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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율법 아래 있는 자, 은혜 아래 있는 자’ (롬6:12-14)
-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와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죄는 믿지 않는 사람들의 죄와 차원과 다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죄는 십계명의 제 5계명 이하에 나오는 죄와 같은 것들을 의미합니다. 반면 신앙인들의 죄는 십계명에서 말씀하시는 것들은 물론이거와 한걸음 나아가 본문 말씀처럼 몸의 사욕을 순종하고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곧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차원을 훨씬 넘어섭니다. ‘법 아래’ ‘은혜 아래’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견해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크게 두 가지 면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구원에 관한 것이며, 둘째는 행함의 동기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말씀을 행하여야 구원 받고 행하지 않으면 지옥 간다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동기에 있어서도 징계가 두려워 행하거나 상급 보상을 바라고 행합니다. 행함의 주체 또한 자신입니다. 반면에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자신은 아무 공로 없지만 예수님께서 내 대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을 믿는 믿음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행함의 동기 역시 형벌이 두렵거나 보상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대신 죽어주신 사랑과 은혜가 너무나도 고맙고 감사해서 사랑의 강권함을 받아서 행합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말합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엡2:20b).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합니다(갈5:6). 주일 지키는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율법적으로 지키는 사람은 “이날 거룩하게 지키지 않으면 징계 와” “이날 사고 팔지 말라고 그랬으니. 매매하면 안돼.” 그렇게 지킵니다. 물론 이것도 소중합니다. 그러나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주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주님을 사랑함으로 이 날 하루를 온종일 거룩하게 지키자 ”하는 자발적인 사랑의 동기가 되어 지킵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처럼 남을 정죄할 틈이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함으로 지킬 때 사랑의 영이신 성령이 함께 하여 율법의 요구까지도 넉넉하게 이루어 주십니다. 보상이 문제가 아닙니다. 매가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너무 너무 감사하니까 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비록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아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이지만, 살면서 율법과 복음의 과정을 거친다는 점입니다. 자기 힘으로 지키려 하다가 깨어지고 넘어지는 과정이 필연적으로 따릅니다. 이런 과정이 없다면 주님께 대한 간절함과 겸손과 은혜의 소중함도 모를 것입니다. 바울같은 사람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는 탄식하는 과정 몸부림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이런 과정이 있어야 자신을 부인하게 되고 믿고 의뢰하며 주님의 은혜의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신앙인들은 은혜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고맙고 감사함으로 자원하는 심령으로 말씀을 지키려 할 때 사랑의 영이신 성령이 함께 하셔서 행하게 하십니다(빌2:13). 따라서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의 행함은 기쁨이고 활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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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율법 아래 있는 자, 은혜 아래 있는 자’ (롬6: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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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하나님 나라의 영웅’(단 3:13~18)
- 세상영웅 느부갓네살왕는 두라 평지에 자기신의 신상을 만들었습니다. 가장 귀한 금으로 만든 어마어마한 힘과 능력을 과시할 신상입니다. 자기 나라를 지켜주고 전쟁에서 이기게 하고 온 나라를 풍요하게 해서 잘살게 하는 신입니다. 신상 낙성식은 나라의 중요한 행사입니다. 모든 관원들이 낙성식에 참석 하여 그 신상 에게 절을 합니다. 그런데 만약 그 자리에서 신상 에게 절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왕을 반역하는 행동인 것이 명백합니다. 감히 왕의 신에게 경배하지 않는 것은 그 나라 관원으로서는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에서 잡혀 온 포로 소년 출신의 관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왕의 호위를 받고 왕의 인정을 받아 포로 출신이 그 나라의 관원이 되어 부귀영화가 보장된 삶을 살고 있지만 그 위에는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차마 왕의 신에게 절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사건 때문에 느부갓네살 왕이 불같이 화를 냅니다. 한번의 기회를 더 줄테니 자기 신에게 경배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풀무불 속에 집어 넣겠다고 합니다. 느부갓네살왕의 분노와 같은 맹렬하게 타는 풀무불이 눈앞에 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그 앞에서 믿음이 시험을 받게 됩니다. 여호와냐 금신상이냐는 결국 여호와냐 나의 목숨이냐가 되어 믿음을 지키는 것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로 진화 했습니다. 위기 앞에서 세 사람은 함께 마음을 보태서 결국 여호와를 선택하기로 결단합니다. 혼자서는 흔들릴 수도 있었지만 셋이 함께 하니 더욱 힘있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우리를 풀무불과 왕의 손에서 구할 능력이 있는 분이시지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왕의 신을 섬기지 않겠습니다.” 천하의 세상 영웅 느부갓네살왕 앞에서 누가 그를 거절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영웅들은 해냈습니다. 오직 여호와 그분만이 나의 하나님인 것을 고백하는 믿음이 한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자신을 반역한 자들을 평소보다 세배나 더 뜨겁게 달군 풀무불 속으로 집어넣으라고 명령합니다. 근처에만 가도 타죽는 이글 이글 타는 불은 보기만 해도 살벌하고 두렵습니다. 누가 능히 이 풀무불 속에서 살아남을 수가 있을까요? 이 장면을 계속 지켜 보던 사람들은 하나님이 능력이 있는 신이라면 기적이 일어나 그들을 풀무불 속에 던지지 않고 보호하시는 것을 기대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기대를 저버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풀무불 속으로 던져넣는 것을 그대로 두셨습니다. 아! 하나님은 정말 살아 계시는게 맞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무능력 하신 걸까요?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끝까지 가봐야 압니다. 잠시 후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채로 그것을 밖에서 지켜보던 왕은 갑자가 깜짝 놀랍니다. 분명히 풀무불 속에 던진 사람은 세 명인데 네 명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들은 결박이 풀린 채로 유유히 그 안에서 걷고 있었습니다. 전혀 뜨거워서 고통당하는 표정이 아닙니다. 게다가 그들과 함께 있는 정체불명의 또 다른 한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인 것 같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하나님은 그들의 믿음대로 풀무불 속에서 건져내고도 남는 분이신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풀무불 속에 아예 그들과 함께 들어와 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아무리 풀무불이라도 그들을 상하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가장 큰 축복이 아닙니까? 결국 세상 영웅 느부갓네살왕은 그 앞에서 선포합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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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하나님 나라의 영웅’(단 3: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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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예수님을 사랑하려면’(신 30:1~6)
- 스무 살 때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왜 예수님께 대한 사랑은 이성간의 사랑처럼 다가오지 않는 것일까? 만일 매혹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면 나도 뜨겁게 주님을 사랑할 수 있을 텐데........’ 그 다음날 예배시간이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속된 인간의 사랑같이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성간의 사랑은 우리가 노력하지 않아도 쉽게 느낌으로 다가오지만 예수님을 사랑하려면 우물에서 물을 기르는 것처럼 먼저 힘쓰고 애쓰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면서 본문 신30:2절 이하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것을 온전히 따라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이 말씀을 요약하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순종하면 사랑하게 해주겠다.”입니다. 사랑은 한꺼번에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랑도 하나님께서 하게 해주셔야 할 수 있는데 먼저 순종하는 일부터 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의 마음을 아시고 목사님을 통하여 응답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 때 받은 은혜가 지금도 생생합니다. 신앙인들이 느낌을 의지하면 환경에 지배를 받고 마귀의 속임에 놀아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지 자신의 감정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런 느낌이 없어도 순종하라고 하셨으니 순종하는 것이고, 사랑하라고 하셨으니 사랑하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느낌은 거짓입니다. 날씨처럼 수시로 변합니다. 다말을 연애하여 심화로 병이 들었던 암논이 자신의 정욕이 채워지자 이전 연애 감정이 이젠 미움으로 바뀐 것을 예로 들수 있습니다(삼하13:1-22). 순종하고 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 감정까지 주십니다. 그 때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 감정입니다. 롬7:22에는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라고 나옵니다.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것은, 예수님을 즐거워하는 것은 속 사람이지 육신이 아닙니다. 육신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려고하니 문제가 됩니다. 육신으로는 예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육신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착한 양심을 써서, 속사람을 쓴 사람들은 예수님을 존경하고 사랑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과 같은 사람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속사람을 써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사랑을 깨달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하여 먼저 묵상해야 합니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 묵상할 때에 화가 발하나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시39:3). 묵상할 때 화가 발합니다. 감동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영원한 구원 뿐만 아니라 현재 함께 하여 주시고, 인도하여 주시고, 돌아보아 주시는 은혜를 묵상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깨닫기 위해서는 눅7:36 이하의 한 여인처럼 자신이 사함 받은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죄를 많이 깨달을수록, 사함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알수록 주님을 많이 사랑합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7:47). 빚을 탕감 받은 일이 많은 사람일수록 고마움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속사람을 따라 순종하고 묵상하며 많은 죄 가운데서 사함 받은 것을 깨닫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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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예수님을 사랑하려면’(신 3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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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전염’
- “르호보암이 나라가 견고하고 세력이 강하매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니 온 이스라엘이 본받은지라.”(대하12:1). 며칠 전 저는 어떤 목사님 댁에 방문하였습니다. 마침 그 목사님은 아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부자간에 한 참 대화를 나누는가 싶더니 갑자기 아들이 “아버지, 그동안 저를 잘 참아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저는 둘의 눈을 피하여 어디론가 가더니 펑펑 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 나를 오래도록 참아주셨다는 생각이 밀려왔기 때문입니다. 꿈이었습니다. 왜 이런 꿈을 꾸었나 생각해보았습니다. ‘주사야몽’이라고 전날 저는 ‘해와달’이라는 소책자에서 이도형 교역자가 쓴 ‘덮어주신 은혜’라는 글 속에 삽입되었던 박찬석교수(전 경북대 총장)의 아버지에 대한 가슴 뭉클한 회고담에 전염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전염병이 꿈에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코로나19가 다소 멈추었나 싶어 ‘사회적 거리두기’에서 ‘생활 속 거리두기’로 전환한지 4일 만에 이태원 클럽에서 불씨가 일어나 여러 곳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국제화 시대라 어느 한 지역, 어느 한 나라가 안전하다 하여 안전한 것은 아닙니다. 백신이 개발되어 치료되거나, 지구 모든 지역에서 사라질 때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 사라졌나’ 싶어도 다시 일어나는 전염병, 몸의 전염병이 그러할진대 영적인 전염병은 더욱더 그러할 것입니다. 몸은 대면이나, 접촉이 필요하지만, 영적인 문제는 생각만으로 전염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지도자 위치에 있는 사람은 전염성이 더욱 강합니다. 그들은 슈퍼인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르호보암이 나라가 견고해지고 세력이 강해지자 하나님의 율법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약하면 붙들려고 하는데 강해지니 스스로 선 줄 알고 버린 것입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왕도 하는데 우린들 어때?” 하면서 르호보암의 행동들을 본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 후에 대부분의 제자들에게 이미 두 번이나 나타내 주셨습니다. 그러나 약속하셨던(막14:28, 16:7) 갈릴리에서는 아직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은 그곳에서 주님을 기다리다가 지쳤는지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베드로의 이 말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나타내 주시지 않으면 어떡하지? 우린 무엇을 먹고살지? 다시 어부로 돌아가자.’ 영향력 있는 베드로가 이런 말을 하자 다른 제자들도 덩달아 “나도” “나도” “나도” 하며 버렸던 것을 붙잡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의 근심이 그대로 제자들에게 전염된 것입니다. 전염을 한문 그대로 풀이하면 ‘전달하고 물들이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염에는 이런 좋지 않은 전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종려주일에 두 제자가 예수님이 지시하신 나귀를 끌고 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옷을 벗어 나귀 위에 올려놓습니다. 그러자 두 제자의 행동을 본 많은 유대인들도 자신들의 옷을 벗어 예수님이 지나가실 길에 펼쳐 놓았습니다. 이에 못 미치는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로 대신하였습니다(마21:7-8). 두 제자가 사람들에게 전염시킨 것입니다.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을 높이는 전염을 시킨 것입니다. 이처럼 전염은 우한코로나처럼 부정적인 전염만 아니라 제자들이 본을 보인 것처럼 좋은 전염도 있습니다. 성경은 “너희 열심이 퍽 많은 사람들을 분발하게 하였느니라.”(고후9:2b)라고 말합니다. 신자들의 태도가 많은 사람을 분발하게 하기도 하고 나태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나는 어떤 전염을 몰고 올까요? 기쁨의 전염, 사랑의 전염, 감사의 전염일까요? 아니면 가룟 유다처럼 불평의 전염일까요? 형제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려면 십자가 지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옛사람이 다시 활동할 때에는 썩은 냄새밖에 피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나타날 때 비로소 생명과 기쁨의 전달자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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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전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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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데일리 기도] 김우상 학술이사의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기도’
- 하나님! 항상 하나님을 대면하고 있지 않으면, 항상 성령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있지 않으면 어느샌가 저는 죄를 짓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하나님! 또다시 코로나 감염자가 창궐할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첫번째 창궐은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인간의 영혼을 파괴하고 가정을 파괴하고 돈을 벌고 권력을 누리는 집단인 신천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두번째 창궐은 쾌락을 좇아 흥청망청 술을 마시고 춤추고 난잡한 행위를 일삼는 곳인 클럽, 주점, 블랙수면방 등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신천지로 인해서는 주로 대구에서 확진자가 많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클럽을 다녀간 젊은이들은 주로 서울 경기도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인구수를 감안한다면 서울, 인천, 경기도에서 앞으로 대구보다 10배 이상 많은 확진자가 나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교회는 문을 열지 못할 것이고 경제는 다시 침체될 것이고 겨우겨우 버티던 수많은 우리의 이웃들이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하나님! 아직도 대한민국의 백성들과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 지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손을 거두지 않는 것이겠지요? 지금 여기를 사는 대한민국 백성은 거의 대부분 정도가 심하든 덜 심하든, 이웃은 어찌 되든지 말든지, 자신의 쾌락과 욕망만을 추구하는 이기주의를 살고 있습니다. 이태원클럽에서의 제2의 코로나 창궐은 정확히 그 부분을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금 여기를 사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도 상황은 비슷해 보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기에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사랑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세상 쾌락과 욕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 우리들의 죄를 회개합니다.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겠습니다. 나의 욕망을 추구하는 일에 하나님을 이용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 이태원클럽 코로나 사태가 일파만파 퍼져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목숨을 잃을까 두렵습니다. 하나님! 염치 불구하고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긍휼과 자비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 우리에게 안식의 은혜를 내려 주심에 감사를 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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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데일리 기도] 김우상 학술이사의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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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임우성 목사의 ‘목사안수 쓴 소리’
- 한 후배 목사님이 교회 개척을 했다. 신학교 동기 목사님이 와서 돕는 다 해서 참 감사한 일이라고 여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부득이하게 교회 문을 닫게 되었다고 했다. 참 안타깝고 슬픈 일이었다. 그 와중에 이런 애기를 한다. 돕기로 하고 오신 목사님이 자신보다는 연배가 높고 사역 경험이 많으신 분이라 1부 설교를 맡겼단다. 1부 설교에 열정, 열정, 다 하시고 설교내용은 '믿음과 행함으로 가득 찬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행함 없는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진노와 껍데기신앙에 대한 회개의 선포 한 마디로 부흥회식 설교를 하셨단다 졸거나 집중하지 않는 성도는 용납지 않고 무서운 책망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어서 2부 담임목사인 자신의 설교시간엔 맨 앞자리 앉아 아예 잤고. 십일조도 안 했다 한다. 교회 문을 닫아서 마음이 아프나 이 분을 안 보게 돼서 시원한 마음도 있다는 애기를 들었다. 주인의 눈에 매운 연기 같은 일꾼이라면 같이 일 할 수 없다. 신학교에서 초청받을 때가 있다. 이때 목회지망생들에게 늘 강조하는 단골메뉴가 있다. 섬기는 교회 담임목사님이 이단이 아닌 한, 충성을 다하라. 하나님이 그분을 세우셨다. 부교역자로서 종의 마음으로 섬기기를 다하십시오, 부교역자인 신분에서 충성과 헌신을 다하시면 당신들이 담임목회자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신다 강조 한다. 하지만 내가 봐도 반응도 없고 인기는 없다, 그래도 계속 한다 어딜 가든. 사실 전도사로 3년간 사역을 했지만 새벽기도 철야기도 예배참석 전도만 열심히 했다. 사역이 맡겨지지 않았다. 3년 후 처음으로 찬양 인도를 하라 해서 두렵고 떨림으로 여러 번 사양 후 시작했다.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단에 선다는 자체가 두려웠다. 목사안수 받고도 두려워 강대상에 올라가지 못하고 강대상 아래 사회상에서 설교했지만, 또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감히 내가....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강대상 앞에 두렵고 떨렸다. 1996년 남산 순환도로 초입에서 개척했으니, 목회도 어언 24년이 넘어서지만 지금도 마찬가지다. 떨린다. 주머니 한쪽에 손을 넣고 설교 하는 분들 강대상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아 앉아 계시는 분들도 있다 휜다리 골반 척추 하지정맥류에 좋지 않다고 하니 걱정도 된다. 왠지 주님과 너무 친근하셔서 인가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제가 감히 관여할 일은 아니지만. 사도바울은 예수님 믿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고백한다, 자신이 목회자 중 가장 작은 자라고, 그 다음 더 시간이 가니 성도 중 가장 작은 자라고 했고, 말년에는 자신은 죄인 중 괴수라고 고백했다. 믿음의 연조가 있을수록 더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성경적이다. 어느 여 집사님이 찬양을 부르는데 감동받았다. 지금도 여운이 깊다. 가창력이 좋고 스킬이 좋아서가 아니다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라는 가사가 들어가는 곡 인데 이 여 집사님은 '주 예수 나의 당신' 이라 부르지 않고 '주 예수 나의 주님이여' 라고 부르셨다. 이유는 어떻게 예수님을 당신이라 호칭할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영어로는 어른에게도 YOU 라고 부를 수 있겠지만, 우리는 어르신을 당신이라 부를 수 없는 것 같이, 감히 하나님을 당신이라 부를 수 없기에 '주 예수 나의 주님이여' 라고 부른다고 하신다. 요즘 십일조 설교 하면 돈 욕심이나 내는 한심한 시대에 뒤 떨어진 속물 목회자라고, 헌신과 충성 순종을 강조하면 지금이 어느 때 인데 구닥달이 애기나 하고 있어가 되어 버렸다. 하나님 말씀이 뒷전이 되어버린 것이다. 예례미야 35장. 레갑족속은 하나님께서 포도주를 마시라 했는데도 선조 요나답 으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이니 마시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집을 짓지 말고 포도원과 밭을 사지 말고 장막에서 살라고 한 명령을 계속 지키고 살았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에게는 재앙을, 이에 대조되는 세상시류에 섞이지 아니하고 경건하게 살아가는 레갑족속에게는 하나님 앞에 설 자가 영원히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칭찬하시며 복을 선포하셨다. 십 수년 전, 십여 분의 목사님들과 해외에서 해마다 행사가 있어 보름 정도 일정으로 몇 년을 같이 다녔었다. 비행기 안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와인서비스를 요청하여 얼굴이 벌게 지신분도 계시고. 캐나다 아이스와인 공장 방문 때는 와인 한 잔씩을 돌리며 와인공정에 대해 설명을 해 주는데 목사님들의 한 잔만 더 달라는 요청으로 설명회 진행이 어려울 지경이었다. 목사님들인 줄 다 알고 있는데. 예수님 믿기 전 잘 마셨었지만, 믿고 난 후 술을 끔찍하게 여기고 결별한 터라 거절하니 제 것을 낚아채가는 목사님으로 만감이 교차했다. 그분들이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이셨고 지금도 그렇다. 적어도 하나님께 부름 받은 목회자라면 와인 한 잔 정도는 괜찮다고 세련되게 살지 말자. 세상과 섞여 살지 말자 술까지 마시려면 세상 직업을 가지라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막중한 위치에 있지 않은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벧전1:16) 목회자를 목회자답게 보지 않고 존경하여 섬기는 전통도 사라지고 있다. 담임목사님의 생일을 아시냐고 물어보면 요즘 촌스럽게 그 딴거 챙기는 시대가 아니란다, 그 교회 중직들의 반응이다. 제가 섬기는 교회는 전혀 아니지만. 하지만 시대가 이렇게 되어 버렸다. 직장에서도 상사가 부하직원에게 당연히 지시 할 사항인데도 항의 한단다. 노동법, 근로기준법, 운운하면서 일 열심히 하는 직원보다는 베짱이 같은 직원이 특히 그렇단다. 요즘은 그대로 그냥 놔둘 수밖에 없단다. 자칫하면 고발당한단다. 교회에서도 똑같은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다. 충성은 없고, 주중예배와 새벽예배에는 참여도 안하고 헌금도 제대로 안하는 분들이 불평과 불만을 많이 한다. 마치 교회를 무너 뜨릴려는 신천지의 수법과 같다. 방송에는 잘 나와서 복음 허무는 말, 교회 흠만 족집게 같이 찾아내서, 발표하는 그런 분들 같이 말이다. 이런 현상은 남의 일이다,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 나와는 상관없다고 나단의 책망을 받기 전 다윗같이, 실상은 나 자신을 돌아볼 때다. 최근에 일어난 일이다 가족 없이 홀로 계신 분이 소천하시기 전 바른말 잘하기로 소문난 유명목사님께 억대의 유산을 공증까지 해서 다 드리면서 목사님 제 장례식에는 부조금을 절대 받지 말아주세요, 신신 당부 하면서 눈을 감았다. 눈 감자마자 부조금부터 받더란다. 적잖은 분들이 실망했다고 한다. 돈 된다면 무슨 일이든 하는 발람이 생각난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사사기 25:21) 교회 돈 쓰고 남의 돈 받는 건 조자룡이 헌 칼 쓰듯 하면서, 자기들은 착하고 여리단다, 소심하단다. 그래서 당하기만 하고 남을 돕기만 하는 성품들이란다. 욕심이 없단다. 정작 하나님의 거울에 나 자신을 봐야 하지 않을까. 저의 장모님은 장인어른이 믿기 전까지 월급에서 몰래 십일조를 떼며 열심히 신앙생활 하셨다, 실상 쫓겨 날 각오로 신앙생활 하신 거다. 평신도가 믿음이 더 좋은 경우가 수다하다. 적어도 평신도는 예배에 순서 안 맡겨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예배드리러 나온다. 목회자들 중 행사에 자기를 순서 안 맡겼다고 평생 원수 맺는 사람들 많이 봤다. 거동도 제대로 못 하시고 축도도 잃어버리고 못 하시면서, 자신을 강사로 안 세워 준다고 이를 가는 분도 봤다. 박조준 목사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발음에 문제 생기면 대중설교 안 한다. 자신에게 치매가 오면 절대 자신을 세우지 말라는 부탁이셨다. 너무 절제가 몸에 베어 계신다 서슬 퍼런 군부 에게도 다 거절하시다 그 어려움, 수치 다 당하셨는데도 지금도 여전하시니 독야청청이 어울리는 의복같이 여겨진다. 유명한 분들 중 죽을 때까지 원수 관계 못 풀고 가는 분들, 이름 대기도 바쁘다. 이유는 자기 순서자로 안 불렀다, 자기 안 세워 줬다는 것이다. 차라리 행사에 헌신도 하고 재정적 공헌도 하면서 순서를 바라는 것이 오히려 양심적이고 정직하다 받으려고만 하기에 그렇다. 그래서 목사와 중직자 자녀와는 결혼시키지 말라는 속설까지 생겼단다. 다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보고 자라난 아이들이 받을 줄 만 아는 습성을 본받아 고질병으로 자리 잡아 일생 베짱이 같은 신앙으로 살아간다. 많은 분들이 어디서든지 설교를 하고 싶어 한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고 헌신 봉사 십일조 주일성수 회개하라고 목청 높인 설교와 기도는 감정까지 고조 되어 울먹이면서까지 너무 잘한다. 그러나 설교는 설교자 자신에게 제일 먼저 적용되어야 한다. 설교대로 살아내야 한다. 이때 더욱 목사안수가 중요함을 절감한다, 안수 받아 서는 안 되는 분들을 거절치 못할 분 추천이라고, 스승의 자녀라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분이라고, 많이 배운 고학력 박사라고, 유명연예인이라고, 또는 유명깡패 출신을, 자질과 인성이 안 되는 분들을 목사안수하면 안 된다. 십 여년 전 일이다. 타 단체에서 임원으로 실무에 몸담고 있을 때였다. 최고 학력과 외국 유수의 대학 박사학위 소지자가 목사고시 청원했다. 더구나 그분 아버지가 소천 하셨지만 한국에서 존경받는 최고의 신학자 중 한 분이셨다. 면접 때 보니 자세가 면접관이 반대로 그분 같았다 왜 목사가 되려 합니까? 질문에 라이센스가 여러 개 있는데 목사 라이센스도 필요해서란다. 저는 불합격판정을 내렸다. 그런데 합격해서 신학교 강의도 하고 자신의 가족에 대해 부정적으로 쓴 책을 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합격 이유는 면접관인 임원분들과 그 분의 아버님 신학자와 친한 사이였단다. 그래서 합격시켰단다. 가끔 공통된 문제를 가지고 문의 하는 분들이 있다, 소위 제일 크다는 양대 교단 출신자 중에서 자기 교단에서 목사 고시, 강도사고시까지 통과했는데 외국 시민권자라 안수가 안 된다 등등의 이유이다. 안수 신청할 수 있냐는 것이다. 문의 가능하다, 고시 청원도 가능하다. 하지만 자기는 큰 교단에서 목사고시 강도사고시 합격했으니 여기서는 그냥 목사고시 없이 안수 해 달라는 분들이 상당수다. 너무 무례하다 큰 교단에서는 뺨을 맞고 생면부지 타 기관에는 그것도 전화로 생떼를 부린다. 예수 믿는 것은 자기의 권을 쓰지 않는 것을 모르는 분은 아예 목회자가 되어 서는 안 된다. 강자에 무릎 꿇고 약자에 갑질 하는 자는 목회자가 되지 말자. 십자가 없이 부활 영광 누리겠다는 분들은 목회를 꿈도 꾸지 말라. 또 한 분 잊혀 지지 않는 분이 있다. 미국 신학교 교수인데 한국 신학교에서 교수로 러브콜을 받았는데 한국서는 박사학위 외에 목사 안수증을 원한다고 목사안수를 서류로만 받을 수 있냐는 기상천외한 신학교 교수도 있었다. 호통을 쳤더니 다른 단체로 갔다. 이런 분들이 교회개혁 외치는 모습 보면 가슴이 저리다 못해 통증까지 온다. 목회자로 부르신 분에 마음에 들어야 한다. 세상 조건이 아무리 훌륭해도. 최근 국제독립교회연합회 목사고시와 면접을 마쳤다. 엄격하게 한 다 소문이 나서, 지원자가 적다. 하지만 남은 자와 같이 알곡들이 모인다. 우리 모두가 하늘나라를 두렵고 떨림으로 준비하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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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임우성 목사의 ‘목사안수 쓴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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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미완성된 바벨탑’(창 11:1~8)
- 함의 아들 구스가 니므롯을 낳았습니다. 니므롯은 영웅 이었습니다. 시대마다 영웅들이 있습니다. 사람 중에서 가장 뛰어나서 보통 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일을 해내는 사람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이런 탁월한 자들이 있습니다, 니므롯과 그를 따르는 무리 들은 동방의 시날에 가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돌로 성을 쌓던 시대에 벽돌을 발견하고 진흙을 쓰던 시대에 역청을 만들었습니다. 대단한 발견입니다. 그들은 사람 중에서도 뛰어난 위대한 사람들인 것은 분명합니다.위대한 사람들이 발견한 그것으로 무엇을 하는가 보니 그들은 자기들의 세상을 만듭니다. “자, 벽돌을 견고하게 구워서 무너지지 않는 하늘까지 닿을 수 있는 도시를 만들자. 그 도시에 인류를 하나로 묶어 우리의 세상을 만들고 그들을 다스리는 한 사람을 세우자!” 자기들이 발견한 뛰어난 실력으로 그들은 자기들의 세상을 창조합니다. 하나님 없는 세상 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창조주가 되어 인류를 다스리며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합니다. 더 높이 더 높이 올라가다 보니 가장 높은 자리가 창조주 하나님의 자리입니다. 그곳이 가장 높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곳만 접수하면 이제 다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만드는 성을 보려고 내려오십니다. 위대한 인간은 창조주의 자리를 대신하여 자기들이 하나님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하지만 그들 위에는 분명히 하나님이 계십니다. 창조주 하나님만 자기가 만든 피조 세계를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의 자리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발상 자체가 모순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인류의 가장 뛰어난 이들이 사실은 가장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결국은 시날에서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은 인류 역사 속에서 교회와 대적하고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창조주의 한 번의 움직임으로 결국 그 성은 완성하지 못하고 그들은 성 쌓기를 그치고 온 땅으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 성의 이름이 바벨입니다. 바벨탑은 결국 쌓지 못했습니다, 그 영웅의 후손들은 여전히 인류 중 에서는 가장 탁월한 영웅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겠지요, 자기들의 세상을 창조하겠다는 조상들의 유업을 계속 충실하게 이어나갈 것입니다. 인간은 창조주처럼 세상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만든 세상을 창조했습니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세계입니다. 보이지 않고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세상인데 힘을 실어주니 진짜 현실이 되어 버려서 존재하지도 않는 사이버 세상이 현실에서 힘있게 존재합니다. 실제는 없는 세상인데 접속만 하면 현실이 되는 세상입니다. 학교도 될 수 있고 친구를 만날 수 있는 곳, 모임장소, 매매가 이루어 지는 곳, 탁월한 인류는 인간이 만든 자기들의 세상 안으로 창조주가 만든 땅의 세상을 끌어 들였습니다. 인간이 만든 세상으로 하나님이 만드신 땅의 세상을 통제하기 시작합니다. 급기야 가상의 세계는 그 안으로 영적인 예배 까지 끌어 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합리적인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가상세계의 예배도 좋다’라고 안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다 동원해서 최고의 것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가를 이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막 12:30)’ 왜냐하면 하나님은 한분 이시며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시대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믿음도 그 어려운 시대에 비례해서 더 강해야 지킬 수 있습니다. 그게 계산이 맞지요. 인류는 자기 나라를 만들지만,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어갑니다. 바벨탑은 완성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역사 속에서 인생들이 자기 힘으로 무엇인가를 이루려고 해도 최종결제는 그 위에 계시는 하나님이 사인을 하셔야 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그때는 하나님이 창조하지 않으신 가상의 세상은 무너지고 하나님의 것만 존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만 남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 그 나라에 들어오라, 그 나라에 들어와야 산다,’고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경기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어떤 장애물이 있더라도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까지 끝까지 완주하여 승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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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미완성된 바벨탑’(창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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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습니다’
- 누가 이런 사람 모르시나요?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람을 찾습니다. 1.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사람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렘5:1). ‘공의’는 하나님께도 옳고 타인에게도 옳고 자신의 양심에도 옳은 것을 뜻합니다. 2.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는 사람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 고로”(겔22:30). 여기서 성은 ‘거룩함’을 의미합니다. ‘거룩함’의 성을 쌓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찾습니다. 3.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행13:22).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같이 기뻐하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을 같이 싫어하는 마음입니다. 공감입니다. 4.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사람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 하시고”(겔9:4). 두 종류의 탄식이 있습니다. 자신의 죄로 인한 탄식과 타락한 세상으로 인한 탄식입니다. 롯은 소돔성의 죄로 인하여 날마다 의로운 심령이 상했지만(벧후2:6-8) 자신의 죄로 인한 탄식은 하지 않았습니다. 겨우 불 가운데서는 구원을 받았지만 두 딸과 함께 굴에서 살면서 술로 여생을 보냅니다. 5. 전심으로 하나님께 마음을 향하는 사람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대하16:9). 우리 마음을 나누게 하는 것, 전심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염려와 재리와 일락입니다(눅8:14). 그것들로 인해 기도해야 합니다. 6.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게 행하는 사람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인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 하리라”(창18:32). 하나님은 자신이 경건치 못하는 것을 깨닫고 주님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을 믿는 사람을 의롭다고 여기십니다(롬4:5). 7.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사람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14:2-3). 지각으로 하나님을 찾는 행위는 거듭난 양심, 곧 선한 양심을 힘 있게 쓰는 것입니다(벧전3:21). 8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사람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는 ‘성령과 진심’으로 예배드리는 자를 뜻합니다. 9 하나님의 종이 되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 “내가 내 종 다윗을 찾아 나의 거룩한 기름으로 부었도다.”(시89:20). 종은 자기 뜻대로 살지 않고 주인 한 분의 뜻을 찾아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찾습니다. 10 길 잃어버린 사람 “인 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 목자의 입장에서 잃어버린 것은 ‘양’이지만 양의 입장에서 잃어버린 것은 ‘목자와 길’입니다. 양의 입장에서 온 우주에 충만하신 주님을 왜 잃어버릴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골1:21). 회복하기 위해서는 순종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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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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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모세의 설교’(신 8:11~20)
-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시겠다는 땅을 목전에 두고 건너편에서 그 땅을 바라보고 섰습니다. 40년동안 광야에서 참 길고 먼 세월을 지나서 왔습니다. 많은 일들을 함께 겪고 드디어 그 땅에 들어가기 바로 직전, 백발이 성성한 모세가 그 앞에서 당부하고 또 당부하는 말씀입니다. 모세의 말을 듣는 청중은 20대입니다. 20여년 동안 자기가 겪고 보고 아는 것 이상으로는 알 수 없는 세대에게 노인 모세가 120년 동안 자기가 겪고 보고 아는 것을 쏟아놓는 주옥같은 설교입니다. 그 내용이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자 이제 가나안의 그 땅에 들어가면 하나님이 분명히 복을 주실 것이다. 그때 너희는 ‘하나님을 잊고,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않는 일이 없도록 삼가라 (신 8;11)’ 고 합니다. 세상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의 백성은 가장 중요한 삶의 원칙으로 세웁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냥 자기가 열심히 성실하게 사는 것 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번성하게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라’ 는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자기 신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그 말을 들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모든 피조물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존재하고 번성합니다. 하나님이 피조물 중의 인간을 특히 교회를 자기 것으로 삼으시고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교회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크신 하나님이 나를 상대해 주시는 것입니다, 좀 더 가까이에서 느껴지도록... 내가 정말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으로 대한다면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가장 기본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들에게는 삶의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면 누가 이것을 중요하다고 생각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이 사실을 잊어버리지 말라고 합니다. 잊지 않기 위해서 의지적으로 기억을 붙잡아서 흘려보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애굽에서 어떻게 홍해를 갈라 그 백성을 빼내어 오셨는지, 광야에서 어떻게 인도 하셨는지... 불뱀과 전갈이 있는 위험한 광야에는 물도 먹을 양식도 없었습니다. 광야는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40년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반석에게 물을 내라고 명령 하셔서 거기서 나오는 물을 마셨고, 아무도 몰랐던 신비한 만나를 하늘에서 내려주셔서 먹이시면서 그곳을 지나게 하셨습니다. 기적입니다. 광야는 내가 누구인지가 분명하게 보이는 곳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나, 그래서 하나님이 절실하게 필요한 나, 하나님이 아니면 내 힘으로는 살 수 없는 광야에서 하나님이 보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나의 본질이 다 드러나서 처절하고 비참한 광야가 저주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다릅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라 (신 8:16)” 하나님의 본심은 마침내 광야가 나에게 복을 주시기 위한 장소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복은 광야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야 복인데 광야에서는 하나님이 보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립니다. 그 말씀이 들리니 순종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이 주시려는 복을 받을 수 있는 곳입니다. 복은 비로소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모세는 말합니다.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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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모세의 설교’(신 8: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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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합2:3). 제가 시골에 살았을 때는 동네에 보일러를 설치해 놓은 집은커녕 연탄을 피우는 가정도 없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마른 솔잎과 잔솔가지들을 모아다가 불을 지피기 마련인데 그런 나무들에는 구들이 쉽게 달궈지지 않았습니다. 도끼로 장작을 패서 아궁이에 집어넣어야 달구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구들이 얇을수록 방은 쉽게 따뜻해졌지만 반면에 두꺼운 구들은 어지간한 장작에도 반응이 없었습니다. 인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벌써 몇 번은 일어섰을 것입니다. 하지만 불을 지피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반드시 달궈진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 확신이 있기에 멈추지 않고 장작을 넣었던 것입니다. 벌써 오래 전의 일입니다. 친구가 당시 잘 나갔던 회사에서 사표를 쓰고 나온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아니, 왜 그렇게 좋은 직장을 그만 두고 나왔느냐?” 고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너무 쉽게 들어갔기 때문이랍니다. 쉽게 들어갔기 때문에 회사에 대한 애착이 가지 않아 더 공부해서 자신의 마음을 쏟을 수 있는 직장을 찾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인들 가운데는 아직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거나 믿음에서 떠난 주변 사람을 위하여 애타게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배우자를 위하여, 혹은 가족이나 친척을 위하여 오랫동안 기도를 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수고와는 무관하게 그들이 마음을 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소망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망해서는 안 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는 약속은 변함없기 때문입니다. 구들에 불을 지피면 반드시 달구어지리라는 확신처럼 구원에 대한 소망을 분명히 가져야 합니다. 구원은 가족단위입니다. 노아의 의로운 행동으로 말미암아 반항심이 많았던 함도 구원을 받았습니다(창7:6-7). 기생 라합이 이스라엘 정탐들을 숨겨주었기 때문에 그와 그의 부모 형제들이 구원 받을 수 있었습니다(수6:25). 사도행전에 나오는 간수 또한 그의 온 집이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행16:33). 내가 믿기 때문에 다른 형제들도 구원을 받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로 믿으면, 십자가 지고 주님을 따르면 아직 주님을 영접하지 않은 형제들에게도 생명이 역사하여 하나님께서 구원을 주실 때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를 시작한 지 1년 안에 결실을 거두지만 다른 사람은 10년 혹은 20년이 되어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심지어 기도한 사람이 고인이 되어서야 나타나기도 합니다. 더디거나 느리다 해도 기도를 멈추지 말고 계속해야 합니다. 쉽게 달구어진 구들은 곧 식어버리지만, 오랜 시간 동안 달구어지는 돌은 쉽게 식지 않듯 시간과 정성이 많이 들어간 후에 응답 받은 기도는 그렇지 못한 내용들보다 감사와 기쁨이 더 크며 오래 지속됩니다. 본문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합2:3)는 말씀은 구원의 때만 의미하는 바가 아닙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모두 적용 됩니다. 육신은 조급한 특징이 있지만 영혼의 성장은 인내할 때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 역시 사랑의 감정이 없을지라도 의지를 써서 사랑을 묵상하고 말씀을 믿고 순종해 나가면 분명히 마음의 할례를 베풀어 주셔서 사랑의 감정까지 주실 때가 있습니다. 포기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와 간구의 불을 지피시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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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더딜지라도 기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