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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두려운 영광, 설레임”
    지난 목요일 오후에 황순원문학관 소나기마을에서 ‘영혼을 담은 시 쓰기’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였습니다. 어린 시절 백일장대회에 가는 것만큼 두렵고 떨렸습니다. 그러면서도 가슴이 설레기도 하였습니다. 시를 쓰는 것은 시상을 갖고 순간순간 시가 찾아올 때 쓸 수 있지만 시 창작 강의를 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에서도 저명한 시인들을 초청하여 강연을 들었지만 ‘시란 무엇인가?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해서 정확하게 설명한 분은 못 봤습니다. 그냥 자기 시 몇 편을 소개하고 삶의 이야기로 마감하는 걸 봤습니다. 물론 저도 그렇게 할 수가 있죠. 저에게도 많은 스토리가 있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이 기회에 ‘시는 무엇이고 어떻게 시를 쓸 것인가’ 정리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적지 않는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강의안을 준비해도 왠지 낯설고 두려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성도들이나 일반인 앞에서 강의를 한다면 그렇게 두렵고 떨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시대 최고의 문학평론가인 김종회 교수님 앞에서 강의를 한다는 것이 엄청난 부담이고 스트레스였습니다. 잘해야 본전이고 잘못하면 큰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꼭 두려움과 불안만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영광스럽고 가슴이 설레이기도 하였습니다. 강의에서 언급한 것처럼 저는 국문과나 문창과를 전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소나기마을 촌장이신 김종회 교수님께서 어느 정도는 저의 필력과 구술력을 인정하셨기에 저를 강사로 부르셨지 않나 싶어 더 가슴이 뛰었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에 엿장수, 사탕장수의 이야기로 시작하였고 상여의 만가 소리를 시연하며 시 강의를 접근 했습니다. 결코 녹록한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앉아서 할 수도 없고 일어서면 강의안이 안 보일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원고가 보이고 안 보이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원고를 이미 그림 언어로 거반 외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강의를 했는지, 무슨 꽃으로 내 가슴을 문질렀는지 땀이 눈속으로 들어 갈 정도였습니다. 종교적 언어, 신앙의 언어를 쓰지 않아도 시는 에덴을 향한 원형 혹은 근원을 향한 향수적 갈망이라고 자연스럽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리움에 대한 향수를 이미지 언어로 쓰는 것이 시라고 강조했습니다. 제가 그런 이야기를 해도 어느 누구도 저항을 하거나 반발을 하는 분이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설교를 하는 목사이기 때문에 가끔 억양이나 설교의 이미지가 보였을지 모르지만 그마저도 강의 흐름 상 모두 수용하고 용납하는 듯했습니다. 강의가 끝난 후 김종회 교수님께서 “이곳이 대학 강의실이라고 한다면 교수로서도 99점을 줄 정도라”고 하셨습니다. 강의가 끝나도 그 설렘이 싹둑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미련과 아쉬움이 컸습니다. 왜냐하면 준비한 내용을 절반도 못 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제가 1시간 40여 분 동안 강의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런 많은 시간을 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럼에도 준비한 내용을 절반도 못했습니다. 아쉬움은 미련을 낳았지만 그럼에도 참으로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두려움과 설레임은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여전하기만 합니다. 좀 더 잘할 수도 있었다 싶었는데 저희 장모님이자 기도의 어머니이신 정금성 권사님이 오셔서 부담감이 더 커져 갔습니다. “아니 지금 젊은 연세도 아니신데 왜 여기까지 오시는가...” 그래도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이 계기를 통해 저의 시가 한 단계 더 발전하고 다 하지 못했던 저의 시론이 활자화 되기를 바래 봅니다. 함께 기도해 주시고 성원해 주신 김종희 교수님, 참석해 주신 주민들, 그리고 성도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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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5-07-06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저 푸르지만, 아직 연약한 잎새들”
    저는 이따금 머리를 식히기 위해 창문의 커튼을 열고 푸른 나무들을 바라봅니다. 보기만 해도 마음에 푸르름의 기운이 들어오듯 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오늘따라 바람에 퍼덕이는 잎들이 가여워 보입니다. 서로 바람에 부딪혀 상처받지 않을까 해서요. 그렇지만 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푸르름을 반짝이는 나뭇잎들이 대단해 보입니다. 바람이 불어도 새들은 날아다니고 지저귑니다. 제가 창문으로 다 보고 있는데, 새들은 누구도 보지 않는 것처럼 자유롭게 지저귑니다. 도대체 저 새들의 보금자리는 어디일까요? 어렸을 적에는 새들의 보금자리에서 알도 훔쳐먹은 시절이 까마득한데, 저 습자지처럼 얇고 부드러운 나뭇잎 사이에 둥지를 틀리는 만무할 것이고... 우리 교회가 지어질 때만 해도 오동나무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지금은 거목이 되어 있습니다. 하긴 거의 20년이 흘렀으니까요. 나무는 자라서 모든 날아다니는 새들의 쉼터가 되고 있습니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정말 여리고 부드럽게 느껴지던 것이 제법 푸르름의 빛을 반짝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푸름보다 여림이 더 강하다고 할 것입니다. 얼마 전 심방을 했던 한 성도가 떠올랐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지, 저의 첫사랑과 첫 열정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보통은 처음부터 그렇게 열심을 내기가 쉽지 않거든요. 얼마나 교회 생활에 몰두했냐면, 학업보다 교회 일을 더 중히 여겼습니다. 그런 세월이 거의 반세기, 안식년이나 안식월을 한 번도 갖지 못하고 푸르름이라고 하는 페달을 밟고 왔지요.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으셨다면 이미 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저 오동나무는 가을이 되면 스스로 낙엽이 되지만, 교회 뒤편에 있는 소나무들은 겨울도 쉬지 않고 푸르름을 자랑하죠. 낙엽으로 떨어질 때는 떨어지더라도, 이 순간 푸르름으로 발화하고 있는 저 넓적한 활엽수들을 축복합니다. 겨울에 폭설이 내리면 저 넓은 잎사귀가 그 무게를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저 푸른 잎들을 바라보며, 얼마 전 심방 했던 새 가족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가을이 온다고 푸르름을 포기하지 않으시겠지... 아직은 푸르름보다는 여린 면이 더 많지만, 가을이 와도, 겨울이 와도 더 단단하겠지.” 부족하지만 저처럼 말이죠. 푸르지만 아직은 여린 그 성도님에게 하나님의 은총과 가호가 그분에게 가득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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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5-06-29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평화에 이르는 새 길”
    명지대학교 정성철 교수께서 쓰신 ‘국가는 왜 싸우는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 보면 한반도 평화로 가는 길에 대해서 로버트 저비스의 이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국가는 왜 싸우는가, 사회평론 아카데미) 로버트 저비스에 의하면 나선형 모델(Spiral 모델)과 억제 모델(Deterrence 모델)이 있습니다. 나선형 모델은 안보 딜레마에 기초하여 충돌에 이르는 길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두 국가가 모두 자국의 안보를 위해 방어적 행동을 취하지만 이는 상대의 안보 불안을 야기 시킨다고 합니다. 결국 두 국가는 위기의 고조를 막지 못한 채 충돌에 이른다는 것이죠. 이러한 모델은 유화와 관용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남북한 모두 평화를 희망하더라도 오해와 불신으로 상대의 방어적 행위를 공격적으로 바라보게 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러한 경우 남북한은 번갈아 가며 그러한 오해에 따른 대응을 취하면서 소용돌이에 휘말린 채 충돌로 치닫게 되고 맙니다. 바로 그러한 비극은 상호 인정을 바탕으로 신뢰를 쌓아갈 때 피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억제 모델의 관점에서 평화는 상대의 공격에 맞서 싸울 결연한 의지를 보일 때 가능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상대의 도발에 미온적으로 대처한다면 결국 양측은 대규모 분쟁에 휩싸이고 맙니다. 상대방이 군사적 수단 자체를 고려하지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압박하고 봉쇄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이 모델에 따르면 평화는 역설적이게도 싸울 준비를 마치고 결의에 찬 국가들 사이에서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죠. 상대를 공격하여 압도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없어야 한다고 합니다. 과거 6.25 전쟁의 발발도 김일성이 승리할 수 있다는 오판에 따른 결과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국과 미국이 적극적으로 북한의 공격이 엄청난 피해를 불러올 것이라는 메시지를 다양한 방법으로 전달하였을 때 한반도의 평화가 보장되어왔다는 것이죠. 이러한 두 가지의 주장은 모두 한반도 평화를 지향해 왔습니다. 하지만 상반된 가정에서 기초한 두 입장의 정책제안은 상이하다고 합니다. 나선형 모델에서 국가는 현상 유지를 희망하는 불안한 행위자이지만, 억제 모델에서 상대국은 불만족으로 현상 변경을 노리는 도전적 행위자입니다. 그래서 정성철 교수에 의하면 우리는 북한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북한은 오랜 경제 실패와 외교 고립으로 생존을 갈구하는 국가인가? 이라크 전쟁과 후세인 처형을 바라보며 두려움에 사로잡힌 실패 국가로 바라볼 것인가? 아니면 반대로 핵과 미사일 개발을 지속하면서 체제 안정이 위협받을 경우 모험적 도발도 감행할 준비가 된 도전 국가인가? 그것도 아니면 주체사상에 기초하여 외부 세력의 영향을 차단하며 정권 안보에 사활을 건 공격적 행위자로 볼 것인가?” 저자에 의하면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우리의 대북 통일정책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북한은 안보 불안에 시달리는 국가인가? 아니면 정권 안보를 추구하는 불만족 국가인가?” 이에 대한 우리 안에서 열린 토론이 합의에 이를 때 저자는 장기적 관점에서 지속 가능한 대북 통일 정책이 가능하다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다소 전문가적이고 어려운 글이긴 하지만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대한민국의 자유와 번영이 얼마나 아슬아슬했던가를 느낄 수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6.25 참전용사들의 헌신과 희생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지금의 번영과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다시 생각해 봐도 우리가 누리는 이 자유와 평화는 절대로 공짜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6.25 참전용사들의 수고와 지금도 우리나라를 지키고 있는 안보의 힘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국민 모두가 서로 단합하고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평화에 이르는 새 길입니다.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우리 교회는 6.25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19년째 맞이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행사들이 거룩한 낙수 효과를 이루며 나비효과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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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5-06-22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위대한 헌신을 우리 모두의 가슴에
    “당신의 희생 위에 오늘의 우리가 있습니다. 나라를 지켜낸 위대한 헌신, 그 숭고한 정신이 지금도, 여기에 새겨져 있습니다.”(내레이션) “나의 무덤엔 묘비가 쓸데없다. 고향에 묻히어 한 줌 흙 되면 그뿐. 이름 없는 꽃이나 한 그루 심어다오. 나는 썩어 거름이 되리니 고향의 봄에 한 송이 더 많은 꽃이 되리라.”(애국지사 노성원 묘비), “결코 뒤돌아보지 않는 강한 정신력으로 군인의 명예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굴욕적인 삶 대신 명예로운 죽음을 택한 고인의 숭고한 군인 정신은 바로 우리들의 살신성인의 정신이었습니다.”(애국지사 육군 중령 장철부 묘비), “여기는 민족의 얼이 서린 곳 조국과 함께 영원히 가는 이들,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국립서울현충원 현충탑) 윗 글은 지난 6월 6일 제70회 현충일 추념식에서 있었던 애국지사들의 묘비를 성우가 내레이션한 내용입니다. 글로 보면 평범할지 모르지만 남자 성우, 여자 성우가 번갈아 가며 낭독하였을 때 가슴이 먹먹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자유와 번영을 위해 아낌없이 자신의 몸을 불사른 참전용사들의 희생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19년째 해오고 있는 참전용사 초청행사야말로 얼마나 고귀하고 가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특별히 1951년 강원도 정선 전투에서 총상을 입고 전사하신 고 송영환 일병의 이야기를 듣고 마침내 눈물이 터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고 송영환 일병의 딸 송재숙 님은 아버지가 어머니와 혼인신고를 하지 못하고 입대하셔서 큰아버지의 호적에 올리고 평생을 살아왔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너무 애처롭기 그지없었습니다. 73년 만에 시신이 발굴이 되고 복원된 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뵈니 너무나 알 수 없는 반가움에 눈물이 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참 많이 울었습니다. 성우가 이런 묘사를 할 때는 더더욱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고 송영환 일병은 세 살배기 외동딸을 남겨두고 6·25전쟁에 참전했습니다. 내가 지켜낸 국토 어딘가에 쓰러져 돌아갈 수 없게 될지라도 긴 세월 그리움과 아픔을 남기게 되더라도 기꺼이 총탄과 맞서며 나아갔던 이유, 반드시 지켜야 할 소중한 나의 나라, 소중한 나의 가족이 있기 때문입니다.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희생 위에서 대한민국이 다시 일어나 빛나고 있을 때 가족의 품으로, 국민의 곁으로 돌아온 고 송영환 일병, 당신의 위대한 헌신을 우리 모두의 가슴에 새깁니다.” “(송영환) 사랑하는 나의 빵구 재숙아, 아빠가 미안하다. 언제나 너를 사랑한다.” “(성우) 새하얀 꿈처럼 기억이 가물합니다. 너무도 그립고 보고 싶은 아버지의 얼굴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아 울먹이며 지내온 긴 세월이었습니다. 아버지, 오랜만에 인사를 드립니다. 할머니께 자주 듣곤 했어요. 고된 일 마치시고 집에 오시면 밤이 늦도록 저를 업고 동네를 다니시며 빵구 재숙아, 우리 빵구 재숙아 부르셨다지요. 아버지의 얼굴도 목소리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버지가 저를 얼마나 예뻐하고 아끼셨는지 알 것만 같습니다. 저는 풀잎만 보아도 아버지 목소리가 듣고 싶고 꽃잎만 보아도 아버지의 목소리가 듣고 싶은 세 살 아이 빵구 재숙입니다. 1951년 아버지가 전사하셨을 때 엄마와의 혼인신고가 되어 있지 않아 큰아버지의 호적에 제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렇게 70년이 넘는 아득한 시간을 살아오다 이제라도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되어 형언할 수 없는 반가움에 눈물만이 흐릅니다. 이제 조금 알 것 같아요.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키고 싶은 게 있으셨겠지요. 아버지가 지켜내신 것, 대한민국이었고 엄마였고 할머니였고 빵구재숙이었겠지요. 그래서 그렇게 쏟아지는 포탄과 총탄에 아버지를 내던지셨겠지요. 지난달 어버이날에 그립던 아버지의 얼굴을 처음으로 보았습니다. 복원된 아버지의 영정 사진 앞에서 저는 다시 옛날로 돌아가 아버지가 그렇게 안아주시던 아이가 된 듯했습니다. 매년 비어 있는 아버지의 묘역에 저는 아버지께 드린 것 하나 없는 것 같아서 심심한 마음을 담아 하얀 카네이션 한 송이를 드렸습니다. 아버지의 희생으로 남겨지고 지켜지고 새롭게 태어난 수많은 생명들이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참 감사합니다. 참 고맙습니다. 다시 뵈올 그날까지 편히 쉬세요.”(고 송영한 일병의 딸 송재숙)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고 헌신해 주신 모든 성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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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5-06-15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이제부터는 기도해 주세요”
    저는 국민일보 이사를 하다가 어찌어찌해서 CBS 이사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CBS에서 이사장이 될 뻔도 했는데 저보다 더 훌륭한 분이 하시고 싶다고 해서 제가 양보를 했죠. 그런데 얼마 전부터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CBS 내부에서도 그렇고 또 주변 이사님들이 저를 지원해 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장 후보로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총회장도 그렇고 한번도 선거를 해 본 적이 없고 다 추대로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양보하지 않는 한 분이 계셔서 어쩔 수 없이 선거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단 한 번이라도 누구를 만나서 밥을 먹은 적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선거 운동을 하나도 안 했다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CBS 이사장이 된 것입니다. 우리 합동 교단에서는 임시 이사장은 몰라도 정식으로 이사장으로 선출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초유적인 사건이죠. 제가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요 수준 높은 이사님들께서 선견지명을 가지고 저를 선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실 우리 교인들에게 CBS 이사장 나간다고 아무런 말도 안 했거든요. 기도해 달라고 부탁도 안 했습니다. 더 많은 기도거리가 있는데 이걸 위해서 기도해달라고 하기에는 너무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혼자만 기도하고 나갔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CBS 이사장으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CBS는 1954년 출범한 우리나라 최초의 민영 방송사로 ‘올바름’(흔들림 없이 진실과 정의를 전하는 정도 언론), ‘따뜻함’(어두운 사회를 밝히고 약자를 감싸 안는 따뜻한 방송), ‘새로움’(미디어 혁신을 이끌어가며 다양한 소통창구 역할을 하는 미디어4.0)을 핵심 가치로 하며 기독교 선교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사랑과 자유, 정의를 구현하는 명실상부한 최고의 방송사입니다. 특히 군사독재 권력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민주언론으로 한국 민주주의 발전과 자유 언론 창달에 크게 기여하며 방송 저널리즘의 꽃을 피웠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CBS는 시사·뉴스 채널(표준 FM)과 음악전문 채널(음악 FM)로 전문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다채널 특성화 전략을 펼치게 되었고 2000년 중반 이후부터 인터넷 뉴스, 지상파DMB, OBS 투자, 무료 신문, 스마트미디어 등 다양한 매체에 투자하며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CBS는 순수 복음을 전하면서도 공정한 뉴스와 시사, 음악을 통해서 기독교적 가치와 정신을 세상에 실현해 가고 교회와 세상과의 교량 역할을 하는 방송입니다. CBS의 장점은 기독교인들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비기독교인들도 CBS를 신뢰하고 많이 보고 경청하면서 대사회적 영향력이 지대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꾸 특정 이념이나 진영의 시선으로 CBS를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공정한 뉴스 보도와 시사 프로그램도 결국은 CBS가 직간접적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실현하며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 목사가 CBS 이사장이 되면 CBS가 너무 보수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CBS가 너무 진보 쪽으로만 가는 것도 안 됩니다. 너무 극좌나 극우로 가면 중도로 와야 할 것입니다. 아니, 성경적 가치관과 세계관에 뿌리를 내리고 사회적, 문화적 다양성을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들을 섬기듯이, CBS 이사장의 직함이 있을 때 오히려 CBS를 더 잘 섬기고 직원들도 잘 섬기겠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어떻든지 CBS가 우리 교회가 섬기는 선교의 대상지라고 생각하면서 많은 사랑의 기도와 후원이 필요하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부터 제가 CBS 이사장으로 잘 섬길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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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5-06-08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윤동주처럼, 이육사처럼
    저는 윤동주를 만나본 적도 없고 그에 대한 연구를 집중적으로 한 적은 없습니다. 다만 윤동주에 관한 책을 두루두루 읽었습니다. 그리고 윤동주의 삶의 흔적이 묻어 있는 용정 명동촌, 그가 다니던 교회, 용정학교, 연희전문학교, 일본 후쿠오카 감옥, 릿쿄대학까지 다 방문했습니다. 그곳에서 제가 “윤동주 특강”까지 했고요. 그리고 ‘별빛 언덕 위에 쓴 이름’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리고 제 안에 윤동주 시심이 들어오고, 제가 윤동주 시 속에 들어가서 시적 대화를 하며 차마 윤동주가 말하지 못한 내용을 시적 화자가 되어 ‘다시, 별 헤는 밤’이라는 시집을 썼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누구에게 미안함이 들었냐면, 이육사 시인에게 죄송한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이육사 시인은 아주 강인한 성품을 지닌 실천적인 시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시만 쓴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을 하였습니다. 그의 막내딸 이옥비 여사에 의하면, 20년 동안 총 17번이나 수감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육사의 원래 본명은 이원록인데, 그가 처음으로 감옥에 갔을 때 수감번호가 264번이었습니다. 그래서 일제에 저항하는 의미로 이름을 이육사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시를 썼습니다. 그런데 그 시를 쓰게 된 문학적 영감과 독립운동의 정신적 동기가 성경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의 딸 이옥비 여사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중국어 성경을 늘 품고 다니며 틈틈이 성경을 읽었다고 합니다. 결국 그는 독립운동을 하다 베이징 감옥에 수감 되어 견딜 수 없는 고문과 매를 맞다가 1944년 1월 16일, 40세의 나이로 순국을 합니다. 윤동주의 시가 개인적이고 보편적 인류의 가치를 읊었다면, 이육사는 그야말로 민족적이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시의 지평이 더 넓고 웅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시는 잔인하다 할 정도로 생명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미안한 마음에 몇 년 전에 안동에 있는 이육사 문학기념관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시를 다시 한번 보았습니다. 그는 독립운동을 하면서 역사를 기록하거나 서술한 게 아니라 어떻게 자신의 애국적 혼을 시적으로 웅장하게 담아낼 수 있었는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특별히 ‘광야’ 같은 시를 보면 그 광활한 시 세계에 경탄하게 됩니다. “까마득한 날에 / 하늘이 처음 열리고 /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 모든 산맥(山脈)들이 /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 지금 눈 나리고 / 매화(梅花) 향기 홀로 아득하니 /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 이 광야(曠野)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여라.” 그의 시는 원시적 광야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처음 하늘이 열리고 닭 우는 소리가 들리는 광야는 바다로 향하는 산맥마저 차마 범하지 못하는 순결한 땅이었습니다. 그 위로 끊임없는 세월이 흐르고 사계가 흐르면서 드디어 역사의 강물이 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그 광야에 지금 눈이 내립니다. 그런데 겨울 광야에 매화가 필 수 없지만 매화 향기가 가득하다는 것은 그 어떤 폭압과 압제에도 굴하지 않는 독립운동가들의 지조와 자신의 내면의 절개를 보여줍니다. 또한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기독교의 메시야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백마 타고 오는 초인에 대한 여망이야말로 조국의 독립과 광복의 축복을 염원하고 있는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그가 옥고를 치렀던 중국 북경 감옥도 한번 방문해 보고 싶습니다. 문학뿐만 아니라 목회도 그렇다고 봅니다. 때로는 윤동주처럼 따스하고 푸른 빛처럼 설교도 하고 사역도 해야 하지만, 때로는 이육사처럼 승부 근성을 갖고 장엄하고 또 잔인스러울 정도로 광폭적 공공 사역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윤동주처럼, 눈 내리는 겨울 광야를 백마 타고 달리는 이육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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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5-06-01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그 청년 바보 의사처럼”
    ‘안수현, 그 청년 바보 의사’라는 책이 있습니다. 제가 원래 이 책을 읽은 것은 아니고 몇 달 전에 국민일보에 나온 기사를 보고 이 책을 구해봤습니다. 故 안수현 님의 삶은 정말 짧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분은 예수님처럼 만 33살 나이로 죽었습니다. 세상에 직업이 의사, 그것도 내과 전문의였는데 33살에 죽은 것입니다. 그분이 영락교회를 다녔는데 장례식장에 4천 명이나 왔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 많은 사람이 왔느냐 하면, 의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다 왔습니다. 그는 군의관이었는데 유행성 출혈열로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그런데 병원에 입원하였을 때 자기가 환자였음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사랑과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 청년의사는 환자와 눈이 마주치면 많이 아프냐고 묻기도 하고 빨리 치료를 못 해줘서 미안하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간호사들을 보면 왜 그렇게 예쁘냐고, 잘생겼냐고 덕담을 건넸다고 합니다. 그는 입원 첫날부터 한밤중이면 살며시 찾아와 환자의 침대 곁에서 기도를 해드렸습니다. 자기 것을 하나도 아끼지 않고 나누고, 누군가가 필요하면 자기 시간을 내주고, 찬양 테이프와 신앙 서적을 따뜻한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는 주변인들로부터 ‘청년 예수’로 불릴 정도로 신실한 청년이었습니다. 돈이 없는 환자의 검사비를 대신 내주고 시한부 환자들의 말동무가 되어 주었습니다. 군의관 시절엔 풀밭에서 사병들과 함께 지내며 부하들의 건강을 먼저 챙겼습니다. 그가 사망한 이후에 안 씨 유가족은 책 수익금 전액을 그가 활동했던 누가회에 기부했고 이를 통해 의사를 양성하는 “안수현 장학회”가 설립되었습니다. 그 장학회를 통해 15년간 의대생 60명이 장학금을 수여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바보 의사라고 불렀습니다. 최근 의료 위기를 맞을 때 그 바보 의사의 말과 삶이 더 빛나게 다가왔습니다. 지난 용기총에서 주최한 용인시복음화대성회를 하는데 5월의 햇빛이 7, 8월의 땡볕 못지않게 작열하였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 종이 모자도 쓰지 않고 앉아 있는 분들이 참 대단하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설교도 한 4분 정도 했을 것입니다. 땡볕 아래 앉아 있는 우리 성도들에게 너무너무 미안한 것입니다. 진짜 제가 바보 목사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이석을 한 걸로 들었습니다마는, 끝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 분이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 이시영 집사님이십니다. 그분은 진짜 바보 집사님이세요. 이시영 집사님은 마을버스를 운전하시는 기사님이신데, 하루는 버스 운행 중에 단국대를 다니는 중국 유학생 승객이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진 것입니다. 이 집사님은 곧바로 차를 몰아 우리 교회 이재훈 의료목사님이 원장님으로 계시는 다건연세내과로 갔습니다. 집사님은 의식을 잃고 축 늘어진 환자를 등에 업고 정신없이 뛰었습니다. 이재훈 목사님 역시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응급처치를 바로 시작했습니다. 환자는 의식이 없고 혈압도 낮은 상황이었습니다. 조금만 더 늦으면 심정지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초위기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이재훈 목사님께서 급히 수액을 처방하고 혈압을 올릴 수 있는 조치를 취해서 5분쯤 후 신음과 함께 여성의 의식이 돌아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20~30분이 지나서야 완전히 정신이 돌아왔으니까 만약에 응급실을 찾아서 헤매고 다녔다면 심정지가 왔을 수도 있었던 급박한 상황이었습니다. 다행히 이시영 집사님과 이재훈 목사님의 침착하고 신속한 응급 구조가 한 학생의 생명을 살리게 된 것이죠. 이시영 집사님은 병원비까지 다 결재를 하고 다시 버스 운행을 재개했다고 합니다. 이 아름다운 미담이 여러 공중파 방송에 보도가 되어 큰 감동을 주었고 유학생은 나중에 이시영 집사님을 찾아와 치료비를 갚고, 감사 인사와 함께 홍금기를 선물했다고 합니다. 중국에서는 생명을 살린 의인에게 붉은 비단 깃발, 홍금기를 준다고 합니다. 바로 그 이시영 집사님께서 용기총 집회에서 끝까지 자리를 지켰고 소형자동차 경품에 당첨이 된 것입니다. 진짜 그분은 바보 집사죠. 그런데 그 바보 집사님에게 하나님께서 담임목사를 대신하고 또 우리 성가대를 대신해서 경품 선물로 위로하시고 칭찬하신 것 같았습니다. 일주일 내내 이런 생각을 하며 살았습니다. “나도 더 기도하는 바보가 돼야 되겠구나. 더 바보 목사로 살아야 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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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5-05-25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초절제가 초감탄을 이룬다
    지난주 화요일 부산에서 총회가 주관한 전국목사장로기도회에 저녁설교를 하였습니다. 제가 화상을 입기 전에 저녁 강사로 초청을 받았는데, 지금까지 합쳐 보니까 목사장로기도회에서 8번 설교를 했더라고요. 총회 역사에 이런 유례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첫날 저녁 시간은 목사장로기도회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이상하게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먼저는 거리가 너무 멀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설교도 40분 이상 해도 된다고 문자가 와서 넉넉하게 준비를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설교자가 두 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투트랙으로 기도회를 하고 투트랙으로 설교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30분으로 줄여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30분 정도 하자 하고 거기에 맞게 준비를 하고 갔습니다. 오랜만에 KTX를 타고 부산으로 갔습니다. 집회 장소에 도착하니까 여러 목사님, 장로님들이 인사를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한 임원이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강의가 많아서 좀 피곤하고 힘듭니다. 좀 졸립니다. 목사님, 제발 설교를 좀 재미있게 해 주세요.” 이 말은 좀 짧게 해달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게다가 동행한 송종호 안수집사가 열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선 설교를 짧게 해야 한다고 압박감을 주었습니다. 사실은 한국기독교 140주년 기념 칸타타 ‘빛의 연대기’ 곡도 몇 곡 소개하고, 6.25 참전용사 초청행사에 대한 영상 등 다채롭게 준비해 왔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가서 보니까 순서들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제 설교 후 많은 분들의 특별기도, 그다음에는 또 제가 아끼는 후배 목사님의 설교가 있었습니다. 더구나 설교 중에 나와야 할 영상이 제때 나오지 못한 것입니다. “안 되겠구나...” 저는 영상 시스템이 우리 교회와 비슷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저의 설교와 함께 영상이 따라오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기왕 절제한 김에 확실하게 절제를 하자” 생각하고 정말 과감하게 설교를 짧게 끝냈습니다. 끝나고 보니까 설교를 딱 21분 했더라고요. 그러면서도 전하고 싶은 말씀은 거의 다 했습니다. 그렇게 설교를 마치고 나오자 여러 사람들이 이렇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최고였습니다!” 다음날 이종민 목사님도 이렇게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목사님, 설교를 짧게 하시기를 너무나 잘하셨습니다. 그리고 후배를 아끼는 마음이 너무나 들었습니다. 목사님 설교가 짧고 간결하면서도 할 얘기는 다 전했다고 여러 사람들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저도 젊은 날에는 시간을 초과하면서 많이만 듬뿍듬뿍 전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생각해 봤습니다. 초절제가 초감탄을 이룬다고 말입니다. 성령의 은사 중에 하나가 절제입니다. 교회는 혼자서만 신앙생활하는 곳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절제와 양보할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또 하나 생각난 것이 있었는데요. 지난번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공연했던 한국기독교 140주년 기념 칸타타 공연을 안 하기로 한 것은 너무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럴만한 시간도 없었고, 상황이 안되었기 때문이죠. 사실은 제가 그렇게 결정했다는 것보다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결정을 하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저는 다시 한번 감격했습니다. "초절제 초감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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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5-05-18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쑥 캐는 소녀는 어디 있는가?
    4월부터 제 밥상에 어김없이 오르는 음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쑥국입니다. 저는 쑥국이 맛있기도 하지만 쑥국을 먹을 때마다 쑥 캐는 소녀가 생각납니다. 초등학교 시절 제가 좋아했던 소녀가 있었습니다. 봄이면 화사한 옷을 입곤 하던 그 아이의 모습이 너무 예뻤습니다. 하지만 좋아한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마을 뒷동산을 넘으면 냇가가 하나 있는데 소녀는 냇가 건너편 마을에 살았습니다. 하루는 우리 동네 한 친구가 쑥을 캐러 간다고 해서 따라가 보니 그 소녀가 쑥을 캐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훔쳐보면서 제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사랑이었을까요, 그저 막연한 동심의 연모였을까요. 지금 생각해 보면 황순원의 <소나기>에 나오는 소년과 같은 순정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날 밤, 쑥 캐는 소녀의 모습이 머릿속에 필름처럼 장착되어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제 가슴에 사랑의 씨가 싹트면서 밤새 뒤척이며 그 아이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 도와줘야 할 일은 없는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애를 괴롭히는 아이는 없었습니다. 공부도 제법 잘했고 인기도 좋아 모든 친구와 사이좋게 지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얼마 후, 시험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시험을 망쳐서 1등을 못했다고 울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저는 그 소녀를 보며 ‘다음 시험에는 일부러 몇 문제를 틀려서 그 아이에게 1등을 양보해 줘야지’ 하고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소녀를 위해 다음 시험을 일부러 망쳤는데도 다른 아이가 시험을 잘 보아서 그 소녀가 또 1등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져 그 소녀보다 제가 더 속상하고 분했습니다. 몇 년 뒤 중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남자아이들은 자전거를 타고 학교를 다녔지만 여자애들은 버스를 타거나 걸어 다녔습니다. 저는 외향적이고 사교적인 성격이었는데도, 영어 단어를 외우고 다니는 여학생에게 말 한마디도 건네지 못했습니다. 세월은 강물처럼 흐르고 저도 어느덧 중년을 넘긴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쑥 캐는 소녀가 어디에 사는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지도 못합니다. 또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그 시절의 순수한 마음으로 기억을 간직할 뿐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목회를 한 후 쑥 캐는 소녀를 생각할 겨를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에는 오직 주님이 나의 주인이시고 목양 사역으로 바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4월, 5월이 되면 쑥국을 먹을 때마다 쑥 캐는 소녀가 떠오르고 나이와 상관없이 다시 청춘, 아니 소년으로 돌아갑니다. 너무 삭막하고 강퍅한 시대 속에서 순수의 시대를 떠올리게 됩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얼마나 순수를 잃어버리고 온갖 야욕과 음모, 위선과 권모술수로 혼란과 갈등을 겪고 있습니까? 한국교회마저도 너무 이념화, 정치화되어 사회 갈등과 분열을 일으키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러한 때에 우리 모두 다시 순수의 시대를 회복해야 합니다. 순수한 십자가의 복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저는 우리 모든 성도들을 쏙 캐는 소녀, 쑥 캐는 소년으로 생각하며 언제 어디서나 순수한 마음을 잃지 않고 목양 사역에 전념할 것입니다. 비록 빛바랜 추억의 흑백 앨범 같은 것일지라도 저의 가슴에 쑥 캐는 소녀와 같은 순수한 추억과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그런 기억마저 망각한 채 거친 세상을 살아간다면 얼마나 차갑고 삭막한 삶일까요. 저는 우리 교회에 오시는 모든 성도들이 쑥 캐는 소녀라고 여기며 반깁니다. 새로운 4월, 5월이 되면 한 살, 한 살 나이는 더 먹어 가지만 변함없이 저는 다시 소년으로 돌아갑니다. 천국 갈 때까지 저는 콘크리트 도시의 경쟁과 야욕, 망상을 떠나 그 눈부셨던 순수 시대의 봄의 길을 걷고 봄의 사역을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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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5-05-0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빛의 나라에서부터 빛의 연대기까지
    지난주 수요일 오전에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빛의 연대기’ 공연을 하였습니다. 남들은 그냥 지켜보는지 모르지만 저는 앉아만 있어도 땀이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제가 작사를 할 뿐만 아니라 영상 하나하나, 멘트 하나하나까지 다 체크를 해야 했거든요. 사실 제가 영상 내레이션을 몇 번을 보면서 “이렇게 고쳐라, 이렇게 편집하라”고 수정하고 또 수정했습니다. 영상 실무를 담당하는 나유진 자매가 우리 교인이 아니었다면 엄청난 시험에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마지막 순간까지 꼼꼼하게 체크를 하고 지적을 했거든요. 사실 장소를 허락해 주신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 목사님께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마는. 아쉬운 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아직도 한국교회 연합기관이 하나 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애당초 한교총과 한기총이 합하여 이 칸타타를 공연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실무선에서부터 반대가 심하고 어떤 적대감, 증오심 같은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같이 하고 싶었습니다. 그 뜻을 이루지 못해서 아쉬웠습니다. 또 하나는 사실 ‘빛의 연대기’ 공연을 더 넓은 광장에서 하고 싶었지만, ‘광장’하면 긍정적이라기보다 부정적 이미지가 떠오를 수 있잖아요. 그래서 잠실에 있는 체조경기장이나 기타 다른 곳도 찾아봤지만, 대여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본당 2층을 가득 메운 우리 교회 성도들의 그 뜨거운 열기는 강단으로까지 전해졌고 저의 제스처에 따라서 다 움직이는 성도들이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음악감독을 맡은 류형길 지휘자가 너무 수고가 많았습니다. 사실은 총 9곡인데 제가 과감하게 한 곡을 뺐습니다. 저라고 아쉬움이 있는 걸 왜 모르겠습니까마는, 저는 항상 시간을 예측하는 사람입니다. 만약에 한 곡을 더 불렀으면 그 한 곡 때문에 지루함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류형길 지휘자에게 서곡을 한번 멋지게 만들어 보라고 했습니다. 지역 차량이 돌기 때문에 12시까지 예배를 마쳐야 되거든요. 그런데 정확하게 행사가 끝나는 시간이 12시 1분 30초였습니다. 제가 7번 곡을 뺀 것이 너무 정확한 판단이었습니다. 특별히 서곡에서부터 시작하여 피날레에서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할 때는 그야말로 모든 청중이 감동을 받고 다 일어서서 함성과 박수를 보냈습니다. “태초의 밤하늘에 떠오르던 별 / 달빛 아래에 잠든 꽃들이 깨어나고 / 구속사의 푸른 장강이 흐르고 / 한라에서 백두까지 그 길을 따라가 / 눈물과 상처로 얼룩진 역사 / 길고 길었던 시간들 / 하나님 섭리로 이겨냈네 / 빛의 나라 고요한 아침의 나라 / 이제 어두웠던 역사 그치고 / 밝은 빛의 향해를 시작하네 / 우린 진정한 하나가 되어서 / 이 빛을 지켜가리라 / 우린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 빛의 선민으로 나아가리라 / 우린 진정한 한민족 되어서 / 이 빛을 지켜가리라 / 거룩한 환상 생명의 언어로 / 새로운 역사를 열어가리라 / 어둠을 뚫고 밝아오는 찬란한 / 찬란한 새벽빛이여 /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 아멘 아멘 아멘 아멘!” 행사가 끝나고 나니까 어느 국회의원은 “이거 목사님이 진짜 쓴 거 맞습니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또 어떤 총회장은 “목사님이 시인이라는 걸 이제 알았네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아니 국민일보도 안 보십니까?” 사실 이 공연은 한 교회에서만 하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유튜브에 올릴 수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시청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본다 한들 현장에서의 느낌과 감동을 그대로 전해주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 유튜브를 시청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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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5-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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