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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바라는 것보다 더 좋은 것’
-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마16:28).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전하신 말씀입니다. 이에 앞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을 만류하는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책망하신 후 아무든지 주님을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것과,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고 주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찾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제자들은 다소 어리둥절했을 것입니다. “이상하다. 선생님께서 분명히 그리스도이시면 왜 죽으시는 것일까? 이 나라에 왕으로 오셔서 원수들을 모두 물리치고 우리를 식민지 상태에서 해방시켜주셔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죽으신다고 말씀하시니 우리가 제대로 된 길에 들어선 것일까?” 그러자 그들의 마음을 아시는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와 소망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본문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마16:28). 북의 남침으로 6.25가 일어나고, 630여만 명의 피난민이 발생하면서 휴전 이후 천만여 명의 이산가족이 발생하였습니다. 원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지구 반대편도 갈 수 있는 시대에 살면서도 부모형제를 지척지간에 두고도 만날 수 없는 형편이 되고 말았습니다. ‘내 생전에 자녀를 만나볼 수 있으려나?’ 자기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자녀들을, 부모님을 머리카락이 하얗도록 그리워하면서 살다가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젠 생전에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은 손꼽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들도 ‘내 생전에 독립이 올 수 있을까?’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렇다.”라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그러다가 엿새가 지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들 앞에서 변형이 되셔서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그러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말하였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마17:1~5). 베드로는 후에 이때 본 경험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벧후1:16~17). 베드로는 여기서 예수님의 크신 위엄을 보았고,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다고 말합니다. 크신 위엄과 존귀와 영광은 왕권을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성도들을 다스리는 권한이 있고, 성도들은 들어야 하는 위치에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왕권을 말씀하심입니다. 사실 베드로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왕권을 정치적인 왕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이 사상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에도 머뭅니다(행1:6~8).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들이 변화산상에서 체험한 예수님의 왕권은 세 명의 제자들에게는 다소 실망적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좋았던지 베드로가 말합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마17:4). 그들의 기대와는 다른 것이었지만 산 아래로 내려가고 싶지 않을 만큼 좋았던 것입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엡3:20). 그들은 현실 세계에서 나라의 독립보다 변화산상에서 더 좋은 영광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들이 바라고 원하는 것 이상으로 좋은 세상이 있는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분명히 보이는 나라도 중요하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의 왕권과 다스림이 더 중요하고 거기에는 말할 수 없는 행복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직접 체험한 사람과, 들어서 체험하는 사람의 느끼는 정도가 다를 것입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다른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말한다면 그들은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선생님이 왕이 되셨어? 그리고 우리나라는 독립국가가 되었어? 그대로 있잖아. 무엇을 보았다는 거야?” 예수님은 도저히 납득하지 못할 다른 제자들과 유대인들을 아시고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마17:9) 라고 하신 것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후에는 성령을 받아서 성령으로 알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정치적인 메시아이기 전에 영적인 메시아로서 자기 백성을 죄악에서 구원하고 마귀와 세상과 육신을 다스리는 분이심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독립은 죄와 마귀와 세상 풍속습관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합니다. 죄가 주장하는 대로 살아가지 않고 새 생명을 따라 살아갈 때 정치적인 독립도 따라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였기 때문입니다(마6:3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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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바라는 것보다 더 좋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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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남은 자’
-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음이라.”(사10:22). 코로나19가 창궐한 시기, 백신이 개발 되었다고 하나 여러 변이가 나와 백신을 무색케 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주님의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 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무서운 시기일지라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남겨두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남겨두실까요? 성경은 유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갈 때에 “빈천한 국민을 남겨두어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와 농부가 되게 하였더라.”(렘52:16) 라고 말합니다. 당시 느부갓네살왕은 사회 집권세력들, 부한 사람들, 능력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포로로 끌어가 왕실에서 인질로 사용하거나 유다로부터 먼 곳으로 흩어버리고, 가난하고 천한 사람들만 남겨 두었습니다.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키듯이 당시에도 사회에서 볼품없고, 반란을 일으킬 수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들만 남겨 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가난하고 천한 사람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습니다. 그런데 가난을 어떻게 정의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성경에서의 가난은 마음의 태도입니다(마5:3). 실제로 풍족하지 못한 사람들이 가난한 태도를 갖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간혹 빈곤하면서도 허영심으로 자신을 과시하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여기서 말하는 가난한 사람들 속에 포함 될 수 없습니다. 바울은 가난한 자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고전7:29~30). 여기서 “~같이 하라.”는 말씀은 마음의 태도입니다. 마땅히 누릴 권이 있는 풍족한 사람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을 다 쓰지 않고 실제 부족한 사람들을 위하여 쓴다면 이 사람이 가난한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인들의 상급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을 주님을 위하여 다 쓰지 않는 것입니다(고전9:18). 우리 주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실제 부요하신 분이셨지만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고후8:9). 하나님께서 두 번째로 남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계7:2~3). 종이란 자기 뜻이 없이 오직 주인의 뜻만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목회자일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자신의 뜻대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종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비록 목회의 직분을 갖지는 않았지만 범사에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찾아 살아간다면 이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만 바라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로 작정하는 종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선물로 주시며, 이러한 종을 붙잡고 계십니다(사42:1). 하나님의 종들에게는 또한 먹을 것을 주십니다(사65:13). 하나님의 종들은 마음이 즐거우므로 찬송을 합니다(사65:14).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 한분 기쁘시게 할 마음을 품습니다(갈1:10). 하나님 한 분의 기쁨을 추구 하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인을 치도록 하십니다. 반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거나 물질을 의지하거나 과학을 맹신하는 자는 짐승의 표를 받습니다. 666은 인간 지혜의 최대의 숫자입니다. 인간의 지혜가 아무리 발전해도 7로는 가지 못하고 6옆에 6이라는 숫자가 붙을 따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짐승의 표를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기쁨을 추구하고 살아가는 종을 남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위하고, 세상 신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을 남기십니다(롬11:4). 아합 시대에 이세벨이 선지자들을 많이 죽였습니다. 엘리야는 자신만 살아남은 줄 알았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남달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왕상19:14).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19:18). 자신이 잘 해서 남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남기셨으며, 그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칠천 인을 남기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명예와 영광을 섬기는 사람은 세상 신에게 무릎을 꿇은 사람입니다. 돈을 섬기는 사람 역시 세상 신에 무릎을 꿇은 사람이며, 세상 풍속과 유행과 여러 가지 이념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 신에게 무릎을 꿇은 사람입니다. 신앙인들의 이념은 오직 하나님 나라와 그 의일 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세상 신을 따르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위하는 사람을 남기십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남기는 사람은 거룩한 사람입니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사6:13). 거룩하게 되는 것은 진리를 순종할 때입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 그러므로 거룩함의 씨는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남기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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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남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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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단의 불’
-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레10:1~2). 본문에서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하나님께 분향했습니다. 그들은 번제단에서 취한 불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의 불이나, 밥할 때 사용하는 불이나, 등불을 켤 때 사용하는 불이나, 불이면 되는 것이지 불의 질이 소용 있나?” 하면서 보통 사람들이 사용하던 불을 가지고 향유를 태웠습니다. 그 결과 여호와 앞에서 불이 나와 그들을 삼키고 말았습니다. 불순종의 결과는 이렇게 참혹했습니다. 이 말씀이 주는 교훈은 불순종의 참혹함과 불이 주는 상징성입니다. 본문에서의 불은 열심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열심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단을 통과한 열심’과 ‘단을 통과하지 못한 열심’입니다. 성도들이 사용하는 불은 ‘단의 불’이어야 합니다. 구약의 제단이 신약에서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열심은 좋은 것이지만 그 열심이 십자가를 통과한 열심이 아니라면 그 열심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태워버리고 맙니다. 이전에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면 그 제물을 받았다는 증거로 하늘에서 불이 내렸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자신을 드린 사람에게 성령의 불로 임하십니다. 거기서부터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가 일어납니다(골1:29). 십자가를 통과하기 전의 열심은 육신적인 열심이 되기 쉽습니다. 사도바울이 믿기 전에는 조상들과 율법에 대하여 열심이 있었습니다.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3:6).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라고 생각하였지만 결과적으로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왜 이런 행동을 할까요?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10:2~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곧 신약시대의 제단인 십자가에 자기 의를 처리하지 아니하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열심을 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옳은 것을 따르지 아니하고 자기 옳은 것을 따라 열심을 낸다면 교회를 핍박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오늘날에도 십자가를 통과한 열심이 아닌 육신에게서 나온 열심은 성령을 거스르는 열심이 됩니다. 육신에게는 선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롬7:18). 십자가는 죽음입니다. 자신을 십자가로 처리한다는 뜻은 순종하는 사람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순종은 자기 생각을 접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순종하고, 양심에 순종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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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단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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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풀어야 할 것과 매어야 할 것 2’
-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16:19). 어릴 적 우리 동네 주변에는 유난히 산이 많았습니다. 동네를 중심으로 동편 남편 북편 모두 산이 있었습니다. 예외도 있었지만 집집마다 염소 한두 마리는 기르고 있었습니다. 염소 목에 쇠말뚝 달린 줄을 걸어서 끌고 들이나 저수지 언덕에다가 박아놓고 반나절씩 서너 번 옮겨 놓으면 저녁때는 염소의 배가 불룩한 상태가 되어 보기 좋았습니다. 그런데 소나 염소 줄을 고정시켜서는 안 되는 곳이 있었습니다. 큰 나무가 있는 산이었습니다. 만일 그 주변에 박아 놓으면 줄이 나무를 칭칭 감아 최후에는 자신의 목을 조일만큼 감기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돌면 풀릴 텐데 그럴만한 이성이 없기 때문에 몸부림치다가 질식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신앙인들에게 참 된 이성은 성령입니다. 성령을 따라 살아가지 않으면 우리도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것으로 해결하려 들다가(유:10), 염소처럼 점점 더 조여드는 환경을 만나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는 사람의 지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오직 성령으로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욥36:8은 “혹시 그들이 누설에 매이거나 환난의 줄에 얽혔으면 그들의 소행과 허물을 보이사 그 교만한 행위를 알게 하시고 그들의 귀를 열어 교훈을 듣게 하시며 명하여 그 죄악에서 돌아오게 하시나니” 라고 말합니다. 누설은 족쇄를 말하고 있습니다. 족쇄에 매이거나 환난의 줄은 보이지 않는 줄입니다. 환경의 줄입니다. 마음을 옭아매거나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소행과 허물을 보이사” 말씀처럼 위와 같은 환경일지라도 성령께서 족쇄와 올무가 무엇인지 보여주시면 회개하고 돌아오게 됩니다. 이처럼 신앙인들의 참 이성은 이론이 아니라, 모든 일에서 주님을 인정하는(잠3:6) 바탕 위에 계시하는 생명입니다.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는 성령이 깨닫게 해주셔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문제 위에 문제, 올무 위에 올무, 점점 조이는 환경을 만나는 이유는 성령의 해석을 받으려 하지 않고 보이는 현상만 가지고 판단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도 무시할 수 없지만 보이는 일은 나타나는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라(히11:3), 더 깊은 영적인 곳에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라는 큰 성과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싸워 이겼습니다. 그런데 아이라는 작은 성과는 싸워 지고 말았습니다. 많은 수도 필요 없고 3,000명이면 된다고 하면서 자신만만하게 싸우러 갔지만 결과는 36명의 목숨을 잃은 패전이었습니다. 그러자 여호수아는 참모들을 불러 잘 못 된 작전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적은 수를 탓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것들을 탓했다면 본능으로 아는 대로 판단한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다시 싸워본들 틀림없이 패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성령의 감동 된 사람이었습니다(민27:18). 패전의 원인을 나타나는 현상만 보지 않고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찾았습니다. 하나님과 관계에서 찾았습니다. 온종일 기도한 결과 그들 가운데 더러운 것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제비뽑은 결과 아간이 범인이었습니다(수7:18). 아간의 문제를 처리한 다음에야 비로소 대적을 당할 수가 있었습니다(수8:28~29). 이처럼 매인 것을 풀어야 하는 것들은 드러나는 현상보다 드러나지 않은 영적인 영역에 많이 있습니다. 오늘은 반대로 우리가 매야 할 것들을 상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찬송가 ‘복의 근원 강림하사’에는 “주의 은혜 사슬 되사 나를 주께 매소서.” 라는 가사가 나옵니다. 신앙인들은 주님의 은혜로 구원 받았고 주님의 은혜 없이는 믿어 나갈 수도 없습니다. 미혹은 ‘주님의 은혜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있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면 내 안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셔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게 해주십니다. 우리 자신을 이기게 해주시고, 마귀를 이기게 해주시고, 세대를 본받지 아니하고, 세상 풍속 습관을 따르지 아니하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갈 수 있게 해주십니다. 그래서 “주의 은혜 사슬 되사 나를 주께 매소서.” 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의 줄로 이끌었습니다(호11:4). 죄악의 사슬에서 끊으시고 대신 사랑의 줄로 주님과 결탁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같은 분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고후5:14) 라고 말하였습니다. ‘강권하다.’는 뜻은 ‘강하게 끈다.’는 말씀입니다. 대신 죽어주시고, 온 우주보다 더 좋은 선물 곧 성령을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끄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끌림을 받지 못하는 것은 다른 유혹하는 것들이 우리 자신에게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을 처리해야 주님의 사랑에 끌림을 받을 수 있습니다. 행18:5은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라고 나옵니다. 바울은 말씀에 붙잡혔습니다. 바울이 말씀을 붙잡은 것이 아니라, 말씀이 그를 붙잡았습니다. 말씀에 잡히면 말씀이 말하고, 말씀이 인도하고, 말씀이 보호하고, 말씀이 깨워줍니다(잠6:22). 그래서 다윗 같은 분은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시119:97) 라고 고백했습니다. 말씀에 붙잡히니 말씀을 묵상하게 됩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살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합니다(수1:7~8). 말씀이 다윗으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였습니다(시119:98). 하나님의 말씀에 매인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유다의 죄악과 그들이 장차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당할 것을 알고 애통하며 울었습니다. 누구보다 그의 가장 큰 애로사항은 왕으로 하여금 바벨론에게 항복하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전하지 않을 수는 없고 전하자니 매국노 취급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하도 괴로워서 그는 이렇게 토로하였습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20:9). 중심에 불붙는 것 같은 마음, 하나님의 말씀에 매인 마음입니다. 성도들은 은혜의 사슬에 매이고, 그리스도의 사랑의 줄에 매이며, 말씀에 사로잡히는 사람들이 되길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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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풀어야 할 것과 매어야 할 것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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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풀어야 할 것과 매어야 할 것 1’
-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16:1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물으십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대답합니다. 본문은 베드로의 답변을 기뻐하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많은 주석가들은 ‘천국열쇠’에서 ‘천국’은 ‘교회’를 의미하며 ‘열쇠’는 베드로를 대표하는 사도들의 ‘복음전파’와 ‘교회치리’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풀어야 할 것과 매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이번 말씀은 매인 것들을 전제로 풀어야 할 것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8장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빌립이 닦아 놓았던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곳에서 시몬이라는 마술사가 있었는데 두 사도가 안수하자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함을 보고 돈을 가져와서 자신도 누구에게든지 안수하면 성령을 받게 하는 권능을 사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시몬에게 강한 책망을 하였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행8:20~23). 시몬은 악독이 가득하여 불의에 매인 바 된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보인 그의 악독의 뿌리는 바르지 못한 마음이었고 그 마음의 본질은 ‘명예영광심’이었습니다. 그가 속이는 마술을 한 것은 유명한 사람이 되기 위함이었고, 또 유명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누구든지 안수하면 성령이 임하게 하는 권능을 사려하였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신의 영광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면, 마술사 시몬과 다를 바 없이 불의에 매인 사람들입니다. 명예영광 허영심을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도 망하는 길을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명예영광심의 사슬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드려야 합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집니다(딤전6:9). 말 타는 사람에게 말이 잘 달려주기만 한다면 부지런히 보살피고 꼴과 마실 물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찾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일절을 공급해 주십니다. 그러나 말이 달리려 하지 않고 꼴을 먹는 데만 관심 갖는다면 필경은 버림받고 말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부하려 하는 것도 말이 꼴에만 관심 갖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부하려는 마음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드려야 합니다. 가장 악한 왕들 가운데 한 명을 뽑으라면 아마도 아합 왕이었을 것입니다. 그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저가 그 아내 이세벨에게 충동되었음이라. 저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아모리 사람의 모든 행한 것 같이 우상에게 복종하여 심히 가증하게 행하였더라.”(왕상21:25~26). 그가 악을 행한 이유는 두로 왕의 딸인 이세벨에게 팔려 그의 충동에 놀아났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보혈로 우리를 사셨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팔린 몸입니다. 육신의 충동에 따라, 온갖 교훈의 풍조(엡4:14)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죄에 매인 행동이며 주님께서 사신 것을 부인하는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드려야 합니다. 주님 가르쳐 주신 기도 가운데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6:12) 라고 나옵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부연하십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 하시리라.” 우리가 용서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혐의가 있다면 그것 역시 우리를 맨 것입니다. 우리는 용서하지 못하는 사슬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 이처럼 불의에 매이거나, 돈에 매이거나, 교훈의 풍조에 매이거나, 혐의에 매인다면 그것을 푸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주님의 약속(마18:18~19)을 붙잡고 “주여 저를 이러한 죄악에서 풀려나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드려야합니다. 말씀과 기도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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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풀어야 할 것과 매어야 할 것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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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반석 위에 세운 교회’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16:17~19). 반석위에 세운 교회에서 반석에 대한 의견이 많습니다. 실제로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카톨릭과 기독교를 나누는 분기점이 될 만큼 극단적인 해석이 행해지고, 기독교 내에서도 다양한 해석들이 나타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카톨릭측은 반석이 베드로의 인격을 의미하며 교회는 베드로라는 인격 위에 세워졌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해석은 그들이 베드로의 법적 후계자라고 주장하는 교황의 교회 지배권을 옹호하는데 뒷받침 하고 있습니다(그랜드 주석 요약). 그러나 카톨릭의 주장은 많은 문제점을 낳고 있습니다. 첫째 교회가 베드로의 인격 위에 세워졌다면 베드로는 실수가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일이 있은 후 얼마 안 있어서 주님께 사탄이라는 책망을 받습니다(마16:23). 그는 예수님께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말씀하셨을 때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라고 간절히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일 후에도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전 예수님의 말씀대로(막14:30) 닭이 두 번 울기 전 세 번이나 부인하는 행동을 합니다. 또 예수님 부활 후에는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야고보에게서 보냄 받은 유대인들이 왔을 때 먹지 않은 체합니다. 그러자 바울이 “당신은 원래 유대인인데도 다른 유대인들과는 달리 율법에 구애받지 않고 이방인들처럼 살아왔소. 그런데 이제 와서 이방인들에게 유대인처럼 살라고 강요할 수가 있는 겁니까?”(갈2:14, 쉬운말성경) 라고 책망합니다. 이처럼 베드로도 사람이기 때문에 실수가 있었습니다. 만일 베드로의 인격이 반석이라면, 베드로의 여러 실수도 거기에 포함되는 모순을 갖게 합니다. 설사 그들의 말대로 베드로의 인격을 기초로 교회를 세웠다 해도, 그 내용이 베드로의 후계자로 교황을 세워야하는 것과, 성경보다 위에 있는 교황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교황 무오류설)을 뒷받침 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교회의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런 실수를 하는 것은 성령 없이 성경을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반석이 주는 의미는 베드로의 인격이 아니라 첫째, 베드로의 신앙 고백 곧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의 터입니다. 이 고백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며 반석입니다. 예수님을 주와 및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다면 거듭날 수도, 의롭게 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신앙인들은 이 고백으로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며, 위기 가운데 있을 때에도 예수님이 구주와 그리스도 되심을 선포하여 사탄을 대적해야 합니다. 반석이 주는 두 번째 의미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칭찬 곧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말씀과 같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아 살아가는 터’를 의미합니다. 신앙인들은 비록 거듭났다고 하지만 육신이 있기 때문에 항상 혈육의 가르침과 성령의 가르침 사이에 있습니다. 육신의 속삭임을 물리치고 성령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간다면 반석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말씀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란 헬라 음 ‘에클레시아’로 ‘불러내어 모은다.’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의미는 신약에서 ‘성도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내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의미’로 재해석 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신앙인들은 ‘그리스도의 몸’이요, 각각 ‘몸의 지체’ 라고 말합니다(고전12:27). 교회 또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1:23). 따라서 ‘신앙인들의 총회는 교회요, 그리스도의 몸’인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입니다(엡1:22).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뜻을 나타내야 합니다. 몸이 머리의 말을 듣지 않고 마음대로 움직인다면 반신불수입니다. 결코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울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참 된 몸이 되려면 각 지체가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고 말씀하신 반석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은 터’를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가르침을 받아 살아가지 않고 혈육의 가르침이나 육신의 생각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을 터로 삼아 교회를 세운다면 결코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머리이신 예수님의 생각을 온전히 나타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주님께서는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그리스도께 가르침을 받아, 몸으로 그리스도를 재현할 때 ‘그리스도의 지시를 받아 살아가는 것’을 터로 삼아 교회를 세우십니다. 성령께 받은 말씀은 아무도 무너뜨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신앙인들이 무슨 일을 당하여 주님께 기도하면, 성경에 맞는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성경에 맞지 않는 음성은 사탄의 음성이라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또한 성경에 맞을지라도 양심에 타당하지 않다면 그것 역시 성령의 음성이 아닙니다. 성령의 음성은 성경과 양심과 환경에 일치 됩니다. 주님은 이런 터 위에 자신의 교회를 세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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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반석 위에 세운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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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잔치 2’
- “고난 받는 자는 그 날이 다 험악하나 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상 잔치하느니라.”(잠15:15). 아무리 좋은 악기가 있고 좋은 음식이 있으며 장소가 좋아도 마음이 즐겁지 않다면 잔치가 될 수 없습니다. 비록 잘 갖추어 있을지라도 잔칫상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발생한다면 차라리 잔치를 하지 않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진정한 잔치는 비록 외적인 조건들이 잘 갖추어 있지 않을지라도 영이 만족하고 기뻐한다면 잔치일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7:1) 라고 말합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란 말이 있듯이 가정이 화목하며 서로를 사랑하고 위하는 것이 가장 좋은 잔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잔치는 잘 차려진 음식의 개념보다도 마음의 개념이 더욱 중요합니다. 어떻게 하면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 마음은 대부분의 영어번역본에서 'heart'로 나옵니다. 차가운 이성의 마음이 아닌 거듭난 속사람의 마음입니다. 영의 마음입니다. 속사람이 기뻐하면 항상 잔치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언제 속사람이 기뻐지는지 상고해보겠습니다. 죄를 회개하면 기뻐집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3:19). 회개하면 유쾌하게 됩니다. 유쾌하다는 것은 쾌활하고 기쁘다는 뜻입니다. 죄는 더러운 오물과 같아서 그것을 품고 있는 한 마음이 맑고 깨끗할 수가 없습니다. 탄식이 나오고 짜증이 나옵니다. 그래서 죄를 품고 있으면 사소한 일에도 신경질을 잘 부리며, 말 한마디도 참지 못합니다. 이럴 때는 회개거리가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예수님의 보혈 공로로 사함 받지 못할 죄가 없습니다. 어떤 죄라도 반드시 아뢴다면 유쾌하게 됩니다. 기뻐집니다. 말4:2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치료하는 광선이 발합니다. 그러한 치료는 영적인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오래 되고 고질적인 병만 아니라, 죄도 습관도 이길 수 있습니다. 의로운 해가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의로운 해는 성령을 말하고, 광선은 성령의 능력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주님은 넉넉히 이길 힘을 주십니다. 이기는 자는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해집니다. 뿐만 아니라 경쾌해집니다. 양심에 거리낌이 없을 때 담대함을 얻고 기뻐집니다(행24:16). 양심이 거리낌이 있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원만해질 수 없습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되지 않습니다. 양심이 거리낌이 있으면 먼저 하나님께 내 놓아야 합니다. 성령은 양심과 더불어 말씀하십니다(롬1:9). 양심 안 쓰면 캄캄해집니다. 거듭난 양심, 곧 착한 양심을 힘 있게 써 나가면 담대함을 얻고 마음이 즐거워집니다(요일3:20). 이처럼 양심을 쓰는 사람은 항상 잔치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명절 끝 날 곧 기쁨이 다 지나간 날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7:37~38). 명절은 기쁘고 즐거운 날입니다. 하지만 명절 끝 날이 되어 가면 즐거움이 시들해집니다. 허무해집니다. 아쉬움이 많이 남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러한 날을 복음 전파의 기회로 삼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이 말씀의 의미는 “너희들 세상 명절을 따라 먹고 마시고 즐겨봤지? 하지만 지금 어떠하냐? 공허하고 갈증만 더하지? 이처럼 외적인 명절은 목마름만 더할 뿐이다. 참 기쁨을 얻으려면 내게로 오라. 내게로 와서 나를 믿으라.”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고 영접하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이 흐릅니다. 만족하게 됩니다. 성령의 생수가 흐릅니다. 기쁨의 강물, 평강의 강물이 흐릅니다. 솔로몬은 사랑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 화창한지 쾌락하게 하는구나.”(아7:6). 이에 대하여 킹제임스 우리말 번역에는 “오!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어여쁘고, 어찌 그리 상냥하여 기쁨을 주는가!” 라고 번역 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바로 기쁨을 줍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할 때 마음이 기뻐집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얼굴에 기쁨이 드러납니다. 이런 사람은 항상 잔치를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무겁지 않습니다. 사랑 없이 하는 것이 율법이요 사랑 없이 하는 것이 짐입니다. 하지만 사랑하면 아무리 무거운 것도 가벼워집니다. 사랑의 영 성령이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요일5:2). 사랑으로 하는 행동은 수고가 기쁨이 됩니다. 기쁨은 힘이요 활력입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면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사58:13~14). 구약 안식일의 정신을 오늘날 주일을 지키는데 적용해야 합니다. 그럴 때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포도나무라고 하셨고, 그를 믿는 사람들은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여러 나무들이 있는데 특별히 포도나무와 가지로 비유하신 것은 포도나무가 기쁨을 상징하는 나무이기 때문입니다(삿9:13). 기쁨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안에서 행하면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항상 잔치합니다. 앉으나 서나 걸으나 멈추나 잔치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한 것입니다(빌4:4). 코로나19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의 기쁨을 앗아갈 수 없습니다. 어떤 형편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항상 기뻐하며 잔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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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잔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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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잔치 1’
-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쌔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요12:1~3). 잔치란 경사 때에 여러 사람을 초대하여 음식을 먹으며 즐기는 일이라고 사전에는 나옵니다. 잔치는 붙이기 나름인데 성경에서 나오는 잔치는 예수님을 위한 잔치(요12:1~3), 이삭이 젖을 뗀 후 아브라함이 베푼 잔치(창21:8), 혼인잔치(마22:1~14), 생일잔치(욥1, 마14:10~12), 양털을 깎을 때 여는 잔치(삼하13:23~29), 왕이 베푸는 잔치(에1, 단5), 돌아온 탕자를 위하여 베푼 잔치(눅15:22~24) 등 여러 잔치가 있습니다. 특성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그 하나는 주기적으로 여는 잔치와, 특별히 정해져 있지 않지만 경사로움 때문에 여는 잔치가 있습니다. 전자는 생일잔치나, 기념일에 베푸는 잔치가 해당 될 것입니다. 후자는 혼인잔치나, 젖을 떼는 날 베푸는 잔치, 돌아온 탕자를 맞이하는 잔치 등이 여기에 해당 될 것입니다. 이처럼 잔치는 기쁘고 즐거운 날입니다. 그런데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성경에는 잔칫날 불행이 닥친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욥의 아들들이 맏형의 생일날 잔치를 벌이며 먹고 마셨습니다. 그런데 이 날 욥은 전 재산을 잃고 그 자녀들 모두를 잃고 맙니다(욥1). 또한 헤롯의 생일잔치 때 세례 요한이 참수당하는 참혹한 일이 벌어졌습니다(마14:10~12). 에스더에서는 아하수에르 왕이 즉위한지 3년 만에 모든 방백과 신복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습니다(에1:3). 그러자 왕후 와스디 역시 부녀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이 날 후에 와스디는 왕후의 자리에서 쫓겨나게 됩니다(에1:19~22).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벨사살 왕 역시 귀인 일천 명을 위하여 큰 잔치를 베푼 후 그날 밤에 죽임을 당하고, 다리오가 왕이 됩니다(단5:30~31). 압살롬은 자신의 양털을 깎는 잔칫날에 암논을 죽입니다(삼하13:28~29). 바울은 디모데에게 “일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딤전5:6) 라고 말합니다. 또한 야고보도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약5:5) 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잔치는 우리의 영을 살찌우는 것이 아니라 육체와 마음을 살찌게 합니다. 자신을 위하거나, 사람들을 위하여 잔치를 벌일 때 사탄이 틈타기 쉬운 때입니다. 부득이하게 잔치를 할 경우에는 마귀로 틈타지 않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드려야 합니다. 혼인잔치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잔치입니다(마22:1~14).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신 남녀가 하나가 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마19:5~6). 뿐만 아니라 신랑이신 예수님과 신부인 성도들의 혼인잔치의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럴지라도 사치스럽고 요란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코로나19는 세상 풍속 습관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볼 기회입니다. 세상 살아가면서 신앙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잔치는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가 했던 것처럼 예수님을 위한 잔치입니다(요12:1~3). 그들은 예수님께서 마르다 자매의 오라버니 나사로를 살려주신 은혜가 너무나 고마워서 주님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고 그날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드려 모든 영광을 돌렸습니다. 오늘날 신앙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잔치는 주님을 위한 잔치입니다.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주신 주님을 위하여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잔치입니다(시50:14a). 참 된 감사는 내 마음에 드는 일만 아니라 마음에 들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드리는 감사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에게 서원을 갚는 잔치입니다(시50:14b). 어려울 때 잘 믿기로 했던 서원이 어려움이 해결 되면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하나님께 했던 서원을 기억하고 주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갚는 서원은 잔칫상의 음식입니다. 마리아처럼 가장 좋은 것으로 주님께 드리는 잔치는 우리의 중심입니다(요12:3). 이러한 잔치에는 향유 냄새가 가득해집니다. 이러한 잔치는 마음이 즐거움으로 매일 잔칫날이 됩니다(잠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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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잔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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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지렁이 같은 야곱’
-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사 41:14). 야곱은 택함을 받은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야곱을 지렁이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개역개정에는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대신에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평소에는 흙 속에 숨어서 흙을 헤치며 먹이를 찾고 있다가 비가 오면 나타나는 지렁이들은 가장 약한 동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당시 이사야가 이 말씀을 선포하던 때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당하고 포로가 된 때였습니다. 스스로는 일어설 수 없는 때였습니다. “생명이 오그라들 때 목수 청년이 보이지 않는 젓가락으로 나를 집어 올렸다 그리고 질척한 흙속으로 밀어 넣고 나는 그 때 햇볕 쨍쨍한 시멘트 바닥에서 체액이 말라가는 길 잃은 한 마리 지렁이였다.” 이 시는 김영교 시인의 ‘그 젓가락’ 이라는 시입니다. 체액은 조금씩 말라가고, 까치는 부지런히 그들을 찾고 있으며, 무수히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밟힐지 모르는 그 상태가 당시 이스라엘의 상태이며, 과거 믿지 않았을 때 우리들의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지옥에서 들어 올려 생명수 강이 흐르는 하나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돌아보면 이스라엘의 삶은 그야말로 지렁이와 같은 삶이었습니다. 애굽의 노예상태에서 바로의 학정을 받으며 살아왔던 430년간의 삶, 바벨론의 포로 생활, 페르시아의 식민지, 헬라와 로마의 압제....... 이처럼 1948년 신생국가가 될 때까지 2000여 년간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로 떠돌며 나라 없는 설움을 당해야 했습니다. 다른 민족이라면 벌써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들의 잘못으로 그런 결과가 초래했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은 약속을 잊지 아니하시고(렘33:19~26) 각 시대마다 모세,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 에스라, 느헤미야와 같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보내셔서 그들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우리에게도 일제 강점기가 있었습니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목적은 자원 확보와, 시장 확대를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마구잡이로 우리의 산천을 파헤쳤으며 식량을 강탈해갔습니다. 민족말살정책을 펴서 우리말을 사용할 수 없게 하였으며, 창씨개명을 통하여 일본식 성명으로 강제 변경시키도록 하였습니다. 곳곳에 신사를 세워놓고 참배를 거부하는 기독교인들을 잔인하게 옥사시켰습니다.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해방 될 수 없는, 본문 속의 지렁이와 같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자멸의 길을 택하였습니다. 여러 싸움에서 승리하자 그 기세를 몰아 세계 최강의 미국을 기습 공격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조선 독립을 위하여 미국을 흔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두 개의 원자폭탄을 맞고 항복하기에 이릅니다. 그동안 애국지사들은 국제사회에 끊임없이 외교활동을 펼쳤고, 그 결과 2차 세계 대전 중 미국과 영국과 중국(당시 장개석 총통)이 함께한 카이로 회담(1943.11.22~26)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받습니다. 그러다가 일본이 패망하기 직전에 독일 베를린 포츠담에서 열린 포츠담 선언(1945.7.26)에서 연합국은 한국의 독립을 재확인하고, 일본에게 그것을 요구합니다. 일본이 미국을 공격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조선 독립을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부르짖음과 간구의 눈물이 하나님께 상달 된 것입니다. 비천한 자를 돌아보시는 하나님(눅1:48)께서 지렁이 같은 조선을 불쌍히 여기셔서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폭격하게 만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코로나19라는 대 재앙 앞에서 백신이 개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렁이 같은 나약함을 보게 됩니다. 2021년 7월 8일 현재 코로나19 실시간 통계사이트 ‘월드오미터’에 따르면 전 세계 코로나19 사망자는 410만 6,724명으로 집계 되었습니다. 다윗이 인구조사로 사망했던 숫자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많은 숫자입니다. 우리 역시 이날 확진자 수가 1,274명으로, 백신투입이 인구대비 30%를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전 세계가 하나님의 손에 빠졌습니다. 다윗시대에는 사흘 만에 징계를 거두셨지만 지금은 1년 6개월이 지났는데도 끝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한 후 하나님 앞에 크게 회개하자 하나님께서는 갓 선지자를 통하여 다윗이 받을 징계를 택하라고 합니다. 첫째, 삼년 기근이었습니다. 둘째, 석 달을 대적에게 패하여 쫓기는 일이었습니다. 셋째, 사흘 동안 일어날 온역이었습니다. 만일 다윗이 회개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들이 동시다발로 일어났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회개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세 가지 중 한 가지만 선택하도록 하셨습니다. 다윗은 “내가 곤경에 있도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심히 크시니 내가 그의 손에 빠지고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나이다.”(대상21:9~13). 그래서 내린 것이 온역이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7만 명의 희생자가 나왔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은 자연 발생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빠진 재앙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빠진 일은 하나님이 손을 거두실 때만 끝날 수 있는 일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기 전에 먼저 통회를 하였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용서하여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대상21:8). 다윗은 그에게 넓은 영토를 주시고, 많은 인구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고 자신이 그 영광을 가로챈 죄를 회개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통회하는 자들에게 긍휼을 베푸십니다. 백신도 중요하지만 신앙인이라면 먼저 제사장의 심정으로 하나님이 손을 거둘 때까지 회개거리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의 열매를 맺기 위하여 힘써야 합니다. 우리의 행동으로 하나님께 어떤 대가도 요구 할 수 없지만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호10:12) 라는 말씀대로 하나님께서는 지렁이 같은 성도들의 몸부림을 긍휼히 여기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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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지렁이 같은 야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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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큰 돌무더기’
- “무리가 압살롬을 옮겨다가 수풀 가운데 큰 구멍에 던지고 그 위에 심히 큰 돌무더기를 쌓으니라.”(삼하18:17). 하나님은 아버지를 반역하고 왕이 되려하였던 압살롬에 대하여 진노하셨습니다. 전쟁 중에 그의 머리카락은 상수리나무에 걸렸고, 노새는 그의 몸에서 빠져나갔습니다. 그가 공중에 매달린 채 대롱대롱 있을 때 요압이 와서 창으로 그의 심장을 찔렀습니다. 무리는 그를 데려다가 큰 구멍에 던졌고 큰 돌무더기를 쌓았습니다. 이로서 전쟁은 다윗의 군사들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돌무더기에 대하여는 여호수아 7장에도 나옵니다. ‘여리고’ 라는 큰 성과 싸워 승리하였던 이스라엘 공동체가 아이라는 작은 성과 싸워 패하게 되고 용사 36명이 전사합니다. 하나님께 바쳐야 할 물건을 아간이 훔쳤던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아간은 돌에 맞아 죽게 되고 그 자리가 큰 돌무더기가 되었습니다. 그 골짜기 이름이 ‘괴로움’이라는 뜻을 가진 아골 골짜기입니다(수7:26). 예외도 있지만(창31:46~52), 이처럼 돌무더기는 죄 값의 처절함을 보여줍니다. 아간과 압살롬의 공통점은 절도입니다. 아간은 하나님께 드려야 할 물건을 훔쳤고, 압살롬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과 왕위를 훔쳤습니다. 게다가 압살롬은 아버지를 반역하고, 아버지의 후궁들과 백주에 동침하였으며, 아버지를 살해하려 했던 천인공노할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부모님을 저주만 하여도 죽을죄라고 말합니다(레20:9, 잠30:17), 하물며 반역하여 아버지를 죽이려 하는 자의 받을 벌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압살롬이 암논을 죽였을 때 바로 징계하지 아니 하시고,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아버지 다윗이 그술왕 달매에게 도망간 그를 당장 소환 요청을 하지 않은 것이 한 예입니다(삼하13:37~38). 그러나 압살롬은 하나님의 그런 사랑에 대하여 고마워하기는커녕 회개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죄는 점점 커지고 만 것입니다. 이처럼 죄를 지은 후 회개하지 않으면 점점 더 큰 죄에 빠지게 됩니다. 이러한 죄는 다음과 같은 특징들이 있습니다. 본문에서와 같이 죄에는 성장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죄는 점점 자랍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말처럼 행하는데 있어 점점 대범해집니다. 우리는 사울에게서 그런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울은 왕으로 뽑혔을 때 짐 보따리 사이에 숨을 만큼 수줍어했고 겸비하였습니다(삼상10:21~22). 그러나 왕이 된 후에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사무엘이 정한 기한에 나타나지 않자 제사장만 할 수 있는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중심으로 회개하지 않고 변명만 늘어놓더니 그의 범죄는 점점 커지고 증가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모두 멸하라고 하셨지만 사울은 오히려 아각 왕과, 살지고 기름진 가장 좋은 우양을 남겼습니다(삼상15:9). 심지어 기념비를 세워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자신이 차지했습니다(삼상15:12). 그러다가 자신이 멸하였던 신접한 여인을 수색해서 죽은 사무엘을 불러오도록 합니다(삼상28:8).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일을 서슴지 않고 한 것입니다. 그 결과 그는 블레셋과 전쟁에서 패하여 죽고 맙니다(삼상31:4). 이처럼 죄는 회개하지 않으면 점점 자라 죄 지은 사람으로 하여금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빠뜨립니다. 압살롬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형 암논을 죽인 죄에 대하여 아무런 회개도, 징계도 받지 않았던 그는 마침내 아버지를 반역하여 왕위를 찬탈하고 죽이려는 행동까지 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각에서부터 죄는 처리 되어야 합니다. 생각을 받아들이면 눈덩이처럼 불어나 결국은 실천에 옮기게 됩니다. 둘째로 죄의 중독성입니다.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죄의 낙 때문입니다. 쥐나 물고기가 맛있는 미끼에 속아 덫이나 낚시에 걸려들듯, 죄의 낙은 신앙인들을 미혹하는 미끼입니다. 설상가상 낙은 커 보이고 죄가 가져다주는 고통은 작아 보이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걸려들고 맙니다. 어거스틴의 참회록 가운데는 그가 어린 시절 나쁜 친구들과 어울러 타인의 과수원에서 배를 훔쳐 먹었던 일이 있었는데 배가 고파서 그런 것이 아니라 훔치는 기쁨 때문에 했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죄가 주는 낙에 비례하여 중독성도 강하게 작용합니다. 세 번째로는 죄에는 사망이 작용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3). 사망이란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영적으로 죽은 상태였습니다. 하나님과 전혀 교제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후 우리는 영적으로 거듭났습니다. 다시 산 것입니다. 영적으로 거듭난 사람이 죄를 지으면 죽음의 고통과 대가를 톡톡히 맛보게 됩니다. 영적인 고통은 물론 환경으로 곤고와 쇠사슬에 매이게 됩니다(시107:10). 그러니 죄를 지은 후 속히 회개해야 합니다. 네 번째로 죄는 전염성이 있습니다(갈5:9). 다윗의 죄로 그의 온 가족이, 압살롬 한 사람으로 죄가 온 이스라엘에 퍼진 것과 같습니다. 우리 자신은 ‘나 하나쯤이야’ 할 수 있지만 우리의 행동을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으며 그들의 행동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흉년이 들어 애굽으로 갔던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내 사라가 이복누이인 점을 들어 애굽 사람들에게 누이라고 속인 결과 바로왕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 후 사라는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돌아왔지만 애굽 왕 바로에게 아브라함이 책망을 듣습니다(창12:18~19). 그런데 아브라함의 이러한 거짓말을 이삭도 그대로 써먹습니다(창26:7). 그는 자신이 존경하는 아버지의 거짓말 방법까지 배운 것입니다. 이처럼 죄는 자신은 물론 주변사람에게까지 영향을 끼칩니다. 특별히 지도자 위치에 있는 사람의 행동에 대한 파급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범위 그 이상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돌무더기의 흔적, 아골 골짜기도 소망의 문을 삼아주실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호2:15). 죄 때문에 실망할 것이 아니라 회개하여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주님의 은혜를 간구할 때 넉넉히 이기는 사람이 됩니다(롬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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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큰 돌무더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