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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연리지 교회
    지지난 주에는 제주도에서 우리 교회 전반기 교역자 정책 수련회를 가졌습니다. 제주도의 바람과 구름과 하늘과 그 푸른 녹음의 풍경은 언제 보아도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저는 제주도의 바다도 좋아하지만 특별히 교래리 휴양림이나 한라산 생태숲길 같은 곳 걷기를 좋아합니다. 도심에서는 만나볼 수 없는 깊은 원시림을 걷다보면 고요 속의 고요를 듣고 신비 속의 신비를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부교역자들과 함께 교래리 휴양림뿐만 아니라 평지로 잘 조성해 놓은 비자림 휴양림을 걷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그곳에서 한 그루의 나무, 연리지(連理枝)를 보았습니다. 연리지는 뿌리가 다른 나무의 가지들이 서로 엉키고 붙어서 마치 한 그루의 나무처럼 자라는 것을 말합니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연리지를 실제로 보면서 저는 어쩌면 두 나무가 한 나무처럼 붙어서 저렇게 자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안내원에게 물어보았더니, “사람들도 서로 끌리는 사람이 있듯이 숲 속의 나무도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서로 밀어내고 싸워야 정상인데 나무가 저렇게 붙어 있는 것은 무언가 끌리는 힘과 연정과 생명애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고 웃으며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과학적 답변은 아니었지만 그 말을 들으니 연리지가 더 신비로운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사실 연리지는 비좁은 숲 속에서 서로 자라면서 바람에 부딪쳐 상처가 나기도 하고 그러다 또 비를 맞고 이슬을 맞고 햇빛을 맞으며 어느새 그 상처에서 새살이 돋아나 서로 붙어 한 몸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흔히 사람들은 연리지를 사랑나무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저는 한 그루의 연리지 앞에서 한국교회의 모습과 비교해 보았습니다. ‘연리지는 저렇게 서로를 사랑으로 부둥켜안고 한 몸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서로 싸우고 다투며 분열하고만 있을까. 우리도 한 그루의 연리지가 될 수는 없을까.’ 실제로 한 몸을 이룬 연리지는 태풍이나 벼락을 맞아 나뭇가지가 꺾이거나 쓰러져도 다른 반대편 나무에서 영양분을 공급 받아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합니다. 비록 나무이지만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을 담고 있는 모습일까요? 세계 교회사를 보아도 어느 시대이든 서로 싸우고 분열하는 교회는 망했고, 하나 되고 연합하는 교회는 흥했습니다. 만일 우리 교회도 다투고 싸웠더라면 오늘날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30주년을 맞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싸우는 것입니다. 아무리 일을 잘하고 봉사를 많이 하고 헌신을 많이 해도 싸우는 사람은 싫어합니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전도를 많이 한다 하더라도 상대를 증오하고 공격하며 충돌하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평생표어가 ‘사랑하며 섬기는 교회’ 아닙니까? 그런데 교회를 하나로 만들고 연리지 교회를 이루게 하는 것은 딱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띠로만 하나가 가능합니다. 교회는 오만가지 사람이 다 모이는 곳이 아닙니까? 개성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며 출신 지역이 다르고 빈부격차 등 모든 교인들의 구조는 천태만상입니다. 이런 천태만상의 사람들이 서로 자기하고 맞지 않는다고 얼마든지 싸우고 분열할 수 있잖아요. 더구나 교인들의 입이 몇 개입니까? 우리 교회 같은 경우는 수만 개의 입이 있는데 자기 소리를 한 마디씩만 하더라도 얼마나 많은 소리가 나겠습니까. 그럼에도 우리 교회는 정말 바보스러운 교회이고 역설적인 교회이며 공동체 교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연리지 교회를 이루고 있는 것이죠. 그것은 담임목사의 리더십이 출중해서도 아니고 장로님들과 집사님들이 훌륭해서도 아닙니다. 우리 교회 안에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과 생명, 하나님의 사랑을 한 띠로 묶어서 연리지처럼 되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런 마인드로 본다면 다투고 싸우고 분열하는 교회는 주님의 보혈의 능력과 생명의 역사가 없다는 방증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지 못하고 성령의 한 띠로 묶음당하지 못했다는 것이죠. 마귀는 항상 분열하는 자요, 거짓말 하는 자요, 이간질 하는 자요, 다투게 하는 자이지 않습니까? 싸우는 교회는 교회 안에 분열의 영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도 외 없이 주님의 보혈과 생명의 능력보다 인간의 정욕과 사욕이 앞서면 반드시 마귀가 틈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저는 더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요. 오로지 주님의 보혈과 생명과 하나님의 사랑과 섬김으로 성령의 한 띠가 되도록 기도할 뿐이죠. 제주 비자림에서 본 한 그루의 연리지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신비하고 경탄스럽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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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8-07-23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투혼의 추억
    작년 이맘 때 저는 2차 성대 폴립수술을 받았습니다. 10여 년 전 1차 수술은 뭣 모르고 했지만 작년에 2차 수술은 신경이 좀 쓰였습니다. 비후성 심근증이 있는 사람은 전신마취 후에 최소한 호흡곤란이나 드물긴 하지만 심근경색이 올 수 있다고 경고를 받았기 때문이지요. 심장내과와 마취과 선생님이 몇 번이나 그 말을 하였으니 누가 태연할 수 있겠습니까? 아침 일찍 수술 대기실에서 잠시 기다리는 동안 지난날의 삶이 주마등처럼 떠올랐습니다. “아, 나는 누구보다도 성대를 많이 사용했어. 남들이 하는 주일 설교뿐만 아니라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집회를 했던가. 그리고 동굴 같이 답답한 차에서 얼마나 수많은 원고의 내용을 전화로 불러 줬던가. 게다가 외부집회, 특히 수만, 수십만 앞에서 화염을 내 뿜는 야성의 외침들이 내 목을 상하게 한 거야.” 이윽고 수술실로 들어갔습니다. 싸늘하고 음산한 공기가 수술실을 에워싸고 있었지요. 의사선생님의 경고 말씀이 문득 스쳐갔습니다. 그래서 잠시 주님께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주님, 저의 삶이 여기서 끝나지는 않겠지요. 만에 하나 그렇게 된다면 저의 가족들과 성도들이 얼마나 실망을 하겠습니까? 저 역시 아직은 준비가 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죽음이 절대로 두렵지는 않습니다. 주님이 오라고 하시면 미련없이 떠나겠지만요.” 저는 머릿속에 그 생각뿐이었습니다. 마취과 선생님이 저에게 주문을 하였습니다. “하나, 둘, 셋을 따라해 보세요.” 제 기억에 다섯, 여섯까지는 세었는데 그만 깊은 잠에 빠졌고 인공호흡기가 제 호흡을 대신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육신은 잠에 빠졌지만 제 의식은 살아서 잠꼬대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맞아, 나는 지금까지 주님의 소명에 혼을 바치고 산 거야. 매일매일 주님의 면전에서 절규의 산제사를 드리는 투혼의 삶을 살아왔던 거야. 맞아, 그랬어. 그랬던 거야.” 그 때 간호사 선생님이 저를 흔들어대며 깨웠습니다. 제 어깨를 때리며 야단을 쳤습니다. “소강석님, 소리 지르지 마세요. 숨을 쉬세요. 크게 쉬세요. 입을 다물고 말하지 마세요. 코로 숨을 쉬세요.” 마침내 잘 깨어난 것입니다. 감격의 순간이었습니다. 인공호흡기가 아니라 제 스스로 숨을 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격이고 경탄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새로웠고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눈부시게 느껴졌습니다. 병실 창문으로 보이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과 풀잎들이 신비하게 느껴졌고 살아서 숨을 쉬고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가를 새삼 깨달았습니다. 저는 3주 동안 침묵을 지켜야 했습니다. 한 주간은 기도원에서 있었고, 또 한 주간은 제주도에서 있었고, 또 한 주간은 일본 온천 지역으로 갔습니다. 제주도에서도 일본에서도 거의 숲 속을 다녔습니다. 3주 동안 숲속에서 모든 자연의 생명체와 대화를 하고 함께 호흡을 하였습니다. 갑바도기아의 교부였던 닛사의 그레고리가 청결한 마음을 가졌을 때 자연과 교감하게 될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말한 것처럼 숲속에서 제 마음은 더 깊은 숲속으로 향하였고 끝없는 원시림 속으로 향하였습니다. 그곳에서 고요 속의 고요를 듣고 신비 속의 신비를 느끼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마치 상처 입은 독수리가 바위 밑에서 웅크리고 있다가 회복한 후 다시 비상하듯이 그 숲속에서 모든 생명체와 대화하고 호흡을 하면서 투혼을 불태우고 있었습니다. 그런 후에 조심스럽게 주일설교를 시작했고 바로 이어서 여름수련회를 인도했습니다. 그리고 어언 1년을 맞이한 것입니다. 지난 1년을 돌아보니, 어떻게 살아 온지도 모르게 달려왔습니다. 마치, 진한 적토 빛 말갈기를 휘날리며 거친 광야를 달려가는 군마처럼 저는 주님을 태우고 달리고 달렸습니다. 황사를 나부끼며 주님을 모시고 달리고 달렸던 1년을 회상하니 아련하고 꿈 같기만 합니다. 아슬아슬하긴 하였지만 그래도 주님의 은혜로 쓰러지지도 않고 목이 그리 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 가 지난 주는 모든 것이 감사해서 중직자들을 모시고 식사를 대접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도무지 식사 한끼를 대접할 시간이 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든지 한 번의 기회를 만들어야 하겠지만요. 이번주는 교역자수련회를 하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이대로 얼마나 달려갈 수 있을까. 제 아무리 잘 달리는 군마도 언젠가는 쓰러지듯이 나 역시도 쓰러지는 날이 있겠지. 아니면 거침없이 달리다가도 어느덧 요단강 앞에 멈추게 될 거고... 그러나 그때까지 달리고 달릴 거야. 그러다가 언젠가 나의 영혼은 영원한 불사조가 되어 저 하늘나라로 훌훌 날아가겠지.” 지난 한주는 유달리도 숲이 그리웠습니다. 끝없는 원시림 속을 걷고 싶었습니다. 투혼의 추억이 그리웠기 때문이죠. 그래서 교래리 휴양림 숲길을 걸으며 주님께 또 속삭였지요. “주님, 지금은 여름입니다. 아직도 저는 젊습니다. 젊기에 여전히 정염의 불꽃이 되고 싶습니다. 가을이 오려면 아직도 멀었는데 지금 시들어서야 되겠습니까? 작년에 불태웠던 투혼의 불길이 더 타오르게 하소서. 여름은 저의 계절이고 싶습니다. 작년의 투혼은 추억이 아니라 오늘의 연속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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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8-07-15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광대 목회, 광대 설교 2
    지난 주에 저의 목양칼럼 ‘광대 목회, 광대 설교’의 글이 네이버와 다음에 실렸는데 반향이 제법 컸다고 합니다. 많은 분들에게 신선한 충격이 되었지만 개중에는 비판하는 분도 있었다고 하지요. 비판의 골자는 설교자와 복음의 격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죠. 즉 약장수 같은 설교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백번 옳은 말이라고 여겼습니다. 왜냐면 광대 설교론을 잘못 이해하여 설교자가 청중들에게 엔터테인먼트나 하는 유사광대노릇을 할 수 있기 때문이죠. 광대 설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 설교자의 바보스러움과 역설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행동과 설교를 봐도 당시 정황에서 보면 바보스럽고 역설적일 때가 있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 역시 자신이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때 구경거리(광대)가 되었다고 했잖아요.(고전4:9-10) 두 번째 중요한 것은 성경 본문과 청중을 향한 애절함과 열정입니다. 억지로 청중을 웃기고 폭소를 자아내려고 하는 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설교가 개그콘서트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가수들도 대중적 소통과 감동을 위하여 청중을 향한 애절함과 예술적 투혼을 발휘하지 않습니까? 하물며 설교자는 시대와 소통하고 청중을 감동시키기 위하여 이런 애절함과 열정이 더 있어야 하겠지요. 바로 그 애틋한 열정과 신앙적 투혼으로 이 시대에 하나님의 마음과 아픔, 그리고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청중의 가슴에 울렁거리도록 전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세 번째는 필요에 따라 설교자의 자기 부인, 자기 비하가 필요합니다. 일부러 설교자가 바보가 되라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복음을 더 잘 드러내고 하나님의 마음을 더 잘 전달하기 위하여 자기 부인이나 비하를 통하여 하나님의 광대가 되자는 것이죠. 지금까지의 기존 설교학은 성경 본문 속에서 설교의 씨앗을 찾아내어 신학적 논리로 3대지 설교를 만들어왔습니다. 그리고 3대지의 메시지를 잘 전달하기 위해 본문과 적절히 연결되는 예화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다가 조금 발전한 설교가 ‘스토리텔링’이었습니다. 80년대 이후에 생겨난 미국의 새로운 교회, 곧 커뮤니티 처치는 대부분이 스토리텔링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미국의 설교학자 스콧 깁스의 표현대로 교회 공동체성이 상실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남아공의 스텔른보쉬대학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광대 설교이론이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에 의하면 광대 설교를 하게 되면 몇 가지 결과가 나타난다고 하는데요, 첫째는 바보스러운 교회 공동체, 둘째는 역설적 교회 공동체, 셋째는 교회의 공공성과 공동체성이어야 한다고 하죠. 이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교회 모습이기도 합니다. 물론 설교자가 광대가 되지 않고 설교자의 격을 높이며 설교 전달 방법 역시 아주 중후하고 격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게 하면서도 교회가 바보스러운 공동체를 이루고 역설적 공동체를 이루며 공공성과 공동체성을 회복할 수 있다면 말이죠. 그러나 지금 한국교회는 설교자의 격이 정형화되고 고품격 콘텐츠의 메시지가 전달이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교인들은 영악하고 똑똑해 지는 걸까요? 왜 그토록 자기 선악의 논리와 윤리적 기준으로만 판단하며, 서로 증오하고 다투며 분열을 반복하고 있는 걸까요? 지금 한국교회는 과연 공동체 회복과 공공성의 교회를 세우고 있습니까? 서로 힘을 모아 교회 생태계를 지키려고 킹덤처치를 세우고 있는가요? 광대 설교론이란 절대로 엔터테인먼트나 각설이 타령식의 속화적 설교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복음과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더 드러내고 시대와 청중을 향해 대중적 소통을 하기 위해서 애절함의 혼을 가지고 때때로 바보스러움과 역설적 자기비하를 하자는 것이죠. 그러면 진정한 광대 설교와 짝퉁 광대 설교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간단합니다. 청중을 울리건 웃기건 간에 그 목적이 하나님께 유익이 되고 영광이 되며, 동시에 청중의 가슴에 울먹이는 감동을 주기 위함에 있다면 진정한 광대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자의 자기 유익과 인기를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은 사이비 광대 설교요, 짝퉁 광대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우리 교회는 철저하게 바보스러운 공동체를 이루어 왔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가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12년째를 해 왔잖아요. 더구나 우리 교회 부흥과는 전혀 관계도 없는 한국교회 생태계 보호를 위한 사역을 변함없이 해 왔지요. 이런 바보스러운 공동체를 이루지 않았더라면 저는 진작 우리 교회에서 쫓겨나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성도들의 바보스러움 때문에 우리 교회는 여전히 역설적 공동체를 이루고 있고 사나 죽으나 전도와 기도, 사명 밖에 모르는 젊은 교회로 매주 다시 태어나고 있습니다. 또한 공공성과 공동체성을 발휘하여 묵묵히 한국교회를 섬기며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결코 설교자의 격을 운운하다가 청중에게 전혀 감동을 주지 못하는 고지식한 설교자보다는 복음과 하나님의 사랑으로 시대와 소통하며 청중에게 울먹임과 감동을 주는 진정한 하나님의 광대가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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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7-08
  • [소강석 목사의 목양 칼럼] 광대 목회, 광대 설교
    지난주 수요일 저녁예배 후에 총신대 신대원 김덕현 교수님으로부터 우리 부교역자들과 함께 ‘광대 설교론’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설교는 명제적이고 선포적이며 가르치는 설교였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주제설교, 대지설교, 강해설교가 중심을 이루었습니다. 최근에 와서 스토리 설교와 내러티브 설교로 발전 하였지만, 좀 더 역설적이고 화행적 설교는 ‘광대 설교’라는 것입니다. 광대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설교자가 먼저 어리석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수사학이나 변증학은 아름다운 언어, 논리, 지혜, 웅변 등을 중요시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사도바울은 전혀 그런 기법을 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역설적이고 어리석은 이야기를 많이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팔복 설교도 당시는 힘과 정복을 통해서 땅을 차지하는 것이지 어떻게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할 수 있습니까? 고린도전서1장에 나타난 바울의 설교 역시 설교자의 바보스러움을 말하는 것이며 십자가를 선포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것이고 미련함의 극치였다는 것입니다. 광대가 무엇입니까? 광대는 시대의 아픔과 한, 정서를 마음에 담아 말과 음악과 춤 등을 통해서 인생의 희로애락을 전하며 마음을 치유하고 힘과 용기를 주는 존재가 아닙니까? 그러므로 광대 설교자는 본문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광대적 감성으로 전하는 것입니다. 본문이 웃기면 웃기는 것이고, 본문이 슬프면 슬프게 전달하고, 본문이 진지하면 진지하게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설교자가 먼저 자기비하와 자기부인을 해야 합니다. 점잖아 가지고 어떻게 광대 설교를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지금까지 기존의 설교학은 목회자의 고상함과 우아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품격과 본문의 메시지를 드러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설교가 정형화, 제도화, 화석화 되다 보니까 설교자만 드러나고 진정한 하나님의 복음이 드러나지 않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광대 설교는 때로 설교자가 망가지고 품격이 떨어지더라도 하나님의 마음, 숨겨져 있는 감정이 설교자를 통해서 청중들에게 전달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설교자에겐 전령, 목양자, 스토리텔러, 그리고 증인의 이미지와 역할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마음과 아픔, 사랑과 기쁨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그 본문의 사건과 이야기가 설교자의 감성을 호흡하게 하고 파도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호흡과 파도를 통하여 역설적 복음과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설교자가 철저하게 하나님의 광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맨 먼저 광대 설교론을 쓴 분이 김덕현 교수님의 스승이신 요한 H. 실리에 교수님입니다. 저는 몇 년 전 그 분이 쓴 ‘하나님의 어릿광대’라는 책을 읽으면서 어렴풋이 “나는 철저하게 광대 목회자요, 광대 설교자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생태적으로 광대의 끼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입니다. 게다가 맨땅, 맨몸, 맨손으로 개척한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이 환경적으로 광대 목회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개척할 때 오신 분들은 대부분 상처와 아픔이 많고 낮은 자존감을 갖고 있어서 위로와 힐링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광대 사역을 하게 된 것입니다. 교인 집에 심방을 가도 그들의 아픔을 가슴으로 함께 느끼며 광대적 기도를 해 주었고, 복음을 역설적으로 전하며 반전의 꿈을 심어 주었습니다. 또한 설교 할 때도 이중시점을 사용하면서 본문의 절정을 극화시키기 위해 중간 중간에 찬양을 하고 필요할 때는 대중가요도 개사하여 부를 때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김덕현 교수님에 의하면 본문만 확실하게 잘 드러내고 절정을 극화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언어를 쓰거나 노래를 부르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설교의 기준이나 잣대가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말입니다. 사실 제 설교가 방송으로 나가면서 많은 비판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목회자들이 저의 광대적 설교 스타일을 따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광대설교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제 설교를 이론적이고 신학적으로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책이 나왔고 지지하는 교수님이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저는 광대 설교론을 잘 발전시켜서 정말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내고 복음을 역설적으로 전달하며 수천 년 전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의 언어와 혼과 노래로 전달하는 광대 설교자의 모델이 되어갈 것을 다짐했습니다. 김덕현 교수님을 알게 된 것이 참 감사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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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8-07-01
  • [소강석 목사의 목양 칼럼] 초여름의 크리스마스
    올해 참전용사 초청행사는 어느 해보다 언론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국민일보를 비롯해 조선일보, 동아일보, 문화일보, 경향신문, 매일경제, 아시아투데이, 크리스천투데이 등 메이저 신문과 수많은 인터넷 언론이 다루어 주었습니다. 그 중에서 동아일보 김갑식 문화전문기자가 쓴 글이 아주 독특하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기사 제목은 ‘6월의 크리스마스’였습니다. 흥남철수작전이 펼쳐진 날은 1950년 12월 크리스마스 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68년의 세월이 지나서 새에덴교회에서 그 날의 영웅들인 알몬드 소장, 포니 대령, 현봉학 박사의 후손들 그리고 메러디스빅토리호의 1등 항해사 로버트 러니 예비역 해군 제독을 비롯하여 참전 용사와 가족 45명을 초청하였다고 소개한 것입니다. 러니 제독은 우리 교회에서 열린 한국전 68주년 상기 참전용사 초청, 평화 기원 예배에 참석하여 “진짜 영웅은 내가 아니라 그때 자유를 찾아 메러디스빅토리호에 오른 피난민들”이라고 고백하며 뜨거운 감동을 선사하였습니다. 특별히 제가 설교하는 도중에 순간적인 착상이 떠올라 흥남철수작전 당시 15살이었던 김영숙 수녀와 러니 제독이 다시 만나 손을 잡고 고마워하는 장면을 연출하였는데 김갑식 기자가 그 사진을 배경으로 ‘6월의 크리스마스’라는 아름다운 기사를 써 준 것입니다. 1950년의 크리스마스쯤에 수행했던 흥남철수작전을 이제는 새에덴교회가 다시 그들에게 6월의 크리스마스로 꽃피우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기자는 왜 새에덴교회가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하게 되었는가를 소개하였습니다. 직접 이름까지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레리 레딕이라는 노병과 얽힌 이야기도 언급했습니다. 저는 2007년 1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마틴 루터 킹 퍼레이드 전야제에서 레리 레딕이라는 흑인 노병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허리에 총 맞은 상처를 보여주며 떠듬떠듬 거리는 말로 자기는 6 · 25전쟁 때 한국을 위해 싸운 참전 용사인데 그 뒤로 한국을 한 번도 가보지 못해 죽기 전에 꼭 한번 방문하고 싶다며 눈물을 글썽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자리에서 큰절을 하고 반드시 한국을 방문할 수 있도록 초청하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해에 바로 초청행사를 시작하였는데 참전용사들이 너무 감동하는 것을 보고 그 다음 해에도 초청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12년을 한결같이 해 온 것입니다. 기자도 소목사가 한결같이 12년 동안 약속을 지켜 왔다고 평가해주었습니다. 저는 그 기사를 읽고 저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아, 내가 12년을 이렇게 해 왔구나. 그간에 새에덴의 성도들은 얼마나 많은 헌신과 희생을 해야 했던가. 이것은 우리 교회만의 일이 아니라 한국교회를 대표하여 보은의 정신을 살리는 일이 아니었던가. 아니, 대한민국 국민을 대표로 하는 일이었으리라.” 저 자신이 대견스럽게 생각이 되었고 그렇게 성도들이 고마울 수가 없었습니다. 참으로 우리 교회가 자랑스럽게 느껴졌습니다. 대사회적 순기능과 선순환의 역할을 하며 목회적 대형교회의 자존심을 세워준 교회이니까요. 그리고 우리 한국교회의 위상을 세워주었고 해외에 대한민국의 자존심을 세워준 교회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작년에 이어 올해도 문재인 대통령께서 축하와 감사의 메시지를 보내 주셨고 또 트럼프 대통령도 축하 메시지를 보내주었습니다. 특별히 트럼프 대통령은 아주 이례적으로 “새에덴교회가 미국 정부에서 해야 하는 그 신성한 의무를 대신해 주심으로써 미국의 전쟁 영웅들의 사기를 높여주며 미국의 정신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저는 미국 온 국민들을 대표하여, 지난 12년 동안 매년 한국전 참전용사들을 위한 보은행사를 열어주신 새에덴교회와 소강석 목사님께 감사를 표합니다”라는 문구까지 넣어 직접 사인을 해서 보내 준 것입니다. 김갑식 기자의 글처럼 우리 교회는 12월의 크리스마스를 6월의 크리스마스로 꽃피운 교회입니다. 올 초여름의 크리스마스는 흥남부두의 혹독한 추위 대신에 더운 가슴을 선사해 주었습니다. 눈보라 대신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게 해 준 크리스마스였습니다. 그들이 68년 후 이렇게 눈부시게 발전한 서울의 모습을 보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기 때문이죠. 또 우리 교회가 이렇게 잊지 않고 초청해 주며 극진히 대접해 주는 정성에 감동하여 순간순간 푸른 눈동자에 뜨거운 이슬을 촉촉이 적셨고 마침내 공항을 떠나면서 눈물을 비오듯 흘렸기 때문입니다. 초여름의 크리스마스는 유난히도 그들의 가슴을 덥게 하였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울먹이는 가슴으로 한반도에 평화의 봄이 오고 평화의 꽃이 피기를 기도해주었습니다. 이제 6월의 크리스마스는 68년 전의 희미한 추억을 되살리는 보은의 행사를 넘어서 남북화합과 평화의 꽃으로 피어나리라고 확신합니다. 아, 초여름의 크리스마스여, 곧 우리 땅에 피어나게 될 평화의 꽃이여!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8-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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