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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마음을 지키라’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우리는 집을 지키고, 약속을 지키고, 귀중품을 지키고, 나라를 지키고, 마음을 지키는 등 지켜야 할 것들이 여러 가지입니다. 지키는 이유는 그것이 귀중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노리는 존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는 지킬만한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마음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지키는 것들 역시 마음에서 비롯되며, 마음이 점령당하면 모든 것들이 점령당하기 때문입니다. 성을 지키는 용사가 ‘내가 나태하면 이 성은 점령당한다.’라고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철통같은 방어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나 하나쯤이야’라고 생각하고 방어를 게으르게 한다면 그가 서 있는 자리가 구멍이 될 수 있습니다. ‘나 하나쯤이야.’ 하는 것이나, ‘내가 아니면’ 이런 것들은 모두 마음 자세입니다. 사소한 것 같지만 결과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지킨다.” 함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생각은 감정과 의지를 생성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좋은 감정이 일어나기도 하고 뜻을 결정하기도 합니다. 몇 가지 사례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사울과 다윗이 싸움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을 추고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였습니다. 그들이 부른 가사 가운데는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18:7)라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이 가사에 다윗은 전혀 요동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를 승리하게 하신 분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여인들의 노래를 듣고 불쾌해하며 심히 노하였습니다.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삼상18:8). 사실 싸움은 왕이 하는 것이 아니라, 신하들이 하는 것입니다. 왕이 직접 싸우기도 하지만 왕이 전사하면 다 끝나는 일이기 때문에 왕은 진두에서 지휘하고 싸움을 독려하는 일에 더 치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군이나 병사들이 왕보다 적군을 더 많이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신하가 한 일은 왕이 한 일이기도 합니다. 사울이 여인들의 말을 들었을 때 ‘그래, 다윗은 내 신하지. 내 신하가 잘하는 것은 내게도 영광이야’라고 하며 무시하고 지나갔으면 될 터인데 사탄이 참소하는 그 말 곧 “다윗이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에 걸려든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불쾌하였고 심히 노했던 것입니다. 이 생각은 일회성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가 세상 떠날 때까지 그를 괴롭혔습니다. 생각을 다스리지 못한 결과입니다. 마귀는 우리 마음을 불쾌하게, 격노하게 만들기 위하여 여러 사건들을 가져옵니다. 불쾌한 생각을 넣는 것이 마귀입니다. 마음을 지키는 것은 사탄이 사건을 통하여 집어넣는 생각들로부터 지키는 것입니다. 사울은 그 일을 하지 못하고 생각이 들어오는 대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직장이나 집안에서 어떤 일이 우리에게 주어졌을 때 ‘하필 나야? 내가 왜 이 일을 맡아야 돼?’ 하며 불쾌함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게 영원한 상급을 위하여 이런 일들을 허락해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하고 마음을 돌려 먹으면 영생을 소망하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큰 상급이 됩니다. 사탄이 터를 잡지 못합니다. 마음을 노리는 마귀를 대적하는 것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훈계를 굳게 잡고 놓치지 말고 지키라. 이것이 생명이니라.”(잠4:13). 훈계는 말씀입니다. 말씀은 여러 가지 이유와 까닭을 통하여 들어오는 마귀를 쓰러뜨리는 핵폭탄입니다(고후10:5~6).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게 하려면 예배시간이나 평소 읽은 성경을 통하여 성령의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그 말씀이 마음에 박힙니다. 오늘도 마귀가 주는 생각을 말씀으로 대적하여 마음을 지키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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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23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가라사대 내가 은혜를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였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를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1~2). 은혜의 사전적인 정의는 고맙게 베풀어준 혜택입니다. 신앙적인 의미로는 예수님의 공로로 받은 혜택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모든 것이 은혜라고 말합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벧전5:10). 거기에는 은혜로 보이는 것만 아니라 은혜로 보이지 않는 고난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조선시대 마음씨 고운 귀부인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시집간 딸집에 가기 위하여, 약간의 짐을 꾸려 하인들에게 맡기고, 자신과 다듬잇돌 하나만 가마를 타고 있었습니다. 여러 산을 넘고 넘어 드디어 딸네 집에 도착하였습니다. 다 도착하자 귀부인은 그제야 “휴우”하며 긴 한숨을 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온 몸에는 땀이 흠뻑 적셔 있었습니다. 왜 그러느냐고 가마꾼들이 묻자 하는 말이 “말도 마소. 말도 마소. 내가 자네들 힘들까봐 다듬잇돌을 머리에 이고 왔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부인에게 은혜는 가마꾼입니다. 은혜 안은 가마 안입니다. 가마 안에서는 자신이 짐을 이고 갈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가마꾼들이 그 짐까지 모두 책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마꾼들은 귀부인 앞에서 차마 웃지 못하였지만 배꼽을 잡았을 것입니다. 불필요한 수고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요14:1에서 주님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 역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라고 전합니다(벧전5:7).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사람들은 근심 걱정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주님께서 맡기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권고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믿고 맡기지 못하는 것은 가마 속에서 다듬잇돌을 이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이 다 지시고 주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인데 믿지 못하니 영육 간에 피폐해지고 맙니다. 주님은 우리가 맡기는 것을 보호해주십니다. 목욕탕에 들어갈 때 주인에게 맡긴 귀중품은 나중에 분실당해도 배상 받을 수 있지만, 맡기지 않은 귀중품은 배상 받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는 믿고 맡긴 것을 보호해주시고 책임져 주십니다. 근심 걱정을 맡기지 못하고 자신 홀로 처리해 나가려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 행위입니다. 빌1:29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라고 말합니다. 은혜를 주신 목적은 그리스도를 위하라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아 그리스도를 위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육체의 기회로 사용된다면 은혜를 헛되이 받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은혜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첫 사랑에는 주님을 위하여 힘을 쓰지만 시간이 지나 마음이 해이해지면 주님을 위하지 아니하고 은혜마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은혜가 멈춰질 수밖에 없습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할 때, 감사할 때 넘치게 받을 수 있습니다(고후4:15). 은혜가 헛될 때는 징계를 경이 여길 때입니다(히12:5). 징계는 곧 교훈입니다. 징계 속에는 교훈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는데(히12:6), 아무런 의미 없이 하시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가르치고자 하시는 교훈이 있습니다. 그 교훈을 받지 못하고 무의미하게 지나칠 때 은혜를 헛되게 받는 것입니다. 은혜는 주님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고전15:10). 주님과 사귀는 것입니다. 주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허물을 들어내 주십니다. 자신의 허물을 깨달으면 회개하고 돌이키면 깨끗하게 됩니다. 그러나 양심의 악을 깨닫고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은혜를 헛되이 받는 사람입니다. 부모님이 용돈을 주면 못 된 친구들과 사귀며 죄 짓는데 사용한다면 용돈이 끊길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 짓도록 은혜를 주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도록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주님을 위하여 고난 받기를 기뻐한다면 은혜 위에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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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16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사탄의 공작’
    “암논에게 요나답이라는 친구가 있으니 저는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이요 심히 간교한 자라.”(삼하13:3). 본문은 암논이 다말을 연애하여 심화로 병이 들었을 때 여기에 개입하는 요나답에 대한 내용 일부입니다. 사탄은 계획성 없이 일을 하지 않고 오히려 치밀하게 계획하고 꾸밉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두아디라 교회에게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계2:24)라고 말씀하십니다. 사탄도 깊은 것이 있고 얕은 것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였던 뱀이 지금은 용이 되었습니다(계12:9). 사람만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탄도 발전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발전은 파괴와 파멸을 시키는 방향입니다. 사탄이 직접 나서기보다 자신의 사자들을 통하여 하는 때가 많습니다. 사람이 때로는 사탄의 사자 역할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사탄과 싸워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탄의 개입을 미리 차단하는 것은 더 중요한 일입니다. 이 글을 통하여 사탄이 공작활동을 하는 때와 그들의 개입을 미리 차단하는 길을 살펴보겠습니다. 다윗왕의 장자 암논은 이복누이 다말을 연애하였습니다. 심화로 병이 들만큼 깊었습니다. 그에게는 요나답이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심화로 병이 든 암논을 보고 요나답은 조언을 합니다. 우선 병든 체 하고, 이에 다윗 왕이 그를 방문하면 “청컨대 내 누이 다말로 와서 내게 식물을 먹이되 나 보는데서 식물을 차려 그 손으로 먹여주게 하옵소서.”(삼하13:5)하라는 내용입니다. 요나답은 친구를 바로 인도하기보다 친구의 잘못된 욕구를 충족시키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요나답이 암논에게 조언했던 일들은 모두 시행 되었습니다. 다윗 왕은 다말에게 암논의 집에 가서 그를 위하여 음식을 차리도록 하였습니다. 다말이 그의 집에 와서 과자를 굽고 그에게 가져다주었을 때 암논은 사람들을 모두 나가게 한 후 저항하는 다말을 억지로 끌어들여 음욕을 충족시키고 말았습니다. 음욕이 충족되자 그는 다말이 미워졌습니다. 그 미움은 연애감정의 깊이보다 더 심하였습니다. 그래서 억지로 다말을 쫓아내고 말았습니다. 요나답의 잘못된 권고 하나로 다말은 강간을 당하고, 암논은 그 일로 인하여 다말의 오라버니 압살롬에 의하여 죽임을 당합니다. 사탄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유의하여 봅니다(욥1:8). 그것은 사자가 짐승을 노리는 것처럼 신앙인들을 낚아챌 기회를 엿보기 위함입니다. 사탄이 그리스도인들을 파멸시킬 공작을 벌일 때는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이 하나님께 향하지 아니하고 세상으로, 돈으로, 음란으로 향할 때입니다. 사탄은 암논의 마음이 다말에게 향함을 보았습니다. 심화로 병이 들 정도로 깊이 빠짐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심히 간교한 요나답을 그들의 공작을 펼칠 사자로 보냈습니다. 압살롬은 암논을 죽이고 아버지의 노여움을 피하여 외가가 있는 그술 땅으로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삼년이 지나자 다윗은 암논 사건에 대하여 어느 정도 상처가 치유되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마음이 아들 압살롬에게 기울어졌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향하여 간절하니 암논은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음이더라.”(삼하13:39). 요압은 압살롬의 마음이 다윗에게로 향하여 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러자 드고아 땅에서 슬기 있는 여인 한 명을 왕에게 보내어 압살롬을 그술 땅에서 데려오도록 하는 모사를 꾸밉니다. 그는 압살롬을 데려오기 전에 압살롬이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충분히 회개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먼저 살펴야 했습니다. 회개의 여부를 살피지 않고 다윗의 마음만 보고 압살롬을 데려온 결과는 참혹하였습니다. 쓴 뿌리가 있는 압살롬은 마침내 아버지 다윗을 반역하여 난을 일으킵니다. 요나답의 공작과 요압의 공작 두 사례를 들어 보았지만 사탄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지 아니하고 음란이나 자녀나 돈이나 세상으로 향하면 자신들의 충성된 사자를 통하여 일을 꾸밉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사탄의 공작을 미리 차단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골1:10)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생각을 주님께 고정시키고 주님 보시기에 합당하게 살아가려고 할 때 성령이 임하시고, 파멸시킬 기회를 엿보던 사탄은 틈을 찾지 못하여 달아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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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06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천국 보화를 사라’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마13:44~46). 본문은 예수님께서 천국 보화를 발견한 사람의 기쁨과 태도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44절과 45절은 뜻밖에 보화를 발견한 사람의 태도를 말한 반면, 46절은 찾고 찾다가 보화를 발견한 사람의 태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여기 ‘샀느니라.’를 오해하면 자신의 능력으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의미로 해석하기 쉬운데, 그런 의미가 아니라 믿어 구원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과 천국의 귀중함을 깨닫고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릴 때 얻게 되는 영광스런 천국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해와 달의 영광이 다르고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듯이 구원 받은 사람이 주님을 위하여 살아간 정도에 따라서 천국에서 받는 영광도 각각 다릅니다(고전15:41). 예수님 곁에서 십자가에 달린 후,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여 예수님을 영접한 강도가 받을 영광과, 자신의 이름을 불러준 예수님께 자신의 소유 절반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세리장 삭개오가 받을 영광, 보화를 발견한 후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던 성도들과 또 순교자들이 받게 될 영광은 다를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의 기반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의 터 위에 팔고 버리며 헌신할 수 있는 힘이 나옵니다. 그러면 어떻게 자기 소유를 버리고 팔게 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느 날 베드로는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여쭙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19:29). 베드로는 마치 자신이 잘해서, 똑똑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은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누가복음 5장 1절 이하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에 앉아서 말씀을 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배에 앉아 주신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 베드로는 아마도 말씀에 집중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명하십니다. “깊은 데로 들어가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5:4). 말씀에 퍽 감동을 받은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5절). 그리고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 결과 두 배에 가득 채워 잠기게 될 만큼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이에 놀란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말합니다. 자신은 예수님을 가까이 할 사람이 못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그러자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습니다. 베드로 스스로 예수님을 좇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따를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영광을 맛보게 하시고 따르게 하신 것입니다. 순전히 예수님의 은혜로 따르게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에는 나사로의 집에서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를 벌입니다. 그들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던 나사로를 살려주신 은혜가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그 은혜에 감격한 나머지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습니다. 그러자 향유 냄새가 온 집에 가득합니다. 돈에 대한 계산이 빠른 가룟 유다의 말에 의하면 그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의 값어치가 있습니다. 그것은 당시 노동자 1년 품삯에 해당 됩니다. 여인이 그렇게 모으려면 더 많은 날 수고해야 할지 모릅니다. 마리아는 주님을 위하여 조금도 아끼지 아니하고 재물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힘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오라버니를 살리신 은혜가 너무나 고맙고 감사함으로 드린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주님께 드리는 것이 기쁨입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드리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버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바울 역시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던 것이 예수님의 영광을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냥 무작정 따르게 한 것이 아니라 영광을 맛보게 하시고 따르게 하신 것입니다. 자신들의 지혜로 따른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예수님의 사랑을 포함하여 모든 선한 형상입니다(출33:18·19).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주님의 자비하심을 맛본 사람들은 예수님의 영광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누가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있습니까? 믿는 자는 예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요11:40). 마음이 청결한 자 역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마5:8). 마음이 청결케 되기 위해서는 착한 양심 곧 거듭난 양심을 힘 있게 써야 합니다. 성령은 양심을 통하여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롬9:1~2). 성령과 사귀면 죄를 깨닫게 되고,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게 깨끗하게 하십니다(요일1:7). 본문 가운데 자기 소유를 팔아 천국을 산 사람의 행동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사람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사랑의 강권함을 받아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 외에 자신이 소중하게 여겼던 모든 것들을 버리고,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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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1-30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올바른 권면’
    “너희가 달음질을 잘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갈5:7~9). 제가 부교역자 시절에 있었던 일입니다. 한 번은 새로 오는 교인 집에 심방을 갔습니다. 그 분은 어릴 때는 교회를 잘 다녔다고 했습니다. 6.25 이후에 미국인 선교사 밑에서 신앙생활을 했던 부모님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공산당에게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외할머니 댁에서 자랐는데 교회에 가고플 때면 외할머니가 "너의 부모님이 예수 때문에 죽었는데 그 예수를 믿겠느냐?" 하면서 예수님을 믿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그것에 세뇌되어 70세가 넘도록 시험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몸이 아프게 되자 예전에 믿었던 예수님을 떠오르며 스스로 교회를 찾아왔던 것입니다. 그 분의 외할머니께서 믿지 않는 분이라 그러셨겠지만 사람의 권면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만일 그 분의 외할머니께서 “얘야, 세상에서 가장 복이 무엇인 줄 아느냐? 예수님 믿다가 고난당하고 죽는 복이란다. 그 복을 너희 부모가 지금 하늘나라에서 누리고 있단다. 얼마나 좋은 일이냐? 또 자녀인 너희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보살펴 주겠느냐? 너희 부모님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효도한다는 마음으로 그 정신을 본받도록 해라.”라고 말했다면 상황이 바뀌었을 것입니다. 부모님께서 순교하셨다는 것에 대하여 긍지를 가지고 살았을 텐데 잘 못 권면한 사람으로 인하여 신앙에서 떠나게 되고 한 평생을 원망과 불평, 상처 속에서 살아간 것입니다. 사무엘하 9장과 10장에는 각각 므비보셋과 하눈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다윗은 그들에게 은총주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로 말미암아 다윗에게 은총을 입게 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아버지가 다윗에게 은총을 베푼 덕택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베풀고자 한 은총을 받아들인 자세는 두 사람 사이 너무나 차이가 많고, 그 결과 역시 말할 수 없이 많은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므비보셋은 다윗이 베풀고자 하는 은총을 그대로 믿고 받아들였습니다. 그 결과 그는 이스라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의 유산을 모조리 받을 수 있었고, 왕자처럼 다윗의 식사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암몬 왕 하눈은 다윗의 은총을 믿지 않았고 오히려 은총을 전달해준 이스라엘 신하들의 수염 절반과 의복을 중동볼기까지 자르고 돌려보냈습니다. 다윗의 노여움을 예상하고 아람나라들에게 지원을 요청합니다. 그 결과 암몬과 아람사람들 모두가 다윗의 군대에게 패하여 달아나고 말았습니다. 하눈이 그렇게 한 이유는 신하들이 그에게 한 잘 못된 권면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암몬 자손의 방백들이 그 주 하눈에게 고하되 왕은 다윗이 조객을 보낸 것이 왕의 부친을 공경함인 줄로 여기시나이까? 다윗이 그 신복을 보내어 이 성을 엿보고 탐지하여 함락시키고자 함이 아니니이까?”(삼하10:2). 신하들이 다윗의 진의를 믿지 못하고 오해하여 참소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잠14:15은 “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믿으나 슬기로운 자는 그 행동을 삼가느니라.” 이 말씀처럼 우리는 모든 것을 그대로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때로는 저의를 의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럴 경우 신중하게 분석하고 대처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다윗은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결코 의심될 일이 없습니다. 오히려 믿고 찬송해야 합니다. “너는 하나님의 하신 일을 찬송하기를 잊지 말지니라. 인생이 그 일을 노래하였느니라.”(욥36:24).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행하시는 일은 모두 선하고 찬송 받으실 일입니다. 정상적인 아버지라면 자녀들의 행복을 도모하듯이, 우리 하나님 역시 자녀들의 행복을 위하기 때문입니다. 설사 불행하게 보이는 일일지라도, 단지 우리가 영적으로 어려서 이해하지 못한 포장지일 뿐, 안에는 은혜와 복이 담긴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믿고 감사해야 합니다. 본문말씀 “너희가 달음질을 잘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는 자신에게 권면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살피라고 합니다. 성령으로 비롯된 권면은 회개를 시키고, 살리는 일, 힘과 용기를 북돋아 주지만 육신으로 비롯된 권면은 상대의 영혼을 망치고, 실망시키고, 낙담하게 하며, 또한 세상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이처럼 밖에서 오는 권면은 물론 자신 안에 생각으로 주는 권면을 잘 분별하여 하나님을 더 깊이 사랑하며 더 가까이 따르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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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1-24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겨자씨의 비유’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13:31~32). 겨자씨는 가장 작은 씨 가운데 하나입니다. 겨자는 채소과에 해당 됩니다. 그런데 그 채소가 자라면 3미터까지도 자란다고 합니다. 나무가 3미터까지 자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채소가 3미터까지 자라는 것은 거의 보기 힘든 일입니다. 채소를 나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자라니 얼마나 확장성이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천국에 대한 확장성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외부로의 확장입니다. 눅17:20 이하에는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라고 나옵니다. 여기 ‘너희 안’에서 ‘안’은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마음을 가리킨다면 바리새인들의 마음속에도 천국이 있다는 뜻인데 예수님을 시기하고 심지어는 죽이려고 하는 그들 안에 천국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너희 안에 있다.”는 말씀은 “거기 모인 사람들 중에 있다.”는 뜻입니다. 모인 사람들 가운데는 예수님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곧 예수님이 천국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목수의 아들로 구유 안에 나실 만큼 가난하고 보잘 것 없게 오셨지만, 예수님으로부터 비롯된 천국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는 물론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파되었습니다(행1:8). 온 세상 믿는 사람들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위하여 살았고, 지금도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둘째, 천국의 확장성은 신앙인 개인의 변화입니다. 개인의 변화에는 인격의 변화와 능력의 변화가 있습니다. 인격은 그리스도 성품에 참예하는 것을 의미하고, 능력의 변화는 각자의 소질에 은사가 덧 입혀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격의 변화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세상 떠날 때까지 진행되지만 은사는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에게 일어납니다. 오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능력의 변화를 상고하겠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4복음서에 모두 등장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여자와 어린 아이를 제외한 무리 오천 명도 넘는 숫자가 예수님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갑자기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들은 “이곳은 빈들이요 때도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먹게 하소서.”(마14:15)라고 말하였습니다. 비록 해가 저물었다고는 하지만 제자들의 이런 행동은 무례였습니다. 전능하신 예수님께서 무리의 형편을 모르실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온전히 믿고 맡기면 될 터인데 말씀 도중에 말씀을 자르고 나왔습니다. 그들은 이 사건 전에 예수님께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받아 전도 여행을 떠났던 사람들이었습니다(마10:1). 그들이 안수기도하고, 그들이 말씀을 전하면 귀신들도 나가고 병자들도 고침 받는 일이 생겼습니다. 제자들 입장에선 상당히 신이 났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들도 모르게 마음이 높아진 것입니다. 이런 상태가 아니고서야 말씀 전하시는 예수님께 말씀을 자르면서까지 나오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마14:16). 이 말씀 속에는 “너희들이 자신 만만해졌는데, 그렇게 자신 있으면 너희들이 능력껏 주어라.”라는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무리를 향하여 말합니다. “여기 음식을 가져오신 분 있습니까?”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는데, 어린 아이 한 명이 벌떡 일어나더니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보리떡은 당시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음식이었습니다. 준비성 있고 야무진 사람들도 음식을 갖추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음식이 그 많은 사람을 충당시키지 못할 것을 알고 내놓지 않았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처음부터 나눌 생각이 없어서 내놓지 못 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믿음은 이론이 아닙니다. 앞 뒤 재지 않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어린아이가 가져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감사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러자 어린 아이와 여자를 제외한 무리 오천 명이 먹고도 12광주리가 남을 만큼 많은 떡과 물고기가 나왔습니다. 어린아이가 가졌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각 개인들의 능력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개인 간의 차이는 도토리 키 재기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이미 있는 것들을 폐하기도 하시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각자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주님께 드리느냐 드리지 않느냐’에 있습니다. 소유의 많고 적고를 떠나 자신의 재능을 온전히 예수님께 드렸을 때, 예수님의 손에 맡겨졌을 때 주님은 그것을 변화시켜 주시고 겨자씨나 누룩에 의한 가루처럼 확장시켜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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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1-18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행동의 결과를 예측하라’
    “대저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나중은 쑥 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 같이 날카로우며 그 발은 사지로 내려가며 그 걸음은 음부로 나아가나니 그는 생명의 평탄한 길을 찾지 못하며 자기 길이 든든치 못하여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느니라.”(잠5:3~6). 여기 ‘꿀을 떨어뜨리는 입술’은 ‘입맞춤을 갖게 하는 입술’을 의미합니다. ‘기름처럼 미끄러운 입’은 ‘말로 사람을 유혹하는 입’을 말합니다. 입술이 육체의 관능을 말한다면 입은 정신까지 유혹하는 것을 말합니다. 최근 사무엘하를 강해하면서 다윗과 밧세바의 사건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침상에서 일어나 옥상을 거닐 던 어느 날 저녁, 다윗은 밧세바의 목욕하는 장면을 보았고 그의 아름다운 모습에 그만 홀리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둘은 불륜관계를 맺어 밧세바는 잉태하였고, 다윗은 그것을 감추기 위하여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맹렬한 전쟁터에 선두로 나가도록 하여 죽게 만듭니다(삼하11장). 그토록 그를 괴롭혔던 사울을 죽일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지만, 다윗은 사울이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이유로 그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랬던 다윗이 왜 간음하고 살인할 지경에 이를 만큼 타락하고 말았을까요? 성경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 아들아 내 지혜에 주의하며 내 명철에 네 귀를 기울여서 근신을 지키며 네 입술로 지식을 지키도록 하라.”(잠5:1~2). 다윗이 넘어간 이유는 근신을 지키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근신의 반대는 방심입니다. 방심할 때가 죄짓는 때입니다. 다윗은 방심할 때 행인 곧 정욕이 들어와 주인 노릇하였고 거기에 굴복하고 만 것입니다. 정욕이라는 행인이 말하였습니다. “밧세바 참 아름답구나. 동침하고 싶구나. 너는 왕이야.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 이 나라가 이만큼 커지고 편안해진 것은 네가 싸움을 잘하였기 때문이야. 그러니 내가 원하는 여인과 하루 밤 동침 하도록 해줘” 다윗이 만일 근신하였더라면 “무슨 소리야? 저 여인은 분명히 남편이 있는 여인으로써 옷이라도 만지면 하나님과 그의 남편에게 큰 죄를 짓는 것이야.” 하며 행인 곧 정욕의 요구를 물리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방심한 상태였습니다. 신하들은 전쟁터에 나가 싸우고 있는데 자신은 낮잠을 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삼하11:2). 방심한 결과 다윗은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결과를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나중을 보아야 했습니다. 지금 당장 주는 죄악의 낙에 속지 않고 그 후 결과를 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비록 왕일지라도 여느 백성과 다름없는 신분일 따름입니다.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말씀 앞에는 왕후장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동침을 요구하는 여주인의 간청을 거절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 순간 자신의 지위만 생각하였을 뿐 왕까지도 예외 없이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생각지 못한 것입니다. 그의 행동의 결과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짐작하지 못한 것입니다. 거센 파도처럼 밀려오는 죄악의 낙에 가려서 밧세바가 잉태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잉태 된 후에도 전쟁터에서 우리아가 죽는다면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 되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드러내신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행동 결과를 미리 예측하고 행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결과를 예측하고 피하였습니다. “나의 주인이 가중 제반 소유를 간섭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임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 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창39:9). 사람은 모를지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아시고 자신의 죄를 적발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캄캄했습니다. 그 결과 밧세바의 꿀 떨어지는 관능에 속아 쑥 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같이 날카로우며, 사지로 내려가는 나중을 못 본 것입니다. 음녀는 비단 음심 있는 여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약4:4). 타락한 세상이 바로 음심 있는 여인이고 그들과 벗하는 것이 영적인 간음입니다. 육체의 간음은 사람들이 조심하지만 세상과 짝하는 것은 소홀히 여깁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와 신자들이 세상과 벗하고 나가기 때문에 세상과 교회가 전혀 구별이 서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세상과 벗하는 것은 세상 풍속 습관과 유행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사치 연락 돈과 명예를 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 풍속 습관을 따라 살아가면 세상에 속하게 되며 세상 신 곧 마귀의 지배하에 놓이게 됩니다. 그 결과 혹독한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은 세상이 주는 낙을 볼 것이 아니라 세상을 가까이 함으로 발생할 결과를 봐야 합니다. 애굽이 가져다주었던 고기 가마를 볼 것이 아니라, 바로의 학정 밑에 시달렸던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은 아담을 탓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창2:17)는 내용의 말씀을 지금도 하십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8:13). 이 말씀이 그런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어 아담과 하와의 영이 죽은 것처럼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는 고통을 체험하게 됩니다.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는다는 결과를 마음에 새기는 사람은 육신대로 살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육신대로 살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주님께 부르짖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주님께서는 도와주십니다. 다윗처럼 죄를 짓지 않으려면 첫째 근신해야 하며 둘째는 고난으로 갑옷을 삼아야 합니다(벧전4:1). 그리고 주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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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1-15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약4:8). 성경은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마13:35)라고 말합니다. 만물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감추어 있습니다. 그래서 잠25:2는 말합니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살피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살피고 찾는 일입니다. 코로나사태를 맞이하여 저 역시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시는지 찾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코로나 역시 하나님의 허락하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아니면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는데(마10:29), 하물며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온 코로나19사태가 그냥 우연히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지구 전체, 특별히 기독교인들에게 경고하는 말씀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껏 신앙의 자유가 있는 국가에서 이만큼 예배에 제한을 받은 적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예배의 자유를 누리고 있지 못하는 상황에 왔는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저는 맨 먼저 우리와 같은 민족인 북한 주민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국 국무부가 매년 지정하는 ‘종교자유특별우려국 명단’에 북한이 또다시 포함됐습니다. 북한은 2001년 이후 19년 연속 종교자유특별우려국으로 지정되고 있으며, 박해감시단체인 오픈도어즈가 매년 발표하는 박해국가순위에서도 19년 동안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김일성을 믿는 그곳에서 기독교나 다른 종교는 일체 허락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순교를 당하거나 정치범 수용소에 들어가게 되며 그곳에서도 가장 혹독한 곳 가장 깊은 갱도에서 강제 노역을 당합니다. 우리의 제한 된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신앙의 자유가 없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조금이나마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북한주민들을 생각하라는 것임을 알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더욱 기도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 우리는 그동안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보다는 사람을 가까이 하고 세상을 가까이 하지 않았나 생각해봐야 합니다. 물론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모임도 중요하지만 그 모임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함보다는 사람을 사귀기 위한 방편이 아니었나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사귐, 모임은 주님께 이르도록 하는데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몬:6). 취미나 흥미 위주가 된다면 육신이 자랄지언정 영혼은 유익을 보지 못합니다. 야곱에게는 열 두 아들과 딸 디나가 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세겜에 머무를 때 디나가 그곳에서 추장의 아들 세겜에게 강간을 당하게 됩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땅 여자를 보러 나갔더니”(창34:1). 디나가 강간을 당한 것은 바울처럼 기도처를 찾기 위하여 가다가 당한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듣는 곳을 찾기 위하여 간 것도 아닙니다. 그곳에서 또래 친구를 사귀러 나가다가 당한 것입니다. 바울은 사람을 찾기 위하여 간 것이 아니라, 기도처를 찾다가 여인들을 만나 전도하였고 그곳에서 루디아를 만났습니다(행16:11~15). 디나는 친구를 찾다가 세겜을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고 했던 바울은 하나님을 만났을 뿐 아니라 전도대상의 여인들도 만나게 되었지만 친구를 찾으러 간 디나는 세겜에게 잡히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필요한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지만 하나님을 멀리하면 이처럼 사나운 환경을 만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을 받아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습니다. 그는 가나안 땅을 향하여 나갔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떠난 결과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마침내 거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탕자는 스스로 잘 살기 위하여 떠났다가 결국은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애굽은 떠나야 할 곳이지만 가나안은 가야 할 곳입니다. 세상은 멀리해야 할 곳이지만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지향해야할 곳입니다. 버렸던 세상에 대하여 자꾸 애착을 가지면 다시 세상 신 마귀에게 잡히고 맙니다. 반면 주님께 소망을 두고 주님을 위하여 옛 사람을 버리고 떠난다면 필요한 모든 것을 주께 공급받습니다. 환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는 말씀입니다. 새 해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 곧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는 음성을 듣고 기도와 말씀에 착념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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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1-03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성탄절의 선물’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마2:11) 사람들은 흔히 생일에 선물하거나 축하 파티를 합니다. 생일 선물을 받는 주인공은 파티에 참석한 사람이 아니라 생일 당사자 입니다. 김씨 생일에는 김씨가 선물을 받습니다. 이씨의 생일에는 이씨가 받습니다. 간혹 다른 사람을 통하여 전할 수 있지만 종착점은 생일을 맞이한 그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탄 선물은 그렇지 않는 것 같습니다. 주인공인 예수님이 아니라 모두의 생일처럼 선물을 주고받고 싶어 합니다. 그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겠지만, 우리가 새겨야 할 것은 가장 먼저 예수님께 드려야 합당한 생일 선물이 되며 성탄절 의미와도 잘 부합됩니다. 성탄절이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예수님을 기쁘게 하려는 마음보다 자신들의 기분이나 내며 흥청망청 즐긴다면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오신 예수님의 정신과는(마1:21) 전혀 상관없는 성탄절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번 성탄절은 예수님께 드릴 성탄 선물을 상고하도록 하겠습니다. 가장 먼저 본을 보인 사람들은 동방박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서 왕권의 상징인 황금과 신성의 상징인 유향, 십자가의 죽으심을 상징하는 몰약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요셉과 마리아에게 준 것이 아닙니다. 연인들에게 준 것도 아닙니다. 친구에게 준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께 드린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동방박사들이 생일의 주인공인 예수님께 드린 것처럼 성탄절은 예수님께 선물을 드려야 합니다. 롬12:1 이하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고 말합니다.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기뻐하는 선물 가운데 하나는 신자들 자신입니다. 지금껏 우리 자신의 몸을 우리가 주관하고 살았지만, 하나님께 드리는 순간부터 자신의 몸은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이 됩니다. 자신의 뜻대로 마음대로 살아갈 권리를 상실하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마음이 새로워집니다(롬12:2). 새로운 마음이라야 분별력이 새로워집니다. 신앙인들이 여전히 믿지 않는 사람들과 분별이 같은 이유는 하나님께 몸을 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몸 드리는 사람은 구약시대 제물에 불이 내려와 하나님께 상달 되었던 것처럼 성령의 은사를 주셔서 새롭게 하십니다.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면 다소 시련은 있을지라도 평강의 길을 가게 됩니다. 예수님을 목자로 삼고 살아가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시23:1). 구원함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하게 됩니다(사33:6). 신자들이 영원히 추구해야 할 길입니다. 이 성탄절에 신앙인들이 예수님께 드려야 할 선물은 무엇일까요? 시50:14는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드릴 선물 가운데 하나는 감사입니다. 사람들이 제 마음에 드는 일을 만나면 누구나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에 안 드는 일을 만날 때 감사드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원망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일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환경이 좋을 때나 안 좋을 때나 하나님을 믿음으로 감사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십니다. 제사는 상처가 있습니다. 피 흘림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마음에 상처가 있고 마음의 피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이 참 제사일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세 번째 선물은 이웃을 돌아보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예수님께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5:40).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지극히 작은 자는 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의 눈에 소외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자신이 누구에게 선물을 받으려 할 것이 아니라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자녀는 부모님을, 형제는 형제를, 친구는 친구를, 직장인은 직장 동료를 예수님이라 생각하는 것 역시 예수님께 드리는 귀한 선물이 될 것입니다. 서로의 겉모습을 볼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보고 서로를 귀히 여기는 복 된 성탄절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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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24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신앙인들의 자유의지’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1~32). 가끔씩 신앙인들은 ‘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도록 그대로 두셨을까?’ 하는 의문을 품습니다.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느 대형 식당 운영진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과일을 어느 때 주는 것이 좋은가?”하는 문제였습니다. 식전에 주어야 한다는 사람이 있었고, 식후에 주어야 한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식전에 주어야 한다는 사람은 과일과 밥은 소화속도가 달라서 과일을 나중에 주면 위 속에서 밥 위에 있는 과일이 부패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반면 식후에 주어야 한다는 사람은 끓인 음식물은 소화효소가 파괴되기 때문에 식후에 생과일을 먹으면 과일에서 나오는 소화효소들이 소화를 돕는다는 것입니다. 과일이 먼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밥이 먼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다툴 때 한 종업원이 나서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식후에도 식전에도 주지 말고 식사 때 과일도 함께 보내는 것이 어떨까요? 그러면 식전에 먹는 것이 편한 사람은 과일부터 먹을 것이고 식후에 먹는 것이 편하다면 식후에 먹을 것입니다.” 그러자 모두 그 의견에 찬성하였고 다시는 그런 문제로 의견충돌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슬하에 자녀가 없이 단칸방에 사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이 부부에게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남편은 추위에 약하지만 아내는 추위에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반면 남편은 더위에 강하지만 아내는 더위에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금슬이 좋은 이 부부도 겨울이 되면 항상 온도가지고 티격태격하였습니다. 아내는 21도, 남편은 23도가 적당하다고 하며 서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방이라도 따로 있다면 난로나 선풍기로 서로 온도를 조절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도 못한 형편이었습니다. 이 날도 부부는 온도 때문에 서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남편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원하는 23도로 하면 당신이 아무리 옷을 얇게 입는다고 해도 벗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21도는 체감할 수 없겠군요. 하지만 당신이 원하는 21도로 하고, 내가 옷을 두껍게 껴입는다면 나는 23도를 누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내가 양보하지요.” 그리하여 부부 사이에 온도 문제는 해결 되었습니다. 동서 냉전이 한참 진행되던 때에 K라는 나라(가상의 나라)에서는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할 것인지 공산주의를 선택할 것인지 국회에서 격렬한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한 의원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나라를 공산주의로 만든다면 공산주의 속에 자유가 말살되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자유 민주주의를 선택하면 자유 안에 공산주의도 포함될 수 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사유재산을 포기하고 공동체를 이루어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념적으로 공산주의를 택하는 순간 우리는 물질 취급을 받게 되고, 이념을 위하여 개인의 인격은 말살 될 뿐만 아니라 사유재산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의 말을 모두가 수긍하였고 그 나라는 지금까지 국가적으로 채택 된 자유민주주의 속에서 개개인이 모여 다양한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습니다. 이 세 예문에서 보시다시피 문제 해결의 가장 합리적인 길은 자유 의지를 누릴 수 있는 길에 있습니다. 식전이든 식후든 개인이 선택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 조절을 스스로 할 수 있는 온도상태, 개인의 의지에 따라 다양한 방식을 선택할 수 있는 이념, 이 모든 것들의 핵심은 자유 의지입니다. 자유와 사상을 억압하는 이념이 있다면 그것은 그런 사람들끼리 따로 모여 살지언정 한 국가의 이념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아담과 하와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습니다.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려고 할 때 그의 손을 마비시키지 않는 이유입니다. 지금도 신앙인들의 자유 의지는 법과 질서를 해치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침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보혈로 우리를 사시고 죄와 마귀로부터 구원하여 주셨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든지 내 마음대로 살든지 우리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저의 자유 의지까지 주님께 드리기를 원합니다. 제 뜻대로 살면 마귀에게 사로잡힐 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 자신을 주님께 드리면 주님의 보호가 따를 뿐 아니라 심령에 평강과 진리의 자유를 누리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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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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