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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간절함’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1:20).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그 몸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일이었습니다. 죽고, 살고, 부끄러움을 당하고 안 당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일이었습니다. 신앙인이라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자신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문제는 그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가? 그렇지 않는가에 있습니다. 간절함과 유사한 말은 절실함입니다. 절실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소원은 ‘이루어진다면 좋겠다.’는 정도가 아니라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입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절실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모두 들어주셨습니다. 에서 문제로 얍복강 나루에서 밤새 씨름하던 야곱의 기도를 들어주셨고(창32:29), 브닌나로부터 심한 멸시를 받았던 한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사무엘을 주셨습니다(삼상1:20). 이사야 선지자로부터 죽고 살지 못하리라는 말을 전해들은 히스기아왕은 눈물로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의 눈물을 보시고 15년의 수명을 연장해주셨습니다(사38:15). 예수님 당시 많은 병자들 역시 그들의 간절한 소원만큼 고침을 받았습니다. 사도시대에는 헤롯이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마저 죽이고자 옥에 가두었을 때, 마가의 집에서 성도들이 모여 일심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어 그를 겹겹이 지키는 파수꾼들을 뚫고 나오게 하였습니다(행12:1~19). 이처럼 하나님으로 하여금 침묵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간절한 기도입니다. 간절함은 어디서 만들어집니까? 삼하13:39는 “다윗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향하여 간절하니 암논은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음이더라.”라고 말합니다. 간절함은 마음을 향할 때 일어납니다. 예수님께 마음을 향하면 예수님께 대하여 간절함이 일어납니다. 세상으로 향하면 돈에 대한 간절함, 명예에 대한 간절함이 일어납니다. 향한다는 것은 방향을 정하고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바라봄은 생각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간절함을 불러일으킵니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7:11).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자신에 대한 불만에서 나옵니다. ‘내가 이렇게 믿어서는 안 되는데’ ‘내가 이렇게 게을러서는 안 되는데’ ‘내가 이렇게 예배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데’ 등과 같은 불만에서 비롯됩니다. 환경이나 하나님께 대한 불평불만은 멸망을 자초하지만 자신에 대한 불평불만은 간절한 마음을 일으킵니다. 간절한 마음은 의를 사모하는 자에게 일어납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시63:1). 목마르고 주린 심령이 간절한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하나님 보시기에 옳게 살아가기를 소원하는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앙인들의 간절함을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환난을 허락하십니다. “여호와여 백성이 환난 중에 주를 앙모하였사오며 주의 징벌이 그들에게 임할 때에 그들이 간절히 주께 기도하였나이다.”(사26:16).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기한(400년)이 가까웠는데도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움직여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역을 시키도록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제야 조상들이 섬기던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하였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어 그들을 인도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환난은 간절한 마음을 불러일으킵니다. 하나님께 대한 간절함은 하나님께 마음을 향할 때,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할 때, 의에 주리고 목마를 때, 환난 때 일어납니다. 처음부터 세 번째까지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일으키는 간절함인 반면, 네 번째는 하나님께서 교만하고 태만한 사람을 징계하심으로 일으키는 간절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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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27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아드리엘과 발디엘’
    “그 남편이 저와 함께 오되 울며 바후림까지 따라 왔더니 아브넬이 저에게 돌아가라 하매 돌아가니라.”(삼하3:16). 다윗은 사울왕의 딸 미갈과 혼인하기 위하여 블레셋 용사의 양피 일백을 사울에게 바쳤습니다. 미갈은 엄연한 다윗의 아내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도망자 신세가 되자 사울왕은 그를 라이스의 아들 발디엘에게 줍니다(삼상25:44).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미갈은 발디엘의 아내로 지냈습니다. 그 후 사울과 요나단이 블레셋과 싸움에서 죽임을 당한 후,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군대장관 아브넬이 이미 유다 족속의 왕이 된 다윗에게 온 이스라엘을 넘기기 위하여 다윗 왕을 찾아가겠다고 기별하였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우선 자신의 아내 미갈을 데려오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은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정이 듬뿍 든 발디엘이 미갈을 울며 보내는 내용입니다. 아무리 본 남편이었던 다윗에게 다시 보낸다고 하지만 참으로 이 순간만큼은 발디엘에게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시, 다윗이 사울의 신하였을 때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딸 미갈을 다윗에게 주기 전 먼저 미갈보다 나이가 많은 메랍을 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딸을 다윗에게 줌으로써 다윗을 싸움에 나가 죽도록 할 셈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였는지 사울은 다윗에게 줄 시기에 메랍을 아드리엘에게 아내로 줍니다. “사울의 딸 메랍을 다윗에게 줄 시기에 므홀랏 사람 아드리엘에게 아내로 준 바 되었더라.”(삼상18:19). 사울은 자신의 딸까지도 다윗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삼으려 했는데 아마도 그럴만한 기회를 찾지 못하자 아드리엘에게 준 것 같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는 배우자가 정해지면 쉽게 바뀔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은 더욱 엄격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일을 겪은 다윗의 입장에서는 어처구니없는 일이겠지만, 메랍을 차지한 아드리엘 입장에서는 왕이 당시 떠오르는 별 다윗보다 자신을 선택한 일에 대하여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을 것입니다. 비록 시대는 차이가 있지만 사울의 두 딸을 두고 아드리엘과 발디엘의 감정의 희비가 교차합니다. 아드리엘은 큰 기쁨, 발디엘은 큰 슬픔........, 그 후 다윗의 통치가 한창일 때 이스라엘에 연이어 3년 기근이 있었습니다. 그때 다윗이 무슨 연유로 이런 기근이 임하는지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 집을 인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삼하21:2). 원래 기브온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닌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였습니다. 이스라엘 족속들이 가나안 칠족을 멸할 때 그들을 죽이지 않기로 하나님 앞에 맹세하였는데, 사울의 이스라엘에 대한 잘 못 된 열심이 그들의 일부를 죽게 하였습니다(삼하21:2). 다윗은 기브온 족속들을 불러 그들에게 어떻게 보상해야 그들이 재앙 중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복을 빌어줄 것인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사울의 자손 일곱을 내어 주면 하나님 앞에서 목매어 달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절친 요나단의 후손 므비보셋은 아끼고, 대신 사울의 다른 자녀나 그의 후손을 내어 주었습니다. 사울의 큰 딸 메랍의 후손, 곧 사울의 사위 아드리엘의 아들은 다섯이나 희생자 명단에 포함되었습니다. 다윗과 경쟁하여 사울의 딸 메랍을 차지한 아드리엘, 그 때의 감격이 아직도 생생한데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때를, 순전히 사울의 사위 된 연유로 아들 한 명도 아니고 다섯이나 잃게 될 줄을, 금쪽같은 아들을 잃은 서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반면에 미갈과 이별을 아쉬워하며 울었던 발디엘의 후손은 아무도 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발디엘은 아마도 가슴을 쓸어내렸을 것입니다. 인간지사 세옹지마라고, 미갈과 헤어지는 발디엘의 눈물이 자손의 죽음을 면할 씨앗이 되고, 왕의 딸 메랍을 차지한 아드리엘의 환호가 후에 자녀를 잃는 설움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약5:14). 슬픔에 처한 자, 고난 당하는 자는 낙심하지 말고 기도함으로 하나님께 위로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을 더욱 바라보아야 합니다. 즐거움에 처한 자는 기쁨에 도취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사탄이 틈타지 않도록 더욱 겸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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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20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왕다움이 없는 왕’
    “길보아 산들아 너희 위에 우로가 내리지 아니하며 제물 낼 밭도 없을지어다. 거기서 두 용사의 방패가 버린바 됨이라. 곧 사울의 방패가 기름 부음을 받지 않음 같이 됨이로다.”(삼하1:21). 사울과 요나단이 죽은 후에 다윗이 쓴 애가에 나온 한 구절입니다. 사울의 방패가 기름 부음을 받지 않음 같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표현은 원래 칼이나 창, 화살 같은 무기가 방패에 닿았을 때 잘 미끄러져 나가도록 방패에 기름칠을 하던 옛 전사들의 행동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즉 사울의 방패가 사울을 막아주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사울에게 사무엘은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15:23b). 하지만 이 후에도 사울은 여전히 왕의 신분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왕의 지위는 있었지만 왕으로서 권위는 없었습니다. 그가 왕다움이 없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으로 입증됩니다. 첫째, 그는 전혀 자신을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그 안에 악신이 들어오면 번뇌하거나 야료하였습니다(삼상18:10). 기름부음을 받은 왕은 다른 사람을 다스리기 전에 자신을 다스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떠나고 대신 악신이 임한 그는 악신이 충동하는 대로 행동한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 부여받은 왕으로서의 신분을 망각하였습니다. 그가 왕이 된 것은 하나님께 부여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대로 통치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백성들은 주님 안에서 평화를 누리도록 다스렸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을 영화롭게 하는데 마음 쓰고, 백성을 잘 다스리는 것보다 여생을 다윗 죽이는 일에 몰두합니다. 셋째, 본문말씀처럼 그의 방패가 무용지물이 된 점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18:1-2). 무려 8가지 유사한 말을 빌려 하나님이 그의 방패이심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하나님이 그의 방패라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일에 마음 쓰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전쟁 가운데서 보호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전혀 다릅니다. “사울의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과 큰 싸움이 있었으므로 사울이 힘 있는 자나 용맹 있는 자를 보면 그들을 불러 모았더라.”(삼상14:52).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힘 있고, 용맹 있는 자를 의지한 것입니다. 그가 왕이 된 후 줄곧 의지한 것은 자신의 지혜나 사람의 말이었습니다. 자신의 지혜와 사람을 의지한 삶이 그를 지켜주지 못 한 것입니다. 사울이 왕으로서 지위는 있지만 왕의 권위가 전혀 없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신자들 역시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된 백성이기 때문입니다(벧전2:9). 자기를 다스리는 왕입니다. 자신의 죄를 위하여 기도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하여 중보 기도하는 제사장입니다. 그런 지위를 받았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너희는 범인 같이 죽으며 방백의 하나 같이 엎더지리로다.”(시82:6).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소홀히 여기고 팥죽 한 그릇에 판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 됨이 얼마나 큰 은혜인 줄 모르고 육신을 따라 살아가니 마귀의 지배를 받고 환경의 지배를 받는 약한 신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소유하고 있습니다(눅10:19). 전능하신 분이 그의 권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지 아니하고 여전히 옛 사람으로 살아간다면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로 살아가는 영적 식물인간이 되고 맙니다(계3:1).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은 성도들이 범인처럼 살아갈 것이 아니라 아들의 영, 곧 성령을 따라 살아서 육신과 세상과 마귀를 다스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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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14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는 예수님’ (마 28:18-20)
    초등학교 때 학생들 사이에는 서열이 있었습니다. 키가 크고 힘이 세면 유리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약간의 격투기 실력에다 용기가 있어 기선제압을 잘하면 높은 서열이 될 수 있었습니다. 다섯 살 때부터 주일학교에 다녔던 저는 착각일수도 있지만, 유순한 편이었고 용기마저 없어 누가 싸움을 걸어오면 당하는 편이었습니다. 동네에 일 년 선배가 있었습니다. 그 형은 키도 크고, 공부도 상급학년에서 제일 잘했을 뿐 아니라, 운동이면 운동, 음악이면 음악, 미술, 생활 또한 모범적이었습니다. 동네 어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면 그 형의 사례를 들어서 말 할 정도였습니다. 어느 날 그 형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부터 내가 너를 말게 줄게.” ‘말게 준다.’는 말은 ‘갑이 을을 해하려 하는 사람으로부터 보호해주겠다.’는 약속의 지역사투리입니다. 이런 약속은 강자가 약자에게 어떤 유익을 전제로 흔히 했던 계약이었습니다. 그 약속은 정말 성실히 지켜졌습니다. 그가 보는데서 누가 시비를 걸거나, 제가 부를 때면 달려와서 절 지켜주었습니다. 정확하진 않지만 아마도 2년은 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 형이 갑자기 돌변했습니다. “이제부터 널 말게 주는 것 없다. 이런 약속은 대부분 오래 못 가지만 난 2년 동안 이 약속을 지켰다. 이제부터는 너 스스로 널 지켜.”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런 약속들은 종종하지만 그 형의 말대로 대개 한 달도 못 되어 파괴되는 공약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그 형의 말에 충분히 공감이 갔기에 다시는 형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보호 약속은 길어야 몇 년이고 완전하지도 못합니다. 사람을 의지하는 것은 저주를 자처하는 길입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리라.”(렘17:5-6). 사람을 믿고 혈육으로 권력을 삼고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게 된다는 모순 같은 진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나운 환경을 만난다는 뜻입니다. 사람과 혈육은 타인도 해당되지만 자신도 예외가 아닙니다. 자신의 지혜를 의뢰하고 살아가면 역시 저주 가운데 살아갑니다. 하지만 실망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렘17:7-8). 이처럼 하나님을 의뢰하면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헤쳐 나갈 수 있는 은사를 부여받습니다. 사43:2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물은 세상이 주는 유혹을 의미하고, 불은 정욕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이 신앙인들을 넘어뜨리지 못합니다. 이유는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말씀으로 함께 하십니다. 예배시간이나 성경을 읽을 때 성령의 감동으로 오는 말씀을 만난다면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약속의 말씀을 붙들면 주님 또한 우리를 붙드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과 함께 하십니까? 본문말씀처럼 제자들과 함께 하십니다. 제자들은 선생의 가르침을 받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입니다(막10:29). 버린다는 것은 믿고 맡기는 것을 의미합니다(벧전5:7). 그런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은 항상 예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요8:29). 기뻐한다는 말은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사랑의 기쁨입니다. 사랑하는 곳에 기쁨이 있고 힘이 있습니다. 반대로 미워하는 것이 고통이요 죽음입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자와 항상 함께 계시며 그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주님은 주님을 위하여 고난당하는 자, 욕먹는 자와 함께 하십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이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4:14).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먹을 때, 성령님이 함께 하시고 영광 받으십니다. 고난은 빛을 받은 사람이 참예할 수 있고, 주님은 신자들이 환난을 당할 때, 시련 가운데 있을 때 분명 함께 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은 영원불변한 약속입니다. 이런 주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 사귐이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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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07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주님이시다’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능히 대답하지 못하는지라.”(창45:3). 바로의 꿈에 대한 요셉의 해석대로 애굽에 7년 풍년이 지난 후, 흉년이 2년째일 때였습니다. 가나안 땅에도 기근이 임하여 야곱은 베냐민을 제외한 아들들을 애굽에 보냈습니다. 요셉은 그들을 보자마자 형들인 줄 알았지만, 형들은 요셉인 줄 전혀 몰랐습니다. 고개를 들어 똑바로 볼 수도 없었겠지만, 본다 한들 총리대신 요셉은 상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요셉이 이미 죽었거나, 다른 집의 노예였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총리대신의 용모와 치장이 더욱 몰라보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이 자신을 여러 모양으로 형님들에게 나타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취하여 그들의 목전에서 결박하고”(창42:24). 시므온은 상당히 잔인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누이동생 디나를 세겜성의 추장 하몰의 아들 세겜이 강간하자 세겜성의 모든 남자들을 속여 할례를 받게 한 후 그들이 고통할 때 부지중에 성을 엄습하여 레위와 함께 남자들을 모두 죽이고 말았습니다(창34). 그런 성격은 요셉을 애굽에 팔아넘길 때에도 가장 앞장서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처음에는 형들 모두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사흘 후에는 시므온만 결박하여 옥에 남겨둔 채 다른 형들은 곡식을 가지고 가나안 땅으로 가도록 하였습니다. 열 명의 형제 가운데 시므온이 옥에 남겨질 확률은 10%밖에 안 됩니다. 조금 감각 있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시므온이 특별히 요셉을 괴롭히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남겨놓으셨구나.’ 그들에게는 이상한 일들이 계속 일어납니다. 곡식을 나귀에 싣고 집으로 돌아와 각 자루를 쏟고 보았을 때 그들의 돈뭉치가 그 자루 속에 있는 것을 봅니다. 그들 중에 아무도 집어넣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돈뭉치가 들어있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어서 살펴볼 만도 한데 그들은 단지 착오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들이 가져온 곡식이 다 떨어지고 또 구하러 가야만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아버지가 곡식을 사오라고 하자 그들은 그곳 총리가 베냐민을 데려오지 않으면 자신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없다고 하면서 아우 베냐민을 데려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야곱은 “너희가 어찌하여 너희에게 오히려 아우가 있다고 그 사람에게 고하여 나를 해롭게 하였느냐.”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아들들이 “그 사람이 우리와 우리 친족에 대하여 자세히 힐문하여 이르기를 너희 아버지가 그저 살았느냐 너희에게 아우가 있느냐 하기로 그 말을 조조이 그에게 대답한 것이라 그가 아우를 데리고 내려오라 할 줄을 우리가 어찌 알았으리이까.”(창43:7)라고 대답합니다. 그들도 예상치 못한 말 “너희에게 아우가 있느냐?” “아버지가 그저 살아계시냐?” “아우를 데리고 내려오라.” 그런 말은 그 집안에 대하여 특별한 관계가 있지 않으면 물어볼 필요가 없는 말입니다. 요셉은 자신을 그렇게 나타낸 것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그들이 드디어 베냐민을 데리고 요셉에게 갔을 때 요셉은 장유의 차서대로 그들을 식탁에 앉힙니다. 뿐만 아니라 음식을 주는데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오배나 줍니다. 이런 모든 것들을 볼 때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분이 도대체 누구기에 형제들의 장유유서를 알고, 베냐민에게 특별히 관심을 가질까?’ 하며 요셉을 유추해 볼만도 합니다. 그런데 열 명이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합니다. 왜 그렇게 둔할까요? 죄 때문입니다. 죄가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요12:35). 정귀남 사모님(안병모 목사님의 부인)이 생전에 어떤 사람과의 문제로 몹시 힘들어하고 있었습니다. 못 살겠고, 못 있겠고, 못 듣겠고, 아무데도 없는 곳으로 도망가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 문제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리자 하나님께서 “내가 그랬다.”라고 하시더랍니다. 사모님은 바로 “주님이십니까? 그러면 제가 달게 받겠습니다.”라고 하고 주님으로 인정하자 그토록 힘들게 하던 사람이 사랑스러워지고 무슨 말을 하든지 받을 능력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 문제가 그렇게 해결 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6)라고 말합니다. 모든 일 가운데 주님을 발견하는 것은 영적인 지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지만 한 마리도 못 잡혔던 고기가 바닷가에 서 계신 사람의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라는 말에 그대로 순종하였을 때 그물을 들 수 없을 만큼 많이 잡혔습니다(요21:6). 그 때 요한은 고기를 본 것이 아니라 배후에 역사하시는 주님을 발견하고 “주시라.”(요21:7)라고 하였습니다. 요셉이 유다의 희생적인 사랑에 감복하여 드디어 “나는 요셉이라.”하고 직접 나타내주었지만 그 전에도 자신을 계속해서 드러낸 것처럼 주님도 요셉처럼 수시로 우리에게 나타내주십니다. 하지만 우리의 눈이 어두워 전혀 주님을 알아채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살면서 내 마음에 드는 일이든 들지 않는 일이든 우리가 “주님이시다.” 외칠 수 있을 때 주님으로부터 능히 감당할 힘을 공급 받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주님을 발견하고 주님의 공급을 받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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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29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다시 찾은 왕권’③ (창 1:27~28)
    엄청난 일이 벌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사람과 같은 모양으로 죽음에 대항하여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이 되셔서 사람이 지은죄의 형벌인 사형을 당하시고 합법적으로 죽으셨습니다. 죽었지만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죽음을 이기신 것입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마귀에게서 승리하셨습니다. 이제 마귀는 예수님의 승리 때문에 더 이상 사람 앞에 자기가 패배한 죽음을 앞세우고 나타나지 못합니다. 이제 사람은 더 이상 마귀의 종이 되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님이 마귀가 종으로 매어 놓았던 결박을 풀어주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죽음과 어두움과 고통과 두려움 안에 있지 않아도 됩니다. 거기서 나와 생명과 빛과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승리로 우리를 아주 불리하게 하는, 마귀가 하나님께 제출한 법조문으로 쓴 증서가 효력이 없어졌습니다. (골 2:14) 하나님은 마귀의 증서를 무효화 시키고 고소장을 폐기하셨습니다. 합법적으로 인간을 고발한 마귀의 고발장이 효력이 없어진 것입니다. 마귀는 이제 더 이상 인간을 죽음의 권세아래에 붙잡아 둘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마귀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더 이상 나의 죄에 대한 요구를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다 법적으로 치르심으로, 그래서 의롭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죄인이 아니라고 해주신 것입니다.그러니 의로움에는 나의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죽음에서 살아나심으로 마귀를 승리하심으로 진자는 이긴자의 종이 되는 원리로, 마귀의 종이 된 인간을 풀어주셨습니다. 마귀에게 빼앗긴 왕권도 찾아서 돌려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엄청난 사건이지요, 구원에는 우리의 생명뿐만 아니라, 되찾아 돌려주신 왕권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마귀의 종으로 살지 말아야 합니다. 왕권을 누리면서 살 권리가 있습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계속해서 마귀의 종을 살면서 왕권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십자가를 모욕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것까지 됩니다. 구원은 마귀와 마귀에 속한 모든 것 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죽음, 어두움, 멸망.... 더 이상 내것이 아니라고 선포할 수 있습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인 줄을 모르면 받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어디에 쓰는 것인지를 몰라서 못쓰고 있다면 얼마나 억울합니까? 구원받고도 계속 어둠 속에서 죄와 죽음에 묶여 죄책감과 두려움과 고통으로 산다면,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무시하는 것 까지 될 수 있습니다. 구원은 창조때에 인간에게 원래 주신 왕권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 삶의 증거가 그리스도인의 삶속 에서 보이고 나타나야 합니다. 이 일은 실제적으로 마귀에게 속한 불순종에서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이루어 집니다. 왕권이 회복되었으니 더 이상 마귀의 종이 아니니까요, 하나님의 아들의 왕같은 존재감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예수님이 마귀에게서 빼앗아서 도로 찾아주신 부귀영화를 가지고 다시 마귀에게 돌아가는 게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 하나님 나라의 영광 안으로 들어갈 소망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마 28:28~20) 교회가 아니면 어디로 부터 이 놀라운 소식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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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25
  • [WACI 칼럼] 강성률 목사의 ‘성령의 감동’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저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왕상18:46). 이 말씀은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 450인과 아세라 선지자 400인을 죽이고, 갈멜산 꼭대기에 올라가 기도한 후 큰 비가 내려 삼 년 가뭄이 멈췄을 때,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향하여 가는 아합 앞에서 취한 행동입니다. 그가 허리를 동이고 말보다 빨리 달릴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의 능력이 임하였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능력”에 대하여 관주를 찾아보면 왕하3:15이 나옵니다. “이제 거문고 탈자를 불러 오소서. 하니라 거문고 타는 자가 거문고를 탈 때에 여호와께서 엘리사를 감동하시니” 이처럼 성령의 감동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덧입혀주시는 능력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바로의 꿈을 해석하였고(창41:38), 삼손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손에 아무 것도 없어도 사자를 염소새끼를 찢음 같이 찢었고(삿14:6), 다윗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오실 메시아에 대하여 미리 말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 선지자들 역시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전기와 다리미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다리미는 그 자체로 아무런 능력이 없지만 전선을 전기에 꽂는 순간부터 구겨진 옷을 펼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전기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고, 다리미를 사람으로 본다면 전선을 전기에 꽂는 것은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에 감동 된 사람은 나약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어 강한 사람이 됩니다. 어둡고 거친 세상에서 성령의 감동을 입어야 신앙인들이 자신과 세상과 마귀를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믿음을 전제로 하고 누가 성령의 감동을 받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엘리사는 아합의 아들 여호람에 대하여 상당히 불쾌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호람이 비록 아버지 아합이 만든 주상을 제하였지만 여로보암이 이스라엘로 범하게 한 죄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날 이스라엘에게 조공하던 모압이 배반했습니다. 이에 분을 이기지 못한 여호람이 유다왕 여호사밧과 에돔 왕에게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그렇게 모인 세 나라 군사들과 생축들에게 불행이 닥쳤습니다. 7일째 되는 날에 마실 물이 다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할 수 없이 유다 왕 여호사밧의 요청으로 선지자 엘리사를 찾았습니다. 엘리사의 심정이 좋을 리가 없었습니다. 도저히 만나기 싫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사밧의 낯을 보고 거문고 탈자를 불러오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감동은 하나님을 높일 때, 찬양할 때 옵니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시22:3). 하지만 마음이 상하거나 마귀가 들어간 사람은 찬송 부르기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때는 억지로라도 불러야 합니다. 억지로라도 하나님을 높이면 마귀가 떠나가게 되어 마음이 풀립니다. 여호수아는 성령의 감동 된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신에 감동된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고”(민27:18). 그가 모세의 후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에 감동 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가 성령의 감동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출33:11). 여호수아는 위의 말씀처럼 모세를 수종하였고, 또한 회막을 떠나지 않고 기도하였습니다. 이처럼 시중드는 것과 기도는 성령의 감동을 입게 합니다. 계1:10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성령의 감동을 받으려면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이 날 주님 한 분 사랑하고, 존중히 여기는 정신을 가지고 온갖 일을 다 주께 맡기고 주님 앞에 나와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주일에 말씀 받지 못하면, 성령의 감동을 입지 못하면 신앙인들이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주일에 말씀 받기 위하여 일주일 동안 기도로 준비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준비하는 사람에게 말씀을 주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한 말씀 받기 위하여 간구하고 베뢰아 사람들처럼 ‘이것이 그러한가?’하며 성경을 상고할 때 주님께서 전하는 사람을 통하여 말씀을 주십니다. 주일 한 시간 지킨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주일은 밤 0시부터 다음 날 0시가 되기 전까지를 말합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 자에게 하나님께선 분명히 성령의 감동을 입게 하십니다. 성령의 감동은 양심 쓰는 자에게 임합니다. 요셉이 성령의 감동을 입었고 언제나 하나님이 함께 하실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이 보나 안 보나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게 살았다는 점입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과 동침을 요구했을 때는 남편 보디발이 먼 곳으로 갔거나 얼마간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는 때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보디발 아내의 요구를 뿌리칩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신다는 것을 양심을 통하여 알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감동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 감동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시중 하는 사람이 되고, 오랫동안 기도할 때 임합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또 양심을 쓰는 자에게 임합니다. 특별히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할 때 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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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22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다시 찾은 왕권’② (창 1:27~28)
    아담의 후손들은 마귀가 쳐놓은 사악한 덫에 걸려서 마귀의 종이 되어 살다가 죽음으로 끝나는 소망 없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다 끝나는 것인가요? 정말로 소망이 없는 것인가요? 그러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죄의 형벌은 사형입니다. 죄가 죄로 공인되는 것은 완전한 진리의 기준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고전 15:56)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을 때에는 무엇이 옳은 것인지 틀린 것인지 모르다가 완전한 진리의 기준 앞에서 옳은 것, 틀린 것, 죄와 의가 가려집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반역하는 것, 이것은 명백한 죄인 것이 분명합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기는 것이 죄며 죽음으로 죄 값을 치러야 하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창2:17)’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반역한 것을 근거로 마귀는 합법적으로 아담을 사형에 처할 죄인으로 문서를 만들어 제출합니다. 법정에서는 정확한 증거제출과 문서로 판결합니다. 마귀는 이것을 근거로 죄인 인간에 대한 사형집행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쓴 시나리오에 속아서 걸려든 인간을 이제는 사형시키라고 당당하게 요구하고 있는 사악한 마귀의 뻔뻔한 행동을 보십시오, 이것이 마귀가 하나님의 법정 안에서 고소한 사건입니다. 죽음의 권세를 맡은 마귀는 하나님께 인간을 자기에게 넘겨 달라고 요청합니다. 기세 등등하게 인간을 자기 손아귀에 넣어서 맘대로 할 수 있는 합법적인 권한을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을 마귀의 손에서 죽게 하실까요?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반역해서 관계가 끊어졌을지라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한쪽에서 끝까지 놓지 않고 사랑할 때 관계는 계속됩니다. 하나님은 절대 이 사랑을 놓지 않으십니다. 죽음이 선포된 인간을 위해 죽음에 대항하여 싸우십니다. 마귀의 절대 주권인 죽음을 내걸고 인간을 대신해서 싸워 주시는 것입니다. 죽음을 이길 수가 있느냐... 이것을 이겨야 마귀를 이기는 것입니다. 어떻게 죽음을 이길 수가 있을까요? 죽어도 죽지 않아야 죽음을 이깁니다. 죽음을 뛰어넘어서 죽지 않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죽어도 죽지 않기 위해서 이 땅에 내려 오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나의 죄에 대한 댓가를 대신 치르셔서 채찍으로 맞으시고 고통당하시면서 마귀가 주는 모든 것을 다 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었는데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죽음과 죽음의 권세자 마귀를 이기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반드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이기시려고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마귀와의 싸움이라고 표현할 수도 없습니다. 마귀는 애초부터 예수님의 상대가 안되니까요, 마귀가 아무리 죽음의 권세가 있다 해도 그것을 허락하신 분으로 부터 받은 것 아닙니까? 십자가 승리는 마귀와 온 세상을 향한 창조주의 선포입니다. ‘온 세상이여 들으라, 이제 마귀는 패배했다,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이 죽음을 이기시고 영원히 살게 되었다, 그 생명 안으로 들어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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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19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마 11:28-30)
    성경은 샘과 같습니다. 샘에서 물이 끊임없이 솟아나는 것처럼 말씀 또한 시대에 따라 가장 적절한 모습으로 솟아납니다. 말씀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이든 아니든 모두가 좋아하는 이 말씀에 대한 연구는 벌써 2천년도 넘게 상고 되었지만 고갈이 되지 않고 더욱 풍성해지고 새롭습니다. 오늘은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상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28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믿는 자들은 ‘아, 이제는 내가 짐을 지지 않아도 되는 구나.’라고 믿고 나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짐을 내려놓으라고 하지 않고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께서 이 전에 멘 멍에를 풀어버리고 주님이 주신 멍에를 메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마음이 쉼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이전에 멘 멍에는 무슨 멍에입니까? ‘마음을 쉬지 못하게 하는 멍에’입니다. 같은 일을 가지고도 마음을 쉬게 할 수 있고, 마음을 쉬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마음을 쉬게 할 수 있습니까? “나의 멍에를 메고”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환경이 하나님께서 주신 멍에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말씀입니다(잠3:6). 우연히 되었거나 누구 때문에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다른 멍에이며 우리는 마음에 쉼을 얻을 수 없습니다. 가정이, 직장이, 사람관계가 하나님께서 주신 멍에임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멍에는 풀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목이 눌려옵니다. 코뚜레는 도망가면 갈수록 더욱 아파옵니다. 주님이 내게 주신 멍에라고 생각하고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하면 멍에는 조이지 않고 코뚜레는 아프게 하지 못합니다.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주님께서 능히 감당할 만한 힘을 주십니다. 물론 그 환경이 기도할 수 없는 환경이거나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합당치 못한 경우까지 포함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정상적인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진 일들이라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라고 받아 들여야 합니다. 직장 동료가 마음에 안 들어도, 상사가 마음에 안 들어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환경입니다. 주님은 또 “내게 배우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멍에를 멘 사람은 배울 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누구에게 배워야 합니까? 예수님께 배워서 예수님의 해석을 받아 살아가야 합니다. 자칫 마귀에게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배우는 사람은 일을 통하여, 멍에를 통하여 자신을 만들어 갑니다.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건축해 나갑니다(유:20). 하지만 마귀에게 배우는 사람은 남을 만들어 주려하고 남을 가르치려합니다. 나도 나를 못 만드는데 어떻게 남을 만들어 줄 수 있습니까? 내가 만들어지면 주님께서는 그 사람도 만들어 주십니다. 눅10:38이하에는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 나사로의 집으로 가십니다. 거기서 마르다는 일을 보고 마리아는 예수님 발아래 앉아서 말씀을 듣습니다. 마르다는 참으로 분주했습니다. 이 것 저 것 장만할 것이 많았습니다. 애써서 예수님이 드실 음식을 준비하고 있는데 마리아는 언니가 수고해도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예의 없어 보이고 눈치 없어 보입니다. 마르다 입장에서는 괘씸할 만도 합니다. 직장 상사가 열심히 일을 하는데 부하직원은 가만히 앉아서 책만 보고 있다면 상사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마르다가 힘든 것은 많은 일 때문만은 아닙니다. 동생의 태도가 더 힘들게 합니다. 그를 참소하는 육신의 생각들입니다. 마리아에 대한 섭섭한 생각들입니다. 모두 4명을 위하여 음식을 장만하지만 분주하고 무겁기만 합니다. 참다못한 마르다는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그러자 예수님의 대답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마르다도 일손을 그만두고 말씀만 들어야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양심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한 가지 일입니다. 마리아처럼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생활 속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연습을 쓴 로렌스처럼 음식을 장만하는 가운데서도 할 수 있습니다. 물건을 사고 팔 때도 할 수 있습니다. 청소할 때도 할 수 있습니다. 오직 주님 보시기에 합당하게 행하려는 마음이 마리아처럼 주님께 듣는 것입니다. 요12:1이하에도 마르다의 집에서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때에는 예수님과 제자들 나사로의 가족 모두 16명입니다. 거기서 마르다는 여전히 일을 보고 마리아 역시 여전히 예수님의 발아래서 말씀을 듣습니다. 그들의 역할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이전과 달리 한 마디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이 전에는 겨우 4명이었어도 불평하였지만 이제는 16명의 음식을 거뜬히 장만합니다. 지난번에 배웠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참소를 듣지 말고 오직 양심을 통하여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하라.”는 말씀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신앙인들이 힘든 것은 일 자체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일 때가 많습니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일들이 주님이 주신 멍에라는 생각과 그 멍에를 통하여 배우려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직장인으로서, 자녀로서 당신이 선 곳이 하나님께서 주신 멍에라는 것을 믿고 배우는 자세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분명히 체험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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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17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다시 찾은 왕권①’ (창 1:27~28)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 중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남자와 여자로 나누어 만드셔서 그 둘이 만나 하나의 완성체가 됩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교통이 됩니다. 그런 인간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셨습니다. ‘번성하고 많아 져서 땅에 충만하라, 가득 차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 공중의 새, 땅의 짐승과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땅의 모든 생명체의 왕으로 삼으시고 다스리는 통치권을 얻었습니다, 어마어마한 복입니다. 땅 위에서 서열은 아담 위에는 하나님 한분만 계십니다. 이것이 사람이 하나님께 받아 가지고 있었던 원래의 모습입니다. 온 피조물 중에서 하나님과 교통이 되고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아 땅 위 통치권까지 갖고 있는 사람은 천사도 부러워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걔 중에 마귀는 부러워하는 것을 넘어서 그것을 빼앗고 취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습니다. 사악하니까요. ‘우주에 아담이라는 새로운 피조물 인간이 등장했는데 하나님이 인간 아담을 만드시더니 감히 그가 온 땅의 왕권을 가지고 올라와 있다? 그것을 빼앗자’ 마귀는 아담을 무너뜨리기 위한 가장 좋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왕권을 가진 아담에게 허락되었지만 단 하나 금하신 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을 가진 나무를 먹지 말라’입니다. 선악과는 선과 악의 지식을 알게 하는 나무입니다. 선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악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가를 이미 알게 되었을 때에는 이미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을 반역했을 때 처절하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악을 알고 하나님께 불순종할 때 그것이 죄이며 죄의 처형은 사형, 즉 죽음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창2:17)’ 마귀는 선도 알고 악도 알고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의 위력을 알았습니다. 반드시 지키시고 그 말씀대로 행하시는 하나님! 그러니, 아담이 선악과를 먹어야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담은 죽게 됩니다. 그리고 왕권도 잃어버립니다. 결국 아담과 하와는 마귀의 유혹에 지고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진자는 이긴자의 종이 되는 원리로 사람은 왕의 신분에서 마귀의 종으로 살다가 마지막은 죽음으로 끝이 납니다. 마귀는 아담이 받은 복을 빼앗았습니다. 이제 마귀는 아담에게서 빼앗은 세상 왕의 권세로 등극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 하는 결과가 이런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에 반역한 악의 결과로 어떻게 무너지는지 알게 되면서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제 마귀가 왕이 되어 인간을 다스리고 통치해서 압박하는 마귀가 왕이 된 세상이 왔습니다. 인생이 고통 일 수밖에 없는 이유 입니다. 인생고는 영적 싸움으로 풀어가야 할 문제입니다. 마귀의 통치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풀어지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에서 고통 중에 있다가 예수님을 만나면 평안과 자유함을 체험하게 됩니다. 마귀에게 매인 종의 결박이 풀어지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체험이후에 세상 행복한 느낌, 그 감정들이 이 진리를 증명하지 않습니까? 마귀에게서 벗어나야 비로소 인생고가 풀어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분명한 길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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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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