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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존귀한 자’
-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49:20). 인류 역사상 가장 불행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히틀러? 네로? 김일성? 이런 사람들도 당연히 후보 가운데 한 사람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특별히 택함을 받은 제자였지만, 그리스도를 팔아넘김으로 가장 파렴치하고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그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배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다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마26:24). 조선인보다 더 조선을 사랑한 미국인 조선 독립운동가 헐버트(1863-1949)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1886년 그의 나이 23세 때 선교사로 조선에 왔습니다. 헐버트는 여느 선교사처럼 조선에서 고생할 각오를 하고 왔지만, 막상 와보니 조선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열악했습니다. 그는 ‘선교사라면 자신이 선교하는 나라의 지리 역사 문헌 등에 대하여 특별히 공부하고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적극적으로 조선을 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나흘 만에 한글을 깨우쳤습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언어 자질이 남달랐기 때문이라기보다, 익히기 쉬운 한글의 특징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그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훌륭한 글자를 만들 수 있는 민족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부터 조선에 애정을 가지고 조선을 위하여 열정을 불태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훈민정음을 보고 세 가지 면에서 놀랐습니다. 첫째는 매우 과학적인 것에 놀랐고, 둘째는 가장 익히기 쉬우면서도 사용할 수 있는 범위가 매우 넓은 점에서 놀랐고, 셋째는 이런 글자를 국민들이 무시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매우 귀중한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익히고 발전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천시하는 것을 보고 만일 조선이 훈민정음을 중요시 여겼다면 그토록 낙후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가룟유다는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택함을 받은 제자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제자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19:29-30).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주신 약속은 위임 받은 심판의 권세와 영생 상속이었습니다. 계시록에는 열 두 사도에게 주어지는 다음과 같은 상급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성에 성곽은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 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계21:14). 그들은 하나님 나라 성벽의 주춧돌이 되는 영광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가룟유다는 자신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서 그런 영광을 받지 못하고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현 위치가 어떤 상황인지 안다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나의 형편 나의 처지는 존귀한 위치입니다. 우리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 끝날 까지 항상 함께 계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우리는 복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니 때로는 시험들 일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유익하게 하시고 모든 것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실 줄 믿고 감사함으로 주님을 영화롭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한 가룟유다는 결국은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에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장자의 명분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몰라서 야곱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고라는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는 레위 지파에 속한 것에 대하여 귀중함을 모르고 제사장 직분을 탐내다가 결국 망하고 말았습니다(민16:9). 우리가 가진 명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분입니다. 우리가 가진 지위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자신의 자리가 얼마나 존귀한지 깨닫고 더욱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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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존귀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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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치료의 하나님’(출 15:22-27)
-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늘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힘들고 어렵고 낙심되는 일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이때 이 어려운 과정을 어떻게 통과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홍해를 건너 3일 동안 수르 광야를 지나는 동안 마실 물이 없어 큰 고통을 당했습니다. 다행히 마라에 이르러 물을 발견했으나, 그 물이 써서 마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진퇴양난에 처하며 위기를 만났습니다. 애굽의 병사들의 추격을 뿌리치고 홍해를 건넜던 3일 전의 감사와 감격, 기쁨과 찬양은 온데간데없고, 모세를 원망하고 낙심하며 좌절했으며, 백성들의 불평은 극에 달했습니다. 그때에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절실한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25절상). 하나님께서는 쓴 것을 달게도 만드십니다. 이 같은 이적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치료자가 되심을 계시해주셨습니다(26절).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성도의 아픔을 치료하십니다. 깨어지고 불행한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쓴물을 단물로 바꾸는 역사를 나뭇가지가 일으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모세가 믿음으로 그대로 순종했을 때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나 사이에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지 않으면, 그 말씀이 내게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합니다. 우리는 불신의 마음을 떨쳐버리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 굳게 서야 하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며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서,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 은혜와 축복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불신의 마음을 떨쳐버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인생에서 만나는 마라의 쓴물(재물, 건강, 각종 문제들)을 단물로 바꾸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들이니,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 원망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시고 지금도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제일 바라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는 것입니다. 욥은 수많은 고난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감사했습니다. 그럴 때 갑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롬 8:28). 마라의 쓴물을 달게 한 나무는 물가 가까이에 있었듯이, 이 세상 마라의 쓴물 때문에 고생하는 우리 곁에도 성령님이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마라에서 붙든 나뭇가지는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의 생존을 지켜주는 비결이 무엇인지를 다짐하게 합니다. 우리의 인생길에도 힘들고 어려운 마라를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치료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치료의 말씀을 듣기를 기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능력이며, 역사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마라를 지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두신 엘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27절). ‘엘림’이란 오아시스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라’라는 고통과 고난을 잘 이겨내고 통과했을 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출애굽 역사는 하나님께서 하신 놀라운 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 출애굽의 역사가 우리의 삶에서 구현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며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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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치료의 하나님’(출 15: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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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겸비함’
-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저가 내 앞에서 겸비함을 인하여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왕상21:29). 동서를 막론하고 하나님께도, 사람에게도, 결코 용서 받을 수 없는 사람으로 보이는 포악한 군주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로마의 네로, 조선의 연산군, 독일의 히틀러,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등입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북왕국 아합이었고, 남왕국의 므낫세였습니다. 아합은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우상을 이스라엘에 들여놓고 아무 거리낌 없이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습니다. 그것을 반대하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자기의 나물 밭으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아합의 삶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저가 그 아내 이세벨에게 충동되었음이라.”(왕상21:25). 곧 아합은 이세벨에게 팔려 살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며, 충동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의 죄악에 대한 결과로 하나님의 종 엘리야는 아합에게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재앙을 네게 내려 너를 쓸어버리되 네게 속한 남자는 이스라엘 가운데 매인 자나 놓인 자를 다 멸할 것이요, 또 네 집으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처럼 되게 하고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처럼 되게 하리니 이는 네가 나의 노를 격동하고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까닭이니라 하셨고”(왕상21:22). 이 말을 들었을 때 아합은 다음과 같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행보도 천천히 한지라.”(왕상21:27).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아합에 대하여 엘리야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저가 내 앞에서 겸비함을 인하여,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왕상22:29). 이러한 말씀을 볼 때, 하나님은 어느 누구든지 회개하고 돌이키면 사해주시는 분이며, 겸비함을 보이는 자는 내리기로 한 재앙까지 돌이키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히틀러같이 악한 자라도 돌이키기만 하면 사해 주시는 분이며, 자기 고모부를 죽이고, 이복형까지 죽인 김정은이라 할지라도 회개하여 합당한 열매를 맺으면 용서해 주시는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에 속아 죄를 지었을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자백하면 긍휼을 베푸시고 사해주시는 주님 앞에 담대히 나가야 할 것입니다(히4:16). 하나님께서는 아합의 겸비함을 들은 것이 아니라 보았습니다. 입으로 겸비를 외친 것이 아니라 직접 겸비한 행동을 한 것입니다. 우리도 겸비를 외치기는 쉽습니다. 겸비함을 좋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직접 겸비를 보여주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겸비함을 보십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함을 보이는 것 가운데 하나는 겸비이기 때문입니다. 아합이 엘리야의 책망을 강하게 들었을 때 성령께서는 아합의 마음을 열어 그 자신의 죄악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가 한 행동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습니다. 선지자들을 죽이고, 나봇을 죽인 일들이 얼마나 끔찍한 죄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내가 이렇게 끔찍한 일들을 저질렀다니, 그까짓 나물이 뭐라고, 나봇의 포도원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원하는 만큼 먹을 수 있는데, 하나님께 충성된 사람 나봇을 나의 사욕을 위하여 죽였구나’ 그야말로 자신이 미웠고 한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며 굵은 베에 누운 것입니다. 너무나 마음이 아파 음식을 먹을 마음도 사라진 것입니다. 옷을 찢는 것은 통회하는 마음, 상한 마음을 의미합니다(사57:15). 신앙인들이 믿음과 착한 양심을 쓰려고 할 때 자신이 착한 양심을 못 쓰는 사람임을 보게 됩니다. 그럴 때 중심에서 통회가 나옵니다. 제가 저를 볼 때 매일 매일 탄식하게 됩니다. 특히 하나님의 영광은 말 뿐이고, 저의 영광을 나타내려 하는 마음이 가득 찬 모습을 볼 때 탄식하게 됩니다. 식탐으로 인하여 탄식하게 됩니다. 게으름으로 인하여 탄식하게 됩니다. 저 실제 모습보다 그 이상 되게 보이려하는 외식하는 모습을 볼 때 탄식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한 후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세마포로 시체를 쌌듯이(눅23:53), 베로 몸을 동인다는 것은 자신을 죽은 자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금식은 식물을 금하는 것을 뜻하는데 영적인 금식은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대로 살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굵은 베에 눕는다는 것은 편안한 생활을 추구하지 않고 고난 받을 각오를 하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말로만 하는 겸손이 아니라, 통회하는 겸손, 죽은 자 곧 십자가 지고 살아가는 겸손, 자신의 기쁨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기쁨만을 추구하는 겸손, 주님을 위하여 고난 받을 각오로 살아가는 겸손, 의복과 삶에 있어서 검소하고 소박한 생활의 겸손을 보이기를 우리 주님께서는 원하십니다. 이러한 겸손을 보일 때 주님은 “아무개가 내 앞에서 겸손함을 보느냐?” 하시며 은혜를 내려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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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겸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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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하나님만 의뢰합시다’(잠 22:19)
- 사람의 관계가 사랑의 관계에서 미움의 관계로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항상 한결같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지 못한 것은 만물보다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렘 17:9) 하신 말씀과 같이 사람의 마음이 타락하고 부패하고 교만하고, 악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환경이 아닙니다. 그 어떤 사람도 아닙니다. 그 어떤 사건도 아닙니다. 내 마음의 문제요, 내 믿음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남의 탓, 환경 탓, 무슨 탓으로 돌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들의 어떤 행동도, 환경도 모두 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므로,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보고, 사랑으로 보며, 은혜로 보아야 합니다. 좋은 쪽으로 해석하고, 좋은 결과를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좋으신 하나님이시니 좋은 것으로 주실 것이며,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범사에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뜻’을 깨닫고, 하나님을 인정하면 적대감, 불평불만, 변심들이 살라질 것입니다.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시 37:8)고 하셨습니다. 분을 내고 불평을 하면 이것이 습관이 되어 악한 길에 빠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정로로 가는 것입니다. 분노와 불평을 하다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지 못하고, 도리어 마귀가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불평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도 감사하는 사람은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자신은 어떻게 되든지 하나님만 영광을 받으시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훌륭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삶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그 앞에서 잠잠히 바라는 삶입니다(시 62:5). 사람 앞에서, 환경 앞에서 잠잠한 사람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사람에게 실망하고, 속고, 세월에 속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만 의뢰해야 합니다. 신령한 계시의 정신을 받아 마음눈이 밝아지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그 영광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엡 1:18). 우리는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람은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주고 사랑하시면 됩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단순한 구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냈다는 것은 그때부터 사는 목적이 달라지고, 가치관이 달라지며, 사는 방향도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불러주셨기 때문에 나의 소중한 가치를 깨닫게 되고, 나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미래 지향적인 삶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진리를 주신 목적은 여호와를 믿고 의뢰하게 하는데 있습니다. “여호와를 의뢰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깨닫는 대로 그 결과를 하나님의 손에 맡긴 채, 어떤 어려움과 희생이 따르더라도 그것을 지키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뢰하며 맡기고 나가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화가 변하여 복이 되게 하시며, 그 믿음의 분량대로 채워주십니다. 그리고 그 거룩한 사역을 완수하도록 필요한 지혜와 물질과 건강을 주십니다. 지난 날 우리가 살아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내 힘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일뿐입니다. 지금까지의 체험을 통해 현재와 앞으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은혜로 이끌어주실 것을 확신하며, 하나님께 더욱 의뢰하여 의지하는 삶을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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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하나님만 의뢰합시다’(잠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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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형편에 따른 치료’
- “창세 이후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요9:32-33). 소경으로 태어나 구걸하며 지내던 사람이 예수님께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시기하던 사람들이 그 사실을 믿지 못하고 ‘예수님이 어디 계시는지’ ‘그가 어떻게 고침을 받았는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예수님이 어디서 왔는지’ 한두 번도 아니고 반복해서 물어왔습니다. 이에 대하여 고침받았던 사람은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 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요9:30-33)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요9:34)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글을 통하여 소경이었던 사람의 말은 상당히 조리 있고 설득력이 있지만, 유대인들은 다소 감정적이고 억압적이며, 전혀 말씀에도 맞지 않는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소경이었던 자가 직업의 종류가 다양하지 않았던 당시 구걸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었지만, 그의 지적 소양과 인격만큼은 다른 사람에게 무시 받을 만큼 천박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년 공생기간 많은 환자의 병을 고치셨습니다. 고침을 받는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장애인들과 불치병 환자들의 병을 고쳐 주셨지만, 세부적인 면에서는 다소 차이가 있었습니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을 마치시고 산에서 내려오시자 한센병 환자 한 사람이 절하며 말하였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그러자 즉시 깨끗해졌습니다(마8:1-4). 반면 누가복음 17장에서 등장하는 열 명의 한센병 환자에 대하여는 그들이 소리 높여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했을 때 손을 대지 아니하시고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눅17:14)고만 하셨습니다. 물론 그들도 다 나았습니다. 이 외에도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에 걸렸을 때, 그것을 직접 꾸짖으셨고(눅4:39), 손 마른 사람에게는 손을 내밀도록 하였습니다(눅6:10). 귀먹고 어눌한 자에게는 예수님의 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고 손에 침을 뱉어 그 혀를 만진 후 “에바다”라고 하시며 고쳐주셨습니다(막7:31-35). 여러 방법 가운데 본문에 등장하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는 과정은 4복음서에 나타난 병 고치는 사역 가운데 가장 많은 과정을 거칩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진흙에 침을 뱉으시고 진흙을 이기셨습니다. 둘째, 그 진흙을 소경의 눈에 바르셨습니다. 셋째,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대로 순종한 소경은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단지 한마디 말씀만 하셔도 무슨 병에 걸렸든지 낫게 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뜻을 모두 헤아릴 수 없지만, 그것은 각 사람의 형편에 따른 치료였을 것입니다. 그 형편은 각 사람 인품의 정도와 믿음의 정도입니다. 이 소경이었던 사람이 바리새인과 같은 유대인 장로들을 상대한 것을 보면 상당히 똑똑하고 야무진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실 믿음에 있어서 야무지고 똑똑한 것은 썩 바람직한 것이 못 됩니다. 오히려 걸림돌이 될 때가 많습니다. 그가 알고 있는 지식들과 논리들이 믿음을 사용하지 못 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소경 되었던 사람도 그가 고침을 받기 전에는 얼마간의 변화 되는 과정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소경이라는 사실과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 있음을 깨달은 후로는 겸손과 약함을 배웠을 것입니다. 그의 본성대로라면 예수님께서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를 때,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이 사람 뭐 하는 거야? 내가 앞을 못 본다고 이렇게 더러운 흙을 내 눈에 발라? 나를 무시해도 보통이 아니구먼.” 예수님께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했을 때는 “바를 때는 언제고, 이제는 씻으라고 하는 거야? 그리고 눈을 씻기 위하여 실로암까지 갈 필요가 있어? 여기서 씻으면 되지. 참 별사람도 다 봤네.”하고 따지고 돌아섰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소경은 한 마디 대꾸하지 않고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그만큼 그가 볼 수 없는 약점을 통하여 온유하고 겸손해진 표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이었던 사람에게 이 세 과정을 통과하게 한 후 고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쓰실 때는 이전 모습대로 쓰시지 않습니다. 새롭게 고치신 후에 쓰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질까지 바꾸는 것은 아닙니다. 모세는 모세의 기질대로, 베드로는 베드로의 기질대로 쓰셨고 바울은 바울의 기질대로 쓰셨습니다.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게 하고 십자가에 처리하신 후 성령의 열매를 바탕으로 일하게 하신 것입니다. 소경의 경우 이전에는 자신을 위하여 이론이 강하고 변론적인 사람일 수 있었지만, 믿은 후에는 하나님이 주신 기질로 예수님을 위하여 유대인들 앞에서도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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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형편에 따른 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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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독연 칼럼] 이상길 목사의 ‘기도합시다’(출 14:15-17)
- 그리스도인에게는 모든 일이 기도를 통해서 계획되고,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정로로 가게 됩니다. 기도는 내 뜻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하려고 하면 어려움이 많이 생깁니다. 때로는 기도가 힘들고 귀찮을 때도 있습니다. 특히 새벽기도는 힘들 때가 많습니다. 그래도 기도해야 답이 나옵니다. 기도에 길이 있습니다. 새벽기도는 성도들만이 힘든 것이 아니라 목회자들도 힘이 듭니다. 그러다 보니 오래 전에 어느 목사님이 저에게 ‘미국교회는 새벽예배를 하지 않는데, 꼭 새벽예배를 할 필요가 있느냐’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한인교회는 새벽예배를 드리지 않습니까? 새벽예배가 힘들거나 귀찮아서 그런 말을 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청년시절에는 ‘새벽예배는 순교다. 그러므로 새벽예배는 순교정신으로 드리는 것이라며’ 독려하시던 목사님이 생각이 납니다. 하루의 시작점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것입니다. 열심히 기도해야 힘도 얻고, 믿음이 새로워지고, 성장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도우십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출애굽하여 가나안으로 가는 중, 앞에는 홍해 뒤에는 애굽 군대가 쫓아왔습니다. 진퇴양난입니다. 그때 모세는 무엇을 했습니까? 기도했습니다. 모세는 그 어려운 상황에서 살아날 수 있는 길은 기도밖에 없다고 믿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홍해는 갈라졌습니다(출 14:15-16). 탈북여성 1호인 김영실목사님은 총살장으로 가는 길에 ‘아버지 살려주세요!’라고 간절히 기도했다고 합니다.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절규입니다.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겠습니까? 뼈가 녹는 간절함이었겠지요. 그 결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인생에 감옥과 같은 문이 가로막혀 나갈 길이 없어도, 기도하는 성도에게 문이 열려지는 역사가 일어나는 줄로 믿습니다(행 16:19-26). 에스더는 위기에 처한 자기 민족의 소식을 듣고, 사흘 동안 금식하고 기도했습니다. 간절히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담대하게 왕에게 나아갔고(에 4:16), 결국 위기에 처한 자기 민족을 구했습니다. 다윗도 여러 번의 죽을 지경에 처했으나. 그러한 위기에서 생명을 구해주시길 하나님께 기도하여,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구원하여주셨습니다.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우리에게는 좌절보다 신앙적 결단이 필요합니다. 용기를 갖고 기도할 때, 우리에게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까? 기도하십시오. 교회 성장, 교회 부흥 역시 열심히 기도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기도는 만능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고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심은 불신앙인 것입니다. 특히 영적전쟁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는 마귀가 물러가지 않습니다. 고함지른다고 물러갈 줄 압니까? 하나님의 능력으로 물리치시기를 바랍니다. 최근에 한미일 동맹관계가 강화됨으로 중국과 북한이 심한 자극을 받아 반발이 심한 상황입니다. 북한은 전술핵을 사용하여 우리나라의 주요위치를 선제공격대상으로 삼아, 연일 미사일을 쏘아 되며 불안감을 조성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가 대처해야 할 가장 우선순위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이 되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자의 편이십니다. 기도는 나를 변화시키고, 가정을 변화시키고, 사회와 국가를 변화시킵니다. 방법론에 앞서 우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기도합시다. 하나님께서 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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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독연 칼럼] 이상길 목사의 ‘기도합시다’(출 14: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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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4:26). 석수장이가 바위를 부술 때 큰 망치를 가지고 무조건 때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바위 사이에 난 틈을 찾습니다. 조그마한 틈이 보이면 쐐기도끼를 틈 사이에 끼우고 비로소 망치질을 합니다. 그러면 큰 바위라도 갈라지고 깨어집니다. 마귀가 신앙인들을 파멸시키기 위하여 틈을 노립니다. 마귀에게 보이는 틈이야 다 헤아릴 수 없겠지만 크게 두 가지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분노는 마귀에게 주는 틈입니다. 만일 분노가 오래 지체되면 마귀는 여지없이 그 틈을 뚫고 분을 품은 사람을 파멸로 몰아넣고 맙니다. 사울이 멸망하게 된 것도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라는 여인들의 춤추며 노래하는 소리에 격분하였기 때문입니다(삼상18:6-8). 압살롬이 스스로 죽음의 길로 간 것도 자신의 누이 다말을 강간한 이복형 암논에 대하여 오랫동안 분을 품은 결과였습니다(삼하13:32). 하나님을 경외하였던 아사왕은 그의 잘못을 책망하였던 선지자에게 노하다가 회개하지 않았으므로 죽게 되었고(대하16장), 매우 총명했던 웃시아 왕 역시 분노를 품다가 한센병이 발하여 여생을 별궁에서 홀로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대하26:16-23). 이처럼 분노는 마귀로 틈타게 하여 상대방보다 분노하는 자신이 더 해를 입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분을 품지 않을까요? 분노는 증상입니다. 허리가 쑤시고 아픈 것은 병의 원인이 아니라 증상이듯 분노 역시 증상입니다. 하지만 디스크가 돌출 되었거나 근육이 뭉쳤다면 그것은 허리 통증의 원인이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분노가 병의 증상이라면 병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지정의로 대표되는 자기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뜻이 가로 막히고 상처를 받을 때 분노를 발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분노를 품지 않으려면 자신의 지정의를 십자가에 처리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자신의 지정의를 무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잠3:6).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것은, 일어나는 일들마다 하나님의 허락하심임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장이 ‘쿵’ 찍혀 있음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 감람산 길로 올라갈 때, 베냐민 지파 사람 시므이가 그를 저주하였습니다.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 대신에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붙이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인고로 화를 자취하였느니라.”(삼하16:7-8). 이 말에 대하여 아비새는 격분하여 다윗이 명하기만 하면 단칼에 시므이의 목을 베어버리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삼하16:10). 이처럼 다윗은 시므이를 단순한 시므이로 보지 않고, 그를 저주하라고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사자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시므이에게 격분하지 않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긍휼히 여김을 받을 계기로 삼았습니다.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 하고”(삼하16:12). 그의 말대로 하나님께서는 시므이의 저주를 다윗에게 선으로 바꾸셔서, 다윗이 예루살렘 왕궁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은 신앙인들이 분노하지 않게하는 첩경입니다. 만일 분노하였다면 본문처럼 해가 지기 전에 화해하고 풀어버려야 합니다. 두 번째로 마귀가 신앙인들에게 노리는 틈은 그들을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마귀와 악한 자들은 강자에게는 굴욕적이며 약자에게는 한 없이 강한 특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귀에게는 두려움 없이 처음부터 강하게 나와야 합니다. 한 번은 아람왕 벤하닷이 이스라엘왕 아합에게 사자를 보내어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네 은금은 내 것이요, 네 처들과 네 자녀들의 아름다운 자도 내 것이니라.”(왕상20:3). 그러자 아합왕이 다음과 같이 응답하였습니다. “내 주 왕이여 왕의 말씀 같이 나와 나의 것은 다 왕의 것이니이다.” 아합은 이렇게 대답하면 벤하닷이 만족하게 여겨 거기서 멈출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자 벤하닷은 한 층 더 강하게 나옵니다. “내일 이맘 때에 내가 내 신복을 네게 보내리니 저희가 네 집과 네 신복의 집을 수탐하여 무릇 네 눈이 기뻐하는 것을 그 손으로 잡아 가져가리라.”(왕상20:1-6). 처음에는 신복의 집이 포함되지 않았지만, 두 번째 사자를 보냈을 때는 신복까지 포함되어 모두 가져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아합이 처음부터 약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탄의 공격은 받아주면 받아줄수록 더 큰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니 처음에 딱 거절해야 합니다. 술이나 담배 도박 마약 등은 사탄의 사자들인데 처음에 거절해야지 조금씩 양보하면 마침내 그들이 사람을 삼키고 맙니다. 처음에 항거해야 합니다. 때가 늦으면 이기기 힘듭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도 처음에 과감하게 끊어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혼미하게 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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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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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차악을 허락하신 하나님’
-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마19:8-9).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처녀 딸을 시집보내는 자도 잘하거니와 시집보내지 아니하는 자가 더 잘하는 것이니라.”(고전7:38). 이처럼 혼인 문제에 있어서 최선의 길은 ‘주님을 위하여 시집가지 아니하고, 장가가지 아니하고 독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 주님을 위하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둘째, 은사가 있어야 합니다. 둘 가운데 하나라도 맞지 않는 것이라면 이기적으로 되거나 탈선하기 쉽습니다. 혼인에 있어서 최선의 길은 아니지만 차선이 되는 것은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입니다. 혼인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부합한 일이며, 사회 구성원을 존속시킬 뿐만 아니라 역사를 계승 발전시키는 원동력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혼인 문제는 최선과 차선의 차이일 뿐 모두가 선입니다. 선택 문제에 있어서 최선과 차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투표를 하거나 일이 어그러질 때 우리는 ‘일단 최악만 피하자’하는 심정이 될 때가 있습니다. 차악이라도 선택할 수밖에 없는 마음입니다.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한 후에 마음에 자책하고 통회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그런 다윗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갓이 다윗에게 나아가 고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마음대로 택하라. 혹 삼년 기근일지, 혹 네가 석 달을 대적에게 패하여 대적의 칼에 쫓길 일일지, 혹 여호와의 칼 곧 온역이 사흘 동안 이 땅에 유행하며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온 지경을 멸할 일일지 하셨나니 내가 무슨 말로 나를 보내신 이에게 대답할 것을 결정하소서.”(대상21:11-12).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내리신 벌 세 가지는 모두 다윗에게 고통을 가져오는 것들이었습니다. 다윗은 모두 고통스러운 것이었지만 덜 고통스러운 것으로 온역의 징벌을 택하였습니다. 다윗은 결국 가장 지혜로운 선택을 한 것입니다. 한 번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하여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마19:3). 이 질문의 의도는 이렇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을 가리켜 예수님 앞서 보냄 받은 자라고 하신 일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가르침이 비슷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헤롯 안디바와 헤로디아의 이혼과 부정한 결혼을 반대하다가 결국 참수형을 당하였습니다(마14:3-12). 이에 바리새인들은 이혼 문제를 예수님께 질문함으로써 만일 예수님께서 이혼을 금지하신다면 이를 정치적인 쟁점으로 삼아 결국 세례 요한과 같은 운명에 빠뜨리고자 획책한 것입니다(Schaff). 이혼 문제에 대하여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19:4-6). 예수님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이혼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마19:7)라고 다시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본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마19:8-9). 예수님의 말씀은 비록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여 아내 버림을 허락하셨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본뜻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간음 외에 이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원칙이지만, 완악한 사람들에게 이혼하지 말라고 한다면 그들은 이혼하지 않는 테두리에서 이혼보다 더 심한 악행을 저지를 것입니다. 곧 아내를 학대하거나, 구타하거나, 타인하고 정을 통하거나, 아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을 맡길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자비의 하나님께서 여인들이 당할 수도 있는 최악을 피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차악(이혼)을 허락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조상들의 예를 들어 잘 알 수 있습니다. 완악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유교의 영향을 받았던 조선은 한 번 시집가면 이혼할 수도 재혼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에게나 가문에 큰 수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속아서 하게 된 혼인이더라도, 남편이 간음한 경우가 명백한데도, 심하게 구타를 당하고 살아가는데도, 시모의 시집살이가 심함에도 불구하고 참아가며 살아야 했습니다. 간혹 친정으로 돌아간다면 동네에서는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인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경우가 허다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한 자들의 이러한 일들을 막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악으로 인한 최악보다는 차악인 이혼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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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차악을 허락하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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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기도의 결국은 감사와 유익입니다’(골 4:2)
- 성도라면 누구나 기도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기도해야 한다는 대해서 모두가 공감하며 총론적으로는 다 그렇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각론에 들어가면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는 말이 있듯이, 어떤 이유로든 자기를 합리화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옳지 않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항상 기도에 힘써야 하겠습니다(시 72:15, 시 141:5, 눅 18:1, 눅 21:36, 행 10:2). 기도는 영적 호흡이요, 영적 생명줄과 같습니다. 또 기도는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이며,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길이고, 삶에 활력을 얻는 은혜의 근원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이 아닙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고 명하셨습니다. 좋을 때나, 괴로울 때나, 슬플 때나, 즐거울 때에나 어떤 처지와 형편이든지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소망이 생기고, 환경도 상황도 인생도 바꾸어 놓습니다. 환경과 현실만 보고 구하지 말고, 앞을 바라보며, 입을 크게, 넓게 열어야 합니다(시 81:10). 저희 교회 집사님 중 한 분이 8년 전에 아내가 병으로 위경에 처했을 때, 담당의사가 장례준비를 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낙망이 되어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2년만 더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2년만 더 살아도 어디 입니까? 그 후 정확하게 2년을 더 사시고 하나님나라에 가셨습니다. 장례를 치루고 나서 집사님께서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까 ‘그때 5년만 더 살게 해달라고 기도할 껄’ 후회가 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이성으로, 자기 판단으로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현실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들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히 11:1)? 믿음으로 확신을 갖고 담대하게 구해야 할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역사해주십니다(약 5:15). 그런데 기도의 응답이 더디거나, 간구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실망하며 시험에 들거나 낙심될 때가 있습니다. 저 역시 열심히 기도했는데, 정반대의 결과를 마주칠 때, 혼란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기도자로서 옳지 않은데 말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이루시니, 우리는 기도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간구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실망하거나 무력감에 빠지지 않아야 하며, 시험에 들거나 낙담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기도자는 하나님의 뜻을 기다릴 줄 알고, 소망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진정한 기도는 감사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간구보다 높으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으면 감사할 일이 아닙니까? 또 기도에 열중하며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갔고, 그 만큼 신앙의 성장과 진전을 이루었잖습니까? 기도의 응답이 있기까지 기다리는 인내의 훈련도 받지 않았습니까? 이런 유익을 놓치고 탄식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는 어떤 결과가 나와도 감사와 유익뿐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도로 이끄시어,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굳건하게 세워나가시는 선하시고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응답이 되지 않았다고 해서 낙망해서는 안 됩니다(눅 18:1). 오히려 하나님의 더 큰 사랑과 계획을 알게 되었기에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며, 하나님의 뜻을 존중해야 하겠습니다. 기도는 도깨비 방망이가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항상 온전히 기도에 힘쓰고, 기도할 때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다(골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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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기도의 결국은 감사와 유익입니다’(골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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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감찰하시는 하나님’(잠 16:2)
- 우리가 어느 곳을 가든지 눈에 띄는 것이 있는데 바로 CCTV입니다. 그러나 CCTV가 아무리 많이 설치되었더라도 촬영범위를 넘어서면 촬영이 불가능합니다. 설치되지 않는 곳은 더욱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세상 어느 곳이든지 감찰하지 못하는 곳이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높은 하늘에 계실지라도 땅에 있는 모든 사람을 감찰하시되 마음까지도 감찰하십니다. 그러기에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감찰하사 모든 인생을 보실 뿐(시 33:13)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의 생각과 뜻을 다 아시고(히 4:12: 계 2:23), 그들의 모든 말과 행위를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139:3-4).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자신의 행위는 깨끗하고 양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께서는 겉으로 들어난 행위뿐 아니라 마음속까지 파악하시기에, 사람의 숨은 마음까지, 곧 그의 마음의 생각과 감정과 의향 그리고 행동의 동기까지 살피시고 그것이 과연 깨끗하고 선한지 혹은 불결하고 악한지 평가하십니다. 인간의 육신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또한 인간의 마음을 지으신 분이시기에(시 94:9) 마음속에 있는 생각과 의도를 속속들이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피할 곳이 없고(시 139:7-9),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하나님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습니다(히 4:13).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선한 행위도 감찰하시고, 인간의 악한 행위도 감찰하시니, 하나님의 전지성 앞에서 경외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요셉은 아무도 없는데서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할 때 하나님께 득죄할 수 없다며 그 자리를 뛰쳐나왔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을 보십니다(삼상 16:7). 그러기에 마음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하나님께서만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귀도 역사하기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분별을 통해 마음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특히 마음의 급속한 요동을 가져오는 기분 감정에 지배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말씀과 성령의 지배를 받아 사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기분 감정에 사로잡히면, 마귀에게 마음을 내어주는 게 됩니다.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이루어가야 합니다(롬 12:2). 마음이 바뀌면 행동이 달라집니다. 즉 내 마음이 변하면 삶의 모습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마음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나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바로 정립해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절망에 억눌려 한숨으로 살았다면, 그 절망을 끄집어내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원망과 불평이 내 생애를 지배했다면 그것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게으름과 나태와 미움과 증오도 못 박아야 합니다. 주님보다 이 세상의 다른 것들을 더 사랑하고 귀하게 여겼다면 그것 역시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순간 새로운 자아가 탄생합니다. 그것은 신비로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순수한 마음과 순수한 신앙을 가진 사람을 들어 쓰십니다. 하나님도 믿고, 재물도 믿고, 권력도 지식도 명예도 믿는다면 그것이 바로 혼합주의 신앙입니다. 혼합주의 신앙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깨끗하고 순결하여 하나님께만 충성하는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십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감찰하시되, 사람의 마음도 감찰하시니,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의 눈은 속일 수 없습니다. 코람데오 신앙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살아서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온전한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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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감찰하시는 하나님’(잠 16: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