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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독연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마21:4-5) 예수님께 대한 아버지의 뜻은 이미 창세기에서부터 정해져 있었습니다(창3:15). 모든 성경이 예수님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5:39). 예수님은 임의대로 사시지 않고, 아버지께서 이미 정해 놓으신 그 길을 가셨습니다. 본문 역시 예수님의 대속 여정 가운데 정해진 내용으로 주님은 아버지께 순종하여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정하신 대로 세상에 오셨고, 예정대로 병자들을 고치셨으며, 예정대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임의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대속사업을 종종 제자들에게 알리셨습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마16:21). 그 외에 갈릴리에 모였을 때에 말씀하셨으며(마17:22-23),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또 말씀하셨습니다(마20:18-19). 이미 아버지께서 정해 놓으신 길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 중 한 사람이 그를 팔아넘길 것을 예고하시면서 그것 역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요13:18,21). 이처럼 예수님은 자신의 기쁨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사셨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신앙인들은 어떠할까요? 예수님은 부활하신 주일 저녁때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처럼 예수님도 제자들을 보내셨고, 오늘날 신앙인들을 보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도들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듯이 정해진 길이 있고 또 순간, 순간 보내심을 받습니다. 형님 속이고, 아버지 속이고 에서의 보복이 두려워 도저히 가나안 땅에서 살 수 없었던 야곱은 형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가는 도중에 벧엘에서 노숙하게 되었습니다. 꿈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28:15).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욥도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 욥에게도 자신이 가는 길이 있었습니다. 선지자들도 사역의 목표와 방향성은 대개 비슷하였지만 살아가는 방식에 있어서는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아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너는 이 땅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며 자녀를 두지 말지니라.”(렘16:2). 반면에 이사야 선지자는 아내를 두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 아들의 이름을 하나님께서 친히 정하여 준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내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 하라. 이는 이 아이가 내 아빠, 내 엄마 할 줄 알기 전에 다메섹의 재물과 사마리아의 노략물이 앗수르왕 앞에 옮긴바 될 것임이니라.”(사8:3).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길과 삶의 양식까지도 정해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같이 예수님도 사도들에게 각자의 정하신 곳으로 보내셨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으로 베드로와 바울을 들 수 있습니다.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갈2:7-8). 제자들을 보내셨던 예수님께서 지금 신앙인 모두의 길을 정해 놓고 보내십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만 보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먼저는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가 보내신 곳입니다. 보냄 받은 사람은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부름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골3:23-24). 그러므로 신앙인들은 보내신 이의 뜻을 잘 헤아려서 나타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성경은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잠25:2)라고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너는 어디로 가서 무슨 일을 하라.”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위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각자의 길을 숨기시는데 우리가 더듬어 찾아야 합니다. 지각을 사용해서 찾아야 합니다. 기도로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우리의 길을 알리시는데 지체하지 않습니다(렘10:23). 기억하십시오.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정하신 길로 보내신 것처럼 예수님도 우리를 보내셨고 또 보내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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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독연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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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독연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야긴과 보아스’
- “이 두 기둥을 전의 낭실 앞에 세우되 우편의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야긴’이라 하고 좌편의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보아스’라 하였으며”(왕상7:21). 솔로몬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때 전의 낭실 앞에 세운 두 기둥의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우편 기둥의 이름을 ‘야긴’이라고 하고, 좌편 기둥의 이름을 보아스라고 하였습니다. 야긴은 히브리어로 ‘저가 세우리라.’ ‘저가 확립하심’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또한 야긴은 다윗시대 족장이며 제사장이었던 인물로도 나옵니다(대상9:10, 24:17). 반면 ‘보아스’는 ‘그에게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인명으로는 룻의 남편이며 다윗의 증조부입니다. 성전의 두 기둥이 가지는 특징적인 명칭은 야긴과 보아스라는 인물보다 거기에 담긴 의미에 있습니다. 야긴의 의미를 담고 있는 ‘저가 세우리라’에서 세우는 것의 주체는 당연히 하나님이십니다. 무슨 일을 해 놓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아니하고 스스로 잘했다는 생각이 들 때 다음에 반드시 실수하게 된다는 것을 요사이 톡톡히 교훈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피조물입니다. 그러니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세우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시127:1). 성전을 짓는 것도, 나라를 세우는 것도, 가정을 세우는 것도 하나님이 세워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허사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누구를 세워주실까요?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신고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삼하7:27).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하여 집을 세워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다윗 집안에 왕이 끊이지 않겠다는 약속입니다. 솔로몬의 타락으로 그의 사후 르호보암왕 때 이스라엘은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로 분열되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시조 여로보암부터 마지막 호세아 왕까지 208년이라는 기간에 왕이 19명이 교체 되었으며 왕조(가문)는 8번이 바뀌었습니다. 반면 다윗 왕조는 시드기야 왕이 바벨론에 끌려갈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왕하25:7). 그리고 그 약속은 신약 시대 이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다윗이 어떻게 하였기에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이토록 복을 주셨을까요? 다윗은 단지 하나님께서 사방의 모든 대적을 파하시고 다윗 왕으로 궁에 평안히 거하게 하신 때에 나단에게 이런 말을 했을 뿐입니다.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도다.”(삼하7:1). 자신은 좋은 백향목 궁에 거하는데 그를 왕이 되게 하신 하나님은 장막 가운데 있는 것이 하나님께 죄송스러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을 건축하고 싶은 마음을 썼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영영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삼하7:11-13). 야긴은 이와 같이 하나님이 세우시리라는 약속의 터며, 기둥입니다. 기둥 중에 하나인 보아스는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그에게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힘으로 무엇이든지 하려하면 큰 낭패를 당합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아줄 때는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 때였습니다(창21:5). 아브라함과 열 살 아래인 사라의 나이는 90세였습니다. 이미 오십 세만 되어도 경수가 끊어지는 시기인데 90세라니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죽은 자와 방불한 사람을 통하여 한 민족을 세우는 일을 하였습니다(히11:12). 오직 능력이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을 알리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은 이스라엘에 흉년이 들자 부인과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땅으로 갔습니다(룻1:2). 그곳에서 모압 여인에게 두 아들을 장가보냈지만 엘리멜렉과 두 아들은 모두 죽고 세 과부만 남았습니다. 10년쯤 지난 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돌아보셨다는 소식을 듣고 둘째 자부 오르바는 모압에 남았지만 룻은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농사를 주업으로 하는 그 시대에 힘 있고 능력 있는 남자는 모두 죽은 상태였기 때문에 나오미와 룻은 그야말로 약한 상태였습니다. 하루는 룻이 이삭을 주우러 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이 보아스에게 속한 밭이었습니다(룻2:3). 보아스는 그 때까지 혼인을 하지 않은 노총각이었습니다. 거기서 보아스는 룻과 혼인하였습니다. 그래서 태어난 사람이 다윗의 조부 오벳이었습니다(룻4:17). 나오미와 룻은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가 되어 다른 사람의 밭에서 주운 이삭으로 연명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모두를 잃어버리고 아무 것도 의뢰할 것이 없을 때 보아스라는 유력자를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능력은 약한 자 무능한 자에게 임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고 스스로 지혜로운 자로 여기면 하나님께서 결코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성전의 두 기둥인 야긴과 보아스는 성전을 세우실 분도 하나님이시고, 세울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임을 알고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고, 하나님께 힘을 받아서 살아가야 함을 지금 우리에게도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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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독연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야긴과 보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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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독연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
-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마21:2). 나귀 어미와 나귀 새끼가 한 풀밭에 매여 있습니다. 본문 내용만으로는 나귀 새끼도 매여 있었는지 확신할 수 없지만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나귀 새끼만 매여 있다고 나옵니다. 그러므로 나귀 어미와 나귀 새끼가 모두 매여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어린 시절 염소나 소를 끌고 다녀본 적이 있습니다.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이 있는데 언덕이나 나무나 다른 짐승이 닿지 않는 곳에 매여야 한다는 원칙입니다. 만일 그들을 매고 있는 줄이 서로의 반경 안에 들어 있다면 대단히 위험한 상황이 초래될 수도 있습니다. 줄끼리 얽히고설켜 그들의 목을 조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있는 나귀도 예외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서로 마주보고 곧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었겠지만 몸이 닿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어미가 새끼를 향하여 다가오고 새끼가 어미젖을 먹기 위하여 접근하였을지라도 서로 바라만 볼 뿐 접촉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러한 나귀 어미와 새끼를 풀어 주님께로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매인 그들이 풀어졌을 때 드디어 그들은 피부를 접촉하며 그동안 못다 하였던 사랑을 나누며 예수님께로 왔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6:12-14). 신앙인들이 사욕을 좇아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은 결코 자유가 아닙니다. 죄가 왕 노릇하는 것이며, 죄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귀와 나귀 새끼처럼 매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비록 풀밭에 매여 있었지만, 우리는 사욕, 곧 죄에 매여 있었습니다. 사욕이라는 우상이 끄는 그대로 끌려 간 것입니다(고전12:2). 그런데 주님께서 나귀를 풀어주었듯이 신앙인들이 다시는 죄에 매여 있지 않도록 줄을 끊어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해서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더 흉악한 주인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더러운 귀신이 나가 물 없는 곳으로 다니다가 마땅히 쉴 곳을 찾지 못하여 이전 살았던 집으로 와서 보니 그 집이 소제 되고 수리되었던 것을 보고 전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려와서 살기 때문에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여진 것과 같습니다(마12:43-45). 우리도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해서 방심한다면 전보다 더 악한 귀신이 들어오게 됩니다. 믿는 사람이 안 믿는 사람보다 더 인색하고 더 이기적이고 더 명예영광 추구하고 더 양심 안 쓰고 더 욕심부리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거기에 해당할 것입니다. 마귀는 거듭난 신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더 이상 받지 못하도록 얼마나 노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노리는 마귀를 사전에 차단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신앙인들은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롬6:13, 12:1). 나귀 새끼처럼 자신의 몸을 예수님이 쓰실 수 있도록 드려야 합니다. 사실 예수님이 우리를 보혈로 사셨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고전6:19). 우리 임의대로 쓸 권리가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영광만 위해야 합니다. 나귀 새끼를 주님이 쓰시지 않았다면 그 나귀 새끼는 영혼 없이 죽는 한 마리의 나귀 새끼에 불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그를 만나주셨을 때 그는 주님의 나귀가 되었습니다. 주님 때문에 사람들이 그 잔등에 인간의 옷을 걸쳐주고, 그가 걷는 곳에 사람들의 옷을 펼쳐 두었으며, 승리의 나뭇가지 위에 걸으며, 존귀한 나귀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영광에 나귀도 참예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존귀하게 되려고 아니해도 주님 한 분 영화스럽게 하려는 마음을 품고 살아가면 이처럼 주님께서 곧 영광을 주십니다. 죄에 매여 죽을 인생을 주님께서 풀어주셨으니 우리 역시 고맙고 감사한 마음으로 자신을 주님께서 쓰시는 도구가 되도록 주님께 드리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딤후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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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독연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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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독연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보냄을 받은 사람’
-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막11:2-3).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에 제자들을 맞은편 마을로 보내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두 제자가 예수님께 보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이시며, 사랑이시며, 덕스러운 분입니다. 세상 윤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윤리 이상의 윤리를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그런데 두 명의 제자들에게 본문의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앞 동으로 가서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새 차가 주차되어 있을 터이니 가지고 오너라.”는 것과 유사하다고 하겠습니다. 그 말씀에 선뜻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선생님, 남의 차를 어떻게 주인의 허락도 없이 타고 옵니까?”라고 되물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명령은 온 우주의 주인이신 예수님만 하실 수 있는 명령입니다. 제자들은 선생님의 그 말씀에 어떤 두려움도, 어떤 질문도 없이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순종훈련을 제대로 시키신 열매일 것입니다. 그들은 맞은편 마을로 가서 매여 있는 나귀 새끼를 풀었습니다. 그러자 거기 있는 사람 가운데 나귀 주인인 듯한 사람이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일러주신 대로 대답하였습니다. 이에 나귀 주인은 즉시 허락하였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보냄을 받아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것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두 뒷감당을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순종하고 가니까 정말로 나귀 새끼가 매여 있었고, 당당하게 풀어오려고 하자 주인은 머뭇거리거나 삯을 요구하지 않고 바로 허락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날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내로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날 텐데 그를 따라가서 그가 들어가는 집 주인에게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는지’를 묻도록 합니다. 제자들이 그대로 하자 성안에 물동이를 들고 가는 사람을 만났고, 그를 따라서 간 집이 마가의 집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최후에 만찬을 진행하였습니다(막14:12-26).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만 가라고 하시고 가만히 계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귀 주인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예수님을 위하여 나귀 새끼를 줄 마음을 불러일으켰으며, 마가의 어머니에게는 주님과 제자들을 위하여 유월절 만찬을 베풀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유월절 식사를 위하여 제자들을 보낸 성은 예루살렘 성이었습니다. 물이 흔치 않은 그곳에 평소라면 사람들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물을 들고 가는 사람 역시 한 사람뿐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제자들에게 물동이를 들고 가는 사람의 얼굴 생김새와 옷차림과 신장 등을 상세히 말씀하시지 않고 단지 물동이를 들고 가는 사람이라고만 합니다. 주님은 두 제자가 혼돈되지 않도록 제자들이 그 성내에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마가네 집식구 외에는 아무도 물을 긷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순종하는 사람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들을 준비하십니다.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는 경건한 사람으로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행10:1-2). 그런 백부장에게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청하여 말씀을 듣도록 하였습니다. 그러시면서 베드로가 있는 위치까지 가르쳐 주십니다. 고넬료는 집안 하인 둘과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베드로가 있는 곳으로 보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보내지 않으셨는데도 그들이 베드로를 찾아가서 청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베드로는 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도 이방인에 대한 선입견이 완고하였습니다. 구원은 유대인과 이방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뿐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방인과는 식사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선입견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개입하시지 않는 한 깨지기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의 선입견을 깨뜨리시기 위하여 세 번이나 똑같은 환상을 보이십니다. 보자기 같기도 한 큰 그릇이 네 귀에 줄이 달린 채로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그릇 안에는 구약 율법에서 금한 각색 짐승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일어나 그것들을 잡아먹으라고 하십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였습니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이런 일이 세 번이나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리워 갔습니다. 세 번까지 같은 일이 반복 된 것으로 보아 베드로의 선입견이 얼마나 강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환상까지 보이면서 베드로의 선입견을 깨뜨린 것은 보냄을 받아 베드로에게 가는 고넬료의 종과 부하들을 위함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보내심에 순종하고 살아가는 사람을 위해서 모든 것을 예비해주십니다. 그것은 마치 어느 대기업 사장이 사원에게 출장을 보낼 때는 여비와 가서 먹고 쓸 것을 모두 제공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내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행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스스로 책임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보냄을 받은 두 제자는 예수님의 뜻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사람은 자기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 삼을 것입니다(요7:18). 그것이 보냄을 받은 사람들의 자세이며, 보냄을 받은 사람의 표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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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독연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보냄을 받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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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독연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서로 발을 씻기라’
-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13:13-14). 발은 가장 냄새나는 부분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팔레스타인 지역은 사막이 많았습니다. 지금이야 그곳도 자기 집에서 목욕할 수 있겠지만 당시에는 물이 있는 곳이 흔하지 않아 씻기 위해서는 우물을 찾아가거나 냇가나 강을 찾아야 했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샌들을 주로 신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목욕을 해도 오가며 발이 더럽혀지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래서 귀빈이 오면 씻을 물을 떠서 발을 씻겨주었습니다. 그것이 사랑과 환영의 표시였습니다. 예수님을 초대하였던 바리새인 시몬은 그 동네 죄인으로 낙인 찍혔던 여인이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눈물로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씻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에 대하여 혐의가 생겼습니다. ‘이 분이 정말 선지자였다면 저 여인이 저렇게 하도록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자 모든 생각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것이 있도다.” “주여 말씀하소서!” “채주에게 빚진 자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500데나리온의 빚을 졌고 또 한 사람은 100데나리온의 빚을 졌는데 둘이 갚을 것이 없어 다 탕감하여 주었다.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그러자 시몬이 대답하였다.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 받은 사람입니다.” “네 말이 옳도다. 이 여인을 보느냐?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지만 이 여인은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씻었으며.......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랑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7:36-50절 내용). 비록 바리새인 시몬은 예수님을 초대하였지만 그를 접대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발을 씻겨주기는커녕 발 씻을 물조차 주지 않은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초대한 이유는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짐작이 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신을 초대하는 사람에게는 응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고(요3:17), 사람들과 함께 사시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마1:23). 이처럼 발을 씻겨준다는 것은 “당신이 우리 집에 오심을 환영합니다.”의 뜻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으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서로 발을 씻겨주는 것이 옳다고 하였으니 우리 역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발은 육신을 의미합니다. “여수룬이 살찌매 발로 찾도다.”(신32:15). 여기서 발로 찾다는 것은 육신의 거역성이 나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신앙인들이 형제의 발을 씻겨준다면 어떻게 씻겨주어야 할까요? 발을 씻기는데 꼭 필요한 것은 물입니다. 물이 아니고서 깨끗하게 씻겨줄 그 어떤 것도 없습니다. 형제들의 발, 육신의 죄악성을 씻겨주려면 물로 상징되는 성령으로 씻겨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흠을 들춰내고 지적하여 씻겨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 가뭄이 심할 때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사르밧에 사는 과부의 집으로 보냈습니다(왕상17:8-24). 과부가 그를 공궤하도록 하였습니다. 엘리야가 오기 전 과부의 집에는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이 조금 남았었는데 엘리야가 머무는 동안 통 안에 가루와 병 안에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과부가 엘리야를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왕상17:18). 엘리야는 이 과부의 죄를 한 마디도 지적하지 않았지만 이 과부는 엘리야를 보고 죄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아들이 죽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한 여인은 물론 죄를 회개하였을 것입니다. 이 여인은 엘리야를 통하여 성령을 만진 것입니다. 그가 회개하고 씻을 성령의 물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말씀하셨습니다(막16:7). 제자들은 갈릴리에 갔습니다. 그런데 여러 날이 지나도 예수님이 나타나시지 않자 제자들 가운데 지도자 격인 베드로가 말하였습니다. “나는 고기 잡으러 가노라.” 그러자 그동안 꾹 누르고 있었던 다른 제자들도 “나도” “나도” 하면서 동참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날 밤에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날이 새어갈 무렵 모르는 분이 멀리 서서 물었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그러자 제자들이 대답하였습니다. “없습니다.” 그러자 그분이 말하였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요21:6). 그러자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었습니다. 요한이 외쳤습니다. “주님이시다.” 그러자 베드로는 겉옷을 걸치고 90여 미터 되는 곳으로 헤엄쳐 갔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배를 타고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곳에서 숯불을 피워놓고 고기를 굽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무엇을 느꼈을까요? “이런 생선이 어디에서 나왔지?” “예수님께서 이미 생선과 떡과 숯불을 가지고 계셨구나” “예수님만 따르면 의식주에 걱정이 없는데 우리가 그사이에 참지 못하고 자발없이 나갔구나.” 생각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마디 말씀이 없으셨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그 행위에 스스로 회개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제이며 발을 씻겨주는 것입니다. 며칠 전 안산에 올라갔습니다. 그곳에 한 어르신을 만났는데 그 분은 저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곳에 화초를 심었는데 너무 가물어 물을 떠다가 주었어. 그런데 그것도 못 견디고 말라 죽고 말았어.”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분의 말을 듣고 저는 아무도 몰라주어도 ‘이렇게 좋은 일을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둘레 길을 걷다가 개똥을 발견했습니다. 나무 색과 비슷한 색이어서 밟기 딱 좋은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나무로 젓가락을 만들어서 사람이 밟지 않을 곳으로 버렸습니다. 그 어르신을 만나지 않았어도 하였겠지만 더욱 선한 행동을 하고 싶은 마음이 그 어르신을 통하여 일어난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이처럼 서로 발을 씻기라는 것은 우리를 통하여 형제가 성령을 만지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산에 아름다운 화초를 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산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남겨놓은 꽁초를 보면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발을 씻기기는커녕 오히려 더러움만 묻게 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인들은 우리 자신을 통하여 선한 영향력을 상대에게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서로 발을 씻겨주는 행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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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독연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서로 발을 씻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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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독연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생명과 평안’
-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5,6). 산에 올라갔는데 모기들이 새까맣게 제 주변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사람의 몸에 모여드는 모기들은 암컷들이라고 합니다. 원래 모기의 음식은 꿀과 달콤한 식물즙이면 충분하지만, 산란을 위해서는 단백질과 철분이 필요하므로 동물들에게 모여든다고 합니다. 모기들은 땀내가 많이 나는 먹잇감을 특히 좋아하고 대체로 A형보다 O형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뿌리는 모기약도 있지만, 오늘은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부채로 쫓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쫓으면 그뿐이었습니다. 다시 득달같이 달려들었습니다. 철분과 단백질이라는 먹잇감이 있고 냄새가 그들을 유혹하였기 때문에 모기가 저에게 달려들었던 것처럼, 마귀가 신앙인들을 공격하는 것 역시 신앙인들에게 자신의 먹잇감이 있고 또한 그들이 좋아하는 냄새를 맡았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좋아하는 먹잇감이 무엇이며 그들이 좋아하는 냄새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넘어뜨린 뱀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창3:14). 뱀의 음식을 흙이라고 정한 것입니다. 뱀은 개구리나 쥐와 같은 동물들을 잡아먹습니다. 흙을 먹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잘 못 말씀하신 것일까요? 결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사실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였던 뱀은 사탄의 사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2:7). 생기는 ‘생명의 호흡’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에게서 생명의 호흡이 빠지면 흙만 남습니다. 그 흙은 육신입니다. 뱀에게 ‘흙을 먹고 살라.’는 의미는 육신을 먹고 살라는 의미입니다. 육신의 속성을 먹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사탄의 미혹을 받아 육신대로 살아가면 자신 안에 역사하는 사탄을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육신을 따라 살아가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살아가면 사탄은 점점 쇠약해져 힘을 못 쓰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탄은 육신의 속성이 강하고 육신의 속성을 제어 못 하는 사람을 유혹하고 그런 사람 주변으로 모여듭니다. 모기를 퇴치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 하나는 모기가 싫어하는 냄새를 몸에 바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기가 아예 접근을 못하거나 질식해버리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육신을 추구하고 육신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에게 모여들지만 이런 사람이라도 돌이켜 사탄이 싫어하는 속사람 생명을 따라 살아가면 그들의 밥이 없어져서 피하고 맙니다. 사탄으로 접근하지 못 하게 하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들이 모일지니라.”(마24: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나 까마귀들이 모여듭니다. 마귀는 육신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노립니다. 사람들의 육신의 속성은 그들의 밥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을 좇는 자들은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롬8:5-6). 우리 자신이 육신적인 사람인지 영적인 사람인지 아는 방법은 우리의 생각을 살펴보면 됩니다. 오감에 자극을 받아, 보고 듣고 느끼는 것에 끌려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육적인 사람이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영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들이 육신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영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간다면 사방이 평안해지지만 보이는 것에 지배를 받아 살아 간다면, 사방에 대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살아가면 평안과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족하여집니다(사33:6). 영을 따라 살아가는 일은 마귀들에게는 에프킬러나 몸에 뿌리는 모기약과 같습니다. 마귀들이 끔찍이 싫어하는 냄새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냄새가 생명에 이르는 향기입니다(고후2:16).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풍기려면 자기를 부인하도록 해야 합니다. 자기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함께 죽었습니다. 죽은 자에게서 나오는 것은 썩은 냄새입니다. 아무리 냄새를 감추려고 해도 드러나는 것은 고약한 악취입니다. 이러한 악취도 마귀들에게는 향기입니다. 신앙인들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 구할 따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가 참되다고 하였습니다. 그 속에 불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요7:17-18).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스스로 말하고 스스로 행하지 않습니다. 오직 보냄을 받아 보내신 이의 영광만 위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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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독연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생명과 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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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독연 WAIC 설교] 이귀열 목사의 '나는 무엇인가?'(창1:26∼31) ⓶
- 3. 하나님의 형상에는 가치의 도가 들어 있습니다. ‘가치의 도’는 ‘나는 어떤 가치가 있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사람의 체(體)와 용(用)의 혼합적 의미를 말합니다. 사람의 체(영혼, 육체)도 가치가 있고, 사람의 용인 여러 가지 당위도 가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금을 귀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무한한 가치가 있습니다. 금은 사람과 비교 대상도 아닙니다. 우리가 무한한 가치가 있다는 실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 받으시고 죽으신 사실입니다. 이사야 53장 4∼6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성육신하시고, 고난 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재림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무한한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측량할 수 없는 지극히 귀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가치는 세상 어느 것에도 비교할 수 없는 존귀한 가치입니다. 4. 죄로 인해 상실되고 오염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길은 없을까요? 로마서 5장 1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됩니다. 매우 간단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믿음→의(하나님 형상의 회복)→하나님과 화평(하나님과 관계의 회복) 믿음이 공로가 아닌 통로가 되어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고, 하나님과 관계도 회복됩니다. 이 귀한 일을 이루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것이 믿음의 도입니다. 에무나(구약에서 말하는 믿음)와 페이도(신약에서 말하는 믿음인 피스티스의 어원)의 의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인이 되는 칭의의 도는 우리에게 복음입니다. 우리의 노력과 힘씀, 우리의 공로, 우리의 경건으로 의인이 된다면 우리가 의인이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인류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얼마만큼 힘써야하고, 얼마만큼 공로를 쌓아야 되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공로 주의는 사람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서 결국 좌절에 빠지게 되고 멸망의 길로 가게 만듭니다. 믿음으로 의인이라고 칭함을 받고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믿음의 도는 우리에게 복음입니다. 은혜입니다. 이 좋은 믿음의 길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5. 나의 정체를 바르게 알면 어떤 유익이 있을까요? 높은 자존감을 누립니다. 시편 8편 4∼6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으니“ 사람의 정체는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입니다.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운 존재입니다. 만물을 다스리는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존의식이 있으며 만족과 기쁨이 있습니다. 자존의식이 있기 때문에 자신감이 있고, 긍정적이고, 밝은 정서를 가집니다. 명랑합니다. 자존의식이 있기 때문에 깊고 깊은 세계를 탐구합니다. 높고 높은 경지를 추구합니다. 나의 정체를 바르게 알면 높은 성취동기를 갖게 됩니다. 나의 존재와 당위, 가치를 알면 나의 인생의 구현을 위하여 매진합니다. 높은 도덕성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존재의 도와 당위의도, 가치의 도를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귀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존재이므로 높은 도덕성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행복을 누립니다. 나의 정체를 아는 것은 행복의 조건인 지성적 조건 가운데 하나를 충족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정체를 알면 과욕을 품지 않습니다. 절대자가 되려고 한다든지, 신이 되려고 한다든지, 절대 권력자가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인간 존재로서 만족하고 행복을 누립니다. 나의 정체를 바르게 알면 다른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인류에게 평화와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나의 정체를 바르게 아는 것은 행복으로 가는 길입니다. 감사의 도를 체득합니다. 시편 100편 3∼5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 할지어다 대저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성실하심이 대대에 미치리로다.“ 하나님이 나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은혜를 알고 감사합니다.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지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되심에 감사합니다. 우리를 존귀한 백성으로 삼으심에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길러주시고, 보호하여 주시고, 인도하여 주시고,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됨을 감사합니다. 선하신 하나님, 인자하신 하나님, 변함없이 진실하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 모든 은혜를 온전히 누리기를 소망합니다. ◇이귀열목사는 총신대 신학대학원을 나와 전북신학교 교수를 역임했습니다. 전북 전주 완산구 서신동에 개척한 국제독립교회연합회소속 생명의빛교회는 하나님을 믿기에 행복한 성도들이 힘차게 복음 전하는 말씀 중심의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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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독연 WAIC 설교] 이귀열 목사의 '나는 무엇인가?'(창1:26∼31) 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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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독연 WAIC 설교] 이귀열 목사의 '나는 무엇인가?'(창1:26∼31) ⓵
- 사람은 누구나 궁극적 질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 즉 인간의 정체(identity)에 대한 의문을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먹었던 것이 바로 나’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먹은 쌀이 나이고, 김치가 나이고, 상추, 쑥갓, 물, … 그런 것들이 ‘나’라고 생각합니다. 유물주의적인 관점에서 인간의 정체를 정의합니다. 이런 인간관에서는 인간의 가치를 논할 수가 없습니다. 도덕성을 논할 수가 없습니다. 행복과 불행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 영생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소가 바로 나’라고 생각합니다. 돼지, 말, 토끼, 너구리, 닭, 거북이, 개구리, … 그런 것들이 ‘나’라고 생각합니다. 인과 관계에 의해서 인간을 바라보는 불교 윤회설의 입장입니다. 이런 인간관에서도 인간의 가치, 도덕성을 논할 수가 없습니다. 행복과 불행을 말할 수 없습니다. 영생을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란 도덕성을 가진 자연만물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유학에서는 도덕성 유무에 따라서 존재의 가치를 논합니다. 유학에서 인간을 도덕성으로 이해한 것은 장점입니다. 그러나 도덕성은 인간 정체(identity)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정체에 대해서 처음부터 명확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분명하게 계시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무한에 가까운 좋은 가능성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무한히 귀하고 귀한 존재입니다. 인간 존재에 대해서 불교는 유(有)에서 환(幻)(有→幻)을 말하고, 유학은 유(有)에서 실(實)(有→實)을 말하며, 기독교는 무(無)에서 유(有)(無→有)를 말합니다. 사람이 무엇인가에 대한 견해의 차이에 따라서 인생이 전혀 다른 길을 갑니다. 성경의 인간론 성경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자가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세기 1장 27절). 사람의 정체를 정확하게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 노소, 인종, 구분 없이 모두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씀은 사람이란 유한성과 무한성을 겸비한 존재임을 계시하여 줍니다. 전인격으로서 인간은 시작은 있지만 영원한 생명을 가진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에는 존재의 도, 당위의 도, 가치의 도가 들어있습니다. 1. 하나님의 형상에는 인간 존재의 도가 들어있습니다. ‘나는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체(體, substance)에 대한 질문의 답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인간 존재 질문에 대한 답이 ‘존재의 도’입니다. 전인격(영혼과 몸)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영혼은 지·정·의의 인격을 가진 생명체입니다. 실체입니다. 존재입니다. 영혼이 하나님 형상의 좌소(座所)입니다. 몸은 하나님 형상을 드러내는 기관입니다. 실체입니다. 존재입니다. 하나님 형상을 온전하게 이해하려면 창세기 1장 26∼31절을 통하여 사람의 정체를 관조해야 합니다. 창 1: 26∼31에서 사람은 5가지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 사람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고 하셨는데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지칭합니다.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인간의 영혼과 육체가 합하여 한 인간이 되었다는 것으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완전한 설명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삼위일체 존유방식과 사람의 영혼과 육체가 하나가 된 존재방식은 우리들에게 불가해한 일입니다. 우리의 이해의 한계를 초월한 영역입니다. ‘따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존유’와 ‘인간 존재’의 관계를 말합니다. 인간 존재는 하나님께 의존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유하심을 따라 인간 존재가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면 죽습니다. 둘째, ‘다스리는 직분을 가진 존재’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사람은 모든 것을 다스림을 통하여 하나님을 땅위에 나타내는 직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신화(神化)되어 하나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물을 탐구하고, 연구하고, 창조적 지성을 발휘해야 합니다. 셋째, ‘남자와 여자’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라는 것입니다. 넷째, ‘복을 누리는 존재’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창 1: 28절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라고 말씀하셨는데 어떤 복일까요? 그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모든 복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처럼 복을 누리는 자로 창조 받았습니다. 하늘의 복과 땅의 복, 영적인 복과 육적인 복, 현재의 복과 영원한 복, … 모든 복을 누리는 것이 우리의 본래 모습 입니다. 다섯째, ‘심히 좋은 존재’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심히 좋다고 말씀하셨으니까 인간 존재의 좋음은 그 깊이, 높이, 크기, 정미함, 오묘함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본래 우리는 이처럼 매우 아름답고 좋은 존재입니다. 영혼도 아름답고, 육체도 아름답습니다. 영혼도 매우 좋은 존재이고, 육체도 매우 좋은 존재입니다. 전인격이 매우 아름답고 좋은 존재입니다. 우리의 전인격이 진·선·미로 가득 차있습니다. 이것이 본래 우리의 모습입니다. <2편에 계속> ◇이귀열목사는 총신대 신학대학원을 나와 전북신학교 교수를 역임했습니다. 전북 전주 완산구 서신동에 개척한 국제독립교회연합회소속 생명의빛교회는 하나님을 믿기에 행복한 성도들이 힘차게 복음 전하는 말씀 중심의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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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독연 WAIC 설교] 이귀열 목사의 '나는 무엇인가?'(창1:26∼31) 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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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
-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19:30). 먼저 된 자가 먼저 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회사에서의 진급이나 군대에서의 진급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되지 못할 때 구성원들 사이에는 불평불만이 쏟아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원칙을 깨뜨리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먼저 믿은 사람이 나중 믿은 사람보다 신앙에 있어서 뒤처지는 경우가 많다는 내용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는 이유가 마땅히 버려야 할 것을 버리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19:29). 공회의원이면서 부자였던 한 청년이 영생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께 왔지만 많은 재산을 팔지 못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하였습니다(마19:21-22). 반면에 다른 제자들은 대부분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마9:9, 눅5:11). 바울 사도 역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았습니다(빌3:13-14). 이처럼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된 자의 조건은 주님을 믿는데 지장이 되는 것을 버리는 데 있습니다. 버린다는 것은 믿고 맡기는 것을 의미합니다(벧전5:7). 예수님의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된 자의 비유는 포도원의 품꾼들에게서도 나타납니다(마20:1-16). 어떤 포도원 주인이 일당 15만 원을 주기로 약속하고, 새벽 여섯 시에 일군을 보냈습니다. 아홉 시에 장터에 가보니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 역시 포도원에 보냈습니다. 정오에도, 오후 세 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후 다섯 시에도 나가보니 해가 저물어 가는데도 아직 일을 찾지 못하고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포도원에 들여보냈습니다. 오후 여섯 시가 되자 포도원 주인은 일과를 마치게 하고 일군들에게 삯을 주었습니다.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 뜻밖에 십오만 원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오후 세 시에 시작한 사람과 정오에 시작한 사람, 오전 아홉 시에 시작한 사람, 새벽 여섯 시에 시작한 사람들이 기대에 찬 눈으로 자신들에게 줄 몫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포도원 주인은 나머지 모든 사람에게도 똑같이 15만 원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실망한 사람들이 포도원 주인에게 따지듯 말하였습니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마20:12). 그러자 주인이 대답하였습니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마20:14-15). 먼저 온 사람과 나중 온 사람의 차이가 본문 가운데 드러나지 않지만 먼저 온 사람들의 말에 그들의 태도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마20:12).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의 말 속에는 기쁨으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억지로 일을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에 한 시간만 일을 한 사람들의 태도는 다를 것입니다. 그동안 수십 곳에 서류를 집어넣었지만 통과되지 않다가 뒤늦게 그를 고용해준 주인이 너무나 고마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보답하는 마음으로 기쁨으로 일을 하였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 마음이 천국에 합당한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천국 백성으로서 합당한 마음은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함과 보답하는 자세, 기쁨으로 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먼저 온 자가 먼저 될 기회는 늦게 온 자가 먼저 되는 기회보다 훨씬 많습니다. 바로 많은 시간 때문입니다. 그 시간들을 허투로 쓰지 않는다면 영적인 성장은 일취월장할 것입니다. 하지만 오랜 경험으로 인한 교만과, 타성에 젖은 태도가 뒤처지게 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먼저 온 자로서 계속 먼저 되기 위해서는 나중 온 사람처럼 보답하는 자세와 겸손한 태도와 배우려는 자세입니다. 셋째로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는 경우로는 회개 여부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맏아들에게 가서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마21:28). 맏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에 “예,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도 가서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라고 하였습니다. 둘째 아들은 “싫소이다.”라고 대답하였지만, 곧 뉘우치고 갔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둘째 아들이 첫째 아들보다 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였다고 말씀하시면서 회개하고 순종한 세리와 창기들이, 말뿐이며 행함이 없는 대제사장과 유대인의 장로들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십니다(마21:31).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회개와 그에 합당한 열매 맺은 사람들을 먼저 되게 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구원 얻는 사람이 적은지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13:24)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시면서 결론적으로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눅13:30)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기 위해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함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을 위하여 얼마나 버렸는지, 겸손과 보답하는 마음을 가지고 얼마나 열심히 섬겼는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었는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썼는지 여부가 먼저 된 자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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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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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독연 칼럼] 강성률 목사의 ‘타인의 잘못 때문에’
- “시므이가 그 종을 찾으려고 일어나 그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가드로 가서 아기스에게 나아가 그 종을 가드에서 데려왔더니 시므이가 예루살렘에서부터 가드에 갔다가 돌아온 일을 혹이 솔로몬에게 고한지라.”(왕상2:40-41). 운전면허를 딴 후 얼마간 장롱 속에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부득이하게 운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생겨 한 형제로부터 연수를 받을 때였습니다. 우회전을 위하여 도로 갓길을 서행하고 있었는데 앞에 가는 차가 갑자기 정차하였습니다. 조금만 비키면 된다는 생각에 핸들을 살짝 좌로 돌려 옆 차선을 걸치려고 하자 조수석에 있던 형제가 저를 저지시켰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앞차가 다시 갈 때까지 기다리던지, 아니면 좌측 차선을 보고 지나가는 차가 없으면 그때 옆 차선을 걸치세요. 조금만 비켜 가면 된다는 생각에 사이드미러도 보지 않는다면 접촉사고 내기 쉽습니다.” 그러면서 덧붙였습니다. “왜 타인의 잘못 때문에 우리가 사고를 내야 합니까?” 성경에는 타인의 잘못 때문에 자신이 더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노아의 아들 함은 술에 취하여 발가벗고 장막에 드러누운 아버지의 실수를 보고, 형 샘과 야벳에게 비난한 후 아버지로부터 저주의 경고를 받았습니다(창9:22,24,25). 그로 인하여 함의 아들이었던 가나안의 후손은 기브온 족속만 빼고(창9:26), 여호수아에 의하여 거의 전멸 당하다시피 했습니다. 모세는 애굽 사람이 동족 히브리 사람을 학대하는 것을 보고 분을 이기지 못하고 애굽 사람을 죽였습니다(출2:11-12). 애굽 사람은 조금 잘못했지만, 그는 가장 큰 범죄 가운데 하나인 살인을 저지른 것입니다. 결국 그의 살인이 애굽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고, 그는 애굽에 있지 못하고 부모와 형제 동족을 떠나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보냅니다. 타인의 잘못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여 생활할 때 물이 없다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화를 내며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며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 때문에 분냄을 인하여 그는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가게 됩니다(민20:12). 본문 말씀에서 언급했듯이 다윗을 저주한 후 솔로몬으로부터 예루살렘 밖을 벗어나면 죽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던 시므이는, 3년 후에 그의 종이 가드왕 아기스에게로 도망가자 그를 잡으려고 예루살렘 경계에 있는 기드론 시내를 건넜습니다. 비록 종은 잡아 왔지만 그가 기드론 시내를 건넜다는 소문이 솔로몬에게 들려왔습니다. 솔로몬은 그가 경고한 대로 사람을 보내 시므이를 죽게 하였습니다. 이처럼 시므이는 타인의 작은 잘못을 고치려다 자신이 사형에 이르는 잘못을 범하고 만 것입니다(왕상2:36-46).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였던 밧세바와 간음한 후 밧세바가 잉태하자 우리아를 전쟁터에 죽게 하고 밧세바를 아내로 삼았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그를 책망하였을 때 다윗은 회개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를 용서하셨습니다(삼하12:13-15). 그러나 죗값까지 제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죄가 뿌리가 되어 밧세바가 낳은 아들과 암논과 압살롬과 아도니아가 죽는 슬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의 받은 죗값과는 별도로 하나님은 그를 용서하셨습니다(삼하12:13). 그로 인하여 그는 하나님과 계속 교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밧세바의 조부였던 아히도벨은 다윗을 용서하지 못하고 압살롬의 반역에 가담하였습니다. 압살롬에게 베푼 그의 모사는 다윗이 심어둔 후세에 의하여 패하여지고, 전쟁의 결과를 예측한 그는 자살하고 말았습니다(삼하17:23). 다윗의 잘못을 복수하려다가 자신은 더 큰 죄를 짓고 망한 것입니다. 이처럼 남의 잘못을 고치려다 자신이 더 큰 잘못을 저지르는 예는 우리의 생활 가운데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행동을 물타기 위하여 저의 행동까지 끌어들였습니다. 그와 저의 상황이 전혀 다른데도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그 상황이 전혀 같지 않음을 이야기하고 한마디 해줄까 하려다가 하나님께 믿고 맡겼습니다. 하나님은 저보다 저를 잘 변호해주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제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불쑥 말을 꺼냈다면 죄까지는 아니겠지만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부덕을 행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사고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2중, 3중, 4중으로 확대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범죄도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고 점점 확대될 수 있습니다. 모방범죄는 두말할 나위 없지만, 문제는 잘못을 고쳐주려다가, 잘 해결해주려다가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점입니다. 어떤 경우도 우리 감정이 불순한 상태라면 죄를 낳을 뿐입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6:1-2). 타인의 범죄를 볼 때 우리의 태도가 첫째는 온유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온유는 격동 받는 마음 없이 성령이 함께하는 마음입니다. 둘째는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자신을 돌아본다는 의미는 회개할 기회로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셋째는 자신도 시험받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시험은 유혹(temptation)을 의미합니다. 자신도 거기에 동조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넷째는 그 사람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처럼 생각하고 아파하라는 말씀입니다. 타인의 잘못 때문에 더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깨어 근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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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독연 칼럼] 강성률 목사의 ‘타인의 잘못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