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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하나님의 손에 빠진 교회’
- “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곤경에 있도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심히 크시니 내가 그의 손에 빠지고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나이다.”(대상21:13) 사무엘하 24장과 역대상 21장에는 다윗이 인구 조사한 내용이 나옵니다. 예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국가들은 재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세금을 부과하였고 세금을 위하여 인구조사가 꼭 필요하였습니다. 또한 군대 모집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다윗이 인구조사를 한 후 크게 자책합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21:8).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한 후에도 이렇게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하12:13) 정도였습니다. 인구 조사한 것이 무슨 잘 못이기에 이렇게 큰 죄가 될까요? 표면적인 이유는 그들이 인구를 조사할 때마다 내야 할 생명의 속전을 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네가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를 따라 조사할 때에 조사 받은 각 사람은 그 생명의 속전을 여호와께 드릴지니 이는 그 계수할 때에 그들 중에 온역이 없게 하려 함이라.”(출30:11-12). 생명의 속전이란 죄를 사해주시고 구원해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연보입니다. 다윗은 그 헌금을 망각하고 백성들에게 내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지나치게 헌금을 강조하는 것도 문제지만, 가르치지 않는다면 더 큰 문제가 됩니다. 내면적인 이유는 인구조사의 동기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다윗은 싸우는 곳마다 승리하였습니다. 그로 인하여 이스라엘 영역이 넓어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사방에서 이방인들이 귀화하여 인구 또한 많아졌습니다. 다윗은 그것을 직접 수치로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얼마나 커졌는지, 이전 사울 때보다 얼마나 좋아졌는지, 부국강병이 되었는지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자신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인구조사 동기가 명예영광심 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자신의 영광으로 돌린 죄였습니다. 영적인 죄 곧 교만 죄였던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7만 명이 죽는 참혹한 결과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오늘, 지구상 대부분의 국가는 코로나19라는 전염병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전염병은 하나님의 손에 빠진 징계입니다(13절). 하나님의 손에 빠졌다는 것은 하나님만 치료해주실 수 있는 병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병은 회개 외에 고칠 길이 없습니다. 백신을 개발하면 된다고요? 일순간 막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회개하지 않는 채 개발 된다면 둑이 무너져 가는데 그것을 막기 위하여 윗돌을 빼서 아랫돌에 넣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다윗은 이런 전염병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였으며 무엇을 회개하였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다윗이 눈을 들어보매 여호와의 사자가 천지 사이에 섰고 칼을 빼어 손에 들고 예루살렘 편을 가리켰는지라. 다윗이 장로들로 더불어 굵은 베를 입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하나님께 아뢰되 명하여 백성을 계수하게 한 자가 내가 아니니이까 범죄하고 악을 행한 자는 곧 내니이다. 이 양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컨대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시고 주의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지 마옵소서.”(16-17절). 다윗은 첫째 굵은 베옷을 입었습니다. 둘째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셋째 온역의 원인을 자신의 악으로 돌리고, 그 죄 값을 백성에게서 자신에게로 옮겨 자신과 자신의 아비집이 당하게 해달라고 기도드렸습니다. 그러자 온역이 그쳤습니다. 굵은 베옷은 겸비함을 뜻합니다(왕상21:27). 땅에 대고 엎드리는 것은 온전한 순종과 복종을 뜻합니다. 자신과 자신의 아비집이 당하게 해달라는 것은 희생을 의미합니다. 그의 교만을 회개하고 겸비와 복종과 희생을 보인 다윗을 보고 주님께서 온역을 거두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회개한 다윗에게 오르난 타작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으라고 합니다(18절). 하나님을 위한 제단은 신약에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속죄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코로나 19를 직면한 우리가 해야 할 또 하나의 일은 자신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드리는 것입니다(롬12:1-2). 그것이 영적 예배입니다. 천사가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오기 전에 여러 곳을 거쳤을 것입니다. 오르난은 어떤 태도를 취하였기에 하필 천사의 칼이 그곳에서 멈췄습니까? “때에 오르난이 밀을 타작하다가 돌이켜 천사를 보고 네 아들과 함께 숨었더니”(대상21:20). 오르난과 네 아들들은 숨었습니다. 천사 앞에서 숨는다고 숨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애굽의 장자를 칠 때 양의 피로 이스라엘 장자를 숨겨준 것처럼 하나님이 숨겨 주셔야 합니다. 시27:5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 여호와의 은밀한 곳은 초막속입니다. 초막이란 자기를 낮추는 곳입니다. 만일 화려하고 웅장한 곳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면 예수님께서 오실 때에 예루살렘 궁전에 오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본으로 오신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시고 마구간에 오셨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본을 받아 낮추고 검소하게 사는 사람을 하나님이 보호해주십니다. 성경은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호10:12)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의 어떤 행동도 구원의 조건은 되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는 있습니다. 코로나19라는 거대한 재앙 앞에서 더욱더 겸비와, 온전한 복종, 선한 희생, 주님을 위하여 십자가의 단을 쌓고, 검소한 생활 등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입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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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하나님의 손에 빠진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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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산 위에 오르신 예수님’
-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마5:1). 마태복음 5-7장을 산상보훈이라고도 하고 산상수훈이라고도 합니다. 산 위에서 베푸신 교훈이라는 뜻입니다. 이전 산 아래서 교훈 하실 때 허다한 무리가 따랐던 것(마4:24-25)과는 달리, 예수님께서 산 위에 오르시자 제자들만 따라왔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라면 예외도 있겠지만 무리 앞에 서기를 원할 것입니다. 12명 보다 70명 앞에 서기를 원하고, 70명 보다는 100, 1000, 10000명 앞에 서기를 원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많을수록 듣는 사람도 많기 때문에 복음 전파에 효과적일 것입니다. 그런데 산에 오르면 몇 명의 제자들만 따라올 것을 아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고난의 길을 택하십니다. 만일 군중들의 환호와 영광을 좋아하셨다면 예수님께서는 가파른 산에 오르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들의 병을 고치고, 약한 것을 강하게 하고, 오병이어의 기적과 같은 일들, 곧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들에 머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명예 영광이나 사람들의 환호에는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오직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일이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께서 가파른 산에 오르기 시작하자 따르던 무리들이 예수님을 떠나기 시작합니다. “여긴 너무 힘들어” “땀 흘리긴 싫어” “편하자고 믿는데 고난 받을 필요가 어디 있어?” 하며 떠납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끝까지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제자로 택함을 받을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만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고생하며 믿을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빌1:29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은혜는 좋아하지만 예수님을 위하여 고난 받는 것은 싫어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은, 은혜 주신 목적 중에는 주님을 위하여 고난 받게 하는 것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위로는 주님을 위한 고난과 비례합니다(고후1:5). 주님이 베풀어주신 떡만 먹을 것이 아니라 거기서 받은 힘으로 산에도 올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허다한 무리들에게 산상보훈을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으면서 땀을 뻘뻘 흘리며 산에 오른 제자들에게 비로소 전하십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왜 산 아래 무리들에게는 그러한 귀중한 말씀을 전하지 않고 제자들에게만 전했습니까? 다음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요6:66). 여기 있는 제자들은 열 두 제자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따르던 사람들을 총칭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자 열심히 따라다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 푹 빠져 있는 사람들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6:63)라고 말씀하시니까 도저히 함께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육신적인 것인데 예수님은 육은 무익하다고 하십니다. 육신적으로 잘 되고, 육신적으로 복 받는 일을 좋아하는데 육은 무익하다고 하니 비전이 없어 보였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산상보훈에서도 주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의 관점과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세상은 부자가 복이 있다고 하는데, 주님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5:3). 세상은 연락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주님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5:4). 세상은 강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는데, 주님은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5:5). 세상은 환영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는데 주님은 욕을 먹고 핍박을 받은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5:10-11). 이런 말씀을 어떻게 육신적인 사람이, 세상을 좋아하는 사람이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산상보훈을 하시기 전에 미리 말씀을 받을 수 없는 자를 걸러내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8장은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을 전하시고 내려오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마8:1). 예수님께서 산 아래로 내려오시니, 다시 허다한 무리가 모여들었습니다. 산 위에 오를 때 흩어졌던 사람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처럼 산상보훈은 아무나 듣고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위한 신앙에서 한 걸음 나아가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을 믿는 사람,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각오하는 사람이 들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겔43:12은 “전의 법은 이러하니라. 산꼭대기 지점의 주위는 지극히 거룩하리라. 전의 법은 이러하니라.”라고 나옵니다. 산은 거룩한 곳을 의미합니다. 산에 오른다는 것은 성결에 소망을 두고 살아간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실 때에도 산에서 주셨습니다. 믿어서 구원 받는 것은 시작입니다. 자녀로 태어났다고 해서 다 된 것이 아니라 더욱 자라가는 일이 남은 것처럼, 신앙인들도 허다한 무리에서 나아가 거룩함에 소망을 두고 주님께서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성도가 되는 일이 남았습니다. 그런 성도들에게 주님께서는 보배로운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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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산 위에 오르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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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데일리 기도] 김호연 목사의 ‘국가와 민족의 치유 회복을 위한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코로나로 인하여 오랜 동안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예배가 중단되고 일상이 파괴되고 우리의 삶이 고됩니다. 이 고통 가운데서 우리를 속히 구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주님, 코로나로 인하여 감사할 것이 많습니다. 인생의 연약함을 깨닫게 하시고 더욱 주님을 의지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코로나로 인하여 신천지와 같은 사이비 종교집단의 실체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 것도 주의 섭리요 뜻인 줄 앎으로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교회로서 더욱 본이 되고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코로나로 인하여 동성애와 같은 죄악이 드러남도 감사를 드립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다시는 발의되지 않도록 하시고 저들이 죄악에서 돌이키게 하여 주옵소서. 위정자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그들에게 주어진 권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을 깨닫고 주의 뜻을 따라 나라와 민족을 인도할 수 있도록 바른 믿음과 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코로나로 인하여 교회가 미래를 준비하게 하심도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바야흐로 새로운 시대의 진입을 앞두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의 시대와 같이 우리는 변화의 소용돌이 가운데 있습니다. 개인화가 더욱 진전되고 사람마다 자기주장대로 사는 것이 옳다고 믿는 이 시대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사람과의 관계가 회복되며 바른 세계관, 물질관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하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지금도 불철주야 코로나 퇴치를 위하여 수고하는 당직자들과 의료진의 노고를 위로하시고 교회가 더욱 본이 되고 기도하고 코로나 예방에 힘써 속히 코로나를 극복하고 일상이 회복되며 예배가 회복되고 주의 복음을 전하는 교회, 생명을 살리는 교회의 사명을 감당케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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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데일리 기도] 김호연 목사의 ‘국가와 민족의 치유 회복을 위한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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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간절함’
-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1:20).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그 몸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일이었습니다. 죽고, 살고, 부끄러움을 당하고 안 당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일이었습니다. 신앙인이라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자신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문제는 그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가? 그렇지 않는가에 있습니다. 간절함과 유사한 말은 절실함입니다. 절실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소원은 ‘이루어진다면 좋겠다.’는 정도가 아니라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입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절실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모두 들어주셨습니다. 에서 문제로 얍복강 나루에서 밤새 씨름하던 야곱의 기도를 들어주셨고(창32:29), 브닌나로부터 심한 멸시를 받았던 한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사무엘을 주셨습니다(삼상1:20). 이사야 선지자로부터 죽고 살지 못하리라는 말을 전해들은 히스기아왕은 눈물로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의 눈물을 보시고 15년의 수명을 연장해주셨습니다(사38:15). 예수님 당시 많은 병자들 역시 그들의 간절한 소원만큼 고침을 받았습니다. 사도시대에는 헤롯이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마저 죽이고자 옥에 가두었을 때, 마가의 집에서 성도들이 모여 일심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어 그를 겹겹이 지키는 파수꾼들을 뚫고 나오게 하였습니다(행12:1~19). 이처럼 하나님으로 하여금 침묵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간절한 기도입니다. 간절함은 어디서 만들어집니까? 삼하13:39는 “다윗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향하여 간절하니 암논은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음이더라.”라고 말합니다. 간절함은 마음을 향할 때 일어납니다. 예수님께 마음을 향하면 예수님께 대하여 간절함이 일어납니다. 세상으로 향하면 돈에 대한 간절함, 명예에 대한 간절함이 일어납니다. 향한다는 것은 방향을 정하고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바라봄은 생각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간절함을 불러일으킵니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7:11).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자신에 대한 불만에서 나옵니다. ‘내가 이렇게 믿어서는 안 되는데’ ‘내가 이렇게 게을러서는 안 되는데’ ‘내가 이렇게 예배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데’ 등과 같은 불만에서 비롯됩니다. 환경이나 하나님께 대한 불평불만은 멸망을 자초하지만 자신에 대한 불평불만은 간절한 마음을 일으킵니다. 간절한 마음은 의를 사모하는 자에게 일어납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시63:1). 목마르고 주린 심령이 간절한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하나님 보시기에 옳게 살아가기를 소원하는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앙인들의 간절함을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환난을 허락하십니다. “여호와여 백성이 환난 중에 주를 앙모하였사오며 주의 징벌이 그들에게 임할 때에 그들이 간절히 주께 기도하였나이다.”(사26:16).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기한(400년)이 가까웠는데도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움직여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역을 시키도록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제야 조상들이 섬기던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하였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어 그들을 인도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환난은 간절한 마음을 불러일으킵니다. 하나님께 대한 간절함은 하나님께 마음을 향할 때,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할 때, 의에 주리고 목마를 때, 환난 때 일어납니다. 처음부터 세 번째까지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일으키는 간절함인 반면, 네 번째는 하나님께서 교만하고 태만한 사람을 징계하심으로 일으키는 간절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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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간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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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아드리엘과 발디엘’
- “그 남편이 저와 함께 오되 울며 바후림까지 따라 왔더니 아브넬이 저에게 돌아가라 하매 돌아가니라.”(삼하3:16). 다윗은 사울왕의 딸 미갈과 혼인하기 위하여 블레셋 용사의 양피 일백을 사울에게 바쳤습니다. 미갈은 엄연한 다윗의 아내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도망자 신세가 되자 사울왕은 그를 라이스의 아들 발디엘에게 줍니다(삼상25:44).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미갈은 발디엘의 아내로 지냈습니다. 그 후 사울과 요나단이 블레셋과 싸움에서 죽임을 당한 후,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군대장관 아브넬이 이미 유다 족속의 왕이 된 다윗에게 온 이스라엘을 넘기기 위하여 다윗 왕을 찾아가겠다고 기별하였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우선 자신의 아내 미갈을 데려오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은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정이 듬뿍 든 발디엘이 미갈을 울며 보내는 내용입니다. 아무리 본 남편이었던 다윗에게 다시 보낸다고 하지만 참으로 이 순간만큼은 발디엘에게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시, 다윗이 사울의 신하였을 때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딸 미갈을 다윗에게 주기 전 먼저 미갈보다 나이가 많은 메랍을 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딸을 다윗에게 줌으로써 다윗을 싸움에 나가 죽도록 할 셈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였는지 사울은 다윗에게 줄 시기에 메랍을 아드리엘에게 아내로 줍니다. “사울의 딸 메랍을 다윗에게 줄 시기에 므홀랏 사람 아드리엘에게 아내로 준 바 되었더라.”(삼상18:19). 사울은 자신의 딸까지도 다윗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삼으려 했는데 아마도 그럴만한 기회를 찾지 못하자 아드리엘에게 준 것 같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는 배우자가 정해지면 쉽게 바뀔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은 더욱 엄격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일을 겪은 다윗의 입장에서는 어처구니없는 일이겠지만, 메랍을 차지한 아드리엘 입장에서는 왕이 당시 떠오르는 별 다윗보다 자신을 선택한 일에 대하여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을 것입니다. 비록 시대는 차이가 있지만 사울의 두 딸을 두고 아드리엘과 발디엘의 감정의 희비가 교차합니다. 아드리엘은 큰 기쁨, 발디엘은 큰 슬픔........, 그 후 다윗의 통치가 한창일 때 이스라엘에 연이어 3년 기근이 있었습니다. 그때 다윗이 무슨 연유로 이런 기근이 임하는지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 집을 인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삼하21:2). 원래 기브온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닌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였습니다. 이스라엘 족속들이 가나안 칠족을 멸할 때 그들을 죽이지 않기로 하나님 앞에 맹세하였는데, 사울의 이스라엘에 대한 잘 못 된 열심이 그들의 일부를 죽게 하였습니다(삼하21:2). 다윗은 기브온 족속들을 불러 그들에게 어떻게 보상해야 그들이 재앙 중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복을 빌어줄 것인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사울의 자손 일곱을 내어 주면 하나님 앞에서 목매어 달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절친 요나단의 후손 므비보셋은 아끼고, 대신 사울의 다른 자녀나 그의 후손을 내어 주었습니다. 사울의 큰 딸 메랍의 후손, 곧 사울의 사위 아드리엘의 아들은 다섯이나 희생자 명단에 포함되었습니다. 다윗과 경쟁하여 사울의 딸 메랍을 차지한 아드리엘, 그 때의 감격이 아직도 생생한데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때를, 순전히 사울의 사위 된 연유로 아들 한 명도 아니고 다섯이나 잃게 될 줄을, 금쪽같은 아들을 잃은 서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반면에 미갈과 이별을 아쉬워하며 울었던 발디엘의 후손은 아무도 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발디엘은 아마도 가슴을 쓸어내렸을 것입니다. 인간지사 세옹지마라고, 미갈과 헤어지는 발디엘의 눈물이 자손의 죽음을 면할 씨앗이 되고, 왕의 딸 메랍을 차지한 아드리엘의 환호가 후에 자녀를 잃는 설움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약5:14). 슬픔에 처한 자, 고난 당하는 자는 낙심하지 말고 기도함으로 하나님께 위로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을 더욱 바라보아야 합니다. 즐거움에 처한 자는 기쁨에 도취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사탄이 틈타지 않도록 더욱 겸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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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아드리엘과 발디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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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왕다움이 없는 왕’
- “길보아 산들아 너희 위에 우로가 내리지 아니하며 제물 낼 밭도 없을지어다. 거기서 두 용사의 방패가 버린바 됨이라. 곧 사울의 방패가 기름 부음을 받지 않음 같이 됨이로다.”(삼하1:21). 사울과 요나단이 죽은 후에 다윗이 쓴 애가에 나온 한 구절입니다. 사울의 방패가 기름 부음을 받지 않음 같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표현은 원래 칼이나 창, 화살 같은 무기가 방패에 닿았을 때 잘 미끄러져 나가도록 방패에 기름칠을 하던 옛 전사들의 행동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즉 사울의 방패가 사울을 막아주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사울에게 사무엘은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15:23b). 하지만 이 후에도 사울은 여전히 왕의 신분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왕의 지위는 있었지만 왕으로서 권위는 없었습니다. 그가 왕다움이 없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으로 입증됩니다. 첫째, 그는 전혀 자신을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그 안에 악신이 들어오면 번뇌하거나 야료하였습니다(삼상18:10). 기름부음을 받은 왕은 다른 사람을 다스리기 전에 자신을 다스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떠나고 대신 악신이 임한 그는 악신이 충동하는 대로 행동한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 부여받은 왕으로서의 신분을 망각하였습니다. 그가 왕이 된 것은 하나님께 부여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대로 통치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백성들은 주님 안에서 평화를 누리도록 다스렸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을 영화롭게 하는데 마음 쓰고, 백성을 잘 다스리는 것보다 여생을 다윗 죽이는 일에 몰두합니다. 셋째, 본문말씀처럼 그의 방패가 무용지물이 된 점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18:1-2). 무려 8가지 유사한 말을 빌려 하나님이 그의 방패이심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하나님이 그의 방패라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일에 마음 쓰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전쟁 가운데서 보호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전혀 다릅니다. “사울의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과 큰 싸움이 있었으므로 사울이 힘 있는 자나 용맹 있는 자를 보면 그들을 불러 모았더라.”(삼상14:52).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힘 있고, 용맹 있는 자를 의지한 것입니다. 그가 왕이 된 후 줄곧 의지한 것은 자신의 지혜나 사람의 말이었습니다. 자신의 지혜와 사람을 의지한 삶이 그를 지켜주지 못 한 것입니다. 사울이 왕으로서 지위는 있지만 왕의 권위가 전혀 없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신자들 역시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된 백성이기 때문입니다(벧전2:9). 자기를 다스리는 왕입니다. 자신의 죄를 위하여 기도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하여 중보 기도하는 제사장입니다. 그런 지위를 받았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너희는 범인 같이 죽으며 방백의 하나 같이 엎더지리로다.”(시82:6).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소홀히 여기고 팥죽 한 그릇에 판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 됨이 얼마나 큰 은혜인 줄 모르고 육신을 따라 살아가니 마귀의 지배를 받고 환경의 지배를 받는 약한 신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소유하고 있습니다(눅10:19). 전능하신 분이 그의 권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지 아니하고 여전히 옛 사람으로 살아간다면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로 살아가는 영적 식물인간이 되고 맙니다(계3:1).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은 성도들이 범인처럼 살아갈 것이 아니라 아들의 영, 곧 성령을 따라 살아서 육신과 세상과 마귀를 다스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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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왕다움이 없는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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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는 예수님’ (마 28:18-20)
- 초등학교 때 학생들 사이에는 서열이 있었습니다. 키가 크고 힘이 세면 유리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약간의 격투기 실력에다 용기가 있어 기선제압을 잘하면 높은 서열이 될 수 있었습니다. 다섯 살 때부터 주일학교에 다녔던 저는 착각일수도 있지만, 유순한 편이었고 용기마저 없어 누가 싸움을 걸어오면 당하는 편이었습니다. 동네에 일 년 선배가 있었습니다. 그 형은 키도 크고, 공부도 상급학년에서 제일 잘했을 뿐 아니라, 운동이면 운동, 음악이면 음악, 미술, 생활 또한 모범적이었습니다. 동네 어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면 그 형의 사례를 들어서 말 할 정도였습니다. 어느 날 그 형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부터 내가 너를 말게 줄게.” ‘말게 준다.’는 말은 ‘갑이 을을 해하려 하는 사람으로부터 보호해주겠다.’는 약속의 지역사투리입니다. 이런 약속은 강자가 약자에게 어떤 유익을 전제로 흔히 했던 계약이었습니다. 그 약속은 정말 성실히 지켜졌습니다. 그가 보는데서 누가 시비를 걸거나, 제가 부를 때면 달려와서 절 지켜주었습니다. 정확하진 않지만 아마도 2년은 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 형이 갑자기 돌변했습니다. “이제부터 널 말게 주는 것 없다. 이런 약속은 대부분 오래 못 가지만 난 2년 동안 이 약속을 지켰다. 이제부터는 너 스스로 널 지켜.”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런 약속들은 종종하지만 그 형의 말대로 대개 한 달도 못 되어 파괴되는 공약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그 형의 말에 충분히 공감이 갔기에 다시는 형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보호 약속은 길어야 몇 년이고 완전하지도 못합니다. 사람을 의지하는 것은 저주를 자처하는 길입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리라.”(렘17:5-6). 사람을 믿고 혈육으로 권력을 삼고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게 된다는 모순 같은 진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나운 환경을 만난다는 뜻입니다. 사람과 혈육은 타인도 해당되지만 자신도 예외가 아닙니다. 자신의 지혜를 의뢰하고 살아가면 역시 저주 가운데 살아갑니다. 하지만 실망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렘17:7-8). 이처럼 하나님을 의뢰하면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헤쳐 나갈 수 있는 은사를 부여받습니다. 사43:2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물은 세상이 주는 유혹을 의미하고, 불은 정욕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이 신앙인들을 넘어뜨리지 못합니다. 이유는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말씀으로 함께 하십니다. 예배시간이나 성경을 읽을 때 성령의 감동으로 오는 말씀을 만난다면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약속의 말씀을 붙들면 주님 또한 우리를 붙드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과 함께 하십니까? 본문말씀처럼 제자들과 함께 하십니다. 제자들은 선생의 가르침을 받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입니다(막10:29). 버린다는 것은 믿고 맡기는 것을 의미합니다(벧전5:7). 그런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은 항상 예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요8:29). 기뻐한다는 말은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사랑의 기쁨입니다. 사랑하는 곳에 기쁨이 있고 힘이 있습니다. 반대로 미워하는 것이 고통이요 죽음입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자와 항상 함께 계시며 그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주님은 주님을 위하여 고난당하는 자, 욕먹는 자와 함께 하십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이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4:14).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먹을 때, 성령님이 함께 하시고 영광 받으십니다. 고난은 빛을 받은 사람이 참예할 수 있고, 주님은 신자들이 환난을 당할 때, 시련 가운데 있을 때 분명 함께 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은 영원불변한 약속입니다. 이런 주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 사귐이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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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는 예수님’ (마 28: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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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주님이시다’
-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능히 대답하지 못하는지라.”(창45:3). 바로의 꿈에 대한 요셉의 해석대로 애굽에 7년 풍년이 지난 후, 흉년이 2년째일 때였습니다. 가나안 땅에도 기근이 임하여 야곱은 베냐민을 제외한 아들들을 애굽에 보냈습니다. 요셉은 그들을 보자마자 형들인 줄 알았지만, 형들은 요셉인 줄 전혀 몰랐습니다. 고개를 들어 똑바로 볼 수도 없었겠지만, 본다 한들 총리대신 요셉은 상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요셉이 이미 죽었거나, 다른 집의 노예였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총리대신의 용모와 치장이 더욱 몰라보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이 자신을 여러 모양으로 형님들에게 나타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취하여 그들의 목전에서 결박하고”(창42:24). 시므온은 상당히 잔인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누이동생 디나를 세겜성의 추장 하몰의 아들 세겜이 강간하자 세겜성의 모든 남자들을 속여 할례를 받게 한 후 그들이 고통할 때 부지중에 성을 엄습하여 레위와 함께 남자들을 모두 죽이고 말았습니다(창34). 그런 성격은 요셉을 애굽에 팔아넘길 때에도 가장 앞장서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처음에는 형들 모두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사흘 후에는 시므온만 결박하여 옥에 남겨둔 채 다른 형들은 곡식을 가지고 가나안 땅으로 가도록 하였습니다. 열 명의 형제 가운데 시므온이 옥에 남겨질 확률은 10%밖에 안 됩니다. 조금 감각 있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시므온이 특별히 요셉을 괴롭히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남겨놓으셨구나.’ 그들에게는 이상한 일들이 계속 일어납니다. 곡식을 나귀에 싣고 집으로 돌아와 각 자루를 쏟고 보았을 때 그들의 돈뭉치가 그 자루 속에 있는 것을 봅니다. 그들 중에 아무도 집어넣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돈뭉치가 들어있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어서 살펴볼 만도 한데 그들은 단지 착오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들이 가져온 곡식이 다 떨어지고 또 구하러 가야만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아버지가 곡식을 사오라고 하자 그들은 그곳 총리가 베냐민을 데려오지 않으면 자신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없다고 하면서 아우 베냐민을 데려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야곱은 “너희가 어찌하여 너희에게 오히려 아우가 있다고 그 사람에게 고하여 나를 해롭게 하였느냐.”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아들들이 “그 사람이 우리와 우리 친족에 대하여 자세히 힐문하여 이르기를 너희 아버지가 그저 살았느냐 너희에게 아우가 있느냐 하기로 그 말을 조조이 그에게 대답한 것이라 그가 아우를 데리고 내려오라 할 줄을 우리가 어찌 알았으리이까.”(창43:7)라고 대답합니다. 그들도 예상치 못한 말 “너희에게 아우가 있느냐?” “아버지가 그저 살아계시냐?” “아우를 데리고 내려오라.” 그런 말은 그 집안에 대하여 특별한 관계가 있지 않으면 물어볼 필요가 없는 말입니다. 요셉은 자신을 그렇게 나타낸 것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그들이 드디어 베냐민을 데리고 요셉에게 갔을 때 요셉은 장유의 차서대로 그들을 식탁에 앉힙니다. 뿐만 아니라 음식을 주는데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오배나 줍니다. 이런 모든 것들을 볼 때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분이 도대체 누구기에 형제들의 장유유서를 알고, 베냐민에게 특별히 관심을 가질까?’ 하며 요셉을 유추해 볼만도 합니다. 그런데 열 명이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합니다. 왜 그렇게 둔할까요? 죄 때문입니다. 죄가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요12:35). 정귀남 사모님(안병모 목사님의 부인)이 생전에 어떤 사람과의 문제로 몹시 힘들어하고 있었습니다. 못 살겠고, 못 있겠고, 못 듣겠고, 아무데도 없는 곳으로 도망가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 문제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리자 하나님께서 “내가 그랬다.”라고 하시더랍니다. 사모님은 바로 “주님이십니까? 그러면 제가 달게 받겠습니다.”라고 하고 주님으로 인정하자 그토록 힘들게 하던 사람이 사랑스러워지고 무슨 말을 하든지 받을 능력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 문제가 그렇게 해결 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6)라고 말합니다. 모든 일 가운데 주님을 발견하는 것은 영적인 지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지만 한 마리도 못 잡혔던 고기가 바닷가에 서 계신 사람의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라는 말에 그대로 순종하였을 때 그물을 들 수 없을 만큼 많이 잡혔습니다(요21:6). 그 때 요한은 고기를 본 것이 아니라 배후에 역사하시는 주님을 발견하고 “주시라.”(요21:7)라고 하였습니다. 요셉이 유다의 희생적인 사랑에 감복하여 드디어 “나는 요셉이라.”하고 직접 나타내주었지만 그 전에도 자신을 계속해서 드러낸 것처럼 주님도 요셉처럼 수시로 우리에게 나타내주십니다. 하지만 우리의 눈이 어두워 전혀 주님을 알아채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살면서 내 마음에 드는 일이든 들지 않는 일이든 우리가 “주님이시다.” 외칠 수 있을 때 주님으로부터 능히 감당할 힘을 공급 받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주님을 발견하고 주님의 공급을 받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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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주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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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다시 찾은 왕권’③ (창 1:27~28)
- 엄청난 일이 벌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사람과 같은 모양으로 죽음에 대항하여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이 되셔서 사람이 지은죄의 형벌인 사형을 당하시고 합법적으로 죽으셨습니다. 죽었지만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죽음을 이기신 것입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마귀에게서 승리하셨습니다. 이제 마귀는 예수님의 승리 때문에 더 이상 사람 앞에 자기가 패배한 죽음을 앞세우고 나타나지 못합니다. 이제 사람은 더 이상 마귀의 종이 되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님이 마귀가 종으로 매어 놓았던 결박을 풀어주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죽음과 어두움과 고통과 두려움 안에 있지 않아도 됩니다. 거기서 나와 생명과 빛과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승리로 우리를 아주 불리하게 하는, 마귀가 하나님께 제출한 법조문으로 쓴 증서가 효력이 없어졌습니다. (골 2:14) 하나님은 마귀의 증서를 무효화 시키고 고소장을 폐기하셨습니다. 합법적으로 인간을 고발한 마귀의 고발장이 효력이 없어진 것입니다. 마귀는 이제 더 이상 인간을 죽음의 권세아래에 붙잡아 둘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마귀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더 이상 나의 죄에 대한 요구를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다 법적으로 치르심으로, 그래서 의롭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죄인이 아니라고 해주신 것입니다.그러니 의로움에는 나의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죽음에서 살아나심으로 마귀를 승리하심으로 진자는 이긴자의 종이 되는 원리로, 마귀의 종이 된 인간을 풀어주셨습니다. 마귀에게 빼앗긴 왕권도 찾아서 돌려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엄청난 사건이지요, 구원에는 우리의 생명뿐만 아니라, 되찾아 돌려주신 왕권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마귀의 종으로 살지 말아야 합니다. 왕권을 누리면서 살 권리가 있습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계속해서 마귀의 종을 살면서 왕권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십자가를 모욕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것까지 됩니다. 구원은 마귀와 마귀에 속한 모든 것 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죽음, 어두움, 멸망.... 더 이상 내것이 아니라고 선포할 수 있습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인 줄을 모르면 받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어디에 쓰는 것인지를 몰라서 못쓰고 있다면 얼마나 억울합니까? 구원받고도 계속 어둠 속에서 죄와 죽음에 묶여 죄책감과 두려움과 고통으로 산다면,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무시하는 것 까지 될 수 있습니다. 구원은 창조때에 인간에게 원래 주신 왕권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 삶의 증거가 그리스도인의 삶속 에서 보이고 나타나야 합니다. 이 일은 실제적으로 마귀에게 속한 불순종에서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이루어 집니다. 왕권이 회복되었으니 더 이상 마귀의 종이 아니니까요, 하나님의 아들의 왕같은 존재감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예수님이 마귀에게서 빼앗아서 도로 찾아주신 부귀영화를 가지고 다시 마귀에게 돌아가는 게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 하나님 나라의 영광 안으로 들어갈 소망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마 28:28~20) 교회가 아니면 어디로 부터 이 놀라운 소식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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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다시 찾은 왕권’③ (창 1: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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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CI 칼럼] 강성률 목사의 ‘성령의 감동’
-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저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왕상18:46). 이 말씀은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 450인과 아세라 선지자 400인을 죽이고, 갈멜산 꼭대기에 올라가 기도한 후 큰 비가 내려 삼 년 가뭄이 멈췄을 때,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향하여 가는 아합 앞에서 취한 행동입니다. 그가 허리를 동이고 말보다 빨리 달릴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의 능력이 임하였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능력”에 대하여 관주를 찾아보면 왕하3:15이 나옵니다. “이제 거문고 탈자를 불러 오소서. 하니라 거문고 타는 자가 거문고를 탈 때에 여호와께서 엘리사를 감동하시니” 이처럼 성령의 감동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덧입혀주시는 능력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바로의 꿈을 해석하였고(창41:38), 삼손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손에 아무 것도 없어도 사자를 염소새끼를 찢음 같이 찢었고(삿14:6), 다윗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오실 메시아에 대하여 미리 말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 선지자들 역시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전기와 다리미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다리미는 그 자체로 아무런 능력이 없지만 전선을 전기에 꽂는 순간부터 구겨진 옷을 펼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전기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고, 다리미를 사람으로 본다면 전선을 전기에 꽂는 것은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에 감동 된 사람은 나약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어 강한 사람이 됩니다. 어둡고 거친 세상에서 성령의 감동을 입어야 신앙인들이 자신과 세상과 마귀를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믿음을 전제로 하고 누가 성령의 감동을 받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엘리사는 아합의 아들 여호람에 대하여 상당히 불쾌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호람이 비록 아버지 아합이 만든 주상을 제하였지만 여로보암이 이스라엘로 범하게 한 죄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날 이스라엘에게 조공하던 모압이 배반했습니다. 이에 분을 이기지 못한 여호람이 유다왕 여호사밧과 에돔 왕에게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그렇게 모인 세 나라 군사들과 생축들에게 불행이 닥쳤습니다. 7일째 되는 날에 마실 물이 다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할 수 없이 유다 왕 여호사밧의 요청으로 선지자 엘리사를 찾았습니다. 엘리사의 심정이 좋을 리가 없었습니다. 도저히 만나기 싫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사밧의 낯을 보고 거문고 탈자를 불러오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감동은 하나님을 높일 때, 찬양할 때 옵니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시22:3). 하지만 마음이 상하거나 마귀가 들어간 사람은 찬송 부르기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때는 억지로라도 불러야 합니다. 억지로라도 하나님을 높이면 마귀가 떠나가게 되어 마음이 풀립니다. 여호수아는 성령의 감동 된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신에 감동된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고”(민27:18). 그가 모세의 후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에 감동 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가 성령의 감동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출33:11). 여호수아는 위의 말씀처럼 모세를 수종하였고, 또한 회막을 떠나지 않고 기도하였습니다. 이처럼 시중드는 것과 기도는 성령의 감동을 입게 합니다. 계1:10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성령의 감동을 받으려면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이 날 주님 한 분 사랑하고, 존중히 여기는 정신을 가지고 온갖 일을 다 주께 맡기고 주님 앞에 나와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주일에 말씀 받지 못하면, 성령의 감동을 입지 못하면 신앙인들이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주일에 말씀 받기 위하여 일주일 동안 기도로 준비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준비하는 사람에게 말씀을 주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한 말씀 받기 위하여 간구하고 베뢰아 사람들처럼 ‘이것이 그러한가?’하며 성경을 상고할 때 주님께서 전하는 사람을 통하여 말씀을 주십니다. 주일 한 시간 지킨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주일은 밤 0시부터 다음 날 0시가 되기 전까지를 말합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 자에게 하나님께선 분명히 성령의 감동을 입게 하십니다. 성령의 감동은 양심 쓰는 자에게 임합니다. 요셉이 성령의 감동을 입었고 언제나 하나님이 함께 하실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이 보나 안 보나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게 살았다는 점입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과 동침을 요구했을 때는 남편 보디발이 먼 곳으로 갔거나 얼마간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는 때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보디발 아내의 요구를 뿌리칩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신다는 것을 양심을 통하여 알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감동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 감동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시중 하는 사람이 되고, 오랫동안 기도할 때 임합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또 양심을 쓰는 자에게 임합니다. 특별히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할 때 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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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CI 칼럼] 강성률 목사의 ‘성령의 감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