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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죽은 사람의 부활’(요11:1~44, 고전 15장)
- 예수님 믿는 가장 큰 가치는 영원한 생명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영원한 생명은 부활의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 부활의 생명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베다니에 살던 병든 나사로가 위독해서 두 여동생은 예수님께 급히 사람을 보내어 도움을 청합니다. 빨리 오셔서 우리 오빠의 병을 고쳐주세요 예수님!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고 하십니다.(요 11:4) 그런데 예수님이 이틀을 지체하시는 바람에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죽을병이 아니라고 하셨는데 나사로가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틀린 것인가? 아닙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사로가 자고 있으니 가서 깨우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부활생명을 가진 사람의 죽음입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영원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처음에 생물학적인 생명을 받았습니다. 부활생명은 생물학적인 생명과 다릅니다. 그래서 죽음도 생물학적인 죽음과 진짜 죽음이 있습니다. 죽음은 완전한 끝이며 절망입니다. 죽음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진짜 죽음은 지옥입니다. 영원의 관점으로 보면 생물학적인 죽음은 다 끝난 것이 아니라 한 사건에 불과합니다. 변화를 지나 새로운 시작이 있고 더 큰 소망이 다가 옵니다. 영원의 관점에서는 죽음이 자는 것이며 깨울 수 있는 것입니다. (요11:11, 14) 그래서 나사로는 죽은 것이 아니고 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활생명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부활이고 생명이십니다. 부활생명은 생명의 근본이신 예수님 이십니다. (요11:25)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어서 부활생명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부활이고 생명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면 죽은 성도는 듣고 일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 11:43~44) 그리스도인은 이 사실을 믿고 소망합니다.(요 5:29) 사람들은 죽었던 나사로의 시체가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부활생명을 보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던 날 하나님의 생명이 육체와 분리되시면서 떨어져 나오실 때 그 부활생명의 에너지를 감당할 수 없었던 땅이 흔들리면서 바위가 터지고 그 주변일대의 무덤에서 자던 성도들의 육체가 나사로처럼 일어나서 성으로 걸어 들어왔던 역사적이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마 27:53) 마지막 날 부활생명을 받은 성도들이 그렇게 될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몸으로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그때는 어떤 몸입니까?(고전 15:35) 생물학적인 죽음은 몸과 영혼이 분리 되는 것입니다. 부활생명을 받은 영혼은 예수님이 부르실 때 까지 잡니다.(요 5:28) 그러면 몸은 어떤가요? 생물학적인 몸은 나흘이 지나면 썩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그 몸은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썩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하지 않을 썩을 것이 어떻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겠습니까? (고전 15:50) 못 들어 가는 게 당연하지요. 창조주의 창조원리는 모든 형체를 먼저 주신 게 아니라 종자(씨)를 주셔서 그 종자가 썩고 죽어야 형체가 나올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창1:11~12) 사람은 물리적인 몸을 종자로 받았습니다. 그 몸을 심으면 썩고 죽어서 다시 신령한 몸으로 납니다.(고전 15:43~44) 신령한 몸은 이 원리로 해서 만물이 순종하여 반응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변화됩니다.(빌 3:21) 하늘의 시민권자 들은 하늘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신령한 몸을 그렇게 받게 됩니다. 생물학적인 몸들이 종자가 되어 썩어서 죽고 신령한 몸들이 나올 때 비로소 죽음은 완전히 멸망한 사실이 확증됩니다. 더 이상 죽음과 죽음에 속한 일들이 우리를 괴롭히지 못할 것입니다.(계21:4) 성도는 죽음을 향해서 당당하게 소리쳐 따져 묻습니다.(고전 15:55) 죽음아 어디에 네 승리가 있느냐? 죽음아 네가 타겟으로 삼는 죄가 이제 어디 있느냐? 예수님의 십자가로 죄가 소멸되어 죽음을 이긴 그리스도의 승리를 받은 자들의 당당한 외침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 받아서 가지고 있는 영원한 부활생명입니다. 부활생명을 가진 성도가 이기지 못할 육체의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영원한 부활생명의 눈으로 보면 이 땅의 일이 아무리 커도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진짜 죽음은 절망이며 지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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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죽은 사람의 부활’(요11:1~44, 고전 1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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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시편 114편)
-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십니다. 이스라엘은 그분의 것입니다. 여호와는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에 임재 하십니다.(시114:2) 이스라엘은 여호와가 다스리는 그분의 나라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법을 가지고 있는 나라입니다. 이스라엘이 얼마나 탁월하며 거룩한 나라인지 이것만으로도 설명이 충분합니다. 왜 여호와의 백성이 이스라엘인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 중에서 자기 것으로 한 부류를 택하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모아서 자기 민족으로 만드신 것은 그분의 이루고자 하시는 뜻이 있습니다.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택하신 이스라엘을 그분의 이름을 걸고 지키십니다. 완전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특별한 보호를 받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어떤 보호를 받았는지 시편기자가 만방에 드러냅니다. 여호와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계획을 품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직접 데리고 가나안으로 나가십니다. 그 길에 홍해 바다의 물들이 자기 백성의 무리를 데리고 나오시는 여호와를 보았습니다. 주의 뜻이 이루어지는 현장의 기세에 눌려 그 물들이 주를 보고 두려워 깊음 속에서 진동하면서 도망갔습니다.(시114:3) 그곳에 모세의 지팡이만 보이고 주님의 발자취는 보이지 않았지만 누가 여호와의 권세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광야를 지나 가나안땅을 앞에 두고 요단강 앞에 섰을 때 요단의 물들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순종하면서 물러가서 한곳에 쌓여 섰습니다.(시114:3) 그곳에는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의 발자국만 보였지만 만물은 그곳에서 여호와의 발자취를 보았습니다. 그분이 행하시는 일을 보면서 산들은 뛰며 찬양합니다.(시 114:4) 왜 바다의 물들이 여호와 앞에서 도망하고 물러갑니까? 여호와의 뜻이 이루어 질 때 온 천지 만물은 그분을 경외함으로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함께 순종하여 협력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기적이라고 합니다. 여호와는 그분의 뜻을 이 땅위에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루십니다. 홍해에도 요단에도 물들이 도망가고 물러간 그 자리에는 사람의 발자국만 보였지만 땅은 여호와의 발자국을 보았습니다. 주님이 행하시는 그 일 앞에서 만물은 두려워 떨며 경배합니다.(시 114;7 광야에서는 반석도 이스라엘을 데리고 가시는 여호와를 보고 경외함으로 그 앞에서 물이 있는 못으로 변합니다.(시 114:8) 반석이 순종하여 물이 있는 연못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 한분 앞에서 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런 특별한 보호를 받으면서 여호와의 뜻이 이루어지는 현장의 중심에 주인공으로 서 있었습니다. 주인공 이스라엘을 중심에 두고 물들은 여호와께 순종함으로 기적을 일으키면서 합력하기도 하고 산들은 여호와를 찬양하면서 뛰놉니다. 이스라엘이 그분의 뜻을 이루고자 앞으로 나아갈 때 그 길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 때문에 실패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 계획이 실패했을까요? 그래서 이스라엘을 교회로 대치한 것인가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완전하신 성품을 볼 때 그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완전하시기 때문에 그분이 택하신 이스라엘은 결코 멸망하지도 버림받지도 않습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에게 실패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과 명철의 부르심으로 마지막 때에 교회를 자기 것으로 부르셔서 거룩하게 하셨습니다.(롬 11:33)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교회의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이 되셨습니다. 이제 교회는 이스라엘이 특별한 보호하심을 받았던 것 같은 보호와 인도하심을 받고 있습니다. 홍해와 요단의 물들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이스라엘을 위하여 합력했던 것처럼 만물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교회에 합력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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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시편 11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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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 1:1~14)
- 말씀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요1;4) 천지창조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면서 만물이 살아있는 생명으로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지혜와 지식과 명철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창공아래의 물에게 한곳에 모이라고 말씀 하시니 물이 한곳으로 모이면서 그 아래에 깔린 땅을 나오게 하신 것이 얼마나 기가 막힌 지혜입니까?(잠 3:19) 창조주 하나님은 지혜이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생명이십니다. 그분이 누구신가 요한이 추적해 보니 예수님이십니다.(요1:14) 창조주 하나님이 사람 사는 땅에 내려 오셔서 사람과 함께 계시면서 그들 속에서 사셨습니다. 세상의 어떤 신도 그렇게 한 신은 없습니다. 더구나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창조주께서 사람 사는 땅으로 왜 내려오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시기 위해서 내려오셨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스스로 존재하신 창조되지 않은 지존자이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육체를 입히시니 육체의 한계만큼 존재합니다. 육체의 눈으로 보니 영의 세계가 안보입니다. 보이는 육체의 마음과 육체로 생각하니 육체가 원하는 것을 하게 됩니다. 영이 운전하고 영이 제어 기능을 해야 하는데, 영혼의 작동이 멈추면 육체의 욕망은 제어가 안됩니다. 그야말로 죄인입니다. 죄인과 지존자의 진짜 사랑이 가능할까요? 사랑에서 나오는 친밀한 소통이 가능할까요? 하나님은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나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시기로 작정하셨고 그럴만한 능력이 있으십니다. 나를 책임 지려고 사랑을 위해서 치러야할 모든 대가를 치르시기 위해서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나의 모든 죄의 값을 치르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되어 올라갈 수 없으니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땅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창조주가 나를 찾아내려 작정하고 이 땅에 육신을 입고 내려 오셨는데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무엇을 못하시겠습니까? 산 넘고 물 건너 땅 끝 어느 구석에 처박혀 있는 나를 찾아내셔서 만나셨습니다.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다 만신창이가 되었더라도 창조주가 그렇게 내려오셔서 나를 찾아내서 손에 꼭 붙드셨으니 이제 된 것입니다. 창조주는 나를 절대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죽음을 뛰어넘으면서 그 사랑을 지키셨는데 사람은 그 사랑을 모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슬퍼하시는 것입니다. 목숨 걸고 지킨 사랑을 멸시하고 십자가의 창조주를 짓밟으면서 느낌 없이 다시 죄를 짓는 것에 분노하시는 것입니다, 연약해서 넘어질 수는 있지만 그때 마다 심판자 하나님 앞에 창조주의 피를 흘리신 십자가를 들고 회개를 다짐하면 창조주는 그 십자가를 기억하며 나를 용서하시고 새로운 마음을 주십니다. 그러니 이제는 내 죄 때문에 주님 앞에 가까이 못 간다는 말도 통하지 않습니다. 그 사랑이 너무 큰 빛으로 비추이니 짙은 어둠이 인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어둠이 조금씩 빛을 인지하면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내안의 모든 어둠의 일들이 물러갑니다. 내 마음이지만 내 맘대로 안되서 고통 받는 어둠의 일들이 있습니다. 해야 하는 건 알지만 움직이지 않아서 못하는 어둠의 결박들이 있습니다. 마음에 새겨진 문신처럼 지워지지 않는 어둠의 흔적들, 그 흔적들이 결박이 되어 묶여 버린 저주 받은 인생의 고통들....빛이 들어와야 어둠이 물러가면서 결박이 풀어집니다. 풀어져야 자유롭게 숨쉬고 삽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목숨 걸고 지킨 사랑 때문에 그분은 나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나는 그분의 사랑이 되었습니다. 이 사랑을 누가 끊을 수 있겠습니까? 요한은 다시 기록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일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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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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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창조의 빛’(요1:1~14)
-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1:1)”는 선포로 시작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생명이 있어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모든 만물은 생명으로 존재합니다.(요1:1~4) 태초는 흑암으로 깊은 공허와 어둠만이 존재하는 무의 상태였습니다. 흑암 속에 있는 수면위에 하나님의 영이 거닐고 계셨습니다. (창1:2) “빛이 있으라 (창1:3)” 말씀 하실 때 빛이 생명으로 흑암에 들어옵니다. 흑암이 빛을 인지하고 빛의 생명력에 눌려 흑암은 빛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빛과 어둠이 공존합니다. 빛을 낮이라 하시고 어둠을 밤이라 하시면서 저녁이 있고 아침이 있는 첫째 날이 생겨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면서 천지에 시간이라는 개념이 생겨납니다. 하나님은 흑암 속에 있는 수면에게 말씀하십니다. “물 가운데 창공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어라 (창1:6)” 창공을 사이에 두고 하늘위의 물과 하늘아래의 물로 나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면서 하늘이 생겨납니다. 하늘은 살아있습니다. 하나님은 창공 아래의 물에게 말씀하십니다. “물들은 한 장소로 모이고 마른 곳을 나타내어라 (창1:9)” 그 말씀이 이루어지면서 물들이 모인 곳을 바다라 하고 마른 곳을 땅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땅과 바다는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땅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안에 있는 씨에서 그 종류대로 풀과 채소와 열매를 내어라 (창1:11)” 살아있는 땅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각종 씨에서 종류대로 충실하게 열매를 내었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만물은 창조주의 말씀을 알아듣습니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창조의 순리대로 이루어지는 자연의 원리로 작동하면서 유지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창조하신 만물들이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서로 소통하면서 함께 연합하여 자연의 원리가 이루어졌습니다. 원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모든 만물은 축복을 누립니다. 인생은 땅과 우주와 더불어 창조주의 말씀에 순종으로 함께 연합하는데 이중에 하나라도 불순종하면서 궤도에서 이탈하면 모두 함께 부서집니다. 모든 만물은 창조주의 말씀의 순종함으로 이루어지는 이 연합 밖에서는 다 파멸입니다.이것이 순리입니다. 인생도 순리대로 흘러갑니다. 순리대로 이루어지는 우주에 불법의 어둠이 들어왔습니다. 마귀입니다. 불법이 들어와 불순종으로 순리가 깨어지면서 천지가 여기저기서 부서지기 시작합니다. 불법은 망하고 멸망하게 하여 고통을 주다가 결국은 죽음이 끝입니다. 그래서 불법으로 순리가 깨어진 인생은 고통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나하나 성실하고 열심히 잘산다고 다 잘 되는 게 아닙니다. 어둠이 들어와서 사람사이의 연합과 질서가 있는 원리가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돈 벌었더니 가난한 부모형제의 빚으로 다 날려서 망하고, 치매 부모 모시느라 평생을 독신으로 살고, 부부가 둘이 두면 잘 살 텐데 시댁, 친정 등등 온갖 침입자들이 들어와서 가정을 깨어놓고, 착한 자녀가 악한 자들에게 고통당하면서 가족이 다 망가지고.... 착하고 성실하게 내열심만 가지고 살아도 맘대로 안되는 게 인생이 되어버렸습니다. 어둠이 들어와 순리가 깨어져 역행해서 고통뿐인 인생입니다. 어둠이 물러가야 합니다. 빛이 들어와야 어둠이 물러갑니다. 태초에 “빛이 있으라”는 말씀선포의 시작으로 만물은 생명이 꿈틀거리면서 하나씩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천지는 창조되어 모든 만물은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 말씀 안에 있는 생명의 근본이 사람들의 빛입니다. (요1:4) 그 빛이 어둠에 비추어야 합니다. 어둠은 빛이 비추일 때 물러갑니다. 빛이 비추어서 어둠의 일들이 인생에서 물러가야 합니다. 오직 생명의 빛 이어야만 합니다. 주님, 빛으로 오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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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창조의 빛’(요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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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천국은...’(마 25;14~30)
- 천국은 어떤 곳일까? 막연하게 상상은 할 수 있지만 직접 눈으로 본 것도 아니고 가본 것도 아니기 때문에 느끼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비유로 말씀 하셨습니다. 비유를 깨닫는 만큼 천국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천국이란,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외국으로 떠나면서 자기 종들을 불러 자기 돈을 맡기는 것과 같다고 하십니다. (마 25:1, 14) 주인이 집을 비워도 종은 계속해서 주인을 위해서 일을 해야 합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자기의 비즈니스를 맡기고 떠납니다. 그래서 자기 돈을 종들에게 맡겼는데 각 사람 에게 모두 똑같은 액수를 맡긴 게 아니라, 종의 재능대로 1억, 1000만원, 100만원..을 맡겼습니다. 주인의 공평한 계산입니다. 종들은 자기가 받을 만큼 잘 받았습니다. 종들이 재능대로 받은 것은 자기가 주인이 아니고 맡긴 분이 주인입니다. 왜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인지 말씀대로 이유가 분명합니다. (마25:14~15) 자기 돈을 맡기고 떠나는 주인이 종들에게 원하는 것은 단 한가지입니다. 자기가 맡긴 돈을 불려서 이익을 남기는 것입니다. 그것을 목적으로 종들에게 돈을 맡긴 것 아니겠습니까? 주인이 원하는 것은 종들이 많은 이익을 남기는 것입니다. 착한 종은 주인이 집을 비운 사이에도 변함없이 주인을 위해 열심히 일합니다. 주인이 종에게 구하는 것은 충성입니다. (고전 4:2) 충성은 성실함이 있어야 나옵니다. 성실함이란 지금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 내게 맡겨진 일을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못하면 더 큰 것을 맡아도 못합니다. (마25:21) 성실함이 대상이 있을 때 충성이 됩니다. 교회를 섬기면서 많은 사람들을 대하다 보니 잘 되는 사람과 안 되는 사람은 성실함과 충성으로 구별이 됩니다. 성실함이 있는 사람은 충성도 같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믿음생활이나 직장에서나 무슨 일을 해도 다 잘합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성경의 원리이며 심은 것의 결과는 거짓이 없이 정확하게 받습니다. 성실함과 충성이 없다면 탁월한 재능과 능력도 별 의미가 없습니다. 충성이 있어야 재능과 능력이 이익을 남깁니다. 주인은 재능과 능력을 보고 사명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충성된 사람에게 맡깁니다.(딤전 1:12) 드디어 주인이 돌아오셨습니다. 주인의 돈을 맡은 종들은 모두 주인 앞으로 나와 그동안 자기가 남긴 이익의 결산을 보고합니다. “주인님, 제가 주인님께 10억을 받았지요, 보세요, 그 돈으로 열심히 장사를 해서 10억을 남겼습니다.” 주인은 기뻐하면서 말씀하십니다.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했으니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길 수 있겠구나,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거라” 결산의 날 주인께 받은 돈으로 이익을 남긴 종들에게는 칭찬도 받고 승진도 하는 기쁨과 흥분의 자리였지만 그렇지 않은 종도 있었습니다. “주인님, 당신은 심지도 않은데서 거두고 뿌리지도 않은 곳에서 모으는 분이 아니셨던가요? 제가 받은 게 뭐가 있다고 달라고 하십니까? 여기 당신의 원금만 그대로 돌려드립니다. (마 25:24~25)“ 주인의 것을 받고도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종에게 주인은 ‘악하다’ 라고 하십니다. 그 결산의 결과는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쫒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마25:30)” 불타는 지옥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고 천국일까요? 바깥 어두운 데가 어딘지는 잘 모르겠지만 천국문 안으로 들어간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은 불신자에게 하는 게 아니라 더 심각합니다. 달란트의 비유는 예수님이 천국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서 충성 하면서 살았던 삶의 열매가 천국을 결정하는 것에 포함된다는 말씀이 엄중하게 다가옵니다. 오늘 내가 사는 하루는 계속 결산 되고 있습니다. 인생은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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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천국은...’(마 25;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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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죄인 여자’(요8:1~11)
-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가 예수님의 발 앞에 끌려 나와서 내던져 졌습니다. 증거는 현장에서 걸렸으니 충분합니다. 법대로 하면 죽여도 되는 여자입니다. 법은 증거만 확실하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응해서 정확하게 갚아야 하기 때문에 죄인에게 베풀 자비가 없습니다. 법대로 죽을 일을 한 이 죄인여자에게 긍휼과 자비를 강연하던 예수님은 뭐라고 하실까... “이 여자를 어떻게 할까요?” 예수님은 현장에서 잡혀 끌려온 죄인 여자를 바라보십니다. 수치감과 죄책감과 두려움으로 벌벌 떨고 있는 죄인여자는 끌려오느라 헝클어진 머리와 찢긴 옷 사이로 잡아 뜯겨진 살점들에서 스며나오는 피와 눈물이 먼지와 뒤범벅이 되어 처참한 몰골입니다. 그야말로 죄인의 참혹한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눈길을 돌려 둘러선 무리들을 바라보십니다. 죄인을 심판하는 자리에 있으니 의롭다고 착각하면서, 명백한 증거로 잡힌 죄인을 살기등등하게 노려보는 심판자의 모습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이것이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의 선포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의 죄가 낱낱이 보여 지니 자기도 죄인이라는 사실을 거부할 수가 없는 사람들은 슬그머니 하나씩 하나씩 그 불편한 자리를 피합니다. 양심이 법을 능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현장입니다. 결국 그 자리에는 다 가고 예수님과 그 가운데 있던 죄인여자 둘만 남았습니다. 죄인여자는 자기 앞에 계시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아직 모릅니다. 예수님이 누군지도 모르고 모르는 그분을 만나려고 애쓴 것도 아닙니다. 자기가 원해서 온 것도 아닙니다. 그냥 죄짓다 끌려온 것입니다. 간음죄로 비참하게 멸시받는 처참한 자리에서 죽기 직전에 죽음 앞에서 만난 분입니다. 죄인여자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뭔가를 잘한 것이 아닙니다. 잘할 힘도 없습니다. 오직 긍휼함 하나만을 바라는 죄인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죽을 길 밖에는 없어서 예수님이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곳은 높고 존귀한 자리가 아니라 내가 죄인인 것이 명백하게 드러난 자리입니다. “사람도 네 죄를 정죄하지 않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요 8:10~11)” 자기가 죄를 지은 것이 명백한데 자기의 죄를 비판하면서 따져 묻지 않고 죄를 단정하지 않겠다고 하시는 이분은 누구십니까?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8:12)” 생명의 빛을 만난 여자는 그분이 심판주 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심판주가 죄의 종결을 선언하셨습니다. 죄인여자의 죄를 심판주가 용서하시는 것으로 그 죄가 종결되어 다 끝났습니다. 죄는 정말로 용서받았습니다. 죄가 드러나는 자리에는 하나님의 용서가 있습니다. 용서에는 댓가를 치르는 보상이 있어야 합니다. 심판주께서는 자기가 친히 십자가에서 간음한 여인이 돌을 맞아 죽어야 할 죽음을 대신 당하시고 댓가를 치르심으로 그 사실을 근거로 합법적으로 용서하신 것입니다. 심판주의 이유가 있는 용서입니다. 그 용서는 나를 사랑해서 대신 죽어주신 지극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주님 이십니다. 죄인여자는 죄가 아니면 예수님과 관계없는 사람입니다. 죄인여자는 죄 때문에 예수님과 관계가 맺어졌습니다. 그 관계 안에서 간음한 죄인여자가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요 8:11)” 이제는 더 이상 간음한 죄인여자로 살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존재대로, 거룩한 사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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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죄인 여자’(요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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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나사로 이야기’(요 11:37~44)
- 베다니에 나사로라는 병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나사로에게는 두 여동생이 있었는데 우리도 잘 아는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입니다. 그중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던 그 유명한 여인입니다. 어느 날 나사로가 병이 위독해 져서 죽을 것 같습니다. 두 여동생은 예수님께 급히 사람을 보내서 도움을 청했습니다. 빨리 오셔서 오빠가 죽기 전에 병을 고쳐 달라는 내용이었겠지요, 절박합니다. 두 자매는 예수님이 모든 병자들을 다 고치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오빠의 병을 고치시면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틀을 지체하시는 바람에 결국 나사로가 죽고 말았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 (요 11:21, 32)” 병을 고치시는 예수님이 죽은 사람도 살리실 것이라고는 믿지 못했습니다. 죽기 전에 오셔서 막아 주셨어야지 이제 오빠가 죽었으니 예수님이 오셨어도 이제는 다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같은 마음입니다. 죽은 지 나흘이 지나서 시체에 썩은 냄새가 나는데 다시 살 수 있는 것은 불가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네 오빠가 다시 살아나리라” 예수님이 말씀하셨지만 마르다는 그 말씀을 마지막 날 부활 때 다시 살 걸 로 알아들었습니다. (요 11:2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요 11:25~26)” 죽어도 살고 살아서는 영원히 죽지 않는 부활생명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의 무덤 앞으로 가셨습니다. 무덤 앞에 입구를 막은 돌을 치우라. “죽은 지 나흘이 되어서 벌써 썩은 냄새가 납니다.” 설마 저 시체가 걸어 나오기라도 할까요?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요 11:40)” 예수님은 무덤 바깥쪽에서 큰 소리로 나사로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그때 도저히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 일어납니다. 죽은 시체였던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묶인 채 얼굴까지 꽁꽁 싸놓은 상태로 무덤 문에서 성큼성큼 걸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에게 믿게 하시려는 증거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요 11:42) 부활 생명입니다. 부활이고 생명이신 예수님이 이름을 부를 때 그 음성을 듣고 죽었던 육체까지 일으켜집니다. 부활의 생명이 육체까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부활생명을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는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마지막날 다시 사는 사람은 오늘 여기서 부터 삽니다. 부활의 생명은 지금 여기서 부터 일어나는 현재의 생명입니다. 그 생명의 능력은 죽은 몸까지 일으킬 만한 에너지가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생명의 힘이 보이는 물리적인 힘까지로 이어집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면 그의 죽었던 육체의 삶도 살아납니다. 다 죽은 썩은 시체 같은 소망 없는 인생이 생명의 삶으로 변화됩니다. 부활이고 생명이신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살았고 그 앞에서 어둠이 물러갔습니다. 부활생명 이신 예수님 앞에서 어둠이 물러갈 때 어두움에 속한 모든 일들도 함께 물러갔습니다. 다 죽어서 시체 같은 가망 없는 삶이 생명의 삶으로 살아납니다. 할렐루야! 왜 이런 불치병이 걸렸는지, 장애가 왔는지, 망했는지, 깨졌는지... 부활생명이신 예수님을 받은 사람에게는 그런 것들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 앞에서 어둠의 일들이 스스로 물러갑니다. 저는 부활생명 앞에서 해결 받지 못할 인생 문제는 없는 것을 믿습니다. 교회는 그 생명을 받았습니다. 부활생명이신 예수님, 내게 오셔서 이곳에 임재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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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나사로 이야기’(요 11:3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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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한’을 품은 기도’(삼상 1:1~11)
- 에브라임에 사는 엘가나 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엘가나는 성품도 좋고 재력도 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좋은 사람입니다. 엘가나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습니다. 두 아내 중 브닌나에게는 자식들이 있었고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브닌나는 자식이 있다는 우월함으로 자식 없는 한나의 상처를 건드리면서 고통을 주었습니다. 한나는 적이 된 브닌나 때문에 심하게 격분하고 괴로웠습니다. 마음이 힘들면 그 마음이 고통에 묶이게 됩니다. 남편의 지극한 사랑, 맛있는 음식들과 충분한 재물들이 있어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받은 축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원인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삼상 1:6)” 하나님이 주시지 않아서 생긴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태를 열어주셔야 문제가 해결됩니다. 인생문제는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한나에게는 두 갈래 선택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안주셨으니 하나님을 원망할 것인가? 주실 수 있는 하나님께 구할 것인가? 한나는 마음에 심한 격분과 괴로움으로 한을 품고 일어났습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삼상 1:10)” 마음에 한을 품고 기도로 통곡하면서 토해 냅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풀어질 수 없는 문제를 하나님 앞에 놓고 해결 하려는 것입니다. 한을 품은 기도는 아무나 할 수 없는 결단을 하게 만듭니다. 아들을 주셔서 원을 풀어 주시면 그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것입니다.(삼상 1:11절) 한나의 태의 문을 닫으신 하나님은 이 기도가 나오기를 원하셨을 지도 모릅니다. 이 기도가 확실히 응답될 것을 믿으니 일상에 평안이 찾아왔습니다.(삼상 1:18) 여전히 적수 브닌나는 가까이 있지만 그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한나의 한을 품은 기도에 하나님은 응답하셔서 사무엘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으셨으니 나도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겠다’는 결단을 실행한 것입니다. (삼상 1:27~28) 사무엘이 젖을 떼자 엘리 제사장에게로 데려갔습니다. 자기의 생명 같은 아직 어린 아들을 남겨 두고 혼자 내려오면서 피눈물을 흘렸을 아이 어머니의 마음이 전해져서 울컥합니다. 하나님 믿고 섬기는 것을 쉽게 생각할 게 아닙니다. 믿음의 선진들과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들은 그들이 탁월하고 잘나서 쓰임 받은 게 아닙니다. 이런 피눈물을 흘리면서 은혜에 반응할 줄 아는 신실한 마음을 쓰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능력을 쓰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마음을 쓰십니다. 한나는 사무엘을 받으면서 아들을 주신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우해 드렸습니다. 사람과의 약속도 중요하게 지키는데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길 수 없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겠다는 신실한 한나의 결단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졌습니다. 한나는 이제 갓 젖 뗀 어린 아들을 떼어서 엘리의 손에 맡겨 두고 피맺힌 마음으로 혼자 집에 돌아와서 평생 사무엘을 위해서 한을 품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약속한 것을 지키기 위해 이를 악물고 아들을 드린 한나의 신실한 마음을 하나님이 쓰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져서 가장 어두운 시대에 미스바에서 성회를 열어 온 민족이 함께 회개하고, 전국을 두루 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한 시대를 살린 위대한 사무엘을 내었습니다. 엘가나 가정의 이름 없는 한 여인의 신실한 결단이 조국 이스라엘을 살렸습니다. 하나님이 한나의 태를 닫아 아들을 주시지 않았지만, 한나는 마침내 사무엘을 받았습니다. 한을 품은 기도는 분명히 응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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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한’을 품은 기도’(삼상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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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하나님이 뽑은 사람들’(고전 1:24~31)
- 세상에서는 사람을 뽑을 때 소위 잘난 사람을 뽑습니다. 지혜와 지식이 있고 권력 있고 집안 좋은 사람을 선호합니다. 강하고 자신감 있는 사람을 뽑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뽑는 사람은 좀 다릅니다. 하나님이 뽑는 사람은 약하고 비천하고 멸시받고 자신감 없는 사람이 많습니다.(고전 1:26) 이런 선택은 세상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탁월한 지혜입니다.(고전 1:25)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런 사람들을 뽑으실까요?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9)” 자랑할게 많은 인생은 우월하고 자랑 할 게 없는 인생은 열등감으로 위축되지만 이것은 상대적입니다. 이렇게 뽑으시는 하나님 앞에 오면 우월감도 없고 열등감도 없습니다. 자기 것으로는 자랑할 게 없는 육체, 이것이 진리입니다. 사람의 것으로는 자랑할 게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으로 부터 나온 다는 것을 아는 게 축복입니다. 전능자는 온 우주만물을 뛰어넘는 창조주 하나님의 탁월하심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 그 자체로만 인정하면 그분의 존재는 뛰어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그렇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무시하는 것입니다. 자기 수준의 눈높이로 밖에는 이해 할 수 없는 인생의 한계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니 하나님을 의지 할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내 힘으로 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해서 자기 열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나보다 못한 존재로 무시하고 마음에서는 버려 버리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실은 수많은 인생문제들은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나보다 좀 더 힘이 센 사람이 도우면 되려나, 생각하지만 그것도 착각입니다. 인간관계, 돈 문제, 건강문제, 죽음의 문제 .... 막상 닥치면 사람 중에는 해결할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자랑 할 것이 없는 인생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렘 9:23~24)” 하나님은 자랑 할게 없는 인생들을 위해서 예수님을 우리의 자랑으로 주셨습니다. (고전 1:30) 자랑 하는 사람은 주 안에서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고전 1:31)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이 너무 낮추어 나에게 오시니 저런 분이 하나님일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전능자가 나를 대신 해서 죽으실 리가 없다고 합니다. 죽으신 예수님이 부활로 하나님이신 것을 증거 하셨는데도 못 믿습니다. 무당이 신을 받는 것은 믿으면서 내안에 임재하신 하나님의 신은 못 믿는 것입니다. 자기 수준만큼 밖에는 볼 수 없는 인생의 한계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그분이 내안에 들어오시면 회복되지 못할 육체가 없습니다. 죽은지 나흘 되어 시체가 다 썩은 나사로가 무덤에서 걸어 나오면서 그것을 증명했습니다. 다 썩어서 냄새나는 가망 없는 시체인생, 그 분 앞에서 얼마나 만신창이로 무너졌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이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질서가 잡히면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온 세상을 향하여 자기 것으로 자랑하는 육체들에게 모든 것을 능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탁월하심을 나타낼 때 피조 세계는 질서가 회복됩니다. 이 질서 안에서 진정한 예배가 드려집니다. 그때 인생문제의 질서도 회복되어 그 안에서 풀어집니다. 하나님이 약하고 없는 사람을 뽑으신 것은 그분의 지혜입니다. 육체로는 아무것도 건질게 없는 인생을 써서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십니다. 저의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저의 가장 약한 그 때 하나님이 비로소 전능자로 바로 보였습니다. 그분을 나의 하나님, 나의 주인으로 대우해 드리니 내 삶에서 하나님으로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무능하지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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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하나님이 뽑은 사람들’(고전 1:2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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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영생과 영원한 불’(눅 16:19~31)
- 예수님을 처음 믿기 시작했을 때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는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세상성공을 목적으로 하던 저는 부자의 대문 앞에 늘어지게 누워서 그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얻어먹고 사는 거지 나사로가 한심했습니다. ‘왜 한번 사는 인생을 나사로는 저렇게 살까?’ 그런데 반전입니다. 둘 다 죽었는데 한심한 거지 나사로는 천국에 갔고 매력 있는 부자는 음부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믿는 것이 이런 것인가? 그때 더 충격적인 말씀이 또 있었습니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 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 보다 나으니라(마 18:8)” 영생에 못 들어가는 것 보다는 불구가 되는 게 더 낫다니... 도대체 영생이 무엇이고 영원한 불이 무엇이길래 불구와 바꿀 수 있는 가치가 있는가? 저는 고민하다가 본문에서 진리를 찾고, 세상성공을 좇던 길에서 돌아서 목회의 길로 인생의 진로를 바꾸었습니다. 본문에서 첫째, 천국과 지옥은 분명히 있고 그곳은 ‘영원한 곳’이라는 것입니다. 그곳이 ‘영원한 곳’이라면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영원하지 않은 곳’이며 둘은 함께 이어져 있었습니다. 영원한 그곳, 천국과 지옥에는 누가 들어가는가?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눅 16:24)” 지옥에 간 부자는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는 둘 다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면 천국과 지옥으로 나눠지는 기준은 무엇인가? “너는 살았을 때 너의 좋은 것을 받았고 거지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다.. (눅 16:25)” 살았을 때 좋은 것을 받은 사람은 자기의 육체의 좋은 것을 받아 누리면서 육체를 위해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육체가 다 무너져 버리면서 가난하고 병들고 버림받은 거지 나사로는 고난 받으면서 살다가 자기의 영혼을 보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육체에서는 아무것도 건질 게 없었으니 눈을 돌려 영혼을 위해 살았겠지요, 그렇다면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어 지는 기준은 이 땅 에서 살면서 ‘육체를 위한 삶’인가, ‘영혼을 위한 삶’인가로 나누어집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8)” 예수님 믿고도 계속해서 나의 육체를 위하여 사는 삶은 이렇게 말이 안되는 불일치입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예수님 믿는 것은 그 삶이 ‘무엇을 위해 사는 가’로 증명됩니다. 부자는 영원하지 않은 세상에서 자기의 육체를 위해서 잘 살아서 육체의 좋은 것들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아도 영원한 세상과 이어지지 않으면 결국 다 헛된 것들이었습니다. 부자가 이 세상에서 살았던 인생의 시간들은 하나님 앞에 서니 아무것도 남길 게 없는 삶이었습니다.(고전 3:12~15) 헛된 인생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헛된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심판 받게 됩니다.(마 25:30) 우리가 이 땅 에서 살아온 시간들은 내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분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았는가 아닌가를 스스로 증명합니다. 그리고 그 증명된 시간들로 심판 받게 됩니다. 진리는 결코 허술하지 않습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퍼즐을 맞추듯이 들어맞아서 반박할 수 없는 명확한 논리로 주장 합니다. 이 진리가 드러났습니다. 영원하지 않은 이 세상에서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좋은 것은 죽음을 생각하고 영생의 가치를 깨닫고 그 가치를 향하여 사는 시간 들입니다. 그러면 예수님 믿고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가 답이 나옵니다. ‘나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삶!’ 저는 그렇게도 동의하기 어려웠던 말씀이 진리로 강력하게 드러나니 거부할 수가 없었습니다. 진리의 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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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영생과 영원한 불’(눅 16:19~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