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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노조의 적폐청산, 노조가 답하라’
    언제부터 우리 사회에서 ‘노조가 생기면 기업이 망한다’는 자조섞인 말이 회자되었다. 그 배경에는 ‘귀족노조’, ‘고용세습’, ‘채용장사’, ‘거대권력’... 등등 부정적 용어들이 노조의 이미지를 훼손시키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대강성노조는 자신들의 힘과 정치적 영향력을 믿고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했고, 습관적으로 파업을 강행함으로 스스로 존재 이유를 부정했다. 최근에 정부의 원칙적이고 강경한 입장에 의해 진압된 화물연대 노조의 파업의 의미는 이미 그들을 향한 국민적 지지가 철회되었음이다. 윤석렬 정부가 더욱 강력하게 노동개혁을 부르짖을 수 있는 원인도 노조가 스스로헌납한 것이다. 지금 정부는 노조의 자금을 들여다 보고 있다. 이 분야 전문 수사관들이 들여다보기 시작했다면 이미 그 결말도 충분히 예측가능하다. 그러기에 국민이 무서워서도 정부는 어물쩡 노조와 타협하는 일은 없을 듯하다. 어쩌면 노조 입장에서 보면 출범이래 최대의 위기일 것이지만, 국민적 시각에서 보면 제대로 된 수술대 위에 올려놓은 샘이다. 노조는 그야말로 노동자의 권익과 복지를 위해 존재하는 조직이다. 건전한 노조는 노동권의 질을 향상시키고, 양질의 제품으로 응답한다. 그런데 노조가 사업주의 갑의 위치에 서면서부터, 사업주는 파업으로 인한 엄청난 손실을 감수하느니보다 적당한 선에서 그들의 요구를 들어줌으로서 궁극적으로 노조의 힘과 영향력을 키워주었고, 이런 내성과 경험을 바탕으로 노조는 그들이 넘어설 필요도 없는 영역으로 들어서고 말았다. 지금 노조를 향한 사회적 시선은 차갑다 못해 냉소적이다. 노조뿐만 아니라 공공의 이익을 담보하고 있는 집단의 지나친 이기주의도 비판의 도마위에 올라 있다. 이 두 그룹의 공통점은 시위, 즉 큰 목소리에 있다. 언제부터인가 공권력이 지나치게 민원에 위축되어 있다. 민원은 곧 자신의 승진과 보직에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공무원들의 보신주의는 목소리의 크기에 따라 응답하는 속도와 내용이 달랐다. 그러다보니 너도 나도 할 것없이 소리지르고, 트집잡아 고발 고소하는 최악의 사회 구조를 만들고 말았다. 이제라도 윤석렬 정부가 노조 적폐 청산에 칼을 빼든 것은 진영 논리를 떠나 국민적 환영을 받을 일이다. 우리는 지난 화물연대 파업에서 보여준 정부의 단호하고 명확한 입장이 통할 수 있었던 것도 노조의 명분없는 파업에 더 이상 국민들이 참아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고, 이것을 법과 원칙에 의해 처리하겠다는 정부의 입장을 지지해 주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가능하다면 지금이라도 노조는 스스로 본연의 위치로 돌아가야 한다. 사람이건 조직이건 가장 불행하고 슬프고 자존심 상하는 것은 당연히 고쳐야 할 부분을 타인에 의해 수술당하는 것이다. 지금 정부가 국민의 힘을 빌어 노조를 수술대 위에 올려 놓았다. 단순한 위협은 아닌 것 같다. 그렇게 했다가는 국민이 정부를 수술대 위에 올려놓을 기세이기에 노조가 이런 기류를 조금이라도 파악했다면 자정의 힘을 발휘하는 것이 좋겠다. 어쩌면 이것을 국민들이 바라고 있는지 모르겠다. 전장연이 지하철 승하차 시위를 벌릴 때, 같은 장애인들이 막고 나선 일이 있었다. 그 기사를 접한 필자의 가슴에 울림이 있었다. 얼마나 힘들게 나섰을까? 전장연 회원들의 절박한 호소를 모르는 바 아니나, 그 때문에 겪어야 하는 시민들의 불편은 그들의 절박함을 넘어섰다. 그런 시민들을 위하여, 그리고 궁극적인 장애인의 복지를 위하여 용기를 낸 그들의 행동이 그나마 국민들의 마음을 다독거리며, 여전히 장애인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멈추지 않게 만들었다. 강성 노조는 이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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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성택시사프리즘
    2022-12-24
  • [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숙맥(菽麥) 예찬의 비극’
    판단의 기준이 흐려지고 공리적 정당성이 위협을 받으면서 상식과 보편적 윤리가 도전받으면 옳고 그름은 차선이 되고 결국 편당(偏黨)만이 남는다. 그런데 이 편당의 가치와 기준을 염려하는 것은 이것이 지닌 무분별한 횡포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이런 가치 기준의 상실에서 오는 철저한 편당의 투쟁만이 보인다. 숙맥(菽麥)이란 콩과 보리도 구분못하는 부족한 인사를 지칭할 때 쓰는 말이다. 그래서 특정인을 숙맥이라 부르면,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한다는 핀잔에 다름아니다. 그러나 그런 개인적 문제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심각한 숙맥은 집단적이고 편당적인 형태로 나타나 선악의 개념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것이다. 편당에게서 악(惡)이란 내부적으로 걸러야 하는 불편한 것에 불과하다. 이 내부적 악이 외부로 도출되었을 때 편당은 감추고, 축소하고, 부정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편당의 선(善)이기 때문이다. 이 일을 거부하면 그는 반동이 되고, 축출 내지는 징계의 대상자가 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이런 심각한 숙맥들의 활극이 도를 넘고 있다. 과연 그들이 콩과 보리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구분할 줄 알면서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들의 이익과 목적을 위하여 오히려 부풀리고 있는 것일까? 만일 후자라면 이는 모두를 위해서 불행한 일이다. 어떤 일을 대처함에 절대로 넘어서는 안되는 선이 있다. 그 선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서슴없이 넘어버리는 것은 분명 숙맥의 짓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이런 숙맥의 행태가 병리적 환호를 받고 있다. 성직자가 죽음의 저주를 서슴없이 자행하고, 그것을 당연한 종교인의 책무로 몰아부친다. 그리고 이를 두둔하며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그의 판단의 정당성을 담보할 물증을 제공하기에 골몰하는 인사들이 있다. 숙맥들이다. 어이없이 젊은 생명들이 일시에 유명을 달리하였음에도 자발적으로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사과한다는 말이 아니다. 희생자들과 피해자들이 ‘그만하면 됐습니다’할 때까지 사후의 모든 일을 살피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책임지고 감당하겠다는 인사가 없다. 숙맥들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우리 사회가 이런 숙맥들의 전성시대가 되었는가? 콩과 보리도 구분못하는 인사들이 주름잡고 있고, 여론의 중심에 서 있다. 이에 열광하는 또 숙맥의 추종자들은 거의 카타르시스적인 행태를 보이고 집단 숙맥들이다. 이것은 여와 야, 진보와 보수에 상관없이 모두에게 같은 현상이다.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고, 법적으로 말이 안되는 일들이 어찌 이렇게 태연한가? 그런데 이를 향하여 불같이 맹렬하게 나서야 할 교회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반적인 문제들은 모두 이 숙맥들이 주동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양심적이고 지성적인 인사들은 입을 닫고 있다. 왜냐하면 숙맥들의 힘의 근원이 되는 또다른 숙맥들의 횡포 때문이다. 이는 지극히 위험한 단말마적 사회병리현상이다. 이런 것이 무서워 양심과 지성에 의해서 표방되고 지켜져야 할 가치들이 몰수당한다면 그 사회의 미래는 없다. 더이상 숙맥이 주름잡는 사회는 안된다. 나아가 숙맥의 말장난이 통하는 사회도 안된다. 우리가 물려줄 다음 세대의 가치는 일류로서의 선진 이성이며, 윤리이고, 이를 선도하는 집단 지성이 필요하다. 이것을 실현하는 길은 오직 제대로 된 민주와 진취적인 자유를 신념으로 하는 정직한 시대정신이다. 즉 권위주의를 버린 권위의 회복, 위선을 벗은 다움의 명예, 이것이 오늘의 숙맥을 잠재우는 새로운 시대정신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숙맥에 휘둘릴 정도의 모자란 국민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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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성택시사프리즘
    2022-11-19
  • [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김건희 여사, 학위를 반납함이 도리이다’
    지금 김건희 여사가 정부 여당의 아킬레스 건이 되고 있다. 지난 정권에 대한 현 정권의 사정과 검찰에 의한 적폐청산이 계속되는 만큼, 야당은 집요하리만큼 김 여사의 학위 논문 표절문제를 물고 늘어지고 있다. 만약 윤석렬 대통령의 국정 초기 지지도가 40%만 넘어서도 이 문제는 그리 크게 부각될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30%를 오르내리락 하는 지지율로는 작은 리스크 하나도 감당하기 힘든 마당에 표절 시비에 노출된 김 여사의 논문 문제는 결코 간단할 수 없다. 그래서 김여사의 결단이 필요한 것이다. 절대로 관행이었다고 말하면 안된다. 이것은 다수 건전한 연구자들에 대한 모독이다. 관행이 사실이었을지라도 그것은 관행을 따라간 사람들의 경우이고, 그중에서도 올곧게 연구 윤리를 지킨 분들이 더 많다. 그러기에 그것을 변명이라고 내세우면 안된다. 그리고 애꿎은 대학을 더이상 곤란하게 하면 안된다. 대학이 검찰에서 잘 나가는 윤석렬이라는 이름을 의식해서 모종의 편의를 제공했을 수도 있다. 정당한 것은 아니지만 대학을 관리해본 입장에서는 그런 학생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살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 대학이 김 여사의 학위논문의 표절을 변명하기 위한 궁색한 입장을 김 여사는 더 이상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제 김 여사는 더 이상 학위가 필요한 분이 아니다. 퇴임 이후라 할지라도 전직 영부인의 위상만으로라도 하실 수 있는 일은 다 할 수 있다. 굳이 학위에 얽매이고 고집할 필요가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남편인 윤 대통령과 집권 여당이 김 여사의 문제를 막아내기 위해 고군부투하고 있다는 현실이다. 국정과제도 아니요, 시대적 요청 문제도 아닌 한갓 개인의 학위 논문 표절시비가 국정의 발목을 잡는 시비거리로 제공되었다면 신속하고 분명하게 김 여사가 석, 박사 학위 반납을 선언해야 한다. 늦었다고 할 수 있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지금 윤석렬 정부는 급기야 퇴진이라는 여론의 철퇴를 맞고 있다. 이것은 다분히 의도한 자들의 계산된 주장이겠지만, 이것의 단초를 제공한 것은 정부 여당과 대통령 자신임을 부인할 수 없다. 치열하게 윤석렬 후보를 지지했던 사람들조차 현 정부의 아마추어리즘을 걱정하고, 윤 대통령의 경박함을 근심한다. 검사 윤석렬의 활달하고 거침없는 인간미가 대통령 윤석렬에서는 가볍고 거친 인상을 남기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대통령은 말로써 직을 수행하는 사람이다. 그가 싸인하는 서류의 책임은 정부와 정권의 공동책임이지만, 그의 언행으로 인한 책임은 고스란히 죄없는 정부와 정권 그리고 지지자들에게 돌아간다. 그래서 필자는 윤석렬 정부에 탁현민이 없음을 안타까워한다. 국정을 홍보하고 대통령의 정무 정사를 소상하고 인상깊게 알리는 일은 얼마나 중대하고 값어치 있는 일인지 모른다. 사람들은 지난 정부의 탁현민의 허물과 과실을 논하지만, 필자는 그 비판에 동의함과 동시에 그가 문재인 정부에 긍정적으로 작용한 역할을 절대로 과소평가하면 안된다고 강조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국내 국정과 외교 무대에서 일으킨 무리가 많은가?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40%대의 지지율과 고정된 지지층을 갖고 있다. 이것은 문 대통령을 국민의 가슴에 좋은 대통령으로 각인시킨 탁 비서관의 공로라고 할 수밖에 없다. 홍보는 이 시대의 최고의 가치를 창출하는 기술이다. 지금 현 정부에는 이 분야에 문외한들만 모여 있는 것 같다. 자신감 넘치고 화려한 스팩을 가진 분들이 즐비하지만, 구슬도 꿰어야 보배라는데, 도대체 이 정부에서는 이것을 꿰는 사람이 없다. 이런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아마 그는 김 여사의 논문 반납을 소재로 국민을 감동시킬 기가 막힌 장면을 연출했을 것이다. 무턱대고 ‘예스’라고 말하는 충성 경쟁자들로는 절대로 국민 감동의 정치적 파노라마을 연출할 수 없다. 지금이라도 이에 대한 깊은 고민이 정부여당에는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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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성택시사프리즘
    2022-10-22
  • [시사프리즘] 윤 대통령, 너무 경박하다.
    말로 제일 큰 덕(德)을 보고, 설화(舌禍)로 제일 상처를 입은 대통령이라면 노무현 대통령일 것이다. “아내를 버려야 대통령이 될 수 있다면, 차라리 대통령을 버릴 것입니다”라는 그 유명한 ‘노풍연가’로 대통령에 오른 그가 야심차게 기획한 평검사들과의 대화에서 “이 정도면 막가자는 거지요?”로 대표된 그의 설화는 임기 내내 국민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군대 3년을 썩는다”는 말로 비교적 군생활에 유감이 없던 필자를 포함한 힘들게 33개월 이상의 군복무를 마친 당시 현역 출신들의 공분을 샀었다. 그런데 이런 말들이 속칭 안주감으는 그리 틀린 이야기가 아니다. “이 정도면 막가자는 거지요?”라는 정도는 제법 품위 있는 집단의 뒷풀이에서 소수 한잔 놓고 “너, 그럴 수 있어?”라고 나무람이요, “아, 죄송합니다. 분위기도 그렇고 해서...”, 뭐 이런 식으로 넘어갈 수 있는 말이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군대 3년 썩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대부분 현역 출신들의 생각이다. 징집당한 군생활이 즐거울리 없지만, 그래도 나라 지켰다는 의미 하나로 고생을 가치로 바꾸었는데, 그 수장 현역 대통령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을 때 절망한 것이다. 이런 딱한 모습을 윤석렬 대통령에게서 다시 보고 있다. 여론 조사 지지율이 바닥을 치고 있을 무렵, 기자들의 질문에 “뭐, 그런거 신경쓰지 않는다. 열심히 일할 뿐”이라는 대답을 출근길에 늘어선 기자들에게 던졌다. “그런 거?”... 여론조사기관의 성향이나 표본에 대한 의구심이 있더라도, 국민의사를 대변하는 여론 조사를 향해서 ‘그런 거’라고 하면 이것은 말실수가 아니다. 어쩌면 저렇게도 말을 못할까? 아니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건가?, 아니면 알면서도 속상하니까 한번 내질러 본 걸까? 떠오르는 여러 상념을 지울 수가 없었다. “네, 국민의 채찍으로 알고 더 겸손히 더욱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이렇게 말할 수는 없었겠는가? 그랬다면 지금처럼 대통령에게 등을 돌리겠는가? 여론조사기관에서 전화오면 시작도 하기 전에 끊어버리던 사람도 이런 대통령의 말을 듣고는 실망했단다. 사실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이제 취임 2개월 지났는데, 표본 문제 등등 이러저런 사유로 여론조사가 조작 내지 기획된 의도가 있다는 생각할 수 있기에 신경쓸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술자리 안주감이지, 기자 인터뷰에서 할 말투는 아니다. ‘프로 검사의 아마 대통령’이란 비아냥이 공연히 나온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윤 대통령의 솔직하고 거침없는 말과 행동을 우려한다. 그 우려는 때와 장소를 구별하는데 매우 서툴다는 것이다. 같은 말도 언제 어디서 하느냐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의미와 결과를 낳는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이런 구분을 무시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체 판단력이 부족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국가 원수요 최고 결정권자이며, 그의 말 한마디가 국가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 그런 그의 경박함은 상상할 수 없는 불행을 초래할 수 있음을 염려하는 것이다. 왜 펜이 총보다 무섭다고 하는지 그 의미를 안다면 이 염려가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님을 짐작할 것이다. 지금 많은 지식인들과 뜻있는 애국자들이 윤 대통령의 입을 걱정하고 있다. 그의 실패는 곧 이 땅의 자유와 민주 그리고 미래의 실패를 의미한다. 그런 그가 ‘법과 원칙’을 강조하며 여전히 검사로서의 서슬 퍼른 정권의 칼을 들고 있다. 그 모습에서 노련하고 치밀한 ‘덕과 모범’의 정치력을 볼 수 없다. 자신들을 향한 비난에 “그럼 전 정권은 이보다 나으냐?”라고 응수하는 하수 대통령의 모습에서 그의 ‘법과 원칙’이 초라하게 보였다. 무엇보다 먼저 대통령을 바로 세워야 한다. 경박한 대통령에서 신중한 대통령으로, 술자리 화법에서 대중화법으로, 비교면피 해명에서 자기책임 설명으로 대통령의 대국민 언행을 바꾸어야 한다. 비록 극좌 야당인사의 발언이지만 ‘탄핵과 촛불’을 들먹이게 만든 당사자는 윤 대통령 자신이다. 그들이 서슴없이 ‘탄핵과 촛불’을 거론한 것은 실제로 민심이 그만큼 대통령을 이반했다는 실증이다. 여론 후각이 동물적으로 발달한 그들이 진정한 국민적 지지가 윤 대통령을 받치고 있다면 꿈에도 하지 못할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것은 대통령을 만만하게 보아도 된다는 판단이 섰다는 것이다. 그 판단의 배경과 책임은 오롯이 대통령에게 있다. 고금리 고물가 시대, 코로나 4차 대유행, 한일관계 복원, 북핵 문제 등등 그가 상대해야 할 대형 현안을 상대해야 하는 대통령으로서, 국민적 지지가 없으면 절대로 불가능한 미션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가 더 겸손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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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성택시사프리즘
    2022-07-25
  • [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교회가 세속 정치에 승리하는 길’
    삼국시대를 경험한 우리 민족에게서 남북분단은 숙명처럼 느낀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 우리 민족의 운명은 그나마 단일민족, 혈통적 일체감으로 외부의 재난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왔다. 왕과 위정자들이 타락하고 부패하여 그들이 나라를 망쳐도 민초들이 일어나 피로써 지켜냈다. 언제나 우리의 가슴속에는 우리는 하나이며, 이 땅의 주인은 민초라는 아주 오랜 민족적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고 있었고, 그 힘으로 오늘에 이르렀다. 그런데 최근에 이르러 이 뿌리가 썩어가고 있음에 화들짝 놀라 정신이 혼미해지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다. 극심한 신분차별의 역사도 거쳐보았고. 무지막지한 사상적 좌우 대결에 의한 피눈물도 경험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고통받고 설움 받은 계층이 생겨나고 아픈 역사적 사건을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우리의 존립을 위협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작금의 작태는 우리 민족의 뿌리깊은 우리식 민주주의의 근간을 썩이고 녹여내고 있다. 이러다가는 더 이상 우리가 존재할 수 없는 사태에 이를 수도 있다. 고질적인 영호남의 대결은 이미 익숙하고 그렇다고 치자. 이미 내성도 생겼고, 서로 얼굴을 마주하면 까닭없이 기분이 상한다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래도 지금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공존할 수 있는 정도에 이르렀다. 영호남의 갈등은 다른 지역 출신들과의 갈등을 이야기할 때 조금 강도가 셀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제 영호남의 차별을 서로의 농담 정도로 여길 수 있다. 그리고 남녀차별도 이제 그리 큰 문제는 아니고, 신분의 차별은 이미 극복했다고 보아도 좋다. 그런데 지금 새롭게 부각하는 갈등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고 권력의 문제이고, 그 배후에는 엄청난 경제적 배려가 당근처럼 있고. 그 방법은 교묘한 편 가르기다. 최근 대통령 선거와 지방선거에서 나타난 이대남과 이대녀의 대결을 바라보면서 청년을 사랑하는 필자의 마음은 아픔을 금할 수 없었다. 노사(勞使)의 편가르기는 고전적이고, 코로나 그 혹독한 전쟁 중에도 표를 위하여 의사와 간호사로 편을 갈라 싸우게 한탄을 넘어 감탄했다. 선생과 학생을 가르고, 세대와 세대를 가른다. 더 무서운 것은 내 편은 절대선이며, 상대는 절대악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이니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는 유명한 대깨문의 표어가 이런 세대를 대변한다. 내로남불은 문제가 아니다. 내로남불이라 공격하면 그런 것은 없다는 식으로, 나아가 그러면 어떠냐고 말한다. 내편이 하면 그것은 언제나 정의요, 개혁과 혁신의 길이니 어쩔 수 없다는 주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런 면에서 진보와 보수라고 서로 다른 것은 없지만, 양측의 극단적 선악 논쟁은 결국은 모두의 파멸을 가져올 것이다. 이들은 강력한 결속력으로 정치적 세력을 형성하고, 정치인들이 이 세력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구속한다. 자신들을 벗어나려 하거나 공격하면 문자 폭탄은 기본이고, 그들이 가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가용하여 그를 추방하든지 무력화시키고 결국 항복하게 만든다. 검수완박법에 반대했던 금태섭 의원은 쫒겨났고, 그나마 부정적인 소신을 밝히던 의원들마저 결국 전원 동의했다. 필자는 그들의 동의를 보고 그 나약함과 비겁함에 절망했다. 그래서 그들에게서 희망을 볼 수 없는 것이다. 이제 교회의 차례다. 180석에 가까운 의석을 가진 민주당과 진보 계열의 정치 세력에 의해 차별금지법 통과라는 위협 앞에 직면해 있다. 각종 악법들이 다수당의 횡포로 만들어지고, 무기력한 여당의 대응은 말만 요란하다. 이미 그들의 관심은 2년 후 총선에 가 있고, 득표를 위한 정략적 선택을 준비한다. 그들에 정의란 곧 득표일 뿐이다. 이들의 선택이 가져올 불행한 미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의 갈등은 망국적이다. 오직 자신과 같은 편의 승리를 위하여 우리의 근본을 허무는 이 무도함을 교회는 더 이상 지켜만 보면 안된다.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세상 정치에 대한 무한 책임을 부여받았다. 그것이 인간에게 통치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정치적 처분이다. 이 인간의 권력 앞에 신정정치의 준엄함을 교회가 보여 주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더 이상 교회는 정부에 티끌하나도 구걸하지 말라. 받는 순간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다. 스스로 정화하고 갱신하고 개혁하여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그들 위에 서야 한다. 교회가 세속 정치에 승리하는 길은 이런 힘으로 민초의 정치적 지지를 결집하여 그들을 사로잡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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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성택시사프리즘
    2022-06-14
  • [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청와대, 국민의 가슴으로 이전하라!’
    평생을 학자와 목회자로서 살면서 참 많은 글을 썼고, 많은 강연과 집회를 다녔다. 그러던 필자가 지난 3년간 절필하다시피 하고, 강연과 집회를 자제했다. 물론 코로나라는 외적인 요소가 있었지만, 굳이 그 이유만은 아니다. 촛불 정권에 대한 절망감과 소위 이 시대 리더들에게서 발견한 도덕적 불감증과 분열적 편가르기 앞에서는 더 이상 글과 강연이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편싸움에서 도덕적 가치는 중립을 상실했고, 인간의 가치는 진영의 논리에 함몰되고, 정당성은 주장의 힘에 실려 떠밀렸다. 글을 쓸 의욕은 물론이요, 이런 글로 무엇을 할수 있을까라는 펜의 힘에 대한 의구심까지 들었다. 그런 필자가 다시 글과 말에 힘을 내기로 했다. 세상이 바뀌었으니 한번 더 믿어보자는 소탈하고도 조금은 어리석어 보이는 생각 때문이다. 이 필에 먼저 부딪히는 것이 청와대의 용산이전이다. 필자는 청와대 이전에 반대한다. 청와대를 옮겨야 한다는 주장의 배경은 제왕적 대통령의 국민과의 이격(離隔)이며 소통에 문제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 주장은 상상을 초월하는 국민적 비용은 차지하고, 가소롭기까지하다. 역대 대통령들의 청와대 이전 공약은 가장 대표적인 표풀리즘 공약이다. 청와대가 구중궁궐이라서 소통이 안된다고? 말 같지도 않는 주장이 힘을 얻은 것은 그 동안 청와대 주인들이 보여온 행태 때문다. 청와대 주인의 행태만 바꾸면 될 일을 혈세를 퍼부어 청와대를 옮길 일인가? 불가한 이유가 다음과 같다. 첫째, 정권 교체기 국방의 위협이다. 전시 상황에서 청와대 위치의 중요성은 불문가지의 일이다. 그 청와대가 전혀 운용해본 경험이 없는 생소한 시설로 북한이 미사일을 쏘아대는 시점에 옮기겠다는 것은 그야말로 성과를 보여주기 위한 포퍼먼스에 불과하다. 둘째, 천문학적인 비용이다. 보도에 의하면 국방부는 이전을 위하여 오천억원을 제시했다. 청와대 이전 비용에 국방부 이전과 그 이전에 뒤따르는 이전 도미노 비용이 과연 얼마일까? 이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고 얻은 용산에서 청와대처럼 살면 그때 반발을 어찌 감당하겠는가? 셋째, 필요한 것은 진심으로 국민 곁으로 다가가겠다는 대통령의 결심과 실천이다. 그 비용이 바로 청와대 이전 비용을 대신할 수 있다. 대통령이 자주 언론 앞에 나서고, 국민과 동행하는 행보를 보인다면, 그야말로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두는 가장 경제적인 청와대 이전, 국민의 가슴 속으로의 이전일 것이다. 더불어 야당은 무조건 새 정부의 청와대 이전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 이것은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이었고 그 앞선 같은 당 대통령들의 약속이었다. 이행하지 못한 공약이었음을 안다면, 실천하지도 못할 공약을 번번히 내건 것에 대한 사과가 먼저 있어야 할 것인데, 정작 자신들이 못하던 것을 당선인이 하는 것을 배아파 하는 심술인가? 적어도 야당은 제대로 된 정치적 판단이 있다면 새 정부의 청와대 이전을 돕던지 아니면 침묵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필자는 다시 한번 새 정부의 청와대 이전을 재고해 줄 것을 당부한다. 그리고 정말 이전이 절대적 필요라면, 최소한 일년의 시간을 가지고 차근차근 준비해서 부드럽게 이전해야 한다. 개인도 이사하는 데 한달도 부족한데, 어찌 청와대 이전을 두달만에 끝내겠다는가? 그야말로 보여주기식 행정이며, 정치적 실수이며, 새 정부의 능력을 의심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 차라리 그 힘과 재원을 이미 60만을 넘어선 오미크론 확진자 대책을 세우는 것이 더 현명할 것이다. 너무나 쉽고 단순한 문제를 정략적 판단에 따라, 혹은 인기에 영합하여 일을 저지르면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안게 될 것임을 새 정부는 명심해야 할 것이다. 청와대를 국민의 가슴속으로 이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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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성택시사프리즘
    2022-03-20
  • [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정청래 의원의 불교 관련 발언의 교훈’
    기억이 가물하지만 상당히 오래 전 미국에서 있었던 이야기이다. 한국에서 이단으로 규정된 통일교의 폐해로 인해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자 이를 정부에서 제재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실제로 집회 금지 등등의 조치들이 나왔고, 이로 인해 통일교 측과 당국 간의 갈등이 있었다. 그런데 이 사태에 통일교의 편을 들고 나선 것이 묘하게도 미국의 건전한 기독교였다. 이를 대변한 목회자들의 핵심 주장은 ‘정부는 종교의 자유와 신념에 지나치게 관계하지 말라’는 것이다. 종교탄압이 될 수 있다는 논리였다. 당신 신학생있던 필자는 매우 분개하였고, 동료들과 이 문제를 상당히 진지하게 토론했던 기억이 있다. 최근 정청래 의원이 불교계를 향한 발언이 정가와 불교계를 뜨겁게 다루고 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정 의원의 발언에 공감하고 있고, 실제로 불사가 있는 산을 등산하면서 입장료라는 명록으로 통행료를 내야 할 때마다 법당 쪽을 쳐다보며 궁시렁거렸던 기억이 있다. 그 산이 불교 재산이고, 그 사찰이 고적임에는 틀림없지만, 먼가 불편했던 마음이 사실이다. 그런데 같은 말인데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듯이 정의원의 발언은 표현상 문제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알기로 정 의원의 거침없는 발언과 센 소신 표현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이다. 그러나 그런 화법이 적어도 종교계를 향할 때는 달라야 한다. 정치인끼리 주고받은 화법, 정치적 상대를 향해서 주고받은 화법, 거래 성사를 위해 판깔이용 화법 등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화법이라도, 어른들, 아이들, 청년들, 여성들, 실직자 등등 일명 사회 약자와 소외층을 향한 화법은 이와 달라야 하며, 특별히 종교계를 향한 발언에서는 더욱 신중해야 한다. 종교는 현행법보다 우선하는 자신들의 계율을 가지고 있다. 현행법과 계율이 부딪히면 신앙적인 사람은 계율을 택한다. 이런 종교인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자신들의 교리와 존재에 대한 사회적 존중과 그에 합당한 예의이다. 종교는 이것이 무시당하지 않는 한 본질적으로 세상(속세)과 부딪치지 않는다. 이것은 어느 종교나 동일한 것이다. 정 의원은 지금 가장 예민한 이 부분을 거침없이 건드렸다. 내가 아는 정의원의 한번도 주일예배에 빠지지 않는 교회 집사이다. 그의 담임목사님은 그를 두고 세상 사람들의 인상처럼 거칠고 무지막지한 독설가가 아니라, 매우 성실한 집사요, 말없이 교회를 잘 섬기고 순종하는 성도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이 정 의원의 본래의 성품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서 기도한다고 했다. 그런 정의원의 이번 발언의 충격은 그가 바로 이 경계선을 구분하지 못한 데서 온 것이다. 그는 본성적으로 불교를 폄훼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을 것이다. 다만 서두에서 말한 불합리하다는 세간의 지적을 정치적 언사로 거칠게 표현한 것이 불심을 성나게 한 것이다. 이런 면에서 불교계는 정의원의 진심어린 사과를 받아들이고, 그와 진솔하게 대화하는 한 차원 높은 종교적 지도력을 보여주면 좋겠다. 정 의원도 불교의 궁극적인 요구가 민주당적을 버리는 것이라면, 그리고 자신의 사과가 진심이라면 당적을 버릴 용기도 가져야 한다. 오늘 기사에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2년만에 정의당에 복당했다. 조국 사태에 대한 정의당에 처신이 반발하여 탈당한 지 2년만에 당의 위기를 보고 돌아온 것이다. 탈당한다고 해서 정 의원의 민주당 사랑을 의심할 사람이 없다. 언제가 다시 돌아올 수 있다. 오히려 당을 위한 헌신적 결단으로 이해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성난 불심을 잠재울 수 있다면, 그것이 바른 길일 것이다. 그리고 또 종교편향 문제를 들고나오는 불교계는 이것을 자신들의 전가의 보도로 여겨서는 안된다. 공식적이 아닌 대통령의 개인적 신앙활동을 종교편향이라고 몰아가는 것은 다분히 의도가 있다. 대통령이 신봉하는 특정종교에 대한 관계부처의 부당한 우대가 있으면, 이는 정상적인 경로로 바로 잡으면 되는 것이다. 이 갈등이 장기화되는 것은 기독교 선교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유사한 상황이 우리 교회를 향해서도 있지 말라는 법이 없다. 오히려 그 가능성이 기독교에 더 많다. 이때마다 정치인들이 거친 언사로 치고 나오면 우리 목사들도 5,000명 정도 몰려가야 하는 것일까? 다시 한번 정 의원과 불교계의 심사숙고와 한발씩 물러선 이해를 요청한다. 이것이 종교인의 자세요 신앙 덕목이 아닐까? 자비로운 불심에 기대해 본다.
    • 칼럼
    • 임성택시사프리즘
    2022-01-22
  • [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위드 코로나 정책의 실패가 주는 교훈’
    “제발 전문가의 말 좀 듣고, 정치인들은 그 전면에서 물러서라!” 늘 전문가인 것처럼 처신하는 정치인들이 늘 하는 실수를 보면서 하게 되는 자조 섞인 말이다. 그것은 “권력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근거없는 정치인들의 무모한 자신감 혹은 “모든 구조는 권력의 통제 아래 있어야만 한다”는 족보없는 강변이다. 정치만큼 전문적이고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예술적 요소를 갖춘 것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가의 감각과 실력은 정치가 영향력을 미치는 모든 곳에서 그 실패와 성공을 좌우한다. 이런 관점에서 정치가에게서 가장 요구되는 것은 모든 전문적 분야에 산재한 실력자들을 조율 조합하며 최고의 가치를 창출해내는 일이다. 바야흐로 전문가 시대에 정치가의 최고 능력은 전문가들을 여하히 조율, 조합하여 냄으로서 국민복리 증진과 세계 속에 국가의 위상을 당당히 세우는 일이다. 그런데 지음 우리 정부와 권력은 이와 정반대로 가고 있다. 이 말은 가장 수준낮은 정치적 아마추어들이 각 분야에서 최고의 실력을 갖춘 프로들을 제 부하 다루듯이 하고, 그들의 조언과 실력을 한갓 정치적 판단에 맞춤으로서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결과를 도출함으로서 정치적 무능의 극단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위드 코로나 정책 시행 45일만에 18만명 확진, 1,700명 사망이라는 초대형 사고로 인해 급기야 다시 원점으로 되돌린 위드 코로나를 바라보면서 도대체 이 정부의 무능과 부실함이 어디까지인가 궁금할 정도이고, 코로나 방역에 대한 청와대의 진정성과 실력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방역은 그 어떤 분야보다도 전문적인 의료행위이다. 의술을 정치적 의도로 사용할 생각이 없는 한, 정치인들은 절대적으로 그들의 조언과 판단을 믿고 수용해야 한다. 이미 섣부른 위드 코로나 정책은 전문가들로부터 우려와 경고를 받았다. 대한의사협회(의협)는 지난 10월 27일 '위드 코로나 시행에 따른 준비와 대책'을 주제로 간담회를 열고 코로나19 방역(COVID-19)과 치료방안 등을 논의했다. 염호기 의협 코로나19 대책 전문위원회 위원장(인제대 서울백병원 내과 교수)은 "전문가들이 위드 코로나로 5차 대유행이 올 수 있다고 염려한다"며 "국내 하루 확진자 수가 2만명까지도 나올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김재석 위원(한림대 강동성심병원 진단검사의학과 교수) 역시 "계절적 요인으로 올해 12월부터 내년 1월 사이에 코로나19 환자 수가 상당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간담회에서는 백신 접종률이 70%를 돌파한 것만으로 위드 코로나를 도입하기엔 시기가 이르다는 염 위원장은 "단순히 백신 접종률이 높다는 이유로 위드 코로나를 추진하는 것은 옳은 방향은 아닌 것 같다"며 "모임의 숫자만 조정하는 기존의 정량적인 방역은 중단하고 과학적 원칙에 따른 정성적인 방역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위드 코로나 전환 단계에서 의료체계가 마비되지 않도록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는 주문도 나왔다. 김 위원은 "일상회복으로 가는 단계에서 환자 수가 증가할 것"이라며 "의료체계가 마비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명백한 전문가들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앞장서서 위드 코로나의 장밋빛 정책을 강행했다. 아마 운을 바랐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정말 아마추어 중에 아마추어들이다. 아무리 정치적 환경이 어렵고 대통령 선거라는 매거톤급 정치 이벤트가 있다고 하더라도 세계적 재앙에 시달리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전문의료인들의 냉철한 분석과 처방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에 뒷받침된 정치적 판단이 뒤따라야 한다. 다시 모든 것을 원점으로 되돌린 지금이라도 정부는 제발 전문가들의 말을 귀담아 듣고, 그들을 이 문제해결에 전면에 내세우고 제발 정치인들이 이 문제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는 진정한 코로나 대책과 정치가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 칼럼
    • 임성택시사프리즘
    2021-12-19
  • [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정권교체론의 시대적 의미’
    연애 중에 첫사랑의 배신이 가장 가슴 아프고, 인생 중에서 믿었던 사람의 배신이 또한 가슴 쓰라리며. 역사 중에서 충신의 배신이 가장 치명적이다. 그래서 배신한 첫사랑에 대한 보복은 때로 잔인한 결과에 이르고, 믿었던 사람의 배신에 대한 응징은 때로 제로섬에 가까운 투쟁을 유발하며, 충신의 간신 짓은 두고두고 후대의 조롱과 놀림이 된다. 지난 날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과 구속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의 영어의 몸은 배신의 댓가라기 보다 세력 대 세력의 싸움에서 패한 패전지장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패전한 세력의 회복 정도에 따라 그 다음 운명이 결정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새로운 울림으로 들리는 정권교체론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이 소리에 귀를 기울일 밖에 없는 것은 이 정권교체론의 근저가 적대 세력이 아닌 과거 촛불 세력, 즉 지금의 정권 수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민심의 이반이라는 데 심각성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태 앞에서 집권 여당은 지지세력의 이탈과 민심이반에 대하여 심각한 고민과 처방을 찾아야 하는데, 여전히 대통령은 자화자찬에 몰두하고, 참모들은 간신배성 아첨 경쟁에 치열하고, 당은 당대로 거대한 의석의 힘을 믿고 여전히 태만한 바, 그 이탈의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고, 결국 국민은 정권교체라는 권리를 내밀며 대안을 찾기에 이른 것이다. 필자는 진심으로 이 정권이 성공적으로 권력을 이양하고, 공과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통해 다음 정권이 국가의 미래를 위해 헌신할 것을 기대한다. 지금 이재명 후보의 태도는 국민의 분노와 의혹을 불러일으킴에 모자람이 없다. 대장동 문제에 대한 특검에 동의했으면, 깨끗하게 이를 추진해야 한다. 그러나 야당 후보를 같이 물고 들어가는 모습은 추하다 못해, 겨우 이 정도의 후보가 집권여당의 후보이고, 이런 후보를 엄호하기 위해 전혀 논리적이지 못한 방법으로 버티는 여당 인사들이 안쓰럽기까지 하다. 지금 국민은 국민의 당과 그 후보에 대한 호불호 평가의 결과를 갖지도 않은 채, 이미 이재명 후보에 대한 심정적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사태가 이럼에도 대안이 없이 뚝심과 어설픈 정면돌파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더욱 국민을 분노하게 만든다. 이에 민주당과 이재명 후보는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허물에 대해 정직하고 진솔한 해명으로 국민의 가슴으로 파고 들어야 한다. 우리 국민들의 정치적 수준과 의식은 이미 상당한 수준에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자기 진영에 있는 절대 충성파들의 말만 들으면 이미 선거는 끝난 것이다. 충성파는 진정한 충언을 하지 않고, 오로지 상대를 격파해야 한다고만 주장한다. 이것이 충성으로 망가뜨리는 반역이다. 그런데 지금 민주당은 이런 충성파들이 여전히 후보를 감싸고 있고, 후보 역시 이들의 가마 위에서 내려올 생각이 없다. 버려야 얻는다. 충성파를 버려도 어차피 그들의 표는 다른 데로 갈 데가 없다. 버리라는 의미는 그들을 등지라는 말이 아님을 너무도 잘 알 것이다. 그런데도 버릴 용기가 없고 버릴 수 없다는 것은 이미 그 마음 속에 패전을 예상하고 있고, 그 패전 이후를 위해 그들이 제공한 가마가 여전히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패배주의자들의 슬픈 가면극이며 무의미한 객기가 보인다. 살펴보면 비록 패하더라도 국민 속에 깊은 여운으로 남아 차기라도 기약하려면, 적어도 그 사람은 자신의 실수와 허물에 대해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라는 인상이라도 남겨야 한다. 이재명 후보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인사들이 얼마나 정상인들과는 거리가 먼 사람인지를 살피고 이들과 분리되어야 한다. 만일 이런 무뢰배들과 분리될 수 없다면 그는 이번 대통령 후보에서 내려와야 한다. 그것이 적어도 국민에 대한 예의이며 그나마 차기라도 기약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 칼럼
    • 임성택시사프리즘
    2021-11-21
  • [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가오없는 비겁한 자의 정면돌파론’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수갑 차고 다니면서 가오 떨어질 짓 하지 말자!”. 그 유명한 영화 ‘베테랑’에 나오는 말단형사 서도철(황정민 분)의 한 대사다. 행동파 형사인 ‘서도철’은 큰 사건 하나를 성공적으로 끝내고 승승장구하던 중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 생각하는 막무가내 재벌 3세 ‘조태오’를 만나 끝까지 ‘조태오’를 뒤쫓아 수사하며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재벌 3세 조태오의 패륜과 무개념은 돈과 권력으로 포장된 악인의 전형이다. 요즈음 우리가 정계로부터 여야를 막론하고 ‘정면돌파’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정면돌파란 전투용어이다. 서로 대치 국면에서 아군의 승리를 전제로 한 피치못할 마지막 전략적 선택이다. 좌고우면할 여유가 없고, 불필요한 힘의 낭비가 없이 가장 효율적으로 치고 나가는 최종적인 선택이다. 이런 용어가 정치판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은 그만큼 이런 위험에 처한 인물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군사적 의미에서의 정면돌파는 아군을 보호하고 승리를 쟁취하기 위한 최종적 전략이라면, 정치판의 정면돌파는 주로 대형 부정부패나 스캔들, 비교적 지저분한 일을 당한 자들이 정의와 정당성을 위장한 비겁한 자들의 수사에 불과했음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이때까지 정면돌파를 시도한 이들의 귀결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군사정권이 자신들의 정권을 위협하는 세력에 대하여 ‘정면돌파’ 방식으로 자신들의 정적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 정면돌파의 주인공들은 모두 줄줄이 영어의 몸이 되었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면돌파가 멋있어 보이지만 최종적이고 공익적인 차원이어야 한다는 것을 당사자들은 알고 있을까? 정면돌파 이전에 관련된 사람들의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해명과 해법이 분명히 있을 텐데 정치권의 정면돌파는 소위 ‘뚝심과 배짱’이라는 전혀 상관없는 개념들과 짝을 이루고 있다. 특별히 정치적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대형 악재를 만나면, 어떤 정치적 타협이나 대안을 통해 문제를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소위 나름대로의 원칙과 소신을 앞세워 ‘정면돌파’를 선언하곤 하였다. 필자의 눈에는 비겁한 자들의 화려하고 힘찬 언어적 유희에 불과하다. 근자에 대통령 후보들 가운데 ‘정면돌파’라는 표현을 사용한 후보들이 벌써 몇명이 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들은 정면돌파로 대중의 의심과 관심을 무너뜨리고 일거에 사건을 덮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설명하고 해명해야 할 일들이며, 나아가 조사받고 수사받아야 할 사안들이다. 이런 것들을 ‘정면돌파’라는 어줍잖은 군사적 용어를 정치적 용어로 희화화하는 비겁함을 버려야 한다. 적어도 그것은 정치인의 태도는 아니다. 이제 민주당 후보로 정해진 이재명 후보는 ‘대장동 사태’에 대하여 적어도 ‘정면돌파’라는 용어를 사용하거나 그런 개념으로 이 일을 대응해서는 안된다. 연일 메스컴에서 이와 관련된 새로운 의혹들이 보도되고 있다. 이 일에 대하여 이재명 후보가 자신의 말대로 당당하다면, 정면돌파가 아니라, 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지위에서 속히 경기도지사 직을 내려놓고 성실하고 진지하게 수사든 특검이든 받아야 한다. 그런 당당한 태도를 보고서 국민들은 이재명을 후보다운 후보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정치인들은 다른 것은 몰라도 정치적 가오는 있어야 한다. 그것은 국가적 애국과 애민에 바탕을 둔 정치적 대의명분이다. 지금 각 당의 후보들에게서 정치적 가오를 보기가 힘들고, 나아가 비겁한 자의 냄새를 풍기고 있다. 이제 국민의 힘 후보가 결정되고 양당이 정면으로 충돌한다면 대장동 사태가 어떤 위력을 발휘할지 알 수 없지만, 이것으로부터 이재명 후보가 안전하기 위해서는 그의 정치적 가오를 보여주는 길 외에는 없다. 정면돌파 식은 아니다.
    • 칼럼
    • 임성택시사프리즘
    2021-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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