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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데일리 기도] 진병하 목사의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기도’
- 하나님께 모든 영광 돌립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합니다. 구원의 확신과 사죄의 은총과 내세의 소망으로 사역에 집중합니다. 하나님의 웨이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심을 감사드립니다. 웨이크에 속한 모든 교회를 통한 구원의 역사가 성취되길 소망합니다. 인간의 욕심과 죄악과 죄책으로 인한 범죄를 용서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세계적으로 감염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치유되고 회복되길 소망합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치료되고 강건해지는 은혜를 갈망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지구촌에 사는 백성에게 임하사 전인치료의 축복을 누릴 수 있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시길 기도합니다. 나를 쳐서 주께 온전한 순종과 완벽한 항복으로 언약이 회복되어 치유되길 소망합니다. 주께서 풍성한 사랑과 긍휼하심과 성령의 은총으로 치유와 회복을 갈망합니다. 치료의 주님을 찬양 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중보기도와 헌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를 통해 고침 받기를 원합니다. 믿음에 따른 치료의 기적을 허락하심을 감사합니다. 77억 인구에 대한 구속과 대속과 속죄함의 비밀을 누릴 수 있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시길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형상회복과 만민의 구원을 위해 기도합니다. 교회와 사역자들의 헌신과 간절한 믿음의 기도를 통해 선교적인 가치와 치료의 역사를 누릴 수 있도록 하소서. 성령께서 인도하시고 역사하실 때에 한국교회를 통한 구속의 비밀과 치료 및 회복의 은총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특별한 사랑이 대한민국과 지구촌에 흐르게 하소서. 성령의 감동과 능력과 역사로 인해 주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치료의 손길을 허락하소서. 모든 영광 주께 돌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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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데일리 기도] 진병하 목사의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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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복(福)’(신 28:1~6)
- 사람들은 누구나 복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복을 받고 싶어합니다. ‘복’ 듣기만 해도 좋은 단어입니다. 어떻게 하며 복을 받을 수 있는가? 복을 받을 곳을 찾아 다닙니다. 사람들은 복을 받으면 잘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상은 복과 성공하는 것을 동일한 의미로 생각하면서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는 가를 연구하고 가르칩니다. 돈, 능력, 외모, 습관, 가치관.... 성공하는 사람들만의 공통점을 찾아서 잘살기 위한 도구라면 무엇이든지 다 출동시켜서 복을 연구합니다. 복이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요? 성경은 복 받는 방법을 아주 정확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신 28;2)”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면 따라오는 게 복이라고 하십니다. 그 복은 어떤 복일까요? 그 복은 장소에 관계없이 복있는 사람에게 저절로 옵니다.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으니 복이 어디에 있는 지를 수소문해서 복이 있는 곳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복이 있는 사람이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복이 나옵니다. 복은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 관계되는 모든 것들이 그가 받은 복을 다 같이 받고 함께 누리게 됩니다. 자녀와 일터와 그가 수고한 것들이 복을 받게 됩니다.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으니 그가 복 그 자체인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복의 근원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니 교회는 복 자체인 것을 믿으십니까? 더 나아가 세상에서 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오직 그리스도인 인 것을 아십니까? 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한 것의 결과로 오는 것인데 오직 교회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복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얻는 것인데 (창 22;18)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복은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게 확실합니다. 그것을 믿고 받은 복을 누리는 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복입니다. 예수님은 진리이시며 그 이름이 충신과 진실이십니다.(계 19:11) 복은 진리 안에서 세워집니다. 충성과 진실된 마음에 복이 임합니다. 세상은 거기에 복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복을 찾으러 이리저리 헤메고 다닙니다. 복은 진리가 세워지는 그 안에 오는 것인데 복 인줄 알고 복처럼 보이는 것을 따라다니다 진짜 복을 놓칩니다. 그러니 눈치 보고 머리를 쓰는 것보다 차라리 미련스럽고 묵묵하게 진리 따라 가는게 빠릅니다. 복을 쫓으며 눈치를 보면서 살면 진실한 마음이 없어집니다. 자기를 시시각각 바꾸다 보니 오래 살다보면 진실이 이중적으로 변합니다. 진실이 없으니 진리에 충성할 수 있는 마음도 없지요, 복은 가지고 있지만 복을 받아서 누릴 수 있는 그릇이 점점 작아집니다. 가진 것이 있으나 없으나 풍족하고 넘치며, 어디서나 동일 하게 내가 있는 곳이 다 천국이며, 만나는 사람마다 나의 것으로 나누면서 더 충만하게 되는 삶! 넘치고 흘러서 계산으로는 안 나오는 것이 복입니다. 복을 소망하면서 복이 되신 예수님과 함께 따라 걷다가 이미 받은 복을 취하여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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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복(福)’(신 2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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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아름다운 눈’
- “사울과 요나단이 생전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러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떠나지 아니하였도다. 저희는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하였도다.”(삼하1:23) 위 내용은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쓴 애가 가운데 한 구절입니다. 다윗이 요나단을 아름답게 본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나단의 다윗에 대한 사랑은 우정의 진수를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를 죽이기 위하여 특별히 뽑은 3000명의 용사까지 동원하여 온 이스라엘을 수색하였던 사울까지 아름답게 본 것은 보통 사람으로는 볼 수 없는 눈입니다. 사울보다 사울을 그렇게 본 다윗의 눈이 아름답습니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심한 화상을 입고 몸과 얼굴이 망가졌던 주바라기 이지선 자매의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차츰 회복하고 있을 때, 오빠와 찍은 자신의 사진을 홈페이지에 올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저는 솔직히 지선씨가 여전히 징그럽고 무섭고 혐오스러워요"라고 댓글을 달았다고 합니다. 자신이 볼 때는 귀엽다고 생각되고 자꾸 보면 정들 수 있는 얼굴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던 차에 나온 글이어서 ‘현실은 여전히 이렇구나.’ 라고 생각하며 적지 않게 실망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신 말씀은 "너의 눈이 그 사람의 눈과 같지 않다는 것에 감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댓글을 단 그 사람의 눈 같았다면 아마 하루도 살 수 없었을지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아무 죄 없는 자신을 죽이려 했던 사울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전에 아름답게 보았습니다. 그가 사울을 아름답게 본 것은 사울의 많은 단점과 흠점을 본 것이 아니라 좋은 점을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첫째는 그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었다는 점에서 좋게 보았을 것입니다. 둘째는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한 모습일 것입니다. 셋째는 갓 시골 목동에 불과하였던 자신을 왕의 측근에서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에 대하여 감사하였을 것입니다. 넷째는 그가 골리앗과 싸우러 갈 때 자신의 옷을 벗어 다윗에게 입혔던 것에 대하여 감사하였을 것입니다. 비록 다윗은 그 옷이 불편하여 벗고 말았지만, 왕이 입는 옷은 왕만 입을 수 있었을 터인데 자신의 옷을 벗어 주었다는 것은 그만큼 다윗에 대하여 호감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기 때문입니다. 이 외에도 많이 있겠지만 이상은 우리가 쉽게 찾아볼수 있는 것들입니다. 누가복음 11장 34절에는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라고 나와 있습니다. 사람의 분별력이 그 사람의 앞길을 좌우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바로 판단하고 바로 분별해야 합니다. 무조건 좋게 봐서도 안 될 것이며 무조건 나쁘게 보아서도 안 될 것입니다. 사실 그대로,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고 분별하되 대하는 일에 있어서는 사랑으로 대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우리 모습대로 평가하지 않고, 사랑의 눈으로 대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은 분별력을 가질 수 있습니까? 신앙인들의 분별은 믿지 않는 사람들의 그것과 달라야 합니다. 신앙인들의 분별이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면 그것은 영은 새로워졌지만 마음은 아직 새로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새로워지면 이 전에 부, 명예, 사치, 유행을 추구하고 세대 본받고 살았던 일 등이 부끄러워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마음을 바꿀 수 있습니까? 거듭난 사람들이 마음까지 새로워지려면 몸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롬12:1). 드린다는 것은 목회의 길로 가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인 순종, 온전한 순종을 의미합니다(롬6:16). “평생 제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하는 서원을 의미합니다. 몸 드릴 때 비로소 마음이 새로워지고, 변하여 새사람이 되며, 올바른 분별을 할 수 있습니다(롬12:2). 분별력이 우리의 운명을 좌우합니다. 야곱과 에서의 삶, 룻과 오르바의 삶, 여호수아와 갈렙과, 다른 열 족장들의 삶이 그들의 분별력의 결과입니다. 부언하지만 신앙인들의 올바른 분별은 몸 드리는 일, 곧 온전한 순종에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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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아름다운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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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데일리 기도] 오필환 목사의 ‘국가와 민족의 치유와 회복을 위한 기도’
- 창조주 하나님,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어 하나님을 바라보는 우리를 위기 가운데서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니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는 인류가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전 세계의 수 백 만 명의 많은 사람이 질병을 앓고 있으며, 수 십 만 명이 코로나로 인하여 생명을 잃고 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불안과 공포 속에 머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이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통제하고 계신 것으로 믿습니다. 하나님, 인류의 교만으로 인한 우상숭배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며 배척하는 모든 행위를 회개하게 하여 주시고, 물질문명으로 인한 타락과, 쾌락주의로 빠진 나의 죄악과 인류의 죄악을 막지 못한 우리의 죄악을 회개하오니 용서하여 주시고, 이 바이러스를 거두어 주시어 질병의 불안과 공포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심판자 되신 주님, 아직도 이교도들과 공산국가에선 자신들의 권력유지를 위하여 전쟁을 준비하며, 주님의 자녀들을 탄압하며 교회를 허물고 추방하고 있으며, 자유주의 국가에서는 인권과 자유란 이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소돔과 고모라의 타락한 모습을 정당화 하려고 하고 있으며, 권력과 물질에 눈이 멀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는 거짓 선지자들이 난무하고, 이단사설로 주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자리를 가로채어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무리들이 세상을 현혹하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존엄하심과 그 사랑을 우리 모든 인류가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특별히 한국의 교회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영화와 부귀를 채우는 자들을 몰아내 주시옵고, 이 지구상에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모든 사람들을 몰아내 주시며, 주님이 전하여 주신 복음이 땅 끝까지 이르러 온 인류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모든 인류를 이 바이러스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여 주시고 구원하여 주시며, 특별히 코로나를 치유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걸고, 맡은 사명을 위하여 일선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의사들과 간호사들, 그리고 병원, 방역 관계자들을 지켜 주시고, 그들에게 건강과 용기를 더하여 주시어서 하나님의 사랑이 전파되는 귀한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기에 세계의 교회들은, 외롭고 어려운 상황에서 어찌 할 바를 모르는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게 하여 주시고, 맘모니즘과 이기주의에 병든 교회가 치유되는 기회가 되게 하여 주시고, 무엇보다 목회자들이 기복주의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현혹하는 삯군 목자가 아닌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양들을 먹이고 인도하는 참된 목자가 되게 하여 주시고, 우리 신앙인들은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자가 아니라 말씀으로 무장하고 주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주님에게 받은 사랑을 이웃에 전하는 참된 주님의 제자되는 귀한 기회로 삼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계적으로 온 인류가 우리의 죄악된 것들을 회개하고, 새로운 기회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영적 각성이 일어나는 기회로 삼아 주시고,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며 우리 인류를 사랑하시는 것을 굳게 믿고 불안과 공포로부터 벗어나서 담대하게 하나님 사랑을 전하는 우리 모두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인류의 어려움 가운데 기도하는 자녀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실 줄을 믿으며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이름을 받들어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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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데일리 기도] 오필환 목사의 ‘국가와 민족의 치유와 회복을 위한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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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소통하는 기도’(삼상 1:9~18)
- 에브라임 산지에 엘가나 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두명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한나과 브닌나입니다. 아내의 자리는 하나인데 거기에 둘이 들어가 있으니, 경쟁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경쟁은 시기와 다툼을 낳고 그로 인하여 미워하며 대적이 됩니다. 게다가 브닌나는 자식이 있지만 한나는 자식이 없고, 엘가나는 한나를 더 사랑합니다. 불행할 수 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엘가나는 매년 온 가족을 데리고 성소에 예배하러 갑니다. 그때 하나님께 받은 은혜대로 헌물을 드리며 온 가족에게 한몫씩 떼어서 챙겨주는 데 한나에게는 두배를 주었습니다. 율법대로 한다면 자식이 있는 브닌나의 아들을 장자로 인정해서 두배로 주어야 하는 게 맞습니다. (신 21:15~17) 법대로 하면 브닌나는 마땅히 자기가 받아야 하는 것을 한나에게 빼앗겼다는 부당함으로 억울합니다. 남편에 대한 분노를 고스란히 한나에게 쏟아 부었습니다. 매년 엘가나가 한나에게 두 배씩 챙겨 줄 때 마다 브닌나는 한나를 괴롭히기 시작합니다. 아마 자식이 있는 자기의 우월함으로 자식이 없는 한나의 상처를 건드리면서 감정을 충동 시켰을 것입니다. 한나는 한나대로 억울하기만 합니다. 자식이 없는 것은 자기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태를 막으신 것인데 어찌 하겠습니까? 축복을 받는 그 복된 자리에서 한나는 마음이 상해서 먹지도 않고 울기만 하고 있습니다. 한나는 슬픔과 괴로움으로 마음이 아픈 여자가 되었습니다. ‘당신에게 아들 열명 보다 내가 더 낫지 않느냐’ 는 엘가나의 말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어떤 것으로도 이 고통에서 헤어 나올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한 남편의 두 아내 중 하나로 살아가면서 자기의 노력으로 남편의 사랑은 얻었을지 모르지만 사람의 노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입니다. 아들을 낳아 기업의 대를 잇는 것은 자기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때 한나는 자기의 고통을 어디에 쏟았을까요? 브닌나는 자기 고통을 한나에게 쏟아서 한나에게 아픔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자기의 고통을 브닌나 처럼 상대에게 쏟지 않고 하나님께 달려가 그 앞에서 쏟아 놓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울었습니다. 자기의 원통함과 격한 감정을 하나님과 함께 소통하였습니다. (삼상 1:15) 한나의 아픔이 하나님의 아픔이 되고 한나의 고통이 하나님의 고통이 됩니다. 한나는 자기의 감정을 하나님께 쏟아 놓으며 어느새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기 시작합니다. 제사장 집안이 타락하여 하나님은 더 이상 그 백성에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치는 게 저주인데 누구 그 말씀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한나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고, 자기에게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께 주의 종으로 드리겠다는 서원을 합니다. 하나님과 소통하면서 아들을 얻기 위해서 기도하던 한나는 자기가 그토록 원하던 그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맹세하고 약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나의 기도를 받으시고 사무엘을 주셨습니다. 고통이 소명이 되어 한나는 위대한 사무엘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말씀이 멈추었던 그 시대에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다시 말씀하시기 시작하면서 온 이스라엘을 말씀으로 구원하셨습니다. 한 여인의 슬프고 아픈 마음으로 시작한 사연 있는 한 가정의 불행한 고통이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올 때 이런 위대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어떤 고통이라도 주 안으로 들어와 그 손에 들리면 하나님의 영광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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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소통하는 기도’(삼상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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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율법 아래 있는 자, 은혜 아래 있는 자’ (롬6:12-14)
-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와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죄는 믿지 않는 사람들의 죄와 차원과 다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죄는 십계명의 제 5계명 이하에 나오는 죄와 같은 것들을 의미합니다. 반면 신앙인들의 죄는 십계명에서 말씀하시는 것들은 물론이거와 한걸음 나아가 본문 말씀처럼 몸의 사욕을 순종하고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곧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차원을 훨씬 넘어섭니다. ‘법 아래’ ‘은혜 아래’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견해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크게 두 가지 면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구원에 관한 것이며, 둘째는 행함의 동기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말씀을 행하여야 구원 받고 행하지 않으면 지옥 간다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동기에 있어서도 징계가 두려워 행하거나 상급 보상을 바라고 행합니다. 행함의 주체 또한 자신입니다. 반면에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자신은 아무 공로 없지만 예수님께서 내 대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을 믿는 믿음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행함의 동기 역시 형벌이 두렵거나 보상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대신 죽어주신 사랑과 은혜가 너무나도 고맙고 감사해서 사랑의 강권함을 받아서 행합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말합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엡2:20b).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합니다(갈5:6). 주일 지키는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율법적으로 지키는 사람은 “이날 거룩하게 지키지 않으면 징계 와” “이날 사고 팔지 말라고 그랬으니. 매매하면 안돼.” 그렇게 지킵니다. 물론 이것도 소중합니다. 그러나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주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주님을 사랑함으로 이 날 하루를 온종일 거룩하게 지키자 ”하는 자발적인 사랑의 동기가 되어 지킵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처럼 남을 정죄할 틈이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함으로 지킬 때 사랑의 영이신 성령이 함께 하여 율법의 요구까지도 넉넉하게 이루어 주십니다. 보상이 문제가 아닙니다. 매가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너무 너무 감사하니까 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비록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아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이지만, 살면서 율법과 복음의 과정을 거친다는 점입니다. 자기 힘으로 지키려 하다가 깨어지고 넘어지는 과정이 필연적으로 따릅니다. 이런 과정이 없다면 주님께 대한 간절함과 겸손과 은혜의 소중함도 모를 것입니다. 바울같은 사람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는 탄식하는 과정 몸부림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이런 과정이 있어야 자신을 부인하게 되고 믿고 의뢰하며 주님의 은혜의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신앙인들은 은혜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고맙고 감사함으로 자원하는 심령으로 말씀을 지키려 할 때 사랑의 영이신 성령이 함께 하셔서 행하게 하십니다(빌2:13). 따라서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의 행함은 기쁨이고 활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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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율법 아래 있는 자, 은혜 아래 있는 자’ (롬6: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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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하나님 나라의 영웅’(단 3:13~18)
- 세상영웅 느부갓네살왕는 두라 평지에 자기신의 신상을 만들었습니다. 가장 귀한 금으로 만든 어마어마한 힘과 능력을 과시할 신상입니다. 자기 나라를 지켜주고 전쟁에서 이기게 하고 온 나라를 풍요하게 해서 잘살게 하는 신입니다. 신상 낙성식은 나라의 중요한 행사입니다. 모든 관원들이 낙성식에 참석 하여 그 신상 에게 절을 합니다. 그런데 만약 그 자리에서 신상 에게 절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왕을 반역하는 행동인 것이 명백합니다. 감히 왕의 신에게 경배하지 않는 것은 그 나라 관원으로서는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에서 잡혀 온 포로 소년 출신의 관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왕의 호위를 받고 왕의 인정을 받아 포로 출신이 그 나라의 관원이 되어 부귀영화가 보장된 삶을 살고 있지만 그 위에는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차마 왕의 신에게 절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사건 때문에 느부갓네살 왕이 불같이 화를 냅니다. 한번의 기회를 더 줄테니 자기 신에게 경배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풀무불 속에 집어 넣겠다고 합니다. 느부갓네살왕의 분노와 같은 맹렬하게 타는 풀무불이 눈앞에 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그 앞에서 믿음이 시험을 받게 됩니다. 여호와냐 금신상이냐는 결국 여호와냐 나의 목숨이냐가 되어 믿음을 지키는 것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로 진화 했습니다. 위기 앞에서 세 사람은 함께 마음을 보태서 결국 여호와를 선택하기로 결단합니다. 혼자서는 흔들릴 수도 있었지만 셋이 함께 하니 더욱 힘있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우리를 풀무불과 왕의 손에서 구할 능력이 있는 분이시지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왕의 신을 섬기지 않겠습니다.” 천하의 세상 영웅 느부갓네살왕 앞에서 누가 그를 거절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영웅들은 해냈습니다. 오직 여호와 그분만이 나의 하나님인 것을 고백하는 믿음이 한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자신을 반역한 자들을 평소보다 세배나 더 뜨겁게 달군 풀무불 속으로 집어넣으라고 명령합니다. 근처에만 가도 타죽는 이글 이글 타는 불은 보기만 해도 살벌하고 두렵습니다. 누가 능히 이 풀무불 속에서 살아남을 수가 있을까요? 이 장면을 계속 지켜 보던 사람들은 하나님이 능력이 있는 신이라면 기적이 일어나 그들을 풀무불 속에 던지지 않고 보호하시는 것을 기대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기대를 저버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풀무불 속으로 던져넣는 것을 그대로 두셨습니다. 아! 하나님은 정말 살아 계시는게 맞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무능력 하신 걸까요?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끝까지 가봐야 압니다. 잠시 후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채로 그것을 밖에서 지켜보던 왕은 갑자가 깜짝 놀랍니다. 분명히 풀무불 속에 던진 사람은 세 명인데 네 명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들은 결박이 풀린 채로 유유히 그 안에서 걷고 있었습니다. 전혀 뜨거워서 고통당하는 표정이 아닙니다. 게다가 그들과 함께 있는 정체불명의 또 다른 한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인 것 같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하나님은 그들의 믿음대로 풀무불 속에서 건져내고도 남는 분이신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풀무불 속에 아예 그들과 함께 들어와 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아무리 풀무불이라도 그들을 상하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가장 큰 축복이 아닙니까? 결국 세상 영웅 느부갓네살왕은 그 앞에서 선포합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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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하나님 나라의 영웅’(단 3: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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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예수님을 사랑하려면’(신 30:1~6)
- 스무 살 때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왜 예수님께 대한 사랑은 이성간의 사랑처럼 다가오지 않는 것일까? 만일 매혹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면 나도 뜨겁게 주님을 사랑할 수 있을 텐데........’ 그 다음날 예배시간이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속된 인간의 사랑같이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성간의 사랑은 우리가 노력하지 않아도 쉽게 느낌으로 다가오지만 예수님을 사랑하려면 우물에서 물을 기르는 것처럼 먼저 힘쓰고 애쓰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면서 본문 신30:2절 이하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것을 온전히 따라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이 말씀을 요약하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순종하면 사랑하게 해주겠다.”입니다. 사랑은 한꺼번에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랑도 하나님께서 하게 해주셔야 할 수 있는데 먼저 순종하는 일부터 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의 마음을 아시고 목사님을 통하여 응답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 때 받은 은혜가 지금도 생생합니다. 신앙인들이 느낌을 의지하면 환경에 지배를 받고 마귀의 속임에 놀아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지 자신의 감정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런 느낌이 없어도 순종하라고 하셨으니 순종하는 것이고, 사랑하라고 하셨으니 사랑하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느낌은 거짓입니다. 날씨처럼 수시로 변합니다. 다말을 연애하여 심화로 병이 들었던 암논이 자신의 정욕이 채워지자 이전 연애 감정이 이젠 미움으로 바뀐 것을 예로 들수 있습니다(삼하13:1-22). 순종하고 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 감정까지 주십니다. 그 때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 감정입니다. 롬7:22에는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라고 나옵니다.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것은, 예수님을 즐거워하는 것은 속 사람이지 육신이 아닙니다. 육신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려고하니 문제가 됩니다. 육신으로는 예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육신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착한 양심을 써서, 속사람을 쓴 사람들은 예수님을 존경하고 사랑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과 같은 사람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속사람을 써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사랑을 깨달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하여 먼저 묵상해야 합니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 묵상할 때에 화가 발하나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시39:3). 묵상할 때 화가 발합니다. 감동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영원한 구원 뿐만 아니라 현재 함께 하여 주시고, 인도하여 주시고, 돌아보아 주시는 은혜를 묵상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깨닫기 위해서는 눅7:36 이하의 한 여인처럼 자신이 사함 받은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죄를 많이 깨달을수록, 사함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알수록 주님을 많이 사랑합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7:47). 빚을 탕감 받은 일이 많은 사람일수록 고마움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속사람을 따라 순종하고 묵상하며 많은 죄 가운데서 사함 받은 것을 깨닫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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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예수님을 사랑하려면’(신 3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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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전염’
- “르호보암이 나라가 견고하고 세력이 강하매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니 온 이스라엘이 본받은지라.”(대하12:1). 며칠 전 저는 어떤 목사님 댁에 방문하였습니다. 마침 그 목사님은 아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부자간에 한 참 대화를 나누는가 싶더니 갑자기 아들이 “아버지, 그동안 저를 잘 참아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저는 둘의 눈을 피하여 어디론가 가더니 펑펑 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 나를 오래도록 참아주셨다는 생각이 밀려왔기 때문입니다. 꿈이었습니다. 왜 이런 꿈을 꾸었나 생각해보았습니다. ‘주사야몽’이라고 전날 저는 ‘해와달’이라는 소책자에서 이도형 교역자가 쓴 ‘덮어주신 은혜’라는 글 속에 삽입되었던 박찬석교수(전 경북대 총장)의 아버지에 대한 가슴 뭉클한 회고담에 전염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전염병이 꿈에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코로나19가 다소 멈추었나 싶어 ‘사회적 거리두기’에서 ‘생활 속 거리두기’로 전환한지 4일 만에 이태원 클럽에서 불씨가 일어나 여러 곳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국제화 시대라 어느 한 지역, 어느 한 나라가 안전하다 하여 안전한 것은 아닙니다. 백신이 개발되어 치료되거나, 지구 모든 지역에서 사라질 때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 사라졌나’ 싶어도 다시 일어나는 전염병, 몸의 전염병이 그러할진대 영적인 전염병은 더욱더 그러할 것입니다. 몸은 대면이나, 접촉이 필요하지만, 영적인 문제는 생각만으로 전염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지도자 위치에 있는 사람은 전염성이 더욱 강합니다. 그들은 슈퍼인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르호보암이 나라가 견고해지고 세력이 강해지자 하나님의 율법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약하면 붙들려고 하는데 강해지니 스스로 선 줄 알고 버린 것입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왕도 하는데 우린들 어때?” 하면서 르호보암의 행동들을 본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 후에 대부분의 제자들에게 이미 두 번이나 나타내 주셨습니다. 그러나 약속하셨던(막14:28, 16:7) 갈릴리에서는 아직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은 그곳에서 주님을 기다리다가 지쳤는지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베드로의 이 말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나타내 주시지 않으면 어떡하지? 우린 무엇을 먹고살지? 다시 어부로 돌아가자.’ 영향력 있는 베드로가 이런 말을 하자 다른 제자들도 덩달아 “나도” “나도” “나도” 하며 버렸던 것을 붙잡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의 근심이 그대로 제자들에게 전염된 것입니다. 전염을 한문 그대로 풀이하면 ‘전달하고 물들이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염에는 이런 좋지 않은 전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종려주일에 두 제자가 예수님이 지시하신 나귀를 끌고 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옷을 벗어 나귀 위에 올려놓습니다. 그러자 두 제자의 행동을 본 많은 유대인들도 자신들의 옷을 벗어 예수님이 지나가실 길에 펼쳐 놓았습니다. 이에 못 미치는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로 대신하였습니다(마21:7-8). 두 제자가 사람들에게 전염시킨 것입니다.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을 높이는 전염을 시킨 것입니다. 이처럼 전염은 우한코로나처럼 부정적인 전염만 아니라 제자들이 본을 보인 것처럼 좋은 전염도 있습니다. 성경은 “너희 열심이 퍽 많은 사람들을 분발하게 하였느니라.”(고후9:2b)라고 말합니다. 신자들의 태도가 많은 사람을 분발하게 하기도 하고 나태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나는 어떤 전염을 몰고 올까요? 기쁨의 전염, 사랑의 전염, 감사의 전염일까요? 아니면 가룟 유다처럼 불평의 전염일까요? 형제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려면 십자가 지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옛사람이 다시 활동할 때에는 썩은 냄새밖에 피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나타날 때 비로소 생명과 기쁨의 전달자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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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전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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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데일리 기도] 김우상 학술이사의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기도’
- 하나님! 항상 하나님을 대면하고 있지 않으면, 항상 성령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있지 않으면 어느샌가 저는 죄를 짓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하나님! 또다시 코로나 감염자가 창궐할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첫번째 창궐은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인간의 영혼을 파괴하고 가정을 파괴하고 돈을 벌고 권력을 누리는 집단인 신천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두번째 창궐은 쾌락을 좇아 흥청망청 술을 마시고 춤추고 난잡한 행위를 일삼는 곳인 클럽, 주점, 블랙수면방 등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신천지로 인해서는 주로 대구에서 확진자가 많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클럽을 다녀간 젊은이들은 주로 서울 경기도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인구수를 감안한다면 서울, 인천, 경기도에서 앞으로 대구보다 10배 이상 많은 확진자가 나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교회는 문을 열지 못할 것이고 경제는 다시 침체될 것이고 겨우겨우 버티던 수많은 우리의 이웃들이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하나님! 아직도 대한민국의 백성들과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 지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손을 거두지 않는 것이겠지요? 지금 여기를 사는 대한민국 백성은 거의 대부분 정도가 심하든 덜 심하든, 이웃은 어찌 되든지 말든지, 자신의 쾌락과 욕망만을 추구하는 이기주의를 살고 있습니다. 이태원클럽에서의 제2의 코로나 창궐은 정확히 그 부분을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금 여기를 사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도 상황은 비슷해 보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기에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사랑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세상 쾌락과 욕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 우리들의 죄를 회개합니다.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겠습니다. 나의 욕망을 추구하는 일에 하나님을 이용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 이태원클럽 코로나 사태가 일파만파 퍼져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목숨을 잃을까 두렵습니다. 하나님! 염치 불구하고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긍휼과 자비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 우리에게 안식의 은혜를 내려 주심에 감사를 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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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데일리 기도] 김우상 학술이사의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