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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할렐루야로 찬송하라’(계 19:1-5)
- 할렐루야는 구약에서 시편에 많이 나오고, 신약에서는 요한계시록 19장에 나옵니다. 할렐루야의 ‘할렐’은 ‘노래하다, 송축하다’라는 히브리말 ‘할랄’의 강조형태이고, ‘루’는 2인칭 복수명령형, ‘야’는 여호와의 축약형입니다. 그래서 할렐루야는 ‘너희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반드시 찬양하여라’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본문을 보면,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이르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두 번째로 할렐루야 하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 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작은 자나 큰 자나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하더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왜 할렐루야를 불러야 할까요? 첫째, 구원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영광은 하나님만이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능력은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즉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찬양해야 합니다.(1절)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2a절) 하나님 심판이 왜 참되신가를 보면, 첫째, 하나님만이 사람의 깊은 속마음을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만이 바른 판단을 하실 수 있는 지혜가 있으시기 때문입니다.(계 7:12)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셨도다.”(2b절) 하나님은 순교자들의 피를 반드시 갚으십니다.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계 6: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공의롭게 갚아 주시지만, 수가 차기까지 하라고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작정한 수가 찰 때까지 순교자들이 계속 생길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끝까지 믿음을 지킨 순교자들처럼 우리도 끝까지 믿음 지키기를 소망합니다.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합니다.(4절) 여기서 이십사 장로는 구원받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네 생물은 모든 살아 있는 피조물인 사자(용맹성 상징), 송아지(힘), 사람(지능), 독수리(빠름)입니다. “하나님 종들”(5절)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인 선지자와 순교자를 의미합니다. 작은 자나 큰 자나 모두 사회 계급 차별 없이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의 찬양 핵심은 어린양, 즉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찬양 내용은 예수님의 우리를 위한 희생적인 죽음과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 것을 찬양합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서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이루어졌음을 노래하는 것이 찬양의 핵심입니다. 다음으로 천사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소유하신 일곱 가지를 찬양합니다. 즉 능력, 부, 지혜, 힘, 존귀, 영광, 찬송입니다.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계 5:11-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찬송은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찬송’, ‘복’입니다.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약 3:10)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엡 1:3) 우리가 드리는 찬송으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면서 거기에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세 번째 나머지 우주가 찬송하는 것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양입니다. 즉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동격으로 찬양받으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계 5:13-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연이 아멘하고, 우리는 경배해야 합니다. 예수의 보혈로 구원받은 우리는 평생 할렐루야로 주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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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할렐루야로 찬송하라’(계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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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말씀으로 주님을 만나다’ (계 19:11~16)
- 요한계시록의 내용에는 상징이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잘 읽으면서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그 상징하는 언어가 나타내는 의미가 반드시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 의미를 찾는 것이 성경말씀 해석의 관건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요한의 눈을 열어주셨고, 주 하나님을 나타내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이 사도 요한을 통해 기록되었으니, 이는 요한만을 위한 것이 아니며, 후대의 사람들에게도 하나님과 그 뜻을 나타내 보여 주시기 위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계시된 책을 덮어만 두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경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치유받고, 말씀을 읽을 때마다 그 말씀이 믿어지고 깨달아지며 지혜가 임하는 놀라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여야 될 줄 믿습니다. 요한은 하늘이 열리고 거기 흰 말 위에 ‘충신’과 ‘진실’이라고 부르는 분이 앉아서 정의로 심판하며 싸우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을 위해 변호해 주고, 몸소 싸워준다면 얼마나 큰 은혜가 되겠습니까? 예수님이 그러한 분이십니다. 주님은 완전히 신실하시고 진실하십니다. 그리고 공의와 정의를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하기에 주님께서는 우리도 거룩하고 온전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 하늘문을 열어놓고 계십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을 열고 오직 주님을 먼저 생각하며, 생사를 주께 맡기며,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일에 신실한 마음으로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싸움은 선과 악의 싸움이며, 진실과 거짓의 싸움이고, 정의와 불의의 싸움이며, 최종적으로는 하나님과 어둠의 영과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도, 정치권에도, 사회 속에도, 가정과 개인의 마음 안에도 이러한 선과 악의 싸움과 진실과 거짓의 싸움과 정의와 불의의 싸움이 있습니다. 이러한 싸움은 결국 하나님 안에 거하는가, 어둠과 정욕에 거하는가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거기에서 이겨야 할 줄 믿습니다. 백마를 타신 분이 충신과 진실이며, 피 뿌린 옷을 입으신 것으로 보아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피는 예수님께서 박해와 순교로 인해 흘리신 피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요한복음 1장 초두에 나오는, 이른바 말씀이 곧 예수님이신 것을 나타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읽는 것은 예수님을 만나는 일과 같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것과 같은 일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예리한 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좌우에 날선 검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많은 이적과 기사를 행하셨습니다. 오늘날 주님을 믿는 많은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이행함을 통해서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감으로 인해 크고 놀라운 은혜의 주인공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십니다(16절). 우리는 이 사실을 온전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께서 말씀과 권능으로 온 세상을 다스리시며, 심판하시고,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의 뜻에 합당하도록 선하고 공의로운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뜻과 그 말씀에 맞추어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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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말씀으로 주님을 만나다’ (계 19: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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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욥의 고백’(욥 42:5)
-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습니다.(1:1) 사탄은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9절)라고 하며 욥의 모든 소유물을 치면 주님을 욕하지 않겠느냐고 말했습니다.(11절) 하나님께서는 욥을 신뢰하심으로 그의 몸에는 손을 대지 말라고 하시며 사탄에게 욥을 맡기셨습니다.(12절) 그래서 욥은 단순한 고난이 아니라 사탄의 전략을 다 보게 되었습니다. 욥은 고난 중에도 중보자가 계심을 믿었습니다.(19:25) 본문을 보면,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욥은 고난을 통해 그동안 하나님을 귀로 듣기만 하였는데, 이제 눈으로 하나님을 보았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욥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깨닫고, 고난 문제를 단순한 죄로만 본 것을 회개하며 하나님 섭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욥이 매우 심한 고난을 당한다는 소식을 듣고 세 친구 엘리바스, 빌닷, 스발이 찾아왔습니다. 나중에 엘리후가 등장합니다. 세 친구는 욥의 고난을 죄의 값으로 보았습니다. 엘리후는 욥을 훈련하기 위해서 고난을 주신다고 말하지만, 나중에는 죄의 값으로 보았습니다. 고난은 죄의 값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욥의 세 친구들의 그런 주장에 노하셨습니다. 사람 자체만으로도 우주를 다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 섭리와 무궁한 지혜를 사람이 다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욥의 네 친구가 욥의 고난을 보며 말한 내용을 살펴봅니다. 엘리바스는 고난에 대한 지혜를 그의 개인적인 경험에 의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볼지어다 우리가 연구한 바가 이와 같으니 너는 들어 보라 그러면 네가 알리라.”(5:27) 엘리바스의 태도는 잘 관찰하고 스스로 판단하겠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빌닷은 고난에 대한 지혜를 과거 전통으로 보았습니다. “청하건대 너는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조상들이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8:8) 전통과 격언은 참고는 되지만, 사람의 것이므로 한계가 있습니다. 소발은 고난에 대한 지혜를 자기 느낌, 즉 즉감으로 보았습니다. 자기 생각이 옳으면 옳은 것입니다. 소발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늙은 자에게는 지혜가 있고 장수하는 자에게는 명철이 있느니라.”(12:12) 소발은 자신의 지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온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지혜의 근본 된 것이 문제입니다. 엘리후는 욥에 대해 심각하게 비난하지 않지만 세 사람이 놓친 것, 즉 고난은 사람을 사람되게 만들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는 사람에게 그의 행실을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의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33:17) 그러나 엘리후가 잘못 생각한 것은, 고난을 이기면 반드시 번영과 축복이 온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견해입니다. “만일 그들이 순종하여 섬기면 형통한 날을 보내며 즐거운 해를 지낼 것이요 만일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면 칼에 망하며 지식 없이 죽을 것이니라.”(36:11-12)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욥은 고난에 대한 지혜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28:28) 우리도 고난을 이기는 지혜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세 친구들이 고난에 대해 말한 것이 욥의 말처럼 옳지 못하다고 책망하셨습니다.(42:7)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세 친구가 욥의 고난을 죄의 값으로 본 것은 맞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단순화시킨 것이 잘못입니다. 죄를 지으면 벌을 주시는 분으로만 생각한 것이 잘못입니다. 세 친구 생각에 교훈이 될 말한 지혜는 사람의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겼는데, 모든 것을 판단하는 최종적인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다 안다고 한 것이 잘못입니다. 세 친구는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고 욥의 기도를 통해 어리석게 말한 것을 용서받게 되었습니다.(42:8) 한편, 엘리후는 책망에서 제외됩니다. 사람 만들기 위해 고난이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죄의 값이기도 하지만, 회개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보상해 주신다고 본 것이 문제입니다. 죄의 값의 결과가 이 세상에서 꼭 일어난다고 볼 수 없으며, 회개하더라도 복을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지혜로는 세상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섭리를 다 깨달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참다운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신뢰하며 경외하는 자에게 주님께서 자신을 계시해 주시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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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욥의 고백’(욥 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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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순간 촬영되는 우리 신앙’ (빌 2:12~18)
- 성도는 언제든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부분에 있어서 매우 허영심이 가득한 모습으로 나타나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특별한 사건이 있을 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상시 물건을 나르는 모습에서, 일상적인 걸음걸이에서, 눈빛과 머리를 흔들어 보이는 과정에서 그러한 모습이 묻어나 보이게 됩니다. 사진을 촬영할 때 쓰는 용어로 ‘스냅샷’(snapshot)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는 순간적인 장면을 촬영한 사진으로, 인물 사진에서는 자연스러운 동작이나 표정을 재빠르게 포착한 사진을 뜻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일상생활 가운데 나타나는 0.1초의 순간적 동작과 모습 속에 휙 하고 지나가는 몸동작이지만 그 안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자기만의 현실과 사정이 고스란히 담겨있게 됩니다. 그러한 모습은 대개 과거로부터 이어져 오는 습관적인 것들입니다. 때로는 평소 감사를 잃어버린 채 불만족스러워하던 습관적인 모습이, 때로는 자신의 우월함을 은근히 나타내 보려는 모습으로, 때로는 무능력함의 뒷모습으로, 때로는 자기의 이익을 애써 감추며 생활이 어려운 사람인 것처럼 행세하는 모습으로, 때로는 상대방을 속으로 조소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곤 합니다. 이렇게 순간적으로 나타나는 자기만의 연약하고 부족한 허영심의 모습은 자기 내면에 숨어있는 과거의 모습이며, 현재까지도 남아있는 연약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이나 믿음의 부모와 같이 신앙의 모범이 되는 사람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그렇게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뤄나가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변화를 추구하는 것은 작은 일처럼 생각될 수 있지만, 그것은 자신의 구원과 관련되어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일은 그렇게 ‘값싼 은혜’가 아닌 것입니다. 독일의 신학자요, 순교자인 디트리히 본회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값싼 은혜는 교회의 철천지 원수입니다. 값싼 은혜란, 회개가 없는 사죄요, 교회의 권징이 없는 세례요, 죄의 고백이 없는 성만찬이요, 개인의 참회개가 없는 용서입니다. 값싼 은혜란 뒤따름이 없는 은혜요, 십자가가 없는 은혜입니다.” 즉 하나님과 구원이 가장 귀한 것인데도, 실상은 은혜와 신앙을 쉽고 값싼 것이라고 생각해서 하나님도 교회도 하찮고 쉬운 존재로 여기는 잘못된 신앙, 빗나간 교인의 모습을 뜻하는 말입니다. 기도회에 곧잘 나오지만, 막상 참된 회개는 없는 그런 기도를 하는 모습이라든지, 하나님과 교회 앞에 분명히 잘못을 저질렀는데도 교회는 권징하지 못하고, 잘못을 행한 자들은 여전히 교회의 주요 활동에 참여하며,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쉽게 여긴다든지, 참된 회개가 없는데도 형식적인 용서를 받은 것처럼 예배드리며 마당만 밟고 자리를 떠나는 모습 등에 대해 ‘값싼 은혜’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러한 값싼 은혜로 무장된 마음이 우리 안에 있게 된다면, 그러한 모습은 하나님과 신앙과 교회를 등한시하는 내면의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의 실상은 이런 값싼 은혜가 아닌, 순전하신 예수님의 보혈과 희생으로 이루어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값진 은혜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그에 따른 진정한 값진 은혜를 체험하고 그것을 끝까지 소유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값진 삶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순간의 동작이 회개를 이룬 고귀한 마음에서 나와야 합니다. 자신의 말 한마디, 한 동작이 그 사람의 신앙의 현주소를 정확히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사람 자신과 하나님의 현재의 관계를 나타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귀한 뜻을 위해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도록 하신다고 하셨습니다(13절). 그러므로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도록 해야 할 것이며(14절), 이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오는 지혜를 우리의 양심으로 받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 놓여 있는 우리의 모습과 마음이 더욱 값진 은혜를 사모하는 자의 모습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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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순간 촬영되는 우리 신앙’ (빌 2: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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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고전 16:21-24)
-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친필로 문안합니다. 바울은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선포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실제로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저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부활, 승천과 재림에 관한 복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구원과 복을 받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믿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라고 말한 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라고 축복합니다. 바울은 저주와 축복 사이에 왜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마라나 타)라고 말했을까요? ‘마라나 타’는 고린도전서 16장에 한 번 나옵니다. 요한계시록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b)는 ‘마라나 타’가 아닙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계 22:20a)에 대한 응답입니다. 고린도전서의 ‘마라나 타’는 같은 의미의 아람어 음역이고, 요한계시록의 응답은 헬라어 표현입니다. ‘마라나 타’는 세 가지로 번역이 가능합니다. 첫째,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재림을 기다리는 간구입니다. 둘째, 우리 주님이 오셨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살려 주는 영”으로 재림하신 것을 확실하게 말한 것입니다. 재림 원어는 ‘와 계시다’는 뜻입니다.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에 임한 영 곧 살려 주는 영이 되어 오순절에 순식간에 임하셨습니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 15:4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셋째, 우리 주님이 오신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께서 지금 예배와 성만찬 가운데 임재하시기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위와 같이 ‘마라나 타’의 미래, 완료, 현재형의 번역은 모두 합당합니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께서는 알파와 오메가로서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시공간 지평 융합 속에서 지금도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거, 현재, 미래는 하나입니다.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계 1:17-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이 저주와 축복 사이에 말한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것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그러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교회에도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라고 복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바울이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라고 말한 것은, 우리 죄를 씻기 위해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님이 되어주시기를 간구한 것입니다. 바울의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간구는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심을 증언한 것입니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께서는 살려 주는 영, 즉 다른 보혜사 성령으로 이미 오셔서 우리 가운데서 지금도 일하고 계신 것을 믿기 바랍니다. “오순절이 되어서, 그들은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다. 그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행 2: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몸은 살려 주는 영이 되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곧 다른 보혜사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습니다.(고전 6:19) 그래서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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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고전 16: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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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에벤에셀의 하나님’(삼상 7:12~14)
- 에벤에셀은 ‘도움의 돌’,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을 이긴 후에 도움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사무엘이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운 기념비의 이름이 에벤에셀이며, 이는 그 지명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일궈낸 승리는 단번에 시원하게 얻은 승리가 아닙니다. 사무엘 선지자 당시 이스라엘은 아벡에 진을 치고 있던 블레셋을 상대로 이곳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했던 전적이 있습니다(삼상 4:1-3). 그 뒤에도 이스라엘은 승리를 위해서 실로에 있던 언약궤를 이곳으로 가져왔지만, 재차 패배하고 언약궤마저 탈취당하게 됩니다. 즉 에벤에셀은 과거에 실패했던 자리였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치욕의 장소였고 적국인 블레셋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블레셋에게 참패해서, 이스라엘군 3만 4천 명이 죽었고, 그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던 하나님의 법궤마저 빼앗겼던 곳입니다. 인생으로 말한다면 커다란 상처와 약점이 있는 치욕스러운 부분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뼈아픈 실패의 자리가 기도의 자리로 되었고, 주님의 전적인 도우심으로 인해 승리의 자리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큰 변화의 이면에는 신실한 하나님의 일꾼을 통해 중요한 작업이 선행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여호와의 궤를 옮겨 언덕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 두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해서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을 온전히 믿기 위해 세상과 세속으로부터 구별되어 하나님과 교회를 잘 섬기고 지키는 일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한 지 상당한 시간이 흐르고 나서,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온 집에 말하기를 “만일 너희가 여호와께 전심으로 돌아오려면, 너희 중에서 이방신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오직 그분만을 섬겨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너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건져내실 것이다”라고 선포했습니다. 바알은 하늘의 폭풍과 비, 기후 등을 다스리는 신이며, 아스다롯은 땅의 곡식과 가축, 사랑과 전쟁을 다스리는 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현재 자기의 모습에서 제거해야 될 바알과 아스다롯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해보는 계기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이스라엘 자손들은 사무엘의 선포를 따라, 자신들이 숭배하던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게 됩니다. 이에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두 미스바로 모이게 해서, 그 날을 금식하면서 여호와께 범죄했음을 고백하는 자리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어린 양을 잡아 여호와 하나님께 온전한 번제로 드린 후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께 목놓아 기도드리자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응답하십니다. 얼마 후 다시 칼을 들고 찾아온 블레셋은 하나님이 일으키신 큰 천둥소리로 인해 어지럽게 되어, 결국 이스라엘에게 대패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해 천둥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최근 한국의 일부 지역에 여름철인데도 불구하고 콩알 반쪽만한 우박이 내린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상식을 넘어 자연만물을 통해 역사하시기도 합니다. 이것이 에벤에셀이 승리의 장소로 되기까지의 내용입니다. 여기까지 우리를 도와주신 에벤에셀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기적과 같은 큰 도움을 주실 것을 믿고 소망합니다. 그러한 승리를 위해 우리는 잘못한 부분에 대한 인식과 해결, 죄의 회개, 그리고 간절한 기도와 결심을 통해 하나님과 긴밀한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고 유지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의 길로 행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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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에벤에셀의 하나님’(삼상 7: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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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양식을 나눠주는 삶’(요 4:27-38)
- 우리의 사명은 전도와 선교입니다. 전도는 바로 나에게 맡겨주신 것입니다.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딛 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항상 전도자를 애타게 찾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영혼을 전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은 불바다에 던져지기 때문입니다.(계 20:15) 본문을 보면, “이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이르되 랍비여 잡수소서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르는 이것이니라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품행이 좋지 않은 사마리아 여자의 말을 듣고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께 나아온 것을 보면, 그 여자가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전심전력으로 증거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전도는 강권하는 것입니다. 나의 양식은(34절), 즉 나의 사명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아버지의 뜻은 무엇일까요? 잃은 자를 찾아내서 살리는 것이며,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 6:39-4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을 얻는 것은 육체가 죽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그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요 5:24) 그래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들(38절)은 영적인 추수를 위하여 수 세기 전부터 복음의 씨앗을 뿌린 사람들, 즉 예수님과 세례 요한, 구약의 모든 예언자를 가리킵니다. 제자들과 그 이후의 복음 사역자들은 영적인 추수에 참여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우리도 영적인 추수에 참여하도록 적극적으로 전도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눅 19:10) 예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셔서 생명을 지불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의 보혈로 구속의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죄와 사탄의 지배로부터 해방된 것이 우리의 구속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몸 전체를 대가로 지불하여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예수의 보혈은 우리를 죄에서 정결하게 해주셨습니다.(요일 1:7) 하나님과 교제를 갖게 해주셨습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분의 피로 하나님께 가까워졌습니다.”(엡 2: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도는 기회입니다. 함께 있는 자들에게 함께 있을 때 전도해야 합니다. 같은 집에 살지만 전도하지 않고, 같은 장소에서 일하지만 전도하지 않으면 영원히 분리되고 맙니다.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눅 17:34-3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도는 기쁨입니다. 잃어버린 영혼들이 돌아올 때 주님께서는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양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한 영혼 구원을 위해 기도하며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빌립이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하니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행 8:4-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성은 혼합 종교 영향을 많이 받은 곳입니다. 그러나 빌립이 복음을 전함으로써 그 성에 복음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도 복음을 통해 화해되었습니다. 우리도 사마리아 여자처럼, 빌립처럼 복음을 담대하게 전해서 영원토록 빛나기 바랍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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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양식을 나눠주는 삶’(요 4:2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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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주님의 놀라운 증거’(시 119:129~136)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증거가 알고 보면 너무 놀랍습니다. 사람을 보면 놀랍고, 꽃과 식물들을 봐도 놀랍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봐도 놀랍습니다. 사랑의 결과로 손톱보다도 작은 크기의 인간 배아가 자라나고 몸과 마음이 성숙된 어른이 되어 이 사회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꽃과 식물들을 봐도 그렇습니다. 추운 겨울에 다 얼어죽었을 법한 그들이, 생명의 기운과 새로운 씨앗들, 그리고 자연물과 자연현상에 깃들어있는 하나님의 오묘한 솜씨로 인해 새로운 꽃과 식물로 자라가는 모습 또한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 또한 그러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실 때에는 그 교회를 개척할 사람들의 마음에 교회 개척의 씨앗을 주심으로써, 거기서 교회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개척하고 나서 보면, 이전부터 교회 개척을 간절히 사모하던 누군가를 통해 기도로 예비하게 하셨고, 교회 개척이 이뤄지도록 새로운 상황이 진행되도록 하셨으며, 개척된 예배당에서 첫 예배가 시작되게 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와 성도가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탄생해서 자라나는 것도, 식물이 탄생해서 자라나 열매를 맺는 것도, 그리고 교회가 믿음과 기도를 통해 자라나는 일도, 모두 각각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인도하심과 살아나게 하시는 생명력으로 인해 자라나는 것입니다. 사람과 식물과 교회가 각각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고 겸허한 마음으로 순종하며 기도로 간구하며 나가는 일 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걱정한다고 되지 않고, 사람의 경험이나 인간적인 마음만으로도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마치 오병이어 기적이 일어날 때처럼, 그러한 방식과 그러한 구조로 이뤄지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증거가 알고 보면 이처럼 너무 놀랍습니다. 시편 기자는 그러므로 자신이 그러한 하나님의 증거를 지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증거를 발견할 수 있는 또 다른 것으로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이나 고난에 처하다가 간구한 끝에 하나님의 은혜를 얻게 되는 경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때, 거기에서 느끼고 누리게 되는 은혜 또한 매우 큰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열면, 거기에서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도 깨닫게 됨에 대해서 본문은 말씀합니다(130절). 하나님의 말씀은 과연 살아 있습니다. 이미 수천 년 전에 기록된 글들인데, 펼쳐 드는 순간 그 말씀이 읽는 사람의 심장과 그 삶에 파고 들어와 놀라운 영향력과 해결과 응답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의 능력과 권세를 체험하고 아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심으로 사모하며 온 신경과 관심을 그곳에 집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소 귀에 경 읽기”라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능력의 신비로움과 그 신선함과 살아 역사하는 힘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성경에 금을 입혀 놓은들 그 말씀의 소중함을 알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가정에서 언제든지 성경말씀 읽기의 부흥이 일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아니 그러한 부흥은 반드시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항상 그렇게 유지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며 예수님이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특히 말씀으로 우리에게 역사해 주십니다. 말씀을 읽는 것은 곧 주님을 접하는 일이 됩니다. 오늘도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야 할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향하시듯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향해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은혜의 시작입니다. “주님의 얼굴을 내게로 돌리셔서,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132절). 그 사람의 현재 처지와 상황을 그 사람의 걸음걸이나 뒷모습이 말해 줍니다. 사람은 자기 걸음걸이조차 자유롭게 조절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의 걸음걸이까지도 인도해 주시는 주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내 걸음걸이를 주님의 말씀에 굳게 세우시고, 어떠한 불의도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해주십시오”(119:133)라는 고백과 간구를 우리의 기도로 하나님께 올려보도록 합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람들의 억압에서 건져 주시는 분이십니다. 풍성한 말씀을 누리며 이를 통해 풍성한 삶과 풍성한 은혜를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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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주님의 놀라운 증거’(시 119:129~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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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예수님의 가르침’(요 13:12~15)
- 제자는 좋은 스승을 만나야 바른 교육을 받을 수 있습니다. 스승의 사전적 의미는 ‘나를 가르쳐주는 사람’이고, 선생의 사전적 의미는 ‘남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교육(education)은 라틴어로 ‘끄집어내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사람됨이 되도록 가르침이 교육의 본질이라는 뜻입니다.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하나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습니다.”(고전 4: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능력을 키워가기 위해서 서로 배워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주와 선생으로서 섬김을 받기보다 오히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섬겨주시면서 제자들에게 서로 섬기는 자세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에서 겸손하신 스승의 모습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3년간 공생애 기간 동안 두 가지 예식, 즉 성찬식과 세족식을 베푸셨습니다. 성찬은 구원의 확증을 의미하는 것이고, 세족은 구원받은 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결단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스승이 되시고 주가 되셨지만,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섬김의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세족식은 예수께서 사랑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섬김을 본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변화시키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삶으로 가르쳐주신 참된 스승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로 세우실 사람들을 찾아다니시며 부르셨습니다.(막 3:13)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이며, 영원한 스승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관심과 눈높이에서 출발하셔서 핵심적인 가르침을 주신 스승이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는 마을에 이르셨습니다. 한 사마리아 여자가 물을 길으러 나왔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마실 물을 좀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께 “선생님은 유대 사람인데,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라고 말하였습니다. 유대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과 상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는 “선생님, 그 물을 나에게 주셔서, 내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여기까지 나오지도 않게 해주십시오.”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여자는 “선생님, 내가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이십니다. 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여자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인 “네 남편을 불러 오너라”로부터 출발하셔서 예배에 대한 대화로 옮겨가셨습니다. 결국 그 여자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알고 전도하도록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내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히신 분이 계십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닐까요?”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뒤에서 살짝 만지고 오랜 혈루병이 나은 여인에게는 어떤 가르침을 주셨을까요?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예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나을 것으로 생각하고 뒤에서 예수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그때 몸이 나은 것을 느꼈습니다. 예수께서는 “누군가가 내게 손을 댔다. 나는 내게서 능력이 빠져나간 것을 알고 있다.”(눅 8:4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여자는 더 숨길 수 없음을 알고서, 떨면서 나아와 예수께 엎드려서, 손을 댄 이유와 곧 낫게 된 사실을 모든 사람 앞에 알렸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 앞에 그 여자를 세우심으로써 그 여자가 치유되었고, 더는 부정하지 않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알려주셨습니다. 그 여자가 당당하게 새로운 삶을 살도록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죄인들에게나 병자들에게는 그들의 눈높이로, 제자들에게는 제자들의 눈높이로 가장 적합한 가르침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배워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변화되도록 생명력 있게 가르쳐야 합니다. 제자가 되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말씀을 순종함으로써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고, 그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제자 되기 위해서 주님처럼 삶으로 사랑으로 가르쳐주는 겸손한 종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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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예수님의 가르침’(요 13: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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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효와 사랑과 감동에 대해’ (딤후 1:11~14)
- 사람의 마음이 감동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감동’(感動)이란, 무언가 크게 느끼어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감동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본래 마음과 태도가 변화되고, 비로소 귀한 마음가짐과 행동의 변화를 이루어 무언가 새롭고 소중한 일을 하게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의 일꾼인 디모데를 향해서 안수하기를 원했고, 디모데에게 안수할 때 하나님이 디모데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이 불일듯 되살아나게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안수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은혜와 그 마음과 능력을 전달하고 전수하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안수는 그 자체로 매우 고귀하고 선한 행위에 해당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실한 하나님의 일꾼, 순수한 사랑의 사역자 디모데의 진실한 믿음은 먼저 디모데의 할머니 로이스와 그의 어머니 유니게에게 있었는데, 디모데에게도 그러한 믿음이 있는 것을 바울은 발견했습니다. 이렇듯 한 사람의 순수한 열정과 진정한 믿음은 어느 한순간에 이뤄지지 않으며 대를 이어 나타난 그 성실함과 진실함과 온전한 믿음가운데 연결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한 디모데의 삶과 인성과 마음을 보았고, 감동했으며, 안수를 주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그러한 결심 또한 바울의 개인적이고 자의적인 차원에서 나온 것이 아닌, 하나님과 연결된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또 그분의 거룩한 일을 위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선행이나 무슨 자격으로 된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뜻과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인 우리 주님을 증거하는 일과 주님을 위해 고난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살고 있음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본문 13-14절)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하나님의 말씀을 본받아 지키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는 것이 무엇일까요?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요? 제가 잘 알던 고(故) 최성규 목사의 효(孝) 사역이 시작된 계기가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였습니다. 16일만에 극적으로 살아난 3명의 젊은 청년들이, 비록 신앙을 갖지 않았음에도 살아난 것에 대해, 그들이 공통적으로 모두 효자, 효녀였다는 것과 연결되면서 최 목사로 하여금 ‘효’를 본격 연구하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효의 관점에서 성경을 읽어보면, 일곱가지로 효가 정리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고(1효), 부모와 어른 스승을 공경하고(2효), 어린이와 청소년, 제자를 사랑하며(3효), 가족사랑(4효)과 나라사랑(5효), 자연사랑과 환경보호(6효)에 이어 이웃사랑과 인류봉사(7효)로 정리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곱 효가 이뤄지면 다시 7가지 행복(가정 학교 사회 경제 나라 교회 인류)이 온다는 내용입니다. 효의 원전은 효경이나 유교 경전이 아니라, 성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효를 가르친 공자는 BC 551년 인물이지만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을 가르친 모세는 BC 1526년 인물입니다다. 그리고 그 내용은 하나님께서 직접 모세를 통해 주신 말씀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통해 얻지만 행복은 효를 통해 받는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분명히 부모를 공경하면 이 땅에서 복과 장수를 얻는다는 약속의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복음을 위해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열심은 언제나 그 삶의 방향이 주님의 뜻인 복음과 긴밀히 밀착되어 있어야 하며 이를 실천하기 위해 근본적으로 효를 행하는 사람들이 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앙으로 살 때, 우리의 모든 상황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가장 선한 방법으로 가장 크고 놀라운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순전한 마음과 진정한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부모를 공경하며, 자녀와 이웃을 사랑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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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효와 사랑과 감동에 대해’ (딤후 1: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