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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반석 위에 세운 교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16:17~19). 반석위에 세운 교회에서 반석에 대한 의견이 많습니다. 실제로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카톨릭과 기독교를 나누는 분기점이 될 만큼 극단적인 해석이 행해지고, 기독교 내에서도 다양한 해석들이 나타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카톨릭측은 반석이 베드로의 인격을 의미하며 교회는 베드로라는 인격 위에 세워졌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해석은 그들이 베드로의 법적 후계자라고 주장하는 교황의 교회 지배권을 옹호하는데 뒷받침 하고 있습니다(그랜드 주석 요약). 그러나 카톨릭의 주장은 많은 문제점을 낳고 있습니다. 첫째 교회가 베드로의 인격 위에 세워졌다면 베드로는 실수가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일이 있은 후 얼마 안 있어서 주님께 사탄이라는 책망을 받습니다(마16:23). 그는 예수님께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말씀하셨을 때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라고 간절히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일 후에도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전 예수님의 말씀대로(막14:30) 닭이 두 번 울기 전 세 번이나 부인하는 행동을 합니다. 또 예수님 부활 후에는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야고보에게서 보냄 받은 유대인들이 왔을 때 먹지 않은 체합니다. 그러자 바울이 “당신은 원래 유대인인데도 다른 유대인들과는 달리 율법에 구애받지 않고 이방인들처럼 살아왔소. 그런데 이제 와서 이방인들에게 유대인처럼 살라고 강요할 수가 있는 겁니까?”(갈2:14, 쉬운말성경) 라고 책망합니다. 이처럼 베드로도 사람이기 때문에 실수가 있었습니다. 만일 베드로의 인격이 반석이라면, 베드로의 여러 실수도 거기에 포함되는 모순을 갖게 합니다. 설사 그들의 말대로 베드로의 인격을 기초로 교회를 세웠다 해도, 그 내용이 베드로의 후계자로 교황을 세워야하는 것과, 성경보다 위에 있는 교황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교황 무오류설)을 뒷받침 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교회의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런 실수를 하는 것은 성령 없이 성경을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반석이 주는 의미는 베드로의 인격이 아니라 첫째, 베드로의 신앙 고백 곧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의 터입니다. 이 고백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며 반석입니다. 예수님을 주와 및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다면 거듭날 수도, 의롭게 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신앙인들은 이 고백으로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며, 위기 가운데 있을 때에도 예수님이 구주와 그리스도 되심을 선포하여 사탄을 대적해야 합니다. 반석이 주는 두 번째 의미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칭찬 곧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말씀과 같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아 살아가는 터’를 의미합니다. 신앙인들은 비록 거듭났다고 하지만 육신이 있기 때문에 항상 혈육의 가르침과 성령의 가르침 사이에 있습니다. 육신의 속삭임을 물리치고 성령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간다면 반석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말씀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란 헬라 음 ‘에클레시아’로 ‘불러내어 모은다.’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의미는 신약에서 ‘성도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내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의미’로 재해석 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신앙인들은 ‘그리스도의 몸’이요, 각각 ‘몸의 지체’ 라고 말합니다(고전12:27). 교회 또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1:23). 따라서 ‘신앙인들의 총회는 교회요, 그리스도의 몸’인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입니다(엡1:22).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뜻을 나타내야 합니다. 몸이 머리의 말을 듣지 않고 마음대로 움직인다면 반신불수입니다. 결코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울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참 된 몸이 되려면 각 지체가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고 말씀하신 반석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은 터’를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가르침을 받아 살아가지 않고 혈육의 가르침이나 육신의 생각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을 터로 삼아 교회를 세운다면 결코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머리이신 예수님의 생각을 온전히 나타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주님께서는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그리스도께 가르침을 받아, 몸으로 그리스도를 재현할 때 ‘그리스도의 지시를 받아 살아가는 것’을 터로 삼아 교회를 세우십니다. 성령께 받은 말씀은 아무도 무너뜨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신앙인들이 무슨 일을 당하여 주님께 기도하면, 성경에 맞는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성경에 맞지 않는 음성은 사탄의 음성이라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또한 성경에 맞을지라도 양심에 타당하지 않다면 그것 역시 성령의 음성이 아닙니다. 성령의 음성은 성경과 양심과 환경에 일치 됩니다. 주님은 이런 터 위에 자신의 교회를 세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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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30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잔치 2’
    “고난 받는 자는 그 날이 다 험악하나 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상 잔치하느니라.”(잠15:15). 아무리 좋은 악기가 있고 좋은 음식이 있으며 장소가 좋아도 마음이 즐겁지 않다면 잔치가 될 수 없습니다. 비록 잘 갖추어 있을지라도 잔칫상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발생한다면 차라리 잔치를 하지 않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진정한 잔치는 비록 외적인 조건들이 잘 갖추어 있지 않을지라도 영이 만족하고 기뻐한다면 잔치일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7:1) 라고 말합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란 말이 있듯이 가정이 화목하며 서로를 사랑하고 위하는 것이 가장 좋은 잔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잔치는 잘 차려진 음식의 개념보다도 마음의 개념이 더욱 중요합니다. 어떻게 하면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 마음은 대부분의 영어번역본에서 'heart'로 나옵니다. 차가운 이성의 마음이 아닌 거듭난 속사람의 마음입니다. 영의 마음입니다. 속사람이 기뻐하면 항상 잔치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언제 속사람이 기뻐지는지 상고해보겠습니다. 죄를 회개하면 기뻐집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3:19). 회개하면 유쾌하게 됩니다. 유쾌하다는 것은 쾌활하고 기쁘다는 뜻입니다. 죄는 더러운 오물과 같아서 그것을 품고 있는 한 마음이 맑고 깨끗할 수가 없습니다. 탄식이 나오고 짜증이 나옵니다. 그래서 죄를 품고 있으면 사소한 일에도 신경질을 잘 부리며, 말 한마디도 참지 못합니다. 이럴 때는 회개거리가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예수님의 보혈 공로로 사함 받지 못할 죄가 없습니다. 어떤 죄라도 반드시 아뢴다면 유쾌하게 됩니다. 기뻐집니다. 말4:2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치료하는 광선이 발합니다. 그러한 치료는 영적인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오래 되고 고질적인 병만 아니라, 죄도 습관도 이길 수 있습니다. 의로운 해가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의로운 해는 성령을 말하고, 광선은 성령의 능력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주님은 넉넉히 이길 힘을 주십니다. 이기는 자는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해집니다. 뿐만 아니라 경쾌해집니다. 양심에 거리낌이 없을 때 담대함을 얻고 기뻐집니다(행24:16). 양심이 거리낌이 있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원만해질 수 없습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되지 않습니다. 양심이 거리낌이 있으면 먼저 하나님께 내 놓아야 합니다. 성령은 양심과 더불어 말씀하십니다(롬1:9). 양심 안 쓰면 캄캄해집니다. 거듭난 양심, 곧 착한 양심을 힘 있게 써 나가면 담대함을 얻고 마음이 즐거워집니다(요일3:20). 이처럼 양심을 쓰는 사람은 항상 잔치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명절 끝 날 곧 기쁨이 다 지나간 날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7:37~38). 명절은 기쁘고 즐거운 날입니다. 하지만 명절 끝 날이 되어 가면 즐거움이 시들해집니다. 허무해집니다. 아쉬움이 많이 남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러한 날을 복음 전파의 기회로 삼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이 말씀의 의미는 “너희들 세상 명절을 따라 먹고 마시고 즐겨봤지? 하지만 지금 어떠하냐? 공허하고 갈증만 더하지? 이처럼 외적인 명절은 목마름만 더할 뿐이다. 참 기쁨을 얻으려면 내게로 오라. 내게로 와서 나를 믿으라.”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고 영접하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이 흐릅니다. 만족하게 됩니다. 성령의 생수가 흐릅니다. 기쁨의 강물, 평강의 강물이 흐릅니다. 솔로몬은 사랑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 화창한지 쾌락하게 하는구나.”(아7:6). 이에 대하여 킹제임스 우리말 번역에는 “오!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어여쁘고, 어찌 그리 상냥하여 기쁨을 주는가!” 라고 번역 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바로 기쁨을 줍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할 때 마음이 기뻐집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얼굴에 기쁨이 드러납니다. 이런 사람은 항상 잔치를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무겁지 않습니다. 사랑 없이 하는 것이 율법이요 사랑 없이 하는 것이 짐입니다. 하지만 사랑하면 아무리 무거운 것도 가벼워집니다. 사랑의 영 성령이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요일5:2). 사랑으로 하는 행동은 수고가 기쁨이 됩니다. 기쁨은 힘이요 활력입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면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사58:13~14). 구약 안식일의 정신을 오늘날 주일을 지키는데 적용해야 합니다. 그럴 때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포도나무라고 하셨고, 그를 믿는 사람들은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여러 나무들이 있는데 특별히 포도나무와 가지로 비유하신 것은 포도나무가 기쁨을 상징하는 나무이기 때문입니다(삿9:13). 기쁨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안에서 행하면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항상 잔치합니다. 앉으나 서나 걸으나 멈추나 잔치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한 것입니다(빌4:4). 코로나19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의 기쁨을 앗아갈 수 없습니다. 어떤 형편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항상 기뻐하며 잔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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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22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잔치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쌔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요12:1~3). 잔치란 경사 때에 여러 사람을 초대하여 음식을 먹으며 즐기는 일이라고 사전에는 나옵니다. 잔치는 붙이기 나름인데 성경에서 나오는 잔치는 예수님을 위한 잔치(요12:1~3), 이삭이 젖을 뗀 후 아브라함이 베푼 잔치(창21:8), 혼인잔치(마22:1~14), 생일잔치(욥1, 마14:10~12), 양털을 깎을 때 여는 잔치(삼하13:23~29), 왕이 베푸는 잔치(에1, 단5), 돌아온 탕자를 위하여 베푼 잔치(눅15:22~24) 등 여러 잔치가 있습니다. 특성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그 하나는 주기적으로 여는 잔치와, 특별히 정해져 있지 않지만 경사로움 때문에 여는 잔치가 있습니다. 전자는 생일잔치나, 기념일에 베푸는 잔치가 해당 될 것입니다. 후자는 혼인잔치나, 젖을 떼는 날 베푸는 잔치, 돌아온 탕자를 맞이하는 잔치 등이 여기에 해당 될 것입니다. 이처럼 잔치는 기쁘고 즐거운 날입니다. 그런데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성경에는 잔칫날 불행이 닥친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욥의 아들들이 맏형의 생일날 잔치를 벌이며 먹고 마셨습니다. 그런데 이 날 욥은 전 재산을 잃고 그 자녀들 모두를 잃고 맙니다(욥1). 또한 헤롯의 생일잔치 때 세례 요한이 참수당하는 참혹한 일이 벌어졌습니다(마14:10~12). 에스더에서는 아하수에르 왕이 즉위한지 3년 만에 모든 방백과 신복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습니다(에1:3). 그러자 왕후 와스디 역시 부녀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이 날 후에 와스디는 왕후의 자리에서 쫓겨나게 됩니다(에1:19~22).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벨사살 왕 역시 귀인 일천 명을 위하여 큰 잔치를 베푼 후 그날 밤에 죽임을 당하고, 다리오가 왕이 됩니다(단5:30~31). 압살롬은 자신의 양털을 깎는 잔칫날에 암논을 죽입니다(삼하13:28~29). 바울은 디모데에게 “일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딤전5:6) 라고 말합니다. 또한 야고보도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약5:5) 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잔치는 우리의 영을 살찌우는 것이 아니라 육체와 마음을 살찌게 합니다. 자신을 위하거나, 사람들을 위하여 잔치를 벌일 때 사탄이 틈타기 쉬운 때입니다. 부득이하게 잔치를 할 경우에는 마귀로 틈타지 않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드려야 합니다. 혼인잔치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잔치입니다(마22:1~14).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신 남녀가 하나가 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마19:5~6). 뿐만 아니라 신랑이신 예수님과 신부인 성도들의 혼인잔치의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럴지라도 사치스럽고 요란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코로나19는 세상 풍속 습관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볼 기회입니다. 세상 살아가면서 신앙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잔치는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가 했던 것처럼 예수님을 위한 잔치입니다(요12:1~3). 그들은 예수님께서 마르다 자매의 오라버니 나사로를 살려주신 은혜가 너무나 고마워서 주님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고 그날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드려 모든 영광을 돌렸습니다. 오늘날 신앙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잔치는 주님을 위한 잔치입니다.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주신 주님을 위하여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잔치입니다(시50:14a). 참 된 감사는 내 마음에 드는 일만 아니라 마음에 들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드리는 감사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에게 서원을 갚는 잔치입니다(시50:14b). 어려울 때 잘 믿기로 했던 서원이 어려움이 해결 되면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하나님께 했던 서원을 기억하고 주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갚는 서원은 잔칫상의 음식입니다. 마리아처럼 가장 좋은 것으로 주님께 드리는 잔치는 우리의 중심입니다(요12:3). 이러한 잔치에는 향유 냄새가 가득해집니다. 이러한 잔치는 마음이 즐거움으로 매일 잔칫날이 됩니다(잠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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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17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지렁이 같은 야곱’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사 41:14). 야곱은 택함을 받은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야곱을 지렁이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개역개정에는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대신에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평소에는 흙 속에 숨어서 흙을 헤치며 먹이를 찾고 있다가 비가 오면 나타나는 지렁이들은 가장 약한 동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당시 이사야가 이 말씀을 선포하던 때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당하고 포로가 된 때였습니다. 스스로는 일어설 수 없는 때였습니다. “생명이 오그라들 때 목수 청년이 보이지 않는 젓가락으로 나를 집어 올렸다 그리고 질척한 흙속으로 밀어 넣고 나는 그 때 햇볕 쨍쨍한 시멘트 바닥에서 체액이 말라가는 길 잃은 한 마리 지렁이였다.” 이 시는 김영교 시인의 ‘그 젓가락’ 이라는 시입니다. 체액은 조금씩 말라가고, 까치는 부지런히 그들을 찾고 있으며, 무수히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밟힐지 모르는 그 상태가 당시 이스라엘의 상태이며, 과거 믿지 않았을 때 우리들의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지옥에서 들어 올려 생명수 강이 흐르는 하나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돌아보면 이스라엘의 삶은 그야말로 지렁이와 같은 삶이었습니다. 애굽의 노예상태에서 바로의 학정을 받으며 살아왔던 430년간의 삶, 바벨론의 포로 생활, 페르시아의 식민지, 헬라와 로마의 압제....... 이처럼 1948년 신생국가가 될 때까지 2000여 년간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로 떠돌며 나라 없는 설움을 당해야 했습니다. 다른 민족이라면 벌써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들의 잘못으로 그런 결과가 초래했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은 약속을 잊지 아니하시고(렘33:19~26) 각 시대마다 모세,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 에스라, 느헤미야와 같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보내셔서 그들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우리에게도 일제 강점기가 있었습니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목적은 자원 확보와, 시장 확대를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마구잡이로 우리의 산천을 파헤쳤으며 식량을 강탈해갔습니다. 민족말살정책을 펴서 우리말을 사용할 수 없게 하였으며, 창씨개명을 통하여 일본식 성명으로 강제 변경시키도록 하였습니다. 곳곳에 신사를 세워놓고 참배를 거부하는 기독교인들을 잔인하게 옥사시켰습니다.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해방 될 수 없는, 본문 속의 지렁이와 같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자멸의 길을 택하였습니다. 여러 싸움에서 승리하자 그 기세를 몰아 세계 최강의 미국을 기습 공격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조선 독립을 위하여 미국을 흔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두 개의 원자폭탄을 맞고 항복하기에 이릅니다. 그동안 애국지사들은 국제사회에 끊임없이 외교활동을 펼쳤고, 그 결과 2차 세계 대전 중 미국과 영국과 중국(당시 장개석 총통)이 함께한 카이로 회담(1943.11.22~26)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받습니다. 그러다가 일본이 패망하기 직전에 독일 베를린 포츠담에서 열린 포츠담 선언(1945.7.26)에서 연합국은 한국의 독립을 재확인하고, 일본에게 그것을 요구합니다. 일본이 미국을 공격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조선 독립을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부르짖음과 간구의 눈물이 하나님께 상달 된 것입니다. 비천한 자를 돌아보시는 하나님(눅1:48)께서 지렁이 같은 조선을 불쌍히 여기셔서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폭격하게 만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코로나19라는 대 재앙 앞에서 백신이 개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렁이 같은 나약함을 보게 됩니다. 2021년 7월 8일 현재 코로나19 실시간 통계사이트 ‘월드오미터’에 따르면 전 세계 코로나19 사망자는 410만 6,724명으로 집계 되었습니다. 다윗이 인구조사로 사망했던 숫자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많은 숫자입니다. 우리 역시 이날 확진자 수가 1,274명으로, 백신투입이 인구대비 30%를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전 세계가 하나님의 손에 빠졌습니다. 다윗시대에는 사흘 만에 징계를 거두셨지만 지금은 1년 6개월이 지났는데도 끝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한 후 하나님 앞에 크게 회개하자 하나님께서는 갓 선지자를 통하여 다윗이 받을 징계를 택하라고 합니다. 첫째, 삼년 기근이었습니다. 둘째, 석 달을 대적에게 패하여 쫓기는 일이었습니다. 셋째, 사흘 동안 일어날 온역이었습니다. 만일 다윗이 회개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들이 동시다발로 일어났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회개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세 가지 중 한 가지만 선택하도록 하셨습니다. 다윗은 “내가 곤경에 있도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심히 크시니 내가 그의 손에 빠지고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나이다.”(대상21:9~13). 그래서 내린 것이 온역이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7만 명의 희생자가 나왔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은 자연 발생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빠진 재앙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빠진 일은 하나님이 손을 거두실 때만 끝날 수 있는 일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기 전에 먼저 통회를 하였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용서하여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대상21:8). 다윗은 그에게 넓은 영토를 주시고, 많은 인구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고 자신이 그 영광을 가로챈 죄를 회개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통회하는 자들에게 긍휼을 베푸십니다. 백신도 중요하지만 신앙인이라면 먼저 제사장의 심정으로 하나님이 손을 거둘 때까지 회개거리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의 열매를 맺기 위하여 힘써야 합니다. 우리의 행동으로 하나님께 어떤 대가도 요구 할 수 없지만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호10:12) 라는 말씀대로 하나님께서는 지렁이 같은 성도들의 몸부림을 긍휼히 여기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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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09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큰 돌무더기’
    “무리가 압살롬을 옮겨다가 수풀 가운데 큰 구멍에 던지고 그 위에 심히 큰 돌무더기를 쌓으니라.”(삼하18:17). 하나님은 아버지를 반역하고 왕이 되려하였던 압살롬에 대하여 진노하셨습니다. 전쟁 중에 그의 머리카락은 상수리나무에 걸렸고, 노새는 그의 몸에서 빠져나갔습니다. 그가 공중에 매달린 채 대롱대롱 있을 때 요압이 와서 창으로 그의 심장을 찔렀습니다. 무리는 그를 데려다가 큰 구멍에 던졌고 큰 돌무더기를 쌓았습니다. 이로서 전쟁은 다윗의 군사들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돌무더기에 대하여는 여호수아 7장에도 나옵니다. ‘여리고’ 라는 큰 성과 싸워 승리하였던 이스라엘 공동체가 아이라는 작은 성과 싸워 패하게 되고 용사 36명이 전사합니다. 하나님께 바쳐야 할 물건을 아간이 훔쳤던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아간은 돌에 맞아 죽게 되고 그 자리가 큰 돌무더기가 되었습니다. 그 골짜기 이름이 ‘괴로움’이라는 뜻을 가진 아골 골짜기입니다(수7:26). 예외도 있지만(창31:46~52), 이처럼 돌무더기는 죄 값의 처절함을 보여줍니다. 아간과 압살롬의 공통점은 절도입니다. 아간은 하나님께 드려야 할 물건을 훔쳤고, 압살롬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과 왕위를 훔쳤습니다. 게다가 압살롬은 아버지를 반역하고, 아버지의 후궁들과 백주에 동침하였으며, 아버지를 살해하려 했던 천인공노할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부모님을 저주만 하여도 죽을죄라고 말합니다(레20:9, 잠30:17), 하물며 반역하여 아버지를 죽이려 하는 자의 받을 벌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압살롬이 암논을 죽였을 때 바로 징계하지 아니 하시고,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아버지 다윗이 그술왕 달매에게 도망간 그를 당장 소환 요청을 하지 않은 것이 한 예입니다(삼하13:37~38). 그러나 압살롬은 하나님의 그런 사랑에 대하여 고마워하기는커녕 회개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죄는 점점 커지고 만 것입니다. 이처럼 죄를 지은 후 회개하지 않으면 점점 더 큰 죄에 빠지게 됩니다. 이러한 죄는 다음과 같은 특징들이 있습니다. 본문에서와 같이 죄에는 성장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죄는 점점 자랍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말처럼 행하는데 있어 점점 대범해집니다. 우리는 사울에게서 그런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울은 왕으로 뽑혔을 때 짐 보따리 사이에 숨을 만큼 수줍어했고 겸비하였습니다(삼상10:21~22). 그러나 왕이 된 후에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사무엘이 정한 기한에 나타나지 않자 제사장만 할 수 있는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중심으로 회개하지 않고 변명만 늘어놓더니 그의 범죄는 점점 커지고 증가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모두 멸하라고 하셨지만 사울은 오히려 아각 왕과, 살지고 기름진 가장 좋은 우양을 남겼습니다(삼상15:9). 심지어 기념비를 세워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자신이 차지했습니다(삼상15:12). 그러다가 자신이 멸하였던 신접한 여인을 수색해서 죽은 사무엘을 불러오도록 합니다(삼상28:8).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일을 서슴지 않고 한 것입니다. 그 결과 그는 블레셋과 전쟁에서 패하여 죽고 맙니다(삼상31:4). 이처럼 죄는 회개하지 않으면 점점 자라 죄 지은 사람으로 하여금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빠뜨립니다. 압살롬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형 암논을 죽인 죄에 대하여 아무런 회개도, 징계도 받지 않았던 그는 마침내 아버지를 반역하여 왕위를 찬탈하고 죽이려는 행동까지 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각에서부터 죄는 처리 되어야 합니다. 생각을 받아들이면 눈덩이처럼 불어나 결국은 실천에 옮기게 됩니다. 둘째로 죄의 중독성입니다.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죄의 낙 때문입니다. 쥐나 물고기가 맛있는 미끼에 속아 덫이나 낚시에 걸려들듯, 죄의 낙은 신앙인들을 미혹하는 미끼입니다. 설상가상 낙은 커 보이고 죄가 가져다주는 고통은 작아 보이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걸려들고 맙니다. 어거스틴의 참회록 가운데는 그가 어린 시절 나쁜 친구들과 어울러 타인의 과수원에서 배를 훔쳐 먹었던 일이 있었는데 배가 고파서 그런 것이 아니라 훔치는 기쁨 때문에 했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죄가 주는 낙에 비례하여 중독성도 강하게 작용합니다. 세 번째로는 죄에는 사망이 작용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3). 사망이란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영적으로 죽은 상태였습니다. 하나님과 전혀 교제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후 우리는 영적으로 거듭났습니다. 다시 산 것입니다. 영적으로 거듭난 사람이 죄를 지으면 죽음의 고통과 대가를 톡톡히 맛보게 됩니다. 영적인 고통은 물론 환경으로 곤고와 쇠사슬에 매이게 됩니다(시107:10). 그러니 죄를 지은 후 속히 회개해야 합니다. 네 번째로 죄는 전염성이 있습니다(갈5:9). 다윗의 죄로 그의 온 가족이, 압살롬 한 사람으로 죄가 온 이스라엘에 퍼진 것과 같습니다. 우리 자신은 ‘나 하나쯤이야’ 할 수 있지만 우리의 행동을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으며 그들의 행동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흉년이 들어 애굽으로 갔던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내 사라가 이복누이인 점을 들어 애굽 사람들에게 누이라고 속인 결과 바로왕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 후 사라는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돌아왔지만 애굽 왕 바로에게 아브라함이 책망을 듣습니다(창12:18~19). 그런데 아브라함의 이러한 거짓말을 이삭도 그대로 써먹습니다(창26:7). 그는 자신이 존경하는 아버지의 거짓말 방법까지 배운 것입니다. 이처럼 죄는 자신은 물론 주변사람에게까지 영향을 끼칩니다. 특별히 지도자 위치에 있는 사람의 행동에 대한 파급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범위 그 이상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돌무더기의 흔적, 아골 골짜기도 소망의 문을 삼아주실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호2:15). 죄 때문에 실망할 것이 아니라 회개하여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주님의 은혜를 간구할 때 넉넉히 이기는 사람이 됩니다(롬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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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24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성령의 하나 됨을 지키라’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1~3). 최근에 모 당의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로 선출 된 분이 대표 수락 연설에서 비빔밥 원리를 강조하였습니다. 비빔밥은 갈아서 각 식물의 특색을 없애는 녹즙기나, 녹여 각각의 광물이나 금속을 새로운 모습으로 만드는 용광로와는 다르게 각 채소의 특징을 그대로 살려 하나가 되게 한다는 내용입니다. 이를테면 오이, 콩나물, 당근, 고사리, 시금치, 참기름, 계란프라이 등 각자의 특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들만의 맛을 그대로 살리고 하나가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이런 말을 한 것은 각자의 생각이 달라도 서로의 차이점을 인정하고 자신이 속한 당의 일원으로 포용하겠다는 뜻입니다. 한 편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것이 모두 각자 자신의 특색만으로는 하나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소금이 소금덩어리로 그대로 있다면 고르게 퍼지지 못하고 어떤 부분은 짜고 어떤 부분은 싱거울 것입니다. 참기름이나 들기름 역시 액체 상태가 아닌 고체 상태인 참깨 들깨로 이루어졌다면 전체를 고소하게 만들지 못할 것입니다. 고추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골고루 퍼져 맛을 낼 수 있는 것은 소금이나 참깨 들깨 고추로부터 녹여졌거나 갈아진 채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비빔밥 원리, 서로의 특성을 유지하면서 하나 됨의 원리는 교회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 됨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덕을 세우는데 있습니다(고전14:26). 하나 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던 성령의 기름부음이 예수님의 몸 된 교회를 통하여 각 지체들에게 흘러 내려오며(시133:1~3), 하나 됨으로 말미암아 기도가 응답됩니다(마18:19~20). 높은 나무는 쓰러지기 쉽지만, 높은 산은 무너지지 않으며,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습니다(전4:12).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본문 3절에는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라고 말합니다. 곡식 단을 묶는 끈이 있듯이 성도와 성도 사이에 하나가 되게 하는 끈이 있습니다. ‘평안의 매는 줄’은 ‘평안을 가져오는 줄’을 뜻합니다. 성경은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5~6) 라고 말합니다. 육신을 추구하는 자는 사망을 초래하지만 영을 따라 생각하고 살아가면 평안합니다. 영의 기능 가운데 하나는 착한 양심입니다. 성도 개개인이 착한 양심을 쓸 때 심령이 평안해지며 성도가 서로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골2:19).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각 성도들은 몸의 지체입니다. 몸이 머리의 지시를 받아서 움직이듯 성도들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뜻을 나타내며 살아야 합니다. 머리의 지시를 받지 않고 자신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간다면 결코 연합이 될 수 없습니다. 반신불수가 되고 맙니다. 성도들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머리이신 주님의 뜻을 잘 살필 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행21장 8절 이하에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중에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갔을 때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때 아가보라고 하는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신의 손과 발을 묶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11절) 그러자 바울과 함께 있던 사람들이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울면서 권하였습니다. 그들의 말에 바울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13절) 바울에게 간곡히 권했던 사람들의 말을 단호히 뿌리치고 바울은 기어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겠다고 말합니다. 바울과 만류하는 사람들 사이에 큰 언쟁이 있을 수 있었지만 그들은 언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태도에 대하여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그렇습니다. 바울의 뜻도, 가지 말라고 권하는 사람들의 뜻도 아니라, 오직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면 모든 것이 매듭지어집니다.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은, 다툼 끝의 화목은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할 때 이루어집니다. 교회에서나 집안에서나 교단에서나 분란이 일어나고 소란스럽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들의 뜻, 단체의 뜻을 이루려고 할 때 생깁니다. 하지만 자신의 뜻을 접고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가 됨은 서로 ‘먼저’가 될 때 이루어집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롬12:10). ‘서로’라는 것은 조화를 의미하며, 교통을 의미하며, 하나 됨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서로 먼저 해야 합니다. 우리는 상대가 먼저 하길 기다립니다. 사랑도 그가 먼저 하기를 바랍니다. 전화도 그가 먼저 하기를 바랍니다. 존경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면 결코 ‘서로’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모니’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자존심을 굽히고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하나가 됩니다. 어거스틴은 “본질적인 것은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은 자유함을,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본질적인 것은 예수님의 신성이나 인성, 구원론 등이 해당 되며, 비 본질적인 것은 각자의 은사적인 면이나 성경 해석상의 다양성 등을 의미합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은 온전하게 매는 띠입니다(골3:14). 하나 되게 하는 결정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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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15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압살롬의 기념비'
    “압살롬이 살았을 때에 자기를 위하여 한 비석을 가져 세웠으니 이는 저가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없음을 한탄함이라. 그러므로 자기 이름으로 그 비석을 이름하였으며 그 비석이 왕의 골짜기에 있고 이제까지 압살롬의 기념비라 일컫더라.”(삼하18:18) 인사유명(人死留名), 호사유피(虎死留皮)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몸과 머리털과 살갗은 부모님에게서 받았으니 감히 훼손하거나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요, 몸을 세워 도를 행하여서 후세에 이름을 드날려 부모님을 드러냄이 효의 끝”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입신양명(立身揚名)은 사람들의 심리 가운데 본능처럼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압살롬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은 그의 이름을 전할 아들이 없어 한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아들이 없어서 한탄한 것이 아니라, 부패한 자신의 이름을 전할 아들이 없음을 한탄한 것입니다. 원래는 아들 셋과 딸 한 명이 있었지만(삼하14:27), 아들들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기록한 비석을 세웠습니다. 3000여년이 지난 지금 그의 이름은 자신의 소원과는 달리 빛나는 이름이 아닌 가장 부끄러운 이름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는 자신의 명예를 위하고 기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결말은 결코 좋지 않게 나옵니다. 노아 홍수 이후에 사람들의 언어는 하나였습니다. 그들은 아라랏 산이 있는 아르메니아 지역에서 시날산으로 옮겨가고 있었습니다. 노아 후손들인 그들은 모두 친족이고 동족의식이 강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인구가 많아짐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흩어질 것을 염려하였습니다. 서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케 하자.”(창11:4). 땅 끝에서도 보일 수 있도록 하늘까지 닿는 대를 쌓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들 역시 하나님의 이름보다 자신의 이름 내기를 원하였고, 온 지면에 흩어져 생육하고 번성하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보다(창9:1), 자신들끼리 똘똘 뭉쳐 자신들의 뜻을 세우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뜻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끼리 지면으로 흩어졌고, 하늘 끝까지 쌓으려 했던 탑은 더 이상 오를 수 없었습니다. 그 탑의 이름은 바벨탑이었습니다. 바벨은 혼잡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명예영광심에 빠지면 그 이름은 무너지며 어려움이 반드시 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다스리도록 하기 위하여 사울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사울은 왕이 되기 전에는 겸손하였지만 왕이 된 후에는 태도가 180도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을 영화롭게 하고, 자신의 이름을 나타내는 일에 더 마음을 썼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이기게 해주셨는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 자신의 이름을 새기는 일에 마음을 썼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찌기 일어났더니 혹이 사무엘에게 고하여 가로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돌이켜 행하여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삼상15:12). 스스로 자기를 영화롭게 하기를 원하였던 사울은 전쟁에서 블레셋 군인에게 죽게 됩니다(삼상31:4~6). 하나님의 이름이 아닌 자신의 명예영광에 마음 쓰고 살아가면 그만큼 고난과 애통이 오게 됩니다. “그가 어떻게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난과 애통으로 갚아주라.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황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계18:7). 자기를 영화롭게 하는 마음, 명예영광심은 고난과 애통의 씨앗입니다. 작은 일에서부터 자신을 드러내고 나타내기를 좋아하는 마음, 칭찬 받기를 원하는 마음은 화를 불러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장 루시퍼를 영화롭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지위까지 넘보다가 그의 부하들과 함께 사탄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버릇은 사탄이 된 후에도 계속 되었습니다. 하와를 유혹할 때에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으면 하나님같이 된다.”는 말로 유혹하였습니다(창3:5). 이처럼 자신을 영화롭게 하려는 명예영광심은 사탄이 사람들에게 넣어주는 마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미혹되어 마귀의 꼭두각시놀음을 합니다. 심지어 세상에서 얻지 못한 명예영광을 교회에서 누려보려고 합니다. 바울은 사람들이 그를 보는 바와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봐 두려워하였습니다(고후12:6).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실제 모습보다 그 이상 되게 보이려고 얼마나 꾸미는지 모릅니다.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인생 최고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임을 다시 한 번 새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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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08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은혜의 말씀에 굳게 서자’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행20:32). 옥상에 고추모를 심고, 버팀대를 세우고 동여맸습니다. 이제 고춧대는 어지간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쓰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혹 고춧대가 쓰러지는 날이 있다면 버팀대가 쓰러지는 날일 것입니다. 고춧대와 버팀대는 이미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에게 버팀대는 말씀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든든히 세웁니다. 농작물에 바람이 불듯 성도들에게도 시험은 있기 마련입니다. 시험은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시는 것입니다(시139:23). 하나님은 우리를 알고 있지만 우리 자신이 우리를 너무 모르니 시험을 통하여 알리십니다. 시험이 올 때 결과는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시험을 통하여 버팀대를 굳게 잡고 세움을 입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둘째는 시험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는 사람입니다. 그토록 하나님을 사랑하던 솔로몬이 노년에 이방인 출신 왕비들에게 마음이 빼앗겼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신전을 세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지만 그가 돌이키지 않자 사방에 많은 대적들을 일으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솔로몬 자신이 키워낸 여로보암입니다. 배반을 심은 솔로몬이 배반의 열매를 먹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아히야를 통하여 이스라엘 열 두 지파 가운데 두 지파만 남기고 열 지파를 찢어 여로보암에게 줄 것을 약속하시며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깁니다. “내가 너를 취하리니 너는 무릇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다스려 이스라엘 위에 왕이 되되, 네가 만일 내가 명한 모든 일에 순종하고 내 길로 행하며 내 눈에 합당한 일을 하며 내 종 다윗의 행함 같이 내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가 다윗을 위하여 세운 것 같이 너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네게 주리라.”(왕상11:37~38). 하나님의 약속대로 그는 남북왕국 시대에 북 왕국 초대 왕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리라.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라.'(왕상12:26~27). 그는 처음 확실한 말씀 “네가 만일 내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가 다윗을 위하여 세운 것 같이 너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네게 주리라.”는 약속에 굳게 서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탄의 참소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금송아지를 세워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두었습니다. 그 결과 그 아들이 왕이 된 후 2년 만에 바아사에 의하여 왕위를 빼앗기고 죽임을 당합니다. 여로보암이 굳게 서지 못한 결과 그의 가정이 세움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바울이 죄수 아닌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에 압송을 당할 때 바울의 말보다 전문가의 말을 따른 백부장의 잘못된 판단으로 그들은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게 됩니다.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않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어 살아날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일 때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을 합니다.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다면 좋을 뻔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27:21~26 내용). 전혀 구원 받을 가능성이 없는 상태에서 받은 말씀이지만 바울은 굳게 믿었습니다. 버팀목인 말씀으로 일어났고 함께 승선한 사람들을 일으켰습니다. 해와 별이 보이지 않고 여전히 큰 풍랑이 일어도, 배의 기구를 버려서 키를 조정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도, 식량마저 모두 떨어지고 빈털터리가 되어도 전혀 요동이 없었습니다. 은혜의 버팀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276명의 탑승자들은 모두 무사하게 됩니다. 바울 한 사람이 말씀에 굳게 서자 남은 275명까지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행20:32).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주시는 약속입니다. 그 약속은 우리의 지주이며 버팀대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은혜의 말씀입니다. 은혜는 말씀을 굳게 믿고 그대로 순종하는 사람에게 임합니다. 말씀을 의지하고 든든히 선 사람은 어떤 풍파에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신 말씀이 우리를 붙드시기 때문입니다. 코로나라는 재앙에서 신앙인들은 조금도 흔들리지 말고 은혜의 말씀에 굳게 서서 마침내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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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28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예수님의 침묵’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마15:23). 본문은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담은 내용에 포함 된 말씀입니다. 이 여인은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하며 소리 질렀습니다. 여기 큰 소리란 절실함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단지 목소리만 크게 한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한 말씀도 대답지 않으십니다. 정말 대답이 없었을까요? 미국의 사회학자 앨버트 메리비언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이 상대와 얼굴을 보고 대화를 나눌 때 의사 결정에 영향을 주는 요소로 세 가지를 들었습니다. 첫 번째는 ‘말의 내용’으로 7%, 두 번째는 ‘목소리’로 38%, 세 번째는 ‘보디랭귀지’로 55%입니다. 즉 소통시 언어적인 요소는 7%이고 93%는 비언어적인 요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이 시사하는 바는 의사 결정에 있어서 표정과 태도 등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평소 사람의 의사 표시는 언어적인 요소보다 훨씬 더 비언어적인 요소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상대방의 말만 듣고 그 사람을 알려고 한다면 그야말로 센스 없고 눈치 없다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센스 있는 사람, 눈치 빠른 사람은 상대방이 말하지 않는 말을 다른 사람보다 훨씬 잘 듣는 사람입니다. 우리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응답하실 때도 있지만 때로는 이 가나안 여인에게 대하시는 것처럼 기도해도 침묵하실 때가 있습니다. 이 때 신앙인들은 주님께서 잠잠하신다고 해서 말씀이 없으신 것이 아니라, 침묵의 말씀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침묵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침묵하셨던 때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시므로”(삼상28:6b). 꿈은 사울에게 직접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의미이고, 우림은 제사장을 통해서도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뜻이며, 선지자는 글자 그대로 선지자를 통하여도 계시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사울의 응답에 침묵하신 것입니다. 왜 침묵하셨습니까? 그것은 사울이 먼저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삼상15:23b).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것이 하나님을 버리는 행위입니다. 말씀을 버린 것을 회개하고 돌이켰어야 하는데도, 그러지 않고 사울은 계속 말씀과 상반되는 행동을 합니다. 충신 다윗을 죽이기 위하여 일생을 허비합니다. 그런 사울에게 주님께서는 응답하시지 않은 것입니다. 회개를 독촉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인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8:4~5). 간교한 그들은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돌로 치라” 하시면 로마의 통치하에 피지배 국가들은 사형을 집행할 수 없기에 로마법에 저촉이 될 것이며, “돌로 치지 마라.” 한다면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침묵하시고 무엇인가 땅에 쓰시고 계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묻기를 마지않았습니다. 침묵을 깨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 이 말씀은 침묵의 말씀이 밖으로 표출 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잠잠하고 계실 때 ‘이 여인을 정죄 할 만큼 떳떳한 사람이 있느냐?’ 라는 말씀을 들어야 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직접 들은 그들은 자신들이 부끄러웠습니다. 은밀히 짓는 죄가 이 여인이 했던 것보다 더 많거나 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해도 예수님께서 침묵하시는 이유는 위의 두 사례와 같은 경우 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에게 인내를 요구하시거나,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요셉이 보디발 아내의 모함으로 무고히 옥에 갇혀 있을 때 술 맡은 관원의 꿈을 해석해주었습니다(창40:9~15). 그리고 그의 해석대로 술 맡은 관원이 석방된다면, 자신의 무고함을 풀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술 맡은 관원은 옥에서 풀려나자 요셉의 말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2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꾸고 다른 신하들이 해석을 못할 때, 비로소 바로의 술 맡은 관원은 요셉이 자신에게 베푼 꿈 해석이 생각났던 것입니다. 기다리다 지친 요셉이 더 이상 기대하지 않고 있을 때 간수로부터 소식이 전해 온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침묵은 인내하라는 말씀이거나 더 좋은 것을 위하여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환경은 하나님의 표정입니다. 사람의 말만 듣고 상대를 파악하려 한다면 자칫 오해를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환경을 통하여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하나님의 표정을 잘 읽어야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습니다. 비록 침묵 중일지라도 환경에 나타나는 주님의 표정에 귀 기울이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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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21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아히도벨과 후새’ (삼하17:1~23)
    다윗의 모사 중에는 아히도벨과 후새도 있었습니다. 아히도벨의 모략은 ‘하나님께 물어 받은 말씀과 일반이라.’(삼하16:23)고 할 만큼 뛰어났습니다. 반면 다윗의 친구 후새의 대하여는 어떠한 평이 없습니다. 압살롬이 반역을 하였을 때 아히도벨은 거기에 가담하였습니다. 짐작컨대 다윗이 아히도벨의 손녀 밧세바와 간음하고,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죽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일 이후 아히도벨은 다윗을 떠나 고향 길로에 머물렀습니다(삼하15:12). 이 모든 사실을 아는 압살롬이 아히도벨을 초청하여 의기투합한 것입니다.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말하였습니다. “이제 나로 하여금 사람 일만 이천을 택하게 하소서. 오늘 밤에 내가 일어나서 다윗의 뒤를 따라 저가 곤하고 약할 때에 엄습하여 저를 무섭게 한즉 저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이 도망할 것입니다. 내가 다윗 왕만 쳐 죽이고 모든 백성으로 왕께 돌아오게 하리니 무리의 돌아오기는 왕의 찾는 이 사람에게 달렸음이라. 그리하면 모든 백성이 평안하리이다.”(삼하17:1~2 내용). 압살롬은 다윗이 심어둔 첩자 후새에게도 말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상황은 매우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아히도벨의 말대로 다윗은 지쳐 있었고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요단을 아직 건너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만일 후새의 모략으로 아히도벨의 모략을 파하지 못한다면 아히도벨은 부하 12,000명과 함께 다윗의 목을 칠 기세였습니다. 이 순간 후새는 아히도벨의 모략보다 나아보이면서도 압살롬으로 하여금 치명타를 입힐 전술을 꾸며야 합니다. “이때만큼은 아히도벨의 모략이 좋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은 모두 용사들로서, 마치 새끼를 빼앗긴 야생 곰처럼 격분하였고, 왕의 부친은 병법에 익은 사람인즉 백성과 함께 자지 아니하고 숨어 있다가 무리 가운데 몇 명만 기습 공격하여 죽이면 사자처럼 용맹스러운 군사들도 겁에 질려버릴 것입니다.” 순간 압살롬과 무리들은 쥐죽은 듯 조용했을 것입니다. 계속해서 후새는 말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므로 저의 의견은 이렇습니다. 먼저 온 이스라엘 군사들을 불러 모으십시오. 그런 후에 해변의 모래알처럼 많은 군대를 이끌고 왕께서 친히 싸우러 나가십시오. 다윗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공격하여 온 대지에 내리는 아침 이슬처럼, 그를 덮쳐버리는 것입니다. 만일 저가 어느 성에 들었으면 온 이스라엘이 밧줄을 가져다가 그 성을 동여맨 후 끌어서 골짜기에 내동댕이쳐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읍이 서있던 그곳에는 돌멩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게 될 것입니다.”(삼하17:11~13, 쉬운말성경 요약). 후새의 모략에는 다음과 같은 허점이 있습니다. 그들이 온 이스라엘에서 군인을 모집할 동안 다윗으로 하여금 안전한 곳으로 피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점과, 둘째 다윗의 군사들이 주둔하는 성을 밧줄로 동여매기도 어렵거니와 그것을 끌어다가 골짜기에 내동댕이치기 전에 밧줄이 끊어질 수도 있고, 그들이 밧줄을 당길 동안 다윗의 군사들은 화살이나 창을 사용하여 공격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적처럼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후새의 모략을 택합니다. 이렇게 된 것은 순전히 다윗의 기도 때문입니다. “혹이 다윗에게 고하되 압살롬과 함께 모반한 자들 가운데 아히도벨이 있나이다. 하니 다윗이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삼하15:31).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간단한 기도 같지만 그 기도에는 엄청난 힘이 있었습니다. 그가 물매로 골리앗을 쓰러뜨리듯, 허점투성이 후새의 모략으로 완벽에 가까운 아히도벨의 모략을 깨뜨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의 기도드리는 습관 가운데 하나는 “마귀의 권세와 궤휼을 눌러 주시옵소서.” 입니다. 왜냐하면 압살롬을 위한 아히도벨의 모략처럼 곳곳에 마귀의 속임수가 있다는 것을 체감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생각을 통하여 때로는 친절한 척, 지혜로운 척, 가장 선한 모습으로 가장하고 저를 유혹합니다. 주님이 깨닫게 하지 않는다면 도저히 알아차릴 수 없는 모습입니다. 그들의 간계를 조금이나마 알기에 주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앙인들 가운데는 “마귀”라는 말을 입에 담기조차 싫어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이미 다 이기셨는데 마귀는 무슨 마귀냐고 묻습니다. 그것은 마귀가 가장 좋아하는 모습입니다. 마치 사자가 두루 다니며 삼킬 양들을 찾아다니지만 양들은 사자라는 존재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인들이 알아야 할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로 승리한 것이지 마귀 자체를 없앤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승리함으로서 마귀 권세를 깨뜨렸습니다. 신앙인들이 사탄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대적하는 한 어떤 사탄도 신자들을 괴롭힐 수 없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눅10:19). 사탄은 예수님이 그들의 권세를 깨뜨렸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난 날 자신의 종이었던 신자들을 지금도 주인인 양 속이고 있습니다. 어찌나 교묘히 속이던지 사탄의 음성인지 성령의 음성인지 모를 정도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사람의 일로 파고들기 때문입니다(마16:23). 사탄이 신앙인들을 계속 속인다면 예수님이 십자가로 그들의 권세를 깨뜨리기 전과 무엇이 다르냐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네, 완전히 다른 세계입니다. 이전에는 신앙인들이 사탄에 대하여 무방비 상태였지만 이젠 사탄을 사탄으로 인식하고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대적하는 순간 그들은 더 이상 속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앙인들이 “마귀의 권세와 궤휼을 눌러 주세요.” 라고 기도드리는 것은 보이지 않는 그들의 속임을 주님께서 막아주시고, 또한 사람의 일로 파고드는 그들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게 해달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대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적을 모른다면 아무리 좋은 무기도 사용할 수 없듯 사탄의 정체를 모른다면 그들을 대적하는데 있어서 전능한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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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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