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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독연 칼럼] 강성률 목사의 ‘끝마무리’
-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왕하5:10). 서울 강북 경찰서는 지난달 26일 미아지구대 소속 경찰관 2명을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불구속 입건하였습니다. 해당 지구대 경찰관들은 지난해 11월 30일 서울에 한파경보가 내려졌을 당시 60대 취객을 집 문 앞까지 데려다주고 돌아갔는데, 이 취객이 약 6시간 후에 이웃 주민에 의하여 숨진 채로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경찰관이 취객을 발견하여 집 문 앞까지 데려다준 것은 잘한 일이지만, 1%의 마무리가 잘못되어 취객이 사망하였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중요한 것이 마무리입니다. 작게는 매 순간 사건 사건에서의 마무리이며, 크게는 인생의 마무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전자에 해당하는 것으로 나아만의 병을 통하여 어떻게 사건이 아름답게 마무리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아만은 비록 한센병 환자였지만 아람 왕에게는 존귀한 자였습니다. 이 전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아람을 구원케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집에는 이스라엘에서 잡아 온 포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 소녀의 소개로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나아만은 마침내 엘리사가 있는 곳까지 갔습니다. 나아만이 오자 엘리사는 나가보지도 않고 사자를 보내어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왕하5:10)라고 말하였습니다. 평생 대접만 받고 살아왔던 나아만은 엘리사의 이런 태도에 마음이 상했습니다. 노하여 그의 종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왕하5:11-12). 항상 ‘내 생각’이 문제입니다. 다윗은 상책을 좇아가다가 시글락에서 낭패를 맛보았고, 여로보암도 자기 생각 때문에 금송아지를 세워 대대로 악한 길의 전형이 되고 말았습니다. 만일 나아만이 상한 마음에 요단강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자기 생각대로 아마나나 바르발강으로 갔다면 틀림없이 깨끗하게 되지 못하였을 것이며 남은 삶도 이전 삶과 다를 바 없었을 것입니다. 다행히도 그에게는 충성스러운 종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말하였습니다.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일을 행하라 하였다면 행치 아니 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이 말은 “우리가 대접을 받으러 왔습니까? 씻어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였는데, 무엇이 문제입니까?”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충성스러운 종들 덕분에 나아만은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왕이 성군이 된 것은 자신 혼자만의 힘으로 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에게는 요나단이라는 친구가 있었고, 갓이나 나단 같은 훌륭한 선지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나아만에게도 성령의 전달자 역할을 했던 종이 있었던 것입니다. 온전케 되기 위해서는 좋은 동역자가 있어야 합니다. 혼자서는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주관에 치우칠 수 있습니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동역자가 있어야 치우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훌륭한 동역자는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항상 자신을 한 발자국 떠나 바라보게 하십니다. 엘리사의 말을 듣고 나아만은 요단강에 갔습니다. 한 번 들어갔다 나왔지만 환처는 여전하였습니다. 두 번, 세 번, 네 번…. 힘써 들어가 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어 보였습니다. 감기 환자가 있는데 일주일치 약을 조제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틀을 먹어도 아무런 효과가 없다면 다른 병원에 가서 다른 약을 타 올 것입니다. 전혀 차도가 없는데, 일주일을 참고 약을 복용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나아만도 이런 유혹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요단강에 무슨 약 기운이 있다고, 들어간다 해서 곪아 터진 환부가 사라질까?’ 하고 포기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아만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다섯, 여섯, 일곱 번째까지 들어갔다 나왔습니다. 그가 일곱 번 들어갔다 나왔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지긋지긋한 한센병 환처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온전한 순종을 원하고 계십니다. 온전한 순종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순종함을 의미합니다. “너희 복종이 온전케 될 때 복종치 않은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고후10:6). 이와같이 좋은 마무리를 위해서는 성령과 동역을 하며, 자원하는 마음과, 끝까지 순종하는 충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 위에 사랑은 온전하게 매는 띠입니다(골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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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독연 칼럼] 강성률 목사의 ‘끝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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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독연 칼럼]전인격적(知情意)으로 감사하는 믿음 (혹은 온전한 감사)
-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는 네 가지 은(恩)으로 반응하여야 합니다. 즉 지은(知恩), 감은(感恩), 사은(謝恩), 보은(謝恩)이 그것입니다. 이 네 가지 은(4恩)을 동원한 골고루 갖춘 반응이 전인격적인 감사입니다. 오늘의 본문 눅17:11~19에는 예수님께서 나병환자 10명을 고치신 사역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에 나타난 한 사마리아인의 반응(4恩)을 묵상하며 전인격적 감사에 대한 교훈을 나누고 싶습니다. 1. 지은(知恩): (15절 상) “그 중의 한 사람(사마리아인)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보았다는 것은 깨달았다 뜻입니다.(지은)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 때 감사가 저절로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배은망덕한 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호 6:3) “나는···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시 136편은 창세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곰곰히 구체적으로 회상하며 감사 찬양하는 시입니다. 우리도 받은 은혜를 우리가 누리는 것들을 곰곰히 헤아려 본다면 엄청난 은혜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되고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과거/현재/미래, 섭리/사랑/능력, 구원/보호/인도/공급, 등). 하나님의 최고의 은혜는 독생자를 보내신 최고의 사랑입니다. 프랑스의 한 노인이 병원에서 코로나 치료를 받은 후 계산서를 받아들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답니다. “제가 눈물을 흘리는 것은 돈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단지 24시간의 산소 공급을 받고 50만 프랑의 돈을 지불해야 하는데, 그러나 저는 하나님께서 주신 산소를 93년 동안 마시면서도 돈을 지불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제가 하나님께 얼마나 많은 빚을 졌는지요!” 2. 감은(感恩): (15절 하)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것은 고침 받은 은혜를 느끼고 큰 기쁨으로 감격해 하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고마움을 느끼는 정서적인 감은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알고도 느낌이 없는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감사의 정서(감정)를 발달시켜야 합니다. 골 3:16은 “감사하는 마음으로(thankfulness in your hearts to God)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며(삼상 16:7), 우리가 무엇이든 전심으로(마음을 다하여) 하기를 원하십니다(시 111:1, 신 6:5, 잠 3:5) 3. 사은(謝恩): (16절)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겉치레가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존경과 깊은 감사를 겸손한 자세와 입술로 표현하였습니다. 이것은 의지적인 감사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19절)고 선언하셨습니다. 입술의 고백이 중요합니다(롬 10:10) 감사의 표현은 우선 말(言)로 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하나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는 것이 감사 기도입니다.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말미암아 배부르게 되나니 ...”(잠18:20). 감사하는 마음을 입술로 고백할 때 우리는 영혼의 만족함을 느낍니다. 감사의 또 다른 표현은 찬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13:15). 감사의 마음을 감사 예물(제물)로 표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시 76:11, 96:8, 빌 4:18, 히 11:4). 감사가 가는 곳에 물질도 따라가게 되어있습니다. 4. 보은(謝恩): 가장 높은 수준의 의지적 감사입니다. 말과 찬양과 예물의 차원을 넘어 삶으로 은혜를 갚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의 은혜에 온전히 보답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시 116:12)라며 고민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살전 3:9)라고 자문하였습니다. 보은은 은혜를 주신 하나님의 소원(뜻, 목적)을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나 자신과 삶을 드려야 합니다(롬 12:1-2, 행 20:24). 우리는 먼저 눈에 보이는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부터 실천해야 합니다(딤전 5:4, 요일 4:20). 우리 위해 생명까지 주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전인격적(知情意)으로 감사하는 믿음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4은(四恩)의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더가스펠미션/그복음선교회는 선교공동체(선교적 교회)로서 성경에 보여주신 ‘그 복음(The Gospel)’을 바로 알고 전파하는 사명과 “원주민 선교는 원주민 선교사로!”라는 전략으로 33년동안 20개 나라에 40명의 원주민(자국민) 선교사를 파송하였으며, 지금은 시에라리온에 3개의 미션학교(Christian Leadership College, 신학과 중심)와 미얀마에 2개의 고아원을 섬기는 사역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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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독연 칼럼]전인격적(知情意)으로 감사하는 믿음 (혹은 온전한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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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크 칼럼] 강성률 목사의 ‘생각지 않는 때에 오시는 주님’
-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24:37-39). 지난 9일 새벽 01시 30분경이었습니다. 눈을 뜬 채로 누워 있었는데 재난 문자 발송 진동이 울리는 동시에 바닥이 좌우로 두 번씩 흔들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전 포항 지진 때보다 더 큰 울림이었습니다. 저는 벌떡 일어나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고등학교 때까지 시골에 자랐던 저는, 다른 친구들에 비하여 농사일을 많이 거들지 않았지만 가끔은 부모님을 도왔습니다. 도리깨로 콩이나 깨를 떤 후, 체를 좌우로 흔들어 곡식과 쭉정이를 거르는 일도 했습니다. 오늘 새벽 작은 흔들림에, 하나님께서 지구를 흔드는 일은 우리가 체를 흔들기보다 훨씬 쉽겠다고 느껴졌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지구를 크게 흔드신다면 살아남을 자가 없을 터인데, 지금까지 주님께서 오래 참고 기다리신다는 생각에 감사드린 것입니다. 코로나가 4년째 지속되고 있습니다. 백신이 개발되었다고 하지만 코로나는 다양한 형태로 백신을 피하여 나타나고 있습니다. 가히 코로나 춘추전국시대라고 할 만합니다. 코로나가 의식이 있어서 스스로 백신을 피하여 변신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경고하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경고를 의식하지 못한다면, 노아 시대 홍수로 인하여 다 멸망당할 때까지 깨닫지 못한 것처럼, 코로나와 같은 각종 재앙으로 다 우리가 멸망당할 때까지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노아시대 사람들이 멸망 받은 이유는 살인, 강도, 강간과 같은 특별히 흉악한 죄 때문에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그 시대 사람들의 행동은 오늘날 우리와 특별히 다를 바 없었습니다.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마24:38-39).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은 노아가 살던 때뿐 아니라, 지금도 대부분 사람에게 관심 있는 일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하루는 에서가 사냥하고 장막으로 돌아왔습니다. 솔솔 팥죽 냄새가 코를 자극했습니다. 동생 야곱이 팥죽을 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잔뜩 허기졌던 차인데 냄새까지 나니 더 배가 고팠습니다. 그래서 야곱에게 팥죽 한 그릇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야곱이 에서의 장자의 명분을 팔라고 하였습니다. 에서는 “내가 죽게 되었는데 장자의 명분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하면서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팔아 넘겼습니다(창25:32-34). 그러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노아 시대에 먹고 마시며 시집가고 장가간 것처럼, 에서 역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갔습니다. 이유는 그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장자의 명분은 하나님의 백성 된 명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자녀 된 명분을 소홀히 여기고 세상살이에만 빠졌기 때문에 심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지 아니하는 사람은 관여하지 않습니다. 믿는 사람, 하나님의 자녀에게 관심을 둡니다. 그것은 마치 사람이 남의 자녀가 말을 듣거나 안 듣거나 상관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타락하면 세상에 심판을 내립니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창6:1-3).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심판이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코비드 상태는 그 서막인지도 모릅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이 가까이 오셨다는 생각으로 등불을 켜고 서 있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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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크 칼럼] 강성률 목사의 ‘생각지 않는 때에 오시는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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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크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 2’
-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마22:20-21). 온 천하 만물이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골1:16-17). 로마시대 가이사는 오늘날 세상 통치자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을 따로 나누신 것은, 비록 만물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일지라도, 통치자들의 통치 행위와 거기에 따른 비용을 염두에 두셨기 때문이며, 아울러 신앙인들이 세상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 한 때 현대에서 그랜저가 최고가였을 때가 있었습니다. L씨 성을 가진 청년이 K회사에 입사하여 그 회사 사장의 기사로 발탁 되었습니다. 청년이 사장을 잘 섬기다가 여자 친구를 사귀었습니다. 어느 날 여자 친구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지, 사장 몰래 사장의 차를 가지고 약속 장소에 갔습니다. 덕분에 그들은 달콤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회사는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청년은 즉시 퇴사를 당하였습니다. 사장은 ‘공과 사가 분명하지 않은 청년이라면, 앞으로 더 큰 문제도 일으킬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회사의 것과 자신의 것에 대한 선을 분명히 해야 하는 것처럼, 신앙인들도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이 분명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수많은 하나님의 것들 가운데 중요한 몇 가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주의 날”은 명칭처럼 주님의 날입니다(계1:10). 주일은 안식일과 의미는 다르지만 행동은 안식일처럼 지켜 나가야 합니다. 그 행동은 다음과 같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20:8-11). 많은 사람들이 안식일은 구약의 것으로, 예수님이 오신 후에 폐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을 폐하였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완전케 하였다고 하셨습니다(마5:17-18).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며(롬13:8), 온전하게 매는 띠입니다(골3:14).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책망하신 것은 안식일 자체가 잘 못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형식적으로 사랑 없이 안식일을 지켰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신앙인들이 지키는 주일은 일곱째 날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매 주 첫째 날입니다. 이 날 성령의 감동을 받는 날이며(계1:10), 자기 일을 쉬는 날입니다.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주의 날을 주님께 돌려드리며 주님을 위하여 거룩하게 지켜 나가야 합니다. 이날은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한 시간만 주의 날이 아니라 온종일이 주의 날입니다. 이 날 하루도 주님과 동행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이 다스리는 천국을 소망한다는 것은 자기모순입니다. 위독한 생명과 관련 된 일이 아니라면, 이 날은 온전히 주님께 드려야 하며, 사랑으로 지켜야 합니다. 그렇게 지키는 사람은 성령의 감동을 분명히 입게 됩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비롯되었으며, 은혜로 주어진 것이지만, 90%를 우리가 이용하고 10%만 하나님께로 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이 부족하여 달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보답하는 마음을 쓰게 하여 은혜를 더 풍성하게 주시기 위함입니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사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말3:8-9).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자기의 것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반면 십일조를 드린 사람에게는 다음과 같은 약속을 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고,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말3:10-12). 신앙인들은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하나님의 것인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며,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라고 말씀하셨으니, 우리 몸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롬12:1). 또한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해야 합니다(벧전2:9).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3:21-23). 이 말씀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으로 살아가면 만물이 다 우리의 것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에게, 만물도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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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크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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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크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
-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기이히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마22:20-21). 유대인들의 집권 세력 가운데 하나인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인기가 점점 오르자 위기의식을 느낀 나머지 “어떻게 하여야 예수님을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마22:15) 서로 의논하였습니다. 왜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지, 예수님의 말씀이 성경에, 양심에 맞는지 살피지 않고 행여나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영광을 예수님께 빼앗길까 노심초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 자신이 한 말에 걸려 넘어지도록 올무를 놓은 것입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마22:16b). 그들의 말은 맞는 말이기는 하나, 그들이 중심에서 존경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존경하는 척 하면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들에 대한 경계심을 풀고 올무에 걸리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진달래는 봄에 피는 꽃인데 종종 계절을 숨긴 늦가을에도 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머잖아 계절이 발톱을 드러내 잔인하게 서리를 쏟아붓고 맙니다. 그러면 늦게 핀 꽃은 물론이거니와 아직 싱싱하게 붙어 있는 잎사귀까지도 바짝 마르고 맙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한 나중 질문 곧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라는 질문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위장술임이 드러나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만일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라.”고 말씀하시면 세금 내는 것을 반대하는 유대인들의 미움을 사는 대답일 것입니다. 반면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지 말라.”고 하면 로마 정부를 반대하는 사람으로 낙인찍힐 수 있는 대답이었습니다. 이 대답에도 저 대답에도 빠져나갈 수 없는 교묘한 질문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몰라도 너무 몰랐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그들의 말에 속을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의도를 뻔히 알아차리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그들 속을 환희 들여다보시지만, 대답을 피하시지 않고 모두에게 교훈할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22:21)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롬13:7). 여기 공세는 조세를 말하고, 국세는 관세를 말합니다.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어야 합니다. 국가가 마땅히 받아야 할 세금이라면 기꺼이 내야 합니다. 그래야 질서와 치안, 복지를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나 연보 등도 감사함으로 드려야 합니다. 간혹 십일조나 헌금을 구제로 대신 하거나, 구제에 쓸 돈을 십일조나 헌금으로 대신 드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십일조는 십일조이며 구제는 구제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이 혼돈되어서는 안 되듯, 연보나 구제는 드리는 대상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세금이나 십일조와 같은 금전과 관련된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신앙인들은 살아가면서 육신의 것과 성령의 것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육신과 성령은 서로 원수이며 대적의 관계이지 화평의 관계는 아닙니다(갈5:17). 육신의 것이 하나님의 것처럼 등장할 때가 있고 하나님의 것이 육신의 것으로 비난 받을 때가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않는 다른 불로 하나님께 분향하려 하다가 둘 모두 하나님의 불에 의하여 살라지고 말았습니다(레10:1~2). 하나님께 분향할 때는 하나님께서 하라고 명하신 ‘단의 불’로 드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가정에서 밥할 때 사용하는 불을 사용한 것입니다. 불은 열심을 상징합니다. 육신의 열심이 하나님께 드릴 열심을 대신한 것입니다. 신약에서 단은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제단에서 하나님께 드려졌기 때문입니다. 제단에 제물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는 증거로 불이 내려진 것처럼 십자가에 우리 자신을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불을 내려주십니다. 신앙인들의 열심은 십자가를 통과한 열심이어야 합니다. 육신에서 나오는 열심은 하나님이 주신 열심이 아니라 자기 열심입니다. 이런 마음은 은혜 받은 것 같지만 어느 순간 성질을 펄펄 내는 사람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령이 주신 열심은 속에서부터 나오는 능력입니다(골1:29).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마땅히 멸할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을 취하여 하나님께 제사하러 왔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결과 사울 왕가는 멸망을 초래하고 맙니다(삼상15:17~23). 아말렉은 육신을 상징합니다. 육신의 소욕에서 나오는 것은 선한 것이 없습니다. 육신은 다 멸해야 할 것인데 멸하지 않아서 결국 사울 역시 버림을 받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것과 육신의 것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습니까? 영이 예민한 사람은 이것을 분별할 수 있지만 대개는 하나님의 것과 육신의 것이 함께 묻어 나갑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다고 하지만 거기에는 자기 영광이 섞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은 선을 행하고도 혹시 섞여 있을지도 모를 ‘자기 의’를 보혈로 씻어야 합니다. 그것은 마치 목욕탕에 다녀온 사람이 집에 들어와서 다시 발을 씻는 것과 같습니다(요13:10). 우리 모두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분별할 수 있는 눈을 달라고 기도드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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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크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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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크 칼럼] 한인수 목사의 ‘요나의 표적’(마 12:38~42)
- 표적의 헬라어는 “세메이온”이다 세메이온은 어떤 것을 가르치는 표지판이다. 성경에 나타나고 있는 모든 기사와 표적과 이적은 전부 세메이온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귀신을 쫒고, 병을 고치고, 풍랑 이는 바다를 잠잠하게 하고, 물로 포도주를 만들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등등의 모든 기사와 이적과 표적은 전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리키는 세메이온이다. 히브리어로는 “오트”다. 오트 역시 기호, 증거, 표, 표식을 가리키는 단어로서 구원의 표 또는 언약의 징표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으로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준 표가 바로 십자가를 상징하고 있는 언약의 징표인 “오트 하베리트”다. 그러므로 표적인 세메이온은 하나님의 영광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나타내는 십자가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으로 압축하신다. 요나는 구약의 역사적 인물이지만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그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삼일동안 있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상징한다.(요나서 1장) 그리고 물고기가 그를 토해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미한다.(요나서 2장) 그리고 요나서 3장은 큰 성 니느웨에 십자가의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뜻하는 복음이 전해지자 왕을 비롯해서 모든 생명이 있는 것들이 다 회개를 한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사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십이만여 명이 구원을 받는다. 12는 게마트리어로 “아들”을 상징한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할 때 천은 땅의 수이고 만은 땅에서 완성된 하늘의 수다, 그러므로 십이만 명이라는 뜻은 땅에서 회개하여 하늘에 앉힌바 되는 교회를 상징한다. 본문에서 표적을 구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한다. 왜 이들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하셨을까? 약4;4절은 이렇게 말한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세상은 늘 표적을 요구한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를 대보라고 요구한다. 그 말은 자신을 굴복시킬 만한 증거나 논증을 대보라는 자기기만 일뿐 그가 자기를 설득하면 예수를 믿겠다고 한 말이 아니다. 예수는 내가 믿겠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주가 되시는 주님이 내안에 찾아와서 나를 설복하실 때 비로소 믿을 수 있는 것이지 하나님을 아는 인간의 지식과 기적과 표적을 보고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다. 표적은 그 자체로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악하고 음란 세대에게 보여주신 요나의 표적은 요나서1,2,3장을 지식과 정서적 감정으로 이해가 되어졌다고 해서 믿음이나 구원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표적은 어디까지나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 가 그 목적지를 보라고 하는 싸인보드판이다. 그렇다면 요나의 표적은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있나? 마태복음9:2절에서 중풍 병을 고쳐주시면서 주님은 “네가 죄 사함을 받았다”고 선언하신다. 죄 사함은 요나의 표적이 가리키고 있는 세메이온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죄 사함”이다. 그러므로 “회개하라”고 주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셨다.(마4:17절) 오늘 본문41절에서도 예수님께서 회개를 천명하신다.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다고 하신다. 그러므로 회개하면 하나님의 영광과 그 아들의 십자가를 비로소 알게 된다. 그래서 사도들도 행2:38절에서 회개와 죄사함의 복음을 외친다. 요나서 3장은 요나의 전도를 듣고 왕부터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다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를 했다. 그러니 우리도 회개를 해야 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복음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인간은 악하고 음란한 존재이기에 결단코 회개할 수 없는 죄인이다. 아무리 하늘에서 불이 내려온다 해도 그것으로 믿고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권한이다. 그러니 아무리 회개를 하려고 해도 회개가 내안에서 이루어지지 않음에 우리는 날마다 절망해야 한다. 그것으로 나의 본성적 자아가 얼마나 양심에 화인 맞았는지 깨달아야한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가 전한 회개의 복음을 듣고 생명가진 모든 존재가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를 했다. 그런데 나에게는 왜 이런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가? 기적을 보지 못해서도 아니다. 성경을 읽지 않고 기도하지 않아서도 아니다. 약4:4절의 말씀대로 나는 지금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삶을 돌이켜보니 정말로 나는 세상과 벗이 되어 “세상 먼저 그리고 하나님 나중의 시간표”를 가지고 오늘을 살고 있다. 복음에 관한한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첫사랑의 뜨거움을 잃어버린 것은 어디서부터일까? 그래서 성경을 대하면 울고 싶을 뿐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회개시킬 자를 불러 회개의 역사가 있게 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말씀하신다. “너는 수고도 아니 하였고 재배도 아니 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버린 이 박 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오늘도 우리는 요나가 되어 절망 앞에서 하나님을 바라본다. 그렇군요! 주님 내가 악하고 음란한 놈이네요 요나가 하룻밤에 시들어 버린 박넝쿨을 아꼈듯이 나도 그렇게 세상에서 없어질 것들을 아꼈나 봅니다. 나도 주님 앞에서 회개하고 싶습니다. 사도바울이 주님의 십자가 외에는 다 배설물로 버렸다고 외침 같이 우리 모두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한주가 되기를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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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크 칼럼] 한인수 목사의 ‘요나의 표적’(마 12: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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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독연 칼럼] 강성률 목사의 ‘솔로몬에게 주신 기회’
- 본문: 열왕기상 11장 7-25절 솔로몬이 마음을 돌이켜 여호와를 떠났다는 뜻은 말씀을 떠났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말씀으로 나타나심이기 때문입니다(삼상3:21). 다윗과 솔로몬의 차이는 크게 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다윗은 나단이나 갓과 같은 선지자와, 사독과 아비아달 같은 제사장을 가까이했지만, 솔로몬이 선지자나 제사장을 가까이하였다는 내용은 거의 보기 힘듭니다. 다윗이 선지자를 가까이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귀중히 여겼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제사장을 가까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씀은 우리 자신의 허물을 보게 하여 어린 양의 피, 곧 보혈공로를 힘입지 않을 수 없게 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아마도 자신의 지혜를 너무나 믿었는지 연설도, 기도도, 축복도 선지자나 제사장을 통하지 않고 자신이 모두 다 하였습니다. 그 마음속에는 모름지기 ‘내가 선지자나 제사장보다 나아’ 하는 마음이 깔려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말씀을 받아서 행동하지 않고 자신의 두뇌를 철저히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외교를 한다며 이방 여인과 연혼정치를 하더니 마침내 그들에게 빠지고 말았습니다. 마음이 여호와를 떠난 솔로몬에게 하나님께서는 두 번이나 나타나셔서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입니다. 대개 선지자를 통하여 회개를 독촉하셨는데 솔로몬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독촉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빠져나오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들과 이미 깊은 관계가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솔로몬, 비록 내가 당신의 아내가 되었어도 종교에 대해서만큼은 불간섭주의로 해요.” “솔로몬, 내가 고국을 떠나 얼마나 외로운지 몰라요. 신전 하나만 세워주세요. 그러면 그것으로 나의 외로움을 달랠 수 있을 것 같아요.” “솔로몬, 내가 섬기는 신을 섬기라고는 하지 않아요. 그래도 가끔씩 예배에는 동참해주셔야죠.” “솔로몬, 나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어찌 그리도 나의 신에게는 절을 하지 않습니까?” 이런 식으로 점점 강도가 세지는 여인들의 말을 한 발 한 발 들어주다가 수렁에 푹 빠져들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정에 얽히고설키는 관계가 되면 빠져나오기 힘듭니다. 그럴 때는 하나님께 합당하게 해결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가장 유익하다는 것을 새겨야 합니다. 회개할 기회를 주시면 그 기회를 붙잡아야 합니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넘겨준 후에도 회개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기한은 아버지가 축복하기 전까지입니다. 하지만 그는 장자의 명분을 넘겨준 일에 대하여 전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동생 야곱에게 축복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창27:27-29). 느부갓네살왕이 한 꿈을 꿉니다. 다니엘이 그 꿈을 해석하였습니다. 장차 느부갓네살왕이 소처럼 풀을 먹고 밤이슬에 젖을 터이니, 온 천하를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임을 믿고, 겸비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단4:26-27).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 왕에게 회개할 기간을 1년이나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회개하지 않았고, 열 두 달이 지난 후에 그 꿈대로 되고 말았습니다(단4:29).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경고를 주시고 바로 징계를 내리시는 분이 아니라 회개할 기간을 주십니다. 기회를 주실 때 빨리 붙잡아야 합니다. 에서나 사울왕, 느부갓네살왕은 기회를 붙잡지 않아 낭패를 당하였지만, 회개할 기회를 붙잡고 회생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간음하고 그것을 감추기 위하여 살인까지 저질렀던 다윗왕이 대표적입니다. 나단 선지자가 책망하였을 때 중심으로 회개하였습니다(삼하12:13). 그 결과 원수의 조롱을 받았지만, 죽음은 면하게 되었고 왕의 지위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가장 악한 왕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아합왕은 엘리야가 책망하였을 때 베옷을 입고 행보도 천천히 하여 겸비한 모양을 보였습니다(왕상21:27-29). 그러자 그에게 내릴 형벌이 아들 대로 옮겨졌습니다. 우리에게도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아직 재림하시지 않는 이유가 아무도 멸하지 않고 회개함에 이르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하였습니다(벧후3:9). 각자가 자신만 아는 죄들이 있을 것입니다. 양심을 통하여 “너 그렇게 하면 안 되지”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 빨리 회개해야 합니다. “너 그렇게 빈둥빈둥하면 안 되지” “너 빨리 술에서 벗어나야지.” “너, 언제까지 그 여자 가까이할 거야? 빨리 헤어져.” 등 각자에게 요구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돌아서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책망하시는 것과 같이 심판이 따라옵니다. 솔로몬에게 내린 심판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라를 빼앗아 신복에게 주리라는 말씀입니다(왕상11:11). 하지만 다윗과 한 약속 때문에, 솔로몬 당대에 그 일을 행하시지 않고 아들 대에서 하시겠다는 것과 한 지파를 남겨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직접 징벌도 내리셨습니다. 사방에 에돔사람 하닷과, 소바사람 르손과, 그의 신복 여로보암과 같은 대적을 일으킨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대로는 멸망 받아 마땅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진노를 내릴지언정 영혼까지 멸망시키시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순전히 예수님의 공로 때문입니다. 그러니 보답하는 마음으로 지금이 회개할 기회라고 생각하고, 행동을 바로 고쳐야 합니다. 자신과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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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독연 칼럼] 강성률 목사의 ‘솔로몬에게 주신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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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크 칼럼] 강성률 목사의 ‘돌 위에 떨어지는 사람, 사람 위에 떨어지는 돌’
-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마21:44).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 말씀이 예수님의 구원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곧 이어지는 본문은 예수님의 심판에 대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첫째는 ‘돌 위에 떨어지는 사람’이며 둘째는 ‘사람 위에 떨어지는 돌’입니다. ‘돌 위에 떨어지는 사람’에서는 ‘사람이 돌을 공격하는 모습’이며 ‘사람 위에 떨어지는 돌’에서는 ‘돌이 사람을 공격하는 모습’입니다. 어떤 사람이 산에 올라갔습니다. 거기서 단단히 박혀있지만, 모양은 보잘것없는 바위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바위가 싫고 미워졌습니다. 게다가 돌부리에 치여 넘어지기까지 하였습니다. 화가 난 그는 바위를 깨부술 생각으로 바위 위 높이 솟은 봉우리로 올라갔습니다.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바위에 충격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더니 “바위야 부서져라” 외치면서 용감하게 뛰어내렸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물어보나 마나 바위를 부서뜨리기 위하여 뛰어내린 사람의 온몸이 깨어지고 뼈가 으스러져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바위를 깨뜨릴 생각으로 산꼭대기에서 뛰어내릴 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위와 같은 사람입니다. 돌은 반석이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을 대적하는 것은 산 위에 올라 깊이 박힌 바위를 깨뜨리려고 뛰어내리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곧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나 다를 바 없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찾아, 동방에서 별을 보고, 예루살렘으로 온 동방박사들에게 헤롯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마2:8).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은 아기 예수에게 인사하는 척 하면서 죽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동방박사들이 그의 말을 듣지 않고 고국으로 돌아가자, 화가 난 헤롯은 동방박사들이 말한 때를 기준으로 그 지경 안 두 살 아래 사내아이를 모두 죽이도록 하였습니다(마2:16). 물론 아기 예수는 주의 사자의 분부를 받고 애굽으로 피하여 죽음을 면하였습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헤롯은 그 후 B.C. 4년 3월경에 추하고 심한 질병에 걸려 고생하다가 죽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예수님이 B.C. 5년 말이나 B.C. 4년 초에 나신 것이 확실하다면 예수님 탄생 후 얼마 못 되어 죽은 것입니다. 바위를 깨뜨리려 하다가 자신이 깨어진 것입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 중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나일강 하수에 던지고, 여자 아이가 태어나면 살리라고 했습니다. 그들 나라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영원히 노예 삼아 민족을 파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모세를 보내셨고 그 모세를 통하여 애굽을 거의 초토화하다시피하고 그들 땅에서 나왔습니다. 이스라엘을 공격했던 애굽이 도리어 망할 직전까지 간 것입니다. 성경 ‘에스더’에서 아말렉 사람 하만은 모르드개로 인하여, 모르드개는 물론 모르드개가 속한 민족 유대인까지 모조리 멸하려고 계획하고 아하수에르 왕의 허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하만의 계획을 방관하실 분이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아하수에르 왕에게 하만의 가족과 아말렉을 진멸하도록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하나님 믿는 사람을 박해하는 사람은 스스로 죽음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다음은 ‘사람 위에 떨어진 돌’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꾸고 잊어버렸는데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에게 그 꿈과 해석을 알리셨습니다(다니엘 2장).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왕은 꿈에 큰 신상을 보았습니다. 머리는 정금으로 되어 있고, 가슴까지는 은으로 되어 있고, 허벅지까지는 동으로 되어 있으며 종아리는 철로 되어 있고 발은 얼마는 철이며, 얼마는 진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뜨인 돌을 던져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리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서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었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신상을 심판합니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 자리에 서 있는 제국들을 심판하십니다. 앗시리아 제국이 멸망했고, 바벨론 제국 역시 멸망하였습니다. 페르시아제국이 멸망하였고, 헬라제국 역시 멸망했습니다. 로마제국이 멸망하였고, 왕을 천황이라고 하며, 신의 위치에 올려놓았던 제국주의 일본 역시 멸망하였습니다. 근래에는 무신론이며 유물론 위에 세운 소련(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하고 높은 마음을 가루로 만드십니다. “너의 넘치는 노를 쏟아서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낱낱이 낮추되 곧 모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낮추며 악인을 그 처소에서 밟아서 그들을 함께 진토에 묻고 그 얼굴을 사서 어둑한 곳에 둘지니라. 그리하면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욥40:11-14). 교만은 하나님의 대적입니다(욥15:25).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예수님을 대적하거나 신앙인을 박해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멸을 택한 사람입니다. '사람 위에 떨어진 돌'은 국가든 개인이든 교만하여 하나님 자리에 오른 자들을 심판하신다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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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크 칼럼] 강성률 목사의 ‘돌 위에 떨어지는 사람, 사람 위에 떨어지는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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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크 칼럼] 강성률 목사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건축자들의 버린 돌’
-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본 일이 없느냐.”(마21:42). 왕명에 의하여 그 나라에서 가장 좋은 대리석을 골라 궁궐을 짓는 건축자가 있었습니다. 돕는 자가 끙끙거리며 돌 하나를 주워 왔습니다. 그러자 건축자는 버럭 화를 내면서 말하였습니다. “이봐. 지금 우리는 임금님의 전을 짓고 있는 거야. 여긴 아름답고 멋진 돌이어야 해. 이따위 돌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돌이야. 당장 버리도록 해” 그러자 돌을 지게에 지고 왔던 사람은 절벽이 보이는 곳에 그 돌을 내동댕이치고 말았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절벽 위에 간신히 걸쳐 있는 한 돌을 발견하였습니다. ‘오! 훌륭한 산 돌인걸. 이렇게 좋은 돌을 버리다니. 이 돌을 주춧돌로 삼아 언젠가 잠시 머무를지 모를 왕의 처소를 마련해야지’라고 하며 여러 해에 걸쳐 사람들을 동원하여 집을 지었습니다. 몇 년 후, 왕은 자기의 궁궐을 짓도록 명했던 건축자를 찾아갔습니다. 건축자는 매우 화려하고 빛나는 궁전을 임금님께 보였습니다. “음, 훌륭하군!” 임금님은 아주 흡족한 표정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표정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미세하지만 한쪽으로 기울고 있는 기둥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임금님이 준엄하게 건축가에게 말하였습니다. “이 집은 궁전이라고 할 수 없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겠구나.” 임금님은 몹시 실망한 표정을 지으면서 궁내로 들어왔습니다. 어느 날 신하 한 사람과 함께 잠행하였습니다. 어떤 한적한 곳에 이르자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비록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매우 견고해 보였고, 주변 경관과 잘 조화된 운치 있는 집이었습니다. 주춧돌과 기둥을 보았는데 어떤 바람이 불어도, 비가 억수로 쏟아져도 무너지지 않을 튼튼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남루한 차림의 선비로 변장한 임금님은 건물주에게 그 집에 관하여 물었습니다. 그러자 건물주는 자기가 임금님을 사모하는데 언젠가는 자신의 집에 머물 거로 생각하여 직접 설계하고 지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임금은 감격하였지만, 이내 모르는 척하고 궁궐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동행하였던 신하를 보내어 건물주를 데려오게 한 후 큰 포상과 함께, 많은 돈을 들여 그 집을 샀습니다. 이 글은 본문과 연결 지어 만들어 본 이야기입니다. 본문에 나온 건축자들은 그토록 훌륭한 산 돌을 왜 버렸을까요? 성경에서는 건축자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고전3:10). 여기 ‘지혜로운 건축자’로 표현된 것처럼 본문에서 나오는 건축자는 ‘지혜로운 자’입니다. 유대인들 가운데서 지혜로운 자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지혜로운 자가 아니라,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세상 지혜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의 관원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지혜로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고전3:19-20).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지혜로 예수님을 버렸고 자기 꾀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지금도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버립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자 예수님을 가까이 따르는 무리가 많았습니다. 그들은 마치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도 아끼지 않는 사람들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들에게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6:63)라고 말씀하시자 말씀에 걸려들고 말았습니다. 육신적인 것을 추구하며 살았던 그들에게 육은 무익하다는 말씀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열두 제자들 외에 예수님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하였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요6:67-68). 육신은 무익하다는 말씀에 모두가 예수님을 버리고 떠날 때 제자들은 거기 남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보이는 것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영적인 것을 추구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버리는 사람들은 영적인 것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육적인 것을 추구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적인 성공, 물질적인 복, 건강, 명예 영광 등 보이는 것을 추구하다가 그런 것들이 차지 않았을 때 실망하여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예수님을 버리지 않았던 이유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안 것은 혈육의 가르침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마16:17). 혈육의 가르침을 받아 살아가는 사람은 예수님을 버립니다. 혈육이란 친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혈과 육, 곧 육신을 의미합니다. 육신의 생각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예수님을 버리게 되지만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 살아가는 사람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마16:16). 이상을 통하여 유대인들의 관원들이 왜 예수님을 버렸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스스로 지혜롭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지 아니하고 혈과 육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는 악을 선으로 선을 악으로 분별하게 됩니다(사5:21).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모르는 것뿐입니다. 더욱 겸손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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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크 칼럼] 강성률 목사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건축자들의 버린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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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크 칼럼] 강성률 목사의 ‘점점 빛나는 의인의 길’
-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잠4:18). 가끔 동이 터 오르기 전에 제가 사는 곳에 있는 산에 올라 아침을 맞이합니다. 태양이 떠오르는 순간부터는 태양은 거침없이 어둠을 삼키고 새로운 세계를 펼칩니다. 그렇다면 태양은 지난 밤 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잠자고 있었을까요? 그 시간 동안 단절 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기나긴 밤에도 그들은 모태에 있는 어린 아이가 아무도 보지 않는 사이에 점점 자라고 있듯 끊임없이 아침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임계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리학에서 액체가 기체로 변화하기 직전 상태로 물질이 구조와 성질을 다른 상태로 변화할 때의 온도와 압력을 말합니다. 가령 물일 때는 온도는 섭씨 100도가 임계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00도가 되기 전까지는 계속 액체 상태로 있다고 해서 그 물은 기체로 변화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끊임없이 변화되고 있지만 표면에 드러나지 않을 뿐입니다. 일단 100도가 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변화의 속도가 달라집니다. 우리는 기도를 해도, 전도를 해도, 노력을 해도 진척이 없다고 생각하고 ‘나는 안 돼’ 하면서 포기할 때가 있습니다. 성공하는 자와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 가운데 하나가 임계점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습니다. 태양이 떠오르기 전 긴 시간동안 정체 되어 있는 듯 하지만 태양은 그 순간에도 끊임없이 왔던 곳으로 돌아가고 있듯이(전1:5), 우리의 기도와 수고와 땀이 헛된 듯 하지만 단지 보이지 않을 뿐 솥뚜껑 안에 있는 물은 기체가 되기 위하여 달궈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임계점이 되기 전까지는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의 활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무로 말하면 뿌리 영역이라고 할 수 있고, 신앙으로 말하면 가장 기본적인 것, 실제 삶에서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영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요셉은 비록 그가 형님들에 의하여 애굽에 노예로 팔려 나갔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가정 총무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보디발 아내의 모함으로 감옥 생활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꿈으로 그가 형님들을 다스리게 될 것을 약속 하셨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점점 꿈과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그러나 그가 30세 되던 해 바로의 꿈 해석으로 말미암아 그는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13년의 기간 자칫 슬픔과 탄식의 시간이 될 수 있었지만 그것은 헛된 시간이 아니라 임계점에 도달하기 전의 시간일 뿐이었습니다. 모세 역시 미디안 광야 40년 기간 그는 죽은 사람처럼 보였지만 양을 치면서 이스라엘 목자가 되는 훈련을 단단히 받았을 것입니다. 다윗 역시 사울에게 쫓겨다니는 날들이 기약 없어 보였지만 그 날들은 헛된 것이 아니라 그가 왕이 되기 위한 준비기간이었습니다. 그 기간을 다 채우자 그는 거침 없이 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신앙인 모두에게는 임계점이 있습니다. 그 점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우리는 죽은 자 처럼 지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그것을 박차고 영적인 성숙이 이루어질 때가 있습니다. 임계점은 거기서부터 가시적인 성공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고자하는 임계점이란 신앙의 성숙 영적인 성숙 속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도달하기 전까지 우리 모두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주님께 매달려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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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크 칼럼] 강성률 목사의 ‘점점 빛나는 의인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