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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은혜의 비밀’ (마 5: 7~12)
-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7-10절) 긍휼은 자비로움으로 해석되며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동정심 이상의 것입니다. 상대의 처지를 내 일처럼 여기고, 가능한 방식으로 손을 내미는 마음입니다. 단순히 판단만으로 끝내지 않고, 상대방의 회복을 향해 움직이는 모습이 긍휼입니다. 타인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들은 그들도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긍휼을 흘려보내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도, 사람 사이에서도 긍휼의 통로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긍휼의 마음이 어떤 때에 작동하게 되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그밖에 불우한 경우에 주로 긍휼의 마음을 갖게 되거나 관련된 사역을 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경우뿐만 아니라 가장 가까운 가정에서부터 긍휼은 시작될 필요가 있으며, 이는 이웃과 성도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어떤 상황에서 판단이 앞서기보다는 어떻게 도울까를 먼저 묻는 자세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긍휼에는 언어적인 습관이나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인내가 모두 포함되어야 합니다. 도움을 주면서도 우월감이 앞서는 경우는 진정한 긍휼이라 할 수 없습니다. 자신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의미는 어떤 의미일까요? 마음의 청결은 비단 깨끗한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이 나뉘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즉 위선과 이중성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한결같은 마음을 드리는 일입니다. 그 마음이 청결한 자들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누리며 분별하는 안목이 열린다는 의미가 됩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신앙과 일상 사이의 이중적인 생활이 정리되어야 합니다. 즉 사람들에게 나타내어지는 말과 자신의 실제 행동이 불일치되는 것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욕심에서 비롯되는 숨기는 습관을 끊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빛 가운데로 나아가는 결단에 해당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행동을 정직하고 진실하다고 말합니다. 이와 함께 자기의 마음을 더럽히는 탐욕과 중독의 습관으로부터 역시 빠져나와야 합니다.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받을 복에 대해서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화평은 단순히 갈등이나 위험을 회피하거나 덮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을 직면하되 사랑으로 평화롭게 연결하는 사람이 화평케 하는 사람입니다. 이는 곧 아름다운 관계의 다리를 놓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대표적인 분이시며 성도 역시 화평케 하는 직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나타나는 표지가 화평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화평을 이루기 위해서는 믿음과 사랑과 용기와 결단과 패기가 모두 있어야 합니다.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경우는 성격이나 감정으로 인해 생긴 충돌이 아닌, 하나님의 의를 따라 살다가 생기는 대가를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선택으로 인해 억울한 말이나 오해, 배척을 겪는 경우가 있습니다. 억울함조차도 하나님께 맡기고 전진하는 지혜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긍휼과 마음의 청결, 화평케 하는 일, 그리고 의를 위해 박해를 감수하는 일은, 본인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열려있어야 하고 그 사랑의 일에 적극적으로 임해야 가능합니다. 그리고 이 일을 제대로 감당할 때에 주시는 커다란 은혜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산상수훈의 복을 잘 지키고 따르며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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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은혜의 비밀’ (마 5: 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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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교회논평회 칼럼] 박조준 목사의 ‘손현보 목사님 석방에 대하여’
- 이번 세계로교회 손현보 목사님께서 한동안 옥고를 치르시고 석방되신 데 대하여, 먼저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동안 진리 수호를 위해 고난을 감내하신 손 목사님의 노고에 대하여 깊은 위로와 격려를 드립니다. 손 목사님께서 겪으신 고생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 한국 교회와 기독교에 대한 핍박의 일부였으며, 손 목사님은 기독교를 대표하여 그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시대의 희생양이 되셨던 것입니다. 손 목사님은 진리를 위해서는 거짓과 타협할 줄 몰랐고, 불의에 맞서서는 생명을 걸고 싸우신 분입니다. 바로 이것이 참된 저항의 정신을 가진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의 삶의 자세입니다. 구약성경 다니엘 3장에 보면 느부갓네살 왕이 금 신상을 만들었는데 그 크기가 굉장히 컸습니다. 이 신상을 바벨론 지방의 두라 평지에 세워 놓았습니다. 그리고 왕은 모든 총독과 수령과 행정관과 모사와 재무관과 재판관과 법률사와 각 지방의 모든 관원을 소집하여, 자신이 세운 신상의 낙성식에 참석하게 했습니다. 모든 백성과 나라를 대표하는 자들이 그 거대한 금 신상 앞에 서 있을 때, 선포하는 자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언어로 말하는 자들아, 왕이 너희 무리에게 명하시나니 너희는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에 엎드리어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라. 누구든지 엎드려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즉시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라." 이 막강한 위력 앞에 이를 거역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까? 풍악이 울릴 때, 거기 있던 거의 모든 사람이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 신상 앞에 엎드려 절했습니다. 막강한 권력 앞에 저항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저항하면 곧 생명의 위협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권력 앞에 굴복하여 비굴하게 절할 때, 유일한 예외가 있었습니다. 바로 유다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였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갈대아 사람들이 즉시 그들을 왕에게 고소했고, 사실을 알게 된 왕은 대노했습니다. 왕은 그들을 불러 문책했습니다.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한다 하니 사실이냐? 이제라도 준비하였다가 풍악이 울릴 때 절하면 좋거니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 이때 그들의 대답은 충격적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고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않을 줄을 아옵소서.“ 참으로 놀라운 정신 자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이 정신을 가진 믿음의 선조들이 과거 일제 강점기에도 신사참배를 거절하고 순교했습니다. 그 순교의 피가 오늘날 한국 교회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평소보다 일곱 배나 더 뜨겁게 달군 풀무불에 던져졌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세 사람이 아니라 네 사람이 걸어 다니고 있었습니다. 네 번째 사람은 '신들의 아들'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의 현장에 함께하셨고, 결국 그들은 승리했습니다. 이번 손현보 목사님의 구속과 석방 또한 이 진리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손 목사님께서 석방 직후 금요기도회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우리와 싸우는 자와 친히 싸워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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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교회논평회 칼럼] 박조준 목사의 ‘손현보 목사님 석방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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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하나님의 마음’(눅 15:7)
-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잃은 양을 찾은 목자 비유, 잃은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 비유,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 비유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시고 찾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길 잃고 방황하는 불쌍한 죄인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도록 오래 기다려주십니다. 본문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 한 사람이 구원받을 때 가장 기뻐하시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그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온 것과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게 된 것입니다.(롬 5:12) 그래서 누구든지 하나님께 돌아와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끝을 아시기에 오늘도 애타게 한 영혼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얻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십니다.”(딤전 2:4)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부터 우리를 아십니다. 때가 되면 주님을 떠난 자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천년을 하루같이 기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만은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는 약속을 더디 지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여러분을 위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벧후 3:8-9) 긍휼의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오래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한 영혼을 포기하지 않으시는데, 우리가 먼저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다림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신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온 후에야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하늘 나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서, 모든 민족에게 증언될 것이다. 그 때에야 끝이 올 것이다.”(마 24: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길 잃고 방황하는 불쌍한 죄인을 사랑하십니다. 내가 잃어버린 양처럼 방황할 때 나를 찾아와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도록 오래 기다려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길 잃고 헤매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이 있음을 전해야 합니다. 전도 방법에 대한 말씀을 봅니다. 첫째, 강권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눅 14: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새번역으로 보면, “큰길과 산울타리로 나가서,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내 집을 채워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날마다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행 5:4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셋째,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담대함으로 능력 있게 복음을 전하도록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전도와 선교입니다. 전도는 바로 나에게 맡겨주신 것입니다.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딛 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울타리 밖에 있는 자를 끌어안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은 놀라운 은혜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전도자를 애타게 찾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 것인가 물으실 때 이사야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우리도 언제든지 주님께서 찾으실 때 “나를 보내소서”라고 망설임 없이 대답하도록 준비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전도이고, 전도가 삶이어서 우리를 통해 많은 영혼이 주님 앞에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주님처럼 한 영혼을 소중히 여겨야 하며, 서두르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의 목적은 전도를 넘어 한 영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한 영혼이 천천히 변화하더라도 오래 기다려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기다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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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하나님의 마음’(눅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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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교회논평회 칼럼] 박조준 목사의 '벙어리 개 같은 교회'
- 하나님의 사람 이사야는 그 당시 파수꾼들의 사명을 보고 느끼면서도 말하지 못하는 이들을 향하여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맹인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들이라.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들이요 누워 있는 자들이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니,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 그들은 몰지각한 목자들이라. 다 제 길로 돌아가며 사람마다 자기 이익만 추구하며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마시자 내일도 오늘 같이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 (이사야 56장 10-12절) 아주 정확하고 예리한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비판이요 경고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그의 종들에게 맡기셨습니다. 목자로서 하나님의 양 무리를 먹이고 치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그 양 무리를 맹수들로부터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을 에스겔 선지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겠다.” (에스겔 3장 17-18절) 하나님의 종들의 사명이 얼마나 중한지, 그 책임이 얼마나 큰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그 사회의 양심이요 나침반입니다. 그 사회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때는 경고의 소리를 발해야 합니다. 도둑이 침입할 때에는 짖는 개가 되어야 합니다. 짖어야 할 때 짖지 못하는 벙어리 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니, 짖지 않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도둑을 따라다니며 꼬리를 흔드는 개가 되면 더욱 안 됩니다. 오늘 우리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형편이 어떻습니까? 우리의 상식을 넘어서는 부정부패, 악법, 탈법, 비법이 자행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파수꾼의 사명을 지니고 있는 교회와 목사들은 어찌하고 계십니까? 지도자들이 탐욕에 쌓여 있고 분별하지 못한 상태에서 세상 독주에 취하여 "내일도 오늘 같이 크게 넘치리라" 하니 어찌 된 일입니까? 세상 독주에 취하여 벙어리 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문득 2001년 데이얀 엉(Dayyán Eng) 감독이 연출한 단편 영화 '버스 44'가 생각납니다. 사회의 무관심과 방조가 낳은 비극적인 결말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중국에서 일어난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더욱 충격을 주었습니다. 한 여성 버스 기사가 버스를 운행하며 산길을 넘고 있었습니다. 강도 두 명이 승객들의 금품을 빼앗고 기사에게 달려들어 성폭행하려 했습니다. 승객들은 모두 못 본 체하고 있었는데, 오직 한 청년만이 그들의 만행을 말리다가 칼에 다리를 찔리고 심하게 얻어맞았습니다. 강도들은 버스를 세우고 여성 기사를 숲으로 끌고 가서 몹쓸 짓을 한 후 한참 뒤에 돌아왔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여성 기사는 조금 전 강도들을 제지했던 청년에게만 다짜고짜 차에서 내리라고 했습니다. 청년이 당황해하며 "방금 내가 당신을 도와주려고 하지 않았느냐?"라고 하니, 여성 기사는 소리를 지르며 "당신이 내릴 때까지 출발하지 않겠다"라고 단호히 말했습니다. 청년이 내리지 않고 버티자, 오히려 다른 승객들이 그를 강제로 끌어 내리고 짐도 던져 버렸습니다. 버스는 다시 출발했고, 기사는 커브 길에서 속도를 높여 그대로 낭떠러지로 추락했습니다. 전원 사망이었습니다. 청년은 아픈 몸을 이끌고 산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다가 사고 현장을 목격했습니다. 교통을 통제하는 경찰관은 버스가 추락하여 승객이 모두 사망했다고 말했습니다. 멀리 낭떠러지 아래를 바라보니 자신이 타고 왔던 그 44번 버스였습니다. 여성 운전기사는 살만한 가치가 있었던, 유일하게 악행을 제지했던 그 청년만은 일부러 내리게 하여 살려두고, 모른 척 외면했던 승객들을 모두 지옥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이 사건은 비록 소수의 악인뿐만 아니라, 침묵하고 방관했던 다수의 사람들에게도 무거운 책임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날의 목자들 역시 이와 같습니다. 사회의 악을 보고도 짖지 못하고 침묵하는 목자는 결국 그 피 값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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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교회논평회 칼럼] 박조준 목사의 '벙어리 개 같은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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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변화를 이룸’(마 3:1~10)
- 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요한은 중심지에서가 아닌 광야에서 말씀을 전합니다. 그리고 그가 처음으로 외친 말은,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는 메시지였습니다. 이는 임박한 하나님 나라 앞에서의 결단을 촉구하는 선포였으며, 가까워지는 천국 앞에서, 삶의 방향을 돌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우리 각자의 생활 반경 속에서 결단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요한의 본분은 주인공이 아닌 주의 길을 예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오시는 분인, 주의 길을 예비하는 일을 자기 사명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주의 길을 준비했으며, 오실 길을 곧게 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사명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부분입니다.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으로는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습니다. 광야의 거친 삶은 그의 메시지와 하모니를 이룹니다. 요한은 안락함과 화려함으로 사람을 끌어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삶 자체가 주의 길을 준비하는 자로서의 외침으로 보입니다. 꾸밈이 아닌 절제, 과시가 아닌 본래의 단순함을 유지했습니다. 그때,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왔으며,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게 됩니다. 회개는 추상적 감정이 아닌 구체적인 고백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 고백은 세례라는 행위로 나타났습니다.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돌이키는 길이 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한편, 요한은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라고 선언합니다. 요한은 종교 지도자들과 오래된 신앙인들의 외식하는 모습을 경계했습니다. 세례의 자리로 나온다고 해서 회개가 자동으로 성립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진노를 피하려는 두려움만으로는 진정한 돌이킴에 이를 수 없다는 경고입니다. 이는 그들이 세례를 종교적 보험처럼 붙들고 있지 않느냐는 하나의 폭로와 같습니다. 겉으로는 경건해 보이지만, 속은 변하지 않은 채로 심판을 피하려는 태도를 가진 그들을 향해 요한은 강력한 충격요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요한은 핵심적인 결단을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즉 온전한 돌이킴은 결코 말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회개는 열매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삶에서 확인되는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회개는 가볍게 입으로만 반복되는 종교적인 텍스트가 아니라, 행동과 습관과 관계에서 드러나는 신앙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요한은 사람들의 또 다른 숨은 정욕의 은신처를 끊어내고자 했습니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혈통과 전통을 구원의 안전장치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선언합니다.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배경도, 기대어 설 특권도 절대적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능히 새로운 백성을 세우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의 자리는 자기 확신을 붙드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겸손히 서는 자리입니다. 마지막으로 요한은 결단의 긴급함을 선포합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즉 열매 없는 삶은 결국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경고입니다. 회개 없는 신앙, 열매 없는 종교성은 하나님 나라의 길을 예비하지 못합니다. 이 말씀을 각자에게 적용해 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가까움 앞에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며 그 길을 예비하기 위해 마음과 삶이 정돈돼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며 은혜 안에 거하는 생활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새해가 그러한 해로 준비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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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변화를 이룸’(마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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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교회논평회 신년 논평 전문] “자유를 수호하는 책임 있는 신앙,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봅시다”
- 국제교회논평회는 2026년 신년을 맞아, 사회적 신뢰의 위기와 공적 책임의 혼란 속에 놓인 한국교회가 다시금 교회의 본질적 사명과 공적 책임을 분명히 확인할 것을 요청합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의 외형적 성장보다, 사회 앞에서 어떤 책임을 지는 공동체인가를 더욱 엄중히 묻습니다. 침묵해서는 안 될 때 침묵하고, 말의 품격과 진리를 잃을 때 신앙은 왜곡되며 교회는 공적 신뢰를 상실한다는 설립 초기의 경고를 우리는 다시 무겁게 되새깁니다.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질서는 인간의 존엄, 양심의 자유, 신앙의 자유라는 기독교적 가치 위에 세워졌습니다. 교회는 이 자유의 단순한 수혜자가 아니라, 자유를 지켜야 할 도덕적 책임의 주체입니다. 자유는 방종이 아니며, 민주주의는 다수의 힘이 아니라 인간 존엄에 대한 존중 위에서만 유지될 수 있음을 우리는 분명히 선언합니다. 특별히 국제교회논평회는 교회 안팎으로 스며드는 공산주의를 포함한 전체주의적 이념의 침투를 철저히 경계합니다. 공산주의는 인간을 계급과 구조로 환원하며, 초월적 하나님을 부정하고 신앙을 도구화해 왔습니다. 역사적으로 공산주의 체제 아래에서 교회는 자유를 박탈당했고, 신앙은 억압되었으며, 양심은 국가 권력에 종속되었습니다. 교회는 어떠한 명분으로도 인간의 자유와 신앙의 본질을 파괴하는 이념과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오늘의 교회가 직면한 심각한 신학적 혼란에 대해서도 분명한 입장을 밝힙니다. 국제교회논평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훼손하는 종교다원주의, 십자가와 회개를 희석시키는 자유주의 신앙, 창조 질서와 성경적 윤리를 상대화하는 동성애 옹호 신학, 그리고 복음과 세속 사상과 이념을 혼합하는 혼합주의 신앙을 단호히 배격합니다. 종교다원주의는 “다른 길도 가능하다”고 말하지만, 복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길이심을 증언합니다. 자유주의 신앙은 복음을 윤리로 축소하지만, 교회는 십자가의 구속과 부활의 능력을 붙들어야 합니다. 혼합주의 신앙은 교회를 시대정신에 종속시키지만, 교회는 시대를 분별하고 말씀으로 시대를 비추어야 합니다. 교회의 공적 신뢰는 세상에 동조함으로 회복되지 않으며, 진리를 지키는 신실함을 통해서만 회복될 수 있습니다. 국제교회논평회는 교회를 정치화하기 위한 기관이 아닙니다. 우리는 특정 정파를 대변하지 않으며, 권력의 편에 서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자유를 훼손하고 신앙을 왜곡하는 전체주의적 사고와 공산주의적 세계관, 그리고 성경적 복음을 해체하는 왜곡된 신학과 극단적 이념에 대해 침묵하지 않을 책임을 분명히 인식합니다. 침묵은 중립이 아니라 방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26년 새해를 맞아 국제교회논평회는 교회가 ▲자유 앞에서 책임 있게 서며, ▲권력 앞에서 양심을 지키고, ▲이념 앞에서 진리를 분별하며, ▲신학 앞에서 성경의 권위를 회복하고, ▲사회 앞에서 신뢰를 회복하도록 공적 논평 사역을 흔들림 없이 이어갈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봅시다 2026년, 모든 혼란과 분열의 시대 한가운데서 국제교회논평회는 교회가 다시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볼 것을 분명히 선언합니다. 교회의 중심은 이념도, 세력도, 시대정신도 아니라 오직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교회가 그리스도를 떠날 때 자유는 왜곡되고, 진리는 상대화되며, 신앙은 이념의 도구로 전락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다시 예수 그리스도께 시선을 고정할 때, 진리는 분명해지고 양심은 깨어나며 교회는 세상 앞에서 다시 신뢰받는 공동체로 서게 됩니다. 우리는 선언합니다. 공산주의를 포함한 전체주의적 이념도, 종교다원주의와 자유주의 신앙도, 혼합주의와 성경적 질서를 해체하는 모든 흐름도 교회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십니다. 2026년, 국제교회논평회는 사람을 따르지 않고, 권력을 의지하지 않으며, 이념에 흔들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신앙, 십자가 앞에서 겸손한 교회, 진리 앞에서 담대한 교회의 길을 끝까지 걸어갈 것입니다. 올 한 해, 우리는 이 고백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교회는 교회다운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있는가.” 2026년 1월 13일 설립자 박조준 목사 명예회장 림택권 목사 이사장 임우성 목사 논설고문 민경배 박사 · 정일웅 박사 · 정인찬 박사 논설위원 김열 박사 · 박순형 박사 · 김석주 박사 국제교회논평회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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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교회논평회 신년 논평 전문] “자유를 수호하는 책임 있는 신앙,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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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하나님이 함께하신 땅’(출 9:22-26)
-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에게 학대받을 때,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그 땅에서 내보내 광야에서 절기를 지키도록 말씀하셨다고 알려주었습니다.(출 5:1) 그 말을 들은 바로는,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지 않겠다며 백성을 더욱 학대하고 노동을 무겁게 시켰습니다. 고집 센 바로는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여 결국 열 가지 재앙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하늘을 향하여 손을 들어 애굽 전국에 우박이 애굽 땅의 사람과 짐승과 밭의 모든 채소에 내리게 하라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지팡이를 들매 여호와께서 우렛소리와 우박을 보내시고 불을 내려 땅에 달리게 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우박을 애굽 땅에 내리시매 우박이 내림과 불덩이가 우박에 섞여 내림이 심히 맹렬하니 나라가 생긴 그 때로부터 애굽 온 땅에는 그와 같은 일이 없었더라 우박이 애굽 온 땅에서 사람과 짐승을 막론하고 밭에 있는 모든 것을 쳤으며 우박이 또 밭의 모든 채소를 치고 들의 모든 나무를 꺾었으되 이스라엘 자손들이 있는 그 곳 고센 땅에는 우박이 없었더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일곱째 재앙으로 우박을 내리게 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늘로 그의 지팡이를 내미니, 하나님께서 천둥소리를 나게 하시고, 우박을 내리시니, 벼락이 땅에 떨어지면서 번갯불도 함께 번쩍거렸습니다. 우박이 쏟아져 내리면서, 이집트 온 땅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할 것 없이, 들에 있는 모든 풀을 치고, 들의 모든 나무를 부러뜨렸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이 사는 고센 땅에는 우박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 땅이 하나님이 함께하신 고센 땅입니다. 고센 땅은 요셉 시대부터 출애굽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이 거주했던 곳입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주하며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창 47:27)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고센 땅은, 바로가 야곱과 후손들에게 목축할 수 있도록 준 좋은 목초지였습니다. 요셉이 바로의 명령대로 아버지와 형들에게 애굽의 좋은 땅 라암셋을 주어 그들의 소유로 삼게 하였습니다.(창 47:11) 고센 땅은 출애굽 때 파리 재앙도 면제된 곳입니다. “그러나 그 날에 나는, 나의 백성이 사는 고센 땅에는 재앙을 보내지 않아서, 그 곳에는 파리가 없게 하겠다. 내가 이렇게 하는 까닭은, 나 주가 이 땅에 있음을 네가 알게 하려는 것이다.”(출 8: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고센 땅은 파리 재앙과 우박 재앙이 면제된 하나님이 함께하신 은혜의 땅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사람의 생존을 위한 싸움에 동행하시며, 조정하시며, 인도하시고, 모든 것에 자유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잊고 사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생명과 온전함으로 인도해주시는 것을 믿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모든 일을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 나가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나안 땅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교류지이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그 땅은 이미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주어질 것이 약속되어 있었습니다.(창 12:7) 하나님은 그 약속의 땅을 주시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힘을 얻고 약속하신 땅을 차지하여 그 땅에서 오래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땅은 하늘에서 내린 빗물로 물을 공급해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땅은 하나님이 몸소 돌보시는 땅으로서 하나님의 눈길이 해마다 정초부터 섣달 그믐 날까지 늘 보살펴 주시는 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신 11:8-12) 우리도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고 잘 지켜서 힘을 얻고,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은혜로 살며, 하나님의 눈길이 해마다 정초부터 섣달 그믐까지 몸소 돌보시는 땅에서 주님과 동행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오직 주님만 의지하고 선을 행하며 성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기쁨을 찾을 때 주님은 우리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할 때 우리의 앞길을 책임져 주실 줄 믿기 바랍니다. “주님만 의지하고, 선을 행하여라.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성실히 살아라. 기쁨은 오직 주님에게서 찾아라. 주님께서 네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신다. 네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여라.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시 37:3-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뜨겁게 경험하며, 우리보다 앞서 가시며, 함께 가시며, 뒤따라오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영원토록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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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하나님이 함께하신 땅’(출 9: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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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분노 버리기’(민 20:10-13)
- “미련한 사람은 화를 있는 대로 다 내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화가 나도 참는다.”(잠 29: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급하게 남을 정죄하거나 분노하는 습관이 있다면 버려야 합니다. 분노는 마귀에게 틈을 주기 때문입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6-2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을 보면,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와 다투었으므로 이를 므리바 물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서 그 거룩함을 나타내셨더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8절)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반역한 너희여”라는 말과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는 큰 실수를 했습니다. 모세의 실수는 하나님 말씀보다 자신의 감정을 앞세운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모세는 반석을 향하여 말로 명령하지도 않고 백성을 향한 격한 감정으로 반석을 두 번 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을 통해 주님의 거룩함을 나타내기 원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원망하는 백성에게도 이적을 베푸셔서 거룩함을 나타내기 원하신 것이지요. 그러나 모세가 격한 감정을 쏟아내서 주님의 거룩함을 파괴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석에서 물을 내어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과 불평이 그치게 하시고, 모세와 아론에게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심으로써 주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차등 없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모세와 아론은 분노로 불순종함으로써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보는 앞에서 주님의 거룩함을 나타낼 만큼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신뢰는 우리에게도 가장 중요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세는 이전에도 주님을 불신한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고기를 실컷 먹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을 때 모세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채 “그들을 위하여 양 떼와 소 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민 11:22)라고 투정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모세가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했던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온 이스라엘 백성이 보는 앞에서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이나 내리친 행동은 공개적으로 주님을 신뢰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잘못을 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우리도 공동체 속에서 주님을 신뢰하지 않는 말과 행동을 삼가야 합니다. 주님의 거룩함을 훼손하기 때문입니다. 합당하지 않은 분노와 불평은 다른 사람에게 나쁜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정의롭지 못한 분노는 버려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반석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목마른 영혼들에게 신령한 음료를 주셨습니다. “그들은 모두 똑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고, 모두 똑같은 신령한 물을 마셨습니다. 그들은 자기들과 동행하는 신령한 바위에서 물을 마신 것입니다. 그 바위는 그리스도였습니다.”(3-4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령한 음식은 만나를(출 16장), 신령한 음료는 광야생활 중 이스라엘 백성이 목마를 때 반석에서 솟아난 물을 가리킵니다.(출 17장)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었던 식물과 음료는 참떡과 참된 음료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의미합니다.(요 6장) 야고보서 4장을 보면,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11-12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방은 거슬리는 말이거나 남의 명예를 훼손하는 말이며, 거칠고 불친절한 태도를 포함합니다. 우리는 모든 악독과 분노와 소란과 욕설을 버려야 합니다. 서로 친절하게 대하며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악한 언행은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분노를 버리도록 생각과 말을 다스려야 합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고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승리하는 삶의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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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분노 버리기’(민 20: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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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성도의 격(格)’(수 21: 1~7)
- 가나안 땅 실로에서 중요한 회의가 있었습니다. 레위 사람들의 족장들이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그리고 이스라엘 각 지파의 족장들에게 다가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해 우리에게 명령하시기를, 레위 지파가 살 성읍들과, 레위 지파의 가축을 기를 목초지를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자신들의 기업 가운데서 성읍들과 목초지를 떼어서 레위 사람들에게 내어줍니다. 그들의 형제애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렇게 제비를 뽑아 레위 지파를 위한 분배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먼저 그핫 가족 가운데 아론의 자손들은 유다, 시므온, 베냐민 지파에서 제비 뽑은 대로 성읍을 받았는데, 그 수가 열세 성읍이었고, 그핫 자손 중 남은 이들도 에브라임, 단,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에서 열 성읍을 받았습니다. 또한, 게르손 자손들에게는 잇사갈, 아셀, 납달리, 그리고 바산에 있는 므낫세 반 지파로부터 열 세 성읍이 주어졌고, 므라리 자손들은 르우벤, 갓, 스불론 지파로부터 열두 성읍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레위 사람들은 각 지파로부터 성읍과 목초지를 분배받아, 그들의 삶과 사역을 이어갈 수 있게 됩니다. 레위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그들의 기업’이라는 말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즉 여호와가 그들의 기업이라는 선언은 레위인의 생계가 토지 수익이 아니라 예배 질서 속에서 공급되는 몫에 의해 유지된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레위인은 하나님의 선언하심 속에서 십일조와 함께 제사와 관련된 몫(제물의 일부 등)을 통해 생활을 유지하게 됩니다. 이러한 구조는 레위인을 무소유로 낭만화하려는 장치가 아니라, 그들의 지속적인 성소 봉사를 위한 공동체적인 처우였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근거로 오늘날에도 목회자를 처우하곤 합니다. 레위 지파를 향한 이러한 처우는 그들의 소속의 중심이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데 있습니다. 즉 다른 지파가 땅을 통해 자리를 확보한다면, 레위인은 하나님과 그 예배에 붙들리는 방식으로 위치를 확보하게 되는 것입니다. 땅이 정체성의 기반이 되기 쉬운 사회에서, 레위인의 삶이 하나님 중심성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직접 제도적으로 구성한 것입니다. 레위인은 성소 봉사를 위해 구별된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기업이라는 의미는, 레위인의 삶이 하나님과의 관계, 즉 거룩함과 헌신과 율법 준수와 교육에 의해 규정되어야 함을 뜻합니다. 레위인에 대한 잦은 오해가 있습니다. 즉 레위인은 가난해야 한다는 오해입니다. 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레위인을 무소유자로 미화하기보다는, 예배와 사역이 공동체 안에서 지속될 수 있도록 일꾼을 지탱하고 유지하도록 하는 제도와 규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레위인이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다는 것은 성경의 사실과는 다른 오해입니다. 지파로서의 기업이 하나님이라는 특별성으로 인해서 농사를 주업으로 하기 위한 토지는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았지만, 그들이 거주해야 할 성읍과 가축을 키우기 위한 목초지는 다른 지파들로부터 각각 필요한 만큼 분배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레위인에게 “하나님이 그들의 기업”이라는 말은 결코 추상적 낭만이 아니며, 그들이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소속되었으며, 땅에서는 다른 지파로부터 나오는 기업의 나눔과 십일조와 제사로 드려진 몫을 통해 삶을 영위하였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구조는 지속적인 하나님의 사역을 구현하기 위함입니다. 오늘날 성도의 입장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는 신분과 레위적 원리에 따라 공동체를 섬기는 일이 함께 성립하는 자리입니다. 즉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과 구별되어 예배와 봉사, 그리고 삶 속에서의 언약공동체를 유지하도록 부름받은 직분이며, 그 사명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사, 그리고 능력과 변화를 은혜로 받은 자들입니다. 부름받은 성도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며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삶을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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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성도의 격(格)’(수 2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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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기다림’(눅 2:25-32)
- 누가복음을 보면, 약속된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경건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므온과 안나는 이스라엘 역사의 어둡고 고달픈 시간을 지나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기다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소극적인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현 상황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적극적인 삶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복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시려고 기다리시며, 너희를 불쌍히 여기시려고 일어나신다. 참으로 주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주님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은 복되다.”(사 30: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다림은 믿음입니다. 기다리는 사람은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기다리지 못합니다. 시므온은 기다림에 성공한 사람입니다. 성령님이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본문에서 이스라엘이 받을 위로는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기다리는 것을 말합니다. 메시아를 이스라엘의 위로라고 한 것은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으로 위로를 주실 것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시므온이 의로웠던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는다고 하더니 과연 아기 예수께서 그 부모에게 안겨 오는 것을 보고 반갑게 아기를 받아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이제 시므온은 평안하게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주의 구원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아기 예수를 본 것은 주의 구원의 약속이 성취된 것을 본 것과 같습니다. 많은 사람은 자신의 소원을 이루고 죽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시므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을 보고 죽기를 원했습니다. 성령님과 동행하며 그 약속을 기다리던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통해 주의 구원을 확인했기에 평안한 마음으로 죽기를 간구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대림절에 우리는 무엇을 기다려야 할까요?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유 20-21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고,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고,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려야 합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된 소망 곧 위대하신 하나님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고대합니다.”(딛 2: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도록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려야 합니다. 안나는 남편이 죽은 후 성전에 들어가서 주님의 약속을 기다리며 84년간 봉사하는 중에 아기 예수를 보았습니다. 안나는 크게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예루살렘의 구원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 “아셀 지파에 속하는 바누엘의 딸로 안나라는 여예언자가 있었는데, 나이가 많았다. 그는 처녀 시절을 끝내고 일곱 해를 남편과 함께 살고, 과부가 되어서, 여든네 살이 되도록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금식과 기도로 하나님을 섬겨왔다. 바로 이 때에 그가 다가서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예루살렘의 구원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였다.”(눅 2:36-38)라고 알려주었습니다. 대림절은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을 기억하면서 또다시 우리의 마음속에 말씀과 영으로 새롭게 임재해 주실 것을 기다리는 계절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불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되도록 복음을 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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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기다림’(눅 2:25-3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