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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아군에게는 총을 겨누지 않으리’
- 지난 월요일 국회대강당에서 NAP 독소조항 반대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출범식에 참석했습니다. 가보니까 여당 국회의원들은 안오고 야당 국회의원들만 왔습니다. NAP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여야를 초월해서, 크리스천의원들이 서로 손을 잡고 독소조항을 수정하도록 해야 하는데 정말 아쉬웠습니다. 더구나 야당 국회의원들은 NAP에 대한 문제를 안보, 경제, 국가 기본 정책까지 싸잡아서 함께 비판하는 것입니다. 물론 야당의 의원들이야 그런 입장일 수밖에 없겠지만 마치 그 자리가 야당을 위한 포럼의 자리로 둔갑을 해 버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니, 그 자리는 마치 반정부운동의 자리와 같았습니다. 저는 출범 메시지를 맡았는데 제 차례가 와서 강단으로 올라갔습니다. 저는 미리 준비한 원고를 접어두고 즉흥적인 메시지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최대한 균형적인 메시지를 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여러분, 저는 정치인이 아니고 목회자입니다. 그래서 중립적이고 균형적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남북정상회담과 평화조약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응원하고 박수를 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NAP안에 있는 독소조항은 참으로 우려스럽습니다. 인권이 무엇입니까? UN 인권 헌장 29조를 보면 윤리, 도덕에기초를 하고 공익에 반하지 않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국가 인권위원회는 인권의 본질을 왜곡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서구에서의 인권운동의 선도자는 윌버포스고 미국에서는 마틴 루터 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래봬도 마틴 루터 킹 퍼레이드 재단에서 국제평화상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당시 마틴 루터 킹 보다 더 과격하고 급진적 인권운동을 했던 마르콤 엑스가 있었습니다. 그는 조지아주와 몇몇 주에서 백인들을 다 쫓아내버리고 흑인공화국을 만들자고 주장했습니다. 백인들을 적폐 중의 적폐로 생각하고 흑백간의 편가르기를 하는 인권운동을 했던 거지요. 물론 그는 일부 흑인들로부터 마틴 루터 킹 보다 더 큰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우리 중의 대부분은 그에 대한 존재 자체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러자 뒤에서 막 “그만해, 그만해, 내려와!” 이런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조금 전에 한 야당의원이 법무부의 인권정책을 마련한 담당관을 비판하자 “죽여, 죽여!”를 외친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극단적인 생각과 표현을 하는 사람이지요. 그러나 저는 계속 메시지를 이어갔습니다. “반면에 왜 마틴 루터 킹은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고 존경을 받고 있습니까? 그는 흑인과 백인을 화해시키고 통합하는 평화적인 인권운동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저 조지아주의 붉은 언덕에서 흑인과 백인이 함께 손을 잡고 살아가는 그런 세상을 꿈꾸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훗날 그의 비도덕적인 과실들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노벨평화상을 받게 되었고 여전히 미국 사람들이 그가 탄생한 날을 기념하여 공휴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도 편가르기식 선동을 하지말고 정말 소통하며 통합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특별히 정부가 인권운동을 앞세워 편가르기식 선동을 하지 말고 상호 간에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면서 소통하고 화해하고 통합하는 인권정책을 펴야 합니다.” 그랬더니 또 그 쪽에서 막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내려와, 지난 번 국가조찬기도회 때 문재인을 상찬했던 것부터 회개해!” 그래도 저는 아랑곳하지 않고 메시지를 이어갔습니다. “지금 우리는 한반도에 평화의 꽃씨를 뿌리고 북한의 핵 폐기와 종전선언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면 언젠가는 피흘림이 없는 복음적 평화통일이 이루어질 수도 있을 텐데 그때 이러한 극단적 인권정책이나 조례를 북한 주민들이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또한 과연 북한 지도부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우리 정부는 심각한 고민을 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도 우리가 하나가 됩시다. 우리 한국교회 뿐만 아니라 타종교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종교는 사회의 마지막 항체요 보루요 저항인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저항인자가 되어서 이 독소조항을 수정하도록 합시다. 이를 위해 우리 모두가 하나 되어 끝까지 싸웁시다” 그러자 우레와 같은 함성의 박수가 나왔습니다. 물론 도중에도 함성의 박수가 나왔습니다마는, 그러나 소리를 질렀던 몇몇 분들은 자기중심의 확증편향성과 선택적 지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한 마디로 극우 중의 극우의 확증편향성을 가진 사람들이죠. 지금 우리는 보수가 되었건 진보가 되었건 절대로 편가르기를 하면 안 됩니다. 무조건 동성애를 인권으로 포장해서 선동정치를 하려고 하는 진보 쪽도 큰 문제이지만, 아군에게 총질을 하면서까지 극우적인 확증편향성에 사로잡혀 과격한 발언을 하고 좌충우돌하는 사람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극우건 극좌건 무조건 편가르기식으로 우리 사회를 선동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편가르기를 하는 것은 정말 쉽지요. 극단에 서서 상대를 비판하고 증오하는 거야 정말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상대와 서로 소통하고 설득하며 대화로 풀어나가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어렵지만 그것이 크고 진정한 지도자의 길이지요. 솔직히 저는 그 분들 보다도 건강한 교회 생태계를 위해 더 많은 희생과 헌신과 눈물을 쏟은 사람입니다. 이런 일을 위해서 얼마나 배후에서 활동하고 후원하고 희생했는데요. 저 또한 정말 극단적인 발언과 행동을 해야 할 때는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도 될 때에는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죠. 저는 그런 극단적이고 과격한 행동을 하는 사람에 대해서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마음속으로도 그들에게 총질은 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함께 손잡고 일해야 하니까요. 공항으로 출국하는 길은 하늘이 캄캄하고 비가 쏟아져 차가 몹시 막혔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맑은 하늘을 꿈꾸며 저는 비행기와 함께 이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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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아군에게는 총을 겨누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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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웃고 있어도 눈물 나는 자리
- 지난 8월 21일 밤, 저는 잠을 설쳤습니다. 어린 시절 소풍을 가기 전날 밤처럼 말이죠. 다음날, 단국대에서 저의 명예문학박사 학위 수여식이 있었거든요. 저는 논문을 써서 두 개의 석사학위와 이어 목회학박사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저의 모교인 광신대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를, 백석대학교에서는 명예철학박사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백석대학교와 장종현 총회장님이 제 가슴 속에서 떠나질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명예문학박사는 정말 제 가슴을두근거리게 하였습니다. 목회자가 명예문학박사를 받는다는 것은 거의 없는 일이기에 총장님 옆에 앉았던 저는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정말 눈물이 나려고 하였습니다. 저의 순서가 오기까지 많은 졸업자들의 석박사 학위 수여식이 있었습니다. 논문을 쓰느라 그들 모두가 얼마나 수고를 하였겠습니까? 그들의 학위 수여식 중 제 머릿속에는 지나온 삶의 여정이 스쳐갔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문학적, 예술적 감성과 상상력이 컸던것 같습니다. 라디오 연속극을 들으면 상상의 나래를 펴고 꿈속으로 날아갔고 동화책이나 소설책을 읽으면 그 이야기가 펼쳐지는 문학적, 예술적 사유를 꿈속으로까지 끌고 갔지요. 만약 제가 일반대학교를 갔더라면 국문과나 영문과를 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거룩한 소명을 받으면서부터 오랫동안 문학적 사유를 중단하고 절필을 하였습니다. 오로지 신앙의 투혼을 불사르며 영적 사유에 정진을 하였지요. 그러다가 어느 정도 목회의 길을 다지게 된 후, 다시 문학적 향취를 회상하며 펜을 들고 글을 쓰며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문학을 전공하지 못한 사람이 글을 쓰기 때문에 그것은 독학이요 습작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였는지 저의 글은 붉은 고원에서 고독하게 쓰여져야 했습니다. 그렇게 쓰여진 제 글은 저 고원의 계곡 아래로 내동댕이쳐지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수많은 산간 협곡을 지나고 오지를 넘어 저의 길, 저의 세계를 개척해 나갔습니다. 목사이기에 설교만 열심히 하면 될 걸, 왜 그토록 글쓰기에 도전하고 문학의 지평을 열고자 했는지... 그러나 그런 문학적 목마름과 갈망 때문에 부지런히 시를 쓰고 책도 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 메이저 일간지에 글쓰기 도전도 하였지요. 하지만 목회자가 비난당하던 시대에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깊은 계곡 아래에 떨어져야 하는 절망도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산기슭이나 계곡의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하이에나가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 산정 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 죽더라도 도전에 살고 죽는,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되고 싶었습니다.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요. 문학적 사유와 잠재력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 그래도 제가 쓴 글의 흔적일랑 남겨둬야지요. 묻지마세요. 왜 그리도 힘들게 고독한 저 붉은 고원, 아니 눈 덮인 저 킬리만자로의 정상을 오르려고 하느냐고요. 굶주리고 고독한 문인의 불타는 영혼을 아는 이 없으니 또 어떠하겠습니까? 마침내 저는 마음으로 잠시 오른 킬리만자로의 정상에서 여름의 푸른 강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름 강을 넘어 푸른 초원을 만날 수 있었지요. 그래서 목회자로는 유일하게 주요 일간지에 글을 쓰고 각종 문학상을 받는 꿈같은 일을 누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목회자가 거의 받지 않는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 자리에서 태연한 척 웃고 있어도 온 몸이 긴장되고 눈물이 날 수 밖에요. 저는 답사를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총동문회 회장처럼 키높이 발판대를 마련해 주었으면 좋았을텐데 학교 직원이 제가 엄청 키가 큰 줄 알고 그것을 준비해 주지 않아서 애를 먹었습니다. 그러나 기억나는 것은 저의 진심이고 울먹이는 가슴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선포적 사역을 많이 하였지만 글쓰기에는 부족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글을 많이 써서 그의 사후에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칼빈도 루터보다 많은 글을 남겨서 더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지요. 이제 제 글에 삶의 진액을 담고 싶습니다. 그 글로 세상의 그늘을 지워나가고 싶습니다. 제 글이 세상에 꿈이 되게 하고 싶습니다. 아니, 제 글이 작은 별 하나가 되어서 어둔 세상을 반짝이며 복음 선교에 한 줌의 중보가 되고 교회의 이미지를 격상시키는 별빛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다가 조용필이 불렀던 저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가죽을 남기고 죽고 싶습니다. 단국대학교와 장충식 이사장님께 하나님의 무궁한 축복이 있기를 바라고 새에덴 성도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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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웃고 있어도 눈물 나는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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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추억은 날개를 타고 오다
- 제가 예수 믿고 신학교를 간다고 집에서 쫓겨나 군산 시내를 전전긍긍할 때였습니다. 그 때 주로 군산명석교회(현 군산 사랑의 교회)에서 잠을 잤습니다. 옛날에 얼마나 추웠습니까? 난로 하나도 못 피우고 맨 의자 위에서 침낭 하나 가지고 기도하다 잠을 자다 그렇게 밤을 보냈습니다. 얼마나 많이 굶었는지 눈이 쑥 들어갔습니다. 낮에는 주로 신학교 시험 준비를 위해서 성경을 보고 그 와중에도 가슴이 뜨거우면 전도를 하러 다녔습니다. 그러던 중에 군산개복교회에서 부흥회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당시 개복교회는 군산 에서 가장 큰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그 집회를 참석했는데 강사는 피종진 목사님이셨습니다. 피종진 목사님은 당시 전국과 세계적으로 부흥회를 다니시는 분이었습니다. 역시 집회를 가보니까 대단한 부흥강사였습니다. 분위기 자체도 다른 교회 부흥회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청중을 압도하는 부흥강사의 찬양과 메시지, 울렸다 웃겼다하는 생동감 넘치는 카리스마에 완전히 매료되었습니다. 그 때 하얀 양복을 입고 부흥회를 인도하시는 목사님의 모습은 환상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금식을 하면서 개복교회 지하실에서 잠을 자고 새벽기도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새벽기도를 하면서 보니까 사람들이 강단에 안수기도를 받으러 가는 것입니다. 그 때는 새벽집회, 낮 집회, 밤 집회, 그것도 목요일, 금요일까지 했던 때인데, 지금 생각해보면 새벽에 그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안수기도를 받았으니 강사님이 얼마나 피곤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남들이 안수기도를 받으니까 저도 한 번 끼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제 머리에 손을 얹는 순간 온 몸에 불이 확 임하는 듯한 감각을 느꼈습니다. 게다가 목사님께서 손을 얹고 기도해주시는 내용이 기가 막혔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지금은 정처 없는 몸인 것 같지만 내가 너에게 다윗의 권능을 주노라. 내가 다윗처럼 능력을 주어 너를 복되고 귀하게 사용하리라. 주여, 성령께서 감동하신대로 꼭 이 아들을 강건하게 사용하여 주옵소서.” 저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아멘, 아멘”하며 엉엉 울어버렸습니다. ‘아, 어떻게 저 분이 내 상황을 알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다윗 같은 은혜를 주시고 능력을 주신다니...’ 하루 종일 감격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새벽이 되어서 사람들이 또 기도를 받으러 가는데 갑자기 의심하는 마음이 들어왔습니다. ‘목사님이 누구에게나 그런 기도를 하시는 거 아니야’ 그래서 제가 반대쪽으로 가서 기도를 좀 엿들었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사람들마다 기도가 달랐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기도를 받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기도를 받으러 갔습니다. 혹시라도 목사님이 저를 기억할까 싶어서 말입니다. 사실 불이 다 꺼진 상태이기 때문에 아무리 천재라도 기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어제보다 더 감동 있는 기도를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권능을 기름 붓듯 부으시리라. 다윗의 권능뿐만 아니라 바울의 능력으로 너와 함께 하여 끝날까지 내가 너를 존귀하게 사용하리라. 걱정하지 말고 부름받은 길을 걸어가거라.” 그래서 저는 목사님 앞에 무릎을 꿇고 “목사님, 죄송합니다. 잘못 했습니다”하면서 사죄를 드렸습니다. 저는 집회를 참석한 이후에 피목사님을 만나 본 적도 없습니다. 가난한 신학생이 어찌 감히 그런 분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제 마음에만 담고 살아온 것이지요. 그런데 가락동 개척교회 시절에 이 분을 부흥회에 모시려고 사모님께 여러번 전화를 드렸습니다. 그 때 사모님이 목사님의 부흥회 일정을 짜셨는데 다 짜여져서 도저히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목사님께 기도 받고 은혜 받은 사람인데 단 하루라도 오실 수 없느냐”고 사정을 하였습니다. 그 때가 연말이었는데 목사님께서 송구영신예배를 위해서 쉬셔야 한다고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한 주 집회는 그만 두고 단 하루라도 모시고 싶다고 했는데도 사모님이 허락을 안 해 주셔서 그 때는 상처가 참 컸습니다. ‘아, 단 하루도 못 오시는가...’ 그래서 그 분을 모실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이후로는 우리 교회가 부흥회를 안 하고 제가 자작부흥회를 했으니 모시질 못한 거지요. 그런데 제가 요즘 나이가 먹으면서 자꾸 피목사님이 떠올랐습니다. 그 때의 지울 수 없는 추억이 날개를 타고 저의 가슴으로 자꾸 찾아오면서 “제 형편에서만 생각하고 상처를 입은 제 자신이 속 좁은 사람이었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다음 주일 저녁에 1일 부흥회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이 분을 진작 모시지 못한 후회하는 마음이 가득합니다. 다음 주일저녁 뜨거운 은혜를 사모합니다. 그때 추억은 날개를 타고 저에게 날아오고 제 마음 또한 그때의 아련한 추억으로 날아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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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추억은 날개를 타고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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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친구의 무덤에 꽃을 피우리’
- 어린 시절 잊을 수 없는 친구가 있다. 내가 살던 마을 작은 교회 담임전도사님 아들이었다. 나는 유교적이고 불교적 전통을 중시하던 아버지 밑에서 자라서 그랬는지 그 친구를 무던히도 괴롭혔다. 예수님이 부처님 앞에서 도망가는 그림을 그려놓고 친구를 골리기도 했다. 그가 울면 좋아서 괴롭히며 때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선생님이 들어오면 “너 왜 우니” 하고 철저하게 착한 아이처럼 위장을 했다. 그래서 하루는 그 친구의 어머니가 학교로 쫓아왔다. 담임선생님께 “저 놈이 우리 아들을 때린다”라고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나의 철저한 위장 때문에 선생님은 친구 어머니께 “이 아이는 모범생이라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다음 날 학교에 가서 그 친구를 골려주었다. 그 친구는 그렇게 놀림을 당하면서도 “강석아, 같이 예수 믿고 교회 좀 다니자. 내가 너를 꼭 천국으로 인도하고 싶어”라며 끈질기게 전도를 했다. 그런데도 나는 교회를 나가지 않았다. 아무리 성탄절에 사탕을 주고 부활절에 공책을 준다고 해도 더 어긋 바라진 심정이었는지 나가지 않았다. 친구와 헤어진 것은 중학생이 된 뒤 친구 아버지가 목사가 되어서 다른 지방의 큰 교회로 부임하면서부터다. 세월은 물처럼 흘러 나는 목사가 되었고 목회를 하면서도 이따금씩 친구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이 밀려오곤 했다. 친구에 대한 그리움도 생겼고 언젠가 친구에게 사과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몇 년 전 그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TV에서 나오는 내 설교 방송을 보고 연락을 했다는 것이다. 지방이었지만 친구는 사업도 잘되고 모든 것이 형통하다고 큰 소리를 뻥뻥 쳤다. 나는 먼저 전화로 사과부터 했다. “친구야, 그때는 내가 너무 미안했어. 방송 설교를 들으면서 얼마나 나를 욕했니? 미안하다. 내가 한번 내려갈게.” 그런데 얼마 뒤 전화를 했더니 결번이라는 안내 음이 흘러나왔다. 왜 그럴까, 몹시 궁금하였지만, 또 세월은 화살처럼 흘러가버렸다. 그러다가 어찌어찌해서 소식을 알게 되었는데 친구는 위암 말기 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바빠도 친구를 위해 기도해주러 한번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 주쯤 뒤에 금쪽같은 시간을 내서 지방병원으로 내려가 보았더니 이미 친구는 하늘나라로 갔고 이제 막 발인을 했다고 했다. 아, 어쩌면 이럴 수가 있을까.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몇 년 전 통화할 때 이미 사업은 부도가 났고 무척 힘들게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친구가 전화번호만 바꾸지 않았더라면 친구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워주었을 텐데, 어쩌면 스트레스를 덜 받아 암도 들지 않았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니 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마침내 친구가 죽어서야 나는 꽃다발을 들고 친구의 무덤을 찾았다. 친구의 시신은 화장을 해서 납골묘를 하였다. 나는 반 평도 안 되는 친구의 작은 무덤 앞에 고개를 떨구고 꽃다발을 헌화하며 용서를 구했다. 마음속으로 이렇게 속삭이고 또 속삭였다. ‘친구야, 네가 나보다 먼저 천국에 갔구나.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니 지금은 하늘나라에서 나를 보고 있겠지. 미안하다. 그런데 그때 왜 전화번호를 바꿨어. 너랑 통화만 되었어도 내가 네 손을 잡아줄 수도 있었을 텐데….’ 인생은 왜 그럴까. 친구가 살았을 적에는 시간을 못 내고 왜 죽은 후에야 아쉬워하며 그리움을 느끼게 된단 말인가. 참으로 미련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애써 쓸어내리며 친구의 무덤 앞에 꽃씨를 한 줌 뿌려놓고 왔다. 이미 봄은 지나갔지만 무덤 앞에 꽃씨는 싹을 틔울 것이고, 올해는 피지 않더라도 내년에는 꽃을 피우리라고 기대를 하면서. 아니, 참으로 속절없기는 하지만 내년 봄에 다시 와서 꽃씨를 뿌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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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친구의 무덤에 꽃을 피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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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목양 칼럼] 선험적 고난 체험
- 지난 주는 30주년 다큐제작을 위해 촬영하느라 완전 땀으로 멱을 감아버렸습니다. 봄이나 지난 번 3M 트립 때 촬영을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서로 소통이 부족해서 별도의 시간을 내야 했던 것입니다. 111년 만에 최고의 더위를 기록한 때에 그 험한 용화산기도원을 올라갔으니 얼마나 더웠겠습니까? 기도원에 올라가서만 촬영을 한 것이 아니라 올라가는 길, 내려오는 길을 여러 번 찍었습니다. 게다가 올라갈 때 앞모습을 찍죠, 또 뒷모습을 찍죠, 심지어는 올라가는 발을 찍는다고 하지요, 그러니까 얼마나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 했겠습니까? 또 경관이 좋은 곳은 내려올 때도 다시 찍었으니 말이죠. 내려와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와이셔츠는 그만두고 넥타이까지 촉촉해져 버렸습니다. 저는 추위는 잘 참지만 더위는 정말 못 견디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군산사랑의교회와 남원까지 가서 대낮에 뙤약볕 아래서 촬영을 하는데 얼굴이 얼마나 새카맣게 익어 버렸겠습니까? 또 화순백암교회에 가서 촬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튿날도 촬영을 위하여 일찍 무등산제일기도원으로 갔습니다. 저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 정권사님을 부축하고 가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냥 가면 좋을 텐데 PD께서 정권사님이 먼저 앞장서서 가고 제가 다시 내려가서 뛰어 오면서 “권사님, 왜 이렇게 잘 가세요? 팔순 노인이 되어가지고 이렇게 빨리 가시면 돼요” 이렇게 정권사님께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달려가다가 갑자기 허리가 삐끗한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원으로 올라가는 길도 힘들었지만 촬영할 때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촬영을 마쳤으면 그 때라도 빨리 내려와서 치료를 받았어야 했는데 정권사님이 기도원에서 라면도 드시고 삶은 감자도 드시고 싶다고 하셔서 두 시간 가까이 앉아서 이야기를 하며 라면과 감자를 먹었습니다. 제가 그만큼 정권사님을 잘 섬긴다는 거겠죠. 정권사님께서 교회에서는 밥도 잘 못 드시고 감자를 삶아드려도 안 드시는데, 그곳에서는 드시고 싶다고 하니 권사님을 배려해 일부러 기다렸던 것이죠. 그런데 등받이 의자에 앉았다고 두시간 동안 기도원에서 내려오는데 허리가 장난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겨우겨우 내려와 광주 한의원에 가서 찜질도 하고 침도 맞으며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차를 타고 올라오는 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휴게소에서 화장실 가는 길도 김문기장로님의 부축을 받아야 할 정도였습니다. 차 안에서 생각해 보니, 이것은 장년수련회를 앞두고 은혜를 방해하려는 마귀의 시험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문득 2015년 장년여름수련회가 생각이 났습니다. 저는 그 때 수련회 기간 중에 갑자기 신장결석으로 통증이 찾아와 숨도 쉴 수 없는 고통과 싸워야 했습니다. 신장결석을 앓아본 사람들은 알지만 산모가 아이를 낳는 고통보다 크다는 것이 바로 신장결석의 통증입니다. 한 번 통증이 시작되면 허리가 끊어질 정도의 고통이 오고 숨도 못 쉬며 꼼짝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상황에서도 모르핀까지 맞으면서 육체의 한계와 고통을 초월해 집회를 인도했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몸이 불편하니까 저로서는 부족하고 아쉬운 마음이 가득했지만, 투혼의 몸부림으로 설교하는 제 모습에 성도들이 더 역설적인 은혜와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번에도 마귀가 어떻게든 은혜를 방해하고 못 받게 하려고 시험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간절하게 기도하였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은혜를 방해하고 시험을 주려는 모든 마귀의 역사는 물러가라.” 그러면서 침도 맞고 최선을 다해 치료를 받았습니다. 동시에 저는 이런 생각이 스쳐갔습니다. “허리를 다치니까 정말 꼼짝도 못하네. 아, 인간이 이렇게 나약하구나...” 그렇습니다. 우리가 두 발로 걸어 다닐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합니까? 허리가 썽썽하다는 게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데 간절히 기도하며 하룻밤을 자고 일어났더니 허리가 진짜 절반 가까이 좋아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유송근 장로님 친구인 이종덕 물리치료학박사님이 제 허리를 만져주자 거의 다 좋아졌습니다. 그래서 금요일부터는 조심스럽게 심방도 다닐 수 있었습니다. 정말 매일매일 사는 게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며, 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니 저도 마찬가지이지만, 우리 성도들이 장년여름수련회에 참석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은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아픈 게 일종의 선험적 수난이고 대표적 고난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년여름수련회에 행여라도 있을 수 있는 안전사고에 대비하여 제가 미리서 선험적이고 대표적인 고난을 체험했다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아니 그렇게 되기를 기도하며 오히려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 이번 수련회에 주실 은혜와 축복을 더욱 더 사모하며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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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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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목양 칼럼] 선험적 고난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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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목양 칼럼] 어느 안티 크리스천과의 대화
- 저에게 인간적인 유일한 행복의 시간이 있다면 산행을 하는 것입니다. 산은 저에게 있어서 항상 주님의 품속 이미지요, 제 영혼의 안식처로 형상화된 공간입니다. 그래서 산에 가면 저만 누릴 수 있는 영육간의 케렌시아를 만끽합니다. 아니, 새로운 세계로 떠나는 것 같고 몸과 마음이 정화되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1년에 한 두 차례라도 깊고 큰 산을 가보는 게 소원입니다. 장로님들과 함께 그런 산에 가노라면 목사와 장로 딱지를 떼어버리고 그저 동무가 되고 마냥 어린애가 되지요. 그러나 시간에 쫓겨 사느라 큰 산은 그만두고 불곡산 같은 곳에도 못 갑니다. 그저 겨우 이따금씩 교회 뒤편에 있는 야산을 가곤 합니다. 그것도 주로 일과가 다 끝나는 저녁에 갑니다. 그런데 하루는 오후 늦게 갈 수 있었습니다. 늦은 오후였지만 날씨가 정말 후덥지근하였습니다. 땀이 얼마나 흐르는지 눈으로 들어갔습니다. 제가 땀이 나면 눈으로 줄줄 흘러 들어가는 것을 우리 교인들은 다 아시잖아요. 그래서 중간에 벤치에 앉아서 좀 쉬었습니다. 그러자 동행한 비서들이 부채질을 해 주었습니다. 그러다가 잠깐 벤치에 누워 있었는데 갑자기 어떤 분이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누워 있는 사람, 소강석목사 맞지요” 그래서 제가 일어나서 “예 맞습니다”라고 했더니, “당신 이래도 되는 거야? 당신이 왕이야? 이 사람들도 똑같이 더울 텐데 왜 당신만 부채질을 받는 거야? 큰 교회 목사가 이래도 되는 거야” 제가 동물적 감각으로 “오늘 큰 물건 하나 만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아이구, 죄송합니다. 보시기에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랬더니 그래도 계속 반말을 하면서 대형교회 목사들을 싸잡아서 욕하는 것입니다. “나도 옛날에 교회를 다녔지만 목사 꼬라지, 교회의 부패한 모습이 보기 싫어서 안 다닌다”고 하는 것입니다. 갑자기 화가 나기도 했지만 죄송하다는 말로 끝날 문제가 아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어서 전략적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래서 저도 화를 버럭 내면서 “아니 죄송하다고 하면 됐지 선생님이 무슨 자격으로 그런 이야기를 하십니까? 뭐가 그렇게 불만이어서 시비를 걸어요? 죄송하다고 하면 알았다고 하고 가면 되지 왜 끝까지 시비를 거는 거요? 나하고 이야기 좀 합시다.” 그러면서 거의 반 강제로 벤치에 앉혔습니다. 그랬더니 계속 같은 말만 반복을 하는 것입니다. 안 되겠다 싶어서 “산에 올라가면서 이야기나 합시다”하면서 이야기를 쭉 했습니다. 제가 느끼기에 그 분은 정의감도 있고 선악에 대하여 경계선이 분명한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공익을 위한 의협심도 있는 것 같았습니다. 특히 이 시대의 부조리한 사회 모습과 불공평함에 분노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어떤 면에서 확증편향성을 갖고 있고, 분노조절장애가 있지 않나 하는 나름대로 감을 잡고 거기에 맞춰서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제 짐작이 어느 정도 맞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진심을 담아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산을 좋아하고 산에 오르면 동심의 세계에 온 것 같으며 오늘 같은 경우는 너무 땀이 나고 저혈당 증세도 온 것 같아서 쉬면서 부채질을 받고 있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저의 삶의 내면을 면면히 주고받았습니다. 그랬더니 이분이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연 것입니다. “사실 저도 한동안 H교회를 다녔습니다. 심지어는 새에덴교회도 몇 번 나가봤지요. 그래서 소목사님이 설교하는 모습에 박력도 있고 인간적으로 의리가 있고 남자다움의 성품을 가졌음을 느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내면의 이야기를 털어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려오는 길에는 서로 형님, 동생의 관계를 맺기로 하고 교회도 나오기로 했습니다. 그 분은 제가 대단한 호화주택에서 살고 차도 벤츠를 타고 다니며 호화판 삶을 사는 줄 알았다는 겁니다. 그러나 아직도 골프채 한 번 잡아 보지 못했다는 사실과 산 아래 주차 되어 있는 제 카니발 차를 보더니 그제야 하는 말이 “목사님도 이제는 골프 좀 치고 쉬시면서 사역을 하세요”라고 하면서 기회 되면 자기 사무실에 와서 기도도 해 달라는 것입니다. 돌아오는 길에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저는 그 분을 통하여 이 시대의 정말 괴짜 같은 ‘안티 크리스천’ 겸 ‘안나가 신자’의 내면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에게는 나름대로의 정의감과 개혁정신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반면에 교회와 목사에 대한 상처와 오해가 깊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도 인내하고 끝까지 소통하며 설득을 하면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목사와 교회를 이해하게 된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소통과 설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우쳤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사람이 다니는 산에서 앞으로 저는 공인으로서 절제되고 자제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글을 쓰는 지금도 그 형제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잠시 그 형제를 축복합니다. 아니, 이 시대의 모든 안티 크리스천 겸 ‘안나가 신자’들을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그들이 유목민으로서 배회를 멈추고 다시 하나님의 목장으로 돌아오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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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목양 칼럼] 어느 안티 크리스천과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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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연리지 교회
- 지지난 주에는 제주도에서 우리 교회 전반기 교역자 정책 수련회를 가졌습니다. 제주도의 바람과 구름과 하늘과 그 푸른 녹음의 풍경은 언제 보아도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저는 제주도의 바다도 좋아하지만 특별히 교래리 휴양림이나 한라산 생태숲길 같은 곳 걷기를 좋아합니다. 도심에서는 만나볼 수 없는 깊은 원시림을 걷다보면 고요 속의 고요를 듣고 신비 속의 신비를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부교역자들과 함께 교래리 휴양림뿐만 아니라 평지로 잘 조성해 놓은 비자림 휴양림을 걷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그곳에서 한 그루의 나무, 연리지(連理枝)를 보았습니다. 연리지는 뿌리가 다른 나무의 가지들이 서로 엉키고 붙어서 마치 한 그루의 나무처럼 자라는 것을 말합니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연리지를 실제로 보면서 저는 어쩌면 두 나무가 한 나무처럼 붙어서 저렇게 자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안내원에게 물어보았더니, “사람들도 서로 끌리는 사람이 있듯이 숲 속의 나무도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서로 밀어내고 싸워야 정상인데 나무가 저렇게 붙어 있는 것은 무언가 끌리는 힘과 연정과 생명애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고 웃으며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과학적 답변은 아니었지만 그 말을 들으니 연리지가 더 신비로운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사실 연리지는 비좁은 숲 속에서 서로 자라면서 바람에 부딪쳐 상처가 나기도 하고 그러다 또 비를 맞고 이슬을 맞고 햇빛을 맞으며 어느새 그 상처에서 새살이 돋아나 서로 붙어 한 몸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흔히 사람들은 연리지를 사랑나무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저는 한 그루의 연리지 앞에서 한국교회의 모습과 비교해 보았습니다. ‘연리지는 저렇게 서로를 사랑으로 부둥켜안고 한 몸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서로 싸우고 다투며 분열하고만 있을까. 우리도 한 그루의 연리지가 될 수는 없을까.’ 실제로 한 몸을 이룬 연리지는 태풍이나 벼락을 맞아 나뭇가지가 꺾이거나 쓰러져도 다른 반대편 나무에서 영양분을 공급 받아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합니다. 비록 나무이지만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을 담고 있는 모습일까요? 세계 교회사를 보아도 어느 시대이든 서로 싸우고 분열하는 교회는 망했고, 하나 되고 연합하는 교회는 흥했습니다. 만일 우리 교회도 다투고 싸웠더라면 오늘날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30주년을 맞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싸우는 것입니다. 아무리 일을 잘하고 봉사를 많이 하고 헌신을 많이 해도 싸우는 사람은 싫어합니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전도를 많이 한다 하더라도 상대를 증오하고 공격하며 충돌하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평생표어가 ‘사랑하며 섬기는 교회’ 아닙니까? 그런데 교회를 하나로 만들고 연리지 교회를 이루게 하는 것은 딱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띠로만 하나가 가능합니다. 교회는 오만가지 사람이 다 모이는 곳이 아닙니까? 개성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며 출신 지역이 다르고 빈부격차 등 모든 교인들의 구조는 천태만상입니다. 이런 천태만상의 사람들이 서로 자기하고 맞지 않는다고 얼마든지 싸우고 분열할 수 있잖아요. 더구나 교인들의 입이 몇 개입니까? 우리 교회 같은 경우는 수만 개의 입이 있는데 자기 소리를 한 마디씩만 하더라도 얼마나 많은 소리가 나겠습니까. 그럼에도 우리 교회는 정말 바보스러운 교회이고 역설적인 교회이며 공동체 교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연리지 교회를 이루고 있는 것이죠. 그것은 담임목사의 리더십이 출중해서도 아니고 장로님들과 집사님들이 훌륭해서도 아닙니다. 우리 교회 안에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과 생명, 하나님의 사랑을 한 띠로 묶어서 연리지처럼 되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런 마인드로 본다면 다투고 싸우고 분열하는 교회는 주님의 보혈의 능력과 생명의 역사가 없다는 방증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지 못하고 성령의 한 띠로 묶음당하지 못했다는 것이죠. 마귀는 항상 분열하는 자요, 거짓말 하는 자요, 이간질 하는 자요, 다투게 하는 자이지 않습니까? 싸우는 교회는 교회 안에 분열의 영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도 외 없이 주님의 보혈과 생명의 능력보다 인간의 정욕과 사욕이 앞서면 반드시 마귀가 틈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저는 더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요. 오로지 주님의 보혈과 생명과 하나님의 사랑과 섬김으로 성령의 한 띠가 되도록 기도할 뿐이죠. 제주 비자림에서 본 한 그루의 연리지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신비하고 경탄스럽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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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연리지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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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투혼의 추억
- 작년 이맘 때 저는 2차 성대 폴립수술을 받았습니다. 10여 년 전 1차 수술은 뭣 모르고 했지만 작년에 2차 수술은 신경이 좀 쓰였습니다. 비후성 심근증이 있는 사람은 전신마취 후에 최소한 호흡곤란이나 드물긴 하지만 심근경색이 올 수 있다고 경고를 받았기 때문이지요. 심장내과와 마취과 선생님이 몇 번이나 그 말을 하였으니 누가 태연할 수 있겠습니까? 아침 일찍 수술 대기실에서 잠시 기다리는 동안 지난날의 삶이 주마등처럼 떠올랐습니다. “아, 나는 누구보다도 성대를 많이 사용했어. 남들이 하는 주일 설교뿐만 아니라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집회를 했던가. 그리고 동굴 같이 답답한 차에서 얼마나 수많은 원고의 내용을 전화로 불러 줬던가. 게다가 외부집회, 특히 수만, 수십만 앞에서 화염을 내 뿜는 야성의 외침들이 내 목을 상하게 한 거야.” 이윽고 수술실로 들어갔습니다. 싸늘하고 음산한 공기가 수술실을 에워싸고 있었지요. 의사선생님의 경고 말씀이 문득 스쳐갔습니다. 그래서 잠시 주님께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주님, 저의 삶이 여기서 끝나지는 않겠지요. 만에 하나 그렇게 된다면 저의 가족들과 성도들이 얼마나 실망을 하겠습니까? 저 역시 아직은 준비가 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죽음이 절대로 두렵지는 않습니다. 주님이 오라고 하시면 미련없이 떠나겠지만요.” 저는 머릿속에 그 생각뿐이었습니다. 마취과 선생님이 저에게 주문을 하였습니다. “하나, 둘, 셋을 따라해 보세요.” 제 기억에 다섯, 여섯까지는 세었는데 그만 깊은 잠에 빠졌고 인공호흡기가 제 호흡을 대신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육신은 잠에 빠졌지만 제 의식은 살아서 잠꼬대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맞아, 나는 지금까지 주님의 소명에 혼을 바치고 산 거야. 매일매일 주님의 면전에서 절규의 산제사를 드리는 투혼의 삶을 살아왔던 거야. 맞아, 그랬어. 그랬던 거야.” 그 때 간호사 선생님이 저를 흔들어대며 깨웠습니다. 제 어깨를 때리며 야단을 쳤습니다. “소강석님, 소리 지르지 마세요. 숨을 쉬세요. 크게 쉬세요. 입을 다물고 말하지 마세요. 코로 숨을 쉬세요.” 마침내 잘 깨어난 것입니다. 감격의 순간이었습니다. 인공호흡기가 아니라 제 스스로 숨을 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격이고 경탄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새로웠고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눈부시게 느껴졌습니다. 병실 창문으로 보이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과 풀잎들이 신비하게 느껴졌고 살아서 숨을 쉬고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가를 새삼 깨달았습니다. 저는 3주 동안 침묵을 지켜야 했습니다. 한 주간은 기도원에서 있었고, 또 한 주간은 제주도에서 있었고, 또 한 주간은 일본 온천 지역으로 갔습니다. 제주도에서도 일본에서도 거의 숲 속을 다녔습니다. 3주 동안 숲속에서 모든 자연의 생명체와 대화를 하고 함께 호흡을 하였습니다. 갑바도기아의 교부였던 닛사의 그레고리가 청결한 마음을 가졌을 때 자연과 교감하게 될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말한 것처럼 숲속에서 제 마음은 더 깊은 숲속으로 향하였고 끝없는 원시림 속으로 향하였습니다. 그곳에서 고요 속의 고요를 듣고 신비 속의 신비를 느끼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마치 상처 입은 독수리가 바위 밑에서 웅크리고 있다가 회복한 후 다시 비상하듯이 그 숲속에서 모든 생명체와 대화하고 호흡을 하면서 투혼을 불태우고 있었습니다. 그런 후에 조심스럽게 주일설교를 시작했고 바로 이어서 여름수련회를 인도했습니다. 그리고 어언 1년을 맞이한 것입니다. 지난 1년을 돌아보니, 어떻게 살아 온지도 모르게 달려왔습니다. 마치, 진한 적토 빛 말갈기를 휘날리며 거친 광야를 달려가는 군마처럼 저는 주님을 태우고 달리고 달렸습니다. 황사를 나부끼며 주님을 모시고 달리고 달렸던 1년을 회상하니 아련하고 꿈 같기만 합니다. 아슬아슬하긴 하였지만 그래도 주님의 은혜로 쓰러지지도 않고 목이 그리 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 가 지난 주는 모든 것이 감사해서 중직자들을 모시고 식사를 대접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도무지 식사 한끼를 대접할 시간이 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든지 한 번의 기회를 만들어야 하겠지만요. 이번주는 교역자수련회를 하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이대로 얼마나 달려갈 수 있을까. 제 아무리 잘 달리는 군마도 언젠가는 쓰러지듯이 나 역시도 쓰러지는 날이 있겠지. 아니면 거침없이 달리다가도 어느덧 요단강 앞에 멈추게 될 거고... 그러나 그때까지 달리고 달릴 거야. 그러다가 언젠가 나의 영혼은 영원한 불사조가 되어 저 하늘나라로 훌훌 날아가겠지.” 지난 한주는 유달리도 숲이 그리웠습니다. 끝없는 원시림 속을 걷고 싶었습니다. 투혼의 추억이 그리웠기 때문이죠. 그래서 교래리 휴양림 숲길을 걸으며 주님께 또 속삭였지요. “주님, 지금은 여름입니다. 아직도 저는 젊습니다. 젊기에 여전히 정염의 불꽃이 되고 싶습니다. 가을이 오려면 아직도 멀었는데 지금 시들어서야 되겠습니까? 작년에 불태웠던 투혼의 불길이 더 타오르게 하소서. 여름은 저의 계절이고 싶습니다. 작년의 투혼은 추억이 아니라 오늘의 연속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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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투혼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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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광대 목회, 광대 설교 2
- 지난 주에 저의 목양칼럼 ‘광대 목회, 광대 설교’의 글이 네이버와 다음에 실렸는데 반향이 제법 컸다고 합니다. 많은 분들에게 신선한 충격이 되었지만 개중에는 비판하는 분도 있었다고 하지요. 비판의 골자는 설교자와 복음의 격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죠. 즉 약장수 같은 설교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백번 옳은 말이라고 여겼습니다. 왜냐면 광대 설교론을 잘못 이해하여 설교자가 청중들에게 엔터테인먼트나 하는 유사광대노릇을 할 수 있기 때문이죠. 광대 설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 설교자의 바보스러움과 역설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행동과 설교를 봐도 당시 정황에서 보면 바보스럽고 역설적일 때가 있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 역시 자신이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때 구경거리(광대)가 되었다고 했잖아요.(고전4:9-10) 두 번째 중요한 것은 성경 본문과 청중을 향한 애절함과 열정입니다. 억지로 청중을 웃기고 폭소를 자아내려고 하는 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설교가 개그콘서트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가수들도 대중적 소통과 감동을 위하여 청중을 향한 애절함과 예술적 투혼을 발휘하지 않습니까? 하물며 설교자는 시대와 소통하고 청중을 감동시키기 위하여 이런 애절함과 열정이 더 있어야 하겠지요. 바로 그 애틋한 열정과 신앙적 투혼으로 이 시대에 하나님의 마음과 아픔, 그리고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청중의 가슴에 울렁거리도록 전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세 번째는 필요에 따라 설교자의 자기 부인, 자기 비하가 필요합니다. 일부러 설교자가 바보가 되라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복음을 더 잘 드러내고 하나님의 마음을 더 잘 전달하기 위하여 자기 부인이나 비하를 통하여 하나님의 광대가 되자는 것이죠. 지금까지의 기존 설교학은 성경 본문 속에서 설교의 씨앗을 찾아내어 신학적 논리로 3대지 설교를 만들어왔습니다. 그리고 3대지의 메시지를 잘 전달하기 위해 본문과 적절히 연결되는 예화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다가 조금 발전한 설교가 ‘스토리텔링’이었습니다. 80년대 이후에 생겨난 미국의 새로운 교회, 곧 커뮤니티 처치는 대부분이 스토리텔링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미국의 설교학자 스콧 깁스의 표현대로 교회 공동체성이 상실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남아공의 스텔른보쉬대학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광대 설교이론이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에 의하면 광대 설교를 하게 되면 몇 가지 결과가 나타난다고 하는데요, 첫째는 바보스러운 교회 공동체, 둘째는 역설적 교회 공동체, 셋째는 교회의 공공성과 공동체성이어야 한다고 하죠. 이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교회 모습이기도 합니다. 물론 설교자가 광대가 되지 않고 설교자의 격을 높이며 설교 전달 방법 역시 아주 중후하고 격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게 하면서도 교회가 바보스러운 공동체를 이루고 역설적 공동체를 이루며 공공성과 공동체성을 회복할 수 있다면 말이죠. 그러나 지금 한국교회는 설교자의 격이 정형화되고 고품격 콘텐츠의 메시지가 전달이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교인들은 영악하고 똑똑해 지는 걸까요? 왜 그토록 자기 선악의 논리와 윤리적 기준으로만 판단하며, 서로 증오하고 다투며 분열을 반복하고 있는 걸까요? 지금 한국교회는 과연 공동체 회복과 공공성의 교회를 세우고 있습니까? 서로 힘을 모아 교회 생태계를 지키려고 킹덤처치를 세우고 있는가요? 광대 설교론이란 절대로 엔터테인먼트나 각설이 타령식의 속화적 설교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복음과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더 드러내고 시대와 청중을 향해 대중적 소통을 하기 위해서 애절함의 혼을 가지고 때때로 바보스러움과 역설적 자기비하를 하자는 것이죠. 그러면 진정한 광대 설교와 짝퉁 광대 설교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간단합니다. 청중을 울리건 웃기건 간에 그 목적이 하나님께 유익이 되고 영광이 되며, 동시에 청중의 가슴에 울먹이는 감동을 주기 위함에 있다면 진정한 광대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자의 자기 유익과 인기를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은 사이비 광대 설교요, 짝퉁 광대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우리 교회는 철저하게 바보스러운 공동체를 이루어 왔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가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12년째를 해 왔잖아요. 더구나 우리 교회 부흥과는 전혀 관계도 없는 한국교회 생태계 보호를 위한 사역을 변함없이 해 왔지요. 이런 바보스러운 공동체를 이루지 않았더라면 저는 진작 우리 교회에서 쫓겨나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성도들의 바보스러움 때문에 우리 교회는 여전히 역설적 공동체를 이루고 있고 사나 죽으나 전도와 기도, 사명 밖에 모르는 젊은 교회로 매주 다시 태어나고 있습니다. 또한 공공성과 공동체성을 발휘하여 묵묵히 한국교회를 섬기며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결코 설교자의 격을 운운하다가 청중에게 전혀 감동을 주지 못하는 고지식한 설교자보다는 복음과 하나님의 사랑으로 시대와 소통하며 청중에게 울먹임과 감동을 주는 진정한 하나님의 광대가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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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광대 목회, 광대 설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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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목양 칼럼] 광대 목회, 광대 설교
- 지난주 수요일 저녁예배 후에 총신대 신대원 김덕현 교수님으로부터 우리 부교역자들과 함께 ‘광대 설교론’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설교는 명제적이고 선포적이며 가르치는 설교였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주제설교, 대지설교, 강해설교가 중심을 이루었습니다. 최근에 와서 스토리 설교와 내러티브 설교로 발전 하였지만, 좀 더 역설적이고 화행적 설교는 ‘광대 설교’라는 것입니다. 광대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설교자가 먼저 어리석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수사학이나 변증학은 아름다운 언어, 논리, 지혜, 웅변 등을 중요시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사도바울은 전혀 그런 기법을 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역설적이고 어리석은 이야기를 많이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팔복 설교도 당시는 힘과 정복을 통해서 땅을 차지하는 것이지 어떻게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할 수 있습니까? 고린도전서1장에 나타난 바울의 설교 역시 설교자의 바보스러움을 말하는 것이며 십자가를 선포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것이고 미련함의 극치였다는 것입니다. 광대가 무엇입니까? 광대는 시대의 아픔과 한, 정서를 마음에 담아 말과 음악과 춤 등을 통해서 인생의 희로애락을 전하며 마음을 치유하고 힘과 용기를 주는 존재가 아닙니까? 그러므로 광대 설교자는 본문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광대적 감성으로 전하는 것입니다. 본문이 웃기면 웃기는 것이고, 본문이 슬프면 슬프게 전달하고, 본문이 진지하면 진지하게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설교자가 먼저 자기비하와 자기부인을 해야 합니다. 점잖아 가지고 어떻게 광대 설교를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지금까지 기존의 설교학은 목회자의 고상함과 우아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품격과 본문의 메시지를 드러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설교가 정형화, 제도화, 화석화 되다 보니까 설교자만 드러나고 진정한 하나님의 복음이 드러나지 않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광대 설교는 때로 설교자가 망가지고 품격이 떨어지더라도 하나님의 마음, 숨겨져 있는 감정이 설교자를 통해서 청중들에게 전달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설교자에겐 전령, 목양자, 스토리텔러, 그리고 증인의 이미지와 역할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마음과 아픔, 사랑과 기쁨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그 본문의 사건과 이야기가 설교자의 감성을 호흡하게 하고 파도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호흡과 파도를 통하여 역설적 복음과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설교자가 철저하게 하나님의 광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맨 먼저 광대 설교론을 쓴 분이 김덕현 교수님의 스승이신 요한 H. 실리에 교수님입니다. 저는 몇 년 전 그 분이 쓴 ‘하나님의 어릿광대’라는 책을 읽으면서 어렴풋이 “나는 철저하게 광대 목회자요, 광대 설교자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생태적으로 광대의 끼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입니다. 게다가 맨땅, 맨몸, 맨손으로 개척한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이 환경적으로 광대 목회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개척할 때 오신 분들은 대부분 상처와 아픔이 많고 낮은 자존감을 갖고 있어서 위로와 힐링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광대 사역을 하게 된 것입니다. 교인 집에 심방을 가도 그들의 아픔을 가슴으로 함께 느끼며 광대적 기도를 해 주었고, 복음을 역설적으로 전하며 반전의 꿈을 심어 주었습니다. 또한 설교 할 때도 이중시점을 사용하면서 본문의 절정을 극화시키기 위해 중간 중간에 찬양을 하고 필요할 때는 대중가요도 개사하여 부를 때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김덕현 교수님에 의하면 본문만 확실하게 잘 드러내고 절정을 극화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언어를 쓰거나 노래를 부르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설교의 기준이나 잣대가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말입니다. 사실 제 설교가 방송으로 나가면서 많은 비판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목회자들이 저의 광대적 설교 스타일을 따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광대설교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제 설교를 이론적이고 신학적으로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책이 나왔고 지지하는 교수님이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저는 광대 설교론을 잘 발전시켜서 정말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내고 복음을 역설적으로 전달하며 수천 년 전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의 언어와 혼과 노래로 전달하는 광대 설교자의 모델이 되어갈 것을 다짐했습니다. 김덕현 교수님을 알게 된 것이 참 감사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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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목양 칼럼] 광대 목회, 광대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