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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아히도벨과 후새’ (삼하17:1~23)
    다윗의 모사 중에는 아히도벨과 후새도 있었습니다. 아히도벨의 모략은 ‘하나님께 물어 받은 말씀과 일반이라.’(삼하16:23)고 할 만큼 뛰어났습니다. 반면 다윗의 친구 후새의 대하여는 어떠한 평이 없습니다. 압살롬이 반역을 하였을 때 아히도벨은 거기에 가담하였습니다. 짐작컨대 다윗이 아히도벨의 손녀 밧세바와 간음하고,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죽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일 이후 아히도벨은 다윗을 떠나 고향 길로에 머물렀습니다(삼하15:12). 이 모든 사실을 아는 압살롬이 아히도벨을 초청하여 의기투합한 것입니다.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말하였습니다. “이제 나로 하여금 사람 일만 이천을 택하게 하소서. 오늘 밤에 내가 일어나서 다윗의 뒤를 따라 저가 곤하고 약할 때에 엄습하여 저를 무섭게 한즉 저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이 도망할 것입니다. 내가 다윗 왕만 쳐 죽이고 모든 백성으로 왕께 돌아오게 하리니 무리의 돌아오기는 왕의 찾는 이 사람에게 달렸음이라. 그리하면 모든 백성이 평안하리이다.”(삼하17:1~2 내용). 압살롬은 다윗이 심어둔 첩자 후새에게도 말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상황은 매우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아히도벨의 말대로 다윗은 지쳐 있었고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요단을 아직 건너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만일 후새의 모략으로 아히도벨의 모략을 파하지 못한다면 아히도벨은 부하 12,000명과 함께 다윗의 목을 칠 기세였습니다. 이 순간 후새는 아히도벨의 모략보다 나아보이면서도 압살롬으로 하여금 치명타를 입힐 전술을 꾸며야 합니다. “이때만큼은 아히도벨의 모략이 좋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은 모두 용사들로서, 마치 새끼를 빼앗긴 야생 곰처럼 격분하였고, 왕의 부친은 병법에 익은 사람인즉 백성과 함께 자지 아니하고 숨어 있다가 무리 가운데 몇 명만 기습 공격하여 죽이면 사자처럼 용맹스러운 군사들도 겁에 질려버릴 것입니다.” 순간 압살롬과 무리들은 쥐죽은 듯 조용했을 것입니다. 계속해서 후새는 말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므로 저의 의견은 이렇습니다. 먼저 온 이스라엘 군사들을 불러 모으십시오. 그런 후에 해변의 모래알처럼 많은 군대를 이끌고 왕께서 친히 싸우러 나가십시오. 다윗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공격하여 온 대지에 내리는 아침 이슬처럼, 그를 덮쳐버리는 것입니다. 만일 저가 어느 성에 들었으면 온 이스라엘이 밧줄을 가져다가 그 성을 동여맨 후 끌어서 골짜기에 내동댕이쳐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읍이 서있던 그곳에는 돌멩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게 될 것입니다.”(삼하17:11~13, 쉬운말성경 요약). 후새의 모략에는 다음과 같은 허점이 있습니다. 그들이 온 이스라엘에서 군인을 모집할 동안 다윗으로 하여금 안전한 곳으로 피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점과, 둘째 다윗의 군사들이 주둔하는 성을 밧줄로 동여매기도 어렵거니와 그것을 끌어다가 골짜기에 내동댕이치기 전에 밧줄이 끊어질 수도 있고, 그들이 밧줄을 당길 동안 다윗의 군사들은 화살이나 창을 사용하여 공격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적처럼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후새의 모략을 택합니다. 이렇게 된 것은 순전히 다윗의 기도 때문입니다. “혹이 다윗에게 고하되 압살롬과 함께 모반한 자들 가운데 아히도벨이 있나이다. 하니 다윗이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삼하15:31).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간단한 기도 같지만 그 기도에는 엄청난 힘이 있었습니다. 그가 물매로 골리앗을 쓰러뜨리듯, 허점투성이 후새의 모략으로 완벽에 가까운 아히도벨의 모략을 깨뜨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의 기도드리는 습관 가운데 하나는 “마귀의 권세와 궤휼을 눌러 주시옵소서.” 입니다. 왜냐하면 압살롬을 위한 아히도벨의 모략처럼 곳곳에 마귀의 속임수가 있다는 것을 체감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생각을 통하여 때로는 친절한 척, 지혜로운 척, 가장 선한 모습으로 가장하고 저를 유혹합니다. 주님이 깨닫게 하지 않는다면 도저히 알아차릴 수 없는 모습입니다. 그들의 간계를 조금이나마 알기에 주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앙인들 가운데는 “마귀”라는 말을 입에 담기조차 싫어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이미 다 이기셨는데 마귀는 무슨 마귀냐고 묻습니다. 그것은 마귀가 가장 좋아하는 모습입니다. 마치 사자가 두루 다니며 삼킬 양들을 찾아다니지만 양들은 사자라는 존재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인들이 알아야 할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로 승리한 것이지 마귀 자체를 없앤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승리함으로서 마귀 권세를 깨뜨렸습니다. 신앙인들이 사탄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대적하는 한 어떤 사탄도 신자들을 괴롭힐 수 없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눅10:19). 사탄은 예수님이 그들의 권세를 깨뜨렸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난 날 자신의 종이었던 신자들을 지금도 주인인 양 속이고 있습니다. 어찌나 교묘히 속이던지 사탄의 음성인지 성령의 음성인지 모를 정도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사람의 일로 파고들기 때문입니다(마16:23). 사탄이 신앙인들을 계속 속인다면 예수님이 십자가로 그들의 권세를 깨뜨리기 전과 무엇이 다르냐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네, 완전히 다른 세계입니다. 이전에는 신앙인들이 사탄에 대하여 무방비 상태였지만 이젠 사탄을 사탄으로 인식하고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대적하는 순간 그들은 더 이상 속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앙인들이 “마귀의 권세와 궤휼을 눌러 주세요.” 라고 기도드리는 것은 보이지 않는 그들의 속임을 주님께서 막아주시고, 또한 사람의 일로 파고드는 그들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게 해달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대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적을 모른다면 아무리 좋은 무기도 사용할 수 없듯 사탄의 정체를 모른다면 그들을 대적하는데 있어서 전능한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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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13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한 사람’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렘5:1) 성경에서는 한 사람이 의미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한 사람으로 인하여 전체가 살기도 하고, 망하기도 합니다. 아담 안에 있는 사람은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하여 죽었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 한 분으로 인하여 영원한 생명을 받았습니다(고전15:22). 요셉 한 사람으로 인하여 7년 흉년 때 애굽 백성이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고 이스라엘과 그 후손들도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한 사람 때문에 공동체가 낭패를 본 일도 있습니다. 죄를 범한 아간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이라는 작은 성에서 패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다윗왕의 잘못 된 인구조사로 인하여 이스라엘 7만명이 죽은 일,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요나로 인하여 그가 탄 배가 파선 될 뻔 한 일, 백부장의 잘못 된 판단으로 바울과 함께 276명이 탄 배가 유라굴로 광풍을 만난 일 등(행27:37) 찾아보면 참으로 많습니다. 이처럼 한 사람의 행동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면 그 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어야 합니까? 본문에서는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성은 그 한 사람이 없어서 멸망당하였습니다. 바벨론에 의하여 짓밟혔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였습니다. 그곳에 성전이 있고, 하나님을 잘 섬기는 제사장들과 대제사장이 있는 곳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이 없어서 멸망당한 것입니다. 공의란 하나님께나 사람에게나 자신에게나 정의로운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를 구하는 일이란 예수님을 찾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찾는 것은 의를 추구하는 행위입니다. “의를 좇으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는 나를 들을지어다.”(사51:1). 하나님께서 옳게 여기시는 것을 찾아 구하는 생활이 진리를 찾는 행동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 합당하게 행동할까?’ 하는 행동입니다. 겔22:30이하는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 한고로 내가 내 분으로 그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라고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직접 행하면서 기도하는 사람을 찾다가 찾지 못하여 성을 멸하였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 한 사람은 자신이 기도하며 행하는 사람입니다. 거룩의 성을 쌓으며 멸하지 못하게 하도록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모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시내산에 있는 동안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을 반역한 사람들을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출32:9~10) 그러자 모세가 대답합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 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출32:11~12). 모세의 이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자칫 진멸당할 뻔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멸망당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금도 이 땅에는 모세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자신이 거룩의 성을 쌓으면서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거룩의 성을 쌓지 않으면서 기도만 한다면 온전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기도하고 그 기도한 바를 행하기 위하여 애를 쓰는 사람의 음성을 주님께서 응답해주십니다. ‘한 사람만 있으면 되니 나 하나쯤이야 뭐 대충 믿어도 돼.’ 그것은 참으로 위험한 생각입니다. 믿는 사람 모두는 각기 자신의 위치에서 그 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그가 탄 배에서 한 사람이었고,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한 사람이었듯이, 성도 개개인은 가정에서 한 사람이고, 직장에서 한 사람이며, 그가 맡고 있는 팀에서 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기생 라합이 하나님께 합당한 행동을 함으로 말미암아 그와 그의 집이 모두 구원을 받았듯이, 사도행전 16장의 간수 한 사람이 돌이킴으로 그의 온 집이 구원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미는 조직마다 구성마다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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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30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영적인 성장’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19:30). 정확한 나이는 기억할 수 없지만 이십 대 중반에 왼손을 사용하면 우뇌가 발달한다는 글을 읽고 왼손으로 젓가락질하고, 왼손으로 글자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젓가락질의 경우 비교적 쉽게 읽히고 숙달 될 수 있었지만 왼손으로 글자를 쓰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글자가 아니라 지렁이 꿈틀거리며 갯벌 진흙탕 위를 지나간 흔적처럼 보였습니다. 그나마 꾸준히 연습했다면 다소 발전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중도에 포기하다가 생각나면 다시 시작하는 정도였습니다. 시작한 지 이십 년도 훌쩍 지난 지금 가끔씩은 연습한 것이 있어 이 정도면 초등학교 오학년 수준은 되리라 생각하고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오학년 수준은 못 되고 4학년 수준이라고 합니다. 제 오른 손 필체는 비록 졸필이긴 하지만 그래도 십대 후반에 나만의 필체가 완료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왼 손 글씨는 시작한 지 이십 년 도 넘었지만 아직도 손에 힘이 없고 어색하고 느리고 제대로 된 모양이 안 나오는지 답은 뻔합니다. 그것은 동기부여가 절실하지 못했고, 꾸준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시작이 오래 되었다고 해서 무조건 잘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모태신앙이라고 해도 자신이 믿음에 힘을 쓰지 않는다면 신앙의 오랜 연조가 영적인 성장을 담보하지 못합니다. 삼십 년 사십년 지났다 한들 성령을 따라 살아가지 아니하고 여전히 육신대로 살아간다면 영적인 어린 아이 신앙일 뿐입니다. 수염 난 아이, 연세 많은 아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믿겠거니’한다면 그야말로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기를 원하고 매일 매일 갈급한 심령으로 믿음과 착한 양심을 따라 말씀에 착념치 않는다면 자신도 모르게 퇴보하고 맙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오래 되지 않았어도 한 말씀이라도 듣고 순종할 정신을 가진다면 이 사람의 신앙은 달려가게 될 것입니다. 육신의 성장은 십대 이십대가 지나면 멈추게 되지만 영적인 성장은 멈추지 않고 힘을 쓴 만큼 자라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바울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 기독교인들을 제일 박해한 사람입니다. 심성으로는 신앙인 남녀를 불문하고 옥에 가두거나 죽이는데 가편 투표를 할 만큼 잔인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메섹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후로 그의 삶은 180도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 열심을 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예수님의 제자 중 가장 신망이 두터웠던 베드로나 요한과 같은 반열에 들어가게 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19:30). 먼저 된 자라고 생각하십니까? 주님의 뜻대로 살기를 소원하고 그것을 위하여 힘쓰지 않는다면 퇴보하고 있는 것입니다. 늦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부터 시작하십시오. 주님은 당신을 불쌍히 여기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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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23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시험 가운데 또 다른 시험’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5:6).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난을 피하여 바후림에 도착했을 때였습니다. 설상가상 사울의 집안 시므이라는 사람이 독한 말로 다윗을 저주하기 시작합니다.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가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 대신에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너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붙이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인고로 화를 자취하였느니라.”(삼하16:8). 시므이의 이 말은 다윗과 전혀 상관없는 말이었습니다. 비록 다윗이 충성된 신하 우리아를 죽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말한 사울 왕과 그 집안에 대해서는 최고의 예우를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사울 왕과 그 아들 요나단이 블레셋과 싸우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옷을 잡아 찢었으며, 저녁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였습니다. 또한 그들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조상하였습니다. 요압이 사울의 군대장관 아브넬을 죽였을 때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윗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금식하다가 석양에 여러 백성이 나와서 다윗에게 음식을 권하였을 때 “내가 해 지기 전에 떡이나 다른 것을 맛보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삼하3:35)라고 함으로써 그의 눈물과 금식이 진실 된 것임을 입증하였습니다. 하루는 사울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이스보셋의 군대 장관 레갑과 바아나가 다윗이 기뻐할 줄 알고 그의 목을 베어 다윗에게 왔습니다. 다윗은 그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부하들을 명하여 암살자들을 처형하도록 명하였습니다(삼하4:12). 왕조가 바뀌면 이 전 왕족들은 역적으로 몰려 처형되기 쉬웠지만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결백한 다윗에게 시므이의 저주는 엉뚱한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내가 아들에게 이렇게 당하니, 이젠 멸망한 사울의 족속까지 나를 무시하는 구나’ 생각하며 아비새가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컨대 나로 건너가서 저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라고 말하였을 때 그렇게 하도록 명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시므이를 시므이로 보지 않았습니다. 악인으로 가장한 하나님의 종으로 보았습니다.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삼하16:10~14). 다윗의 이 말대로 다윗은 압살롬으로부터 어려움을 겪은 후 다시 왕의 지위를 회복하게 됩니다. 이처럼 시험 중에 있는 또 다른 시험은 설상가상이 아니라 흑암 중에 빛이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얻을 기회입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 철저히 하나님께 여쭙고 응답 받아 행하였던 그였지만 계속된 사울의 추적에 피곤한 나머지 잠시 믿음이 떨어진 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상책을 좇아 블레셋으로 피하였습니다(삼상27:1). 블레셋 왕은 시글락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하루는 블레셋 왕이 그들이 이스라엘을 치는 날 다윗과 그의 부하들도 동참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블레셋 방백들의 반대로 다윗 일행은 그들의 거처 시글락으로 삼일 만에 돌아옵니다. 와서 보니 아말렉 사람들이 그곳을 침입하여 다윗과 그와 함께한 백성들의 아내와 자녀들을 사로잡아갔고 시글락은 불태웠습니다. 다윗의 부하들은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고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위급해진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하여 “블레셋을 추격하면 다시 찾으리라.”는 응답을 받고 용기를 내어 400명의 부하들과 함께 찾으러 나섰습니다. 가는 도중 들에 있는 애굽인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자신의 코가 석자인 다윗의 부하들은 다른 사람을 돌볼 틈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흘을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애굽인을 다윗에게 데려갔습니다. 다윗은 그에게 떡과 물과 무화과와 건포도 두 송이를 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시글락을 불태우고 다윗과 그 일행의 가족들을 모두 사로잡아간 아말렉 사람의 종이었습니다. 애굽인 그가 병들자 주인이 그를 버린 것입니다. 그 애굽인은 다윗 일행을 아말렉 사람에게 인도하였고 다윗 일행은 아말렉과 싸워 사로잡힌 사람들은 물론 다른 모든 것들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과 그 부하들이 자신의 처지로 인하여 다른 사람을 돌볼 틈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애굽인에게 긍휼을 베푼 결과 그들 역시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삼상30:18). 거의 모든 소유물과 자녀마저 잃고 온 몸이 악창으로 덮인 욥을 더욱 힘들게 한 것은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욥을 위로하기 위하여 왔지만 욥이 자신을 변호하자 욥과 상관없는 말들로 그를 비난하였습니다. 그래서 욥은 그들을 “번뇌케 하는 안위자라.”고 하였습니다(욥16:2). 욥에게 찾아온 시험 못지않게 그를 괴롭힌 것은 친구들의 근거 없는 말이었습니다. 그러한 시험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만나주셨습니다. 욥은 비록 친구일망정 자신과 상관없는 말을 하는 그들이 괘씸하여 하나님께 벌주시기를 요구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벗들을 저주하는 대신 위하여 복을 빌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이전 소유보다 갑절을 주십니다(욥42:10).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시험가운데 있는 백성들에게 시험에서 벗어나게 하도록 종을 보내십니다. 다윗에게는 병든 애굽 사람과 시므이가 될 것이며, 욥에게는 벗들일 것입니다. 천사의 모습으로 온다면 기쁘게 영접할 수 있겠지만 때론 병든 자로, 때론 악인의 모습으로 옵니다. 이럴 때 우리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그들로 인하여 더욱 시험에 빠져들거나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복을 빌어주는 일입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복을 빌어줄 때,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은 우리들도 시험에서 나오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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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16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무리가 옹위하여 미나이다.”(눅8:45).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병을 앓아 온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기 병을 고치기 위하여 의사들에게 모든 재산을 썼지만, 아무도 그 여인의 병을 고쳐주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실 때, 이 여자가 사람들을 비집고 예수님의 뒤로 다가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그 순간 하혈이 뚝 그쳤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누가 내 옷을 만졌느냐?” 물으셨습니다.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자 베드로가 말하였습니다. “주여, 무리가 옹위하여 미나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다. 누군가 분명 내게 손을 댔다. 내게서 능력이 빠져나간 것을 내가 안다.” 그 여자는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두려워 떨면서 예수님 앞에 나아가 엎드렸습니다. 그런 뒤, 자신이 예수님의 옷을 만진 이유와 병이 즉시 나은 사실을 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만원버스나 만원지하철처럼 수많은 인파가 예수님께 몰려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몸에 자신의 몸이 닿아 체온을 느낀 사람도 있었을 것이며, 예수님의 소매가 자신의 옷에 닿은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호흡을 느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저런 사람들 모두 개인의 문제든, 가정의 문제든 문제들을 안고 온 사람들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 모두의 문제가 치료 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만진 사람은 부정한 여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대지 못하고 다만 그의 옷자락에만 손을 댄 혈루 병에 걸린 여인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주님을 만진 사람으로 인정했습니다. 오늘날 신앙인들은 성경은 물론 수많은 신앙 서적을 읽고 교회에서 혹은 인터넷을 통하여 말씀을 듣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무리들이 주님을 옹위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수많은 말씀이 우리를 옹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말씀이신 주님을 만진 것은 아닙니다. 혈루병에 걸렸던 여인이 주님을 만져 그의 병이 나았던 것처럼 우리가 참으로 주님을 만진다면 실제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의 영적인 병, 환경적인 병 때로는 육적인 병까지 치료됩니다. 많은 성도들이 말씀을 듣고 보면서도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만지지 못합니다. 주님을 만지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며, 주님을 만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요한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라고 말합니다(요일1:1). 만졌다는 것은 주님이심을 직접 목격한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은 고기를 잡으러 갈릴리 바다에 갔습니다. 그 밤에 제자들은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누구신지도 모르는 사람이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라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듣고 던져보니 그물을 들을 수 없을 만큼 고기가 많았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능숙한 어부쯤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요한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시라!”(요21:7). 다른 제자들은 주님이심을 미처 몰랐지만 이 순간 요한은 주님을 듣고 보고 만진 것입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러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베드로 역시 예수님을 엘리야나 예레미야나 선지자 정도로 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본 것입니다. 베드로 역시 주님을 주님으로 만진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말씀과 나타나는 일들을 통하여 중심에서 “주님이시다.”라고 외칠 수 있다면 주님을 만지고 목격하는 사람이 됩니다. 하지만 우연히 된 일로 생각한다면, 누구 때문에 벌어졌다고 생각한다면 수많은 말씀들이 우리를 옹위해도 주님을 만지지 못하고 문제는 치유되지 못합니다. 여인이 어떻게 주님을 만질 수 있었을까요? 여인이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것은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는 믿음 때문입니다(막5:28). 이 믿음은 자신이 강할 때가 아니라 약할 때 생겼습니다. 낫기 위하여 많은 의원들을 의지하였지만 더 괴롭게 되자 할 수 없이 주님만 소망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을 만지려면 ‘내가 그의 옷에만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나 말씀을 들을 때 “제게 한 말씀 주시옵소서. 주님의 말씀만 받으면 이 문제가 해결 될 줄 믿습니다.”하면서 말씀을 통하여 주님을 만나기를 고대하며 들을 때 주님을 만나게 되고, 주님을 만나게 되면 문제들이 치료될 뿐 아니라 바울처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는 해석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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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11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지금, 나 때문에 주님이 당하는 고통’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4:30). 어떤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가 그의 어머니 보는데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얘야, 왜 우느냐?” 그러자 아들이 대답하였습니다. “어머니께서 저를 잉태하신 후 열 달 동안 무거운 몸으로 다니시고, 제가 태어날 때 당하셨을 고통을 생각하니 너무 슬퍼서 웁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기뻐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나의 산고를 생각해주니 고맙구나. 그런데 그 산고의 결과로 아들이 세상에 나왔으니 그 고통은 잊어버린 지 오래구나. 지금 내가 아파하는 것은 그 때의 고통이 아니라 지금 너의 행동 때문이란다.” ‘고난주간’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하신 고통과 십자가의 죽음을 묵상하고, 죄악의 참혹함과 주님의 사랑을 깨달아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기념은 언제까지나 지속 되어야 할 의미 깊은 행사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 도다.”(골1:6).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열매를 맺어 자라가게 됩니다. 열매는 성령의 열매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또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과거에 주님이 겪은 고통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때 흐르는 보혈은 지금도, 미래도 영원토록 흐르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지만, 순전히 고통 차원에서만 살펴본다면 주님의 지나간 아픔입니다. 우리는 그 아픔 못지않게 지금 주님이 우리로 인하여 당하시는 아픔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과거의 아픔보다도 오늘날 주님의 아픔을 더욱 체감하고, 주님을 아프게 하는 사람이 우리 자신은 아닌지 살펴서 회개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번 고난주간 말씀은 지금 내가 주님을 아파하게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전후 맥락을 살펴볼 때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것은 더러운 말을 할 때입니다(엡4: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흔히 더러운 말은 욕이나 성적인 농담 같은 것을 말합니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말들을 삼가야 합니다. 성경은 계속 말합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31절). 특히 훼방하는 말은 자신에 대한 의가 가득한 사람 가운데 나오기 쉽습니다. 이처럼 더러운 말이 입으로 쏟아질 때 우리는 자기의 교만함에 놀라고 성령이 근심하는 것에 대하여 아파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생각과 계획대로 살아가는 성도들을 보고 한탄하십니다(창6:5). 창6:5을 근거로 볼 때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과 계획은 항상 악합니다. 그러니까 악은 자신의 생각과 계획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한탄하시는 고통을 안겨드릴 때는 우리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생각을 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계획대로 살아갈 때입니다. 노아 시대에 인류가 홍수로 인하여 멸망당한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자기 임의대로 살아가는 사람 때문에 주님은 고통스러워하십니다. 사도바울은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심이니라.”(롬8:26)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성령이 큰 탄식을 하고 계십니다. 연약한 자는 잘 넘어집니다. 물론 거듭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라면 주님께서 이해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키와 나이로는 어른인데 여전히 장난감이나 가지고 놀며, 사탕이나 입에 물고 다닌다면 부모님의 근심거리가 되듯, 믿은 지 오래 되었지만 여전히 육신에 속한 어린 아이, 세상에 속한 어린 아이라면 성령이 말할 수 없이 탄식하게 됩니다. 저는 매일 저로 인하여 탄식하시는 성령님을 깨닫습니다. 그만큼 제 자신이 하루에도 수 없이 넘어질 만큼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다윗 같은 분도 “밤마다 내 심장이 나를 교훈하도다.”(시16:7)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의 착한 양심을 통하여 밤마다 훈계하시고 때론 탄식하시는 분이 성령님입니다. 이 소리를 듣고 정신 차려서 성령님을 아프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신자들이 성질을 내는 것은 주님을 무력으로 밀치는 행동입니다. 김현봉 목사님은 생전에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다고 합니다. “신자들이 발끈하고 화를 내는 것은 예수님을 개천에 처박는 행동이다.” 처음에 저는 그것이 무슨 말씀인지 이해를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자라면서 제 자신이 화를 낼 때 영안이 캄캄해지는 것을 보고 그 말씀의 참 뜻을 다소나마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가장 아프게 하는 것은 주님을 배반할 때입니다.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6:4~6). 예수님을 현저히 십자가에 못 박는 행동은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고도 타락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내가 회개해도 용서 받지 못한다면 어떡하지?’라고 걱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필요한 걱정입니다. 회개케 할 수 없다는 것은 회개할 생각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미 회개할 마음이 있는 사람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회개하는 사람에게 주님의 보혈로 씻음 받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고난주간 우리는 2000여 년 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의 고통을 묵상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는 사람이 현재 주님을 괴롭게 한다면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의 생각 때문에, 우리의 분 냄 때문에,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의 배반 때문에 주님이 괴로워하시지는 않는지 잘 살펴 회개할 기회로 삼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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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31
  • [WAIC 목회레슨] 박조준 목사의 ‘독립교회의 의미’
    한국에서 독립교회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것은 35년이 되었다. ‘국제독립교회연합회(WAIC)’는 교회의 순수성을 지켜나가기 위해 세워졌다. 우리는 다른 그 어떤 지배도 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지배만을 받는다. 단 우리 연합회는 회원교회를 돕는 일만을 한다. 우리의 개혁은 매일 매일 일어나야 한다. 바울도 그것을 고백하고 있다. 이 개혁은 곧 우리의 경건의 연습이다. 우리의 경건의 연습은 쉼 없이 계속되어야 한다. 히브리서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흘러 떠내려 갈 것을 조심하라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바른 의식과 정신으로 끊임없이 개혁하며, 경건의 연습을 하며 바른 교회를 세워나가도록 해야 한다. 이 시대 교회의 흐름이 어떠하든 생명 있는 교회는 그 세상의 물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교회이다. 생명 있는 물고기는 반드시 물살을 거슬러 올라간다. 물살에 쓸려 내려가는 물고기는 죽은 물고기다. 독립교회는 목사 중심의 교회이어야 한다. 그러하면 목사만 바로 서면 그 교회는 건강하게 잘 갈 수 있다. 장로교회 체제의 약점은 목사가 아무리 바른 사고와 판단과 분별을 가지고 있다 해도 장로들의 반대에 부딪히면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는 상황이 종종 벌어진다. 이것을 독립교회는 보완하여 가는 교회이어야 한다. 따라서 목사만 바로 서서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교회를 섬긴다면 모든 것이 바르게 그리고 빠르게 진행 될 수 있다. 반면 그만큼 독립교회의 목사는 다른 그 어떤 교회보다 더 큰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바른 목사의 삶을 통해서 샘물이 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우리 국제독립교회연합회의 정신이다. 목사 영어로 목사를 ‘minister’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minister’는 ‘봉사자’라는 말이다. 반면에 ‘Pastor’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여기서 ‘Pastor’는 ‘목자’라는 뜻이다. 즉 목사는 목자로서 봉사자이다. 목자는 양을 치는 사람이다. 예수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내 양을 치라’라고 말씀하셨다. 양을 치는 목자는 자나 깨나 양들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한 것이 마땅하다. 목사는 항상 모든 성도들을 책임지는 사명을 받았음을 알고 있어야한다. 목사는 성도들에게 짐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목사의 급여를 성도들이 감당하지 못할 때는 목사가 별도의 직업을 통해서라도 충당하여 성도들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때는 바울의 Tent Making사역이 필요한 순간이다. 개척교회는 목사에게 충분한 급여를 주지 못할 수 있다. 이때에 그 급여가 성도들에게 부담이 되고 짐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도들에게는 목사를 최선을 다해 섬기려는 아름다운 마음들이 있다. 그런데 그 성도들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목사는 늘 성도들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 세상은 돈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세상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 말씀을 믿어야 하고, 또한 우리는 이 말씀을 성도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말씀이 실제 되는 것을 성도들에게 삶으로 증거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족하기를 위해 힘썼다고 했다. 목사는 자족하기를 힘써야 한다. 우리는 자족할 수 있는 훈련을 해야 한다. 이 땅에서 하늘을 바라다보면 가끔은 먹구름이 가득한 것을 본다. 그리고 때로는 그 검은 먹구름이 두렵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아올라 그 구름을 내려 보면 그저 아름답게 보인다. 우리는 고난 속에서 비상하여 고난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여호수아의 ‘아이’성 점령실패는 교만에 있었다. 기도하지 않았고, 하나님께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다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를 도와서 결국 ‘아이’성을 점령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실패하게 내버려 두시는 경우가 있기는 해도 우리를 버리지는 않으신다. 그래서 우리가 실패했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고 무릎 꿇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고 결국 승리하게 하신다. 다윗도 ‘밧세바’사건을 통해서 실패를 경험했다. 그러나 그가 회개하므로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받은 각자의 은사가 있다. 그런데 이 은사의 크고 작음과, 많고 적음은 하나님 앞에서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청지기이다. 맡은 사람이다. 맡은 사람은 충성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정직해야 한다. ‘Pastor’는 ‘목자’이다. ‘목자’의 가장 주된 사역은 양을 치는 것이다. 영의 양식을 먹이는 것을 말한다. 목사는 이 영의 양식을 양들에게 먹이는 것이 즉 설교하는 것이 행복하고, 재미있어야 한다. 성도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은 아비의 마음, 어미의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 즉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얻어서 그 마음으로 성도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자녀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은 자녀들의 어떠한 외적 조건과 상관없이 동일한 동등한 사랑의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다. 또한 진정한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늘 매사에 본이 되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그와 같이 우리의 삶의 작은 부분까지 늘 조심하여 성도들에게 본이 되도록 하고 덕을 쌓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솔선수범해야 한다. 목자는 앞서 가야 한다. 양들은 목자를 따라 간다. 우리는 늘 모든 일에 앞장서고 본이 되어야 한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 같이 너희도 나를 본 받아라’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목사의 언행일치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래야 권위가 있다. 우리는 우리가 맡은 일에 대해서 100%, 즉 주어진 만큼의 책임을 최선을 다해 감당하는 것이 중요하다. 120%하려고 하지 마라. 그것은 교만이다. 우리는 120%하는 것이 불가능한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목회자는 바른 의식을 가지고 성도들을 바라 볼 때 외모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중심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이다. 성도들의 외적 조건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그 어떠함으로도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 누구의 편에 서서도 안 된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편에 서 있어야 한다. 그 어떤 이익이나 유익을 따지지 마라. 우리의 모든 주권이 하나님 안에 있다. 우리는 성도들의 선심 특히 부자들의 선심이나 권력가들의 선심을 물리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당당할 수 있다. 우리는 ‘줘도 못 먹는 사람이 아니라 줘도 안 먹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부자들의 선심이나 권력가들의 선심은 곧 세상 뇌물이라는 것을 잊지 마라. 즉 사단의 뇌물이다. 한국교회가 중요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은 ‘큰 교회 목사는 큰 목사’, ‘작은 교회 목사는 작은 목사’라는 인식이 있는데 이것은 정말 옳지 않다. 어떤 목사는 비자금을 1000억을 준비했다는데 그것은 도둑놈이다. 목사가 목사답게 살기를 바란다. 우리는 믿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종을 결코 굶기지 않으신다. 목사에게 사례비가 필요한 것은 목회에 전념하기 위함이다. 다른 생각하지 않고 오직 목회에 전념하게 하도록 사례비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례비에 대한 욕심을 버려야 한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겔 3:17) 우리는 하나님의 대사이다. 우리는 우리 신분에 대한 긍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 어떤 부유한 사람을 만나도, 권력가를 만나도 우리의 마음의 중심이 그의 외적 조건에 흔들릴 이유가 없다. 이것은 질서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대사이다. 그래서 목사는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고아와 과부를 만나는 태도와 대통령을 만나는 태도가 같아야 한다. 목사들의 언어문제를 우리는 점검해야 한다. 목사는 하나님의 대사로서 또한 사회의 품위 있는 어른으로서의 언어 수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천박한 언어를 삼가라. 그 사람의 언어를 듣다 보면 그 사람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볼 수 있게 된다. 특히 목사의 언어 속에서 복에 대한 관념이 어떠한지 살펴보라. 만약 부귀영화를 복이라고 말한다면 그는 목사로서 자격이 없는 것이다. 한국의 10대 재벌을 보라. 그들이 진정 복 받은 사람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우리나라 10대 재벌들의 인격적 수준이 바닥을 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정말 커다란 거룩한 부담을 느껴야 한다. 먼저 우리가 이것들에 대해서 바른 가르침을 선포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바른 의식으로 바른 가르침을 선포해야 한다. 잊지 마라. 우리는 하나님의 대사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대사로서 하나님의 가르침을 선포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대사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사람이다. 설령 대통령이 와도 우리는 그에게 정확히 전달해야 한다. 재물 앞에, 권력 앞에 비굴해지지 마라. 목사의 가장 큰 문제이자 유혹은 명예욕이다. 목사의 명예욕은 예수님의 보좌까지 탐낸다. 목사라는 직함이나, 그가 하는 일이 좋아보여서 목회를 한다면 그것은 사명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먼저 사명과 소명에 대한 확인이 필요하다. 목회는 결코 쉽지 않다. 정말 힘들다. 그러나 목회는 결코 못할 것은 아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것은 목회는 정말 어려운 일이나, 못할 일은 결코 아니다. 이스라엘의 정탐꾼의 보고는 지극히 부정적이었다. 대부분의 정탐꾼들은 가나안 땅은 들어가기 불가능한 땅으로 보고 하였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의 언약을 믿었다. 결국 부정적 보고를 듣고, 이에 원망하고 불평한 사람들은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를 듣고, 이에 믿고 하나님을 따른 사람은 다 들어갔다. 중요한 것은 어려운 일이라 해도, 우리가 믿고 가면 들어가진다. 목회는 이와 같다. 목회는 하나님이 이미 약속한 땅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비록 그 과정은 지극히 어려우나 믿음으로 가면 반드시 들어가지는 땅이다. 모세가 80세에 하나님으로부터 쓰임 받은 사건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았을 만한 바로 그 때 즉 80세가 된 모세의 상황에서 하나님은 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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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30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살았을 때 고난을 받은 나사로’(눅16:19~31)
    성경에는 부자와 나사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잔치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는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였습니다. 심지어 개들이 와서 헌데를 핥았습니다. 그러다가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품으로 데려갔습니다. 부자 역시 죽어 장사되었습니다. 부자는 지옥에서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다가 고개를 들어보았습니다. 먼 곳에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자가 크게 소리쳤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습니다.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눅16:25). 여기서 우리는 나사로가 천국에 들어가고 부자가 지옥에 들어간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나사로는 가난한 거지여서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부자 역시 부자였기 때문에 지옥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부자는 살았을 때 자기 좋은 것을 받았기 때문에 지옥에 들어갔고, 거지는 살았을 때 고난을 받았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간 것입니다. 나사로는 주님이 좋아하는 것을 택하느라 고통을 받았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간 것입니다. 이렇게 반문할 수 있습니다. “천국은 믿음으로 들어가는 것 아닌가요?” 예, 맞습니다. 천국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그런데 참 신앙인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 살아가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을 찾아 살아갑니다. 자신의 기쁨보다 하나님의 기쁨을 찾아 살아가려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매사에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뜻 사이에서 갈등을 겪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뜻대로 살기 위하여 기도로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끝까지 참고 인내하는 사람은 반드시 주님의 나타나심을 체험할 것입니다(딤전6:15). 롯은 아브라함을 따라 가나안 땅에 왔습니다. 그들이 가난할 때는 다툼이 없었지만 소유가 많아지자 아브라함의 목자와 롯의 목자가 서로 다투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롯에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 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자는 좌하리라.”(창13:8~9). 그러나 롯은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소알까지 땅이 넉넉하였습니다. 목축하기가 좋았습니다. 에덴동산 같았고 인상 깊었던 애굽과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요단 들 곧 자기 보기에 좋은 곳을 택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스스로 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곳을 찾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창14:4). 그가 하나님을 바라보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가 머물 곳을 지시하여 주셨습니다. 자기 좋은 곳을 찾아 간 롯의 결말은 동굴에 갇혀 술로 여생을 보내는 삶이었습니다. 반면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본 아브라함의 결말은 이방인들도 인정한 하나님의 방백과 같은 생활이었습니다(창23:6).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은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좋은 것을 찾아 살다가 하나님의 버림을 받고 말았습니다(삼상15:23). 하나님께서 먼저 그를 버린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버린 것입니다. 반면에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었습니다(행13:36). 그리하여 다윗은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베드로 역시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들어가 그물을 내려라”하셨을 때 밤새 수색하였던 곳이었기 때문에 헛수고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곳을 택하여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랬더니 그물이 찢어질 만큼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이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살아가지 않고 하나님이 좋아하는 대로 살아가면 세상에서도 풍성한 은혜를 맛보며 살아갑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좋아하는 대로 살아가려면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고난은 특별한 고역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습관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습관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니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술을 마시지 않으려 하니 그것이 고난입니다. 그러나 술을 애초부터 마시지 않는 사람에게는 전혀 고난이 아닙니다. 노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노름을 끊으려 하니 그것이 고난입니다. 그러나 노름에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고난이 아닙니다. 이처럼 고난은 자신의 습관에서 벗어나려 하는 것을 말합니다. 육신대로 살아가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생각해보세요. 지금까지 내가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고 살았는지, 하나님의 기쁨을 추구하고 살았는지,......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기쁨을 추구하고 살았다면 매사에 부딪히는 존재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입니다. 마음에 갈등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기쁨과 나의 기쁨 사이에 갈등, 하나님의 좋아하는 것과 내가 좋아하는 것 사이의 갈등이 생깁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버리기 위해서는 육체의 고난이 따라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로도 옵니다(고후1:5).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고, 하나님의 뜻이 나의 뜻이 될 때까지 육체의 고난, 정신적인 고난이 따라온다는 것을 깨닫고 자원하여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은 구원 받은 성도들의 생활 원리 가운데 하나이며 죄를 그치게 합니다(벧전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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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25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하나님의 집’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시84:1~2). 보통 사람들이 사는 곳을 집이라고 부릅니다. 임금이 사는 곳을 전이라고 부릅니다. 본문의 궁정은 임금이 사는 궁전의 뜰을 의미합니다. 시편 기자가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한다는 것은 단순히 건물을 사모한다는 것이 아니라 건물 안에 계신 하나님을 사모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전은 세 가지 차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건물로서의 성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시내산에서 성막 지을 설계도를 말씀해주셨습니다. 그가 산에서 내려왔을 때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같은 은사 받은 사람을 만나 성막을 짓게 됩니다. 이러한 성막은 솔로몬이 왕이 되기 전까지 장막으로 이어오다가, 솔로몬 왕 때에야 비로소 고정된 건물의 형태를 띤 성전을 건축하게 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지체들의 연합체, 곧 그리스도의 몸의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한편으로 오늘날 성전은 회당교회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가 특정한 장소를 가리키고 있는 것을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회당으로서의 교회가 지니는 대표적인 특징은 예배와 교제와 모임의 의미가 있습니다. 모임의 의미가 중요한 것은 성령이 교회들을 통하여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계2:7). 이러한 말씀은 일곱 교회 모두에게 하고 계십니다(계2:11,17,29 3:5,13,22). 이처럼 오늘날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시대입니다. 성령이 강하게 역사할 때는 대부분 회중 가운데 있을 때였습니다. 오순절날 성령도 회중 가운데 임하셨습니다(행2:1이하). 또 경건하여 하나님께 항상 기도했던 이방인 고넬료에게 천사가 직접 구원의 도리를 말하지 아니하고 베드로를 청하여 듣게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가서 예수님을 전하였을 때 성령이 말씀 듣는 사람 모두에게 임하였습니다(행10:44). 1907년 평양 대부흥도 역시 회중 가운데서 시작 되었습니다. 일제 말기에 우찌무라 간조의 지도를 받아 이 땅에도 김교신을 비롯하여 함석헌, 송두용, 정상훈, 류석동, 양인성, 유달영 등 무교회주의 자들이 여러 곳에서 영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이러한 무교회주의 자들은 기성교회가 갖기 쉬운 지나친 교권주의, 물량주의를 경계하고 순수한 조선의 기독교를 주창했던 많은 좋은 점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회당교회 인정을 거부한 것은 그들이 그토록 주장했던 성서의 본질을 벗어난 것입니다. 두 번째 성전은 예수님의 몸으로서의 성전입니다. 요한복음 2장 13절 이하에는 예수님께서 공생을 시작하실 때 성전을 청결케 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거기서 예수님이 유월절 전에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고 상을 엎으싶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그런 일을 무슨 자격으로 하는지 표적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성전을 헐면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요2:21~22). 이처럼 성전은 예수님의 몸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구약시대에 성전이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이끌었듯이 예수님은 성전이 되어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어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재하시고 계십니다(히5:6). 성전의 세 번째는 신자들 자신입니다(고전3:16~17, 6:19~20). 신앙인들은 성령을 모시고 살아가는 성전이기 때문에, 성전을 언약궤가 있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한정했던 것과는 달리 오늘날에는 누구든 성령의 임재 가운데 있다면 모두가 성전이 될 수 있습니다. 신앙인들 각자가 성전 된 의의는 구약시대 레위 지파 가운데 뽑힌 제사장을 통하여 제사를 드리고, 중보기도를 드렸던 것과는 달리 지금은 신자들 각자가 어디에서든지 아버지께 직접 아뢸 수 있다는 점입니다(요4:21).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몸을 산 제물로 드린 사람을 통하여 예수님이 재현되고 그로 인하여 영광 받으십니다. 그러면 아버지께 직접 예배하고 직접 기도드릴 수 있으니 교회가 필요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를 인하여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니 저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전4:17).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디모데를 보냈는데 디모데가 바울이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행하여야 할 바를 모를 때 주님을 바라보면 성령께서 가르쳐 주십니다. 그 가르쳐 주시는 것은 새로운 말씀이 아니라 성경에 있는 말씀이며 그 성경에 있는 말씀도 대부분 성령이 교회 사자들을 통하여 해석하여 주신 말씀입니다. 코로나로 인하여 각 교회들이 제대로 모여 예배드릴 수 없는 점에 매우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몸은 비록 떨어져 있어도 마음만큼은 하나 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 됨은 성령과 교회를 통한 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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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17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인내의 뿌리’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눅21:19) 여기서 ‘얻으리라’의 헬라음 ‘크테세스데’는 ‘보존하다’ ‘지키다’를 의미하고, 영혼 ‘푸쉬카스’는 ‘생명’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너희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너희의 인내로 너희의 생명을 지키리라.”고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생명을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켜 나가는 것 또한 얻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사탄은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습니다.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날 때 흔들리지 말고 인내로써 주님의 피 값으로 받은 생명을 지켜 나가야 할 것을 주님은 당부하고 계십니다. 며칠 전 교육관에 있던 행운목이 13년 만에 꽃을 피웠다고 하기에 가보았습니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먼발치인 그곳까지 향기가 물씬 풍겼습니다. 13년 전 교회 이전 기념으로 선물을 받은 행운목은 3년 정도 지나자 벌써 천장까지 자랄 만큼 훌쩍 커버렸습니다. 더 이상 자랄 곳이 없을 때면, 보살피는 분들이 적당히 절지하여 원하는 분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솔직히 전 꽃이 피는 식물인지 아닌지조차 몰랐습니다. SNS로 꽃 사진을 보내왔기에 ‘피었나보다’했는데 어렵사리 13년 만에 피었다는 것을 알고 난 후 느낌이 달라졌습니다. 13년은 교회이전 후 기간을 말한 것이고 새싹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중간쯤 자라서 가져온 것이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몇 년 더 걸렸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식물이 사람처럼 감각이 있다면 이 식물도 나름대로 시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주변에 있는 화초들이 활짝 꽃을 피우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때 ‘나는 왜 아직까지 꽃을 피우지 못하지?’하며 초조했을지도 모릅니다. 한 해 한 해 지나며 ‘그래 희망을 포기하지 말자. 나도 반드시 꽃 필 날이 올 거야.’ 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였겠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내게도 그런 날이 올까?’ 하며 불길한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이겨내고 행운목은 기어이 꽃을 피우고야 말았습니다. 이처럼 인내는 쓰지만 결과는 아름답습니다. 수영을 하려는 사람이 이론만 가지고는 수영을 배울 수 없듯이 인내는 많은 책을 본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실습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참고 인내하는 사람이 되도록 환경을 만들어 가십니다. 한나에게는 브닌나라는 동서를 허락하셔서 한나로 하여금 기도하는 사람, 참고 인내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요셉 역시 형님들에게 팔려가게 하고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 등을 통하여 참고 인내하는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참아가며 이스라엘 지도자 수업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사울이라는 사람을 통하여 어떠한 환경도 감내하는 사람으로 빚어 갔습니다. 복음에 대한 결실도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킨 후 인내가 들어가야 합니다(눅8:15). 인내는 영혼을 만들고 성장해 나가는 것에 필수입니다. 인내는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습니다. 또한 참으면 함께 왕 노릇합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딤후2:11~12). 왕은 남을 다스리는 왕이 아니라 자신을 다스리는 왕입니다. 자신을 잘 다스릴 수 있으면 환경도 다스리게 됩니다. 대부분의 어려움은 자신을 다스리지 못한 결과입니다. 성경 자체가 인내하는 말씀입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계3:10). 인내의 말씀을 지킬 때 그 말씀이 인내하는 사람들을 지켜 주십니다. 주일 시험을 인내하며 지키면 주일이 그를 지켜 줍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인내하며 지키면 사랑이 그를 지켜 줍니다. 우리 자신이 말씀 안에 거할 때 주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요15:4). 어떻게 인내할 수 있습니까? 히12:2이하에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라고 나옵니다.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인내의 힘을 얻습니다. 바라보는 것에 힘이 납니다. 바라본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하고, 참으심을 생각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예수님의 용서를 생각하면 위로부터 참는 힘이 주어집니다. 손기정 하면 일제 강정기, 1936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분으로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1935년 일본 도쿄에서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이 열렸습니다. 당시 양정보통고등학교 선생님이었던 김교신은 늦깎이 학생 손기정 선수의 비공식 트레이너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날 김교신 선생은 손기정 선수가 달리는 길에서 자동차로 앞서 달렸습니다. 지쳐 속도가 떨어지면 자신이 존경하던 선생의 얼굴을 보고 힘을 내겠다는 손기정 선수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선생은 손기정 선수가 볼 수 있게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고 손기정 선수는 지칠 때면 선생을 바라보고 혼신을 다하였습니다. 그 결과 무사히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었고 이듬 해 올림픽에서는 금메달을 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존경하는 사람을 바라보고도 이와 같이 힘을 낼 수 있을진대, 전능하신 하나님인 예수님을 바라보면 얼마나 힘을 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롬10:12)라고 말합니다. 주님을 바라볼 때 조금 힘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부요하게 풍부하게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참게 하시는 것은 화를 자신 속에 쌓아둔 채 올라오지 못하도록 꾹꾹 누르도록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한다면 물이 흘러올 때마다 넘치지 못하도록 모래성을 쌓는 것과 같습니다. 필경 몸으로든 입으로든 와그르르 무너지고 맙니다. 그때 자신은 물론 주변에 많은 상처를 입힙니다. 하지만 주님을 바라보면 위에서 흐르는 분노의 물줄기, 정욕의 물줄기, 싫증의 물줄기가 끊어지고 맙니다. 그것은 마치 계12:15이하의 말씀처럼 용의 입에서 강같이 토하여 낸 물을 땅이 입을 벌려 강물을 삼킨 것과 같습니다. 인내 그것은 영혼을 얻고 영혼을 보존해줍니다. 하지만 결코 혼자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앙모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때마다 일마다 주님을 바라보고 생각함으로 주님께 힘을 얻어 인내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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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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