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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목양 칼럼] 낯설고 어색한 은혜
    부총회장 단독 후보 등록을 한지가 엊그제 같은데 시간이 흘러 정견발표를 하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경쟁후보가 있으면 간절함이 가득하고 더 긴장할 텐데 저는 긴장대신 어색하고 낯설기만 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한 번도 그런 정견발표 하는 자리에 가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상대 후보도 없고 단독 후보의 신분으로 처음으로 정견발표에 임하였으니 얼마나 낯설고 어색한 자리이겠습니까? 그래도 시간에 맞춰 강남에 있는 충현교회로 갔습니다. 맨 먼저 총회장 후보께서 정견발표를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형식이죠. 작년에 이미 부총회장 당선이 되어 올해는 자동적으로 총회장이 되지만 법적 과정과 절차에 의해서 정견발표를 하는 것입니다. 총회장 후보께서도 작년에 정견발표 하실 때는 간절함과 열정이 가득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작년 정견발표의 내용을 조금 정리하거나 보완해 발표를 하신 것 같았습니다. 총회장이 되실 분이 평범한 어조로 발표하시니까 저도 오버 할 수는 없지요. 그래서 저도 평범한 어조로 발표 했습니다. 그런데 다음에 하는 부서기나 부회계 등 경쟁 상대가 있는 분들은 얼마나 준비를 많이 해 오고 간절하게 발표하는지 몸에 전율이 느껴졌습니다. 영상준비까지 다 해 와 가지고 정견발표를 돋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다음번에는 영상준비를 잘 해올까 하는데 몇몇 목사님들이 절대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총회장 후보도 그렇게 하지 않는데, 단독 부총회장이 너무 앞서가서도 안 된다고 말입니다. 다음날 대구로 내려갔습니다. 내용이 대동소이하기 때문에 대구에서는 유창하게 잘 할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버벅 거려지는 것입니다. 그만큼 아직도 그 자리가 낯설고 어색한 자리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다른 임원 후보들은 다 총회 내부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정견발표를 하는데 저의 정견발표는 우리 교단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를 세우기 위한 정견발표였습니다. 그만큼 우리 교단과 한국교회를 보는 저의 시야와 마인드가 넓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곧 총회장이 되실 목사님께 부탁을 드렸습니다. “대전에서 마지막으로 발표하실 때는 목사님도 열변을 토하시죠. 그러면 저도 한 번 실력 발휘 좀 해 보겠습니다.” 저는 이 정견발표 때문에 북유럽 교회 그랜드 투어도 하루 늦게 가야 했습니다. 대신 이번 마지막 정견발표는 마음을 가다듬었습니다. 어색하고 불편한 자리라고 생각하지 않고 이제는 저의 간절함과 진정성을 스피치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사실 마지막 정견발표를 하는 대전중앙교회는 15년 전 개혁측과 합동측이 하나가 되었던 장소입니다. 저는 원래는 합동을 반대 했습니다. 여러 가지 정치적인 유언비어를 듣고 말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정 권사님이 합동을 하라는 응답을 받았고, 저도 이를 놓고 금식하며 기도하다 성령님의 강렬한 감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합동의 기치를 들고 왔을 때 중부권의 머뭇거렸던 1500교회가 다 함께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 합동 총대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의 박수를 받으며 총회 현장으로 들어갈 때 “아, 이제야 우리가 하나가 되는구나”하는 감격에 눈물을 흘러내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때의 감격과 눈물을 회상하며 그 자리에 섰습니다. 그랬을 때 비교적 어색하지 않고 저의 가슴 속에서 우러나오는 에토스가 담긴 정견발표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합동 교단에 들어오고 나서 한 번도 정치 노선에 서 본 적도 없고 정치현장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상비부 가운데도 정치부, 고시부 등에 가 본적이 없습니다. 오로지 총회를 섬겼고 한국교회를 섬겼습니다. 그러자 안팎에서 “합동교단은 소 목사를 써 먹고 버릴 것이다. 그러니 너무 희생하지 말라”는 조언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과는 달리 우리 교단은 저를 수용해 주고 품어주셨습니다. 아니 저를 단독 부총회장 후보의 자리에 세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생각해보니 그 자리가 낯설고 어색한 자리였지만 우리 교단 목사님과 장로님들이 만들어주신 포근한 자리요 하나님이 섭리해주신 은혜의 자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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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09-15
  • [소강석 목사의 목양 칼럼] 그때의 눈물 지금도 주소서 2
    추석만 돌아오면 가슴이 시리고 저리도록 잊을 수 없는 하나의 추억이 떠오르곤 합니다. 화순 백암교회 개척 중 처음으로 그곳에서 추석을 맞이했습니다. 그때 마을 청년들이 남루한 개척교회에 찾아와 콩쿠르대회를 하는데 기부금을 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먹을 양식도 떨어져 라면으로 연명을 하고 있는 처지였기 때문에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기가 막혔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기죽기는 싫어서 은행 통장에 돈이 있는데 오늘 시내 나가서 돈을 찾아와 내일 줄 터이니 내일 오라고 말해버렸습니다. 당장의 체면 유지는 했지만 그들을 보내놓고 나서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내일 무슨 돈으로 체면치레를 해야 할까? 쌀이 없어서 밥 못 먹는 것도 서러운 일인데 교회 전도사가 허풍을 쳤다고 소문날 것을 생각하니 정신이 아찔하기까지 했습니다. 얼마나 저 자신이 초라하고 비참하게 느껴지는지요. 그래서 천막교회 속에 들어가 그냥 맹목적으로 엎드렸습니다. 이 어린 나이에 시골 벽촌에 와서 복음을 전하다가 무슨 꼴을 당하고 있느냐고 하는 기막힌 생각이 들어 막 울어대기만 했습니다. 무슨 눈물이 그렇게도 펑펑 쏟아지는지 아마도 서러운 인생의 눈물보가 제대로 터져버린 모양이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무작정 광주시내로 나갔습니다. 누가 오란 곳도 없고 약속한 곳도 없었지만 그냥 무작정 거리를 두리번거리며 다녔습니다. 남들은 선물 꾸러미를 사들고 무엇이 그리도 기뻐서 저렇게 들뜬 분위기에 있는지.... 정말 그들의 모습이 부럽기만 했습니다. 점심때가 이르니 배가 고프기 시작했습니다. 다리도 아프고 피곤해 잠시 금남로에 있는 모 은행에 들어가 지친 몸을 잠시 맡겼습니다. 무슨 돈이 그렇게 많은지 저마다 통장에서 돈을 찾아 가는 모습들이 정말 부럽기만 했습니다. “주여! 천국 은행의 내 통장엔 얼마나 들어 있습니까?” 이런 마음의 기도가 다시 한 번 저 자신을 초라하게 보이게 하였고 제 눈에 눈물을 핑 돌게 하였습니다. 은행에 너무 오래 앉아 있으니 눈치가 보여 다시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때 제 마음과 발걸음은 성령의 분명한 이끌림으로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곳이 제가 잘 아는 류중룡 장로님의 세무사 사무실이었습니다. 그 곳에 이르자마자 애써 태연한척 체면을 유지하려고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그 장로님이 저를 보시자마자 상당히 두툼한 봉투를 하나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하게 어제 저녁부터 괜히 소전도사가 생각이 나 자꾸 염려되는 마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봉투를 하나 준비해 놓고 오전 내내 오기를 기다리셨는데 마침 제가 찾아 왔다는 것입니다. 만일 오후에도 제가 안 오면 저에게 연락할 참이었다니... 그 말을 듣고 그 두툼한 돈 봉투를 보는 순간 감당할 수 없는 눈물보가 터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자존심이 강하여 다른 사람 앞에 약한 모습 보이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저였지만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사무실을 나와 교회까지 오면서 버스 안에서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창고교회의 강대상 앞에 엎드려 바닥에 눈물을 쏟아 흘렸습니다. 그런 후에야 당장 마을 청년들을 오라고 해서 당당하게 기부금을 건네주었지요. 이튿날에는 능주시장에 가서 그 눈물 어린 돈으로 선물을 잔뜩 사 가지고 와서 교인들에게 모조리 나누어 주었습니다. 추석이 오는 길목에서 오늘도 다시금 그 때의 눈물이 생각납니다. 이번 추석에도 대통령 선물이 왔는데 매년 그렇게 해왔듯이 그 선물을 류중룡 장로님께 보내 드렸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그 때의 눈물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 처절했던 눈물의 힘이 앞으로도 저를 강하게 하고 더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여! 제 평생에 그 때의 눈물을 잊지 않게 하소서. 배가 부르고 아무런 부족함이 없을 때에도 그때의 눈물이 마르지 않게 하소서. 이 눈물이 메마를 때 저의 영성과 제 목회의 불빛이 꺼지고야 말기 때문입니다. 주여! 우리 교회가 더 부흥하고 총회와 한국교회를 섬길 때에도 이러한 눈물로 사역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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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09-15
  • [소강석 목사의 목양 칼럼] 여름 모닥불 향기를 훔치다
    속리산 비로산장에서의 하룻밤을 앞두고 가슴이 설렜습니다. 초등학교시절 소풍가는 날을 앞둔 마음과도 같았습니다. 국립공원에 계시는 우리 교회 안수집사님의 소개로 비로산장을 알게 되었는데 그곳은 걸어서 한 시간 반을 가야하는 아주 깊숙한 산장이었습니다. 저는 몇 분 장로님들과 함께 먹을 것을 싸들고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갔습니다. 마침내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입이 쫙 벌어졌습니다. 아바타에 나오는 숲과 같은 신비로움, 아니 신성함마저 느끼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산장 주인의 말을 들어보니 아버지가 온갖 고생을 하시며 혼자 산장을 다 지었다는 것입니다. 주인과 나그네가 숲의 향기를 즐기고 그 추억을 공유하며 추억을 다음 대로 이어가게 하도록 하는 아름다운 동기를 가지고 말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이어서 따님이 산장을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산장의 마당에서 몇몇 장로님들과 함께 고기를 구워먹고 이야기 천국을 이루었습니다. 큰 나무가 하늘을 가려줘서 낮에는 천장 같은 그늘이 되어 주었고 저녁에는 촘촘한 잎사귀들에 가려 별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주인이 피워준 모닥불 연기는 자연스레 어린 시절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산장에 모기도 없었지만 과거 여름밤의 운치를 자아내주기 위하여 모닥불을 피워준 것입니다. 모닥불과 여름 숲의 향기가 원시적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그런 향기를 맡으며 이야기를 하니 동심천국이 될 수밖에요. 삶의 역질주를 한 재앙을 경험한 셈입니다. 그런 원시림 속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반역을 빼놓고는 어떠한 말이나 행동도 죄가 아닐 정도로 순수함 그 자체로 느껴졌습니다. 해지기 전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새벽 2시가 되고 3시가 되어도 ‘모닥불’이라는 노래처럼 끝이 없었습니다. 저는 이야기를 하는 중에 여름 숲과 모닥불의 향기를 몰래 몰래 가슴 속에 훔쳐 넣었습니다. 앞만 보고 숨 가쁘게 달려왔기 때문에 저 자신에게도 삶의 갈증이 있었나 봅니다. 아니 삶의 근원과 원형을 향한 갈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잠자리에 누웠을 때는 유곡수성(幽谷水聲), 즉 깊은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가 고막을 씻겨주는 듯 했습니다. 또한 아직도 꺼지지 않은 모닥불 연기와 숲의 향기는 저의 영혼을 씻겨 주었고요. 아니 웬 축복인지 비까지 내렸습니다. 태어나 이제껏 살아오면서 이런 깊은 산장에서 빗소리를 듣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속리(俗離)의 은혜였습니다. 속리산이란, ‘마을과 세속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아름다운 산’이라는 뜻입니다. 회색빛 콘크리트 도시에서 분주한 삶을 살 뿐만 아니라, 때로는 광장에 가서 검을 휘두르는 검투사 같은 삶을 살아왔던 저는 속리산 같은 깊은 산을 그리워 할 수밖에요. 그래서 깊은 산은 저의 영혼의 근원, 혹은 주님의 품의 이미지로 형상화되어 있습니다. 며칠 밤을 더 보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아니 문정희 시인의 ‘한계령 연가’에 나오는 구절처럼 저 역시 속리산 숲속에서 폭우가 내리거나 긴급한 조난을 당하여 내려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어왔습니다. 간절한 속리산 연가를 불렀던 것이죠. 그러나 저는 다음날 내려와야 했습니다. 내려올 때 여주인이 배웅을 나오는데 선광현 목사님이 주인을 위해 기도해드리면 좋지 않겠느냐 해서 산길에서 기도를 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기도가 끝나고 나니 주인께서 울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이곳에 오셔서 기도해주신 것은 생전 처음이라면서 말입니다. 어린 시절 그곳에 태어나 자랐고 또 아버지의 유훈을 따라 그곳을 지키며 떠날 수 없는 그 무엇 때문에 눈물을 흘렸을지... 그런 곳에 살면서도 더 깊은 삶의 갈증이나 그리움이 있기 때문일는지... 그것도 아니면 내 기도 속에 숲과 모닥불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예수님의 향기가 그 분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했는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산장을 내려왔지만 마음의 발걸음은 산장으로 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저녁 내내 훔쳐 온 숲의 향기와 여름밤의 모닥불 향기가 제 마음에 남아 이런 깨달음을 주는 듯 했습니다. ‘너도 새에덴의 성도들과 함께 신앙의 추억을 공유하고 그 추억으로 대를 이어가게 하거라. 앞으로 총회와 한국교회에 순수의 시대를 열어 가거라. 아침이 되어 모닥불이 사그라진 것처럼 언젠가는 네 인생의 모닥불도 사그라지리니, 그때까지 주어진 사명의 길을 잘 달려가거라. 그리고 여름 숲 향기와 모닥불 연기보다 더 진한 예향(예수님의 향기)을 만리까지 전해야 하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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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09-02
  • [소강석 목사의 목양 칼럼] 눈물에 젖어야 설교가 빛난다
    저는 지난 주 대구에서 ‘하나되게 하소서’ 집회를 다녀왔습니다. 그 집회는 대구지역 초교파 여성 집회인데 매년 3천명 이상이 모이는 대집회입니다. 제가 몇 년 전에도 집회를 인도한 적이 있는데, 이번 집회는 성경강해적 설교가 아니라 시대를 깨우며 미래 한국교회를 세우기 위한 영적 각성 설교를 하려고 했습니다. 울고 있는 여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반으로 우리 자녀들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해 울어야 한다고 호소하였습니다. 그런데 가서 보니까 김부겸 전 행안부장관이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교회 생태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 분이 과거 국회의원 시절과 장관시절에 종교인과세나 동성애 문제에 대해 도와준 것을 칭찬하고 앞으로도 한국교회 생태계를 잘 지켜줄 것을 공개적으로 부탁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집회가 끝나고 나니까 저에게 항의를 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동성애를 찬성하는 분이었는데 왜 반대로 설명을 했냐고요. 그러나 이 분들이 잘 모르고 오해를 하고 계셨습니다. 사실 김 전 장관은 2017년도에 보좌관의 실수로 ‘혐오차별금지법’을 발의한 부분이 있었는데 저 뿐만 아니라 대구지역 교계의 항의를 받고 바로 철회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 발의를 계속 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들에게 철회한 기사까지 찾아서 잘 설명을 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저녁집회에 올라가려고 하니까 주최측에서 “오늘 저녁에는 그 말씀을 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강단에 올라가니까 또 제 마음에 성령의 감동이 와서 더 적극적으로 시대 각성의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중국의 온주가 어떻게 다음 세대를 지켰는가를 이야기하고 영국과 미국교회가 어떻게 반기독교 세력의 사상전, 문화전의 공격에 넘어갔는가를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국교회 생태계를 잘 지켜내기 위해서 기독교 정치인들을 키울 뿐만 아니라 때로는 설득을 하고 격려를 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김 전 장관에 대한 언급을 다시 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너무 편협한 생각이나 프레임에 갇히지 말고 한국교회의 미래와 건강한 사회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부터 울어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실제로 뜨거운 눈물이 제 가슴과 눈동자를 촉촉이 적시며 저의 에토스(진정성)를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항의를 했던 분들도 감동을 받고 저에게 “목사님, 정말 잘 하셨습니다. 이제 이해가 되었습니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젊은 시절 저는 참 많이 울었습니다. 불신 가정에서 쫓겨나 겨울 눈보라 속을 걸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습니다. 가난한 신학생이라 양복이 없어 설교를 할 수 없을 때도 예배실 바닥에 엎드려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서울에 올라와 가락동에서 개척을 한 후에도 토요일이면 설교연습을 했습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억센 전라도 사투리가 고쳐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 원고를 교정하고 네다섯 번 이상 강단에 서서 음독으로 연습했습니다. 내일 누가 올지도 모르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눈물을 흘리며 설교연습을 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전도지를 들고 동네를 누비며 눈물로 전도하고 다녔습니다. 그때는 사람이 너무나 그리웠습니다. 오죽하면 토요일 저녁에 빈 의자를 붙잡고 하염없이 울면서 기도를 하였겠습니까? “주님, 이 빈 의자에 내일 사람을 앉혀 주세요. 지나가는 거지가 되었든, 넝마주이가 되었든 사람을 앉혀 주세요.” 그 눈물은 결코 비관과 절망의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그 눈물은 도전과 희망의 눈물이었으며 제 영혼을 살리는 꽃씨가 되고, 영혼을 사르는 불덩이가 되었습니다. 아니, 이 땅의 불덩이를 넘어 절망과 어둠의 밤을 밝히는 꿈의 별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인생을 쉽게 포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그런데 그 못지않게 마음 아픈 것이 있습니다. 너무나 편협한 사고에 갇혀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편협한 사람들을 보면 또 눈물이 나지요. 그렇지만 우리 모두가 아프고 편협한 시대를 위해 울고, 미래의 역사를 바라보며 울고 또 운다면 한국교회와 건강한 사회를 지키는 한 줄기 희망의 등불을 밝힐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저 역시 매주 눈물을 담아 설교를 준비하고 눈물의 에토스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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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08-25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기억의 강을 걷다
    자박자박 빗소리를 따라 잠시 오크밸리 교회 쪽으로 길을 걸었습니다. 수련회 이튿날, 아침부터 내리는 비였지만 왠지 언짢지는 않았습니다. 아마 빗속에서 버스도 달리고 기차도 달리며 KTX도 비 사이를 헤쳐 달리고 있을 것입니다. 어린 시절에 비가 오면 저는 까닭 없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비가 오면 비 구경을 하느라 집 밖으로 나갔습니다. 지금은 드라이를 한 머리 때문에 우산을 쓰고 빗길을 걸어야 하지만요. 지난 주간엔가도 혼자 LG자이 뒷산을 쏟아지는 빗속에서 우중산책을 한 적이 있습니다. 비를 맞으며 길을 걷노라면 저는 항상 기억의 강을 건넙니다. 이번에는 가락동 개척 교회 시절 강원도 하진부에서 있었던 여름수련회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토록 개를 잡거나 소주를 마시는 일이 없도록 신신당부하였건만, 남전도회 회원들이 결국 사고를 치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지혜롭게 준비를 했느냐면, 개고기 상에 소주를 사이다병에 넣어 놓고 마시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만 현재는 장로인 김창환 집사님이 저에게 사이다를 따라 준다는 게 모르고 소주를 따라 주어서 들통이 난 것이죠. 젊은 혈기에 제가 어떻게 발끈하였겠습니까? 그러자 그날 밤, 김창환 집사님은 술을 곤드레만드레 마시고 저에게 와서 온갖 추태를 부리며 항의를 하였습니다. 결국은 옥수수밭으로 가서 말할 수 없는 해프닝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과거 새에덴교회 여름수련회는 그런 아픔도 있었습니다. 지나온 길마다 엉겅퀴와 찔레덩굴이 저의 두 발과 다리를 얼마나 찔러 상하게 하였는지 모르죠. 그런 엉겅퀴와 찔레숲을 지나 오늘의 장년여름수련회라는 화려한 꽃밭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의 장년여름수련회는 규모와 은혜의 질적 차원에서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전한 것입니다. 특별히 이번 수련회는 ‘영에 속한 사람이 되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하는데, 제가 봐도 대단한 수련회였습니다. 매일 시간마다 자리가 없어서 의자를 더 가져다가 배치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회비만 가지고는 운영이 불가능한데 성도들이 풍성한 헌금도 해주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외부에서 온 몇몇 분들도 수련회의 규모와 영적 분위기를 보고 감탄에 감탄을 하였습니다. 이제 우리 새에덴교회 장년여름수련회는 우리 교회 전통과 문화로 자리매김 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수련회 문화의 모델로 제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니, 다음의 교회세대에 물려줄 거룩한 유산이 되어줄 것입니다. 목요일 오후, 저는 손녀 현주와 함께 그 길을 다시 걸었습니다. 화요일 오전은 비에 젖은 꽃잎들이 슬퍼하는 모습처럼 보였는데, 목요일 오후는 환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꽃잎들이 이렇게 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도 오늘의 이 아름다운 자태로 피어나기까지는 목마른 고통도 이겨야 했고, 비바람에 흔들리는 아픔도 견뎌내야 했습니다.” 우리 교회 장년여름수련회가 그랬지요. 지금은 김종대 장로님을 비롯하여 200명의 준비위원들과 100여명의 교역자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고 빈틈없이 준비를 하고 있지만, 옛날 여름수련회는 제가 다 북 치고 장구를 쳐야 했습니다. 저렇게 화려하게 피어난 꽃잎들도 아픈 기억이 있고 슬픈 추억이 담겨져 있는 것처럼, 오늘의 장엄하고 은혜가 넘치는 장년여름수련회에도 찔레와 엉겅퀴의 가시들로 찢겨진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렇고 보면 아픈 기억과 화려한 축제 사이의 경계는 성난 바다처럼 거칠고 드넓은 것 같습니다. 그 날 비가 오는데도 매미 한 마리가 울었습니다. 지금도 그 매미 소리는 저의 귓전에 이런 메시지를 던져 주는 듯 합니다. “성을 쌓는 자는 반드시 망하리라, 성을 쌓으면 정녕 망하리라...” 이 말은 징기스칸이 한 말이죠. 징기스칸이 가는 곳마다 성을 쌓고 진지를 구축했다면 어찌 그 넓은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겠습니까 저 역시 여기서 안주하면 안 되지요. 끝없는 도전과 응전 속에서 더 나은 수련회, 더 감동적이고 은혜로운 수련회가 되도록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 성이 아닌 하나님의 성을 쌓고 세상을 바꾸는 홀리 체인저가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저는 이따금씩 비가 올 때 마다 기억의 강을 걸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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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08-12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불면, 도전과 응전의 밤
    지난 월요일 저녁은 1시 반 가까이에 잠이 든 것 같은데 3시 반에 잠이 깨버렸습니다. 아무리 다시 잠을 자려고 해도 이 생각, 저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중요한 약속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성경을 보다 새벽기도를 인도하러 나갔습니다. 다음날, 그 다음날도 비슷했습니다. 요즘은 이런 일이 다반사입니다. 생각해보면 저는 어릴 때부터 불면의 밤을 많이 경험하였습니다. 소풍 가기 전날 밤 너무 가슴이 설레어 잠 못 이루었고, 글짓기 대회나 웅변대회를 앞두고도 밤새 뒤척이곤 하였지요. 또 여름밤엔 유난히도 은은한 달빛에 마음을 빼앗겨 가슴 설레는 밤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마당에 있는 평상에 누워서 별빛까지도 유난히 반짝이던 밤에, 지붕에 덮인 하얀 박꽃이 그 빛들을 되받아내고 있는 정경을 보며 상념에 잠겼지요. 신학교 시절에는 기도원에서 철야기도를 하느라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저녁 내내 밤이슬을 맞으며 무릎 꿇고 기도하다가 마침내 안개 자욱한 기이한 아침을 맞이하기도 하였습니다. 온 무등산을 운해로 만들어버린 그 서정적이고 영적인 풍광 앞에 저는 내달리는 영혼의 감성을 발현하며 더 목청껏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저의 영적 갈망이 안개 덮인 무등산에서 더 강렬하게 발휘된 것입니다. 세월은 저를 무드셀라 증후군의 기억 속에 가둔 채 그렇게 흐르고 흘렀습니다. 돌이켜 보면 어릴 땐 저의 서정성 때문에 불면의 밤을 경험했고, 젊은 시절에는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갈망 때문에 밤을 많이 새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한국교회 현실을 생각할 때마다 잠을 못 이룹니다. 제가 한국교회 연합과 생태계 복원, 그리고 부흥운동을 강조하지만 사실은 그 이전에 회개운동과 개혁운동이 선행돼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여전히 혼돈과 공허의 블랙홀에 빠져가고 있습니다. 정치, 문화, 사회에서는 기독교 패싱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이 맴돌 때는 저는 잠을 못 이룹니다. “아, 왜 이 시대에 나는 목회를 하고 있는 걸까? 더구나 이 시대 한국교회 지도자로 부름을 받고 있단 말인가? 그냥 성장주의적 개교회 목회에 심취할 때가 행복했었는데...” 물론 저는 불면증 환자는 아닙니다. 모처럼 교회를 떠나 다른 곳으로 여행할 때는 꿀잠에 빠지거든요. 아니, 해외에 나가면 완전히 꿈나라로 떨어져 버립니다. 그러나 한국교회 현실을 바라보면 불면과 싸워야 한단 말이죠. 다행스럽게도 저는 총회 선거에 단독후보로 출마를 하게 되어 선거운동에 관한 한 마음의 여유가 있는 상황이죠. 그렇지만 교계 현실을 바라보면 마음이 심란하기만 합니다. 아무리 기도하고 뛰어도 별로 이루어진 일도 없고 허탈감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 한켠에서는 제가 부총회장과 총회장이 되어 총회와 한국교회를 섬기게 되면 뭔가 달라질지 모른다는 기대를 해 봅니다. 아니 어쩌면 이러한 난세에 하나님께서 저를 필요로 하셔서 공적 직분을 주시고 그 공적 직분을 통하여 우리 교단과 한국교회를 세우실 것이라는 장밋빛 희망도 가져봅니다. 그런 설렘 때문에 잠 못이루는 밤을 지낼 때도 있습니다. 저는 요즘 선거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교단을 개혁하고 한국교회를 세울 수 있는가를 위해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치적인 목적을 위하여 만나게 되면 그것이 빈 무덤을 쌓는 허망한 만남이 될 수 있지만 진심과 진정성을 가지고 사람을 만나면 서로가 시린 가슴을 감싸주고 교회까지 세우게 된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습니다. 어떤 만남은 서로의 아픈 감정을 주체하기가 힘들 정도로 가슴이 뭉클하기도 합니다. 그런 아픔 속에서 신뢰와 존경과 사랑의 싹이 트기도 하구요. 그런 의미에서 다시 생각해보면, 그 불면의 밤들이 오늘의 저를 성숙시켜 온 것 같습니다. 늘 걱정 없이 밥만 잘 먹고 잠을 자왔다면 오늘의 저는 없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지금쯤 교계의 적폐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지요. 토인비는 도전과 응전이 없는 문화와 역사는 사멸한다고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에게 불면의 밤은 도전과 응전의 역사를 되풀이하는 기회였고 더없는 하나님의 축복의 시간들이었습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08-04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고마워, 심장!
    목요일 점심, 서울의 한 식당에서 호산나선교회 임원회 후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항간에 어떤 사람이 호산나선교회와 저를 폄훼하고 왜곡된 글을 써서 퍼 날랐는데 나라를 염려하는 보수의 한 무명 논객이 썼다 생각하고 일절 대응을 안 했습니다. 그런데 식사 중에 심장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특별히 그 자리에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주치의를 하셨던 정남식 박사님도 함께 자리를 하셨습니다. 그분은 심장에 관한한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권위자라고 합니다. 정박사님은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원장을 하시다가 정년퇴임을 하신 후 서초동에 필메디스의원이라는 심장전문병원을 오픈하셨습니다. 제가 3년 전에 주일날 갑자기 심장이 조여와서 급하게 병원에 간 적이 있잖아요. 가서 CT를 찍어보니까 심장으로 연결된 세 개의 관상동맥 중에 두개의 혈관이 하나는 50%, 또 하나는 70%가 막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튿날 심장 조형술을 해 보니까 스탠트를 박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특별한 이상 증세가 없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 다시 한 번 정밀 조사를 해봤더니 무리를 하면 혈관 경련이나 경미한 협심증 증세가 있을 수 있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바빠서 병원에 못 갔는데, 그 날 아침에 일찍 정남식 박사님께 특별진료를 받으러 간 것입니다. 저는 3시간에 걸쳐서 검사를 받았는데 다행히 심장은 튼튼하였습니다. 다만 동맥혈관에 칼슘이 약간 끼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정원장님께서 운동검사를 하는 곳까지 오셔서 지켜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호산나선교회 임원들이 모인 곳까지 오셔서 식사 하는 자리까지 함께 해 주셨습니다. 그 곳에서 건강과 심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찌어찌해서 죽음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오게 된 것이죠. 그랬더니 박종구 목사님께서 “왜 이렇게 죽음에 대한 이야기만 하느냐, 우리가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하시는 것입니다. 저도 동의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 창가에 보이는 가로수를 보십시오. 저 공원에 보이는 포플러나무나 플라타너스 나무를 보십시오. 우리가 살아서 함께 식사를 할 뿐만 아니라 눈이 부시도록 푸르른 저 나무와 잎사귀를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가수 배호는 ‘마지막 잎새’라는 노래를 구슬프게 부르다가 젊은 나이에 요절을 하였지만 우리는 다 중년을 넘겼지 않습니까? 저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십시오. 얼마나 가슴이 시리도록 푸릅니까? 저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소리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도 들을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푸른 나뭇잎과 풀잎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심장이 우리 안에 뛰고 허파가 숨을 쉬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랬더니 박종구 목사님이 한 술 더 떠서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를 낭송하시는 것입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지금까지 숨차게 달려온 소강석목사, 당신이 그렇게 아름답소.)” 식사를 마치고 김찬호 장로님 장인 어르신인 최기주 장로님이 소천을 하셔서 밀양으로 내려가는 길에 차 안에서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대한민국 심장 최고의 권위자인 정남식 박사님으로부터 진료를 받는 것도 감사하거니와, 여기까지 살게 하시고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할 수 있도록 심장을 뛰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심장을 향해서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만큼 젊은 날부터 애끓는 삶을 살아온 사람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20대에는 백암교회를 개척하고 새에덴교회를 개척 하느라 가슴을 조였고, 30~40대에는 우리 교회 부흥과 성도들의 영혼을 위하여 가슴을 애태웠죠. 또 40대 중반부터는 한국교회 연합과 생태계 회복을 위하여 애를 끓였습니다. 소쩍새가 우는 밤에 저도 긴긴밤을 함께 애를 태웠지요. 그렇게 애태운 나날들이 연속되었는데 저의 심장이 이토록 뛰어주었고 지금도 지치지 않고 뛰어주는 게 너무 감사했습니다. “하나님, 저의 심장과 함께 하셔서 감사합니다. 고마워, 심장! 여태까지 쉬지 않고 뛰어줘서 너무너무 고마워. 부디, 나에게 맡겨진 사명을 다 감당할 때까지 힘들더라도 뛰고 뛰어주기를 부탁해요.” 그러면서 저는 차안에서 글을 쓰고 원고를 교정하며 밀양까지 갔습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07-28
  • [소강석 목사의 목양 칼럼] 비에 젖은 꽃잎처럼
    그 날 오전은 바람이 살랑거렸습니다. 한 여름인데도 조금씩 부는 바람 때문에 아주 덥지는 않았습니다. 하늘은 적당한 구름으로 태양을 가려주었습니다. 마치 태양도 저처럼 수줍음을 타는 듯 했습니다. 차창 밖으로 보니 바람에 풀잎과 나뭇잎들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날 월요일 오전 11시 쯤 저는 우리교단 총회 회관에 겸연쩍은 모습으로 도착했습니다. 우리 교회 서광수, 송원중, 김문기 장로님과 저를 사랑하는 몇 목사님들이 영접해 주었습니다. 참 고마웠습니다. 어떤 기자는 1층까지 나와서 저를 환영해 주며 저에게 귀띔해 주는 것입니다. “소 목사님, 전례 없이 최고 많은 기자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만큼 소 목사님께 관심이 많다는 증거입니다.” 처음이라 쑥스럽기도 했고, 한 편으로는 마음이 조금 상기되기도 했습니다. 4층으로 올라가니까 많은 사람들이 저를 영접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교계 기자들이 저를 에워쌌습니다. 정말 어색하기도 하고 얼떨떨하였습니다. 지난주에는 경기남노회에서 부총회장 단독후보로 추대되자 서광수 장로님이 꽃다발을 가져왔습니다. 그때 저는 서 장로님에게 이렇게 말씀을 드렸지요. “장로님, 이런 자리에서 꽃다발을 가져오시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서 그 꽃다발을 강단에다가 놔버렸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임원 추대를 받은 분들이 다 꽃다발을 들고 사진을 찍었더라고요. 그만큼 저는 아직은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총회 총무와 직원이 저의 서류를 확인하는 동안 옆에 앉아 기다리는 자리가 좀 불편했습니다. 순간 이런 생각이 제 머릿속에 스쳐지나갔습니다. “아,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이름으로 교단이 백 수십 개가 된다고 하는데, 이렇게 교단이 찢어지고 갈라지는 가장 큰 이유는 서로 총회장을 하려고 하는 교권 싸움 때문이 아니었는가. 그러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내 모습 자체가 혹여라도 교권의 이미지로 비춰지지 않을까. 나는 정말 그것이 아닌데...” 그런 생각을 하니까 눈물이 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감정조절을 하고 표정관리를 하느라 힘들었습니다. 식사 후 돌아오는 길은 비가 엄청나게 쏟아졌습니다. 총회회관으로 갈 때는 길가의 꽃들이 방긋방긋 웃는 듯 흔들렸는데 비가 쏟아지니까 비에 흠뻑 젖어 고개를 떨구고 있었습니다. 문득 도종환의 ‘흔들리며 피는 꽃’이라는 시가 생각이 났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비에 젖은 길가의 꽃들이 유난히도 애처롭게 보였습니다. 마치 그 모습이 저의 모습처럼 느껴졌습니다. “아, 내가 꼭 이 길을 고집했어야만 했는가. 나도 양보할 수 있었는데, 아니 양보하려고 마음을 먹었었는데...” 몇 분들의 얼굴이 떠오르며 그 분들이 더 존경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아도 이 길은 나의 교권의 욕망 때문이 전혀 아니었다는 사실을 재확인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 저 아시지 않습니까? 예수 믿는다고 집에서 쫓겨난 후 지금 이 순간까지 저는 오직 예수, 오직 사명뿐이었습니다. 신학교 시절에는 순교하는 것이 저의 소원이었지요. 그러다가 교회를 개척한 이후에는 오직 목양 일념과 교회 부흥뿐이었습니다. 저는 교권의 자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다 어느 때부턴가 교회 생태계 사역에 눈을 떴습니다. 그 후로 저는 불필요한 이미지 소모를 하면서도 한국교회 공적사역을 해 왔습니다. 그러다가 어찌어찌해서 부총회장 단독후보로 등록하게까지 되었네요.” 순간 눈물이 흘러나왔습니다. 그 눈물의 의미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교회 정문에 피어 있는 무궁화 꽃도 축축하게 젖어 있었습니다. 저 또한 비에 젖은 꽃잎이 되어보고 싶었습니다. 비를 맞고 끝없이 산녘을 걸어보고 싶었습니다. 정말 제가 총회장이 되고, 그 이상의 위치에서 한국교회를 섬긴다 하더라도 저는 항상 비 맞은 꽃잎이 될 것입니다. 비에 젖은 꽃잎의 심정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길 것입니다. 꽃잎에 달려 있는 물방울은 저녁 늦게까지 저의 눈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눈물이 마르지 않는 한 저의 초심은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07-27
  • [소강석 목사의 목양 칼럼] 그 섬에 가고 싶다
    저는 사람을 좋아하는 목사입니다. 목사가 되기 전에도 사람을 만나고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교제하기를 좋아하는 아주 사교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제가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하면 신기하게도 아이들이 다 모여 들었습니다. 어떤 때는 저희 집 마루에만 앉아 있어도 친구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만큼 저는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을 끄는 스타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저는 외딴 섬에 가서 지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특히 무인도 같은 곳에 가서 사색을 하고 명상도 해 보고 싶었습니다. 무인도는 그만두고라도 깊은 산속에 가서 천막을 치고 일주일이라도 지내며 깊은 묵상을 하면서 좋은 글과 시도 써보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사람을 좋아하고 끌었던 목사이지만 군중으로 심신이 지쳤다고 할까요? 그래서 사람을 떠나 외딴섬에 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전반기 교역자수련회 중 둘째 날 안주봉 장로님이 개발계획을 하고 있는 무인도에 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무인도라고 해서 잔뜩 기대를 하고 갔습니다. 가보니 정말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였습니다. 물론 현재는 사람이 살지 않지만 예전에 펜션을 지어놓고 사람이 산 흔적이 남아 있어서 조금은 실망을 하였습니다. 저는 펜션도 없고 어느 누구의 발길이 닿지 않은 그런 무인도를 상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가니까 산길에 개망초꽃도 피고 과꽃과 나리꽃도 피어 있는 것입니다. 개망초꽃은 원산지가 캐나다이고 주로 철도 가에서 피었던 꽃인데, 어떻게 이런 무인도에까지 피어났을까 너무 신기한 것입니다. ‘누가 심었을까, 그 씨앗이 펜션을 지을때 목재와 함께 왔을까...’ 더 신기한 것은 그곳에 산딸기가 있는 것입니다. 산딸기는 거의 재배를 하지 않거든요. 그런데 ‘이 외딴섬에 어떻게 산딸기가 심겨져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더 신비롭기만 하였습니다. 제가 산딸기를 따 먹으니까 이분 저분들이 더 따다 주었습니다. 무인도에서 야생의 열매요 자연의 상징인 산딸기를 따 먹는다는 것이 너무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문득 산딸기라는 노래가 생각났습니다. “깊고 깊은 숲 속 잎새 뒤에 숨어 있는 산딸기 딸까 말까 망설이다 그냥 갑니다.” 그런데 저는 그냥 두지 않고 따 먹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서 따 먹었습니다. 그리고 깊은 사색에 잠겨 보았습니다. ‘아, 이곳에서 숙식만 할 수 있다면 단 며칠만이라도 와서 살고 싶다. 아니, 정말 핸드폰도 터지지 않는 외딴 무인도에서 단 일주일이라도 자연인으로 살아보고 싶다. 적막한 해변에 텐트를 치고 파도소리를 들으며 노을이 지고 밤이 깊어가고 별들이 반짝이는 모습을 보고 싶다.’ 한때 미국 사회에서 40~50대 남자들이 경영 일선에서 은퇴한 후 모든 것을 다 뒤로하고 사막이나 산속에 은둔하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만큼 그들도 사람들과의 관계에 지쳤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저는 오래 머물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곳에서 잠시 은둔을 경험하고 싶을 뿐이지, 다시 돌아와서 감당해야 할 시대적 사명과 사역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도 저는 교역자 수련회를 인도해야 할 시간에 서울로 장례식 조문을 다녀왔고 이어서 교역자들에게 계속 강의를 하며 사역 논의를 하였습니다. 교역자 수련회 기간에도 그만큼 바쁘게 살았다는 방증이지요. 앞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제가 교단의 총회장이 되면 더 바빠질 텐데, 이렇게라도 잠시나마 무인도에 가서 산딸기를 따 먹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 모릅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는 정현종 시인의 시처럼, 저는 바쁠수록,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을수록, 언제나 제 마음 속의 무인도를 꿈꾸고 그 섬에 가고 싶은 마음을 품고 살 것입니다. 오직 주님과만 동행하고 주님만 바라보며 걷는 그 무인도의 해변을 그리워할 것입니다. 숨 쉴 틈도 없이 바쁜 일정 가운데서라도, 잠시 무인도를 가고 산딸기를 따 먹을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황홀한 삶의 축복인지 모릅니다. 다시 꿈속에서라도, 가보고 싶은 하나님이 주신 환상의 축복이었습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07-15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살아온 은혜, 살아갈 은혜
    2년 전, 저는 두 번째 성대 수술을 하였습니다. 수술 대기실에서 잠시 기다리는 동안 지난날의 삶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습니다. 주일 낮, 주일 밤, 수요일, 철야기도, 신년성회, 여름수련회 등에서 뿜어낸 사자후의 설교, 그리고 대부분의 원고를 흔들리는 건조한 차안에서, 또는 동굴 같이 답답한 제 방에서 구두로 불러주던 순간들... 게다가 외부집회, 특히 수만, 수십만 앞에서 화염을 내뿜은 야성의 설교들을 목이 터져라 외치면서 목이 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유럽 집회 때 설교하던 중 성대가 터져 피를 토했는데도 계속 집회를 하였고, 한국에 와서도 반동성애 국제대회에서 사자후를 토해내다가 수술을 해야 할 지경까지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이윽고 수술실로 들어갔을 때, 싸늘하고 음산한 공기가 수술실을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수술대 위에 누워 잠시 주님께 속삭였습니다. “주님, 저의 삶이 여기서 끝나지는 않겠지요. 만에 하나 그렇게 된다면 저의 가족들과 성도들이 얼마나 실망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죽음이 절대로 두렵지는 않습니다. 주님이 오라고 하시면 미련 없이 떠나겠지만 아직은 제가 감당해야 할 사명이 남아있겠지요.” 드디어 마취약이 들어가고 잠에 빠졌지만 제 의식은 살아서 잠꼬대를 하였습니다. “그래, 나는 주님의 소명에 혼을 바치고 산거야. 나는 주님 앞에 절규의 산제사를 드리는 투혼의 삶을 산거야. 맞아. 그랬어. 그런 거야….” 그때 간호사 선생님이 저를 흔들어대며 깨웠습니다. 수술을 잘 마치고 깨어난 순간, 다시 숨을 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격이고 새로움이었습니다. 병실 창문으로 보이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과 풀잎들이 신비하게 느껴졌고 살아서 숨을 쉬고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가를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수술을 잘 마친 후, 저는 변함없이 장년여름수련회를 인도했습니다. 그때 저는 수술한 지 3주 만에 1시간 30분짜리 설교를 8번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수련회를 마치고 난후 병원에 가서 보니까 다행히 전혀 이상이 없었습니다. 또 분초를 다투며 살았지요. 특별히 그 해에는 종교인과세를 대처하는 데 얼마나 힘을 쏟았는지 모릅니다. 목이 컬컬하고 아플 때는 또 겁이 나서 병원에 가보면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수술한 후 1주년을 맞았을 때 우리 장로님들께 식사 대접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도저히 시간이 나지를 않았습니다. 강단에서 장로님들께 고맙다고 인사만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2주년이 되었습니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 보았더니 성대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감사해서 이번에는 꼭 장로님들께 식사 대접을 하고 싶었습니다. 사실 식사를 꼭 대접하지 않아도 되지만 제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저를 위해서 노심초사 기도해 주시고 섬겨주셨던 성도들 모두를 대접하고 싶지만, 저를 측근에서 도와주는 분들과 장로님들께라도 꼭 마음을 표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목요일 저녁에 기쁨의 식탁교제를 나눴습니다. 저는 “2년을 무탈하게 하신 하나님, 20년 이상 성대를 잘 쓰게 해 주소서”라고 마음속으로 기도하며 밥을 먹었습니다.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습니다. 제가 성대 수술을 마치고 말을 못 할 때 주일예배 강단에 올라가 ‘오빠 생각’이라는 노래를 하모니카로 불고, 한복을 입고 벙어리 춤을 추기도 한 기억 말입니다. 가끔 그 영상을 보면 쑥스럽기도 하지만, 그때는 저를 염려하는 성도들과 함께 마음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또한 주님이 저를 붙들어 주셔서 여전히 건재하며 언제나 성도들과 함께 하겠다는 마음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이 허락하신다면 천국 가는 그날까지 건재한 모습으로 성도들과 함께 사명의 길을 가겠다는 마음으로 춤을 춘 것입니다. 그때를 생각하니 온몸에 힘이 빠질 정도로 아련한 황홀함이 밀려왔습니다. 어느덧 성대 수술 2주년이 되었습니다. 더욱더 살아온 은혜, 살아갈 은혜를 붙잡고 살아갈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이 제게 주신 은혜의 선물입니다. 은혜자는 은혜자끼리 뭉치게 되어 있습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은혜 안에서 하나 되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의 기도 때문에 성대도 건재하고 앞으로도 사역을 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 교회는 크리스텐덤, 전성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저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서 귀하게 쓰임 받는 사명자요, 아름다운 동역자가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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