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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뜻을 정하여’(단 1:3~9)
    때는 여호야김왕의 삼년입니다. 바벨론의 악명높은 왕 느부갓네살이 쳐들어왔습니다. 전쟁은 참혹하고 포로들은 비참합니다. 왕과 고관대작이었더라도 이긴자의 종이 되어 그 소유가 됩니다. 그때 느부갓네살왕은 환관장 아스부나스에게 명령합니다. “유다 소년 가운데 왕족과 귀족 중에서 흠없고 잘생기고 모든 지혜를 갖추고 지식이 있고 이해력이 있어 왕궁에서 섬길만한 능력이 있는 소년들을 데리고 오라” 환관장은 왕의 명령을 받고 포로들 중에서 가장 장래가 촉망되는 엘리트 소년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먼저 자기가 데려온 소년들의 이름을 고쳤습니다. 이름은 자기의 정체성입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의 신이 생명을 지켜 준다는 의미의 ‘벨드사살’ 이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다, 여호와는 너희를 버렸으니 바벨론에 귀화해서 새롭게 살라’는 의미겠지요. 다니엘에게는 위기가 왔습니다. 먹고 살 게 없어서 두려운 게 아닙니다. 왕궁에서 좋은 것을 먹고 공부도 하고 교육도 받을 수 있습니다. 왕에게만 충성하면 잘사는 것은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걱정입니까? 사방을 보니 바벨론 왕으로 꽉 들어차 있는 환경입니다. 배우는 학문도 갈대아인의 것, 바벨론의 신들...여기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름까지 고치고 나니 다니엘은 두려워지기 시작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버리게 되면 어떻게 하지? 정신을 바짝 차려야 겠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큰 위기는 믿음 지키기 어려운 환경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위기가 오는 것, 이것이 가장 큰 환란입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했습니다. 자기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왕의 음식을 거절 하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이유는 그것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과 다른 존재감이 있습니다. 거룩입니다. 하나님과 언약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도 거룩하니 그 백성도 거룩해야 합니다. 먹는 것도 아무거나 먹으면 안됩니다. 왕의 진미를 거절하는 행동은 부정한 것으로부터 자신을 거룩하게 지키겠다는 의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 하는 것에 하나님의 백성은 하지 말아야 할 것, 해야 할 것이 구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백성이니까요. 왕의 상에서 먹는 자들은 왕의 사람들입니다. 왕의 밥을 먹으면서 그 왕과 언약을 합니다. “왕의 종이 되어 왕만 섬기고 충성하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과 언약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하나님과 언약한 자들입니다. 비록 왕의 밥이 세상 부귀영화와 권세를 주는 것일지라도 그 왕을 거절하겠다는 결단입니다. 다니엘이 왕의 음식을 거절한 것은 그 왕을 거절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의 하나님이 되셔서 그들과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결과는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음식을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 더 좋아 보인지라. 그리하여 감독하는 자가 그들에게 지정된 음식과 마실 포도주를 제하고 채식을 주니라”(단 1:15~16) 믿음은 행동으로 증명됩니다. 믿음으로 행동하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의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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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25
  • [WAIC 데일리 기도] 정일웅 목사의 ‘코로나19의 극복과 국가와 민족의 치유’
    생명의 주인이시며. 천지 만물의 창조주가 되신 하나님 아버지. 지금은 영광과 감사와 찬양보다는 간구와 탄원과 호소의 마음으로 아버지의 긍휼과 자비를 간절한 마음으로 구합니다. 지금 지구촌 전체는 아무도 원치 않는 코로나 판데믹으로 많은 생명들이 신음하며 탄식하며 죽어가는 참상을 경험합니다. 이러한 공포와 두려움의 상황을 신속히 돌아보시며, 재앙과 징계의 시험과 위협을 극복하도록 도와주소서! 무한하신 주님의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어 코로나의 시련 가운데 처한 형제 자매들을 위로 하시며 구원해 주옵소서! 전능하신 구속의 주 그리스도의 하나님. 사순절의 의미도 제대로 새길 수 없을만큼 코로나의 위협으로 예배하지 못하게 된 처참한 한국 교회를 불쌍히 여기시고, 올바른 신앙에 바로 서 있지 못했던 우리를 용서하여 주소서! 부디 코로나의 재앙으로 예배하지 못하는 한국 교회의 불상사를 막아 주시고, 그간 이웃과 형제를 돌아 보지 못한 우리의 허물을 용서 하소서! 거룩 하시며, 위로자 되신 성령 하나님. 오늘도 코로나의 시험으로 고통받는 자들을 위로 하시며, 특히 방역에 온몸을 던져 수고하는 의료진들을 위로하시며, 성령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심을 그들도 느끼게 해 주옵소서! 거룩하신 성령 하나님. 전 세계가 코로나의 판데믹에서 신속히 해방되도록, 성령 하나님이 권능으로 질병을 다스리시며, 치료의 하나님 이심을 세계 만방의 백상들이 알고 깨닫게 하소서!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 모두 온 백성들과 함께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 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가운데 평화 로다" 란 찬양을 우리의 주 아버지 하나님께 드리게 하옵소서!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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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22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하나님의 계산법’
    1. 많고 적음의 차이 하나님의 계산법과 사람의 계산법은 전혀 다릅니다. 사람은 절대치가 있어서 눈에 보이는 수량에 따라 많고 적고를 따지지만 하나님은 형편에 따라서 많고 적고를 따지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2장 1-3절에는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가지고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라고 나옵니다. 세상에서는 기업가들이나 부자들이 많은 헌금을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하나님 나라에 가면 여기 가난한 과부처럼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들이 많이 한 것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풍족한 중에서 넣은 헌금과 구차한 중에서 넣은 헌금의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2. 크고 작음의 차이 예수님 태어난 고장은 베들레헴이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전 베들레헴은 가장 작은 고을 중에 하나로 인식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인식이 바뀌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 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마2:6). 가장 작은 고을에 예수님이 태어나셔서 이제는 가장 큰 고을이 된 것입니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이는 숫자가 많으면 일반적으로 큰 교회라고 인식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렇게 보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이 큰 곳이듯 예수님이 계신 곳이라면 비록 적은 숫자가 모일지라도 그곳은 큰 교회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큰 교회라 할지라도 예수님이 함께 하지 않는다면 그곳은 사교장일 뿐입니다. 3. 큰 사람과 작은 사람 키가 크냐 작으냐에 따라 큰 사람 작은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는 큰 자니라''(마18:4)라고 말씀하십니다. 천국에서는 자기를 낮추는 자가 큰 사람이 되고 높이는 자는 작은 사람이 됩니다. 뿐만아니라 천국에서 큰 자는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사람입니다(마23:11). 4. 세월의 차이 시84편 10절에는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나옵니다. 얼마나 많은 햇수를 보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 어떻게 살았는지가 중요합니다. 주의 궁정은 주님이 계신 곳을 의미합니다. 주일을 어떻게 성수했는지, 주일 하루 온종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거룩하게 지키면 그 날은 다른 곳에서 천 날을 보내는 것보다 낫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우리 몸은 주님의 성전인데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모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한 날이 내 마음 대로 살아가는 천 날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허송세월한 것을 후회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예수님께 주권을 드리고 사십시오. 그러면 하루가 약 2.74년을 사는 것입니다. 능히 잃어버린 연수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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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19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십자가로 일어서라!’(요 18:3~12)
    베드로는 예수님의 가장 사랑하시는 수제자라는 닉네임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사랑하셨지만, 베드로도 예수님을 무리 중에서 유별나게 독보적으로 사랑했습니다. 베드로의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은 진심이었습니다. 잡히시던 그날, 그 동산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예수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거침없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쳐냈습니다. 베드로의 자신감 있는 행동은 예수님이 앞에 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죽은 시체를 살리시는 것도 보았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도 믿었으니 어림 계산해 보면 잡으러 온 그들과 까짓것 한번 싸워보면 할 수 있을 것 같았겠지요, 이것이 베드로의 방법이었습니다. 내게 주신 능력과 힘으로 주의 일을 잘 할 수 있을 것이다...“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아니, 예수님 우리가 한방이면 저들을 다 죽이고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데요? 십자가를 안지고 더 효율적인 방법으로 더 큰 성과를 이루면 안되나요?’ 그러나 예수님의 방법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주신 과정을 다 거쳐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 방법이 비록 십자가에서 죽는일 이라도 그 일을 감당해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지금까지는 예수님의 수제자로 가장 빛을 발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가 등장하니까 그 앞에서 베드로의 좌절이 시작됩니다. 말로만 듣던 십자가가 이제 현실이 되니 베드로의 믿음은 좌절하기 시작합니다. 계속해서 대제사장 앞에서 심문당하는 예수님의 무력한 모습에 베드로는 계속해서 좌절하기 시작합니다. 대제사장의 고함치는 소리와 예수님의 뺨을 때리는 소리, 그리고 대제사장 앞에서 꼼짝 못하시는 것 같은 예수님, 아! 리더가 저런 모습을 하고 있는데... 베드로는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 지금 이 상황에서 자기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어이없게도 문 지키는 여종 앞에서 두려워하며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던 사랑하는 예수님은 저렇게 되어 있고, 목숨을 걸고 끝까지 함께 있겠다고 했는데 계집종 앞에서 두려워 하며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자신을 보면서 베드로는 이 정도면 멘탈이 붕괴가 되겠지요. 아무 정신 없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이런 십자가 옆에 서 있을 것이라고는 예상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저주 자체 입니다. 조금의 자비도 없는 가혹하고 비참한 십자가, 능욕당한 수치의 십자가 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맘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예수님에게 인간이 어디까지 악할 수 있는가를 옆에서 다 보았던 베드로는 외상 후 장애로 정신과 상담을 받으면서 회복이 필요 했을지도 모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마음이 무너지니 회복하지 못하고 내린 결론이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입니다. 이런 베드로를 무엇으로 일으켜 세울까요?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런 베드로에게 오십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소명을 주십니다. ‘내양을 치라, 내양을 먹이라’ 소명을 굳게 하십니다. 베드로는 십자가로 일어나서 소명을 받은 자로 굳게 다시 세워 집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 하라.(벧전 4: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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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19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주의 병에 담으소서’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 하였나이까?”(시56:8). 화창한 날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정오 즈음이면, 창문 맞은 편 벽에 머리를 풀어 헤치고 소리 없이 고불고불 오르는 아지랑이 그림자를 보게 됩니다. 밖을 보면 눈에 쉽게 띄지 않아도, 벽에는 이런 모습들이 스크린처럼 펼쳐집니다. 머잖아 이 아지랑이들은 구름이 되어 가장 적절한 순간에 단비로 내려올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에도, 우리의 눈물에도, 우리의 탄식에도, 우리의 선행에도 주님께서 때로는 전혀 반응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눈물 한 방울도 허비 되지 않고 아지랑이처럼 올라 차곡차곡 주님의 병에 채워져 가장 적절한 때 은혜로 내려 주십니다. 지금 당장 응답이 없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결코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때와 기한을 정하시는 주님께서 반드시 갚아 주십니다. 성경학자들은 시 56편을 삼상21:10-15절 이하의 사건과 연관 된 시로 보고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 가드왕 아기스에게 피하지만 그곳 신하들이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자 미친 체 하고 도망쳐 나옵니다. 어디에도 발 디딜 곳이 없다고 생각한 그가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호소하는 내용입니다. 그 후로도 다윗은 10여 년 동안 유리하면서 육신적으로는 잠시도 쉴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체험합니다. 삼천 명의 택한 용사들과 함께 그를 수색하러 다니는 사울의 목숨이 도리어 다윗의 손에 잡히는 기이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왕이 되기 위하여 한 번도 모사를 꾸미지 않았음에도, 사울을 끝까지 사랑하고 참아주는 그에게 하나님은 마침내 사울을 심판하시고 왕이 되게 하십니다. 그의 눈물, 그의 신음, 그의 탄식을 하나님의 병에 담아 신원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악에 대한 징벌도, 선에 대한 포장도 하나님께서는 각자의 때에 맞게 적절하게 하십니다. 우린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예수님의 사랑에 빚진 자들이기 때문에, 어떤 행위에도 상급을 주장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의 은밀히 행하는 선이나 심지어 눈물까지 흘려보내지 않습니다. 주님의 선하심을 끝까지 믿고 인내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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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13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하나님의 실재하심’(요 14;16~21)
    지금 이 시간이 지나면, 예수님은 군병들에게 잡혀서 채찍으로 맞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입니다. 한치 앞도 모르는 제자들은 ‘설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까지 하실까...’ 라고 생각했겠지만, 미리 알고 계셨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건이 터지면 당황하지 말라며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직접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제 자신이 떠나시면 보혜사가 오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 두시지 않고 보혜사 성령을 통해서 다시 오십니다. 보혜사 성령은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세상은 모르지만 우리는 그분을 압니다. 내 안에 계시는 분에 대한 감각이 있겠지요, 보혜사는 하나님의 실재하심입니다.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같은 공간에 같이 있는 정도가 아닙니다. 같이 한방에서 사는 것입니다. 허물 많은 사람 둘이 만나서 부부가 되어 한방에서 같이 사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같이 살려면 평생을 서로 알아가야 합니다. 알아가면서 이해해야 내 것을 버리면서 상대방에게 맞추어 줄 수 있습니다. 오랜 세월을 그렇게 하다 보면 먹는 것 입는 것 생활 습관까지 닮아갑니다. 같이 사는 것은 서로의 허물을 함께 감당하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부부가 둘이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 입니다. 이걸 못하면 헤어집니다. 사람끼리 만나서 같이 사는 것도 이렇게 어려운 일인데 완전 무흠 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살려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살다보면 둘이 섞여져서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완전하신 하나님과 죄인 인간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땅 에서 인도하여낸 여호와라 (레 11:45)” 하나님과 같이 사는 것은 그분이 원하셔서 계획하신 그분의 뜻입니다. 우리가 먼저 요구한 게 아닙니다. 온 세상의 하나님이 자기가 택하신 자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해서 애굽 에서 꺼내오셨습니다. 애굽에서 열가지 재앙으로 온 세상을 떠들썩 하게 뒤흔드시면서 자기 이름을 알리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자기가 택하신 자의 하나님 이신 것을 온 천지에다 선포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그리고 그들과 거하시겠다고 언약을 맺으시고 성막을 짓게 하십니다. 보편적인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 함께 사는 것, 그것은 놀라운 일이며 엄청난 사건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연합한 생명체가 될 수 있는 것은 모든 피조물 중에서 가장 탁월 하고 비교할 수 없는 영광 입니다.(고전 15:41)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이후에 나는 지구상에서 가장 놀라운 축복의 생명체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며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같이 살려면 먼저 나와 함께 거하실 하나님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분이 나에게 뭘 원하시는 지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맞출 수가 있겠지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레 11:45)” 하나님이 거룩 하시니 우리도 거룩해야 같이 살 수 있습니다. 같이 살려면 서로 수준이 맞아야 겠지요,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불완전한 허물 덩어리인 내가 완전하신 그분과 어떻게 함께 살라고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신 걸까요? 예수님 자신이 어린양 제물이 되셔서 짐승의 피가 아니라 하나님의 피를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 하다고 하십니다. 그것을 근거로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보혜사 성령을 너희에게 보내었다! 그 성령님과 함께 거하라,” 이렇게 다 입증되고 통과되어서 하나님의 실제이신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 실제화 된 것, 이것이 보혜사 성령님입니다. 십자가의 모든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서 그 결과로 받은 가장 큰 축복의 사건이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나는 그분의 백성이 되는 언약이 성취되었습니다.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요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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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11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기준점’
    “여러 성으로 다녀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의 작정한 규례를 저희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니라”(행16:4~5). 이 말씀을 ''작정한 규례를 지키게 하여 믿음을 굳게 한다.''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학교나 군대에서 훈련받았던 사람이라면 "헤쳐 모여"라는 말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말이 모두가 아닙니다. 그 앞엔 반드시 기준점이 있습니다. 선생님이나 교관이 "전방 50미터에 있는 ()()를 기준으로 오른(왼)쪽 3열 종(횡)대 헤쳐 모여" 그러면 우린 그곳까지 헐떡거리며 뛰어가다가 줄을 섭니다. 그곳까지 달리는 순간 모두가 제각기 길을 가지만 기준점이 정해져있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흐트러지지 않는 줄이 됩니다. "헤쳐 모여!" 우리가 살아가는 곳이 항상 반듯하게 정렬되어 있는 줄이라면 좋으련만 가끔씩 흩어지고, 혼잡 되는 순간들이 찾아옵니다. 그토록 고요한 바다라도 사나운 바람이 불면 집채만 한 파도가 일어나 바다를 뒤집어 놓을 수가 있습니다. 평화로웠던 교회, 집안, 사회가 어수선해지고 요란스러워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준점이 있다면 흩어졌을지라도 다시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2000년이 넘도록 이민족의 압제를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이 정도 되면 이미 사라졌을 민족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겐 기준점이 있었습니다. 모세 오경이 기록 된 토라였습니다. 자신 안에 하나님이 계시는 한 아무리 흐트러진 환경일지라도 한 데 모아질 때가 있습니다. 마음이 안정이 되지 않고, 어두워질 때 우린 처음에 확실한 말씀을 기준점으로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우선 신앙생활부터 점검해봐야 합니다. '주일을 얼마나 거룩하게 지키고 있는지' '매일 빠뜨리지 않고 작정한 말씀을 읽고 있는지' '새벽 기도는 변함없이 하는지' '자고 깨는 시간은 일정한지' 등 믿기 시작할 때 작정한 규례를 되돌아 봐야 합니다. 신앙에 있어 기준점이 없으면 결코 믿음의 진보가 없으며 교회에 있어 기준점이 없으면 서로의 목소리만 높아지게 됩니다. 어려운 일들이 닥칠 때마다 처음 믿을 때 확실한 것을, 작정했던 기준점을 찾아 흔들림 없이 나가야 합니다(히3:14) 그래야 일어설 수 있으며 회복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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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07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 (요 14:26~27)
    사람의 눈으로는 한치 앞을 볼 수 없습니다. 바로 한 시간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보내시는 지금 이 시간이 지나면, 예수님은 군병들에게 잡혀서 채찍으로 맞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실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만 현장에서 이 말씀을 듣고 있던 당시의 제자들은 몰랐겠지요, 이제 예수님이 떠나시면 보혜사 성령님이 오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실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제자들을 떠나가실 것이지만 제자들을 버리고 가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셔서 제자들과 함께 영으로 하나님이 함께 계실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실제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고 깨닫게 하시며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그분에게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평안을 주시겠다고 말하십니다.(요 14:27) 평안?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것이 평안이었던가요? 평안은 세상에서 잘 살면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요? 세상에는 진짜가 있고 가짜가 있습니다. 진짜에는 그것만이 가지고 있는 도도하고 기품있는 가치가 있습니다. 가짜는 진짜를 똑같이 흉내내서 구별하기가 어렵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을 찾아내어야 진짜와 가짜가 분별이 됩니다, 평안에도 진짜와 가짜가 있습니다. 평안이라고 해도 다 같은 평안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나와서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있고 세상이 주는 평안이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같지 않습니다. 둘은 같아 보이지만 분명한 구별이 있습니다. 어느 권사님의 고백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을 받기 전에는 세상에서 잘사는 것이 평안이라고 생각 했었습니다. 내가 계획한 대로 내가 이루어 놓은 것들이 질서 있게 제자리에 잘 배치되어 있는 게 평안인 줄 알았습니다. 그것들이 무너지면 평안이 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내 주변의 환경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 그 자리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유지하기 위해서 헌신하면서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이없게 사기를 당해서 전 재산을 날리게 되었습니다. 평안이 깨어지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자살도 생각했었지만 남은 가족들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주님을 붙들고 주님만 의지하기로 결단하니 주님이 나에게 오셔서 나와 함께 임재하셨습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지금까지 나의 평안을 지켜 줄 걸로 알고 붙잡고 있던 것들이 다 부서지고 깨어져서 붕괴가 되었는데도 지금 내 마음에 있는 이 평안은 무엇일까요? 환경이 안정이 되는 게 평안이라면 다 깨져 버린 지금 나는 평안이 없어야 하는데 지금 나는 어느 때 보다도 평안합니다. 지금 나의 기도 제목은 주님을 위해 나머지 인생을 헌신 할 수 있을 만큼 큰 믿음을 달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30년 했지만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정말로 사랑하고 싶고 진실하게 믿고 싶습니다.” 평안은 위기 때 진짜와 가짜로 분별이 됩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세상의 환경 때문에 이루어 지는 평안입니다. 그 환경이 무너지면 평안도 없어집니다. 평안의 주체는 환경이 될 수 없습니다. 다 버리고 파괴시킬 수 있는 게 평안의 주체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평안의 주체는 환경이 아니라 예수님이십니다. 환경이 다 무너져도 모든 게 파괴되지 않고 다시 평안할 수 있어야 주체가 될 수 있지요, 예수님의 평안으로 예수님의 것으로 주시는 것을 받는 것이 진짜 평안입니다, 그래서 평안을 주시는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 하지도 말라“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임재하시니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로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것을 받았습니다. 진짜 평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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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03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음행 중에 잡힌 여자’(요 8:1~11)
    그리스도인 이라면 자기가 믿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지만 사랑하는 감정이 안 생긴다는 고민을 많이 듣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길까요? 라는 질문도 받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만 생기면 주를 위해 모든 걸 다 걸고 헌신할 수 있을 텐데 그 사랑이 안 생기니 괴롭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귀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안되어지니 괴로워하는 마음이 안타깝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까요? 하나님을 모르고는 사랑 할 수 없습니다. 또 하나님을 알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그분이 누구신가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 벌을 받는 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천벌이라고 합니다. 가장 높으신 분이 죄에 대해서 판단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하나님을 알아갈 때 하나님은 죄에 대한 벌을 내리시는 분이라는 인식으로 시작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의 진짜 모습을 예수님에게 담아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면 진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됩니다. (요 14:9) 한 죄인 여자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있는데 사람들 손에 붙잡혀서 그 앞으로 질질 끌려 왔습니다. 머리채는 다 풀어지고 눈물 범벅이 된 얼굴과 옷이 흙먼지와 뒤엉켜 몰골이 말이 아닙니다. 알고 보니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그대로 끌고 온 것입니다. 죄를 짓는 도중에 잡혀 왔으니 꼼짝없이 벌을 받아야 합니다. 피할 곳도 없고 도망 갈 수도 없습니다. 법대로 하면 돌로 맞아서 죽게 된 것입니다. 죄인 여자를 향해서 모여있는 사람들이 돌을 손에 하나씩 쥐고 곧 던질 기세입니다. 죄인에게 벌을 주는 살기등등하고 살벌한 현장입니다. 하나님은 천벌을 내리셔서 죄에 대한 벌을 주시는 분이시지 않습니까, “법대로 하면 돌로 쳐 죽여야 마땅하니 예수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때 예수님의 눈이 수치심보다 더한 두려움으로 바들바들 떨고 있는 죄인 여자의 눈과 마주 치셨습니다. 정말로 불쌍하다는 말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는 여자입니다. 어쩌다 저렇게 되었을까요? 한때 누군가에게는 사랑받는 귀한 딸이었을 텐데 죄를 짓고 나니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죄인의 신분이 그렇게 처참합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나지막한 예수님의 한마디에 갑자기 살벌하던 현장이 숙연해 집니다. 죄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의 양심을 건드리니 이 말씀을 듣고 하나씩 하나씩 슬쩍 그 불편한 자리를 피해서 나갑니다. 이것이 죄인을 대하시는 공정하신 하나님 이십니다. 사람 중에서 누가 죄인이며 누가 의인이겠습니까? 모두가 죄인이지요.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죄를 벌하려던 그 자리에 아무도 없고 예수님과 죄인 여자 둘만 있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 하지 아니 하노니...” 이 말씀을 들은 죄인 여자는 그 자리에서 오열을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을 다 용납하시고 받으셨구나, 이것이 하나님의 용서구나, 사랑, 이것이 사랑이구나...’ 자기의 죄를 용서받은 것을 아는 사람은 용서하신 것이 사랑 인 것도 압니다. 그 여자의 마음이 어떤 심정 이었을지 조금 이해할 것 같습니다. 이런 귀한 용서를 받고 또 다시 같은 죄를 지을 강심장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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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01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아비나답의 집과 오벧에돔의 집’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삼하6:11). 지난 주일 새벽까지 주룩 주룩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진눈깨비로 바뀌더니 차츰 함박눈이 되 가고 있었습니다. 같은 형질의 구름인데 비로, 진눈깨비로, 함박눈으로 바뀌는 것은 그를 맞이할 때의 온도차이일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 때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빼앗겼던 하나님의 궤가 블레셋에서 돌아온 후로 70여 년 동안(에벤에셀의 승리 때까지 20년, 사울 통치하의 40년, 다윗의 통치하의 10년) 제사장 아비나답의 집에 있었습니다(삼하6:3). 그런데 여호와의 궤로 인하여 아비나답의 집에 복이 임하였다는 내용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는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옮기는 도중 소들이 뛰자 하나님의 궤를 붙들다가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이에 다윗은 두려워 그에게로 옮기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가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웃사 사건 전까지 70여 년 동안 잠잠했던 여호와의 궤가 오벧에돔 집에 머문 지 단지 석 달뿐이었는데 하나님께서 그 궤로 인하여 오벧에돔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주신 것입니다. 얼마나 분명하게 주셨던지 모두에게 알려질 정도였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들여다본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웃사 역시 죽임을 당하고, 용사 다윗도 두려워 예루살렘으로 모셔가지 못한 언약궤를 오벧에돔의 집으로 모셔온다고 하자 오벧에돔인들 기쁜 마음으로 모실 수 있었을까요? 하지만 오벧에돔은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았습니다. 오벧에돔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온전히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맡았으니 온갖 정성을 들였을 것입니다. 자기 집에 하나님 보시기에 불합한 것들을 모조리 버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청결을 유지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말씀을 부지런히 보며 언약궤 모시는 법을 터득하려 했을 것입니다. 사실 그는 제사장이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언약궤를 직접 볼 수 없는 신분이었습니다. 성막 문지기, 언약궤를 지키는 문지기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직분을 천하게 여기거나 소홀히 여기지 아니하고 충성스럽게 맡고 지켰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온 가족에게 복을 주신 것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대상26:4-7절까지는 오벧에돔과 그 자손의 직분에 대하여 나열 됩니다. 그리고 8절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다 오벧에돔의 자손이라 저희와 그 아들들과 그 형제들은 다 능력이 있어 그 직무를 잘하는 자니 오벧에돔에게서 난 자가 육십 이 명이며” 이처럼 그 자손들에게까지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반면에 아비나답의 집에 대하여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그들이 언약궤를 수레에 모신 것을 보면 아마도 하나님을 말씀을 경홀히 여겼던 것 같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행진할 때에 아론과 그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기를 필하거든 고핫 자손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지니 죽을까 하노라. 회막 물건 중에서 이것들은 고핫 자손이 멜 것이며”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민4:15). 성물은 만지지 말며 어깨에 메라고 하였는데 그들은 어깨에 메도록 하지 않고 수레에 실었으며, 또 만졌습니다. 구름이 하나님의 은혜라면 그 은혜가 온도차이로 인하여 단비가 되기도 하고 또 눈이 되기도 한 것처럼 신자들의 하나님께 대한 태도가 웃사처럼 화가 되기도 하고, 오벧에돔처럼 복이 되기도 합니다. 때론 하나님께서 우리와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질지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끝까지 믿고 바라고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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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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