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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요 14:27)
- 재난의 징조로서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눅 21:10-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쟁, 지진, 기근, 전염병이 계속되는 상황 속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마음의 평안일 것입니다. 우리에게 마음의 평안을 주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으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모든 근심과 두려움을 뛰어넘는 내적이며 절대적인 평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죄인인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골 1:21-22) 주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이웃과도 평화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께서 주시는 평강을 확장시켜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닫아걸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평강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강은 영적인 평안입니다. 그 평안을 얻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에게 평안이 없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평안을 주시고,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십니다.(요 14:26)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먹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영이 건강하고 얼굴에 빛이 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내려올 때 그의 얼굴에는 빛이 났습니다. 주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었기 때문입니다.(출 34:29) 우리가 주 안에서 기뻐하면,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면, 모든 일에 염려 없이 기도로, 감사로 주님께 아뢰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빌 4:4-7) 주님은 백성의 심지가 견고하여 요동함이나 치우침이 없이 그 은혜를 의존할 때에 그들의 보호자가 되셔서 평강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사야 26장 3절을 보면,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한결같이 주님을 신뢰하는 자에게 평강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변함이 없으시고, 인간은 불안전하기 때문입니다. 유다 왕 아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일, 올바른 일을 하였습니다.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애고,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율법과 명령을 실천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나라는 조용하였고 주님께서 그 나라와 아사에게 평안을 주셨습니다. 아사 왕은 백성에게 우리가 주 하나님을 찾았으므로 평안을 주셨다고 말했습니다.(대하 14:1-7) 우리도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을 때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평안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0:13)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전도해야 합니다. 전도는 나의 지혜의 설득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는 것이기에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해야 합니다.(고전 2:4) 예레미야 29장 11절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평안이요, 미래와 희망을 주시는 것을 기억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갖고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저는 『천로역정』 책을 읽었을 때나 <천로역정> 영화를 보았을 때 가장 감동적인 언어가 ‘희망’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간 존 번연은 소망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알았기 때문에 환경을 넘어 희망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천국으로 가는 여정 속에서 모든 것이 평탄하기만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셨기에 우리도 이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평안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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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요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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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범사에 감사하십니까’(살전 5:18)
-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신과 가족과 타인에게 그리고 자신이 속한 직장과 사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산다는 것은 매우 행복한 일입니다. 감사는 고마운 마음을 상대에게 전하는 아름다운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감사를 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감사는 자신에게나 상대에게 즐거움을 주고, 서로의 관계를 끈끈하게 맺어주는 아름다운 행위인데 말입니다. 우리는 감사에 인색해서는 안 되며 매사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감사할수록 유대관계가 좋아지고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감사는 단지 고마움에 대한 마음의 표현이 아니라 서로를 단단하게 동여매주는 수단이고 건강한 삶도 가져다줍니다. 감사의 말 속엔 따뜻한 긍정의 에너지가 들어 있고, 무엇이든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지만 감사를 잘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매사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비관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십니다(18절).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사의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다. 범사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다 포함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불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상태에서 보면 무엇 하나도 눈물 흘리며 감사하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고난도 환란도 유익합니다(욥 23:10; 시 119:67, 71).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지금의 상태가 최고이고 최적의 상태라는 것이지요. 다니엘은 왕의 칙령이 내려졌으므로 자신이 기도하면 사자굴에 들어갈 것을 알면서도 집에 돌아와 모든 문을 열어놓고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크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단 6:10). 다니엘은 상황을 원망하거나 하소연하지 않았습니다. 그 상황을 바꾸어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처해있는 그 상황에 감사하였던 것입니다. 감사는 환경이나 조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과 생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합 3:17-18에서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을 보면 감사는 신앙의 문제이지 환경의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은혜를 받는 비결은 감사이며, 은혜를 받은 결과도 감사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해 감사하는 삶이 바로 신앙의 생명이요 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복된 생활인 줄로 믿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 믿음은 대단히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성도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지금까지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가게 된다는 믿음의 확신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말세에는 더욱 감사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감사’는 헬라어로 ‘유카리스테오’입니다. 이 말의 뜻은 마음 중심에서 가식이나 부담 없이 자원하여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감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감사는 자원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신앙의 표현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늘 감사로 표현했습니다(시 95:2 ; 100:4). 감사는 단순히 인간의 의지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감동과 감화의 결실입니다. 이러한 감사는 궁극적으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고후 4:15) 우리의 전 생애를 하나님께 위탁하며 충성하는 적극적인 신앙의 행위와 태도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감사가 있는 곳에 기적이 있고, 기쁨과 사랑과 믿음이 있습니다. 모든 것, 모든 순간, 모든 사건, 모든 시간을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선물로 여기며 범사에 감사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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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범사에 감사하십니까’(살전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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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자족 신앙’(빌 4:12-13)
- 현대는 불만족의 시대라고 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만족하다는 소리를 듣기가 어렵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풍요한 삶을 누리는 것 같으나 실상은 모두가 불만의 포로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모르거나 곡해함으로서 불평과 불만에 사로잡혀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영적 피조물입니다(창 1:27). 전 3:11에서는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다만 흙으로 빚어진 물질적인 존재인 줄로 착각하여 지식이나 재물로 그 공백을 메꾸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의 행복은 바람과 같아서 아무리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습니다. 잡았다 생각하지만 빈손입니다. 그래서 전 1:14절에서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물질제일주의로 물질을 추구하면서 물질로 행복을 사겠다고 하지만 도리어 그 물질 때문에 불행해졌습니다(딤전 6:10). 세상은 자족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여기지 않고 더 가져야 한다고 아우성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우리에게 자족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2절).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라”(딤전 6:8)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족이란 자기만족이 아니라 부단히 싸워서 이겨야 하는 즉 자기와 싸워서 이겨야 하는 바로 그런 것임. 자족은 스스로의 체념에서 오는 자기 비하나 자기 포기가 아니라 어떤 도전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용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신자는 가난하고 비천한 환경에서도 결단코 실망과 낙담하거나 열등감에 빠져 자포자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자족과 감사의 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족하는 생활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니 경험을 통하여 자족하는 비결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형편에든지 불평이나 불만은 배우지 말고 자족하기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남의 것을 보고 비교하지 말고, 내 입장과 환경을 바라보며 만족합시다. 세상에는 가만히 있어도 알아지는 것이 있고, 배워야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본능적인 것은 누구나 배우지 않아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부단히 본능적인 욕구들로부터 자족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고후 3: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우리의 만족은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충족시켜 주십니다(시 23:1, 약 1:17). 세상의 만족, 육신의 만족이 아니라, 주님을 신뢰하는 데서 오는 만족인 것입니다. 우리는 환경에 의해 자기의 행불행을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행복은 자기가 처한 환경에 달린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에 내 자신을 굴복시킬 때 우리는 어떠한 환경에서도 자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13절)는 말씀은 ‘세상의 성공’에 초점을 맞추지 있지 않고, ‘자족하는 삶’에 초점을 두고 있는 말씀입니다. 나는 어떤 상황 속에서라도 믿음을 지키며 그 어려운 환경을 극복할 수 있다는데 메시지가 있는 것입니다. 자족은 능력주시는 주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어떤 환경이나 생활 속에 처할지라도,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만족하면서 영적 부요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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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자족 신앙’(빌 4: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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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세 가지 큰 절기’(출 23:14-19)
- 구약의 절기 이해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절기를 통해 그 당시 역사와 사회법을 통합하여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절기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성령 강림의 진리가 연관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절기라는 히브리어는 ‘약속을 지키다’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일정한 때에 이스라엘 백성과 만나시기 위해서 약속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님께로 나오라고 말씀하시고 그들이 나와야 하는 날과 이 특별한 날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알려주셨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절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절기를 정하신 목적은 주님의 백성이 절기를 지킴으로써 신앙생활에 힘을 얻어 더욱 주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감사 절기에 중요한 것은 내 노력이 아닌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사는 것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살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매년 지켜야 할 세 가지 절기는 무교절, 맥추절, 수장절입니다. 이때 모든 남자는 예루살렘에 가서 절기를 지켜야 했습니다.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때에는 각자 주님께서 주신 복을 따라서 그 힘대로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땅에서 난 첫 열매 가운데서 제일 좋은 것을 하나님의 집으로 가져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첫 수확을 감사의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 중요한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새끼 염소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아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짐승의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아 먹는 것을 별미로 즐겼습니다. 이것은 생명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잔인한 행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하찮은 동물이라도 잔인하게 취급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신 22:6-7) 무교절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날에 하나님께서 이집트 땅에서 온 이스라엘 지파를 이끌어냈기 때문입니다.(출 12:17) 누룩은 부패와 죄를 상징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철저히 금지되었습니다.(마 16:11-12) 무교절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죄 된 삶에서 돌이켜 믿음으로 성숙하도록 깨닫게 해주는 절기입니다. 유월절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고난과 죽음으로 죄인 된 우리가 속죄와 구원을 받게 된 것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예수께서 유월절 만찬 이후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완전한 희생제사가 이루어졌습니다. 히브리서 9장 25-26절을 보면, “대제사장은 해마다 짐승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 몸을 여러 번 바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몸을 여러 번 바치셔야 하였다면, 그는 창세 이래로 여러 번 고난을 받아야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기를 희생 제물로 드려서 죄를 없이하시기 위하여 시대의 종말에 단 한 번 나타나셨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희생제사를 따로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생각하며 우리는 평생 감사해야 합니다. 맥추절(칠칠절, 오순절)을 지키는 목적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주위에 있는 연약한 사람들을 섬기는 데 있습니다. 신명기 16장을 보면, 칠칠절 절기를 지키라는 말씀과 곧이어 이웃과 함께 나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감사해야 할 우선 순위는 먼저 하나님입니다. 그후에 이웃을 섬기는 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섬기는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그 당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온 사람들은 교통수단이 발달되지 않아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머물기도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머물러 기도한 120명 사람들에게 성령님이 임하여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고 성령충만을 받은 때가 바로 이때였습니다.(행 2:1-4) 우리가 함께 모여 기도할 때 성령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역사하는 장소는 바로 교회입니다. 수장절(초막절, 장막절)은 “여호와의 절기”(레 23:39)라고 부르기도 했고, “명절”(요 5:1)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생활 40년 동안 초막에서 산 것을 기억하며 지키는 절기입니다.(레 23:42-43) 초막절을 지키는 것은 광야 같은 세상에서 약속의 땅인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해주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기 위해서입니다. 10월 중순경에 곡식 추수한 것을 감사하며 지키는 절기로서 수장절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절기에는 추수에 대한 감사뿐만 아니라 삶을 인도해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하였습니다. 특히 종과 이방인 과부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도 기쁨을 누리는 최대의 명절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명절 끝날 곧 큰 날”(요 7:37)에 누구든지 목마른 사람은 주님께 오라고 초청하셨습니다. 이날이 큰 구원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기 때만이라도 영적으로 목마른 사람들이 예수께 나아와 구원의 은혜를 맛보고 즐겁게 살도록 전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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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세 가지 큰 절기’(출 23: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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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생각과 말’(잠 18:21)
- 사람은 하루에도 수천수만의 말을 하고 살아갑니다. 그러한 말 가운데도 유익을 끼치는 말이 있고 그렇지 않은 말도 있습니다. 적절한 말은 유익이 되지만 넘치는 말은 오히려 해악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만큼 말은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엡 4:29). 더러운 말이란 유익이 되지 않는 말로서 남에게 시험을 주고 분노와 절망을 일으키며 상처를 주는 말입니다. 더러운 말은 신자답지 못한 말이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남에게 유익 되지 않는 말이나 남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해를 끼치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지혜요 은혜인 것입니다. 검(劒)은 사람의 육체에 보이는 상처를 주지만 간사하고 거짓된 혀는 사람의 영혼에 상처를 준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성경에서는 혀의 사용에 대해서 그토록 많은 교훈을 하고 있습니다(55:22, 57:5, 잠 18:21, 26:18). 얼마나 말이 중대한 영향을 끼치면 예수님께서 말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셨겠습니까?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마 12:36).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을 하나도 빼지 않고 다 탐지하고 평가하십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생각,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을 전부 탐지해서 다 기록하십니다. 물론 회개하면 없어지지만 그 이전에는 다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말이 중요한 것입니다. 혀가 실수를 많이 하고 실패를 많이 하고 죄를 많이 짓는 것은 왜 그럴까요? 혀가 마음에 가득한 것을 바깥으로 쏟아내기 때문입니다(잠 15:28, 마 15:18). 우리가 말에 실수가 없는 자가 되기 위해 무릇 제어할 것보다 먼저 자신의 마음과 입술을 제어해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약 3:2). 사람은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을 입으로 말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혀를 보면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혀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보면 우리 신앙의 성숙도를 측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말은 자신의 약점조차도 장점으로 바꾸어버립니다.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삶은 바뀌게 됩니다. 생각은 열쇠라는 말이 있듯이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는 긍정적인 일이 나타나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는 부정적인 일이 나타날 뿐 아니라 부정적인 생각이 사탄이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인생을 지배하는 것은 운명이 아닙니다. 생각이 인생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어제 내가 생각한 결과이고, 내일은 오늘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느냐로 결정됩니다. 변화를 가져오는 삶은 무엇보다도 생각과 말이 믿음에서 나와야 하겠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말에 달려 있습니다(21절). 누에고치의 입에서 실이 나와 집을 만들어가듯이 사람은 자신의 입으로 하는 말에 의해 인생의 집을 짓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말을 하는 사람은 믿음의 집을 짓게 되고, 소망의 말을 하는 사람은 소망의 집을 짓게 됩니다. 그러나 걱정하는 말을 하는 사람은 걱정의 집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말을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민 14:28하). 우리는 삼가 경계하여 항상 선한 마음에서 나오는 선한 말만을 할 수 있도록 힘을 쓰십시다. 원망과 불평하지 말고, 위로의 말을 하고 격려의 말을 하고 긍정의 말, 축복의 말을 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얼마나 힘이 들었냐고, 그래 같이 기도하자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해주실 것이라고 서로에게 선한 말, 감사하는 말을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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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생각과 말’(잠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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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예수님의 식탁 교제’(요 21:9-14)
- 창세기를 보면, 개인과 개인이 계약을 맺을 때도 음식을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아비멜렉이 이삭을 찾아와 언약을 맺을 때도 잔치를 베풀고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창 26장) 야곱과 라반이 언약을 맺을 때도 잔치를 벌이고 함께 먹었습니다.(창 31장) 시내산에서도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중재로 계약을 맺을 때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음식을 먹고 언약의 피를 뜻하는 포도주를 마셨습니다.(출 24장)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모일 때마다 식탁 교제를 했습니다.(행 2장) 이처럼 식탁 교제는 주님을 만나는 자리이고, 언약을 맺는 자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제자들과 하신 일은 마지막 만찬을 나누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깊은 만남도 식사 때 이루어졌습니다. 예수께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먹는 식사를 통해 그들의 눈이 열려서 예수를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식탁 교제를 하심으로써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알게 되고, 사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식탁 교제는 주님과 사랑의 관계를 위한 초대였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음식을 나누신 후부터 공동체의 식탁 교제는 주님의 임재라는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식탁에서 중요한 것은, 혼자 드시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신다는 점과 누구하고라도 함께 식사하셨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식탁의 벗으로 초청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식탁 교제를 통하여 제자들의 정체성을 깨우쳐 주시고 그들을 사랑으로 하나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식탁 교제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기쁨으로 섬겨야 합니다. 마태복음 11장을 보면,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을 절제하던 요한에게는 귀신이 들렸다고 비난했습니다. 죄인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예수님에 대해서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자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을 불러모아 그들과 함께 식탁 교제를 하셨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바리새파의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막 2: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려고 오신 것을 기억하며, 우리는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 식탁을 기쁨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잔치를 베풀 때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식사에 초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4:12-14) 우리는 갚을 것이 없는 사람들을 섬겨야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도 제자들과 함께하셨습니다.(눅 22장)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들어 감사기도를 드리신 후 그것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성찬입니다. 성찬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즉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한 것을 믿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모두 부활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 있는 사람만 부활하는 것을 믿기 바랍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신 자기의 영으로 여러분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롬 8: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없는 사람은 살아 있으나 죽은 자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마 8:22) 그래서 우리는 성령님이 떠나시지 않도록 항상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사람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이 찔려서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각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용서를 받으십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행 2:38)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때 베드로의 말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날 신도의 수가 약 3,000명이나 늘어났습니다. 이처럼 회개하면 성령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밥을 먹듯이 회개해야 합니다. 건강한 가족의 큰 힘은 식사를 함께하는 것입니다. 식탁 교제를 하려면 우선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마귀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서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것을 방해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모여서 교제해야 합니다. 식탁 교제는 주님을 만나는 중요한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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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예수님의 식탁 교제’(요 2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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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관계의 중요성’(요 1:12-13)
- 인간은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삶은 곧 관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자신과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삶이 형성되기에 관계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는 점점 더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관계의 본질을 외면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빨리 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가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관계가 행복과 성공과 영원을 결정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보다 관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을 뿐 아니라 이웃과도 소통과 공감에 의한 성숙한 사랑의 관계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사랑은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며 관계가 바르지 않으면 사랑을 나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됩니다. 하나님과 수직적 관계가 잘 맺어 질 때 수평적 관계도 열리기 때문입니다. 늘 성실하고 진실 된 마음으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이루어 나아가면(고후 7:1 ; 요일 1:6) 사람 관계도 올바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를 목자와 양의 관계로 묘사했음(시 23편). 그는 누구보다도 목자와 양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 운명의 선장이 되려는 현대인들의 사상은 가장 똑똑하고 지혜로운 것 같지만 사실은 가장 어리석고 이기적인 신앙의 비극을 택하게 한 결과를 빚어낸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를 바라보며 실망하거나 기대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이 신뢰할 수 없으리만치 변화무쌍하여 예측할 수 상황에서도 온 땅을 다스리시며 스스로 계신 거룩한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보지 못한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줄 모릅니다. 맞닿을 수없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유한한 자신의 인생과 관계있는 분으로 삼으며 실제로 하나님과 관계를 누리며 살아가게 만드는 위대한 힘의 근원은 오직 믿음인 것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일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유일하게 신경 써야 할 것은 생명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이시오 생명과 축복의 원천이시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성패의 최대의 비결은 바로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냐 아니냐에 달려 있습니다(수 1:5). 하나님께서 내 편이 되신다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나가면 부흥이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며, 성령의 역사와 말씀의 묵상과 간절한 기도와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현세와 내세에서의 가장 큰 유익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긴다고 하면서도 항상 부족해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물질을, 자녀를, 환경을, 그 어떤 문제를 더 크게 보거나 귀하게 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믿음을 흔들기 위하여 쉬지 않고 다가오는 모든 세상의 파도와 믿음의 시련과 결핍 앞에서 자신에게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게 만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중히 여겨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동행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붙잡고 나아갈 때 성공된 인생을 사는 첫걸음이 시작되고 풍성함을 맛보며 힘과 용기와 위로를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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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관계의 중요성’(요 1: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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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
-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창50:25). 며칠 전 고등학교 졸업 이후 연락이 끊겼던 친구와 대화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대화 중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장인, 장모님께서는 자녀들에게 귀한 믿음을 남기시고 가셨다네” 이 말이 저에게는 퍽 감동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최근들어 부모님의 신앙이 자녀들에게 이어지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요셉이 죽어가면서 하는 말입니다. 당시 총리대신이었던 요셉은 큰 권력과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권력이나, 땅이나, 재물에 대하여 자손들에게 말하는 대신에 가나안 땅으로 그의 해골을 가져갈 것을 유언하였습니다. 그가 자신의 시체를 귀중히 여겨서 한 말은 결코 아닙니다.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애굽은 잠시 머무를 곳이며, 그들이 반드시 가야할 곳은 가나안 땅이다.”라는 점이었습니다. 430년 후 실제로 모세는 출애굽 당시 요셉의 시체를 취하였습니다(출13:19). 그리고 40년 동안 운구하면서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야 비로소 그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습니다(수24:32). 요셉이 형님들에게 팔려 나갔을 때,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 대한 신앙뿐이었습니다. 하지만 13년 후, 그는 신앙 외에도 필요한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경험한 바를 자녀들에게 상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예를 보겠습니다. 여호사밧 왕은 하나님을 매우 잘 경외한 왕이었습니다(대하17:6). 그러나 그가 자녀를 신앙으로 잘 양육했다는 내용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아들 여호람의 아내를 맞이하는데 이세벨을 모친으로, 아합을 부친으로 둔 아달랴를 택하였습니다. 그로 인하여 여호사밧 왕의 손자 아하시야왕이 예후에 의하여 죽자 아달랴는 왕의 씨를 거의 전멸하다시피 합니다(왕하11:1). 여호사밧왕은 여호람 외에도 생전에 여섯명의 아들이 더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보기에 지혜롭게 하여 장자인 여호람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다른 아들들에게는 금은 보화와 유다의 성읍들을 많이 물려주어 그들사이에 다툼이 없도록 애썼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후에 왕인 여호람이 동생들을 모두 죽입니다. 그는 동생들이 차지한 성읍들과 금은보화가 탐이났던 모양입니다. 여호사밧이 지혜롭게 한다고 하였지만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주지 못한 결과입니다(대하21:1~4). 자녀들에게 무엇을 상속하시려고 애쓰십니까? 집입니까?직업입니까? 금은 보화입니까? 하나님 경외하기를 심어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마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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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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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목표가 분명하십니까’(빌 3:12-14)
- 이 세상은 막연한 삶이 아닌 목표 중심적 삶을 요구합니다. 목표를 확실하게 정하고 실행해가는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큰 성공과 승리가 안겨지게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것들을 목표로 삼으나 믿는 우리는 세상 사람과 목표가 다릅니다. 우리의 목표는 바로 천국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3:14)고 선언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에 나의 목적과 목표를 일치시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야 하겠습니다. 마 6:33에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고 하셨고, 고전 10:31에서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영적 승리를 꿈꾸는 사람이 분명한 목표가 없다면 승리를 이미 포기한 것이겠지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이 있듯이 그곳에 해결책도 있다는 말로도 풀이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간에 수없는 뜻을 정해 보았고 시행착오를 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승리하려면 신앙생활의 목표가 명확해야 하며, 목표가 세워지면 즉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신앙은 ‘차차 나중에 하겠다’하면 지키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주저하고 방황하기에는 너무도 짧은 인생입니다. 말씀과 기도 가운데 뜻을 정했다면 철저하게 지금 행해야 할 것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도 그랬고, 바울도 그랬습니다. 선한 뜻에는 은혜가 따라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그 뜻을 따르고자 하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모든 필요를 따라 물질도 사람들도 붙여주십니다. 모세는 가나안이라는 인생의 분명한 목표를 설정하고 살았습니다. 모세가 백성들이 늘 비판하고 반대하고 원망하는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이 모든 것들을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이러한 명확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표가 없는 배는 방향을 설정할 수 없고, 이러한 배는 이리저리 표류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천성을 향해 가는 순례자들인데 만일 천성이란 이 목표가 희미하거나 확정되지 않는다면 이 세상 물결로 표류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신앙생활 뿐 아니라 우리들의 육신의 생활에도 이 진리는 마찬가지입니다. 목표가 분명치 못한 사람은 평생 성공하기 어렵게 됩니다. 무슨 일이든지 목적이나 목표가 확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목표가 없거나 목표를 상실하면 그 때부터 방황하며 전진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왜 유혹과 시험에 자주 넘어집니까? 목표가 없거나 목표가 있어도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목표에 이르기까지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정신을 차려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손을 붙잡고 계십니다. 그 손을 놓치지 마시고 따라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목표를 분명히 하면 하나님께서 이끌어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잡으려고 달려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늘 미래를 바라보는 꿈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소망의 목표를 향하여 달려갔듯이 우리도 이 적극적인 신앙, 좇아가는 신앙을 본받기 바랍니다. 뒤에 있는 것 중에 오늘 푯대를 향해 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모두 잊어버려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목표를 세워나가는 사람은 목표 설정만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즉각적인 실행에 옮기는 순종이 반드시 따라야 합니다. 목표를 이룬 사람에게는 반드시 상급이 있음을 기억합시다(딤후 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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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목표가 분명하십니까’(빌 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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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선하고 아름다운 연합’
-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창4:1-5) 가인이라는 말은 얻음이라는 뜻입니다. 하와는 최초의 여인일 뿐 아니라 최초로 잉태하여 아이를 낳았습니다. 새 아이가 탄생 되었으니 얼마나 기뻤을까요? 더군다나 자기의 실수로 인하여 아담과 자기의 영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떠나게 되었고, 에덴 낙원까지 잃게 되어 소망 없이 살았었는데 아들을 낳았느니 환호성을 질렀을 것입니다. 그들은 잃어버렸던 낙원을 가인으로 말미암아 회복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자기는 많이 공부를 못했기에 아들 대에서 자신이 원하는 공부를 시켜 대리만족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심정 이상일 것입니다. 그래서 가인에 대하여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살았을 것입니다. 넘어지면 다칠세라, 불면 날아갈세라 온갖 정성을 다 쏟았을 것입니다. 행여 풀 밭에 가면 뱀이 나타나 그를 유혹할까 봐 보는 즉시 잡아 죽이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그들의 기대와 점점 멀어졌습니다. 기만 살아서 한마디 충고도 듣지 못했으며, 자신의 뜻대로 무슨 일이 되지 않으면 성질을 내며 갈수록 난폭해져만 갔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둘째 아들 아벨을 낳았습니다. 이제는 기쁨보다 가인에 대한 트라우마같은 것이 생겨서 자녀에게 소망을 두는 것이 허무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의 이름을 ‘아벨’ 곧 허무라고 하였습니다. 이와같이 사람이 사람에게 기대와 소망을 가지면 실망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외에 그 어느 누구에게도 소망을 갖는 것을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으며 그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렘17: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의뢰하는 양식을 끊으십니다(시105:16). 돈을 의뢰하면 돈이 궁핍하게 됩니다. 자식을 의뢰하면 자식이 기대에 어긋나게 됩니다.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면 자신의 지혜에 속게 됩니다. 이처럼 창조주 외에 그 어느 것도 사람을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위하며 주님을 의뢰하는 생활이 아니면 모두 빈 껍데기이며 허무한 것뿐입니다. 한 배에서 나온 자녀라도 성격이 다르고 소질도 다릅니다. 가인은 농사를 잘하여 농사짓는 자가 되었습니다. 반면에 아벨은 양을 잘 쳐서 양치는 자가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은사는 가인과 아벨 모두에게 꼭 필요한 은사였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먼저 속죄하는 제사가 필요하였습니다. 그래서 가인에게는 아벨의 양이 필요하였습니다. 아벨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가인이 농사한 밀, 보리, 수수, 조, 참깨, 들깨 등과 같은 곡식이 필요하였습니다. 아벨은 자신이 동생이었기에 필요하면 가인에게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반면에 가인은 속죄를 위한 양을 구입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최고로 알았기 때문에 아벨의 것을 애써 부인하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드리는 속죄제도 동생 아벨의 동물을 필요로 하지 않고 그가 기른 곡식으로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속죄제를 드릴 때조차 자신의 곡식으로 드린 것입니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았을 것입니다(히9:22). 오늘날 신앙인들의 문제 가운데 하나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점입니다. 그것이 교만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들입니다. 우리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모든 지체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형제들 서로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될 존재들입니다. 내가 형제를 필요로 한다고 해서 형제보다 열등한 것이 아닙니다. 형제도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족한 부분을 겸손하게 형제를 찾아 자문을 구하거나 기도를 부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참으로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자리에 성령의 기름을 부어 주십니다(시133). 자신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형제에게 사랑을 나타낼 뿐 아니라 사랑도 기꺼히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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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선하고 아름다운 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