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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하나님의 은총’
    “다윗이 가로되 사울의 집에 오히려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을 인하여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삼하9:1).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에 블레셋을 이스라엘에서 완전히 쫓아내고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에 모셔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변 여러 나라들을 복속시키고, 공과 의를 행함으로 적당한 사람을 적당한 장소에 배치시키는 행정조직을 완비하게 되었습니다(삼하9:15이하). 그러자 그동안 미루었던 일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사울의 아들이자, 목숨처럼 다윗을 사랑해준 요나단과의 약속을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너는 나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의 인자를 내게 베풀어 나로 죽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를 내 집에서 영영히 끊어버리지 말라. 하고”(삼상18:14~15). 비록 요나단은 전쟁 중에 죽었지만 그 후손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울의 집에 남은 사람이 있느냐?”하고 물은 것입니다. 요나단을 인하여 은총을 베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월요일 70대 후반인 한 성도로부터 간증을 듣게 되었습니다. 감사주일 아침 예배당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다가 갑자기 중심을 잃고 넘어지려했습니다. 그런데 몸이 바닥에 부딪히기 바로 직전 갑자기 누군가 그분의 몸을 껴안고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누구인지 뒤를 돌아보았으나 아무도 없었습니다. 분명히 일으켰는데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 분의 입에서 감사가 터져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분의 도움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 성도는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일이 있은 뒤 세상에 대한 집착이 쓸모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 한 분이 나와 함께 계시는 이상,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이분은 평소에도 구제와 성도 섬기는 일을 잘 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나타내주시니 영광의 하나님을 본 아브라함처럼 버릴 권세가 생긴 것입니다. 다윗이 요나단을 인하여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풀었던 것처럼, 예수님을 인하여 그 자매를 보호하셨던 것처럼 지금도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면 다윗이 요나단에게 베푼 은총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3절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왕이 가로되 사울의 집에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시바가 왕께 고하되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절뚝발이니이다.”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풀 마음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며, 자신은 전달자일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은총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조부 사울의 밭을 므비보셋에게 다 줄 뿐만 아니라(7절), 그가 장애인임을 들어 경작할 종들까지 주겠다는 말이었습니다(9~10절). 왕조가 바뀌면 이전 왕조는 멸문지화를 당하기 쉽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고려라고 하겠습니다. 고려 왕조가 무너지자 후환이 두려운 이성계는 직접 나서지 않고 정도전을 통하여 이전 왕족들을 없애는데 바빴습니다. 강화도나 거제도에 모여 살도록 하겠다고 하면서 그들을 불러 모아 배에 구멍을 뚫어 놓고 중간쯤 가다가 침몰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남아있는 왕씨들은 숨어 지내거나 옥씨나 전씨처럼 한자 획을 더하여서 성을 바꿔 지내기도 했습니다. 다윗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다면 사울 후손들을 남겨두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불씨가 남아있다면 언제든지 복귀운동을 벌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이었고 또한 요나단과의 약속을 저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의 재산을 몰수하지 않고 그대로 므비보셋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것이 큰 은총이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베푼 하나님의 은총은 므비보셋으로 하여금 항상 그의 상에서 식사를 함께 하도록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므비보셋을 자신의 친 아들처럼 귀히 여기겠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성령에 감동된 사람입니다. 다윗은 악기를 잘 다루는 사람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므비보셋은 다윗을 통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음악만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웠을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큰 은총입니다. 행3:1 이하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올라가다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이를 일어서게 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는 돈을 바랐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 때 앉은뱅이에게 돈 만원을 전해주었다면 좋아하고 인사를 꾸벅하였을지 모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이라고 말했을 때 실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라는 가장 좋은 것을 앉은뱅이에게 선물한 것입니다. 은과 금을 그에게 주었다면 결코 일어서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그를 서게 만들었습니다. 다시는 구걸하지 않고도 스스로 일하여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은총 중에 가장 큰 은총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성도들이 자손들에게 물려줄 가장 중요한 은총은 집이 아닙니다. 돈이 아닙니다. 차도 아닙니다.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그 이름이 앉은뱅이를 걷게 하신 것처럼 그 이름이 살아가게도 하고, 되게도 하고, 필요한 것만큼 건강하게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유산으로 물려줄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현실에서는 집을 장만하여 주는 것이 가장 큰 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많은 유산을 물려준들 자녀가 하나님을 모른다면 그야말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비참한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성도 개개인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가장 소중한 기업이고 또 자손들에게 물려줄 유산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자녀를 하나님 앞에 합당하게 기르는데 힘을 써야 합니다. 주일학교 시절에는 비교적 잘 출석하던 학생들이 대학에만 가면 출석률이 저조해집니다. 그만큼 자아가 자라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 자녀가 자원하는 심령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품도록 부모는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갈4:19). 가장 중요한 교훈은 본입니다. 부모님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데 자녀가 그렇게 하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부모님이 힘을 써야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고 부모의 마음과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셔서 사랑하게 해주십니다(신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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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29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예수님과 함께하는 사람’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마12:30).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 사이에는 서유럽의 카톨릭교도들이 성지 팔레스티나와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들로부터 탈환하기 위하여 8회에 걸쳐 원정을 감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전쟁의 명칭은 십자군 전쟁이라고 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실패로 돌아갑니다. 그들의 명목은 성지 회복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각자의 유익을 위하여 참여하였던 것입니다. 곧 봉건영주와 하급기사들은 새로운 영토 지배의 야망에서, 상인들은 경제적 이익에 대한 욕망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십자가를 걸고 싸운다고 해서 승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에 합당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들’은 예수님을 대적하고 미워하고 핍박하는 자들만 해당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하지 아니하는 모든 사람들이 포함됩니다. 위의 사례에서 보듯이 예수님을 위하여 모이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온갖 일을 한다고 해도 그 가운데 예수님이 함께 하실 수 없다면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이요, 예수님께로 오는 사람들을 흩어버리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암3:3은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말씀은 뜻이 예수님과 일치함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위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나 행위가 아니라, 그 일에서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지 그렇지 못하는지에 있으며, 많이 모으거나 적거나가 아니라 그 모임 가운데 예수님이 함께하시는지 그렇지 않는지에 있습니다. 천사의 말을 하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고 구제하여 자신의 것들을 내어줄지라도 그 가운데 예수님이 함께하실 수 없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온통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예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 되느냐.’에 두어야 합니다. 엘리가 제사장으로 있던 시대에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에게 패하기 시작하자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진으로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승리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패하였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전쟁 중에 죽었고 언약궤를 빼앗겼던 소식을 들었던 엘리는 충격으로 의자에서 넘어져 죽고 말았습니다(삼상4).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를 통하여 승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지만 그들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께서 어린 사무엘을 통하여 엘리 집안에 대하여 선고한 심판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그 집을 영영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이른 것은 그의 아는 죄악을 인함이니 이는 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이나 예물로나 영영히 속함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노라.”(삼상3:13-14). 엘리가 하나님보다 그의 아들들을 더 사랑한 자신의 죄악을 회개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죄악을 고치지 않은 상태에서는 언약궤를 모신다고해도 하나님이 임재하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 됩니까? 요8:29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께 보냄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냄을 받아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의 뜻이 없습니다. 스스로 가지 않습니다. 주님의 보냄을 받아, 주님의 지시를 받아 행동합니다. 예수님께서 서울로 가라고 하시면 서울로 가고, 예수님께서 대전으로 가라고 하시면 대전으로 갑니다. 하나님의 보냄을 받아 살아가면 먹고 입고 쓸 것을 일절 공급 받습니다. 부모님이 자녀에게 심부름을 보낼 때 여비와 쓸 것을 마련하여 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요3:34). 하나님의 보냄을 받아 살아가면 성령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보냄을 받아 살아가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은사를 주시므로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 스스로 하면 모든 것을 자신 스스로 공급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여간 힘이 드는 것이 아닙니다. 또 거듭나게도 할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결코 생명을 넣을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보냄을 받아 살아가려고 해야 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 뿐 아니라 직장 또한 주님이 보내시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지도 않았는데 가는 사람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 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에 참예하였다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였으리라.”(렘23:21-22).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이 보내지 않았어도 달음질한다고 나옵니다. 열심이 대단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듣고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찾아 행합니다. 자신의 양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감각을 살핍니다. 성령이 기뻐하시는지 아니면 싫어하시는지를 살핍니다. 이런 사람은 혹 영적인 지각이 부족해서 잘 못 된 길을 갈지라도 하나님께서 돌이키게 하십니다. 하지만 성령의 느낌을 전혀 헤아리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계획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냥 내버려 두십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께 대하여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나의 기뻐하는 자라.”라고 하실 때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낮추시고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을 때(마3:17)와, 변화산상에서 십자가를 지시기로 작정하셨을 때와(마17:5), 비록 아들이시지만 종과 같이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할 때였습니다(사42:1).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고난의 자취를 따라오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그 고난의 자취는 자기를 낮추는 자, 십자가 지는 자, 순종하는 자입니다. 이런 사람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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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21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감사의 종류와 신앙의 수준’ (눅 17:11~19)
    누가복음 17장 11절 이하에는 나병 환자 열 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한 촌에서 예수님을 만나 자신들을 긍휼히 여겨달라고 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들을 보신 예수님은 제사장들에게 가서 그들의 몸을 보이라고 하였습니다. 거기에는 ‘예수님께서 그들을 깨끗하게 해주시고, 나병환자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주시겠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그들은 아무런 이유를 달지 않고 떠났습니다. 가다가 모두는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고는 돌아와서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였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개 취급하는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17절) 열 사람 가운데 자신들은 선민이며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했던 9 명의 유대인들은 아무도 감사하지 않았으나 그들이 개 취급했던 사마리아인은 한 명 뿐이었는데 감사한 것입니다. 9명은 믿음은 있었지만 감사는 없었습니다. 감사를 기준으로 놓고 볼 때 사람에 따라 세 가지 반응으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나병에서 건짐 받은 9명의 유대인들처럼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지금 우리들 생각에는 ‘정말 그럴 수 있을까?’하지만 우리도 그 안에 포함되는지도 모릅니다. 이웃 간에는 작은 친절도 감사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이나 부모님의 사랑에는 당연한 것으로 알고 감사하지 못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나를 구속해 주신 주님의 사랑,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사랑, 이를 깨닫는다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며, 부모님께 효도하지 못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불행히도 많은 사람이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도 ‘우리 부모님께서도 나를 이렇게 사랑하였겠구나.’라고 생각을 못 합니다. 그래서 보답할 마음을 쓰지 못 합니다. 감사의 또 하나는 보이는 감사입니다. 자신 보기에 잘 된 일, 자신의 뜻에 맞는 일에는 감사할 수 있지만 자신의 뜻에 맞지 않을 때는 바로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일단 감사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하여 감사를 전혀 모르는 사람에 비하여 한 단계 올랐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요나를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고 하십니다. 그들의 악독이 하나님 앞에 상달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다시스, 지금의 스페인 쪽으로 떠납니다. 그로 인하여 바다에 심한 풍랑이 임하고 결국 요나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이 그를 바다에 던집니다. 그러자 풍랑은 멈추게 됩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죽게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고래를 예비하셔서 요나를 삼키게 만듭니다. 죽을 줄 알았던 요나는 고래 뱃속에서 삼일 밤낮 지내며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욘2:9). 고래는 요나를 육지에 토해 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다시 요나에게 니느웨에 가서 외치라고 합니다.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니느웨로 가서 “사십일이 지나면 이 성이 무너질 것입니다.”라고 외칩니다. 그의 외침을 들었던 니느웨 사람들은 금식을 선포하고, 왕을 포함하여 남녀노소가 회개하게 됩니다. 애초에 니느웨 전도에 대한 반감이 컸던 요나는 그것이 싫었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소리를 듣지 않고 그대로 망하기를 원했는데 모두가 회개하여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노하여 하나님께 자기를 죽여 달라고 떼씁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고 금새 원망 불평을 쏟아내고 맙니다. 이처럼 자기중심적이거나 육신적인 사람은 자신의 뜻대로 될 때는 감사하지만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원망 불평을 쏟고 맙니다. 세 번째 감사는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을지라도 믿음으로 하는 감사입니다. 욥이 자녀와 자신의 전 재산을 모두 잃었을 때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0-21). 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의 신앙의 정도를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없지만 감사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신앙의 수준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은혜에도 감사를 모르는 사람, 자신의 마음에 드는 일에만 감사할 줄 아는 사람,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음에도, 불행처럼 보이는 일에도 믿음으로 감사할 수 있는 사람 신앙 수준이 다릅니다. 어떤 형편에서도 중심으로 감사를 잃지 않는 마음이야말로 높은 경지에 이른 신앙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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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14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드러난다. 모두’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눅12:2~3).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에 주의를 주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아무리 외식을 해도 속에 있는 것이 나타나기 마련이라는 말씀입니다. 정확한 시간은 모르겠지만 약 육 개월 전쯤 주일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가려고 나서는데 교회가 포함되어있는 건물 뒤, 아파트 부속 어린이 놀이터에서 몇 몇 학생이 저에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아저씨 혹시 축구공 보셨나요? 방금 전 저희들이 축구하다가 공이 그곳으로 넘어간 것 같은데 좀처럼 보이지 않아요.” 전 주차장을 두리번거리며 둘러본 후 “없는데? 정확하게 어디쯤이야?” 하고 되물었습니다. “그곳이요.” 하면서 정원 쪽을 가리켰습니다. 그러더니 한 학생이 담을 훌쩍 뛰어 넘었습니다. 그리고는 주변을 살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축구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담을 넘은 학생에게 주의를 주고 집으로 갔습니다. 지난 번 비가 많이 내리면서 건물 맨 아래층 창고에 빗물이 줄줄 세었습니다. 업자를 불러 그동안 정원처럼 사용했던 공간의 초목들을 파내고, 흙을 퍼내고 방수 작업을 하였습니다. 다 완료된 후 전 그곳에 들어와 주변을 살폈습니다. 살피다가 어느 한 곳에 눈이 꽂혔습니다. 뾰족한 쇠로 된 울타리와 놀이터 구조물 사이에 축구공이 끼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마음먹고 숨기려고 해도 힘든 그곳으로 공은 날아와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감춰진 것은 반드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때가 되면 반드시 알려지게 됩니다. 사람이 이 사실을 믿는다면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함부로 행동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기 치거나 횡령하지 않을 것입니다. 요즘 자주 들려오는 소식들 곧 라임, 옵티머스나 성추행 사건들이 그것을 말합니다. 엡5:12은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우리 조상들은 호연지기를 이루기 위하여 신독 곧 혼자 있을 때에 더욱 삼갔습니다. 그래야 지극히 크고 넓은 마음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감찰하시고 사탄도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욱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여호수아 6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아니하고 여리고 큰 성을 점령합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만 함께 계시면 어떤 대적도 능히 이길 수 있다는 생각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기충천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라는 작은 성쯤이야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싸움에는 만 명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삼 천 명이면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지없이 패하고 맙니다. 그 싸움에서 36명이 죽임을 당합니다. 최고 사령관 여호수아는 장군들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줄줄이 책임을 따지며 문책인사를 단행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한 것은 하루 종일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드린 것뿐입니다. 그러자 해저물녘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한 나의 언약을 어기었나니 곧 그들이 바친 물건을 취하고 도적하고 사기하여 자기 기구 가운데 두었느니라.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기 대적을 능히 당하지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자기도 바친 것이 됨이라. 그 바친 것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수7:10~12). 도적하고 사기한 자를 제비 뽑은 결과 아간이 뽑혔습니다(7:18). 아간은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무게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그의 장막 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감쪽같이 숨겼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온 천하에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은밀한 일은 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행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선행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마6:3!4). 선행도 반드시 드러납니다. 은밀한 중에 계시는 아버지가 갚으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드러나기보다 하나님 나라에서 드러나기를 바라야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갚음 받는 선은 일시적이지만, 하나님께 받는 선에 대한 상급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이 주의해야 할 것은 남의 은밀한 일에 대한 것입니다. “너는 이웃과 다투거든 변론만 하고 남의 은밀한 일은 누설하지 말라. 듣는 자가 너를 꾸짖을 터이요 또 수욕이 네게서 떠나지 아니할까 두려우니라.”(잠25:9~10). 상대방과 변론하다가 불리해지거나 일방적으로 몰리게 될 때 그들의 과거를 들춰냄으로 복수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종종 그렇게 하는 사람을 보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그 자신과 그에게 속한 사람들이 비슷한 일을 당하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참으로 두렵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은밀한 일에 대하여 세 가지 예를 들어 말씀 드렸습니다. 첫째는 은밀한 죄, 두 번째는 은밀한 선행, 세 번째는 남의 은밀한 죄에 대한 태도였습니다. 은밀한 것들은 반드시 드러난다는 것을 깨닫고 죄일 경우 참회로써 주님의 긍휼하심을 힘입어 사하심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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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06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양이 이리 가운데 사는 법’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 하라.”(마10:16). 예수님께서 복음 전파를 위하여 제자들을 보내면서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양과 이리의 관계는 천적 관계입니다. 초식동물인 양이 육식동물인 이리에게 먹히는 관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승리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은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한 행위입니다. 비둘기처럼 순결하라는 말씀은 누구든지 “아멘”하는 바이겠지만 뱀을 지혜의 상징적인 동물로 비유한 것은 의외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외도 있겠지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뱀을 좋아할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특별히 저를 포함한 기독교인들은 뱀에 대한 안 좋은 이미지로 가득 차 있습니다. 최초 조상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도 성경에서 뱀은 사탄으로 상징되고(계12:9), 외식과 악독이 가득한 사람(마23:33)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은 그런 뱀에 대한 기본적인 이미지를 깨뜨립니다. 이리 앞에 있는 양과 같은 형편에 있는 신앙인들이 대처할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뱀들이 이 말씀을 안다면 자신들의 저주가 풀렸다고 환호할 것입니다. 딤전4:4은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라고 말합니다. 뱀마저도 하나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선한 동물입니다. 단지 그가 사탄에게 쓰임 받을 때는 악한 동물이 되고 맙니다. 그러면 뱀의 어떤 모습이 신앙인들이 본받아야 할 지혜의 모습일까요? 성경학자에 따라서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제가 자주 보는 주석들에 의하면 ‘신중한 분별력’을 상징한다는 견해, ‘뱀이 자기 밖에 있는 마귀의 지혜를 받아서 사용한 것처럼, 성도도 자기 밖에 있는 신의 지혜 즉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서 사용하라는 뜻’이라는 견해, ‘전도자가 어떤 위험한 일을 인하여 그 전하는 진리를 가리거나 구부러뜨리거나 혹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뜻’ 등이 있습니다. 모두 일리가 있고 맞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전멸시키기 위하여 여자가 태어나면 살리고 남자가 태어나면 나일 강 하수에 던지라고 합니다. 그 때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모세의 준수함을 보고 석 달을 숨겼지만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강가 갈대 사이에 두었습니다. 이때까지는 바로의 전멸 작전이 성공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작전은 미리암에 의하여 여지없이 무너지게 됩니다. 이전까지 가슴 졸이며 길렀던 모세는 바로의 집에 들어가 그의 어머니 요게벳에 의하여 수고비를 받으면서 길러집니다. 미리암에게 위에서 언급한 뱀과 같은 지혜가 발동한 것입니다. 저를 지도했던 안병모 목사님은 뱀의 지혜에 대하여 미7:17을 근거로 하셨습니다. “그들이 뱀처럼 티끌을 핥으며 땅에 기는 벌레처럼 떨며 그 좁은 구멍에서 나와서 두려워하며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주로 인하여 두려워하리이다.” 뱀의 티끌을 핥는 모습, 땅에 기는 벌레처럼 떨며 두려워하는 모습을 지혜로 말하고 있습니다. 겸손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지혜라는 말씀입니다. 거기에다 비둘기처럼 순결함, 곧 순수함과 정결함이 더해져야 이리처럼 사나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을 각각 그릇에 따라 다르게 사용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와 요한은 형제였습니다. 야고보는 헤롯의 칼날에 죽임을 당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지만, 요한은 살아 오랫동안 복음을 전하는 사도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였습니다. 일제와 6.25를 거치면서 많은 성도들이 순교의 제물로 드림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한편으로는 요한처럼 세상에 존재하면서 날마다 자기 몸을 쳐 복종함으로 매일 순교의 삶을 산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전에도 언급한적 있지만, 김현봉 목사님은 신사참배를 하도록 통지서가 배달되면, 자신만 알고 교인들에게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한 번은 일본 형사가 김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이때 김목사님은 밭에 거름을 주기 위하여 양쪽에 변을 담은 지게를 진 채 걷고 있었습니다. “김현봉” 하고 부르니 “예” 하고는 땅만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형사의 독기 서린 눈을 바라보면 자신도 마귀가 들어갈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 형사는 그의 하고 있는 일과 누더기 차림의 모양새를 한참동안 살펴보더니 아무 말 없이 가버렸습니다. 또 한 번은 무슨 행사를 하였을 때였습니다. 200명의 목사님들이 조선 총독부에 모여 남산에 함께 신사 참배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어떻게든 피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인 한 사람과 김현봉 목사님을 지명하여 준비위원으로 남으라고 하기에 ‘준비위원이 뭐야?’ 하시면서 그냥 돌아왔다고 합니다(정봉기 글에서 발췌). 습2:3은 말합니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바로 공의와 겸손은 지혜이며 또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받게 합니다. 우리는 한 세기의 재앙이라고 하는 코로나19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하나님 앞에 더욱 공의와 겸손을 구하는 신앙인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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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0-30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예수님의 형제와 자매와 모친’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마12:49~50).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말씀을 전하실 때 있었던 내용입니다. 그곳 또한 여느 곳과 마찬가지로 환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 못하고 눈먼 자 속에 들어 있던 귀신을 내어 쫓아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말을 하게 되고 보게 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사실들을 부인할 수 없게 되자 예수님의 하신 일을 오염시키기 시작하였습니다.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마12:24). 쫓아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능력이라고 모독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마가는 “예수의 친속들이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막3:21)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미친 사람 취급한 것입니다. 그들의 말은 삽시간에 그 지방에 퍼졌습니다.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들 누이들에게까지 그 소문이 퍼진 것입니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 속담은 오늘날 고쳐야 할 것입니다. 통신수단이 발달 된 오늘날에는 천리, 만리, 지구 반대편에 있는 곳까지 삽시간에 퍼지기 때문입니다. 그 소문을 듣고 예수님의 가족들이 예수님을 찾으러 온 것입니다. 그 사실을 누군가 알리자 예수님께서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며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키며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모친과 동생들이라고 지시한 사람들은 제자들이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둘러앉은 자들”(막3:34)로 나옵니다. 둘러앉은 자들이나 제자들의 공통점은 말씀을 듣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도 거기 있었겠지만 그들은 말씀을 듣기 위하여 참석한 사람이 아니라 흠을 잡기 위하여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거기에 해당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바로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께 말씀을 듣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예수님의 육적인 가족들은 그 순간 예수님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퍼뜨린 소문을 듣고 마음이 흔들린 것입니다. 아무리 친족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말씀보다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면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 될 수 없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보다 세상 말, 철학과 사상에 귀를 기울인다면 예수님의 가족이 될 수 없습니다. 누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까?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요10:27). 예수님의 양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예수님의 양이 아니라면 들을 수 없습니다(요10:26). 예수님께 듣는 자는 살아납니다(요5:25).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롬10:17).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성령이 내려오십니다(행10:44). 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면 기갈이 임합니다(암8:11). 어릴 적에 복사기 대신에 묵지가 있었습니다. 백지와 백지 사이에 묵지를 놓으면 글씨를 쓸 때 아래 백지까지 글씨가 복사됩니다. 영적인 기갈은 육적으로 환경으로 번지게 되어 말할 수 없이 삶이 피폐해집니다. 피곤하고 지치게 됩니다. 사도행전 27장에서 바울과 죄수를 태우고 이탈리아로 가던 백부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바울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들었다가 자신은 물론 그와 함께 있던 모든 사람이 죽을 뻔한 고생을 당하게 됩니다. 요나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다시스로 향하는 배를 타다가 큰 풍랑을 만나 내던져지고 마침내 고래 배속에서 사흘을 회개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자신의 생각과 지혜로 행하거나, 상책을 좇아 살아가거나, 세상풍조를 따라 살아간 결과 깊은 밤을 만나게 됩니다. 전5:1은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저희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라고 말합니다.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처럼 주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주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신4: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하여 기도할 때 반드시 하나님께서는 올바른 길로 인도해주십니다(요7:17). 뿐만 아니라 말씀에 합당한 선한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벧전3:21).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예수님의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가장 시초는 바로 주님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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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0-23
  • [WAIC 데일리 기도] 김형욱 목사의 ‘국가와 민족의 치유 회복을 위한 기도’
    거룩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코로나 바이러스로 전 세계가 혼란에 빠진 지 벌써 8개월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여전히 바이러스는 정복되지도, 사라지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정말 무서운 것은 바이러스가 아닙니다. 회복되지 않는 일상도 아닙니다. 진정 두려운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향한 경고의 메시지를 주심에도 불구하고 회개하거나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이러스 뿐 아니라 이상 기후, 화재, 물난리, 지진 등 수많은 메시지를 한꺼번에 보내어도 그것을 하늘과 하나님과 연결 시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단지 기후의 문제요, 자연의 문제지 영적인 것이라든지, 신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애써 부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어찌 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이 모든 것들이 하늘의 하나님과 연결 되어 있음을 깨닫는 은혜를 주옵소서. 우리의 삶이 무너진 이유가 방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서운 죄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한번도 영원한 나라와 거룩한 나라를 생각하지 않는 세상이 이번 코로나 사태로 이 땅의 무능함과 덧없음을 깨닫게 하시고, 성경이 말씀하는 영원한 나라와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음에 소망의 빛을 볼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세상을 위해 기도하고 맛을 내며 빛을 비춰야 할 교회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오히려 세상에 짐이 되어버린 것을 봅니다. 세상이 악하여 교회를 비난하는 것이야 어떻게 할 수 없겠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의 고집과 더러움, 죄악 됨으로 인해 세상의 비난거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시고, 바른 자리를 찾아 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코로나 사태를 통해 하나님은 교회를 회복케 하실 줄 믿습니다. 그러나 회복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죄를 버리고,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돌아와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는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하나님이 세우신 모세가 아닌, 자신들이 선출한 아론과 함께 우상숭배하던 모습을 닮아 있습니다. 돈이 신이고, 힘이 신이고, 성공이 신이며, 명예가 하나님인양 지금까지 달려온 교회의 모습을 인정하고 회개하게 하옵소서. 세상을 탓하고, 남을 탓하던 자리에서 자신의 죄악을 바라보고 회개하게 하옵소서. 공예배는 어느 정도 회복의 기미가 보입니다. 그러나 주일학교와 소그룹, 함께 나누는 식탁교제 등 우리의 공동체에는 넘어야 할 숙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지혜를 주셔서 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회복의 자리로 갈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길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라시는 회복의 자리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세상은 이제 코로나를 종식시키거나 극복하자고 말하기 보다는 ‘WITH 코로나’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교회도 그러한 준비를 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코로나를 통해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코로나와 같은 시대적 상황 속에서 어떻게 대처해나가며, 어떻게 변화해 나가야 할 지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구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하셔서 이러한 어려움이 우리가 개혁되고, 정결해지는 기회가 되게 하옵시고 지혜롭게 나아가게 하옵소서. 힘들고 어려울 때는 회개하는 태도를 가지려다가 조금만 상황이 호전되면 다시 강퍅해진 애굽의 바로처럼 살아가지 않게 하옵소서. 1단계로 하향조정 되고, 우리의 일상이 조금씩 회복되어 간다고 또다시 하나님과 멀어지고 세상과 가까워지는 교회들이 되지 않도록 은혜를 주옵소서. 국가는 국가의 일을 잘 감당하여 방역에 만전을 기하게 하시고, 교회는 교회의 일을 잘 감당하여 선지자적 사명과 기도하는 사명에 매진하게 하옵소서. 마지막 때가 다가옴을 느끼며 가치 있는 것과 영적인 것에 더욱 귀를 기울이는 사회와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고통스런 현실 가운데서도 몸 된 교회를 더욱 지켜 주시시라 믿고 힘차게 살아가는 교회들이 되게 하옵소서. 교회가 먼저 회복되고, 사회가 질서를 잡으며 우리의 일상을 회복케 하실 주님을 기대하고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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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0-18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하나님의 아름다운 모습 가운데 하나는,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는 모습입니다. 깨어지고 일그러져 폐기처분 될 일들도 하나님의 손에 들어가는 순간 온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납니다. 성경 가운데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신 사실에 대하여 일일이 열거하려면 셀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이루신 대속사업만 보더라도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아예 없애려고 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사흘 만에 다시 살리심으로 그를 믿는 만백성을 구속하시는 선을 이루셨습니다. 야곱의 두 아내 레아와 라헬은 자매 사이였지만 서로 야곱을 차지하기 위하여 치열하게 다투는 경쟁 사이였습니다. 자녀 낳기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경쟁 관계를 통하여 이스라엘 열 두 지파가 태어나도록 하는 선을 이루셨습니다. 요셉은 형님들에 의하여 팔려갔지만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애굽의 총리대신 되게 하여 애굽 거민들만 아니라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굶어 죽지 않게 하는 선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레위의 잔혹한 성격으로 인하여 그들의 후손을 열 두 지파에 흩어지게 함으로 말미암아 각 지파의 제사장 역할을 하게 하는 선을 이루었습니다(창49:7). 야곱의 아들 유다는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자신의 며느리 다말을 거리의 창녀로 오해하여 들어갔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쌍둥이 형제 곧 베레스와 세라를 낳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유다의 실수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셔서 베레스의 후손 가운데 다윗과 예수님이 나오게 하셨습니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것을 감추기 위하여 우리아를 죽게 한 다윗이었기 때문에 그의 죗값을 톡톡히 받게 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까지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셔서 밧세바를 통하여 솔로몬을 낳게 하셨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점하는 귀신들린 여인에게 있는 귀신을 쫓아내고 좋은 일 하고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아무런 죄도 없는 그들이 감옥에 갇히게 된 것 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높이자 지진이 일어나 감옥에 있는 사람들에게 매인 것이 다 벗어졌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간수와 그의 가족이 구원을 얻게 됩니다. 바울 일행이 죄수 아닌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압송될 때 백부장이 바울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들은 결과 그들은 유라굴라라는 광풍을 만났습니다. 그 광풍은 배를 파괴하고 바울 일행을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지만, 뜻 밖에 멜레데라 하는 섬에 석 달 동안 머물게 됨으로, 그 사이 거기 있는 추장과 원주민들의 병을 고치도록 하는 선을 이루었습니다. 어디 병 뿐이겠습니까? 병으로 인하여 복음을 영접하였을 것입니다. 평생 청빈과 순결로 십자가를 몸소 실천하신 김현봉 목사님(1965년 별세)께서 그렇게 하신 데에는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1938년 27차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가 가결 되었을 때였고, 둘째는 6.25의 피난 기간이었습니다. 신사참배가 총회적으로 가결 되자 목사님은 큰 충격을 받고 ‘교회를 어떻게 해야 바르게 인도하며 자신 역시 바르게 살 수 있을까?’는 제목으로 기도하던 중 십자가의 신학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낮아지고 스스로 고난을 짊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몸에는 철저하게 누더기를 걸치고 궂은 음식을 먹고, 머리를 깎고, 고무신을 신고 가장 낮은 자의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생활을 하였습니다. 교회에는 간판, 종, 종탑, 십자가, 의자, 성가대, 악기, 장로가 없었습니다(그 분은 십자가의 형식보다는 몸에 녹아지는 십자가의 삶을 강조하였던 것입니다-필자 주). 목사님 자신이 검소한 옷을 입고 다니기에 교인들 역시 사치한 옷을 입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둘째는 6.25 때입니다. 200명 넘는 교인이 되자 부엌을 헐어내고 4칸 마루와 건너 방을 터서 예배장소를 늘렸습니다. 그러던 중 6.25가 터졌습니다. 목사님은 삼각산에 들어가 38일간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회개 기도가 터져 15가지 이상의 죄를 하나씩 고백하며 크게 은혜 받는 체험이 그의 목회생활에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후로 교회가 크게 부흥되기 시작을 하였고 원고 설교에서 영감설교로 바뀌어 설교 중에도 하나님의 영감이 계속 임하였다고 합니다. 전쟁 후에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이 너무 많이 생기게 되자 사회 복음화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 봉사와 구제 사업을 펼쳐 나갔습니다-정봉기 목사 글. 윗글로 비추어 본다면 김현봉 목사님이 십자가의 삶을 직접 실천할 수 있도록 한 계기가 역설적이게도 한국사와 교회사에서 가장 불행한 시기라고 할 수 있던 때였습니다. 그분이 십자가의 삶을 몸소 실천하게끔 한 계기가 장로교회의 신사참배 가결이었다면, 교회를 부흥케 한 계기 역시 6.25동란이라는 사건이었습니다. 바로는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나일강 하수에 버리게 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로왕의 집에서 애굽에 재앙을 가져오고 이스라엘을 구출한 모세를 키우게 하셨듯이 이 두 사건이 김현봉 목사님이라는 한국 교회에 숨겨진 보물을 보물답게 하신 것입니다. 신사참배의 치욕과 6.25의 비극까지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신 하나님께서 오늘날 코로나를 통하여서 분명히 한국 기독교 신자들만 아니라 전 세계 기독교 신자들에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시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조건이어야 합니다. 깨어있어 기도드림으로 하나님께서 코로나19를 통하여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을 듣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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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0-13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하나님 편에 선 사람’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웠을 때에 눈을 들어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섰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그가 가로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절하고 가로되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수5:13-15). 여호수아는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가나안 정복의 첫 관문인 여리고성 앞에 섰습니다. 그 때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그 사람이 이스라엘을 위하는 사람인지, 이스라엘의 대적을 위하는 사람인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이스라엘을 위하는 사람도 대적을 위하는 사람도 아니라 하나님의 군대장관으로 와 있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편 가르기를 좋아합니다. 좌편이냐 우편이냐, 보수냐 진보냐 등으로 나누기를 좋아합니다. 같은 소속감을 가지고 생각을 공유하며 우의를 다지기도 하고, 반대편에 있는 사람을 합심해서 공격하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무슨 일이 발생하면 사건에 대한 객관성보다는 사건을 일으킨 주체가 어느 집단에 속하느냐에 따라 윤리 기준도 달라집니다. 그가 속한 집단이 권력을 가진 단체라면, 현저히 드러나는 잘못된 사건도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정당화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신앙인들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중간지점은 더욱 안 됩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군대장관의 말처럼 이스라엘도, 이스라엘의 대적도 아니라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옳게 여기시는 것을 옳게 여기고 하나님께서 옳지 않게 여기시는 것을 우리도 옳지 않게 여겨야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조차도 정치 이념에 빠져 바로 판단하지 못하고, 바로 분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만일 그 사람이 자기들을 위한다면 그를 시험하여 역할을 분담하였을 것입니다. 거기에 맞는 활동을 지시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뜻 밖에 그는 하나님의 군대장관으로 왔다고 하였습니다. 여호수아에게 지시를 받을 위치가 아니라 여호수아를 지시할 위치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라고 말합니다. 신은 발과 땅 사이에 있습니다. 신은 육신을 의미합니다. 육적 몸을 벗어버리라는 뜻입니다. 마음의 할례를 뜻합니다(골2:11). 또한 당시 종들은 신을 벗고 살았습니다. 자유인과 종을 분간하는 표시이기도 합니다. 곧 여호수아에게 신을 벗으라는 말은 임의로 행동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종이 되어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일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영적인 세계에서는 하나님편이 아니면 사탄편입니다. 요15:19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거듭났다고 하지만 그 사람이 세상을 추구하고, 육신을 추구하고, 부귀를 추구하고 살아간다면 세상에 속하게 됩니다. 마귀 지배 하에서 심한 고생을 하게 됩니다. 자신이 하나님 편에 서 있는지 아니면 세상 편에 서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말씀을 들을 때 알 수 있습니다. 행2:14이하에는 오순절 날 성령 강림 사건에 대하여 베드로가 말씀을 전하면서 유대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책망합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2:36). 그러자 천하 각국에서 모인 유대인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아 이렇게 반응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그들은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였느니라.”라는 말에 “아멘” 한 것입니다. 바리새인, 서기관, 대제사장, 빌라도만 아니라 자신들 역시 동조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사람들임을 인정하고 “어찌할꼬”하는 탄식이 나온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양심이 찔렸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7장에는 스데반집사의 설교가 나옵니다. 스데반도 마지막에 강하게 책망합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치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 하였도다 하니라.”(행7:51-53). 그러자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똑 같이 마음에 찔림을 받았지만 사도행전 2 장에서 마음이 찔렸을 때는 “어찌할꼬”하는 회개가 나온 반면, 7장에서는 이를 갈았다고 나옵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이 선 위치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은 양심을 쓰면서 하나님 편에 서 있었지만 사도행전 7장에서 이를 갈았던 사람들은 양심 편이 아니라 육신 편, 사탄 편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착한 양심 편에 서 있으면 말씀을 들을 때, 또 전달자가 우리에게 합당한 말을 전할 때 “형제들아 어찌할꼬” 하며 회개하게 되지만 육신편이나, 세상 편에 서 있는 사람이라면 말씀 들을 때 ‘아무개가 일렀구나.’ ‘목사님이 나 들어보라고 하는 구나.’ 하며 시험에 들게 됩니다. 우리 자신이 어느 편에 서 있는지 말씀을 들을 때 우리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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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0-07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표적’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마12:40). 표적이란 sign으로 초자연적인 일이 외부에 드러나 진리임이 입증되거나 묵시 되는 일을 의미합니다(디럭스바이블). 성경에서 예수님께 대한 대표적인 표적으로는 아기 예수님을 구주로 입증하는 표적(눅2:2~1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표적(마12:40), 사흘 만에 부활하시는 표적 등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요2:19).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날 목자들이 찬 공기를 마시며 밤중에 자기 양떼들을 지키고 있을 때 천사들이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그들을 보고 크게 무서워하는 목자들에게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눅2:2~12)라고 말합니다. 그 때 다윗의 동네, 곧 베들레헴에 여러 아이가 태어났을지도 모릅니다. 어떤 아기가 구주이신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표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입니다. 일반적으로 왕을 찾기 위해서는 궁전으로 가야 하지만, 천사들의 지시를 받은 목자들은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우선 마구간이 있는 집을 물색하면 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예수님께서 얼마든지 깨끗하고 아름답고 훌륭한 곳에 나실 수 있었을 터인데 하필 마구간이었을까요? 또 그 사건이 표적이었을까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은 입으로 말씀하실 뿐 아니라 삶 자체가 말씀이셨습니다.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본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자신을 낮추고 검소하고 가난한 모습을 보임으로 신자들 역시 그렇게 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이 머무시는 곳은 자신을 낮추는 사람, 심령이 가난하고 온유한 사람의 몸입니다.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표적을 구합니다. 곧 예수님께서 메시아 되는 상징물을 요구합니다. 이 전에도 예수님은 많은 이적과 기사를 행하셨습니다. 한센 병 환자를 고치셨고,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셨습니다. 귀신들린 자의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중풍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가깝게는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으려 하지 아니하고 다시 표적을 찾았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요나의 표적을 예로 들었습니다. 요나의 표적이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가장 잘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생활은 항상 때를 향하였습니다. 그 때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고 아버지로부터 영광을 받을 때였습니다(요2:4, 7:6, 12:23, 17:1). 그리스도임을 입증하는 표적 역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사건입니다. 이적과 기사는 사탄도 가끔씩 할 수 있습니다(신13:1). 예수님께서도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24: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사탄과 거짓 선지자들이 할 수 없는 것은 죄인이 아닌 신분으로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일입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일은 예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많은 표적들 가운데 메시아임을 보여주는 핵심이었습니다.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교회, 함께 하는 사람에게는 십자가가 있습니다(눅9:23). 그것은 성령의 사람인지 아닌지를 가늠하게 하는 표적입니다. 아무리 말을 유창하게 하고 사람들을 혹하게 하는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삶 속에 십자가가 없다면 성령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죽음입니다. 자신을 없는 자로 여깁니다(요19:15). 십자가는 순종입니다(빌2:8). 자신의 좋은 생각과 의견일지라도 접어두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복종합니다. 요2:18 이하에서 유대인들은 성전을 청결케 하는 예수님께 표적을 요구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이 말씀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지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을 예고하는 표적입니다. 십자가가 씨라면 부활은 열매입니다. 가을이 무르익어가는 요즘 과일 역시 풍성합니다. 이러한 과일들은 씨를 심은 결과입니다. 심지 않고 열매를 거둘 수 없습니다. 농부들이 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고 벌레를 잡아주는 수고를 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누릴 수 있는 것처럼 부활의 기쁨 역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심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영생을 받았고 또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활의 기쁨을 계속해서 맛보려면 바울사도처럼 날마다 죽는 것을 심어야 합니다(고전15:31). 날마다 죽음을 체험한 바울은 날마다 부활을 맛보고 누리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감옥에서 조차 항상 기뻐할 수 있었고, 감옥 밖에 있는 사람을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아 됨의 표적이 십자가였듯이 십자가는 영생에 소망을 두지 않고 세상 복만 추구하는 사탄의 사자들이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모습입니다. 십자가는 성령에게로 우리를 인도하고 성령은 열매를 맺게 합니다(갈5:22~23). 바울이 자신의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진 것처럼, 예수 죽인 것을 항상 몸에 짊어짐으로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몸과 죽을 육체에 나타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고후4: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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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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