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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아쉬울수록 추모의 마음은 깊어지다
    월요일 오후 저는 故 김대중 대통령의 영부인 이희호 여사님 장례식장에 조문을 갔습니다. 장례식장엔 문희상 국회의장님을 비롯해 전 현직 장관, 국회의원들이 식당을 꽉 메우고 있었습니다. 그 분들과 함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장례위에서 저에게 현충각에서 있을 추모식에서 교계 대표로 추모사를 해 달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왜냐면 제가 아직은 교계 대표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래도 그 어느 분보다도 제가 추모사를 하면 추모식을 더 감명 깊고 숙연하게 할 것이라는 겁니다. 물론 제가 추모사를 하면 시적이고 문학적이며 가슴을 울리는 운문의 추모사를 잘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함으로써 행여나 이희호 여사님께 조금이라도 누가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씀 드렸습니다. “이희호 여사님 생전에 더 깊은 관계를 가진 분이나, 저보다 더 훌륭한 선배 목사님을 찾아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적임자가 없거나 제가 꼭 해야 한다면 그때는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장례식장에서 나온 후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추모사를 준비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장례위 쪽에서 연락이 온 것입니다. “목사님이 거절 하셔서 다른 분에게 말씀 드렸더니 흔쾌하게 허락 하셨습니다.” 그분은 진보 진영에 계신 분인데, 교계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훌륭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제가 “잘 하셨습니다. 정말 잘 되었네요.” 그러나 전화를 끊고 보니까 사람 마음이 왜 그런지, 좀 섭섭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왜냐면 이미 원고를 써 놨기 때문입니다. 그때 쓴 원고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의도의 푸른 바람을 맞으며 겨울 광야에 눈물로 피어난 한 송이 인동초가 있었지요. 그 인동초 곁에 한 아내이자, 가슴 시린 정치적 동반자요, 시대의 아픔을 심장에 품고 평화의 꽃씨를 뿌리며 꽃길을 여셨던 어머니 이희호 여사님, 한국교회 장로님! 님의 영혼은 저 소망의 동산인 천국으로 가셔서 하나님 품에 안식을 하고 계시지만, 어머니의 가슴에 달린 카네이션이 떨어진 것처럼 우리 마음은 황망하기 그지없고 죄스럽기까지 합니다. 님은 대한민국 1세대 여성 운동가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었던 사회운동가요, 민족의 갈등과 분열을 통합의 길로 이끄는 평화의 선구자이셨습니다. 김대중 대통령님께서 병석에서 혈압이 떨어져 추위와 싸울 때, 털실로 손수 짜신 벙어리장갑과 양말을 신겨주셨다지요. 그리고 여사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가족들과 함께 찬송을 부르셨으니, 그 애달픈 소망과 그리운 사랑을 가득 안고 하늘나라에 가셔서 예수님께는 인동초의 새하얀 향기를 바치시고 김대중 대통령님께 달려가 손을 꼭 잡아 주세요. 이희호 여사님 그리고 우리의 어머님, 아니 한국교회의 위대한 장로님이시여, 이제 모든 짐, 모든 고통, 그 모든 시련의 상처는 이 땅 위에 다 내려놓으시고 저 영원한 하늘나라 그리고 하늘 인동초 곁에서 다시 사랑과 평화의 꽃으로 피어나소서. 우리도 국민과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시겠다는 장로님의 유언을 받들어, 국민통합, 남북화해, 이념과 계층의 통합을 꽃 피우며 평화통일과 선진대국을 이루어가겠습니다. 그 모습 지켜봐주시며 천국에서도 기도해 주세요. 아, 이희호 여사님이여, 우리의 어머니이자, 위대한 장로님이시여, 그리고 우리 민족의 가슴 속에 영원히 겨울 인동초로 피어날 사랑과 평화의 이름이시여. 존경하며 사랑합니다. 그리고 지울 수 없는 그리움의 꽃을 드리며 추모합니다.” 생각해 보면, 이희호 여사님이 없는 김대중 대통령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숱한 시련의 비바람과 눈보라가 몰아칠 때마다 김 대통령을 격려하고 일으켜 세워준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인생과 신앙의 동반자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사실 저는 김대중 대통령 재임 시절에는 작은 교회 목사였기에 존재감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저에게 추모사까지 부탁하고 장례식장을 나오는 길에 KBS에서 인터뷰까지 요청한 걸 보면 저도 어느새 교계 중진 목사가 된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비록 추모사를 하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고인의 추모식에 조금이라도 누가될까 싶어 양보하려고 했던 저의 마음을 스스로 격려하였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양보의 미덕을 세우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 양보와 섬김의 정신이 없으니 교계는 여전히 치킨 싸움을 하며 리더십이 표류하고 있지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제 마음이 아쉬울수록 가슴 깊이 애도하는 추모의 마음이 더 깊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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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6-16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한국전 참전용사 초청 13년
    벌써 한국전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13년째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2007년 1월 15일, LA에서 마틴 루서 킹 국제평화상을 수상하기 전날 전야제에서 ‘레리 레딕’이라는 흑인 노병을 만났습니다. 그는 제가 한국인임을 알고 다가와 더듬거리는 말투로 자신을 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왼쪽 허리의 총상 흉터를 보여주면서 전쟁 후 한국을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며 울먹였습니다. 한국에 다시 가보고 싶은데 초청해 주는 분이 없어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그 분께 절을 하며 “제가 꼭 한국으로 초청하겠습니다”라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얼마 후 북한이 대포동 미사일을 시험 발사하면서 남북관계가 경색되었을 때 백악관 직속 평화봉사단 특별정책기획실장 폴 진의 초청으로 워싱턴에서 백악관기독신우회 몇 명과 군 장성 출신 모임에 참석하여 말씀을 나눌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 때 미국 사람들이 TV에서 한국의 시위대가 성조기를 찢고 불태우는 장면을 보고 한국의 반미 감정에 대해 매우 섭섭해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조기를 불태우는 모습이 한국의 진짜 모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미국과 한국의 우호를 위해서는 정부차원의 외교 뿐만 아니라 민간 차원의 교류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였습니다.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 바로 2007년 제1차 6.25 참전용사 초청 행사를 하게 된 것입니다. 참전용사 초청행사는 정부기관 차원에서나 할 수 있는 대규모 행사입니다. 그러나 저희 교회는 1회부터 12회까지 비행기 티켓, 숙박료, 체류 비용 등 모든 경비와 선물까지 적게는 3억~4억원에서 많게는 8억원 이상을 지출 하였고 한국으로 초청할 뿐만 아니라 미국에 가서 인서비스를 같이 할 때는 10억원 가까운 경비를 지불하면서 행사를 계속해 왔습니다. 이런 우리 교회의 진정성 있는 섬김에 감동을 받은 참전용사들을 중심으로 미국 내에 친한파들이 많아졌습니다. 예컨대, 한일 간에 독도 영유권 논쟁이 촉발되었던 민감한 시기에 참전용사들이 미국 백악관에 독도는 대한민국의 영토라는 사실을 적시한 서한을 보내고 항의 방문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 한국전 참전 용사들은 살아생전에도 우리 교회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홍보하였을 뿐만 아니라 돌아가시면서 까지도 가족과 이웃들에게 대한민국과 새에덴교회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유언을 남겼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미국 내에 새에덴교회의 참전용사 초청행사에 대한 아름다운 미담과 감동의 스토리가 전해지고 전해져서 마침내 저는 한국교회 목회자로서는 최초로 미국 국가조찬기도회(International Luncheon Prayer)에서 메시지를 전하게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미국 연방의회까지 전달이 되어 13년 째 해 온 우리 교회의 수고와 헌신을 미 연방의회 의사록(Congressional Record)에 영구히 기록 보존되게 된 것입니다. 저는 이런 것이 있는 줄도 모르고 부탁한 적도 없는데 한국교회와 민간인으로서는 최초로 미 연방의회 의사록에 영구적으로 보존이 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 일을 뒤늦게 알고 미 연방 하원 3선을 지낸 김창준 장로님과 제니퍼 안권사님이 귀한 역할을 해 주셨습니다만. 저는 인증서를 받으러 갈 시간도 없었는데, 이번에 한국을 방문하는 미 연방 전직 국회의원들이 인증서를 액자에 담아 가져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올해 우리 교회는 한국전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13년째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정말로 이 일을 언제까지 할지는 모릅니다. 왜냐면 그 분들이 다 돌아가셔서 하고 싶어도 더 이상 할 수 없는 시기가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우리 교회는 목회적 대형교회로서 대사회적 환원 차원으로 한미 우호증진을 위한 민간외교 사역을 해 온 것입니다. 요즘은 사회적 가치, 공유경제, 플랫폼 교회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는 작년 30주년 행사 때도 우리 교회만의 과시적 행사가 아니라 철저하게 사회적 섬김과 공유, 나눔을 실천하는 행사를 하였습니다. 참전용사 초청행사 역시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고 나누는 사역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우리 교회는 사회적 섬김과 나눔의 교회로 갈 것입니다. 이 일에 뜻을 같이 모아주시고 헌신에 동참해 주신 장로님들과 성도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우리 교회만큼 전도와 선교를 열심히 하는 교회도 드물지만, 동시에 목회적 대형교회로서 사회적 섬김과 나눔의 가치를 실현하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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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06-09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시든 꽃은 가슴에서 핀다
    저는 어린 시절부터 경조증이나 강박증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면 소풍 가는 날이나 운동회 하는 날을 앞두고는 너무 좋아서 전날 저녁에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린 시절 글짓기대회나 웅변대회를 나가기 전날은 잠을 못 이뤘어요. 글짓기대회에서 어떤 제목을 줄 것인가, 내가 웅변을 하면 청중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너무 설레서 잠을 못 이뤘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영접하고 교회에 처음 나간 날부터 모든 하루하루가 새로웠던 것 같습니다. 특별히 처음으로 교회에 가서 토요 2부 순서 때 유행가를 부른 후 노래를 잘한다는 목사님의 칭찬을 듣고 당장 찬양대 연습을 하고 다음 날 주일에 찬양대를 하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그날 밤, 기숙사에서 잠을 못 이루고 거의 뜬 눈으로 새웠습니다. ‘내가 자발적으로 교회를 간다는게 도대체 꿈인가, 생시인가. 더구나 내가 찬양대에 서게 되다니...’ 그때부터 하루하루가 새로웠고 눈이 부셨습니다. 그러다가 예수 믿는다고 쫓겨난 후 가슴 설레는 날이 더욱 많아졌습니다. 생전 처음 주일날 양복을 입고 교회를 간다든지, 생전 처음으로 주일학교에서 설교하는 일을 앞두고 설레서 잠을 못 이뤘습니다. 특별히 교회를 개척할 때도 토요일만 되면 입이 타오르고 쉽게 잠이 들지 않았습니다. ‘교인이 몇 명이나 올까, 아무개 아무개 성도가 꼭 교회에 와야 할 텐데, 내일 설교를 어떻게 할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잠을 못 이루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런 강박증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이 정도 부흥했으면 자유함도 있을 수 있고 내 삶도 얼마든지 누릴 수 있을 텐데 우리 교회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를 염려하고 목회 생태계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으로 시달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위로가 되는 것은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 사건을 앞두고 잠 못 이루며 기도하셨지요. 사도 바울도 고린도후서 11장에서 그 많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교회 걱정을 하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5월부터 9월까지는 교단의 선거법 때문에 저의손과 발이 묶여 버렸습니다. 물론 사적인 만남을 많이 갖기는 하지만요. 그래서 요즘 더 설교에 신경을 쓰고 일찌감치 장년여름수련회 말씀준비를 시작했습니다. 미리 준비해놔야 7월부터 총회를 위한 지방 순례를 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간 못 보던 책들을 보면서 주제도 짜고 메모도 하며 연구를 하였습니다. 정말 온 몸과 마음을 다해 기도하고 묵상하며 집중하였습니다. 며칠 동안 그렇게 했더니 또 옛날에 느꼈던 탈진 현상이 오는 것입니다. 일종의 정신적 스트레스가 심장과 폐장을 약하게 했는지 가슴이 답답하고 구역질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시 중단을 하고 교회 뒷산에 갔습니다. 산에 가서 맑은 공기를 쐬면서 머리를 식히니까 그 증세가 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산에 가서 보니 이미 진달래는 다 져 버렸고 꽃은 한 송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꽃잎대신 잎사귀가 무성하게 피어 있었습니다. 저 그늘진 응달 구석에 다 시들어버린 철쭉꽃이 몇 송이 보였습니다. 그 시든 꽃을 보면서 저의 젊은 날의 초상이 생각났습니다. 젊을 때는 며칠 밤을 새워도 끄떡없었던 심장과 폐장이 이제는 조금만 무리해도 조여드는 것을 보며 마치 시든 꽃이 나의 모습처럼 보인 것입니다. 그 순간 사도 바울의 고백이 생각났습니다.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후4:12) 저뿐만 아니라 이 땅의 지도자라면 다 이런 강박증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강박은 많은 사람을 살려내고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줄 것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젊을 때의 경조증이 목회에 더 열심을 내게 하였고, 그 경조증은 강박증으로 이어져서 더 사명에 홀릭하게 된 것입니다. 요즘 저는 장년여름수련회 말씀을 생각하고 묵상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 마다 스트레스가 제 마음을 누릅니다. “올해는 작년보다 더 잘해야 하고 더 은혜가 넘치고 생명이 넘쳐야 하는데...” 저는 산에 오를 때마다 시든 꽃 대신 푸른 잎사귀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젊은 날 제 가슴에 피었던 청춘의 꽃과 열정들은 강박에 의해서 시들어졌지만, 그 꽃들은 성도들의 가슴에서 다시 피어나리라.” 이번 수련회는 제가 더 강박을 느끼고 스트레스를 받은 만큼 성도들 가슴 속에서 더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고 눈이 부시도록 푸른 나뭇잎으로 피어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의 종의 꽃이 시들수록 성도들의 가슴 속에는 더 아름답고 눈부신 꽃들이 피어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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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06-02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감탄사가 감탄의 삶을 만든다
    옛날 어린 시절에 글을 쓸 때는 문장에 감탄사 부호를 많이 썼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글이 아주 매끄럽고 세련되기는 하지만 문장에서 감탄사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 세상에도 감탄하고 감격하게 하는 이야기보다는 남을 비난하고 공격하고 정죄하는 분위기로 변해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을 감탄스럽게 하는 글도 많이 쓰고 그런 말도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제 외손녀 ‘현주’ 때문입니다. 현주가 아주 어려서 낯을 가릴 때는 아무리 제가 사랑해 주어도 저에게는 오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기 엄마하고 외할머니만 좋아하는 것입니다. 제가 그렇게 사랑하고 축복을 하고 모든 장난감을 마련해 주는데도 오지 않는 것입니다. 제 얼굴을 보자마자 울어버릴 때는 섭섭하기도 하고 상처 받고 시험에 들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조금 위로가 되는 것은 지 아빠를 봐도 그런 것입니다. 아빠가 서울 있다가 주말에 오니까 낯을 가리는 것입니다. 하물며 친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얼마나 낯을 가렸겠습니까? 그런데 아이가 약간 말을 알아듣고 의사소통을 하려고 할 때부터는 자꾸 바깥으로 나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현주를 볼 때마다 단 10~20분이라도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제가 아이에게 감탄의 언어를 가르쳤습니다. 개나리, 진달래, 목련꽃이 필 때 꽃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현주야, 이게 꽃이야. 목련이야, 진달래야, 개나리야. 야, 너무 아름답다. 아니, 너의 이름이 꽃이고 너도 꽃처럼 아름다워. 야아~ 와우~” 현주가 알아듣건 모르건 꽃을 보고 감탄을 하게 해 준 것입니다. “현주야, 너도 목련꽃처럼 눈부시게 자라라. 꽃처럼 살아라. 너의 마음이 철쭉꽃처럼 화사할 뿐 아니라 네 삶을 감격하며 살아라. 감탄사를 많이 외치며 살아라. 그래야 네 주변에 사람이 많이 따른단다. 야아~ 와우~” 이런 말이 얼마나 아이 머릿속에 입력이 되었는지 이제는 저만 보면 바깥에 안 나갔는데도 바깥으로 손을 가리키며 “와우~”하는 것입니다. 이제 돌도 안 지난 애가 자기 스스로 감탄하면서 할아버지의 마음을 송두리째 사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지금은 시든 꽃을 봐도 나뭇잎만 보아도 “와~” 하기도 하고 “꽃, 꽃” 하는 것입니다. 과연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의 내용이 어린 손녀에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또 요즘은 강아지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제가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는 순간부터 “와~” 하고 감탄의 언어부터 내지릅니다. 그러다가 강아지를 보면 더 감격하며 “머-엉 머-엉”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현주의 감성을 긍정적으로 자극해 주었습니다. 그러면 그 좋은 감성이 현주의 무의식의 창고에 저장이 될 것이고 무의식의 창고에 저장된 좋은 감성은 반드시 나중에 좋은 추억과 감정만을 기억하는 ‘무드셀라 증후군’으로 발전할 것입니다. 어찌 제 외손녀뿐이겠습니까?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속 감탄사를 쓰고 스스로 감탄을 하는 사람은 감탄 인생, 감격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에게도 감탄의 꽃이 피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꽃밭 여행자’라는 시를 쓰지 않았습니까? “꽃밭을 여행했으면 사막으로 가라 / 사막을 다녀왔으면 다시 꽃밭으로 가라 / 꽃밭의 향기를 사막에 날리고 / 사막의 침묵을 꽃밭에 퍼뜨리라 / 꽃밭에는 사막의 별이 뜨고 /사막에는 꽃밭의 꽃잎이 날리리니.” 꽃밭 여행자는 사막으로 가서 감탄의 꽃을 피워야 합니다. 그리고 사막으로 갔으면 다시 사막의 침묵과 별빛을 가지고 꽃밭으로 와야 합니다. 그럴 때 건강한 사회를 이루는 선순환을 일으키고 순기능이 될 것입니다. 특별히 신앙생활은 더 그렇습니다. 교회에서도 서로 칭찬하고 감격하고 감탄할 때 사랑하며 섬기는 교회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감탄 인생을 넘어서 감탄 신앙을 이루고 그 신앙들이 모여서 감탄 교회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감탄하는 표현을 잘해야 합니다. 물론 그 표현은 진심에서 우러나와야 합니다. 우리가 칭찬과 격려를 넘어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탄을 잘할 때 스스로 감격하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고 감탄의 교회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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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05-27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좋은 추억이 좋은 삶을 만든다
    요즘 딸과 함께 외손녀를 키우는 집사람을 볼 때마다 저는 집사람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외손녀를 정성스럽게 돌보는 집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문득문득 외할머니가 생각납니다. 저의 외할머니는 딸만 셋을 두셨습니다. 그래서 딸이 자녀를 낳을 때마다 가서 애기를 받아주고 애 키우는 일을 도와주셨다고 합니다. 그런 외할머니가 저도 키워주셨는데 정말 따뜻한 사랑으로 키워주신 것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100점 맞은 시험지를 집으로 가져가면 외할머니가 저를 얼마나 칭찬해주셨는지 모릅니다. “우리 강석이는 어쩌면 그렇게 영특하고 영리한지 모르겠구나.” 그러나 목회하기 바쁘고 여러 가지 일을 하느라 그동안 외할머니의 사랑을 까마득히 잊고 산 것이죠. 그런데 손녀를 돌보는 집사람을 보면서 마침내 외할머니의 아련한 사랑이 떠오른 것입니다. 저의 외할머니는 참 불쌍하신 분입니다. 아들이 없었으니 돌아가실 때 저의 아버지가 장례를 치러 드렸습니다. 그때는 가족이 교회를 안 다녔을 때니까 아버지가 묘를 만들어 드리고 묘 앞에 제사상을 차려드리고 절을 하던 기억이 납니다. 저 역시 그때는 교회를 안 다녔을 때니까요. 그런데 외할머니는 아들이 없으니까 딸들에게 제삿날도 기억되지 않고 잊혀 갔습니다. 세월이 강물처럼 흘러서 저도 외할머니 장례를 치러드렸던 아버지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시간이 나면 외할머니 묘를 한 번 찾아가 보려고 합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더듬으며 꽃다발이라도 하나 들고 가서 헌화 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마음이 드는 것은 손녀딸을 지극히 보살피고 사랑하는 집사람의 모습이 옛날 저를 사랑으로 보살펴 주신 외할머니의 모습으로 제 안에 반사되고 투영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외할머니의 사랑이 저의 무의식에 저장 되어서 이해심과 포용력도 있고 남을 배려하고 섬기는 심성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의 무의식 속에 저장되어 있는 외할머니의 사랑과 격려가 오늘날 저로 하여금 사랑과 섬김의 목회를 할 수 있게 되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요즘 저는 나이를 먹으면서 자꾸 옛날 일들이 많이 생각납니다. 물론 저는 어린 시절의 나쁜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좋은 기억, 아름다운 추억들을 끄집어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의 이러한 심리현상이 감정의 순화와 정서의 건강에 굉장히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심리학 용어 중에 ‘므두셀라 증후군’과 ‘희생자(순교자) 증후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므두셀라 증후군은 과거의 나쁜 기억은 지우고 좋은 기억만 남기려는 심리 현상을 말합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므두셀라는 969세를 살아 인류 중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인데 그는 살면서 과거의 아름답고 행복했던 추억들을 많이 떠올리며 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과거의 아름답고 행복한 추억만을 떠올리려고 하는 그런 심리현상을 므두셀라 증후군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희생자 증후군은 자꾸 과거의 나쁜 기억만 떠올리며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는 심리를 말합니다. 왜 내가 이런 부모 밑에서 태어나 가난하게 살고 고생만 했는가 하고, 항상 피해의식에 갇혀서 슬픈 생각만 하고 자기연민에 빠집니다. 그런데 무드셀라 증후군은 반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릴 지브란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추억이란 희망의 길에서 만나는 돌멩이와 같다. 추억이 있기에 길을 걷다가 넘어지면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과거를 회상할 때 상처와 아픔이 아닌 사랑과 용서, 행복과 위로를 떠올릴 수 있다면 그러한 기억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쉼을 주는 안식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돌이켜보니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무드셀라증후군 속에서 살아온 것입니다. 늘 좋은 추억, 좋은 감정만 떠올렸기 때문이지요. 목회에 대한 추억도 좋은 것만 기억하려고 합니다. 이 마저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도 옛날 일이 떠오르거나 기억이 날 때는 무드셀라증후군의 영역 안에서 나쁜 추억, 나쁜 기억은 흐르는 강물에 던져 버리고 아름다운 추억, 행복한 기억을 떠올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함께 건강한 정서와 아름다운 감성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건강한 정서에 건강한 신앙과 영성이 자라날 것이고 그런 건강한 영성과 신앙을 가지고 건강한 교회를 세웠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추억이 좋은 삶을 만들고 신앙에도 좋은 영향을 미치며 좋은 교회까지 만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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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05-19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시인은 어머니를 가슴에 묻는다
    몇 달 전 정호승 시인께서 저에게 개인적으로 특강해 주시던 중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의 시의 근원은 어머니였습니다.” 정호승 선생님의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가지신 권사님이셨고, 정호승 선생님 역시 유아세례를 받고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새벽기도 가려고 개울을 건너는데 보름달이 비취더라. 그런데 그 달빛이 너무 슬프더라.” 정선생님 보시기에 어머니의 그 한 말씀, 한 말씀이 모두 시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머니께서 아궁이에 군불을 때실 때 아궁이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이 시로 보일 정도였다는 것이죠. 시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의 가슴을 울리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어머니의 모성을 통한 사랑과 인생의 본질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너무 연세가 많으셔서 곧 돌아가실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선생님, 혹시 어머님께서 돌아가시면 꼭 연락을 주셔야 합니다. 제가 해외를 나가지 않은 이상은 꼭 조문을 하러 가겠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정호승 선생님의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가족끼리 조용히 장례를 치르고 어느 누구에게도 연락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조문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나중에야 알고 제가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연락을 주지 않으셔서 전혀 몰랐습니다. 늦게라도 조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목사님,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고 심지어 동창들에게까지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목사님께도 누가 될까 싶어 알리지 않았죠.” “계좌번호라도 알려주시면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아닙니다. 어머니가 천국 가신 것과, 목사님께서 지금까지 저희 어머니를 위해 기도해 주신 것만으로도 족합니다.” 그 후에 정호승 선생님께서 추천사를 써 주신 저의 시집 ‘사막으로 간 꽃밭 여행자’가 출간 되어서 이번에는 문자로 드렸습니다. “선생님께서 추천사를 써 주신 시집이 나왔습니다. 한 번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이런 답문을 보내셨습니다. “바쁘신 목사님, 저는 저희 어머니가 얼마나 주의 종을 잘 모셨는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돌볼 양도 많으시고 하실 일도 많으실 텐데 왜 기어이 오시려고 하십니까? 그냥 제 작업실로 시집을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런데 한 이틀 후에 정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온 것입니다. “목사님, 저도 목사님을 왜 안 만나고 싶겠습니까? 저도 목사님을 만나면 영광이지요. 그러나 제가 목사님의 바쁜 시간을 안 뺏으려고 그랬던 것이죠.” “정선생님, 저 같이 한참 아래 있는 시인이 대기권 밖의 시인을 만나보고 싶은 것은 당연지사가 아니겠습까?” “하하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몸 둘 바를 모르죠. 저도 목사님을 만나 뵈면 영광이지만 저희 어머니가 주의 종을 천사처럼 생각하며 얼마나 존중히 여기셨는 줄 아세요? 그러니까 저희 어머니를 봐서라도 제가 목사님을 편안하게 해 드리려는 마음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정호승 시인을 뵈었는데, 선생님께서는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모습과 어머니 장례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하시는 것입니다. 과연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에도 어머니를 가슴에 묻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러다가 한참 후 화제가 저의 시집으로 옮겨졌습니다. “선생님께서 추천사를 써 주시고 언론에서도 많이 다뤄주어서 서점에서 저의 시집이 제법 움직이고 있다고 합니다. 출간된 지 일주일 밖에 안 되었는데 저 같은 사람의 시집도 벌써 재판을 찍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선생님께서 추천사를 써 주신 덕분이고, 선생님의 명성 값일 것입니다.” “아닙니다. 목사님께서 시를 사랑하고 시에 대한 애절함과 아픔을 가졌기 때문이죠. 목사님의 설교야말로 한편의 고통스러운 시가 아니겠습니까?” 정호승 선생님을 만나고 돌아오면서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고 가슴을 때렸습니다. “아, 정호승 시인은 어머니를 가슴에 묻어왔기에 더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는 위대한 시를 쓸 수 있었던 것이구나. 그런데 나는 내 감성의 끝에 서서 나의 시심과 시성을 가지고 사물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봐 왔어. 내가 아직 정호승 시인 옆에도 가지 못하는 것은 시에 대한 열정과 고통, 비극적 황홀을 느끼는 경험이 부족한 것도 있겠지만, 어머니를 가슴에 묻지 못했기 때문이었구나. 그러나 나는 이제부터라도 어머니뿐만 아니라 주님을 가슴속에 더 깊이 모시고 시를 쓰리라. 아니, 사랑하는 성도들과 세상에서 아픔을 당하는 사람들을 가슴에 품고 시를 쓰리라. 그리고 꽃밭도 거닐지만 사막으로 가리라. 사막에 꽃밭의 향기를 날리고 사막의 침묵을 꽃밭으로 가져 오게 하는 시를 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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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5-12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비와이 스타일
    얼마 전 우리 교회에서 비와이 공연이 있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비와이가 누군지도 몰랐습니다. 막연하게 요즘 청소년과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뮤지션 정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처음으로 비와이에 대해서 강하게 인각이 된 것은 우리 교회 방송실에서 제작한 비와이 공연 홍보영상을 보고 나서였습니다. ‘쇼미더머니’라는 음악경연 대회에서 우승한 비와이의 수상소감을 보고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비와이는 한 치의 망설임이나 주눅 든 모습도 없이 당당하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꿈을 하나 이루고 내려가려고 합니다. 제가 진리라고 믿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여기서 말하고 싶어요. 많은 분들이 제가 하는 음악과 제 신념을 되게 많이 비웃으시지만 저는 이게 멋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것을 오늘 말하고 내려가려 합니다. 태초에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저는 그의 수상소감을 듣고 너무나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당당하게 공중파 방송에서 성경 말씀을 외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수상소감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또 한 가지 감동을 받은 것은 그의 노래 가사 중에 나오는 한 대목이었습니다. 그의 노래 ‘Forever’에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스물넷인 난 매달 십일조 봉투에 100만원짜리 수표를 100장씩 넣을 거야” 저의 상식으로는 도대체 어떻게 이런 가사가 공중파 방송에 그대로 나가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가사를 듣는 사람들이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오히려 열광을 한다는 것입니다. 비와이는 실제로 2017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십일조로 1억 원을 봉투에 넣었다고 고백하였고 회계사가 롤스로이스를 끌어도 된다고 할 정도로 엄청난 축복을 받았으며 지금도 십일조 만큼은 반드시 지킨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얼마나 기특하고 아름다운 청년입니까? 저는 이번에 비와이 공연을 보면서 ‘지금까지 나의 음악적 감성과 예술적 로맨스가 너무 아날로그적 향수에 머물러서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문화적 대세와 충격을 감지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다시 돌아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비와이 스타일’을 새롭게 입고 디자인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첫째, 비와이의 스웩(당당함)입니다. 비와이의 별명이 ‘지저스웨거’(Jesuswagger)입니다. 이 말은 Jesus와 Swagger의 합성어입니다. 스웩이라는 말은 원래, 약탈품, 전리품이라는 뜻인데 힙합에서는 ‘본능적인 자유로움’이나 ‘자신감’, ‘자기 과시’ 등을 나타날 때 쓰는 말입니다. 원래 힙합이 1970년대 미국의 할렘가에서 주로 흑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음악이었는데 사회적 불만이나 저항, 신념들을 자유롭게 랩을 통하여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힙합에서 스웩은 생명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비와이는 자신이 믿는 하나님과 신앙을 스웩있게 발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저스웨거’라는 별명을 붙여준 것입니다. 비와이의 이런 스웩 있는 모습은 서로 비난하고 공격하며 교회와 신앙을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시킨 현 시대에 큰 도전과 울림을 줍니다. 비와이처럼 어떤 자리에서든, 누구를 만나든 당당하게, 스웩있게 예수님을 전하고 자신의 신앙을 자랑할 수 있는 멋짐을 지녀야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둘째, 비와이의 뉴 패션 입니다. 청소년들과 청년들은 비와이의 헤어스타일, 옷, 스피치, 몸짓 하나 하나에 소리를 지르고 열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만큼 비와이는 최신 문화감각과 흐름을 읽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노래와 공연은 단순하고 가볍고 스피드 했습니다. 일방적으로 가르치려거나 무거운 분위기를 연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함께 즐겁게 이야기하며 소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뉴 페이스, 뉴 리더를 기다리고 있고 젊은이들은 그런 사람에게 열광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셋째, 비와이의 톱클래스 실력입니다. 비와이는 공중파 방송 경연대회에서 우승할 정도로 최고의 실력을 평가 받은 우리나라 톱클래스 힙합 뮤지션입니다. 그가 최고의 실력을 갖춘 뮤지션이기에 공중파 방송이나 무대에서 당당하게 신앙을 이야기하고 자랑해도 누구 하나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그런 모습을 멋짐으로 받아들입니다. 저 역시 마이너리그였지만 메이저리그에 오르기 위하여 얼마나 노력하였는지 모릅니다. 밤 늦도록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기도하고 책을 읽으며 영성과 지성, 예술적 감성을 쌓기 위해 몸부림쳤습니다. 그랬기에 지금은 누구도 저를 향하여 실력 없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저 역시 어느덧 아웃라이어에 진입하고 있습니다. 이번 비와이의 공연은 저에게 신선한 충격과 도전이었습니다. “나도 지금까지 노력한다고 했지만 아니다. 더 새로워져야 한다. 더 젊어져야 한다. 더 아웃라이어가 되어야 한다.” 앞으로도 비와이라는 아름다운 청년이 하나님께 더 위대하게 쓰임 받고 이 땅의 수많은 청소년과 청년들을 주님께 돌아오게 하는 도구로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교회에서도 비와이같은 지저스웨거가 많이 나오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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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5-05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꽃이 진다고 잊으랴
    봄이 깊어가면서 어디를 보아도 다 꽃입니다. 산과 들에도, 거리와 공터에도 다 꽃이 피어납니다. 꽃은 아름다움의 절정이요, 생명의 향기로운 노래입니다. 아무리 기분 나쁜 사람도 꽃을 발로 차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꽃을 보면 누구나 마음이 따뜻해지고 잠시나마 행복한 상념에 잠기게 될 겁니다. 요 근래에 뒷산을 몇 번 다녀왔습니다. 뒷산을 갈 때마다 화사하게 핀 진달래를 보는 행복이 보통 크지가 않습니다. 누군가가 그랬던가요, 꽃에도 마음이 있다고요. 그래서 제 마음 속에 피어있는 영혼의 꽃이 연분홍 진달래꽃과 무언의 대화를 나누곤 합니다. 가장 먼저 피었지만 가장 오래까지 시들지 않고 꽃잎을 자랑하고 있는 진달래에 눈길이 갔습니다. 그 진달래를 축복 하곤 했지요. 그러나 가장 수명이 긴 꽃도 언젠가는 지고 말 것입니다. 아니, 비가 오고 바람이 세차게 불면 꽃의 아름다움을 노래할 여유도 없이 금방 져 버리겠지요. 그래서 화무십일홍 권불십년 (花無十日紅 權不十年)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교인들도 꽃처럼 화사하게 빛나던 젊은 성도들이 이제는 어느덧 중년이 되고 노년이 되어가는 모습을 봅니다. 저도 거울 앞에서 넥타이를 맬 때마다 탱탱하고 생기 있던 목이 어느덧 주름이 지고 조금씩 쳐지는 것을 보면서 서글픈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아, 내 인생의 꽃도 지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아닙니다. 저의 전성기는 이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꽃이 져도 잎사귀가 무성해지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처럼 제 인생도 이제 시작입니다. 그래서 제가 쓴 ‘꽃밭 여행자’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황무지를 거닐며 꽃씨를 뿌릴 때 / 눈물이 바람에 씻겨 날아갔지 / 봄을 기다리는 겨울 나무처럼 / 가슴에 봄을 품고 황야의 지평선을 바라보았어 / 잠시 꽃밭을 순례하고 싶어 / 벚꽃나무 아래서 하얀 꽃비를 맞으며 섰을 때 / 꽃잎은 나에게 보내어진 연서였음을 알았던 거야... (중략) 꽃잎들의 연서를 손에 쥐고 / 홀로 먼 길을 떠나온 외로운 꽃밭 여행자 / 어느새 해가 저물어 붉은 노을이 질 때 / 문득 울컥하고 눈물이 쏟아진다 / 눈물은 이슬이 되고 / 이슬은 다시 꽃잎으로 피어나리니 / 나도 하나의 꽃잎이 되어 그대의 창가로 날아가고 싶어 / 노을 물드는 꽃밭에 꽃잎으로 떨어지고 싶어.” 그렇습니다. 꽃이 진다고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요. 봄꽃이 지면 다시 여름꽃이 피고, 가을꽃, 겨울꽃이 피어납니다. 그리고 다시 봄이 되면 봄꽃들이 만발하지요. 아니, 그 봄꽃들이 다시 떨어진다 하더라도 꽃밭에 떨어지고 꽃잎으로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 꽃잎은 또 다시 다른 꽃잎을 만들어내지요. 그래서 정호승 시인은 “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 / 별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고 노래하였습니다. 저도 언젠가는 노년이 되고 제 인생의 꽃잎도 다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꽃잎은 또 다른 꽃잎을 만들어 낼 것이고 또 다른 꽃밭 세상을 만들어내어 더 많은 꽃밭 여행자가 찾아오게 할 것입니다. 특별히 제 가슴 속에 새겨진 그 수많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가락동 23평 지하상가에서 처음 교회를 개척하였을 때 저를 믿고 따라와 주고 눈물로 헌신하며 오늘까지 함께 해 준 교인들을 제가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지나온 목회 여정을 돌아보면 아슬아슬한 부분도 있었고 풍비박산 날 위기도 있었지만, 함께 비를 맞고 눈보라를 맞으며 오늘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새에덴의 전성기는 이제 시작되고 있습니다. 새에덴의 개척기와 부흥기를 함께 이끌었던 성도들도 대부분 중 · 노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백설희의 노래를 다시 리메이크해서 불렀던 이선희의 ‘봄날은 간다’의 가슴저미는 대목처럼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져도 같이 울던” 성도들을 어떻게 제가 잊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봄날은 간다’라는 노래가 항상 가슴에 인각 되어 있는데 가사를 이렇게 역설적으로 바꾸어 부르곤 합니다.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져도 같이 웃는 알뜰한 그 헌신에 봄날은 온다.” 그때 마다 지금까지 저와 함께 했던 성도들을 가슴 속에 안고 부릅니다. 언젠가 우리 성도들도 꽃처럼 지는 날이 오겠지요. 그렇다고 제 가슴에 꽃으로 피었던 성도들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도 죽을 때까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잊지 못하였던 것처럼, 저도 함께 헌신해 주었던 성도들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혹시 저보다 먼저 떨어진 꽃잎들이 있다 하더라도 저는 그 꽃잎들을 가슴에 품고 잊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제 인생의 마지막 꽃잎이 떨어지는 날이 온다 해도 제 눈동자에는 사랑하는 성도들과 함께 보냈던 그 화사하고 아름다운 봄날이 어른거릴 것입니다. 오직 사랑과 감사의 회상만이 눈동자에 이슬처럼 고일 것입니다. 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별이 진다고 그대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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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04-21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
    저는 지난 주 화요일 국립묘지에 있는 고 김대중 대통령의 묘역에서 추모기도회를 인도하였습니다. 그 분이 국립묘지에 안장된 이후부터 동교동계 가신들과 참모들은 한 주도 안 빠지고 화요일 오전이면 묘역에 와서 추모모임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듣고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인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동교동계 정치인이요, 국회의원을 하신 배기선 장로님께서 간절하게 부탁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추모모임 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기도회 형식으로 하려고 하는데 꼭 한 번 와서 기도회를 인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는가가서 보았습니다. 제가 간다고 하니까 각종 언론사에서 취재를 오고 일본 NHK방송까지 온 것입니다. 그리고 국회부의장을 비롯해 현직 국회의원들만도 12명이 오셨고, 당대표도 두 명이나 오셨습니다. 저는 몇 십 명 정도 올 줄 알았는데 권노갑 고문을 비롯, 전직 국회의원들과 비서관까지 어림잡아 150명 이상이 온 것 같았습니다. 전부 검은 양복을 입고 서 있는데 순간 저는 쫄아버렸습니다. 저는 그런 긴장 속에서도 정치적이지 않으면서 제 나름대로 신앙적인 중심을 가지고 고 김대중 대통령을 추모하고 그 곳에 오신 분들을 격려하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봉독한 히브리서 3장 1절 말씀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큰 축복입니다. 더구나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도 복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저는 고 김대중 대통령을 생각하면 곧 바로 예수님이 생각납니다. 아니 김대중 대통령을 좀 깊이 아는 사람은 그분을 통하여 예수님이 생각나게 되어 있습니다. 제 입장에서 말씀을 드리긴 하지만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김대중 대통령님의 또 다른 별칭이 DJ이기 때문입니다. 고 이중표 목사님은 DJ를 “Death of Jesus”라고 연결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이니셜대로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정신으로 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하나님과 인간과의 화목을 이루시고, 또 우리와 이웃과의 화목을 이루신 것처럼 김 대통령께서도 평생을 자기를 죽이려는 정적들과 원수들을 용서하며 화해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중략) 그러니까 그분을 생각하면 예수님이 생각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재임시절에 대한민국 역사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의 물꼬를 여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금의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을 갖게 한 것도 다 DJ대통령께서 선구자적 길을 열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한미동맹을 철저하게 강화하는 전제 조건에서 말입니다. (중략) 그래서 평화의 사 도로 인정받아서 대한민국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받으신 것이 아닙니까. 셋째,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들 때문에 저는 예수님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 어느 대통령의 참모들이 매주 화요일이면 이렇게 주군의 묘역에 모일 수 있단 말입니까.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화요일 오전만 되면 이곳에 모여서 대통령님을 추모한다는 것은 기네스북에 등재되어야 할 일이라고 봅니다. DJ대통령께서 한 종교의 창시자나 교주도 아닌데, 화요일이 되면 이곳에 오셔서 가신 님을 추모하고 그분의 삶과 정신을 기리는 여러분들이야말로 저로 하여금 다시 예수님을 생각해 보게 합니다. “과연 나는 목사로서 예수님이 여기에 누워계신다면, 매주 화요일 이곳에 찾아올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무덤이 없지만 나는 예수님을 이토록 지성스럽게 잘 섬기는가. 특히 저는 권노갑 고문님, 박지원 대표님 윤철상 전 의원님들로부터 신앙적이고 목회적인 도전을 받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희 교회 교인들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와 세계를 다니면서 가끔씩 여러분들을 거론하며 도전을 받자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 과 DJ대통령님은 저 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에게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분들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살아생전에 ‘예수님은 나의 형님’이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마음속으로 예수님을 가장 존경하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도 DJ대 통령께서 그토록 좋아하셨던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주인으로 섬기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가 그토록 원하던 남북 간의 진정한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지고, 머지않아 피 흘림이 없는 복음적 평화통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러한 말씀을 드린 후에 한미동맹 강화 안에서 남북평화와 통일의 꽃길이 열리도록 간절히 기도하고 그 분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현 정부도 부디 한미동맹을 더 강화하면서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가지고 남북평화의 길을 지혜롭게 열어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와도 소통하며 함께 가면 더 좋겠습니다. 아니, 우리 모두는 살아서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더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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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04-14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고통의 극지에서 쓴 설교
    저는 시인들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인 한 명을 꼽으라면 주저하지 않고 정호승 시인을 꼽습니다. 정호승 시인의 시에는 예술적 시대혼이 담겨 있으면서도 대중과 소통하는 따뜻한 서정과 감성이 있습니다. 정호승 시인이야말로 이 시대 최고의 시인이요, 감성언어의 연금술사라 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분께 개인적인 강의를 한 번 듣고 싶었습니다. 물론 우리 교회에서 열린 토요 인문학 강좌 강사로 오셔서 특강을 하신 적이 있지만 그런 일반적인 강의가 아닌 그만이 갖고 있는 시 창작의 비기를 깊이 배우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광현 목사님과 함께 그 분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맨 먼저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께서는 시를 쓸 때 제목부터 정하고 내용을 씁니까? 아니면 내용을 쓴 후 제목을 정합니까? 그리고 시를 쓸 때 정말로 아픔과 고통을 느낍니까?” 사실 저는 목회자이면서 시를 쓰는 사람이기 때문에 시를 쓰는 시간보다 말하는 시간이 더 많고 때로는 광장에서 수많은 군중 앞에서 사자후를 토하는 검투사형 웅변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는 선생님 같은 전문 시인이 아닐 뿐만 아니라 삶이 너무 치열하고 바빠서 주로 비행기나 차에서 이동 중에 씁니다. 그러다 보니 시 쓰는 고통을 많이 느낀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랬더니 먼저 본인이 느끼는 시 쓰는 고통에 대해서 토로를 하는 것입니다. “시 창작의 지름길은 없습니다. 시의 스승은 자기 자신일 뿐이며 끊임없이 자신과의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를 쓰는 것이야말로 고통입니다. 시작을 위한 메모 과정부터 그것을 시로 옮기고 다시 수정하고 또 수정하면서도 이 시가 과연 얼마나 독자의 심금을 울릴 것인가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그래서 저도 언제쯤 시 쓰기의 고통에서 해방될 것인가를 생각하며 끊임없이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시집 한 권을 내기 위해서 1년을 품고 고치고 또 고칩니다. 도저히 내 힘으로는 더 이상 고칠 수 없을 때 책을 냅니다. 목사님께서도 사람의 마음을 더 감동시키고 시의 꽃밭을 이뤄주기 위해서는 그만큼 고통의 극지를 경험하셔야합니다.” 그러면서 시에 관한 이론적인 강의가 아닌 본인의 실제적인 시 창작 기법을 자상하고 상세하게 설명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정말 뜻 깊은 강의였고 실제적인 도움이 되는 강의였습니다. 강의를 듣고 와서 출간을 준비 중이던 시집 원고를 보니 고칠 것이 제법 많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수정해 출판사에 최종 원고를 넘겼습니다. 탈고를 하고 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나는 시를 쓰기 위해 그 정도의 고통을 겪진 않지만 매주 설교 한 편, 한 편을 준비하면서는 얼마나 온몸의 진액을 짜는 고통을 느끼고 있는가.” 그래서 정호승 시인을 다시 만나게 되면 이렇게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저는 선생님만큼 시를 쓰기 위해 고통을 느끼지 않지만 설교 한 편을 쓰기 위해서는 정말 고통의 극지를 건너고 고독의 강을 건넙니다.” 설교란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자의 삶과 인격을 통과해서 전달되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뛰어난 설교라 해도 설교자의 인격과 영성, 삶의 모습이 묻어있지 않으면 그 설교는 소리만 나는 꽹과리요 허공의 메아리가 될 수 있습니다. 더구나 매 번 똑같은 설교를 할 수도 없고 끊임없이 새로운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특별히 저는 우리 교회 목회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 생태계와 건강한 사회를 지키기 위한 다양한 공적 사역도 하기 때문에 다양한 주제와 현안에 대한 설교를 많이 준비해야 합니다. 그래서 더 고통의 극지를 걷고 또 걸으며 설교를 준비합니다. 아마, 제 인생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설교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지난 주 수요저녁예배 때 서륜 목사님이 설교 중에 간증한 것처럼, 저는 미국을 가는 비행기나 호텔에서도 계속 설교 원고를 고치고 또 고쳤습니다. 제 설교가 방송과 인터넷으로 나가기 때문에 무슨 흠이나 책잡힐 것이 없는지 끊임없이 꼼꼼히 수정을 합니다. 그렇게 고통스럽게 설교 준비를 마치고 나면 끝난 줄 알았는데 또 다시 다음 설교를 준비해야 하는 고통의 극지가 기다리고 있고 고독의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고통스럽고 고독한 설교자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봄부터 소쩍새가 우는 것처럼, 설교자도 고통의 극지를 걷지 않고 고독의 강을 건너지 않으면 성도들의 심령을 울리고 삶을 변화시키는 감동적인 설교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사람 발자국 하나 없고 풀 한 포기 없는 저만의 외로움과 고독의 극지를 찾아 걷고 있습니다. 그 고통의 산실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아픔이 담긴 말씀을 거룩한 언어의 퍼포먼스로 전달하기 위하여 설교 원고를 쓰고 또 쓰며 고치고 또 고칩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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