람들마저 이해하고 품어버립니다. 그럴 때 고도의 헬퍼스 하이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목회자이지만 문학예술 영역에 젖어들면 예술적 외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일전에 제가 존경하는 이어령 전 장관님께서 전화로 제게 이런 칭찬을 하시더라고요. “소 목사님은 교계활동과 사회활동도 많이 하지만, 문학을 하고 시를 쓰고 예술적 감성이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창의적 상상력을 가지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솔직히 저도 문학과 예술, 시와 음악의 영역에 들어가면 깊은 고독을 느낍니다. 그 고독이 있어야만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하이터치(공감능력)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이런 외로움을 느낄 때는 다니엘 튜더의 제안대로 자연을 가까이 하는 것이 좋습니다. 자연 속에서 자연과 유대를 하고 대화하며 소통할 때 정서적 행복감이 찾아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런 영역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 자선을 베푸는 것은 더 좋습니다. 그래서 저는 비교적 문학적 예술적 감성이 통하는 선광현 목사님, 박주옥 목사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갖고 작은 인정도 베풉니다. 왜냐면 그것이 헬퍼스 하이를 누리는 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과는 달리 우리 그리스도인만이 할 수 있는 가장 특별하고 위대한 유대관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수직적으로는 주님과 유대를 맺는 것이고, 수평적으로는 교회 안에서 영적, 역설적 부족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외로우면 외로울수록 주님께 더 깊이 나아가고 주님과 더 친밀하고 은밀한 관계를 맺습니다. 그리고 감동이 올 때는 언제나 자원제를 드리고 특별한 헌신을 합니다. 또한 교회에서 사랑하고 섬기는 공동체를 이루고 내가 먼저 섬기고 남을 배려하는 삶을 삽니다. 그럴 때 절대적 헬퍼스 하이를 누리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무슨 외로움이 있을까요? 무슨 우울함이 있겠습니까? 그런 차원에서 보면 이번 중대본의 획일적인 비대면 예배 발표는 너무 아쉽기 그지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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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1-07-11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이별이 아름다우면, 아쉬움도 눈물에 씻겨져요”
    저는 원래 지난 수요일 오전에 조선일보 주최로 신라호텔에서 열린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 개막식에 참석하기로 했습니다. 그 자리는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VVIP들만 초청 받은 자리였습니다. 제가 교계 대표로 초청 받았는데 그 행사는 아침 8시까지 입장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의 저와 새에덴교회가 있기까지 가장 큰 사랑과 헌신을 해 주신 문정남 장로님께서 투병 중 의식을 잃은 채 위독해지셨다는 소식을 그 전날 오후에야 들었습니다. 제가 그날 오후까지 예정된 총회일정을 마치고 광주를 가게 되면 밤을 새워 다녀와야 하기 때문에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에 못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약에 두 곳을 다 다녀와 다음날 일정을 소화한다면 저는 아마 쓰러질지도 모릅니다.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 개막식은 엄청난 자리입니다. 대한민국 정재계, 학계, 문화예술계 최고의 분들만 초청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저도 참석하고 싶었지만 만일 문 장로님이 돌아가시면 제 가슴에 천추의 한을 담게 될 것입니다. 문 장로님께서는 저희 개척시절 때부터 매주 광주에서 서울로 교회를 오시며 분당 구미동에 땅을 사고 예배당을 지을 때 건축비의 3분의 1 가까이 헌신하셨던 분입니다. 그리고 제가 교회부흥을 위해 밤낮을 모르고 뛸 때 장로님은 제 어린 아들을 데리고 여러나라 해외여행을 시켜주신 분입니다. 마침내 광주로 내려가서 중환자실로 들어가 장로님의 이마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하자 세상에, 한 달 동안이나 의식이 없었던 장로님이 눈을 뜨시고 저를 알아보시는 것입니다. 목에 호스를 꼽아 말은 못하지만 눈물을 비 오듯 쏟으시며 “목사님, 목사님…”을 수십 번을 불러대는 것입니다. 나중에 알았는데 장로님은 의식을 잃기 전까지 저를 그토록 찾고 기다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장로님 가족들은 제가 총회 사역과 연합기관을 하나로 만드는 사역에 불철주야로 뛰고 있는 것을 너무 잘 알아 제게 연락을 못 하셨다고 합니다. 제가 장로님의 흐르는 눈물을 닦아드리며 복받치는 울음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로님,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이렇게 심하게 아프신지 몰랐습니다. 저를 원망 많이 하셨죠? 지난날 장로님의 헌신과 희생 때문에 오늘의 교회를 이루었고 제가 총회장이 되었으며 지금은 연합기관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 밤낮을 모르고 뛰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장로님. 이제 하나님이 다시 살려주시면 제가 아무리 바빠도 장로님을 모시고 고향인 제주도에서 한 주 동안 함께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제발 일어나주세요.” 그러자 장로님은 눈물을 계속 흘리셨습니다. 저와 함께 간 아들도 엉엉 울어대니까 울지 말라고 고개를 흔드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의 손을 꼭 잡으셨습니다. 제가 하나님께 장로님을 살려달라고 기도하는데도 고개를 흔들어대셨습니다. 이제 빨리 천국에 가고 싶다는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저는 장로님의 얼굴에 눈물방울을 떨어뜨리고 손으로는 가슴과 얼굴을 만지며 기도를 하였습니다. 이러기를 한 시간, 정말 한 시간 내내 장로님과 저 그리고 김현숙 권사님과 제 아들은 그렇게 눈물을 흘렸습니다. 다음 날 수요일 저녁 미국 FMC(전직연방의원협회) 초청 한미우호증진예배를 드리는 시간에 장로님이 천국으로 가셨다는 문자를 받았습니다. 그 문자를 받고 예배시간 내내 계속 눈물을 참지 못했습니다. 저는 다음 날과 그 다음 날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광주로 가서 상주가 되어 장로님의 빈소를 지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발인예배를 드리고 화장장을 거쳐 대전 국립 현충원에서의 안장예배까지 다 인도했습니다. 장례식 일정 내내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아, 내가 그날 밤 장로님께 가기를 너무나 잘했지. 만약에 장로님께 가지 않았다면 한을 가슴에 깊이 품고 살게 되었을 거야. 그러나 그 아름다운 이별의 순간이 있었기에 지난날의 아쉬움과 섭섭함들을 눈물로 씻겨낼 수 있었던 거지. 나는 몰랐지만 그때 장로님은 아셨던 거지. 바로 그 순간이 아름다운 이별의 순간인 줄을...” 사실 저는 장로님이 아프실 때 자주 곁에 있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한국교회의 예배 회복과 연합, 세움을 위한 일 때문에 너무 바빴습니다. 정말 살인적인 스케줄을 다 소화했습니다. 그래도 장로님 입장에서는 섭섭한 마음이 있을 수 있었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정말 바빴던 저에게 장로님과 아름다운 이별의 순간을 주시고 그 깊은 이별의 순간을 통해서 서로의 섭섭함을 화해로 풀고 모든 아쉬움을 눈물로 씻어버리는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 한 시간의 깊은 기도와 소통은, 하나님의 사역 때문에 분주했던 저에게 하나님이 역설적인 보상으로 주신 최고의 선물이었습니다. “문 장로님, 천국에서 편히 쉬세요. 저는 이번처럼 앞으로도 세상의 화려한 곳보다 저의 위로와 사랑이 필요한 곳으로 달려가는 삶을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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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1-07-0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뼈를 깎고 피를 찍어 원고를 쓰다”
    지난 목요일 총신대에서 총신 교수님들이 개혁 신학적 관점에서, 혹은 개혁신학 중심으로 66권 성경 주석 집필을 시작하는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우리 총회의 굵직한 교회들이 후원을 하고 저희 교회에서는 이사야서 주석 작업을 위한 후원을 하기로 했습니다. 제가 총회장의 자격으로 설교를 하였고 이어서 박성규 목사님이 축사를 하셨는데 스위스 신앙고백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하면서 하나님 말씀을 세 가지로 설명하였습니다. 첫째는 기록된 성경의 말씀, 둘째는 설교로 선포된 말씀, 셋째는 보이는 성찬의 말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가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설교자도 믿어야 하고 설교를 듣는 성도들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설교가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되려면 설교자가 뼈를 깎고 피를 찍어 설교 원고를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 가슴에 “뼈를 깎고 피를 찍어 원고를 쓴다”는 표현이 너무 임팩트 있게 다가왔습니다. 저 역시 지금까지 그렇게 설교 원고를 써 왔기 때문입니다. 신학교에 막 입학하였을 때는 너무나 간절히 설교하고 싶어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목회 내공이 깊어지고 시간이 지날수록 왜 그렇게 설교가 부담이 되고 어려워지는지 모릅니다. 설교가 무엇인가를 알면 알수록 더 두려워지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두려운 영광의 세계 속에 빠져드는 것이지요. 그 두려운 영광을 알기에 설교 한 편, 한 편을 준비할 때마다 고통의 산실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나만 이렇게 힘들어하는가? 내가 너무 무능해서 그런 것일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 때도 있습니다. 이 고통은 마침내 열등의식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우울증으로 변색되기도 하며 여러 가지 콤플렉스적인 심리현상으로 둔갑하기도 합니다. 이런 기나긴 산고 끝에 어렵사리 해산한 한 편의 설교를 가지고 주일 아침에 가슴을 두근거리며 강단에 올라가면 충만히 임재하신 성령의 권능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은혜 받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제가 먼저 은혜를 받기 시작하지요. 어떤 사람은 마음에 찔림을 받고, 어떤 사람은 고개를 끄떡거리며 아멘하면서 기뻐하고, 그 반짝거리는 눈동자와 영적 생명이 소생하는 모습들을 보노라면 이때야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 온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이 세상 최고의 행복으로 느껴집니다. 이런 의미에서 설교 한 편을 준비하기까지 겪어야 하는 고통의 산실은 곧 영원한 축복의 산실이요, 은총의 산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산실에서 영감을 사모하고 빛을 찾아 몸부림치다가 영광스런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고 거기서 바로 옥동자와 같은 생명의 설교 한 편이 해산되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스무 대여섯 권의 책을 쓰기까지 뼈를 깎고 피를 찍어 쓰는 마음으로 모든 원고를 제가 직접 손으로 다 썼습니다. 그러다 문서사역 담당자인 선광현 목사님이 오면서부터는 전화로 불러 주어서 컴퓨터 워드 작업을 했습니다. 물론 제가 미리 아우트라인을 메모해서 불러주지요. 그리고 원고가 나오면 그것을 수없이 읽고 고치며 뼈를 깎고 피를 찍는 마음으로 수정합니다. 그러다보면 토요일 밤은 너무 긴장하여 불면과 싸우기도 합니다. 저는 앞으로도 뼈를 깎고 피를 찍어 쓰는 심정으로 설교 원고를 작성 할 것입니다. 언젠가 어느 유명한 가수 분과 식사를 하는데, 그 분은 교회 문화에 익숙지 않으니까 “목사님께서도 기도문을 작성하는데 참 힘드시겠어요.”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은 설교문인데 기도문이라고 표현하신 것이죠. 저는 앞으로도 호흡하고 숨쉬는 마지막 날까지, 제 사역이 멈추는 그날까지, 뼈를 깎고 피를 찍는 심정으로 설교문을 쓸 것입니다. 고통의 산실에서 옥동자를 낳는 해산의 고통으로 설교자의 길을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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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1-06-27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우리의 삶에는 하나도 우연이 없습니다”
    지난 화요일 오후 3시에 제58회 목사장로기도회 역사 갈라콘서트 ‘불의 연대기’가 공연 되었습니다. 저는 공연 내내 혹시 실수가 나타나지 않을까 얼마나 긴장을 하며 손에 땀을 쥐고 몸을 흔들며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저도 모르게 제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흐르는 것입니다. 나중에 보니까 저 뿐만 아니라 다른 목사님, 장로님들도 감동을 하여 눈물을 흘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침내 공연이 끝났을 때, 저는 주체할 수 없는 감동에 가슴이 벅차올라 눈을 감고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 혼자 앉아 있고 주변의 목사님과 장로님들이 다 일어나서 환호성을 지르며 기립박수를 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제야 저도 일어나서 박수를 쳤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제 핸드폰으로 여기저기 문자가 쇄도하는 것입니다. “총회장님, 너무 감격입니다. 총회장님의 한계는 어디까지 입니까? 지금까지 이런 총회장님은 없었습니다.” “이런 목장기도회는 없었습니다. 정말 총회장님의 말씀처럼 음악예술 안에서는 반론이 없고 하나가 된다는 것을 다시 느꼈습니다.” “이번 갈라콘서트 우리 총회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음악공연의 새장을 여시는 대서사시와 같은 불후의 명작을 남기셨습니다.” 공연이 끝난 후, 후문에 의하면 “그 어떤 설교보다도, 백번의 설교보다도 한 시간의 갈라콘서트가 큰 감동을 주었다. 정말 총회장님 말씀대로 얼마나 총회를 사랑하고 총신을 사랑하는지 그 진심을 예술적 감동으로 보여 주었다”는 이야기가 회자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저는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하고 싶었습니다. 이미 대관도 다 해 놓았는데 코로나 팬데믹이 장기화되면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목장기도회 때 하게 되었습니다. 이마저도 정말 힘들었습니다. 정부와 조율하고 지자체와 소통한다는 게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참석자 전원 코로나19 신속 진단 키트 검사를 하고, 개인별 QR 명찰 배부 및 수시 발열 체크 등 철저하게 방역을 지키면서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하나님의 은혜로 정말 은혜스럽게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공연은 끝났지만 제 머리와 가슴에는 아직도 그 날의 감동의 여운과 환호의 잔상이 계속 맴돌고 있습니다. “아, 어떻게 내가 이런 작품을 기획하여 대본을 쓰고 작사를 할 수 있었는가. 또 어떻게 그 어려운 여건 중에도 공연을 결단하고 추진할 수 있었는가.” 저는 어느새 어린 시절의 회상으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수학과목에는 소질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글 쓰고 노래하는 것은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고전읽기도 하고 백일장이 있으면 학교를 대표해서 군 대회에 나가고, 군을 대표해서 도 대회에 나가 상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저는 글쓰기보다 표딱지 따먹기나, 구슬치기 같은 노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큰 형님께서 저를 붙들고 책 읽기를 시키고 글쓰기를 하게 해서 필력을 갖추게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마을 콩쿠르에 나가 노래를 불러 인기상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순간순간은 우연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쓰시려고 어린 시절부터 문화예술적 감성과 소양을 갖추게 하신 것입니다. 또한 위기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일을 추진하는 과감한 결단력과 추진력을 갖게 하려고 백암교회에 가서 뜨거운 영성과 내공을 쌓게 하신 것입니다. 글을 쓰는 지금도 너무 감동 받았다는 문자가 간간히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 가슴에는 “나의 사랑 합동 총회, 나의 눈물 총신··· 울게 하소서···”의 여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우리 교단이 ‘불의 연대기’의 노래처럼 더 이상 반목과 분열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고 더욱 더 하나가 되어 비상하고 웅비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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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1-06-06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그리움과 애태움이 메말라가고 있지는 않는지··· ”
    가락동에서 교회를 개척할 때에는 제가 직접 전도를 하였습니다. 그때는 우리 교회를 출석하는 한 사람 한 사람 대부분이 제 손에 의해서 이끌려졌습니다. 그런데 출석교인이 100여명쯤 되었을 때, 지금은 우리 교회 장로님과 권사님이시지만, 당시 김창환 집사와 유추자 집사님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습니다. 아들과 딸까지 데려가니 성도 4명이 교회를 떠나버리는 것입니다. 제가 봉고차로 공항까지 배웅해 주었는데요, 공항에서 헤어질 때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공항에서 교회로 돌아오면서도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 왔습니다. “아, 그들은 꼭 이민을 가야 했을까. 내가 가지 못하도록 더 붙잡고 말릴 걸...” 사실 김창환 집사님 부부는 가락시장에서 장사해서 십일조도 잘하고 봉사와 헌신도 잘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으로 먼저 간 형제가 자꾸 미국으로 오라는 바람에 꼬임을 받아 LA로 간 것이거든요. 저는 그들을 떠나보내는 아쉬움 때문에 몇 주일 동안이나 일이 손에 안 잡힐 정도였습니다. 그들이 떠난 지 1년 반쯤 되었을 때 제가 미국에 가서 보니까 사는 형편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김창환 집사님 손을 잡고 울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집사님, 여기서 이렇게 고생하지 말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세요. 한국에 오면 얼마든지 가락시장에서 다시 장사를 시작할 수 있잖아요?” 저의 말에 설득을 당하여 그들은 다시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그 부부가 다시 교회로 돌아왔을 때 얼마나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교인 한 부부가 돌아오는 게 얼마나 가슴이 벅찼는지요. 이런 그리움과 애태움은 코로나로 인하여 저의 가슴 속에 다시 가득하기 시작했습니다. 오죽하면 제가 ‘보랏빛 엽서’라는 노래를 개사해서 불렀겠습니까? “♪ 보랏빛 엽서에 실어온 향기는 목자의 눈물인가 이별의 마음인가... / 오늘도 가버린 성도의 생각에 눈물로 써내려간 얼룩진 일기장엔 / 다시 돌아올 성도 모습 기다리는 목자의 사연” 또 ‘J’라는 노래도 사랑하는 성도를 향한 연가로 개사해 불렀습니다. “J 아름다운 교회 생활이 멀리 사라졌다 해도 / J 나의 사랑은 아직도 변함없는데 / J 난 성도들을 못 잊어 / J 난 성도들을 사랑해...” 그러나 공간대비 20% 예배를 드리는 기간이 너무 오래 되다보니까 이것이 너무 당연시 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글을 쓰며 깊은 상념에 잠겨봅니다. “개척교회 시절에 성도 한 명을 보낼 때의 애태움과 그리움이 내게 아직도 남아 있는가. 한 성도를 떠나보내며 성도를 사무치게 그리워하고 애타는 마음이 나도 모르게 메말라가고 있지는 않는가.” 그래서 지난 주 저는 김부겸 국무총리님께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총리님, 언제 교회 예배 때문에 확진자가 나온 적이 있습니까? 예배를 통해서는 코로나 감염이 안 되었잖아요. 그러니 어서 빨리 예배가 더 원활하게 회복될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그래서 언론보도에 나온 것처럼, 김부겸 총리님께서는 “목사님들이 백신을 많이 맞도록 권면해 주십시오. 그러면 7월부터는 예배 제한이 좀 더 풀어지지 않겠습니까?”라는 긍정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지요. “총리님, 저는 예배 회복을 위해서 이미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맞았습니다. 화이자나 모더나도 맞을 수 있었지만 저는 아스트라제네카를 선택해서 맞았습니다. 이렇게 예배 회복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 저 같은 사람의 열정도 알아주시고 예배 회복 뿐만 아니라 문화예술활동도 회복되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러나 공간 대비 비율 예배 회복의 퍼센트가 높아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목사의 가슴에 성도들을 향한 그리움과 애태움이 메말라가고 있지 않는가하는 것입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쩔 수 없이 집에서 유튜브로 예배에 참여한다 하더라도 교회를 향한 애태움과 그리움이 메말라가서는 안 됩니다. 교회를 나오지 않는 것을 당연시해서는 절대로 안 되지요. 오늘밤은 아무리 하늘을 봐도 구름이 꽉 끼어서 별 하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 구름 너머에 별이 반짝이고 있는 것처럼, 비록 코로나의 먹구름이 성도들과 저를 갈라놓고 있다할지라도 저는 지금도 여전히 성도들의 영혼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영혼이 다시 예배의 감격으로 불태울 그 모습을 상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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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1-05-30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아직껏 총회장 명함을 써 보지 못했습니다”
    예전에 청와대 대통령 관저에 초청을 받아 갈 때였습니다. 한 번은 우리 교회 대외협력국장이신 김문기 장로님과 함께 갔는데, 제가 잠깐 화장실에 다녀온 순간에 김 장로님이 대통령께 자기 명함을 건네주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당장 그 자리에서 김 장로님에게 주의를 줬습니다. “장로님, 이미 장로님의 신상에 대해서 대통령님이 다 보고를 받으셨을 텐데 대통령께 직접 명함을 드리는 게 얼마나 실례인지 아세요?” 그러자 대통령께서 “괜찮습니다. 명함을 주면 어떻습니까?”하면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시는 것입니다. 관저에서 나온 후에도 여러 차례 김 장로님을 나무랐습니다. “일개 교회의 대회협력국장이 대통령께 직접 명함을 드리다니요. 이런 걸 가리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저는 총회장이 되고 나서도 아직껏 누구에게도 한 번 명함을 건네주지 못한 것 같습니다. 사실 총회장은 제 자신의 명예이기도 하지만 우리 교회의 영광이기도 합니다. 1만 2천여 교회 가운데 총회장을 배출한 교회는 정말로 드물기 때문이죠. 그것도 무투표로 당선이 되었고 5만 교회 이상의 한교총 대표회장까지 역임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총회장 명함뿐만 아니라 한교총 대표회장의 명함도 누구에게 건네준 기억이 없습니다. 사실 만나는 사람들 대부분이 저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평소에 제 얼굴이 명함이고, 지금까지 닦아놓은 인간관계 속에서 저의 존재 자체가 명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랑삼아 명함을 건네줄 수도 있지요. 많은 사람들이 자기 직책을 과시하기 위해서 명함을 건네지 않습니까? 물론 저는 총회장과 한교총 대표회장이 되기 이전에도 명함을 거의 가지고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총회장과 한교총 대표회장이 되었다고 명함을 건네주는 것이 너무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웠습니다. 저의 삶을 돌아보면 저는 지금까지 성을 쌓는 삶 보다는 길을 내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제가 교단과 교계의 역사를 지켜볼 때, 자기 성을 쌓았던 사람은 다 말로가 좋지 않았습니다. 부끄러운 오욕의 역사만 남긴 채 삶과 명예가 함몰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헌신하고 희생하여 길을 낸 사람은 찬란한 역사를 남길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걸어가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까지 절대로 성을 쌓지 않고 길을 내는 삶을 살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우리 교단도 총회 전후로 갈등의 암초들이 숨어 있었지만 그 암초들을 깨거나 덮어버리고 화해와 상생의 길을 닦았습니다. 제 성만 쌓으려고 했다면 남들이 다투고 싸운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우리 총회와 한국 교계 안에 화합의 길, 협치의 길, 비전의 길을 내고 싶었습니다. 진정한 지도자라면 자기를 희생해서라도 대의와 화합의 길을 열어야지요. 저는 요즘 한국교회 연합기관을 하나로 묶는 일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뛰고 있습니다. 이 역시 공교회를 세우고 공적 교회를 지켜내기 위해서 한 것입니다. 또한 후대를 위한 세움과 새로운 부흥의 길을 열기 위해서 하는 것이죠. 그러나 이 일은 시대적 사명감과 희생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옛날 경부고속도로를 낼 때 얼마나 많은 분들이 논밭을 희생하고 많은 회사도 희생을 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럴 때 훗날 그 고속도로를 통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해택을 받고 꿈을 이루게 되었던가요. 그래서 저 또한 꿈을 꾸며 부지런히 뛰고 있습니다. 저와 우리 교회 성도들의 눈물어린 헌신으로 한국교회 안에 화합과 협치와 세움의 길이 열리는 꿈을 꾸면서 말입니다. 저는 역사 속에 이런 기록을 남기고 싶습니다. “소강석 목사는 자기 성을 쌓는 사람이 아니라 길을 낸 사람이었다고, 새에덴교회는 한국교회 안에 다툼과 분열을 종식시키고 연합과 세움의 길을 낸 교회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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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1-05-23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고 벽이 있으면 벽을 타고 오르겠습니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된다. 희망도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희망이 있다고 믿으면 희망이 있고, 희망 같은 것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실제로 희망이 없다.” 위의 글은 고도원의 아침편지 1호에 실린 글입니다. 지난주 화요일에 한국 교계의 초미의 관심사인 총신 재단이사회가 열려서 마침내 재단이사장이 선출되었습니다. 저도 한동안 총신 관계자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암묵적 동의를 한 채 총신의 세움과 비전을 잠시 꿈꾸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첫 이사회를 가보니까 “이건 내가 걸어야 할 길이 아니구나!”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역사적 진실과 대의적 명분을 가지고 찬란하게 사퇴할 것인가를 고심했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제가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몇 사람들에게 깊은 밤에 전화해 눈물을 흘리며 저를 제발 놔 달라고 사정했습니다. 물론 재단이사 후보를 사퇴해도 총회장으로서 총회 전체 여론이나 절대다수의 정서를 읽어야 하고 그것을 대변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는 “총신은 하나님의 소유이고 총회의 지도와 감독을 받아야 하기에 총회 절대다수의 여론을 감안해야 한다”는 역사에 기록될 발언을 하고 양해를 구한 후 이석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아주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전에도 연합기관을 하나 되게 하기 위하여 물밑에서 여러 관계자들을 많이 만나서 소통을 하였지만, 그 후 더 본격적으로 그 행보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재단이사회가 있었던 그 날 저녁에 만났던 교계 원로 어르신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정말 소 총회장이 바른 행보를 했습니다. 그리고 화려한 명분도 얻었습니다. 만약에 소 목사가 그 자리에 연연했다면 연합운동을 하는 데 있어서 발목이 잡히게 될 것이고 자리나 탐하는 사람으로 비추어졌을 것입니다. 비록 총회 절대다수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이제, 소 총회장은 한국교회를 진정으로 하나로 만들고 앞으로도 계속 하나 됨의 지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그 길이 아닌 바로 이 길을 걸어가세요.” 그런데 사람들을 만나면 만나볼수록 미궁 속에 빠져들어 갔습니다. 진흙탕이 아니라 완전히 수렁 속에 빠져드는 것 같았습니다. 주요 인사들을 만나서 들어보면 도저히 제힘으로는 할 수가 없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또 다른 분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잡해야 하나님이 일을 하십니다. 소 목사님은 그냥 믿음으로 희생하고 헌신하며 이 길을 가면 돼요. 그러면 하나님이 길을 만드시고 분위기를 만드시고 역사하실 것입니다. 하나 되자는 일에는 거의 다 동의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냥 묵묵하게 화합과 희생의 리더십을 발휘하며 그 길을 걸어가 주세요.” 또 어느 교계 기자분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번에 총신 재단이사회를 대하시는 목사님의 화합의 정신과 대의를 보았습니다. 목사님은 사적 이해관계나 이익을 탐하지 않고 총회 화합과 총신의 비전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으며 정도를 걷는 대인의 리더십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기자들이 다 알고 교계 오피니언 리더들 모두 인식하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지금까지도 사적 이해관계를 넘어 교계 공익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양보하고 희생을 해 왔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제부터는 한국교회 연합을 위해서 더 오해를 받고 욕먹을 각오를 하셔야 합니다. 그런 희생과 헌신을 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연합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얼마 안 남은 총회장의 임기 동안 총회의 일도 최선을 다하면서 본격적으로 한국교회 연합사역의 길을 가려고 합니다. 코로나 상황 중에도 한국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고 원 메시지를 내지 못함으로 인해서 예배가 초토화되는 등 얼마나 혹독한 댓가를 치렀습니까? 이런 참혹한 현실을 보면서도 한국교회가 연합하지 못하고 원 메시지를 내지 못하면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어쩌면 지금이 한국교회 연합을 위한 마지막 골든타임일지도 모릅니다. 앞으로 옥죄어 오는 교회 생태계의 위험이나 반기독교 악법을 막아내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이 일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욕도 먹고 오해도 받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최선을 다해서 이 길을 걸어갈 뿐입니다. 길이 막혀도 길을 걷다 보면 길이 열릴 것이고, 담이 막고 있으면 담쟁이처럼 가파른 언덕과 벽을 타고 올라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이끌어주시면 저는 기꺼이 길을 만들고 벽을 오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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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1-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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