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Home >  칼럼 >  WAIC 칼럼
실시간뉴스
실시간 WAIC 칼럼 기사
-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영생을 얻으려면’(마 19:16-22)
- 그리스도교는 영생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영생은 그리스도인의 신앙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생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선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 단순히 계명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생명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생을 얻으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자 청년은 예수께 와서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질문하였습니다. 그는 영생을 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이신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부자 청년은 예수께서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17b절)라고 말씀하셨을 때 어느 계명인지 다시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십계명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부자 청년은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20절)라고 말하였습니다. 부자 청년은 계명을 지킴으로써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예수께서는 영생을 얻는 길은 율법을 지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는 순종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늘에서 보화가 주님을 따르는 자에게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21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자 청년은 재물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영생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재물에 사로잡혀 있으면 주님을 따를 수 없고, 영생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영생을 얻으려면 하나님 말씀을 믿고,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따라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앞서가시는 주님을 뒤따름으로써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는 제자들이 결단한 것처럼 주저 없이 따라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막 1:17-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은 그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이 되어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영생을 얻으려면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즉각 순종하고 따라야 합니다. 즉 율법을 지키더라도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따르지 않으면 결코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선 십계명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영생에 이르는 데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온전하다’는 인격적인 온전함을 뜻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데’라는 뜻입니다. 영생을 얻으려면 단지 율법을 지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르는 데 있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를 따르라”는 ‘함께 가다, 뒤따르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평생 예수와 함께 가며, 예수를 뒤따르며 닮아가는 참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말씀에 순종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영생을 얻으려면 “나를 따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즉시 순종해야 합니다. 부족한 자를 믿고 불러주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기 바랍니다.
-
- 칼럼
- WAIC 칼럼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영생을 얻으려면’(마 19:16-22)
-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바리새인 벗어나기’ (눅16:10-16)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15절) 한 계단을 올라간 사람은 그 다음 계단도 올라갈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사람은 큰 것에도 충성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사람은 큰 것에도 불의하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마음가짐 하나, 행동 하나 하나는 모두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행동이 모두 하나님의 순전한 것으로부터 나오는 마음과 행동이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재물은, 하늘의 보화 즉 복음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은 것임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 안에는 재물의 가치를 너무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해서 그것을 의지하지 말라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자리로 오면, 재물에 몰입하는 정도가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인간의 ‘두 주인’을 재물과 하나님으로 보고 있습니다. 과연 말씀대로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반드시 한쪽으로 심히 쏠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모든 것은, 그것이 물질이라도 궁극적으로는 그것이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맡겨주신 모든 것을 정욕적이거나 이기적인 목적으로 사용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가 바로 청지기적인 자세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환경과 건강과 물질과 명예 등 모든 것을 활용하고 운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한 것임을 반드시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그게 그리스도인다운 삶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어서, 진리의 말씀이지만, 현실과 사뭇 동떨어져 있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사는 사람이 드문 현실에 살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그러한 모습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1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돈을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귀히 여기는 사람은 이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진리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일지라도, 그것이 재물에 대한 교훈일 때, 즉시 그 말씀을 듣고 속으로 비웃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이 이러한 동작을 했다는 것에 유의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들은 오늘날 대부분의 교인들을 향해서 하시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자기 스스로를 옳다 여기는 마음은 자만함에서 교만함으로 이어지는 마음입니다. 잠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겸허와 겸손의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스스로를 옳게 여기거나 두 주인을 섬기려는 마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자세히 아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들에게 높임 받음으로 하나님께 미움받게 된다는 말씀에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겸손함으로 살아가며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가치를 가장 귀하게 여기며 생활하시기를 기도합니다.
-
- 칼럼
- WAIC 칼럼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바리새인 벗어나기’ (눅16:10-16)
-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예수님의 치유 사역(눅 18:35-43)’
-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치유 사역 열여덟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나병환자 치유, 백부장 하인 치유, 두 눈먼 사람 치유, 손마른 자 치유, 간질병 환자 치유, 여리고 눈먼 사람 치유, 중풍병자 치유, 거라사 광인 치유, 회당장 딸 치유, 12년 된 혈루증 여인 치유,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 치유, 귀먹고 말더듬이 치유, 벳새다 눈먼 사람 치유, 귀신들린 아들 치유, 바디매오 치유, 안식일에 수종병 치유, 열 명 나병환자 치유, 38년 된 병자 치유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여리고 가까이 이르셨을 때, 어떤 눈먼 사람이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라고 외치면서 예수님을 뒤따라왔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내가 네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라고 물으시자, 그는 “주님, 내가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눈을 떠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시자 그는 곧 보게 되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병고침 받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사람들의 불규칙적인 생활, 과식과 과로 등 무질서한 생활이 질병을 일으킵니다. 질병은 우리가 범하는 죄 때문에 오기도 합니다. 예수께서는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시고 “보아라. 네가 말끔히 나았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그리하여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생기지 않도록 하여라.”(요 5: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질병에서 벗어가는 길은 주님께 나아와 죄를 회개하면 됩니다. 회개는 이제부터는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주님의 통치를 받겠다고 결단하는 행위입니다. 회개하면 우리의 영혼육이 새로워지고, 편안한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행 3:19) 모든 질병이 다 사람의 죄 때문에 온다고 할 수 없습니다. 죄와 상관없이 올 수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께 눈먼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은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드러내시려는 것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처럼 질병은 주님의 뜻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허용되기도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질병은 마귀의 억눌림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부어 주셨습니다. 이 예수는 두루 다니시면서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억눌린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행 10:3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귀에게 틈을 주지 않도록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 죄를 자기의 몸에 몸소 지시고서,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우리가 죄에는 죽고 의에는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매를 맞아 상함으로 우리는 나음을 얻었습니다.(벧전 2:24) 그래서 우리가 질병으로 소망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질병과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함께하시면서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그 고통에서 건져주시는 것을 믿기 바랍니다. 주님을 경외할 때 치유받을 수 있습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할 것이니 너희는 외양간에서 풀려 난 송아지처럼 뛰어다닐 것이다.”(말 4: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의로운 해는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질병 중에도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병은 다 치유받을 수 있을까요? 주님은 모든 병을 고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뜻에 따라 치유를 허락하지 않으시기도 합니다.(고후 12:9) 그래서 질병 치유를 위한 기도가 생각대로 응답받지 못하더라도 끝까지 주님을 신뢰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의 질병이 치유되지 않을 때 그 사람의 믿음이 부족하거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몸에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질병을 위해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기도는 응답받지 못했습니다. 바울의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바울에게 주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드러나고 교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가시가 자기를 겸손하게 하기 위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크게 기뻐하였습니다.(고후 12:7-10) 우리도 질병이 낫도록 간절히 기도했지만, 치유받지 못하더라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살전 5: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모든 일에 감사할 때 주님께서 가장 선하게 인도해 주실 줄 믿기 바랍니다.
-
- 칼럼
- WAIC 칼럼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예수님의 치유 사역(눅 18:35-43)’
-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행복으로 가는 길’(시 32:1~6)
-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본문은 신앙의 교훈이 담긴 다윗의 시입니다. 잘못을 용서받고 하나님이 죄를 덮어 주신 사람은 행복하다는 내용으로 말씀이 시작됩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의 잘못을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이후에도 죄의 문제는 늘 사람을 따라다닙니다. 가인의 경우를 그 예로 들을 수 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을 알았으며, 하나님과 대화하는 관계에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이 이에 대해 안색이 변하고 몹시 분해하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7). 그러므로 성도는 평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하는 긴박감에 놓여 있습니다. 사람이 용서받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의 죄가 떠올라야 합니다. 자기의 잘못이 생각나지 않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지른 죄가 있는데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을 자기 내면에 방치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죄는 문득 문득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죄가 떠오르는 것, 자기의 잘못이 떠오르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순간 그 사람에게 그 사람의 죄를 떠올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은혜이며 축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냄새의 원인을 잡으면 그 냄새를 없앨 수 있습니다. 통증의 원인을 찾으면 통증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된 것이며, 질병의 원인을 찾게 되면, 질병을 근절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의 죄를 깨닫게 되어 회개하게 되면, 어둠의 권세가 더 이상 그 사람을 잡고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죄의 고백과 회개는, 그래서 치유이고 회복이며 자유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죄 없는 자로 여겨주시는 그 사람, 즉 마음에 속임수가 없는 그 사람은 복되고 복되다고 말씀합니다(2절). 천국 백성이라 함은 반드시 진실함의 문을 통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대하며 관계할 때도 와 비슷한 상황들이 펼쳐집니다. 진실한 사람을 인정하게 되고 진실한 사람을 믿게 됩니다. 사람이 자기의 죄를 고백하지 않았을 때에는 그 인생에 무언가 신호가 옵니다. 소화가 잘 안 된다든지, 잠이 안 온다든지, 마음이 무거워 괴롭다든지 기타 원인 모를 일들이 펼쳐지게 됩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 않을 때 종일 신음하다가 지치게 되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서 죄가 회개되지 않고 남아있으면 반드시 티가 나는 법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밤낮으로 주의 손이 나를 무겁게 누르시므로 여름의 뙤약볕에 물이 말라버리듯 내 기력이 쇠하였습니다.”(4절) 즉 자기의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자기를 짓누르시며, 고뇌와 환난이 다가오고, 기력이 완전히 다 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여기서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자기가 자기의 죄를 고백하기로 결심하고 자신의 잘못과 죄를 숨김없이 다 털어놓았더니, 하나님께서 자기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죄는 감추거나 다른 사람에게 투사하는 방식으로 다루게 되면, 그러한 삶은 자기에게 계속 남아있는 죄로 인해 죄에 찌든 모습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경건한 사람들은 주를 만날 수 있을 때에 주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환난의 홍수가 밀어닥칠지라도 그들에게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를 주님께 고백하여 우리 삶에 은혜와 소망이 가득 넘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
- 칼럼
- WAIC 칼럼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행복으로 가는 길’(시 32:1~6)
-
-
[언론회 논평] 방송법 개정이 정치적 중립인가? 악법인가?
- 2일, 국회 과방위(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소위원회에서는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방송의 지배구조를 변경하는 소위 ‘방송3법’(방송법, 방송문화진흥회법, 한국교육방송공사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공영방송인 KBS, MBC, EBS를 겨냥한 것이다. 현행 KBS 이사는 11명에서 15명으로, MBC와 EBS는 9명에서 13명으로 늘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 중에 국회 추천은 물론, 시청자위원회, 방송 종사자, 학회, 법조계를 포함시키는 것으로 되어 있다. 거기에다 공영방송과 보도 전문 채널(YTN, 연합뉴스TV)의 보도 책임자를 임명할 때, 직원 과반수 동의를 받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사장을 임명할 때도 새롭게 구성된 이사 5분의 3 찬성으로 통과하도록 규정하는 내용이다. 결과적으로 방송의 지배구조를 현 정권과 노선을 같이하는 노조와 그 세력들이 방송을 지배하도록 하는 구조로 변경하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도 한국의 공영방송은 일방적으로 치우친 이념과 사고(思考)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도 모자라 방송을 현 정부와 여당이 영구적으로 차지하며, 장악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더불어민주당이 방송3법을 강행으로 처리하려는 시도는 벌써 세 번째인데, 이미 두 차례는 국회를 통과했지만, 대통령의 재의요구권(거부권)으로 국회에서 폐기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방송3법’을 개정하려는 민주당의 의도는 무엇인가? 방송3법 개정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담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방송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할 수 있는가이다. 진영 성향이 강한 시민단체나 노조가 다수를 점하는 이사회의 지배구조로는 이를 담보하기 어렵다고 본다. 또 다양한 의견이라며, 공영방송의 조직과 운영이 비효율적으로 잘못 나갈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방송의 공정성과 다양성과 객관성과 진정성은 보장되기 어렵다고 본다. 더불어민주당측에서는 ‘방송이 정권에 의해 좌지우지된 시대를 쐐기 박고, 국민 참여로 방송이 온전하게 운영될 수 있도록 역할을 하겠다는 취지’라고 한다. 그런데 그 말을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이며, 진심인가? 오히려 외형적으로는 다양성을 갖췄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편향과 왜곡을 심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더 힘을 얻는다고 본다. 어느 권력이든 언론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보장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정치의 개입 차단을 막겠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언론들이 독립과 공정성을 지키고 있는가? 이를 믿는 국민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이런 식의 방송법 개정으로는 오히려 국민들에게 괴리감(乖離感)만 더할 뿐이다. 이제라도 정치권은 자기들 입맛에 맞는 ‘방송 길들이기’를 위한 입법을 강제할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사랑하고, 인정할 만한 방송이 되는 길을 보장하도록 힘써야 한다. 다수의 권력으로써, 억지로 방송법을 바꾸려는 태도는 오히려 방송을 망치려는 책동으로 보는 국민들의 시선이 많다. 이것이 잘못된 판단인가? 지금은 방송법 개정이 시급한 것이 아니라, 방송의 공정성 담보를 위한 거대 여당의 노력이 훨씬 중요하고 필요하다. 정치권이 방송을 내 편으로 만들려고 억지를 부릴 때, 방송의 순기능은 죽는 것이며, 국민들로부터 방송을 아예 빼앗아가는 악법이 될 것이다.
-
- 칼럼
- WAIC 칼럼
-
[언론회 논평] 방송법 개정이 정치적 중립인가? 악법인가?
-
-
[언론회 논평] 방송법 개정이 정치적 중립인가? 악법인가?
- 2일, 국회 과방위(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소위원회에서는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방송의 지배구조를 변경하는 소위 ‘방송3법’(방송법, 방송문화진흥회법, 한국교육방송공사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공영방송인 KBS, MBC, EBS를 겨냥한 것이다. 현행 KBS 이사는 11명에서 15명으로, MBC와 EBS는 9명에서 13명으로 늘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 중에 국회 추천은 물론, 시청자위원회, 방송 종사자, 학회, 법조계를 포함시키는 것으로 되어 있다. 거기에다 공영방송과 보도 전문 채널(YTN, 연합뉴스TV)의 보도 책임자를 임명할 때, 직원 과반수 동의를 받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사장을 임명할 때도 새롭게 구성된 이사 5분의 3 찬성으로 통과하도록 규정하는 내용이다. 결과적으로 방송의 지배구조를 현 정권과 노선을 같이하는 노조와 그 세력들이 방송을 지배하도록 하는 구조로 변경하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도 한국의 공영방송은 일방적으로 치우친 이념과 사고(思考)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도 모자라 방송을 현 정부와 여당이 영구적으로 차지하며, 장악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더불어민주당이 방송3법을 강행으로 처리하려는 시도는 벌써 세 번째인데, 이미 두 차례는 국회를 통과했지만, 대통령의 재의요구권(거부권)으로 국회에서 폐기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방송3법’을 개정하려는 민주당의 의도는 무엇인가? 방송3법 개정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담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방송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할 수 있는가이다. 진영 성향이 강한 시민단체나 노조가 다수를 점하는 이사회의 지배구조로는 이를 담보하기 어렵다고 본다. 또 다양한 의견이라며, 공영방송의 조직과 운영이 비효율적으로 잘못 나갈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방송의 공정성과 다양성과 객관성과 진정성은 보장되기 어렵다고 본다. 더불어민주당측에서는 ‘방송이 정권에 의해 좌지우지된 시대를 쐐기 박고, 국민 참여로 방송이 온전하게 운영될 수 있도록 역할을 하겠다는 취지’라고 한다. 그런데 그 말을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이며, 진심인가? 오히려 외형적으로는 다양성을 갖췄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편향과 왜곡을 심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더 힘을 얻는다고 본다. 어느 권력이든 언론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보장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정치의 개입 차단을 막겠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언론들이 독립과 공정성을 지키고 있는가? 이를 믿는 국민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이런 식의 방송법 개정으로는 오히려 국민들에게 괴리감(乖離感)만 더할 뿐이다. 이제라도 정치권은 자기들 입맛에 맞는 ‘방송 길들이기’를 위한 입법을 강제할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사랑하고, 인정할 만한 방송이 되는 길을 보장하도록 힘써야 한다. 다수의 권력으로써, 억지로 방송법을 바꾸려는 태도는 오히려 방송을 망치려는 책동으로 보는 국민들의 시선이 많다. 이것이 잘못된 판단인가? 지금은 방송법 개정이 시급한 것이 아니라, 방송의 공정성 담보를 위한 거대 여당의 노력이 훨씬 중요하고 필요하다. 정치권이 방송을 내 편으로 만들려고 억지를 부릴 때, 방송의 순기능은 죽는 것이며, 국민들로부터 방송을 아예 빼앗아가는 악법이 될 것이다.
-
- 칼럼
- WAIC 칼럼
-
[언론회 논평] 방송법 개정이 정치적 중립인가? 악법인가?
-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논평] 하미자 목사의 ‘마땅히 할 일’(신 30:14)
- 우리가 마땅히 할 일은 첫째,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어서 우리를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히 4:12) 둘째, 사람들에게 율례와 법도를 가르쳐야 합니다. 말씀 속에 깨달음과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시 119:32) 본문을 보면,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는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은 바로 우리의 입에 있고, 마음에 있어서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주의 계명의 길로 달려가야 합니다. 구약의 율법은 수만 가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여겼습니다. “수만 가지 율법을 써 주었으나, 자기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처럼 여겼다.”(호 8: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은 그 많은 율법 중 우리가 마땅히 지켜야 할 것을 열한 가지로 말합니다. 주님의 장막에서 주님과 영원토록 함께 살 자격이 있는 사람은, 1) 깨끗한 삶을 사는 사람, 2)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 3) 마음으로 진실을 말하는 사람, 4) 혀를 놀려 남의 허물을 들추지 않는 사람, 5) 친구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 6) 이웃을 모욕하지 않는 사람, 7)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자를 경멸하는 사람, 8)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존경하는 사람, 9) 맹세한 것은 해가 되더라도 깨뜨리지 않고 지키는 사람, 10) 높은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않는 사람, 11) 무죄한 사람을 해칠세라 뇌물을 받지 않는 사람입니다. “주님, 누가 주님의 장막에서 살 수 있겠습니까? 누가 주님의 거룩한 산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깨끗한 삶을 사는 사람,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 마음으로 진실을 말하는 사람, 혀를 놀려 남의 허물을 들추지 않는 사람, 친구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 이웃을 모욕하지 않는 사람,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자를 경멸하고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존경하는 사람입니다. 맹세한 것은 해가 되더라도 깨뜨리지 않고 지키는 사람입니다. 높은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않으며, 무죄한 사람을 해칠세라 뇌물을 받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시 15: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정의와 진리와 이웃사랑을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면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웃과의 약속을 쉽게 파기하거나 뇌물을 받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도 영원히 흔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사야는 그 율법을 여섯 가지로 말합니다. 1) 의롭게 사는 사람, 2) 정직하게 말하는 사람, 3) 권세를 부려 가난한 사람의 재산을 착취하지 않는 사람, 4) 뇌물을 거절하는 사람, 5) 살인자의 음모에 귀를 막는 사람, 6) 악을 꾀하는 것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는 사람입니다. “의롭게 사는 사람, 정직하게 말하는 사람, 권세를 부려 가난한 사람의 재산을 착취하는 일은 아예 생각하지도 않는 사람, 뇌물을 거절하는 사람, 살인자의 음모에 귀를 막는 사람, 악을 꾀하는 것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는 사람”(사 33:15)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에게는 안전과 먹거리가 끊어지지 않게 된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안전한 곳에 산다. 돌로 쌓은 견고한 산성이 그의 은신처가 될 것이다. 먹거리가 끊어지지 않고, 마실 물이 떨어지지 않는다.”(사 33: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미가는 그 율법을 세 가지로 말합니다. 1) 공의를 실천하며, 2) 인자를 사랑하며, 3)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주님 뜻대로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며, 세상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겸손하게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박국은 그 율법을 한 가지로 말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를 보아라. 그는 정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합 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폭력과 다툼과 불의가 판을 치는 상황 속에서 하박국이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할 때 주신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을 굳게 믿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히 11:6) 믿음은 하나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믿음 없이는 죄 사함을 받을 수 없고,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행 16:31)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히 12:2)
-
- 칼럼
- WAIC 칼럼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논평] 하미자 목사의 ‘마땅히 할 일’(신 30:14)
-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할렐루야로 찬송하라’(계 19:1-5)
- 할렐루야는 구약에서 시편에 많이 나오고, 신약에서는 요한계시록 19장에 나옵니다. 할렐루야의 ‘할렐’은 ‘노래하다, 송축하다’라는 히브리말 ‘할랄’의 강조형태이고, ‘루’는 2인칭 복수명령형, ‘야’는 여호와의 축약형입니다. 그래서 할렐루야는 ‘너희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반드시 찬양하여라’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본문을 보면,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이르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두 번째로 할렐루야 하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 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작은 자나 큰 자나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하더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왜 할렐루야를 불러야 할까요? 첫째, 구원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영광은 하나님만이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능력은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즉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찬양해야 합니다.(1절)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2a절) 하나님 심판이 왜 참되신가를 보면, 첫째, 하나님만이 사람의 깊은 속마음을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만이 바른 판단을 하실 수 있는 지혜가 있으시기 때문입니다.(계 7:12)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셨도다.”(2b절) 하나님은 순교자들의 피를 반드시 갚으십니다.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계 6: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공의롭게 갚아 주시지만, 수가 차기까지 하라고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작정한 수가 찰 때까지 순교자들이 계속 생길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끝까지 믿음을 지킨 순교자들처럼 우리도 끝까지 믿음 지키기를 소망합니다.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합니다.(4절) 여기서 이십사 장로는 구원받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네 생물은 모든 살아 있는 피조물인 사자(용맹성 상징), 송아지(힘), 사람(지능), 독수리(빠름)입니다. “하나님 종들”(5절)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인 선지자와 순교자를 의미합니다. 작은 자나 큰 자나 모두 사회 계급 차별 없이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의 찬양 핵심은 어린양, 즉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찬양 내용은 예수님의 우리를 위한 희생적인 죽음과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 것을 찬양합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서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이루어졌음을 노래하는 것이 찬양의 핵심입니다. 다음으로 천사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소유하신 일곱 가지를 찬양합니다. 즉 능력, 부, 지혜, 힘, 존귀, 영광, 찬송입니다.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계 5:11-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찬송은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찬송’, ‘복’입니다.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약 3:10)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엡 1:3) 우리가 드리는 찬송으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면서 거기에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세 번째 나머지 우주가 찬송하는 것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양입니다. 즉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동격으로 찬양받으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계 5:13-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연이 아멘하고, 우리는 경배해야 합니다. 예수의 보혈로 구원받은 우리는 평생 할렐루야로 주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
- 칼럼
- WAIC 칼럼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할렐루야로 찬송하라’(계 19:1-5)
-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말씀으로 주님을 만나다’ (계 19:11~16)
- 요한계시록의 내용에는 상징이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잘 읽으면서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그 상징하는 언어가 나타내는 의미가 반드시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 의미를 찾는 것이 성경말씀 해석의 관건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요한의 눈을 열어주셨고, 주 하나님을 나타내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이 사도 요한을 통해 기록되었으니, 이는 요한만을 위한 것이 아니며, 후대의 사람들에게도 하나님과 그 뜻을 나타내 보여 주시기 위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계시된 책을 덮어만 두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경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치유받고, 말씀을 읽을 때마다 그 말씀이 믿어지고 깨달아지며 지혜가 임하는 놀라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여야 될 줄 믿습니다. 요한은 하늘이 열리고 거기 흰 말 위에 ‘충신’과 ‘진실’이라고 부르는 분이 앉아서 정의로 심판하며 싸우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을 위해 변호해 주고, 몸소 싸워준다면 얼마나 큰 은혜가 되겠습니까? 예수님이 그러한 분이십니다. 주님은 완전히 신실하시고 진실하십니다. 그리고 공의와 정의를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하기에 주님께서는 우리도 거룩하고 온전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 하늘문을 열어놓고 계십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을 열고 오직 주님을 먼저 생각하며, 생사를 주께 맡기며,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일에 신실한 마음으로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싸움은 선과 악의 싸움이며, 진실과 거짓의 싸움이고, 정의와 불의의 싸움이며, 최종적으로는 하나님과 어둠의 영과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도, 정치권에도, 사회 속에도, 가정과 개인의 마음 안에도 이러한 선과 악의 싸움과 진실과 거짓의 싸움과 정의와 불의의 싸움이 있습니다. 이러한 싸움은 결국 하나님 안에 거하는가, 어둠과 정욕에 거하는가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거기에서 이겨야 할 줄 믿습니다. 백마를 타신 분이 충신과 진실이며, 피 뿌린 옷을 입으신 것으로 보아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피는 예수님께서 박해와 순교로 인해 흘리신 피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요한복음 1장 초두에 나오는, 이른바 말씀이 곧 예수님이신 것을 나타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읽는 것은 예수님을 만나는 일과 같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것과 같은 일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예리한 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좌우에 날선 검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많은 이적과 기사를 행하셨습니다. 오늘날 주님을 믿는 많은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이행함을 통해서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감으로 인해 크고 놀라운 은혜의 주인공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십니다(16절). 우리는 이 사실을 온전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께서 말씀과 권능으로 온 세상을 다스리시며, 심판하시고,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의 뜻에 합당하도록 선하고 공의로운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뜻과 그 말씀에 맞추어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
- 칼럼
- WAIC 칼럼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말씀으로 주님을 만나다’ (계 19:11~16)
-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욥의 고백’(욥 42:5)
-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습니다.(1:1) 사탄은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9절)라고 하며 욥의 모든 소유물을 치면 주님을 욕하지 않겠느냐고 말했습니다.(11절) 하나님께서는 욥을 신뢰하심으로 그의 몸에는 손을 대지 말라고 하시며 사탄에게 욥을 맡기셨습니다.(12절) 그래서 욥은 단순한 고난이 아니라 사탄의 전략을 다 보게 되었습니다. 욥은 고난 중에도 중보자가 계심을 믿었습니다.(19:25) 본문을 보면,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욥은 고난을 통해 그동안 하나님을 귀로 듣기만 하였는데, 이제 눈으로 하나님을 보았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욥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깨닫고, 고난 문제를 단순한 죄로만 본 것을 회개하며 하나님 섭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욥이 매우 심한 고난을 당한다는 소식을 듣고 세 친구 엘리바스, 빌닷, 스발이 찾아왔습니다. 나중에 엘리후가 등장합니다. 세 친구는 욥의 고난을 죄의 값으로 보았습니다. 엘리후는 욥을 훈련하기 위해서 고난을 주신다고 말하지만, 나중에는 죄의 값으로 보았습니다. 고난은 죄의 값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욥의 세 친구들의 그런 주장에 노하셨습니다. 사람 자체만으로도 우주를 다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 섭리와 무궁한 지혜를 사람이 다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욥의 네 친구가 욥의 고난을 보며 말한 내용을 살펴봅니다. 엘리바스는 고난에 대한 지혜를 그의 개인적인 경험에 의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볼지어다 우리가 연구한 바가 이와 같으니 너는 들어 보라 그러면 네가 알리라.”(5:27) 엘리바스의 태도는 잘 관찰하고 스스로 판단하겠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빌닷은 고난에 대한 지혜를 과거 전통으로 보았습니다. “청하건대 너는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조상들이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8:8) 전통과 격언은 참고는 되지만, 사람의 것이므로 한계가 있습니다. 소발은 고난에 대한 지혜를 자기 느낌, 즉 즉감으로 보았습니다. 자기 생각이 옳으면 옳은 것입니다. 소발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늙은 자에게는 지혜가 있고 장수하는 자에게는 명철이 있느니라.”(12:12) 소발은 자신의 지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온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지혜의 근본 된 것이 문제입니다. 엘리후는 욥에 대해 심각하게 비난하지 않지만 세 사람이 놓친 것, 즉 고난은 사람을 사람되게 만들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는 사람에게 그의 행실을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의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33:17) 그러나 엘리후가 잘못 생각한 것은, 고난을 이기면 반드시 번영과 축복이 온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견해입니다. “만일 그들이 순종하여 섬기면 형통한 날을 보내며 즐거운 해를 지낼 것이요 만일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면 칼에 망하며 지식 없이 죽을 것이니라.”(36:11-12)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욥은 고난에 대한 지혜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28:28) 우리도 고난을 이기는 지혜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세 친구들이 고난에 대해 말한 것이 욥의 말처럼 옳지 못하다고 책망하셨습니다.(42:7)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세 친구가 욥의 고난을 죄의 값으로 본 것은 맞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단순화시킨 것이 잘못입니다. 죄를 지으면 벌을 주시는 분으로만 생각한 것이 잘못입니다. 세 친구 생각에 교훈이 될 말한 지혜는 사람의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겼는데, 모든 것을 판단하는 최종적인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다 안다고 한 것이 잘못입니다. 세 친구는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고 욥의 기도를 통해 어리석게 말한 것을 용서받게 되었습니다.(42:8) 한편, 엘리후는 책망에서 제외됩니다. 사람 만들기 위해 고난이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죄의 값이기도 하지만, 회개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보상해 주신다고 본 것이 문제입니다. 죄의 값의 결과가 이 세상에서 꼭 일어난다고 볼 수 없으며, 회개하더라도 복을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지혜로는 세상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섭리를 다 깨달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참다운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신뢰하며 경외하는 자에게 주님께서 자신을 계시해 주시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
- 칼럼
- WAIC 칼럼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욥의 고백’(욥 4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