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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교사들을 지키고, 그들을 응원하자’
- 인천의 한 초등학교에서 특수학급을 담당 교사가 6월 23일에 교실에서 학생으로부터 머리채를 잡히고 의자에서 넘어트렸다. 그 교사는 전치 6주 진단을 받았다. 이런 폭행은 지난 2개월간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교사는 학생 신상정보 노출 우려와 교사를 탓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이기지 못해 이를 드러내지 못했다. 지난 6월 30일 양천구 모 초등학교에서도 교사가 학생들이 보는 데서 학생에게 폭행을 당했다. 6월 18일 서초구 모 초등학교에서도 새내기 교사가 원인을 알수 없이 교내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이런 사례를 들고자 하면 슬플 정도로 수없이 많다. 나라의 백년지대계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 이상의 국난이 무엇이고, 이것 이상의 위기가 무엇인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절대로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다. 얼마전 교회에서도 필자는 황당한 경우를 보았다. 교회학교 학생이 여전도사님의 머리채를 잡아채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광경이었다. 한두번도 아니고 거의 대여섯번을 반복했다. 아버지는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았다. 옆에서 지켜본 필자도 그 아이의 기세에, 아버지의 소극적 태도에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하고 물끄러니 바라보는 초라한 처지가 되었다. 그 와중에도 전도사님은 아이를 제압하거나 나무라지 않고 그 수모를 고스란이 당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 전도사님의 인내심이 높이 보이는 순간이었다. 어쩌다 우리 사회가, 교육이 그리고 심지어 교회조차 이렇게 되었을까? 그 언젠가 교사의 정년을 2년 줄이기 위해 교사들의 자존심과 교권을 잔인하게 짓밟던 일이 생각났다. 소위 “000세대”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아이들은 대담해졌다. 아이들은 걸핏하면 112에 신고하고, 여차하면 학부모들은 선생들에게 폭언과 손찌검을 했다. 여기에 학교 당국과 정부는 여론의 눈치를 살피며 적극적으로 교사들을 지켜주지 못했다. 슬픈 일이다. 교육이 무너지면 미래가 무너진다. 자녀가 귀하면 교사를 존중해야 한다. 왜 부모들은 이런 사실을 모를까? 그들의 눈에는 성적표와 대학 간판들만 보이는 것일까? 그렇게 키워낸 아이들이 부모는 물론 이 사회와 구성원들을 귀하게 여길 수 있을까? 그들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사람으로 살아갈지 상상이나 하고 있을까? 자기 자녀들의 허물에는 철저하게 눈감고 변명하면서, 자녀들을 향한 교사의 매, 설사 그것이 과하다 하더라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할까? 지금 우리나라의 이 정도의 성장은 우리를 매로 때리시던 그 선생님들 덕분이다. 필자의 학생 시절, 우리들은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맞았다고 아버지에게 일러바치면, 오히려 무슨 맞을 짓을 했느냐고 아버지에게 혼이 났던 기억이 있다. 이것이 정상적인 교육이다. 부모는 교사를 신뢰하고, 교사는 소신에 찬 모습을 잃으면 안된다. 학교는 교사의 교권을 지켜주고, 당국은 교육의 질서와 권위를 잃으면 안된다. 적어도 교육만은 여론에 휘둘리면 안된다. 더 이상 불확실하고 조작적인 여론에 의해 우리나라의 백년지대계가 무어지면 안된다. 교회와 성도들은 이 문제에 대해 조금은 공격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 지금 이 시대의 정치가들은 모두 여론과 표계산에 온통 집중되어 있어 이런 진지한 고민에 별로 관심이 없다. 이 문제를 본질적으로 다시 살펴보는 진지한 노력이 필요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교회밖에 없다. 목회자들의 대오각성과 결코 방임하지 않겠다는 결의가 필요하다. 지금도 교사들은 교사다움을 위해 출근하고 있다. 그런 교사들에게 “포기하지 말아요. 포기하는 순간에 대한민국의 미래는 무너지고, 돌아서는 순간에 오늘의 현실이 수렁에 빠집니다”라고 당부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런 교사들을 믿고 응원하고 함께 해야 한다. 조금은 더 적극적으로 지켜주고 보호해야 한다. 왜 이런 당연하고 확실한 이야기를 이처럼 진지하고 감동적으로 해야할까? 이것이 우리의 불행이요, 아픔이다. 이 불행과 아픔을 치료할 수 있는 길은 교사들의 결의와 우리들의 응답으로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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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교사들을 지키고, 그들을 응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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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절차는 위법인데 결과물은 합헌이라?’
- 필자가 대학에서 일할 때, 발생한 각종 소송에 대응한 일이 여러번 있었다. 그 때마다 우리 일을 맡은 변호사가 필자에게 늘 했던 말이 있다. “본안을 다투기보다 절차상의 하자를 다투는 것이 최선입니다. 절차상의 하자가 발생하면 법원은 본안 자체를 다투기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 만큼 법원과 법관은 민주적 절차와 과정을 중히 여기고 이것이 무시된 법안 자체는 다루지 않는다는 설명이었다. 그런데 최근 헌법재판소가 일명 ‘검수완박 법안’에 대해 법안 자체는 유효하다는 결정을 내렸다. 근 일년 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안건조정위원회를 그야말로 기기묘묘한 방법으로 통과했다. 안건조정위란 다수 정당이 수적 우세를 내세워 자당에 유리한 법안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하는 입법 장치이다. 이에 더불어민주당은 6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위원회의 과반수를 획득하기 위해 2021년 민주당을 탈당한 무소속 양향자 의원을 2022년 4월 법사위로 사·보임시켰으나 양 의원이 검수완박 법안에 반대하자 민형배 의원을 탈당시켜 안건조정위원으로 만들어 결국 해당 법안 중재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대하여 헌법재판소는 국민의힘 의원들의 심의·표결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절차상의 하자를 인정하면서도 법안 자체는 유효하다는 이해불가능한 판단을 내놓았다. 입법 절차는 위헌이지만 위법한 절차에서 나온 법안을 인정함으로 정상적인 법감정을 가진 국민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문제는 검수완박 법안에 가표를 던진 4인의 재판관인 유남석·김기영·문형배 재판관은 우리법연구회 소속, 이석태 재판관은 민변과 참여연대 출신으로 모두 당시 여당이 지명한 재판관들이다. 이런 구성으로 볼 때 예정된 결과일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헌재의 결정이 정치적 결정인 것에 대한 아쉬움을 던져 버릴 수 없다. 헌법재판소는 이 땅의 사법적 권위의 최종점에 서 있어야 한다. 그 권위는 의심받아서는 안되며, 어떤 정치적 성향이나 이익에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아무리 정치적 성향이 분명하다 할지라도 최소한 법정신과 절차에 대한 기준은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 이러한 법원의 최종적 권위마저도 눈감고 정치적 판결을 내린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대하여 공분하는 것은 비단 필자만의 시각이 아닐 것이다. 민주사회의 근간은 법이고, 이 법은 언제나 공정해야 하고, 그 정신과 의미에 철두철미해야 하며, 이것은 상급심으로 갈수록 더욱 치열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헌재의 위치는 누가 뭐라고 해도 그 중요성을 시비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하므로 그의 결정도 도전 받아서는 안된다. 그런데 지금 헌재는 의심과 비난을 넘어 조롱을 받고 있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사법적 권위가 대단한 도전에 직면에 있으며, 이를 해결하지 못하면 우리 사회가 궁극적으로 위기에 처할 수 있다는 불행한 신호이다. 교회와 목회자들은 이 일에 주목하고 관심을 놓지 말아야 한다. 이는 한갓 일부 정치인이나 정당의 문제가 아니다. 국운과 관계된 것이고 앞으로 사법적 판단을 받을 수 있는 사안들의 이정표가 될 수 있다. 법치 국가에서 법을 수호해야 할 법원이 스스로 법과 절차를 무시하고 경시한다면, 더 이상 법치국가일 수가 없다. 법원이 이러하다면 과연 이를 바로 잡을 책무가 교회에 있을 수도 있다. 법의 깊은 뿌리에는 인간의 양심과 사회적 윤리성이 자리잡고 있다. 이것을 깨우고 역동적으로 활성화시켜 법으로 법이 되게 하는 법윤리의 각성을 촉구할 수 있는 것은 종교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민주사회의 양심적 마지노선으로서, 국민적 공감을 얻지 못하는 판결을 계속하는 사법부에 대한 경종을 울리고, 우리 스스로도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 자정 능력을 고양하여 반민주적 적폐들을 응징할 수 있는 역량을 모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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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절차는 위법인데 결과물은 합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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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노란 봉투, 파란 봉투, 찢어진 봉투!’
- 2014년 쌍용자동차 파업에 동참한 노조원들에게 47억원 배상 판결이 내려진 후 시민들이 노조원들을 돕기 위해 노란봉투에 성금을 담아 47,000여명의 시민이 14억 4천만 원의 성금을 모은 일을 계기로 '노란봉투법'이라는 말이 생겼다. 이 법의 취지는 기본적으로, 정당한 쟁의행위와 그렇지 않은 불법적 쟁의행위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세워서, 정당한 쟁의행위에 대한 손배, 가압류가 이루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 법을 발의한 사람들은 쟁의행위는 분명히 법으로 보장된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사용자가 '손해배상과 가압류'라는 민사소송을 통해 정당한 쟁의행위를 저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주장한다. 이를 위한 해당 법안은 2015년 4월 새정치민주연합(현재 더불어민주당) 의원들 34명이 '노란봉투법'을 발의하였고, 19대와 20대 국회에서 연달아 폐기가 되었고, 21대 국회에서는 4건(민주당 3건과 정의당 1건)의 노란봉투법이 발의되었다가 결국 금년에 민주당과 정의당 위원만 참여해 찬성 9표, 반대 0표로 노란봉투법이 상임위 문턱을 넘었다. 모든 법이 그러하지만, 나름대로 정당성과 합법성을 가지고 있다. 법 자체의 정당성과 합법성만을 보면 불필요한 법이 없기 마련이다. 그런면에서 노란봉투법이 정당성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모든 것에 상대가 있듯이 사용자들의 주장도 반영할 수 있는 법이 필요할지 모른다. 이것을 필자는 ‘파란봉투법’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분명히 우리나라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 조정법’ 제3조(손해배상 청구의 제한)에 의하면 “사용자는 이 법에 의한 단체교섭 또는 쟁의행위로 인하여 손해를 입은 경우에 노동조합 또는 근로자에 대하여 그 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노란봉투법은 이 법 조항으로는 근로자의 쟁의권을 완전히 보장받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최근 우리는 노동조합의 과격한 정치 투쟁과 노조의 설립목적에 반하는 파업에 의해 과도한 투쟁으로 인해 막대한 손실을 보았다. 이것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마음에는 노조를 향한 심정적인 지지를 철회하면서 근심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다. 또한 노조는 반드시 개혁되어야 한다는 귀족노조에 대한 반발심리가 확장되고 있다. 회계 장부의 공개를 거부하고, 국민 혈세로 지원받은 경비의 지출 내역을 밝히지 못하고 있다. 귀족 노조의 전횡이 만천하에 드러난 시점에서 더 이상 순수한 노동자의 권익 대변자의 역할을 못하고 있다. 오죽하면 젊은이들이 이에 반발하여 제3의 노조를 만들고 스스로를 지키고 있는가? 이런 시점에서 다수의 힘으로 등장한 노란봉투법에 대하여 국민의 가슴 속에는 파란봉투법이 싹트고 있다. 사용자가 마음대로 기업활동을 할 수 있고, 일자리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법, 사용자들이 마음놓고 기업의 능력을 고양할 수 있는 법, 악덕 사용자들은 반드시 법으로 처단하였겠지만, 사용자들의 건강한 기업활동을 보장할 수 있는 파란봉투법을 만들어야 한다. 이 시대는 노란 봉투법도 필요하고 파란 봉투법도 필요하다. 어느 한편만을 위한 법이 득세할 경우 이 국민들에게 그 봉투법들은 찢어진 봉투법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언제부터인가 진영논리가 득세하고, 같은 편은 무조건 선이고 상대는 무조건 악이라는 편가르기가 만들어낸 법이라면 그 법은 찢어진 봉투법이다. 비오는 골목실을 걸어가는 다정한 아이들의 우산이 보기 좋듯이 우리들의 노동환경에서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거기에 섞여 있는 찢어진 우산도 빨강 우산과 파란 우산과 함께 빗속에서 다정하게 걸어간다. 우리의 노사도 그렇게 다정하게 보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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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노란 봉투, 파란 봉투, 찢어진 봉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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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간첩 수사, 공안정국이 아니다.’
- ‘간첩단 사건’이 새해 벽두부터 핵심 용어로 언론에 보도되고 있다. 수사당국이 민노총·시민단체를 앞세워 대정부 투쟁을 하라는 북한의 지령을 받은 제주 간첩단 적발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와 더불어 文정부 시절에 간첩수사는 손을 놓았다는 주장이 그의 재임기간 동안 고작 간첩 적발이 3명뿐이었다는 사실과 더불어 회자되고 있다. 이 때문에 국민은 북한 지령을 받고 투쟁하라는 지령을 받은 ‘제주 간첩단’ 사건과 창원·전주 지하조직에 대한 수사 정황을 지켜보고 있다. 그런데 언론들은 지금 정당·노조를 포함한 사회 각 계층에 대한 간첩 침투 사건은 빙산의 일각일 것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언론들이 언급한 이런 간첩단 사건은 이미 작년에 국정원과 검찰이 경남 지역과 제주도에서 대대적인 압수수색을 실시한 바 있어 많은 자료를 축적하고 있는 듯하다. 당시 검찰은 이들이 소위 ‘민중자통전위’를 만들었다고 보았지만 정권의 성향상 본격적인 수사를 하지 못하다가 정권 교체 이후 새해 들어 검찰의 간첩단 수사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이는 늦었지만 당연한 수순이요, 북의 도발행위가 노골화되는 가운데 국내에 침투한 간첩은 물론 이를 지원하고 협력하는 세력에 대한 수사와 법적 응징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일부 세력들이 이 사건들을 윤석열 정부의 신공안정국으로 몰아붙이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적지 않게 당황하고 있다. 왜냐하면 수사당국은 이번 지하조직 규모가 전국에 걸쳐 있고, 1992년 이른바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 이후 최대 규모의 간첩단이 존재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대규모 간첩단 혐의가 있음에 불구하고 일부에서는 아직 구속된 사람이 없다는 수사상의 진도를 문제삼아 전형적인 종북몰이를 시작하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결국 공안당국이 연초부터 진보 단체에 대한 압수수색을 필두로 본격적인 간첩단 수사에 전력할 것이고, 진보 단체들은 강력한 투쟁으로 맞설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투쟁은 명백한 반국민적 행위로 볼 수밖에 없다. 간첩 적발을 포함한 대북정책에서 지난 정권은 비굴할 정도로 저자세였고, 자해적인 국방정책과 굴욕적인 대북 외교를 전개함으로 스스로 무장해제한 안보 문제는 이만저만한 국민적 근심이 아니었다. 북한을 달래고 지원하면 우리는 안전할 것이라는 초라하고 순진한 대북전략이 가져온 필연적인 결과일 뿐이다. 지금이라도 이를 바로 잡는 것이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지금 윤석력 정부가 지향하고 있는 대북 외교는 비교적 정확한 방향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별히 대북 강력 메시지와 구체적인 행동은 곧장 우리의 안보와 평화를 뒷받침할 것이다. 구걸하는 안보가 아닌 지켜내는 안보가 진정한 안보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향하여 구체적인 적대행각과 도전을 서슴지 않는 북한에 대해서 우리가 보여줄 것은 힘의 우위밖에 없다. 그들이 가진 비대칭 전력인 핵무기가 오히려 그들의 자승자박이 되게 해야 한다. 그것을 가지고 있음 자체가 스스로 무너질 수 있는 요인임을 깨닫게 해야 한다. 어떤 이유로도 지금 간첩 수사를 막거나 비판해서는 안된다. 결국 수사결과가 모든 것에 대한 의심에 대답을 줄 것이다. 정말 정략적으로 이용한 것인지, 아니면 생각하기도 싫은 거대한 간첩조직이 실제 있는지는 수사 결과가 말할 것이다. 그때 가서 국민적 판단이 가해지면 된다. 우리 국민들이 고작 공안 정국을 감당해 내지 못할 정도로 무력한 국민이 아니다. 누구보다 정확하고 단호하게 심판할 것이다. 진정한 간첩이라면 그들과 그 비호세력에 대한 철퇴를, 정략적 공안정국 조장이라면 역시 감당하기 힘든 국민적 저항에 부딪힐 것이다. 지금은 검찰과 국정원의 노력을 성원하고 지원해야 한다. 만일 그들을 방해하고 흔들어 위협하는 세력이 있다면 그들이 곧 제거되어야 할 반국가적 간첩단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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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간첩 수사, 공안정국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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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노조의 적폐청산, 노조가 답하라’
- 언제부터 우리 사회에서 ‘노조가 생기면 기업이 망한다’는 자조섞인 말이 회자되었다. 그 배경에는 ‘귀족노조’, ‘고용세습’, ‘채용장사’, ‘거대권력’... 등등 부정적 용어들이 노조의 이미지를 훼손시키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대강성노조는 자신들의 힘과 정치적 영향력을 믿고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했고, 습관적으로 파업을 강행함으로 스스로 존재 이유를 부정했다. 최근에 정부의 원칙적이고 강경한 입장에 의해 진압된 화물연대 노조의 파업의 의미는 이미 그들을 향한 국민적 지지가 철회되었음이다. 윤석렬 정부가 더욱 강력하게 노동개혁을 부르짖을 수 있는 원인도 노조가 스스로헌납한 것이다. 지금 정부는 노조의 자금을 들여다 보고 있다. 이 분야 전문 수사관들이 들여다보기 시작했다면 이미 그 결말도 충분히 예측가능하다. 그러기에 국민이 무서워서도 정부는 어물쩡 노조와 타협하는 일은 없을 듯하다. 어쩌면 노조 입장에서 보면 출범이래 최대의 위기일 것이지만, 국민적 시각에서 보면 제대로 된 수술대 위에 올려놓은 샘이다. 노조는 그야말로 노동자의 권익과 복지를 위해 존재하는 조직이다. 건전한 노조는 노동권의 질을 향상시키고, 양질의 제품으로 응답한다. 그런데 노조가 사업주의 갑의 위치에 서면서부터, 사업주는 파업으로 인한 엄청난 손실을 감수하느니보다 적당한 선에서 그들의 요구를 들어줌으로서 궁극적으로 노조의 힘과 영향력을 키워주었고, 이런 내성과 경험을 바탕으로 노조는 그들이 넘어설 필요도 없는 영역으로 들어서고 말았다. 지금 노조를 향한 사회적 시선은 차갑다 못해 냉소적이다. 노조뿐만 아니라 공공의 이익을 담보하고 있는 집단의 지나친 이기주의도 비판의 도마위에 올라 있다. 이 두 그룹의 공통점은 시위, 즉 큰 목소리에 있다. 언제부터인가 공권력이 지나치게 민원에 위축되어 있다. 민원은 곧 자신의 승진과 보직에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공무원들의 보신주의는 목소리의 크기에 따라 응답하는 속도와 내용이 달랐다. 그러다보니 너도 나도 할 것없이 소리지르고, 트집잡아 고발 고소하는 최악의 사회 구조를 만들고 말았다. 이제라도 윤석렬 정부가 노조 적폐 청산에 칼을 빼든 것은 진영 논리를 떠나 국민적 환영을 받을 일이다. 우리는 지난 화물연대 파업에서 보여준 정부의 단호하고 명확한 입장이 통할 수 있었던 것도 노조의 명분없는 파업에 더 이상 국민들이 참아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고, 이것을 법과 원칙에 의해 처리하겠다는 정부의 입장을 지지해 주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가능하다면 지금이라도 노조는 스스로 본연의 위치로 돌아가야 한다. 사람이건 조직이건 가장 불행하고 슬프고 자존심 상하는 것은 당연히 고쳐야 할 부분을 타인에 의해 수술당하는 것이다. 지금 정부가 국민의 힘을 빌어 노조를 수술대 위에 올려 놓았다. 단순한 위협은 아닌 것 같다. 그렇게 했다가는 국민이 정부를 수술대 위에 올려놓을 기세이기에 노조가 이런 기류를 조금이라도 파악했다면 자정의 힘을 발휘하는 것이 좋겠다. 어쩌면 이것을 국민들이 바라고 있는지 모르겠다. 전장연이 지하철 승하차 시위를 벌릴 때, 같은 장애인들이 막고 나선 일이 있었다. 그 기사를 접한 필자의 가슴에 울림이 있었다. 얼마나 힘들게 나섰을까? 전장연 회원들의 절박한 호소를 모르는 바 아니나, 그 때문에 겪어야 하는 시민들의 불편은 그들의 절박함을 넘어섰다. 그런 시민들을 위하여, 그리고 궁극적인 장애인의 복지를 위하여 용기를 낸 그들의 행동이 그나마 국민들의 마음을 다독거리며, 여전히 장애인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멈추지 않게 만들었다. 강성 노조는 이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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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노조의 적폐청산, 노조가 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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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숙맥(菽麥) 예찬의 비극’
- 판단의 기준이 흐려지고 공리적 정당성이 위협을 받으면서 상식과 보편적 윤리가 도전받으면 옳고 그름은 차선이 되고 결국 편당(偏黨)만이 남는다. 그런데 이 편당의 가치와 기준을 염려하는 것은 이것이 지닌 무분별한 횡포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이런 가치 기준의 상실에서 오는 철저한 편당의 투쟁만이 보인다. 숙맥(菽麥)이란 콩과 보리도 구분못하는 부족한 인사를 지칭할 때 쓰는 말이다. 그래서 특정인을 숙맥이라 부르면,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한다는 핀잔에 다름아니다. 그러나 그런 개인적 문제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심각한 숙맥은 집단적이고 편당적인 형태로 나타나 선악의 개념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것이다. 편당에게서 악(惡)이란 내부적으로 걸러야 하는 불편한 것에 불과하다. 이 내부적 악이 외부로 도출되었을 때 편당은 감추고, 축소하고, 부정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편당의 선(善)이기 때문이다. 이 일을 거부하면 그는 반동이 되고, 축출 내지는 징계의 대상자가 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이런 심각한 숙맥들의 활극이 도를 넘고 있다. 과연 그들이 콩과 보리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구분할 줄 알면서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들의 이익과 목적을 위하여 오히려 부풀리고 있는 것일까? 만일 후자라면 이는 모두를 위해서 불행한 일이다. 어떤 일을 대처함에 절대로 넘어서는 안되는 선이 있다. 그 선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서슴없이 넘어버리는 것은 분명 숙맥의 짓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이런 숙맥의 행태가 병리적 환호를 받고 있다. 성직자가 죽음의 저주를 서슴없이 자행하고, 그것을 당연한 종교인의 책무로 몰아부친다. 그리고 이를 두둔하며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그의 판단의 정당성을 담보할 물증을 제공하기에 골몰하는 인사들이 있다. 숙맥들이다. 어이없이 젊은 생명들이 일시에 유명을 달리하였음에도 자발적으로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사과한다는 말이 아니다. 희생자들과 피해자들이 ‘그만하면 됐습니다’할 때까지 사후의 모든 일을 살피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책임지고 감당하겠다는 인사가 없다. 숙맥들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우리 사회가 이런 숙맥들의 전성시대가 되었는가? 콩과 보리도 구분못하는 인사들이 주름잡고 있고, 여론의 중심에 서 있다. 이에 열광하는 또 숙맥의 추종자들은 거의 카타르시스적인 행태를 보이고 집단 숙맥들이다. 이것은 여와 야, 진보와 보수에 상관없이 모두에게 같은 현상이다.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고, 법적으로 말이 안되는 일들이 어찌 이렇게 태연한가? 그런데 이를 향하여 불같이 맹렬하게 나서야 할 교회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반적인 문제들은 모두 이 숙맥들이 주동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양심적이고 지성적인 인사들은 입을 닫고 있다. 왜냐하면 숙맥들의 힘의 근원이 되는 또다른 숙맥들의 횡포 때문이다. 이는 지극히 위험한 단말마적 사회병리현상이다. 이런 것이 무서워 양심과 지성에 의해서 표방되고 지켜져야 할 가치들이 몰수당한다면 그 사회의 미래는 없다. 더이상 숙맥이 주름잡는 사회는 안된다. 나아가 숙맥의 말장난이 통하는 사회도 안된다. 우리가 물려줄 다음 세대의 가치는 일류로서의 선진 이성이며, 윤리이고, 이를 선도하는 집단 지성이 필요하다. 이것을 실현하는 길은 오직 제대로 된 민주와 진취적인 자유를 신념으로 하는 정직한 시대정신이다. 즉 권위주의를 버린 권위의 회복, 위선을 벗은 다움의 명예, 이것이 오늘의 숙맥을 잠재우는 새로운 시대정신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숙맥에 휘둘릴 정도의 모자란 국민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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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숙맥(菽麥) 예찬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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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김건희 여사, 학위를 반납함이 도리이다’
- 지금 김건희 여사가 정부 여당의 아킬레스 건이 되고 있다. 지난 정권에 대한 현 정권의 사정과 검찰에 의한 적폐청산이 계속되는 만큼, 야당은 집요하리만큼 김 여사의 학위 논문 표절문제를 물고 늘어지고 있다. 만약 윤석렬 대통령의 국정 초기 지지도가 40%만 넘어서도 이 문제는 그리 크게 부각될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30%를 오르내리락 하는 지지율로는 작은 리스크 하나도 감당하기 힘든 마당에 표절 시비에 노출된 김 여사의 논문 문제는 결코 간단할 수 없다. 그래서 김여사의 결단이 필요한 것이다. 절대로 관행이었다고 말하면 안된다. 이것은 다수 건전한 연구자들에 대한 모독이다. 관행이 사실이었을지라도 그것은 관행을 따라간 사람들의 경우이고, 그중에서도 올곧게 연구 윤리를 지킨 분들이 더 많다. 그러기에 그것을 변명이라고 내세우면 안된다. 그리고 애꿎은 대학을 더이상 곤란하게 하면 안된다. 대학이 검찰에서 잘 나가는 윤석렬이라는 이름을 의식해서 모종의 편의를 제공했을 수도 있다. 정당한 것은 아니지만 대학을 관리해본 입장에서는 그런 학생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살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 대학이 김 여사의 학위논문의 표절을 변명하기 위한 궁색한 입장을 김 여사는 더 이상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제 김 여사는 더 이상 학위가 필요한 분이 아니다. 퇴임 이후라 할지라도 전직 영부인의 위상만으로라도 하실 수 있는 일은 다 할 수 있다. 굳이 학위에 얽매이고 고집할 필요가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남편인 윤 대통령과 집권 여당이 김 여사의 문제를 막아내기 위해 고군부투하고 있다는 현실이다. 국정과제도 아니요, 시대적 요청 문제도 아닌 한갓 개인의 학위 논문 표절시비가 국정의 발목을 잡는 시비거리로 제공되었다면 신속하고 분명하게 김 여사가 석, 박사 학위 반납을 선언해야 한다. 늦었다고 할 수 있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지금 윤석렬 정부는 급기야 퇴진이라는 여론의 철퇴를 맞고 있다. 이것은 다분히 의도한 자들의 계산된 주장이겠지만, 이것의 단초를 제공한 것은 정부 여당과 대통령 자신임을 부인할 수 없다. 치열하게 윤석렬 후보를 지지했던 사람들조차 현 정부의 아마추어리즘을 걱정하고, 윤 대통령의 경박함을 근심한다. 검사 윤석렬의 활달하고 거침없는 인간미가 대통령 윤석렬에서는 가볍고 거친 인상을 남기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대통령은 말로써 직을 수행하는 사람이다. 그가 싸인하는 서류의 책임은 정부와 정권의 공동책임이지만, 그의 언행으로 인한 책임은 고스란히 죄없는 정부와 정권 그리고 지지자들에게 돌아간다. 그래서 필자는 윤석렬 정부에 탁현민이 없음을 안타까워한다. 국정을 홍보하고 대통령의 정무 정사를 소상하고 인상깊게 알리는 일은 얼마나 중대하고 값어치 있는 일인지 모른다. 사람들은 지난 정부의 탁현민의 허물과 과실을 논하지만, 필자는 그 비판에 동의함과 동시에 그가 문재인 정부에 긍정적으로 작용한 역할을 절대로 과소평가하면 안된다고 강조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국내 국정과 외교 무대에서 일으킨 무리가 많은가?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40%대의 지지율과 고정된 지지층을 갖고 있다. 이것은 문 대통령을 국민의 가슴에 좋은 대통령으로 각인시킨 탁 비서관의 공로라고 할 수밖에 없다. 홍보는 이 시대의 최고의 가치를 창출하는 기술이다. 지금 현 정부에는 이 분야에 문외한들만 모여 있는 것 같다. 자신감 넘치고 화려한 스팩을 가진 분들이 즐비하지만, 구슬도 꿰어야 보배라는데, 도대체 이 정부에서는 이것을 꿰는 사람이 없다. 이런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아마 그는 김 여사의 논문 반납을 소재로 국민을 감동시킬 기가 막힌 장면을 연출했을 것이다. 무턱대고 ‘예스’라고 말하는 충성 경쟁자들로는 절대로 국민 감동의 정치적 파노라마을 연출할 수 없다. 지금이라도 이에 대한 깊은 고민이 정부여당에는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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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성택시사프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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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김건희 여사, 학위를 반납함이 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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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프리즘] 윤 대통령, 너무 경박하다.
- 말로 제일 큰 덕(德)을 보고, 설화(舌禍)로 제일 상처를 입은 대통령이라면 노무현 대통령일 것이다. “아내를 버려야 대통령이 될 수 있다면, 차라리 대통령을 버릴 것입니다”라는 그 유명한 ‘노풍연가’로 대통령에 오른 그가 야심차게 기획한 평검사들과의 대화에서 “이 정도면 막가자는 거지요?”로 대표된 그의 설화는 임기 내내 국민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군대 3년을 썩는다”는 말로 비교적 군생활에 유감이 없던 필자를 포함한 힘들게 33개월 이상의 군복무를 마친 당시 현역 출신들의 공분을 샀었다. 그런데 이런 말들이 속칭 안주감으는 그리 틀린 이야기가 아니다. “이 정도면 막가자는 거지요?”라는 정도는 제법 품위 있는 집단의 뒷풀이에서 소수 한잔 놓고 “너, 그럴 수 있어?”라고 나무람이요, “아, 죄송합니다. 분위기도 그렇고 해서...”, 뭐 이런 식으로 넘어갈 수 있는 말이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군대 3년 썩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대부분 현역 출신들의 생각이다. 징집당한 군생활이 즐거울리 없지만, 그래도 나라 지켰다는 의미 하나로 고생을 가치로 바꾸었는데, 그 수장 현역 대통령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을 때 절망한 것이다. 이런 딱한 모습을 윤석렬 대통령에게서 다시 보고 있다. 여론 조사 지지율이 바닥을 치고 있을 무렵, 기자들의 질문에 “뭐, 그런거 신경쓰지 않는다. 열심히 일할 뿐”이라는 대답을 출근길에 늘어선 기자들에게 던졌다. “그런 거?”... 여론조사기관의 성향이나 표본에 대한 의구심이 있더라도, 국민의사를 대변하는 여론 조사를 향해서 ‘그런 거’라고 하면 이것은 말실수가 아니다. 어쩌면 저렇게도 말을 못할까? 아니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건가?, 아니면 알면서도 속상하니까 한번 내질러 본 걸까? 떠오르는 여러 상념을 지울 수가 없었다. “네, 국민의 채찍으로 알고 더 겸손히 더욱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이렇게 말할 수는 없었겠는가? 그랬다면 지금처럼 대통령에게 등을 돌리겠는가? 여론조사기관에서 전화오면 시작도 하기 전에 끊어버리던 사람도 이런 대통령의 말을 듣고는 실망했단다. 사실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이제 취임 2개월 지났는데, 표본 문제 등등 이러저런 사유로 여론조사가 조작 내지 기획된 의도가 있다는 생각할 수 있기에 신경쓸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술자리 안주감이지, 기자 인터뷰에서 할 말투는 아니다. ‘프로 검사의 아마 대통령’이란 비아냥이 공연히 나온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윤 대통령의 솔직하고 거침없는 말과 행동을 우려한다. 그 우려는 때와 장소를 구별하는데 매우 서툴다는 것이다. 같은 말도 언제 어디서 하느냐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의미와 결과를 낳는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이런 구분을 무시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체 판단력이 부족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국가 원수요 최고 결정권자이며, 그의 말 한마디가 국가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 그런 그의 경박함은 상상할 수 없는 불행을 초래할 수 있음을 염려하는 것이다. 왜 펜이 총보다 무섭다고 하는지 그 의미를 안다면 이 염려가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님을 짐작할 것이다. 지금 많은 지식인들과 뜻있는 애국자들이 윤 대통령의 입을 걱정하고 있다. 그의 실패는 곧 이 땅의 자유와 민주 그리고 미래의 실패를 의미한다. 그런 그가 ‘법과 원칙’을 강조하며 여전히 검사로서의 서슬 퍼른 정권의 칼을 들고 있다. 그 모습에서 노련하고 치밀한 ‘덕과 모범’의 정치력을 볼 수 없다. 자신들을 향한 비난에 “그럼 전 정권은 이보다 나으냐?”라고 응수하는 하수 대통령의 모습에서 그의 ‘법과 원칙’이 초라하게 보였다. 무엇보다 먼저 대통령을 바로 세워야 한다. 경박한 대통령에서 신중한 대통령으로, 술자리 화법에서 대중화법으로, 비교면피 해명에서 자기책임 설명으로 대통령의 대국민 언행을 바꾸어야 한다. 비록 극좌 야당인사의 발언이지만 ‘탄핵과 촛불’을 들먹이게 만든 당사자는 윤 대통령 자신이다. 그들이 서슴없이 ‘탄핵과 촛불’을 거론한 것은 실제로 민심이 그만큼 대통령을 이반했다는 실증이다. 여론 후각이 동물적으로 발달한 그들이 진정한 국민적 지지가 윤 대통령을 받치고 있다면 꿈에도 하지 못할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것은 대통령을 만만하게 보아도 된다는 판단이 섰다는 것이다. 그 판단의 배경과 책임은 오롯이 대통령에게 있다. 고금리 고물가 시대, 코로나 4차 대유행, 한일관계 복원, 북핵 문제 등등 그가 상대해야 할 대형 현안을 상대해야 하는 대통령으로서, 국민적 지지가 없으면 절대로 불가능한 미션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가 더 겸손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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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성택시사프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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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프리즘] 윤 대통령, 너무 경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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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교회가 세속 정치에 승리하는 길’
- 삼국시대를 경험한 우리 민족에게서 남북분단은 숙명처럼 느낀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 우리 민족의 운명은 그나마 단일민족, 혈통적 일체감으로 외부의 재난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왔다. 왕과 위정자들이 타락하고 부패하여 그들이 나라를 망쳐도 민초들이 일어나 피로써 지켜냈다. 언제나 우리의 가슴속에는 우리는 하나이며, 이 땅의 주인은 민초라는 아주 오랜 민족적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고 있었고, 그 힘으로 오늘에 이르렀다. 그런데 최근에 이르러 이 뿌리가 썩어가고 있음에 화들짝 놀라 정신이 혼미해지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다. 극심한 신분차별의 역사도 거쳐보았고. 무지막지한 사상적 좌우 대결에 의한 피눈물도 경험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고통받고 설움 받은 계층이 생겨나고 아픈 역사적 사건을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우리의 존립을 위협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작금의 작태는 우리 민족의 뿌리깊은 우리식 민주주의의 근간을 썩이고 녹여내고 있다. 이러다가는 더 이상 우리가 존재할 수 없는 사태에 이를 수도 있다. 고질적인 영호남의 대결은 이미 익숙하고 그렇다고 치자. 이미 내성도 생겼고, 서로 얼굴을 마주하면 까닭없이 기분이 상한다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래도 지금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공존할 수 있는 정도에 이르렀다. 영호남의 갈등은 다른 지역 출신들과의 갈등을 이야기할 때 조금 강도가 셀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제 영호남의 차별을 서로의 농담 정도로 여길 수 있다. 그리고 남녀차별도 이제 그리 큰 문제는 아니고, 신분의 차별은 이미 극복했다고 보아도 좋다. 그런데 지금 새롭게 부각하는 갈등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고 권력의 문제이고, 그 배후에는 엄청난 경제적 배려가 당근처럼 있고. 그 방법은 교묘한 편 가르기다. 최근 대통령 선거와 지방선거에서 나타난 이대남과 이대녀의 대결을 바라보면서 청년을 사랑하는 필자의 마음은 아픔을 금할 수 없었다. 노사(勞使)의 편가르기는 고전적이고, 코로나 그 혹독한 전쟁 중에도 표를 위하여 의사와 간호사로 편을 갈라 싸우게 한탄을 넘어 감탄했다. 선생과 학생을 가르고, 세대와 세대를 가른다. 더 무서운 것은 내 편은 절대선이며, 상대는 절대악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이니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는 유명한 대깨문의 표어가 이런 세대를 대변한다. 내로남불은 문제가 아니다. 내로남불이라 공격하면 그런 것은 없다는 식으로, 나아가 그러면 어떠냐고 말한다. 내편이 하면 그것은 언제나 정의요, 개혁과 혁신의 길이니 어쩔 수 없다는 주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런 면에서 진보와 보수라고 서로 다른 것은 없지만, 양측의 극단적 선악 논쟁은 결국은 모두의 파멸을 가져올 것이다. 이들은 강력한 결속력으로 정치적 세력을 형성하고, 정치인들이 이 세력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구속한다. 자신들을 벗어나려 하거나 공격하면 문자 폭탄은 기본이고, 그들이 가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가용하여 그를 추방하든지 무력화시키고 결국 항복하게 만든다. 검수완박법에 반대했던 금태섭 의원은 쫒겨났고, 그나마 부정적인 소신을 밝히던 의원들마저 결국 전원 동의했다. 필자는 그들의 동의를 보고 그 나약함과 비겁함에 절망했다. 그래서 그들에게서 희망을 볼 수 없는 것이다. 이제 교회의 차례다. 180석에 가까운 의석을 가진 민주당과 진보 계열의 정치 세력에 의해 차별금지법 통과라는 위협 앞에 직면해 있다. 각종 악법들이 다수당의 횡포로 만들어지고, 무기력한 여당의 대응은 말만 요란하다. 이미 그들의 관심은 2년 후 총선에 가 있고, 득표를 위한 정략적 선택을 준비한다. 그들에 정의란 곧 득표일 뿐이다. 이들의 선택이 가져올 불행한 미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의 갈등은 망국적이다. 오직 자신과 같은 편의 승리를 위하여 우리의 근본을 허무는 이 무도함을 교회는 더 이상 지켜만 보면 안된다.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세상 정치에 대한 무한 책임을 부여받았다. 그것이 인간에게 통치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정치적 처분이다. 이 인간의 권력 앞에 신정정치의 준엄함을 교회가 보여 주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더 이상 교회는 정부에 티끌하나도 구걸하지 말라. 받는 순간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다. 스스로 정화하고 갱신하고 개혁하여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그들 위에 서야 한다. 교회가 세속 정치에 승리하는 길은 이런 힘으로 민초의 정치적 지지를 결집하여 그들을 사로잡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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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성택시사프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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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교회가 세속 정치에 승리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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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청와대, 국민의 가슴으로 이전하라!’
- 평생을 학자와 목회자로서 살면서 참 많은 글을 썼고, 많은 강연과 집회를 다녔다. 그러던 필자가 지난 3년간 절필하다시피 하고, 강연과 집회를 자제했다. 물론 코로나라는 외적인 요소가 있었지만, 굳이 그 이유만은 아니다. 촛불 정권에 대한 절망감과 소위 이 시대 리더들에게서 발견한 도덕적 불감증과 분열적 편가르기 앞에서는 더 이상 글과 강연이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편싸움에서 도덕적 가치는 중립을 상실했고, 인간의 가치는 진영의 논리에 함몰되고, 정당성은 주장의 힘에 실려 떠밀렸다. 글을 쓸 의욕은 물론이요, 이런 글로 무엇을 할수 있을까라는 펜의 힘에 대한 의구심까지 들었다. 그런 필자가 다시 글과 말에 힘을 내기로 했다. 세상이 바뀌었으니 한번 더 믿어보자는 소탈하고도 조금은 어리석어 보이는 생각 때문이다. 이 필에 먼저 부딪히는 것이 청와대의 용산이전이다. 필자는 청와대 이전에 반대한다. 청와대를 옮겨야 한다는 주장의 배경은 제왕적 대통령의 국민과의 이격(離隔)이며 소통에 문제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 주장은 상상을 초월하는 국민적 비용은 차지하고, 가소롭기까지하다. 역대 대통령들의 청와대 이전 공약은 가장 대표적인 표풀리즘 공약이다. 청와대가 구중궁궐이라서 소통이 안된다고? 말 같지도 않는 주장이 힘을 얻은 것은 그 동안 청와대 주인들이 보여온 행태 때문다. 청와대 주인의 행태만 바꾸면 될 일을 혈세를 퍼부어 청와대를 옮길 일인가? 불가한 이유가 다음과 같다. 첫째, 정권 교체기 국방의 위협이다. 전시 상황에서 청와대 위치의 중요성은 불문가지의 일이다. 그 청와대가 전혀 운용해본 경험이 없는 생소한 시설로 북한이 미사일을 쏘아대는 시점에 옮기겠다는 것은 그야말로 성과를 보여주기 위한 포퍼먼스에 불과하다. 둘째, 천문학적인 비용이다. 보도에 의하면 국방부는 이전을 위하여 오천억원을 제시했다. 청와대 이전 비용에 국방부 이전과 그 이전에 뒤따르는 이전 도미노 비용이 과연 얼마일까? 이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고 얻은 용산에서 청와대처럼 살면 그때 반발을 어찌 감당하겠는가? 셋째, 필요한 것은 진심으로 국민 곁으로 다가가겠다는 대통령의 결심과 실천이다. 그 비용이 바로 청와대 이전 비용을 대신할 수 있다. 대통령이 자주 언론 앞에 나서고, 국민과 동행하는 행보를 보인다면, 그야말로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두는 가장 경제적인 청와대 이전, 국민의 가슴 속으로의 이전일 것이다. 더불어 야당은 무조건 새 정부의 청와대 이전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 이것은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이었고 그 앞선 같은 당 대통령들의 약속이었다. 이행하지 못한 공약이었음을 안다면, 실천하지도 못할 공약을 번번히 내건 것에 대한 사과가 먼저 있어야 할 것인데, 정작 자신들이 못하던 것을 당선인이 하는 것을 배아파 하는 심술인가? 적어도 야당은 제대로 된 정치적 판단이 있다면 새 정부의 청와대 이전을 돕던지 아니면 침묵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필자는 다시 한번 새 정부의 청와대 이전을 재고해 줄 것을 당부한다. 그리고 정말 이전이 절대적 필요라면, 최소한 일년의 시간을 가지고 차근차근 준비해서 부드럽게 이전해야 한다. 개인도 이사하는 데 한달도 부족한데, 어찌 청와대 이전을 두달만에 끝내겠다는가? 그야말로 보여주기식 행정이며, 정치적 실수이며, 새 정부의 능력을 의심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 차라리 그 힘과 재원을 이미 60만을 넘어선 오미크론 확진자 대책을 세우는 것이 더 현명할 것이다. 너무나 쉽고 단순한 문제를 정략적 판단에 따라, 혹은 인기에 영합하여 일을 저지르면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안게 될 것임을 새 정부는 명심해야 할 것이다. 청와대를 국민의 가슴속으로 이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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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청와대, 국민의 가슴으로 이전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