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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100년이 지나도 살아 있는 교회
- 저는 지난 수요일 저녁 안동교회에서 있었던 통합측 경안노회 남선교회 창립 97주년 선교대회 설교를 하였습니다. 저녁 7시에 시작하는데 겨우겨우 7시 3분에 도착하였습니다. 제가 게을러서가 아니라 제 목회일정을 소화하고 늦게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가서 보니 본당 뿐만 아니라 1층 교육관에도 성도들이 가득 찰 정도로 많이 모였습니다. 특별히 안동교회는 109년의 역사를 가진 교회이고 109년 역사상 단 한 번도 분열한 적이 없습니다. 분열 하지 않는 대신 21개 교회를 분립, 개척해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지방이지만 장년이 2000여명이나 출석하는 교회라니 가히 한국교회의 모델이 되는 교회가 아닐 수 없습니다. 현재 안동교회를 담임하고 계시는 분은 김승학 목사님이신데 정말 인자하고 겸손하신 분이셨습니다. 석조건물의 우람한 모습을 보고 제가 감탄을 하니까 담임목사님께서 그 건물은 1937년에 건축해 지금 81년 된 건물이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큰 건물이지만 그때는 명물 중의 명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국에서 사람들이 안동에 오면 먼저 안동교회부터 구경하고 갔다고 합니다. 이런 은혜롭고 감동적인 이야기가 유승준 작가의 ‘안동교회 이야기’라는 책에 잘 소개 되어 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런 교회 소개를 받고 강단에 10분 정도 늦게 섰습니다. 그런데 강단에 올라가자마자 가슴이 울컥 거렸습니다. 가 설교를 통해 성도들에게 은혜를 끼친 것이 아니라 앉아 있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고 제가 더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 사회를 맡은 장로님과 대표기도 하는 분들의 기도가 제 마음을 울리고 때렸습니다. 그뿐 아니라 찬양대에 서셨던 장로님들의 모습만 봐도 저절로 은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도 모르게 강단에서 눈시울을 적시며 설교 하였습니다. 특별히 그 교회는 1954년 대한예수교장로회 39회 총회 때 일제 신사참배에 대한 개를 결정했거든요. 그때 총회 총대들이 안동교회에서 신사참배를 회개하고 금식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 교회가 안동교회보다 훨씬 더 큰 교회이지만 강단에 선 저의 모습은 왠지 너무 작아 보이고 왜소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는 30년 동안 목회하면서 한 번도 안 싸운 것을 자랑했는데 109년 역사 앞에 서니까 진짜 작아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집회가 끝나고 다시 당회장실에 가서 역대 담임목사님들의 사진과 장로님들의 사진을 보았습니다. ‘아, 저 분들은 얼마나 훌륭했으면 이런 교회를 세울 수 있었을까? 109년의 세월 동안 찬 서리도 내리고 눈보라와 폭풍이 몰아치기도 했을 텐데 단 한 번도 싸우지 않고 서로 사랑하고 섬기며 화목하게 지내왔다니... 아니야, 하나님의 은혜가 더 컸던 거지. 하나님의 은혜가 저분들에게 임해 오늘의 안동교회가 있게 된 거야.’ 그렇습니다. 저의 고향 남원도 양반도시라 정말 예수 믿기가 힘들었던 곳인데, 안동은 남원보다 더 양반도시고 미신과 전통문화가 더 강한 곳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곳에서 예수를 믿는 것도 큰 은혜요, 기적이었지만 그런 곳에서 109년의 역사를 지켜오고 21개의 교회를 분립했던 그들이 정말 위대하게 느껴지기만 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설립 30주년을 앞두고 안동교회에 오기를 너무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우리 합동측 권택성 장로님과 권정식 장로님이 간절하게 부탁해 약속했는데, 도중에 ‘내가 왜 통합측 교회까지 가야하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요즘 너무 바쁘기 때문이죠. 그러나 가서 보니까, 저를 초청해 주신 장로님들이 너무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집회가 끝나고 주최측에서 사례비 봉투를 주었지만 저는 손이 부끄러워 받지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우리 교단의 두 권 장로님에게 언젠가 한 턱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별히 안동교회는 3대 담임목사가 같은 동네에 살았다는 이야기로 유명하지요. 저는 이 이야기를 듣고 더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도 언젠가 은퇴할 것이 아닙니까? 은퇴 할 때쯤이면 제 후임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시끄러울 수도 있고 또 그렇지 않더라도 새 담임목사가 와서 원로목사인 저하고 갈등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교인들하고 충돌할 수도 있을 것이고요. 우리 교회라고 그렇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안동교회는 어떻게 109년을 한 번도 싸우지 않고 지내왔는지 차를 타고 오면서도 당회장실에 걸려 있는 사진들이 눈에서 떠나질 않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교회도 이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00년이 지나도 영향력이 사라지지 않는 교회, 100년 후에도 은혜가 넘치고 화목하며 시대와 사회를 섬기는 교회, 이런 교회로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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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100년이 지나도 살아 있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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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선생님, 안녕하신지요?
- 선생님, 안녕하신지요. 벌써 가을이 깊어가네요. 지난 주일저녁에는 익산 장로연합찬양단 90여명이 저희 교회에 오셔서 찬양공연을 하고 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찬양단의 지휘를 하셨던 분이 박영권 장로님이셨습니다. 그 분이 지휘를 참 잘하시고 낯익은 느낌이 들어서 여쭈어 보았더니 고등학교에서 음악선생님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혹시 군산제일고등학교 음악선생님으로 계셨던 000장로님을 아시는지요” 여쭈었더니 “정말 친한 음악선생님이셨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시절 저에게 음악을 가르쳐주신 선생님이 이번 한 주간 내내 생각이 났습니다. 선생님은 그때에도 교회 장로님이셨죠. 당시 경건하게 신앙생활을 하시던 그 모습을 지금도 기억하며 마음으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훗날 선생님도 소명을 받고 목사님이 되셨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선생님을 한 번도 뵌 적이 없고 연락처도 모릅니다. 그런데 언젠가 선생님이 제 페이스북에 들어오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때 저에게 권면을 하셨죠. 제발 설교 시간에 대중가요를 부르지 말라고요. 선생님의 지적이 백번 천 번 옳으신 말씀이죠. 제가 왜 선생님의 진의를 모르겠습니까? 선생님 말고도 그걸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도 아시겠지요. 제가 아무 때나 대중가요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주로 전도설교를 할 때 부른다는 것을요. 저는 오래전부터 광대적 설교를 해왔습니다. 지금까지의 기존 설교학은 목회자의 고상함과 우아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품격과 본문의 메시지를 드러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설교자만 드러나게 되었고 하나님의 복음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말씀의 역동적 생명력이 약화되고 성도들의 가슴에서 은혜를 사모하는 열정이 식어지면서 한국교회가 점차 침체기를 맞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목회자가 설교를 할 때 단순히 지식이나 정보전달에만 그치는 딜리버리나 아나운서형으로만 전해서는 결코 가슴을 깨우고 감동을 줄 수 없습니다. 아무리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고 울어도 눈물 흘리지 않는 시대가 되었지 않습니까? 저는 일찍이 총신대 신대원 교수이신 심상법 교수님으로부터 저의 설교가 판소리 설교라는 평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은사이신 서철원 박사님도 “소목사의 설교는 콘텐츠 면에서는 철저한 개혁신학을 지키면서도 전달방법이 현대적이고 소통과 감동을 중시한 설교”라고 호평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또한 저희 교회에 몇 명의 설교학교수님과 실천신학교수님이 나오시는데 암묵적 동의를 해 주고 계십니다. 그러던 중에 저는 남아공 스텔렌보쉬대학 요한 실리에 교수가 쓴 ‘하나님의 어릿광대’라는 책을 통해서 광대설교론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책을 읽고 나서 제가 광대 설교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죠. 그렇다고 옛날 부흥사식이나 시골 장터형으로 하지 않고 인문학과 시학의 깊이가 있는 예술적 극장형으로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설교자가 자칫 광대설교를 잘못 이해하면 설교가 경박스럽게 느껴지고 강단의 권위가 실추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청중들에게 엔터테인먼트나 개그콘서트 같은 설교를 할 수 있는 위험이 있을 수 있는 거지요. 이런 설교학적 맥락에서 제가 가끔 전도설교 중에, 또 청중과 소통하고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대중가요의 한 부분을 부르거나 가사를 개사하여 노래를 하기도 합니다. 제가 비판을 받으면서까지도 그렇게 하는 것은 어떻게든지 성경 본문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뜻과 애틋한 마음,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아픔을 청중에게 실감나게 전달하기 위한 것입니다. 어떻게든지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애틋한 사랑과 마음을 제 가슴에 품고 하늘 광대가 되어 노래하고 몸부림을 치는 것이죠. 그래서 본문이 웃기면 웃기고, 슬프면 슬프고, 노래하면 노래하고, 춤을 추면 춤을 추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당시의 일상생활이나 문화와 가장 밀접한 언어와 비유들을 통하여 말씀을 전하시지 않았습니까? 과거의 설교학은 성과 속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어떻게 성경과 복음을 바르게 전달할 것인가에 주력했다면, 요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잘 전하면서도 다양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선생님 세대의 정서와 기존의식으로는 당연히 비판하시고 꾸중하셔야 된다고 봅니다. 저도 신학에 있어서는 당연히 보수정통신학이고 개혁신학을 지킵니다. 그러나 신학적 보수와 문화적 보수는 구별해야한다고 봅니다. 문화적 보수만을 지키려는 분들은 청중들로 하여금 닭병이 들게 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존경하는 선생님, 저는 여전히 선생님을 흠모하고 사랑합니다. 바람이 차갑습니다. 언제 기회가 되면 뵙고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기를 바라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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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선생님, 안녕하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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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님의 무덤 앞에 꽃다발을 드리며
- 님께서 잠들어 계신 무덤 초입에 노란 들국화가 피어 있네요. 저 옆엔 패랭이꽃도 피어 있고요. 님께서 이 곳에 묻히신지 30년이죠. 저는 11년 전부터 님의 무덤을 다섯 번째 찾아옵니다. 11년 전 어느 날 밤, “믿음의 사람, 효암 백남조” 라는 책을 읽으며 밤을 지새웠지요. 가슴이 뛰고 눈시울이 젖어 새벽기도 시간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1913년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죽전리라는 두메산골에 태어나 어린 나이에 대구로 가셔서 부산으로, 부산에서 일본으로 청운의 꿈을 키우다가 다시 서울로, 그리고 부산으로 내려가셔서 그 꿈의 나래를 펼치시던 당신... 마침내 당신께서는 복음을 들으시고 하나님께 미친 삶을 사셨지요. 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빚진 자가 되셔서 주의 이름으로 자선을 베풀며 눈물로 씨를 뿌리는 삶을 사셨습니다. 사업이 조금씩 일어나면서 고향에 성산교회를 세워주시고 성산초등학교까지 지어서 헌납하셨습니다. 또한 구절양장같은 길을 시원한 신작로 길로 내 주면서 고향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셨죠. 섬기시던 부전교회 대지 일부를 헌납하셨고 누구보다도 부전교회 건축에 헌신을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 수많은 교회에 땅을 헌납하시고 교회당을 건축해주셨습니다. 그런 때 우리 총회는 WCC 문제로 허허벌판 오지로 갈라져 나와 가슴 시린 새벽 순례자의 삶을 출발해야 했습니다. 신발 끈을 동여매고 새벽 광야를 걸어야 했지만,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신학과 신앙, 그리고 교단의 정통성은 우리 것이었지만, 그러나 외형적으로는 맨발, 맨손, 맨땅 뿐이었습니다. 신학교마저 남산에서 쫓겨나 이리저리 배회해야 했던 서럽고 눈물진 광야 생활, 그때 님께서는 총신대학교 건립을 위해 사당동에 학교 부지 1만 8천 평을 사서 아낌없이 헌납하셨습니다. 그것도 공장 아래에 있는 양철집에 늙으신 노모님을 모시면서 말이죠. 자기 집 하나 변변히 짓지도 못한 사람, 노모 한 분도 편안히 모시지 못한 불효자식 주제에 어떻게 그런 위대한 결단을 하실 수 있었단 말입니까? 그 산으로 첩첩이 둘러싸인 두메산골 중에 산골에 태어난 촌뜨기 출신이 어떻게 그런 큰 믿음의 배포를 가지셨단 말입니까? 장로님께서 그런 헌신을 하지 않으셨다면 회사의 부도는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사업의 부도를 막지 못하여 당신은 감옥 생활을 하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하나님께 원망하지 않으시고 총신대 부지를 헌납한 것을 후회하지 않으셨다지요. 님의 눈물 젖은 헌신으로 오늘 우리 교단은 우리나라 최대의 교단이 되었고 총신대학교 역시 우리나라 최대의 신학대학으로 발전을 하였습니다. 저는 장로님을 만나본 적도 없고 소싯적에는 알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장로님이 가신 후 장로님에 대한 전기를 읽고 나서 한국교회 목사 중의 한 사람으로서, 아니 우리 교단의 목사로서 너무도 감사하고 빚진 자의 마음으로 11년 전 님께서 누워계신 무덤 앞에 꽃다발을 드리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후로도 우리 교회 장로님들과 함께 세 번을 왔습니다. 오늘 님이 태어나시고 자라셨던 성주지역 복음화대성회에 와서 다섯 번째로 꽃다발을 들고 왔습니다. 오늘은 참으로 송구하고 부끄럽고 무거운 마음으로 왔습니다. 요 근래에 와서 우리 교단과 총신에 장로님과 같은 분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총신대학교는 교권을 쟁탈하기 위한 전투장이 되어 버렸고 그 결과 관선이사들이 학교를 관리하며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천국에서 이 모습을 보신다면 장로님의 마음이 얼마나 비통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천국에는 눈물과 애통과 비통함이 없으시겠지요. 저는 총신대 문제를 대화로 풀기를 원했고 관선이사가 들어오는 것을 심히 우려한 목사였습니다. 그러나 저의 우려가 틀리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부디 관선이사가 들어오는 쪽을 선택한 분들의 생각이 맞기를 눈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장로님의 묘 앞에 송구한 마음으로 꽃다발 하나를 헌화합니다. 정말 송구스럽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이곳에 왔지만 다음엔 기필코 장로님의 뜻과 헌신의 목적이 회복되는 기쁨을 가지고 달려오겠습니다. 벌써 찬바람이 불어오는 가을이 되었네요. 이제 조금 있으면 님의 무덤을 에워싸고 있는 사방의 산에는 붉은 단풍이 들겠죠. 그러나 제가 다시 찾아올 때는 총신의 봄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그때는 님의 무덤 주변에 연분홍 진달래가 피어 있고 진분홍 할미꽃도 피어 있겠지요. 그날이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신 부활절이면 참 좋겠습니다. “오, 하나님, 한국교회에 백남조 장로님 같은 분은 더 이상 없는가요? 아니, 우리 교단에 제2, 제3의 백남조는 다시 태어나지 않는 건가요. 우리 교회가 제2의 백남조 역할을 하게 하옵소서. 우리 교회 장로님 가운데도 제2, 제3의 백남조가 나오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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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님의 무덤 앞에 꽃다발을 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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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죽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 지지난 주 목요일 저녁엔 포항지역 지진피해 위로를 위한 희망콘서트에 남진 장로님과 함께 갔습니다. 가보니까 포앙중앙교회에 사람들이 입추의 여지가 없이 모였습니다. 역시 남진 장로님의 저력을 보았습니다. 남진 장로님이 콘서트를 하기 전에 제가 나가서 소망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여러분, 이곳에서 여러분을 만나 뵙게 되어서 정말 반갑습니다. 이곳에 지진이 발생했을 때 얼마나 놀라셨습니까? 얼마나 두려워하셨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살아 있으니까 이런 두려움도 느끼고 놀라신 것 아니겠습니까? 쓰러진 고목이나 죽은 나무는 절대로 바람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시든 꽃잎도 찬 서리가 내리고 눈보라가 쳐도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도 않습니다. 살아 있는 나무만이 바람이 불 때 가지가 흔들리고 찬 서리가 내리고 눈보라가 칠 때 추위를 느끼기도 하고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는 것이지요. 이번 포항지역에 지진이 일어나 큰 피해를 당했지만 인명피해는 없었지 않습니까? 천만다행이었지요. 우리가 큰 피해는 당하였지만 그러나 이렇게 살아 있으니까 이런 고통도 느끼고 아픔도 느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죽은 자는 지진이 와도 모르고 벼락을 맞아도 모릅니다. 미국 애리조나주에 무서운 태풍이 불어 닥쳤습니다.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어요. 거친 허리케인은 집과 농작물, 가축들까지 모두 날려버렸어요. 농부들은 태풍이 쓸고 간 폐허에서 절망의 탄식만을 토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때 무너진 닭장 속에서 벼슬이 찢기고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된 수탉 한 마리가 비틀거리며 걸어 나왔어요. 수탉은 날개를 퍼덕이며 무너지지 않은 담장 높은 곳으로 올라갔어요. 그리고 동녘의 해가 떠오르기 전 붉은 여명을 향하여 목청껏 소리를 쳤어요. “꼬끼오!” 농부는 이 모습을 보고 용기를 얻었어요. “그래, 나도 저 수탉처럼 다시 일어나자.” 우리의 현실이 비록 폐허의 잿더미와 같을지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목청껏 노래하는 수탉처럼 우리도 다시 한 번 희망을 외쳐야 합니다. 아무리 밤이 깊어도 내일의 태양은 반드시 뜨지 않습니까? 첫 새벽길을 떠나는 순례자의 시린 가슴으로 다시 신발끈을 동여매고 길을 떠납시다. 희망의 “꼬끼오”를 외칩시다. 그럴 때 다시 저 동해바다의 아침에 떠오르는 붉은 태양처럼 우리 포항지역에 찬란한 내일의 희망의 아침, 소망의 아침이 밝아올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여러분과 포항지역에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봐도 심플하고 단아하고 소망이 넘치는 메시지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장학금 2천만원을 김문기 장로님으로 하여금 전달하도록 했습니다. 솔직히 2천만원을 가져갈 때는 약간의 부담을 갖고 갔는데, 가서 보니까 2천만원이 너무나 적은 돈이었습니다. 그래서 김문기 장로님으로 하여금 전달하도록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남진 장로님 콘서트를 하였습니다. 남진 장로님의 공연과 콘서트를 많이 봤지만 어떻게 갈수록 더 젊어지시고 청중을 장악하는지 노래 중간 중간에 하는 간증도 일품이었습니다. 콘서트를 하자 온 청중이 난리가 난 것입니다. 오빠를 외쳐대며 야단법석을 떨었어요. 저는 몸살 끝자락에 있었기 때문에 소망의 메시지만 전하고 바로 나와서 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바로 나올 수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한 두 곡만 듣고 나오려고 했는데 노래 한 곡 한 곡, 간증 한 마디 한 마디에 푹 빠져 들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저의 바닥난 체력으로는 거기에 끝까지 앉아 있을 수 없었지만 남진 장로님의 감동적인 콘서트가 저를 꼼짝도 못하게 했던 것이죠. 제가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끙끙 앓으며 식은땀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나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죽어 쓰러진 나무는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고 시든 꽃잎은 찬 서리가 내려도 두렵지 않지만, 살아 있는 나무만이 바람에 흔들리고 가을이 되면 낙엽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사실 저도 살아있으니까 몸살도 앓고 남진 장로님의 희망콘서트에 끝까지 참석할 수 있었던 거지요. 지진을 당한 분들도 살아 있으니까 아픔과 고통을 느꼈던 것이고요. 저는 교회 올라와서도 얼마나 신경 쓸 일이 많았는지 모릅니다. 제 주변의 가까운 분들이 저를 신경 쓰게 할 때가 있거든요. 그리고 거반 중노동보다 더 격한 심방 사역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봐도, 살아 있으니까 그런 아픔도 겪고 격한 사역도 감당해 내는 거죠. 저는 이러한 희망의 메시지가 지진을 당한 포항 시민들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 새에덴 성도님에게도 위로와 희망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살아 있으니까 삶의 꽃과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기도 하고 비에 젖기도 하고 때로는 낙엽을 만들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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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죽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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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해석의 갈등을 넘어선 교회
- 저는 지난 3일 동안 대구 반야월교회에서 있었던 대한예수교장로회 103회 총회(합동)에 참석했습니다. 무리한 남미일정과 귀국하자마자 쉬지도 못하고 빡빡한 목회일정을 소화하느라 결국 감기 몸살을 앓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총회 현장에도 늦게 도착했고 월요일과 화요일에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총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우리 총회는 수요일 저녁으로 마쳤습니다. 저의 경험상 이렇게 빨리 끝난 총회는 처음 봤습니다. 이승희 총회장님께서 특별한 지혜와 회의 리더십을 발휘했기 때문입니다. 총회 기간에 하루에 한 사람이 두 번 발언은 못하도록 하고 그것도 2분 이상 발언하지 말 것을 결정을 해 놓고 시작하니까 빨리 끝난 것입니다. 아무래도 일부 발언하기 좋아하는 분들은 불만이 있었다고 하지만 저는 몸도 좋지 않아서 빨리 끝나니까 너무나 좋았습니다. 지금까지 총회의 모습은 한 안건을 가지고 충돌을 하고 격돌하는 모습이었습니다. 한 하나님을 섬기는 목사, 장로이지만 같은 사안을 놓고 찬성, 반대가 치열하고 한 치의 물러섬 없이 자기 주장만이 옳다고 내세우는 것을 봤습니다. 저는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프랑스의 철학자인 폴 리쾨르가 떠올랐습니다. 그는 ‘해석의 갈등’(한길사)이라는 책에서 해석학적 순환을 통한 새로운 인간이해와 기독교적 세계관을 제시하였습니다. 그에 의하면 똑같은 사건도 보는 각도와 측면에 따라서 해석과 판단이 다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해석이 다르기 때문에 갈등과 충돌을 야기 시킨다는 것이죠. 그에 의하면 모든 시대마다 시대를 해석하는 키가 있다는 것이죠. 예컨대 근현대에 이르러서는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시각으로 시대를 해석하려고 했고, 사회주의와 시장경제라는 키(key)로 시대를 해석하려고 했습니다. 요즘에 와서는 진보적인 시각과 보수적인 시각이 해석의 갈등을 이루고 있지요. 또 정의의 시각과 사랑의 시각도 충돌하곤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의 갈등이 교회 안으로도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교인들도 성경을 자기 입장에서 보고 하나님을 자기편으로 끌어 들여서 해석의 갈등을 일으킵니다. 그러다보니 그들이 주장하는 말에는 다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그 일리와 일리가 교회 안에서 충돌하는 것입니다. 한국교계가 분열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충돌하고 분열하는 이유는 다 자기들이 주장하는 해석의 일리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도 얼마나 반대를 위한 반대, 상생이 아니라 보복과 파괴, 조악한 말꼬리 잡기나 조롱이 판을 치고 있습니까? 무조건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우기며 상대방을 공격하고 무너뜨리려고만 합니다. 이것을 심리학적으로 ‘선택적 지각’ 혹은 ‘확증편향’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가면 갈수록 교회나 교회의 행위를 바라보는 시각도 다르고 해석도 달라질 것입니다. 그래서 폴 리쾨르는 이 세상의 어떠한 사상과 철학도 시대를 온전히 해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나 시대를 온전히 꿰뚫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진리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닙니까?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적어도 그 진리를 믿는 사람이죠. 그렇게 볼 때 무조건 시류와 시대논리로 교회 잘잘못을 따지고 자기 편견으로 상대를 정죄하는 것은 일리의 노예가 될 수 있는 것이죠.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떤 사건을 보고 해석하는 키(key)가 언제나 성경이어야 하고 그리스도여야 하며 성령의 감동과 하나님의 뜻이어야 합니다. 아무리 시대정서나 자신의 편견으로 해석을 잘하고 일 결정을 잘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공동체를 분열시키거나 어느 한 쪽을 파멸시켜서 그것이 하나님께 누가 되게 한다면 얼마나 무지하고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인간적으로만 보면 다윗도 너무나 부정적인 면이 있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 밧세바를 범한 죄인이었습니다. 물론 회개하였지만요. 그리고 죽기 전에 솔로몬에게 요압과 시므이를 죽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떤 성경학자는 다윗을 아주 부정적으로 비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어떻게 보셨느냐는 것이죠. 하나님 보시기에는 다윗의 생전에도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했고 그가 죽은 후에도 얼마나 칭찬해 주셨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시대 흐름을 간파하고 트렌드를 관통하는 지혜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만큼은 시대정서나 논리, 혹은 자신의 일리에만 갇혀서 서로 갈등하고 다투다가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파괴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고 예수 그리스도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관점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총회는 참으로 성총회였습니다. 우리 새에덴교회도 해석의 갈등을 넘어서 하나님이 왕이시고 진리되시는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는 거룩한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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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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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해석의 갈등을 넘어선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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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목양 칼럼] 소목사, 소통 목사
- 우리 교인들이라면 잘 아시다시피 저는 유교문화가 강한 보수적인 가문에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 여아보다 남아선호사상이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물들었구요, 게다가 보수신학을 공부하면서 여성 사역자들에 대한 사고가 보수적 편향성에 치우쳐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전 우리 총회의 여성 사역자 지위향상 개발위원회 위원장님이신 고영기 목사님으로부터 ‘여성 사역자 지위향상과 사역개발을 위한 실제적 방안’에 대해서 목회적 차원에서 연구발표를 해달라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주제를 연구하면서 여성 사역자들에 대한 편향적 사고를 다시 한 번 깨달았고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이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총신대 신대원 출신들 가운데 출중하고 뛰어난 여성 사역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성 사역자 안수를 금하는 우리 교단의 헌법 규정 때문에 출중한 여전도사님들이 다른 교단에 가서 안수를 받고 목회를 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총신에서 교육을 잘 받고 결국 다른 교단에 가서 그 교단의 살을 찌우는 것이 안타깝게 느껴졌습니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여성들이 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능력이 출중함에도 불구하고, 졸업하여 목사안수를 받고 교회에서 대우와 존경을 받는 남성 사역자에 밀려 그냥 심방전도사와 교육전도사에 머무는 여성 사역자들을 보면서 굉장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할 수 있으면 여성 사역자들의 지위향상과 사역 개발에 있어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발표를 하려고 하였습니다. 먼저 발표를 하기 전에 논문을 몇 사람에게 보내 보았습니다. 총신대 신대원 교수이시고 저희 교회 연구목사님이신 양현표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목사님, 여성 사역자들의 지위향상과 사역개발에 대해서 아주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제안하는 것은 좋지만 여성 사역자들의 안수 쪽으로 가는 하나의 징검다리나 그 수순의 이미지로 비춰질 수가 있습니다. 여성 안수는 신학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정치적으로 예민한 사항이기 때문에 발표 수위조절을 적절하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아직 공청회도 하지 않았는데 “소강석목사는 여성 안수를 주장하는 쪽으로 논문을 발표했다”는 헛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몇몇 총회 어른들이 “발표할 때 경계선을 넘지 말라고...” 충고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최대한 차분하면서도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발표를 하였습니다. 현장 분위기로 봐서도 여성 사역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고 감사와 만족의 눈빛도 느꼈습니다. 그런데 결론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오늘 발표한 발제문은 여성 사역자의 안수문제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 역사 속 교단들의 흐름을 보면 이상하게 여성 안수의 허용이 신학적 자유화로 가는 결정적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합니다. 프린스턴신학교가 그랬고, 미국의 PCUSA 교단이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단은 여성 사역자의 지위향상과 사역개발을 위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고 적극적으로 결정하되, 이 과정이 신학적 진보와 자유화의 서곡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교단의 신학적 자유화만큼은 반드시 막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바로 다음에 국회에서 광복절 기념식 행사가 있어서 자리를 떠야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 여성 선교사가 질의와 응답 시간에 자리에도 없는 저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한국에서 여성 안수를 허용하는 교단들은 다 극단적 진보주의입니까” 제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명쾌한 답변을 했을 텐데요. 사실 저는 여성 안수를 분기점으로 해서 신학적 진보와 자유화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우리 교단만큼은 절대로 신학적 진보와 자유화를 막아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을 뿐이지, 여성 안수를 허용한 교단이 극단적 진보주의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거든요. 우리 교단이 신학적 본질과 가치를 잘 지켜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인데요. 그런데 또 어느 언론에서는 마치 제가 여성 안수가 신학적 진보로 가는 길이 되었다고 주장한 것처럼 써 놓은 것입니다. 제가 국회를 좀 늦게 가더라도 질의와 응답 시간까지 남아 있었을 걸 하는 후회를 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오해와 소통 부재가 빚어낸 결과이지요. “아, 이렇게 소통이 중요하구나. 항상 자기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하면서 불통을 낳게 되고 오해를 낳게 되는구나...” 생각지도 않는 질문과 오해를 받게 되면서 다시 한 번 소통의 중요성을 깨달게 되었습니다. 목회현장에서도 이따금 그런 오해와 불통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요즘 양방향 소통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며, 소목사야말로 더 확실한 소통 목사가 될 것을 다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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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목양 칼럼] 소목사, 소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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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아군에게는 총을 겨누지 않으리’
- 지난 월요일 국회대강당에서 NAP 독소조항 반대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출범식에 참석했습니다. 가보니까 여당 국회의원들은 안오고 야당 국회의원들만 왔습니다. NAP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여야를 초월해서, 크리스천의원들이 서로 손을 잡고 독소조항을 수정하도록 해야 하는데 정말 아쉬웠습니다. 더구나 야당 국회의원들은 NAP에 대한 문제를 안보, 경제, 국가 기본 정책까지 싸잡아서 함께 비판하는 것입니다. 물론 야당의 의원들이야 그런 입장일 수밖에 없겠지만 마치 그 자리가 야당을 위한 포럼의 자리로 둔갑을 해 버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니, 그 자리는 마치 반정부운동의 자리와 같았습니다. 저는 출범 메시지를 맡았는데 제 차례가 와서 강단으로 올라갔습니다. 저는 미리 준비한 원고를 접어두고 즉흥적인 메시지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최대한 균형적인 메시지를 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여러분, 저는 정치인이 아니고 목회자입니다. 그래서 중립적이고 균형적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남북정상회담과 평화조약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응원하고 박수를 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NAP안에 있는 독소조항은 참으로 우려스럽습니다. 인권이 무엇입니까? UN 인권 헌장 29조를 보면 윤리, 도덕에기초를 하고 공익에 반하지 않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국가 인권위원회는 인권의 본질을 왜곡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서구에서의 인권운동의 선도자는 윌버포스고 미국에서는 마틴 루터 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래봬도 마틴 루터 킹 퍼레이드 재단에서 국제평화상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당시 마틴 루터 킹 보다 더 과격하고 급진적 인권운동을 했던 마르콤 엑스가 있었습니다. 그는 조지아주와 몇몇 주에서 백인들을 다 쫓아내버리고 흑인공화국을 만들자고 주장했습니다. 백인들을 적폐 중의 적폐로 생각하고 흑백간의 편가르기를 하는 인권운동을 했던 거지요. 물론 그는 일부 흑인들로부터 마틴 루터 킹 보다 더 큰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우리 중의 대부분은 그에 대한 존재 자체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러자 뒤에서 막 “그만해, 그만해, 내려와!” 이런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조금 전에 한 야당의원이 법무부의 인권정책을 마련한 담당관을 비판하자 “죽여, 죽여!”를 외친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극단적인 생각과 표현을 하는 사람이지요. 그러나 저는 계속 메시지를 이어갔습니다. “반면에 왜 마틴 루터 킹은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고 존경을 받고 있습니까? 그는 흑인과 백인을 화해시키고 통합하는 평화적인 인권운동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저 조지아주의 붉은 언덕에서 흑인과 백인이 함께 손을 잡고 살아가는 그런 세상을 꿈꾸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훗날 그의 비도덕적인 과실들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노벨평화상을 받게 되었고 여전히 미국 사람들이 그가 탄생한 날을 기념하여 공휴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도 편가르기식 선동을 하지말고 정말 소통하며 통합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특별히 정부가 인권운동을 앞세워 편가르기식 선동을 하지 말고 상호 간에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면서 소통하고 화해하고 통합하는 인권정책을 펴야 합니다.” 그랬더니 또 그 쪽에서 막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내려와, 지난 번 국가조찬기도회 때 문재인을 상찬했던 것부터 회개해!” 그래도 저는 아랑곳하지 않고 메시지를 이어갔습니다. “지금 우리는 한반도에 평화의 꽃씨를 뿌리고 북한의 핵 폐기와 종전선언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면 언젠가는 피흘림이 없는 복음적 평화통일이 이루어질 수도 있을 텐데 그때 이러한 극단적 인권정책이나 조례를 북한 주민들이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또한 과연 북한 지도부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우리 정부는 심각한 고민을 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도 우리가 하나가 됩시다. 우리 한국교회 뿐만 아니라 타종교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종교는 사회의 마지막 항체요 보루요 저항인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저항인자가 되어서 이 독소조항을 수정하도록 합시다. 이를 위해 우리 모두가 하나 되어 끝까지 싸웁시다” 그러자 우레와 같은 함성의 박수가 나왔습니다. 물론 도중에도 함성의 박수가 나왔습니다마는, 그러나 소리를 질렀던 몇몇 분들은 자기중심의 확증편향성과 선택적 지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한 마디로 극우 중의 극우의 확증편향성을 가진 사람들이죠. 지금 우리는 보수가 되었건 진보가 되었건 절대로 편가르기를 하면 안 됩니다. 무조건 동성애를 인권으로 포장해서 선동정치를 하려고 하는 진보 쪽도 큰 문제이지만, 아군에게 총질을 하면서까지 극우적인 확증편향성에 사로잡혀 과격한 발언을 하고 좌충우돌하는 사람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극우건 극좌건 무조건 편가르기식으로 우리 사회를 선동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편가르기를 하는 것은 정말 쉽지요. 극단에 서서 상대를 비판하고 증오하는 거야 정말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상대와 서로 소통하고 설득하며 대화로 풀어나가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어렵지만 그것이 크고 진정한 지도자의 길이지요. 솔직히 저는 그 분들 보다도 건강한 교회 생태계를 위해 더 많은 희생과 헌신과 눈물을 쏟은 사람입니다. 이런 일을 위해서 얼마나 배후에서 활동하고 후원하고 희생했는데요. 저 또한 정말 극단적인 발언과 행동을 해야 할 때는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도 될 때에는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죠. 저는 그런 극단적이고 과격한 행동을 하는 사람에 대해서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마음속으로도 그들에게 총질은 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함께 손잡고 일해야 하니까요. 공항으로 출국하는 길은 하늘이 캄캄하고 비가 쏟아져 차가 몹시 막혔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맑은 하늘을 꿈꾸며 저는 비행기와 함께 이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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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아군에게는 총을 겨누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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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웃고 있어도 눈물 나는 자리
- 지난 8월 21일 밤, 저는 잠을 설쳤습니다. 어린 시절 소풍을 가기 전날 밤처럼 말이죠. 다음날, 단국대에서 저의 명예문학박사 학위 수여식이 있었거든요. 저는 논문을 써서 두 개의 석사학위와 이어 목회학박사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저의 모교인 광신대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를, 백석대학교에서는 명예철학박사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백석대학교와 장종현 총회장님이 제 가슴 속에서 떠나질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명예문학박사는 정말 제 가슴을두근거리게 하였습니다. 목회자가 명예문학박사를 받는다는 것은 거의 없는 일이기에 총장님 옆에 앉았던 저는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정말 눈물이 나려고 하였습니다. 저의 순서가 오기까지 많은 졸업자들의 석박사 학위 수여식이 있었습니다. 논문을 쓰느라 그들 모두가 얼마나 수고를 하였겠습니까? 그들의 학위 수여식 중 제 머릿속에는 지나온 삶의 여정이 스쳐갔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문학적, 예술적 감성과 상상력이 컸던것 같습니다. 라디오 연속극을 들으면 상상의 나래를 펴고 꿈속으로 날아갔고 동화책이나 소설책을 읽으면 그 이야기가 펼쳐지는 문학적, 예술적 사유를 꿈속으로까지 끌고 갔지요. 만약 제가 일반대학교를 갔더라면 국문과나 영문과를 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거룩한 소명을 받으면서부터 오랫동안 문학적 사유를 중단하고 절필을 하였습니다. 오로지 신앙의 투혼을 불사르며 영적 사유에 정진을 하였지요. 그러다가 어느 정도 목회의 길을 다지게 된 후, 다시 문학적 향취를 회상하며 펜을 들고 글을 쓰며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문학을 전공하지 못한 사람이 글을 쓰기 때문에 그것은 독학이요 습작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였는지 저의 글은 붉은 고원에서 고독하게 쓰여져야 했습니다. 그렇게 쓰여진 제 글은 저 고원의 계곡 아래로 내동댕이쳐지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수많은 산간 협곡을 지나고 오지를 넘어 저의 길, 저의 세계를 개척해 나갔습니다. 목사이기에 설교만 열심히 하면 될 걸, 왜 그토록 글쓰기에 도전하고 문학의 지평을 열고자 했는지... 그러나 그런 문학적 목마름과 갈망 때문에 부지런히 시를 쓰고 책도 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 메이저 일간지에 글쓰기 도전도 하였지요. 하지만 목회자가 비난당하던 시대에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깊은 계곡 아래에 떨어져야 하는 절망도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산기슭이나 계곡의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하이에나가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 산정 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 죽더라도 도전에 살고 죽는,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되고 싶었습니다.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요. 문학적 사유와 잠재력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 그래도 제가 쓴 글의 흔적일랑 남겨둬야지요. 묻지마세요. 왜 그리도 힘들게 고독한 저 붉은 고원, 아니 눈 덮인 저 킬리만자로의 정상을 오르려고 하느냐고요. 굶주리고 고독한 문인의 불타는 영혼을 아는 이 없으니 또 어떠하겠습니까? 마침내 저는 마음으로 잠시 오른 킬리만자로의 정상에서 여름의 푸른 강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름 강을 넘어 푸른 초원을 만날 수 있었지요. 그래서 목회자로는 유일하게 주요 일간지에 글을 쓰고 각종 문학상을 받는 꿈같은 일을 누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목회자가 거의 받지 않는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 자리에서 태연한 척 웃고 있어도 온 몸이 긴장되고 눈물이 날 수 밖에요. 저는 답사를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총동문회 회장처럼 키높이 발판대를 마련해 주었으면 좋았을텐데 학교 직원이 제가 엄청 키가 큰 줄 알고 그것을 준비해 주지 않아서 애를 먹었습니다. 그러나 기억나는 것은 저의 진심이고 울먹이는 가슴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선포적 사역을 많이 하였지만 글쓰기에는 부족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글을 많이 써서 그의 사후에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칼빈도 루터보다 많은 글을 남겨서 더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지요. 이제 제 글에 삶의 진액을 담고 싶습니다. 그 글로 세상의 그늘을 지워나가고 싶습니다. 제 글이 세상에 꿈이 되게 하고 싶습니다. 아니, 제 글이 작은 별 하나가 되어서 어둔 세상을 반짝이며 복음 선교에 한 줌의 중보가 되고 교회의 이미지를 격상시키는 별빛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다가 조용필이 불렀던 저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가죽을 남기고 죽고 싶습니다. 단국대학교와 장충식 이사장님께 하나님의 무궁한 축복이 있기를 바라고 새에덴 성도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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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웃고 있어도 눈물 나는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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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추억은 날개를 타고 오다
- 제가 예수 믿고 신학교를 간다고 집에서 쫓겨나 군산 시내를 전전긍긍할 때였습니다. 그 때 주로 군산명석교회(현 군산 사랑의 교회)에서 잠을 잤습니다. 옛날에 얼마나 추웠습니까? 난로 하나도 못 피우고 맨 의자 위에서 침낭 하나 가지고 기도하다 잠을 자다 그렇게 밤을 보냈습니다. 얼마나 많이 굶었는지 눈이 쑥 들어갔습니다. 낮에는 주로 신학교 시험 준비를 위해서 성경을 보고 그 와중에도 가슴이 뜨거우면 전도를 하러 다녔습니다. 그러던 중에 군산개복교회에서 부흥회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당시 개복교회는 군산 에서 가장 큰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그 집회를 참석했는데 강사는 피종진 목사님이셨습니다. 피종진 목사님은 당시 전국과 세계적으로 부흥회를 다니시는 분이었습니다. 역시 집회를 가보니까 대단한 부흥강사였습니다. 분위기 자체도 다른 교회 부흥회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청중을 압도하는 부흥강사의 찬양과 메시지, 울렸다 웃겼다하는 생동감 넘치는 카리스마에 완전히 매료되었습니다. 그 때 하얀 양복을 입고 부흥회를 인도하시는 목사님의 모습은 환상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금식을 하면서 개복교회 지하실에서 잠을 자고 새벽기도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새벽기도를 하면서 보니까 사람들이 강단에 안수기도를 받으러 가는 것입니다. 그 때는 새벽집회, 낮 집회, 밤 집회, 그것도 목요일, 금요일까지 했던 때인데, 지금 생각해보면 새벽에 그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안수기도를 받았으니 강사님이 얼마나 피곤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남들이 안수기도를 받으니까 저도 한 번 끼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제 머리에 손을 얹는 순간 온 몸에 불이 확 임하는 듯한 감각을 느꼈습니다. 게다가 목사님께서 손을 얹고 기도해주시는 내용이 기가 막혔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지금은 정처 없는 몸인 것 같지만 내가 너에게 다윗의 권능을 주노라. 내가 다윗처럼 능력을 주어 너를 복되고 귀하게 사용하리라. 주여, 성령께서 감동하신대로 꼭 이 아들을 강건하게 사용하여 주옵소서.” 저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아멘, 아멘”하며 엉엉 울어버렸습니다. ‘아, 어떻게 저 분이 내 상황을 알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다윗 같은 은혜를 주시고 능력을 주신다니...’ 하루 종일 감격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새벽이 되어서 사람들이 또 기도를 받으러 가는데 갑자기 의심하는 마음이 들어왔습니다. ‘목사님이 누구에게나 그런 기도를 하시는 거 아니야’ 그래서 제가 반대쪽으로 가서 기도를 좀 엿들었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사람들마다 기도가 달랐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기도를 받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기도를 받으러 갔습니다. 혹시라도 목사님이 저를 기억할까 싶어서 말입니다. 사실 불이 다 꺼진 상태이기 때문에 아무리 천재라도 기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어제보다 더 감동 있는 기도를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권능을 기름 붓듯 부으시리라. 다윗의 권능뿐만 아니라 바울의 능력으로 너와 함께 하여 끝날까지 내가 너를 존귀하게 사용하리라. 걱정하지 말고 부름받은 길을 걸어가거라.” 그래서 저는 목사님 앞에 무릎을 꿇고 “목사님, 죄송합니다. 잘못 했습니다”하면서 사죄를 드렸습니다. 저는 집회를 참석한 이후에 피목사님을 만나 본 적도 없습니다. 가난한 신학생이 어찌 감히 그런 분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제 마음에만 담고 살아온 것이지요. 그런데 가락동 개척교회 시절에 이 분을 부흥회에 모시려고 사모님께 여러번 전화를 드렸습니다. 그 때 사모님이 목사님의 부흥회 일정을 짜셨는데 다 짜여져서 도저히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목사님께 기도 받고 은혜 받은 사람인데 단 하루라도 오실 수 없느냐”고 사정을 하였습니다. 그 때가 연말이었는데 목사님께서 송구영신예배를 위해서 쉬셔야 한다고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한 주 집회는 그만 두고 단 하루라도 모시고 싶다고 했는데도 사모님이 허락을 안 해 주셔서 그 때는 상처가 참 컸습니다. ‘아, 단 하루도 못 오시는가...’ 그래서 그 분을 모실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이후로는 우리 교회가 부흥회를 안 하고 제가 자작부흥회를 했으니 모시질 못한 거지요. 그런데 제가 요즘 나이가 먹으면서 자꾸 피목사님이 떠올랐습니다. 그 때의 지울 수 없는 추억이 날개를 타고 저의 가슴으로 자꾸 찾아오면서 “제 형편에서만 생각하고 상처를 입은 제 자신이 속 좁은 사람이었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다음 주일 저녁에 1일 부흥회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이 분을 진작 모시지 못한 후회하는 마음이 가득합니다. 다음 주일저녁 뜨거운 은혜를 사모합니다. 그때 추억은 날개를 타고 저에게 날아오고 제 마음 또한 그때의 아련한 추억으로 날아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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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추억은 날개를 타고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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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친구의 무덤에 꽃을 피우리’
- 어린 시절 잊을 수 없는 친구가 있다. 내가 살던 마을 작은 교회 담임전도사님 아들이었다. 나는 유교적이고 불교적 전통을 중시하던 아버지 밑에서 자라서 그랬는지 그 친구를 무던히도 괴롭혔다. 예수님이 부처님 앞에서 도망가는 그림을 그려놓고 친구를 골리기도 했다. 그가 울면 좋아서 괴롭히며 때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선생님이 들어오면 “너 왜 우니” 하고 철저하게 착한 아이처럼 위장을 했다. 그래서 하루는 그 친구의 어머니가 학교로 쫓아왔다. 담임선생님께 “저 놈이 우리 아들을 때린다”라고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나의 철저한 위장 때문에 선생님은 친구 어머니께 “이 아이는 모범생이라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다음 날 학교에 가서 그 친구를 골려주었다. 그 친구는 그렇게 놀림을 당하면서도 “강석아, 같이 예수 믿고 교회 좀 다니자. 내가 너를 꼭 천국으로 인도하고 싶어”라며 끈질기게 전도를 했다. 그런데도 나는 교회를 나가지 않았다. 아무리 성탄절에 사탕을 주고 부활절에 공책을 준다고 해도 더 어긋 바라진 심정이었는지 나가지 않았다. 친구와 헤어진 것은 중학생이 된 뒤 친구 아버지가 목사가 되어서 다른 지방의 큰 교회로 부임하면서부터다. 세월은 물처럼 흘러 나는 목사가 되었고 목회를 하면서도 이따금씩 친구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이 밀려오곤 했다. 친구에 대한 그리움도 생겼고 언젠가 친구에게 사과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몇 년 전 그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TV에서 나오는 내 설교 방송을 보고 연락을 했다는 것이다. 지방이었지만 친구는 사업도 잘되고 모든 것이 형통하다고 큰 소리를 뻥뻥 쳤다. 나는 먼저 전화로 사과부터 했다. “친구야, 그때는 내가 너무 미안했어. 방송 설교를 들으면서 얼마나 나를 욕했니? 미안하다. 내가 한번 내려갈게.” 그런데 얼마 뒤 전화를 했더니 결번이라는 안내 음이 흘러나왔다. 왜 그럴까, 몹시 궁금하였지만, 또 세월은 화살처럼 흘러가버렸다. 그러다가 어찌어찌해서 소식을 알게 되었는데 친구는 위암 말기 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바빠도 친구를 위해 기도해주러 한번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 주쯤 뒤에 금쪽같은 시간을 내서 지방병원으로 내려가 보았더니 이미 친구는 하늘나라로 갔고 이제 막 발인을 했다고 했다. 아, 어쩌면 이럴 수가 있을까.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몇 년 전 통화할 때 이미 사업은 부도가 났고 무척 힘들게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친구가 전화번호만 바꾸지 않았더라면 친구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워주었을 텐데, 어쩌면 스트레스를 덜 받아 암도 들지 않았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니 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마침내 친구가 죽어서야 나는 꽃다발을 들고 친구의 무덤을 찾았다. 친구의 시신은 화장을 해서 납골묘를 하였다. 나는 반 평도 안 되는 친구의 작은 무덤 앞에 고개를 떨구고 꽃다발을 헌화하며 용서를 구했다. 마음속으로 이렇게 속삭이고 또 속삭였다. ‘친구야, 네가 나보다 먼저 천국에 갔구나.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니 지금은 하늘나라에서 나를 보고 있겠지. 미안하다. 그런데 그때 왜 전화번호를 바꿨어. 너랑 통화만 되었어도 내가 네 손을 잡아줄 수도 있었을 텐데….’ 인생은 왜 그럴까. 친구가 살았을 적에는 시간을 못 내고 왜 죽은 후에야 아쉬워하며 그리움을 느끼게 된단 말인가. 참으로 미련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애써 쓸어내리며 친구의 무덤 앞에 꽃씨를 한 줌 뿌려놓고 왔다. 이미 봄은 지나갔지만 무덤 앞에 꽃씨는 싹을 틔울 것이고, 올해는 피지 않더라도 내년에는 꽃을 피우리라고 기대를 하면서. 아니, 참으로 속절없기는 하지만 내년 봄에 다시 와서 꽃씨를 뿌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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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친구의 무덤에 꽃을 피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