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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 '주인되심'(롬 14:7~9)
    저의 지인의 이야기입니다. 한 인도 여자가 길에서 떨어진 꽃을 줍고 있었습니다. ‘주변에 저렇게 꽃들이 많은 데 그냥 꺾어가지 왜 힘들게 저럴까...‘ 궁금해서 물었더니 그 인도여자의 대답이 “우리신 에게 가는데 꽃을 드리고 싶어서요, 그런데 우리신은 생명을 일부러 꺾어 죽여서 가져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떨어진 꽃을 줍고 있답니다.” 신을 살아있는 존재로 저렇게 가깝게 느끼면서 그 신이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으려는 인도 여자를 보면서 자기는 예수님의 임재를 얼마나 느끼고 있는지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았다고 합니다. 성경도 많이 알고 묵상도 하지만 아는 그것을 이론으로 정립시켜서 종교가 되어버린 지식의 기독교는 주님의 임재를 느낄 수가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이 땅에 와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본문은 그 결과로 우리의 주님이 되셨다고 합니다. 주님의 임재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것의 결과는 나의 주인이 되신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그러니 내가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주를 위해서 하는 것이며 내가 주의 것이라고 합니다. 이 진리는 어느 특정한 사람만이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그분을 영접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이야기입니다. 좀 더 잘 살아보려고 교회를 다니는 건데 주를 위해 살고 주를 위해 죽으라니 짐을 하나 더 지고 가는 구나... 꼭 저렇게 까지 심하게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가... 마음에 부담이 된다면 우리의 믿음을 다시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을 진리로 믿는 다면 주를 위해 살고 주를 위해 죽으라는 그 말씀이 맞습니다. 그러면 그 말씀이 이해 될 때 까지 깊이 씨름하고 고민해 봐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이 “나는 너의 하나님이라”는 구약의 약속을 목숨을 걸고 지키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해서 대신 죽으시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이심을 입증하시면서 그 부활하신 하나님이 나의 안에 들어오셔서 나의 주님이 되심으로 그분은 나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가 나와 함께 하시는 실제입니다. 그분의 숨결, 향기, 같이 있는 그 느낌... 그분이 그렇게 나의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하나님이 내안에 계신다면 그것은 나의 주인으로 임재 하시는 게 맞는 것입니다. 목숨 걸고 다 이루어 놓으신 그 약속을 받은 우리가 주님이 나의 주인이 되는 것이 싫다고 그 약속을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죽음을 이기시고 마귀를 이기시고 나의 주님이 되셔서 나의 안에 임재하십니다. 마귀를 이기신 주님의 능력이 나와 함께 하셔야 마귀가 권세 잡은 세상을 이기고 살 수 있습니다. 나 혼자는 못삽니다. 어느 권사님의 남편이 갑자기 쓰러지셨습니다. 병원에 입원하고 재활하면서 고생하시다가 지극정성으로 살아났는데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입니다. 어느 날 한 여자가 남편을 찾아왔습니다. 전부터 알던 사이로 병간호를 해주러 왔다는데 남편은 그 여자에게 돈을 뭉치로 쥐어 줍니다. 며칠 후 또 한 여자가 찾아 옵니다. 전에 남편에게 도움을 받은 게 고마워서 병간호를 하러 왔다면서 남편에게 재산을 물려달라고 조른답니다. 뻔뻔한 두 여자는 돈 때문에 남편에게 붙어서 혼이 빠질 정도로 잘해주는데 미련한 남편은 권사님에게 너는 필요 없으니 나가라고 한답니다. 참 기가 막힐 일입니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비상식적인 사건이 살다보면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인생문제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풀어낼 수 있겠습니까?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주인이 되어 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풀어집니다. 주님이 권사님의 주인이 되셨으니 그분을 주인으로 의지하고 끝까지 주인을 믿고 의지하면서 기도하시면 분명히 주인의 방법대로 해결할 것입니다. 마귀를 이기신 주님의 능력만이 마귀가 권세 잡은 세상의 인생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우리의 승리입니다. 주님의 주인 되심의 결과는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심히 큰 능력입니다. 축복입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후 4:8~9)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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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5-21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 21:15~19)
    베드로는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의 손을 잡고 물위를 걸었던 적도 있었고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믿음을 고백하면서 예수님이 구원자이시고 하나님이심을 알았습니다. 십자가 사건 전날에는 주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그날, 닭이 우는 새벽에 베드로는 예수님 때문에 목숨을 버릴 위기 앞에 섰습니다. 베드로는 죽음의 위기 앞에서 나는 그분을 모른다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고 했던 말은 진심이었습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이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도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불치병 환자들을 고치시고 죽은 사람도 살리시며, 물위를 걸으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는 것을 보면서는 할 수 있었던 고백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힘없고 무력하게 맞으시면서 한마디 말도 못하고 수치 당하시는 모습을 보면서는 두려웠습니다. 그날 저항도 못하고 맞고 계시는 예수님의 눈과 마주치면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베드로의 믿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웠을까요, 믿음은 위기 앞에서 시험을 받게 됩니다. 그때 믿음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지만, 베드로는 그토록 사랑하던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눈앞에서 보고도 부활의 기쁨을 충만하게 누리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버리고 나 살겠다고 도망간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이 말밖에는 할 수 없는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사랑하는 예수님을 버리고 갔다는 눌려 있는 마음, 밤새 고기 잡다가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지친 마음, 그런 베드로에게 갑자기 찾아오신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놀라서 반사적으로 바다로 뛰어 들어간 피하고 싶은 마음, 부서지고 무너져 내린 베드로 앞에 조반을 차리시고 함께 계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침묵...이 모든 과정은 마음이 눌려있던 베드로의 회복을 위해 필요합니다. 조반 후,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가 주님을 위해 죽을 수 있다고 할 때 “네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구체적으로 미리 알고 계셨던 주님이 무엇을 모르시겠습니까,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할 것을 아셨던 주님은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도 아셨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고 도망갈 것을 미리 아시고도 베드로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런 주님 앞에서 무엇을 숨기고 감출게 있겠습니까? 나의 약함을 인정합니다. 나는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눌려 있던 베드로의 마음은 회복이 됩니다. “내양을 먹이라” 부활하신 예수님은 주님을 배신한 자격 없는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사역은 자격을 보고 맡기시는 것이 아닙니다. 처참하고 무력한 십자가 죽음 앞에서 믿음의 시험을 받았던 베드로는 십자가의 죽음도 하나님의 뜻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기적의 능력뿐만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무능력함도 하나님의 뜻을 이룹니다. 인생에는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습니다. 좋은 것만 취하고 나쁜 것은 버리고 싶지만 때로는 나쁜 것을 통해서 좋은 것이 박차고 나오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순리입니다. 주님 안에서는 나쁜 것도 잘 지나가면 합력해서 좋은 것이 됩니다. 부활의 영광을 위해서 저주받은 십자가의 죽음을 잘 지내가야 합니다.믿음의 시험을 받고 도망갔던 예수님의 저주받은 십자가도 하나님의 뜻인 것을 알아야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의 하나님 되심의 언약을 성취하신 분이라는 확신 있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성령 받은 후에 베드로는 두려워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갔던 그들 앞에서 담대하게 설교합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행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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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5-07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창세기 39:1~6)
    만사형통하는 것, 모든 사람들이 다 바라고 추구하는 삶일 것입니다. 사전에서 형통이란, ‘모든 것이 뜻과 같이 잘되어감’ 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누구의 뜻대로 잘되어가는 것인가, 만사는 내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뒤돌아 보면 내 삶속에서 하나님의 뜻 안으로 들어오는 것만 남고 그 밖으로 나가는 것은 다 찢어지고 부서집니다.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이 일치하면 형통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형통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형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창 39:2) 그때의 요셉은 애굽에 팔려온 노예소년이었습니다. 그런 상태의 요셉을 형통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 요셉에게는 형통의 잠재력이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형통은 하나님과 계약대상인 이스라엘이 언약을 지킬 때 약속된 축복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형통을 선택하면서 계속 뒤로 물러서지 않고 전진해 나갔습니다. 그 선택이 요셉이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어 바로왕의 앞에 위풍당당하게 우뚝 설 수 있게 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노예요셉의 삼십세 때 일어난 일입니다. 정말 놀라운 출세입니다. 어쩌다 애굽까지 팔려온 파란 만장한 노예소년일지라도 계속해서 형통을 선택할 때 이런 일이 이루어 질수 있습니다. 요셉이 어떻게 형통을 선택했는가? 요셉은 이집트 땅을 처음 밟았을 때 형들에게 노예로 팔려온 상처투성이의 불쌍한 소년이었습니다. 살다보면 예기치 않게 이런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애굽의 장군집에 팔린 소년 노예는 말 그대로 노예입니다. 사람취급도 못 당하는 무시와 멸시 속에서 살았을 것입니다. 내가 노예로 살 사람이 아닌데,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닌데... 배신당한 상처와 아픔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악을 행한 그들이 가족입니다. 보통은 원망과 분노로 칼을 갈면서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그 삶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렇게 대처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자기에게 주어진 노예의 삶에 충실했습니다. 형통한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면 그것이 어떤 것이든 거부하지 않고 믿음으로 받았습니다. 그 믿음 때문에 노예의 삶에 순종해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 수 있었습니다. 급기야 주인 보디발 장군의 신임을 얻어 그 집에서 가정총무까지 올라갔습니다. 그 후 몇 년이 흘러 요셉이 총리대신이 된 시간과 통합해 보면 노예의 때도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고난도 축복으로 통합되는 것이 형통입니다. 주님 안에서는 내게 좋은 것 나쁜 것, 이것 저것 가려서 따질 것이 없습니다. 주님의 뜻 안에 들어있는 것은 모두 다 축복입니다. 내 뜻대로 안 되서 못 견디는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 안으로 들어가는 요셉의 형통을 봅시다. 하나님의 뜻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축복입니다. 후에 요셉은 자신의 삶을 사명 안에서 통찰합니다. 가족의 배신으로 당한 상처와 아픔, 노예시간의 고통, 총리대신의 영광... 그 모든 사건들이 하나님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고 자신의 삶을 쓰신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살다보면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나야 하는지 모를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셔서 사명으로 감당하게 하십니다. (창50:20) 내 뜻대로 되어지는 인생은 없습니다.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됩니다. 눈을 돌려 나와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봅시다. 사람취급 못 받던 노예가 그 약속을 믿고 그 약속이 이루어져 위대한 총리대신 요셉이 되었습니다. 인생을 사명으로 주신 분이 악을 선으로 바꾸셔서 그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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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4-22
  • [WAIC 칼럼] 임현주 목사 '왕, 솔로몬의 법정'(왕상 3:22)
    솔로몬이 하나님께 받은 지혜의 축복은 이스라엘의 축복입니다. 왕은 백성들이 수도 없이 들고 나오는 일들을 잘 재판하여 선과 악을 분별해야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외모나 소문으로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판단 할 수 있는, 잘 듣는 지혜로운 마음을 받은 솔로몬의 재판정에 첫 번째 사건이 들어옵니다. 울고불고 비명소리로 시끄러운 사건이 들어옵니다. 16절 창녀 두 사람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창녀의 삶은 정의나 진리의 세계와는 거리가 먼 인생입니다. 오히려 살기위해 무슨 짓이든 해야 하는 법이나 도덕과는 거리가 먼 인생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그녀들에게도 정의가 필요한, 법이 필요한 일이 생깁니다. 정의 앞에 서야 되는 사건이 생깁니다. 자기가 출산해서 삼일 간 젖을 물리던 어미가 그 아기를 잃어버립니다. 빼앗긴 것입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자기 친구의 품안에 안겨있습니다. 한 집에서 출산을 같이 한 친구입니다. 같은 일을 같은 집에서 하며, 비슷한 시기에 임신을 하고 삼일 차이로 출산을 한 친구 창녀는 아기를 낳고 부주의하여 밤에 자기 아기 위에 누우므로 그 아기가 죽었습니다. 모두가 잠이 든 그 밤에 살아있는 자기친구의 아기와 죽은 자기아기를 바꾸어 놓고 자기 아기라고 주장합니다. 친 엄마 창녀가 곁에 죽은 체 누워있는 아기를 아침에 자세히 들여다보니 삼일 전에 자기가 낳은 아기가 아니었습니다. 엄마는 압니다. 자기 자식을 압니다. 어찌 태에 열 달을 품었다 낳고, 젖까지 물린 자식을 몰라본다 말입니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내 아기가 어느 새 내 친구의 품에 안겨있습니다. 그 엄마에게 그 아기가 자기 자식임은 사실입니다. 진실입니다. 이것은 하늘이 쪼개져도 거짓이 아닌 참입니다. 정의입니다. 그러나 잠든 사이에 감쪽같이 일어난 일입니다. 그 집에는 그들 둘 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제 그 아기가 내 아기라는 사실을 증명 해야만 합니다. 그 아기가 내 아기입니다. 사실을, 사실만을 말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사실이니까요. 그러나 바로 전에 자기 자식을 품에 안아보았던, 그 따뜻한 생명을 느껴보았던, 세상에 내 것이, 내 아기가 생겼습니다, 나를 알아보는 내 아기를, 그리고 곧 잃어버린 아기의 엄마도 필사적입니다. 서로 자기 아기임을 주장합니다.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이 친구가 이런 친구 였나... 어찌 바로 며칠 전까지도 신세 한탄도 같이 하고, 또 이제는 엄마까지 같이 된다고 속을 터놓고 이야기 하던 친구가 이럴 수 있단 말입니까. ‘어쩌다 우리는 이렇게 되었을까, 아기는 잘 낳아 기를 수 있을까’, 다른 사람에게는 말 할 수 없었던 남모를 이야기들을 서로에게는 주고받으며, 그래서 더욱 의지되고 서로의 사정을 이해해주며 위로받던 동료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처음엔 잘 이야기하면 돌려줄 줄 알았습니다. 자기 아기가 죽은 충격에 잠시 내 아기를 안아보고 돌려 줄 거라 기다려 주어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도, 날이 가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점점 더 자기아기라 우겨댑니다. 할 수 없습니다. 뺏기라도 해야겠습니다. 싸움이 쉬지 않습니다. 이제 집 밖을 나섭니다. 이사람 저 사람들에게 하소연 합니다. 저 아기가 내 아기라는 사실을 내 친구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증명해야만 합니다. 사람들이 내 말을 믿도록 증거를 대야 합니다. 엄마에게 내가 낳은 내 아기인 것이 사실인데 무슨 증명이 필요합니까?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아무도 내 말을 믿어주지 않습니다. 내 말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친구에게 아기엄마에게 아기를 돌려주라 말해주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품에 아기를 꼭 안고 젖을 물리며 절대 내주지 않고 있는 친구 말을 오히려 사람들은 옳다합니다. 아기를 당당하게 안고서 아기를 위해 조용히 하라고 타이르기까지 합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딱 아기 엄마입니다. 네, 그도 아기엄마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품에서 아기를 놓친 어미의 말은 믿을 수 없다합니다. 이 엄마는 급기야 불안에 떨며 거품을 물고 그저 내 아기가 맞다고 악을 쓰며 울며불며, 앞뒤도 안 맞는 말들을 마구 쏟아냅니다. 사실입니다. 진실입니다. 나는 사실을 말하고 있기에 다른 것은 필요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러면 그럴수록 나를 미친 여자라 합니다. 실제로 미친 여자가 되어갑니다. 그래도 결코 엄마는 포기할 수 없습니다. 내 아기 곁을 이대로 떠날 수 없습니다. 차라리 내가 죽겠습니다. 죽어 증명할 수 있다면··· 미친 여자 하나가 아기엄마 곁을 따라다니며 소리소리 합니다. 아무도 사실을 알아주지 않습니다. 아무 일 없는 듯, 자신 만만히 내 아기를 안고 젖을 물리는 내 친구도 알고 있습니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이런 불의는 없습니다. 동네 동네를 판결을 구하며 돌아다니다 최고한 법정, 왕의 재판정에까지 서게 됩니다. 이제 왕 앞에 왔으니 왕은 가려내 줄 것입니다.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는 왕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지혜로운 마음을 받은 솔로몬 왕입니다. 왕은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누가 아기의 엄마인지, 무엇이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해 줄 것입니다. 왕 앞에서는 무엇이든 왕의 판단을 명령을 따라야 합니다. 마지막 기회입니다. 있는 힘을 다하여 주장합니다. 자식을 빼앗기느니 차라리 죽겠습니다. 이 아기가 내 아기임은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주장하고 또 주장합니다. 다 보고 들은 왕이, 드디어 판결합니다. 왕의 명령입니다. 24절 칼을 내게로 가져오라 합니다. 칼이 왔습니다.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으니 살아있는 아기를 둘로 나눠 가지라 합니다. 어떻게 됩니까? 26절 그 살아있는 아들의 어미 되는 여자가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둘로 나누면 아기는 죽습니다. 칼이 앞에 있습니다. 이제 내 아기가 죽을 것입니다. 칼 앞에서 아기의 죽음 앞에서 갑자기 아기의 어미의 마음이 불에 탑니다. 이제 여기서 한마디만 더하면, 주장하면 주장할수록 아기는 죽습니다. 이제 아기를 살려야 합니다. 이대로 죽게 할 수는 없습니다. ‘내 아들이 아닙니다. 저 여자에게 주세요.’ 네! 아기가 살 수만 있다면 내 품이 아니어도 됩니다. 내가 엄마라는 것 평생 몰라도 됩니다. 내가 저를 버림으로 자기를 살려냈다는 것 평생 몰라도 됩니다. 살릴 수 만 있다면 엄마는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아기의 죽음 앞에 비로소 침묵합니다. 살려야 합니다. 그러나 아기를 앉고 있던 여인은 어차피 내가 가질 수 없다면 내 친구도 가질 수 없습니다. 아기를 나누자 합니다. 27절 왕이 대답하여 가로되 살아있는 아들을 저 계집에게 주고 결코 죽이지 말라 저가 그 어미니라 하매 왕이 아기를 어미의 품으로 돌려줍니다. 어미가 안을 수 있도록 합니다. 왕 앞에 서고서야, 지혜 앞에 서고서야 모든 것이 드러납니다. 우리의 지혜로 오신 주 예수님 앞이어야 합니다.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잠3:18)’. 생명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주 예수는 생명의 주입니다. 살림입니다. 왕에게 죽음을 드림으로 살림 받습니다. 왕 앞에서 창녀가 엄마가 됩니다. 왕이 준 새 이름입니다. 새 삶을 삽니다. 창녀가 엄마로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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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4-10
  • [WAIC 칼럼] 임현주 목사 '내가 그 죄인입니다'(눅7:44~46)
    어쩌다 나는 이렇게 되었을까요? 없었던 일로 하고 다시 시작할 수는 도대체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잠깐 동안만, 잠시만 하고는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다가 보면 좋은 수도 생길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 이었습니다. 이제 나는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돌아갈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이대로 살다 죽는 수밖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누구 이야기 입니까? 우리처럼 주 예수 앞으로 나와 선한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어떤 모습입니까? 38절 예수의 뒤로 입니다. 네! 뒤에서, 앞에 나설 수조차 없는 여인입니다. 여기에, 교회에 와서도, 주 예수 앞에 와서도 감히 나설 수 없는 여인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조차 입을 열수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피할 것입니다. 또 누가 와서 알게 되기라도 할 것 같아 움찔움찔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마 21장 31~32절) 사람들이 지나다니며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습니다.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같이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가 세상에 왔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살아 계신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그리스도이기도 합니다. 세례 요한이 세상 죄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했답니다. 그리고 이 분은 죄 많은 세리와 창기들과도 식사를 같이 한답니다. 그들의 친구라고 까지 한답니다. 사람이 어떻게 사람들이 그토록 싫어하는 우리들과 같이 지낼 수 있단 말입니까. 세리와 죄인들을 부르러 왔다는 소식에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나입니다. 오실 분이 오신 것입니다. 내가 나가야합니다. 여기까지 오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수소문해 찾아 나서서 달려 나갑니다. 나로구나, 나에게 까지, 나를 찾아 오셨구나, 한 달음에 달립니다. 경건하기로 소문난 시몬의 집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둘러싸여 있는 그의 친구들 무리 사이로 감히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가 계시다면, 그의 곁이라면 괜찮겠습니다. 그 귀하신 분의 발만 눈에 들어올 뿐입니다. 쉬지 못한 발입니다. 많이 걷고 걸은 발입니다. 나 때문입니다. 날 찾아오려고 걷고 걸으셔서 흙먼지에 피곤한 발입니다. 곧 못에 박혀 피 흘릴 발입니다.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눈물로 말을 대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눈물이 떨어진 그 주님 발 닦기 위해 사람들 앞에서 머리털 푸는 것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제 주변 사람의 수군거림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가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창기를 부르신 주님께만 집중 합니다. 내 죄 때문에 이 분이 어린 양으로 오셨구나. 주님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지금 흘리는 나의 눈물이 누군가의 발 씻어주는 물이 되는 축복 있기를!! 무엇 때문에 나온 것일까요? 오직 단 하나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옵니다. 주님께 향유를 붓기 위함입니다. 주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이십니다. 나의 어린 양입니다. 여인이 지니고 있는 단 하나 소유물입니다. 평생을 모은 것입니다. 몸을 팔아 조금 조금씩 준비하던 것입니다. 고된 인생에서 여인이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일입니다.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던 것입니다. 창기로 이 세상을 살면서 다만 저 세상에서 편안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적어도 죽음의 순간만큼은 남들처럼 평범하고 싶습니다. 죽어 장사지낼 내 몸 만큼은 깨끗이 닦여 향기 있고 싶습니다. 그 날만을 위해 소중히 목에 걸어, 품고 다니던 것입니다. 남은 것이라고는, 가진 것이라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 것 뿐입니다. 향유 옥합을 깨뜨 립니다. 주님께 부어 드립니다. 나를 드립니다. 나의 죽음을 드립니다. 어떻게 됩니까?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 하느니라”(47절) 벗어날 길 없이 그대로 살아야하는 인생입니다. 한번 창기는 영원한 창기입니다. 한번 박사는 영원한 박사입니다. 그래서 근사한 명함으로 명패로 한번 바꿔 보려고 밤이나 낮이나 수고하는 우리들 아닙니까? 창기의 굴레를 죽는 날 까지 벗을 수는 없습니다. 그 모습 그대로 주 예수 앞에 섭니다. 나는 내 죄를 내가 압니다. 죄를 지은 죄인이라는 것을 압니다. 나는 내가 누구라는 겉모습보다도 내가 남몰래 지은 죄 때문에 괴롭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나를 피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그러나 그는 내가 본 그대로 메시야입니다. 모두가 오시길 기다리고 있는 그분이 맞습니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아 혼자서 주고받고 주고받으며 되뇌던 말을 다 듣고 계신 메시야라면 모든 것을 다보고 알고 있는 분이라면. . . 그분이 맞습니다. 마음에 알고 있던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더구나 메시야를 믿고, 연구하며, 선포하며, 백성들에게 이렇게 살아야 해 하며 본이 됨으로 가르치고 있는 그 집주인 바리새인 시몬도 몰라보는 그 입니다. 그를 초대까지 한 우리들의 선생님 시몬입니다. 여전히 시몬은 그 인가 아닌 가 시험 중입니다. 주가 하신 말씀 그대로 살고 있다는, 경건한 시몬과 그의 초대로 모인 경건한 무리들 앞에서 그 여인의 죄의 굴레를 끊어 주십니다. 그 여인의 많은 죄는 용서 받았음이 선포 됩니다. 오직 죄인 된 나를 부르러 찾아 오셨다는 그 믿음이 창기였던 이 여인을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건짐 받습니다. 이제 평안합니다. 나의 죽음을 드리고 삶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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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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