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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하나님 나라’(신1;26~35)
    하나님은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을 구원해내셨습니다. 그리고 시내산을 지나 광야로 들어갑니다. 크고 두려운 광야입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왜 애굽에서 구원하셨을까요? 그들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을까요? “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땅이 너희 앞에 있으니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할지니라” (신 1:8) 구원은 어쩌다 보니 우연히 받은 게 아닙니다. 분명한 목적이 있는 구원입니다. ‘가나안으로 가라’ 그런데 가나안이 어디입니까? 가나안은 이 땅에 세우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의 왕은 하나님입니다. 나라는 왕의 통치를 받으면서 세워집니다. 왕은 자기의 백성을 자기의 나라로 보내시기 위해서 구원 하셨습니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습니다. “우리는 못가겠다”라면서 그 앞에서 주저앉아 버린 것입니다. 아니,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기로 약속한 땅을 목적으로 여기까지 오지 않았느냐? 그런데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그 땅에 못 올라가겠다니... 기가 막힌 일이지요, 그럼 왜 여기까지 온 것입니까? 내가 어디를 향해서 가야 하는지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 지 목적을 모르니 가나안에 못 들어가겠다는 말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 생각은 하루아침에 갑자기 생긴 게 아니라 그 속에 계속 있었던 것입니다. 어차피 일어나야 할 일인데, 정탐꾼 사건 에 부딪치면서 드러난 것입니다. 그때 이스라엘은 정탐꾼을 보내자고 제안했었습니다. 일을 실행하기 전에 충분히 사전 조사를 하고 계획을 세워 더 효율적으로 하면 좋겠지요. 각 지파별로 대표 12명을 뽑아서 정탐하러 보냅니다. 정탐꾼들은 눈으로 본대로, 아주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보고를 합니다. ‘그 백성은 우리보다 장대하며 그 성읍들은 크고 성곽은 하늘에 닿았으며 우리가 또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노라’(신 1:28) 세상은 너무 크고 강대한데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그들을 이기고 가나안에 들어 갈 수 있을까? 할 수 없다. 맞는 말입니다.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유는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려고 목적을 가지고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일이니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니 들어갈 수 있고, 들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누구의 말을 선택할 것인가? 정탐꾼의 말인가, 모세의 말인가? 세상의 말인가? 진리인가? 결국 그들은 정탐꾼의 말을 선택했습니다. 그 안에 진리가 없으니 모세의 말은 안 들리고 정탐꾼들의 말이 꽂혀서 공감이 되는 것입니다. 진리는 틀린 것 같고 세상이 하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결국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진리를 외치고 부르짖다가 마지막 내린 모세의 결론은 ‘이일에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신 1:32) 가나안은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의 통치를 받고 그분과 함께 사는 곳, 그런데 거기로 건너가는 것이 그렇게도 힘이 듭니다. 여기서 가나안으로 못 들어가는 자들이 영원한 그 나라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의 삶은 단순한 원칙이 있습니다. 왕의 통치를 받아서 왕과 함께 가면 잘되고 그 반대 길로 내 맘 대로 가면 망합니다. 오늘 선택한 불순종과 불신앙의 삶은 처절한 결과로 받습니다.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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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31
  • [WAIC 데일리 기도] 이봉선 목사의 ‘코로나19 극복 위한 기도’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5:7) 긍휼의 하나님,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의 은총을 구합니다. 코로나19 사태가 중국과 아시아를 넘어 유럽과 미국 등으로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확산하면서 금융시장마저 붕괴되고 있는 위기 상황입니다. 세계 각국이 앞다퉈 문을 걸어 잠금에 따라 세계 경제가 더욱 위축되어 우리나라 경제도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능력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 합당한 긍휼의 심정으로 간구하오니 주님께서 일하셔서 ‘코로나19’가 하루속히 종식되고 치유되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이 땅의 고통 받는 영혼들, 죽어가는 영혼들, 공황상태에 빠져있는 영혼들이 절망에서 소망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옵소서. 오늘 교회가 하나님의 심판의 때를 경험하는 혹독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심을 믿습니다. ‘코로나19’에 위축되어 불안해 하는 걸 보시면서 안타까워하고 계시는 하나님, 성전에 나와 마음껏 예배하기를 기다리고 계시지만 이보다 더 아픈 것은 예배가 유린되고 성전이 굳게 문을 닫고 신앙이 정죄 받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지 않게 하시고 공동체가 모여 마음껏 예배드리는 날이 속히 올 수 있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코로나19’로 인해 사방에서 우겨쌈을 당한 상황이지만 바이러스 앞에 결코 좌절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게 하시고, 강하고 담대하게 하시고, 주님과 함께 이 재난을 넉넉히 이기게 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주님만 바라보게 하옵소서. 바이러스를 제어할 강력한 백신과 치료약이 기적같이 개발되어, 모든 이들을 자유롭게 해 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치유와 회복이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어나게 하옵소서. 오늘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여 모든 재난을 축복으로 바꾸어 주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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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31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주께 합당한 예배’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마24:1-2). 코로나 사태를 통하여 얼마나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 앞에 합당치 못했으면 교회가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내몰렸는지 하나님께 죄송하고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그래서 합당치 못한 예배가 무엇인지 모두 찾을 수 없지만, 주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대로 찾아 회개하고자 합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며 한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의를 나열하며 기도하였지만, 세리는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리새인을 옳다고 하지 아니하고, 세리를 옳다고 하셨습니다(눅18:9-14). 이처럼 주께 합당한 예배는 상한 심령, 곧 회개하는 심령입니다. 이런 심령을 주님께서 가까이 하십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34:18). 시50:13절 이하는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감사한 마음입니다. 어떤 예배도 감사한 마음 없이 드린다면 그것은 형식적인 예배입니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얼마나 감사한 마음을 썼을까요? 습관적이거나 형식에 젖지 않았는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예배뿐만 아니라 드리는 모든 것 역시 감사한 마음으로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하나님께 인심을 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 은혜가 고맙고 감사함으로 성의를 표시하는 것뿐입니다. 롬12:1이하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고 말합니다.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이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시는 예배입니다. 드린다는 것은 순종을 의미합니다(롬6:16). 순종은 자신의 뜻을 전혀 사용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내 마음에 들든지 안 들든지 그대로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엇을 통하여 드릴까요? 단을 통하여 드립니다. 신약에서 제단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위에 자신을 드리는 것이 몸으로 산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4:23-24). 신령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진정은 외식이 없는 진실 된 마음입니다. 성령과 진실 된 마음으로 예배드리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요6:63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곧 영이요 생명이니라.”라고 말합니다. 곧 예배시간에 말씀으로 나타내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이 시간 상한 심령으로 회개합니다. 감사함으로 예배를 드리지 못했고,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지 못했으며,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지 못했음을 회개합니다. 오, 주님! 불쌍히 여겨주시고 우리가 주님께 예배드릴 수 있는 큰 은혜를 계속해서 누리게 하소서. 오,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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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25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뜻을 정하여’(단 1:3~9)
    때는 여호야김왕의 삼년입니다. 바벨론의 악명높은 왕 느부갓네살이 쳐들어왔습니다. 전쟁은 참혹하고 포로들은 비참합니다. 왕과 고관대작이었더라도 이긴자의 종이 되어 그 소유가 됩니다. 그때 느부갓네살왕은 환관장 아스부나스에게 명령합니다. “유다 소년 가운데 왕족과 귀족 중에서 흠없고 잘생기고 모든 지혜를 갖추고 지식이 있고 이해력이 있어 왕궁에서 섬길만한 능력이 있는 소년들을 데리고 오라” 환관장은 왕의 명령을 받고 포로들 중에서 가장 장래가 촉망되는 엘리트 소년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먼저 자기가 데려온 소년들의 이름을 고쳤습니다. 이름은 자기의 정체성입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의 신이 생명을 지켜 준다는 의미의 ‘벨드사살’ 이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다, 여호와는 너희를 버렸으니 바벨론에 귀화해서 새롭게 살라’는 의미겠지요. 다니엘에게는 위기가 왔습니다. 먹고 살 게 없어서 두려운 게 아닙니다. 왕궁에서 좋은 것을 먹고 공부도 하고 교육도 받을 수 있습니다. 왕에게만 충성하면 잘사는 것은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걱정입니까? 사방을 보니 바벨론 왕으로 꽉 들어차 있는 환경입니다. 배우는 학문도 갈대아인의 것, 바벨론의 신들...여기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름까지 고치고 나니 다니엘은 두려워지기 시작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버리게 되면 어떻게 하지? 정신을 바짝 차려야 겠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큰 위기는 믿음 지키기 어려운 환경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위기가 오는 것, 이것이 가장 큰 환란입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했습니다. 자기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왕의 음식을 거절 하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이유는 그것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과 다른 존재감이 있습니다. 거룩입니다. 하나님과 언약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도 거룩하니 그 백성도 거룩해야 합니다. 먹는 것도 아무거나 먹으면 안됩니다. 왕의 진미를 거절하는 행동은 부정한 것으로부터 자신을 거룩하게 지키겠다는 의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 하는 것에 하나님의 백성은 하지 말아야 할 것, 해야 할 것이 구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백성이니까요. 왕의 상에서 먹는 자들은 왕의 사람들입니다. 왕의 밥을 먹으면서 그 왕과 언약을 합니다. “왕의 종이 되어 왕만 섬기고 충성하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과 언약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하나님과 언약한 자들입니다. 비록 왕의 밥이 세상 부귀영화와 권세를 주는 것일지라도 그 왕을 거절하겠다는 결단입니다. 다니엘이 왕의 음식을 거절한 것은 그 왕을 거절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의 하나님이 되셔서 그들과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결과는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음식을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 더 좋아 보인지라. 그리하여 감독하는 자가 그들에게 지정된 음식과 마실 포도주를 제하고 채식을 주니라”(단 1:15~16) 믿음은 행동으로 증명됩니다. 믿음으로 행동하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의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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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25
  • [WAIC 데일리 기도] 정일웅 목사의 ‘코로나19의 극복과 국가와 민족의 치유’
    생명의 주인이시며. 천지 만물의 창조주가 되신 하나님 아버지. 지금은 영광과 감사와 찬양보다는 간구와 탄원과 호소의 마음으로 아버지의 긍휼과 자비를 간절한 마음으로 구합니다. 지금 지구촌 전체는 아무도 원치 않는 코로나 판데믹으로 많은 생명들이 신음하며 탄식하며 죽어가는 참상을 경험합니다. 이러한 공포와 두려움의 상황을 신속히 돌아보시며, 재앙과 징계의 시험과 위협을 극복하도록 도와주소서! 무한하신 주님의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어 코로나의 시련 가운데 처한 형제 자매들을 위로 하시며 구원해 주옵소서! 전능하신 구속의 주 그리스도의 하나님. 사순절의 의미도 제대로 새길 수 없을만큼 코로나의 위협으로 예배하지 못하게 된 처참한 한국 교회를 불쌍히 여기시고, 올바른 신앙에 바로 서 있지 못했던 우리를 용서하여 주소서! 부디 코로나의 재앙으로 예배하지 못하는 한국 교회의 불상사를 막아 주시고, 그간 이웃과 형제를 돌아 보지 못한 우리의 허물을 용서 하소서! 거룩 하시며, 위로자 되신 성령 하나님. 오늘도 코로나의 시험으로 고통받는 자들을 위로 하시며, 특히 방역에 온몸을 던져 수고하는 의료진들을 위로하시며, 성령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심을 그들도 느끼게 해 주옵소서! 거룩하신 성령 하나님. 전 세계가 코로나의 판데믹에서 신속히 해방되도록, 성령 하나님이 권능으로 질병을 다스리시며, 치료의 하나님 이심을 세계 만방의 백상들이 알고 깨닫게 하소서!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 모두 온 백성들과 함께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 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가운데 평화 로다" 란 찬양을 우리의 주 아버지 하나님께 드리게 하옵소서!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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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22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하나님의 계산법’
    1. 많고 적음의 차이 하나님의 계산법과 사람의 계산법은 전혀 다릅니다. 사람은 절대치가 있어서 눈에 보이는 수량에 따라 많고 적고를 따지지만 하나님은 형편에 따라서 많고 적고를 따지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2장 1-3절에는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가지고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라고 나옵니다. 세상에서는 기업가들이나 부자들이 많은 헌금을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하나님 나라에 가면 여기 가난한 과부처럼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들이 많이 한 것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풍족한 중에서 넣은 헌금과 구차한 중에서 넣은 헌금의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2. 크고 작음의 차이 예수님 태어난 고장은 베들레헴이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전 베들레헴은 가장 작은 고을 중에 하나로 인식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인식이 바뀌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 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마2:6). 가장 작은 고을에 예수님이 태어나셔서 이제는 가장 큰 고을이 된 것입니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이는 숫자가 많으면 일반적으로 큰 교회라고 인식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렇게 보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이 큰 곳이듯 예수님이 계신 곳이라면 비록 적은 숫자가 모일지라도 그곳은 큰 교회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큰 교회라 할지라도 예수님이 함께 하지 않는다면 그곳은 사교장일 뿐입니다. 3. 큰 사람과 작은 사람 키가 크냐 작으냐에 따라 큰 사람 작은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는 큰 자니라''(마18:4)라고 말씀하십니다. 천국에서는 자기를 낮추는 자가 큰 사람이 되고 높이는 자는 작은 사람이 됩니다. 뿐만아니라 천국에서 큰 자는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사람입니다(마23:11). 4. 세월의 차이 시84편 10절에는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나옵니다. 얼마나 많은 햇수를 보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 어떻게 살았는지가 중요합니다. 주의 궁정은 주님이 계신 곳을 의미합니다. 주일을 어떻게 성수했는지, 주일 하루 온종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거룩하게 지키면 그 날은 다른 곳에서 천 날을 보내는 것보다 낫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우리 몸은 주님의 성전인데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모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한 날이 내 마음 대로 살아가는 천 날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허송세월한 것을 후회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예수님께 주권을 드리고 사십시오. 그러면 하루가 약 2.74년을 사는 것입니다. 능히 잃어버린 연수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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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19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십자가로 일어서라!’(요 18:3~12)
    베드로는 예수님의 가장 사랑하시는 수제자라는 닉네임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사랑하셨지만, 베드로도 예수님을 무리 중에서 유별나게 독보적으로 사랑했습니다. 베드로의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은 진심이었습니다. 잡히시던 그날, 그 동산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예수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거침없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쳐냈습니다. 베드로의 자신감 있는 행동은 예수님이 앞에 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죽은 시체를 살리시는 것도 보았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도 믿었으니 어림 계산해 보면 잡으러 온 그들과 까짓것 한번 싸워보면 할 수 있을 것 같았겠지요, 이것이 베드로의 방법이었습니다. 내게 주신 능력과 힘으로 주의 일을 잘 할 수 있을 것이다...“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아니, 예수님 우리가 한방이면 저들을 다 죽이고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데요? 십자가를 안지고 더 효율적인 방법으로 더 큰 성과를 이루면 안되나요?’ 그러나 예수님의 방법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주신 과정을 다 거쳐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 방법이 비록 십자가에서 죽는일 이라도 그 일을 감당해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지금까지는 예수님의 수제자로 가장 빛을 발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가 등장하니까 그 앞에서 베드로의 좌절이 시작됩니다. 말로만 듣던 십자가가 이제 현실이 되니 베드로의 믿음은 좌절하기 시작합니다. 계속해서 대제사장 앞에서 심문당하는 예수님의 무력한 모습에 베드로는 계속해서 좌절하기 시작합니다. 대제사장의 고함치는 소리와 예수님의 뺨을 때리는 소리, 그리고 대제사장 앞에서 꼼짝 못하시는 것 같은 예수님, 아! 리더가 저런 모습을 하고 있는데... 베드로는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 지금 이 상황에서 자기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어이없게도 문 지키는 여종 앞에서 두려워하며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던 사랑하는 예수님은 저렇게 되어 있고, 목숨을 걸고 끝까지 함께 있겠다고 했는데 계집종 앞에서 두려워 하며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자신을 보면서 베드로는 이 정도면 멘탈이 붕괴가 되겠지요. 아무 정신 없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이런 십자가 옆에 서 있을 것이라고는 예상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저주 자체 입니다. 조금의 자비도 없는 가혹하고 비참한 십자가, 능욕당한 수치의 십자가 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맘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예수님에게 인간이 어디까지 악할 수 있는가를 옆에서 다 보았던 베드로는 외상 후 장애로 정신과 상담을 받으면서 회복이 필요 했을지도 모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마음이 무너지니 회복하지 못하고 내린 결론이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입니다. 이런 베드로를 무엇으로 일으켜 세울까요?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런 베드로에게 오십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소명을 주십니다. ‘내양을 치라, 내양을 먹이라’ 소명을 굳게 하십니다. 베드로는 십자가로 일어나서 소명을 받은 자로 굳게 다시 세워 집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 하라.(벧전 4: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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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19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주의 병에 담으소서’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 하였나이까?”(시56:8). 화창한 날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정오 즈음이면, 창문 맞은 편 벽에 머리를 풀어 헤치고 소리 없이 고불고불 오르는 아지랑이 그림자를 보게 됩니다. 밖을 보면 눈에 쉽게 띄지 않아도, 벽에는 이런 모습들이 스크린처럼 펼쳐집니다. 머잖아 이 아지랑이들은 구름이 되어 가장 적절한 순간에 단비로 내려올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에도, 우리의 눈물에도, 우리의 탄식에도, 우리의 선행에도 주님께서 때로는 전혀 반응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눈물 한 방울도 허비 되지 않고 아지랑이처럼 올라 차곡차곡 주님의 병에 채워져 가장 적절한 때 은혜로 내려 주십니다. 지금 당장 응답이 없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결코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때와 기한을 정하시는 주님께서 반드시 갚아 주십니다. 성경학자들은 시 56편을 삼상21:10-15절 이하의 사건과 연관 된 시로 보고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 가드왕 아기스에게 피하지만 그곳 신하들이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자 미친 체 하고 도망쳐 나옵니다. 어디에도 발 디딜 곳이 없다고 생각한 그가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호소하는 내용입니다. 그 후로도 다윗은 10여 년 동안 유리하면서 육신적으로는 잠시도 쉴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체험합니다. 삼천 명의 택한 용사들과 함께 그를 수색하러 다니는 사울의 목숨이 도리어 다윗의 손에 잡히는 기이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왕이 되기 위하여 한 번도 모사를 꾸미지 않았음에도, 사울을 끝까지 사랑하고 참아주는 그에게 하나님은 마침내 사울을 심판하시고 왕이 되게 하십니다. 그의 눈물, 그의 신음, 그의 탄식을 하나님의 병에 담아 신원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악에 대한 징벌도, 선에 대한 포장도 하나님께서는 각자의 때에 맞게 적절하게 하십니다. 우린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예수님의 사랑에 빚진 자들이기 때문에, 어떤 행위에도 상급을 주장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의 은밀히 행하는 선이나 심지어 눈물까지 흘려보내지 않습니다. 주님의 선하심을 끝까지 믿고 인내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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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13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하나님의 실재하심’(요 14;16~21)
    지금 이 시간이 지나면, 예수님은 군병들에게 잡혀서 채찍으로 맞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입니다. 한치 앞도 모르는 제자들은 ‘설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까지 하실까...’ 라고 생각했겠지만, 미리 알고 계셨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건이 터지면 당황하지 말라며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직접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제 자신이 떠나시면 보혜사가 오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 두시지 않고 보혜사 성령을 통해서 다시 오십니다. 보혜사 성령은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세상은 모르지만 우리는 그분을 압니다. 내 안에 계시는 분에 대한 감각이 있겠지요, 보혜사는 하나님의 실재하심입니다.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같은 공간에 같이 있는 정도가 아닙니다. 같이 한방에서 사는 것입니다. 허물 많은 사람 둘이 만나서 부부가 되어 한방에서 같이 사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같이 살려면 평생을 서로 알아가야 합니다. 알아가면서 이해해야 내 것을 버리면서 상대방에게 맞추어 줄 수 있습니다. 오랜 세월을 그렇게 하다 보면 먹는 것 입는 것 생활 습관까지 닮아갑니다. 같이 사는 것은 서로의 허물을 함께 감당하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부부가 둘이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 입니다. 이걸 못하면 헤어집니다. 사람끼리 만나서 같이 사는 것도 이렇게 어려운 일인데 완전 무흠 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살려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살다보면 둘이 섞여져서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완전하신 하나님과 죄인 인간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땅 에서 인도하여낸 여호와라 (레 11:45)” 하나님과 같이 사는 것은 그분이 원하셔서 계획하신 그분의 뜻입니다. 우리가 먼저 요구한 게 아닙니다. 온 세상의 하나님이 자기가 택하신 자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해서 애굽 에서 꺼내오셨습니다. 애굽에서 열가지 재앙으로 온 세상을 떠들썩 하게 뒤흔드시면서 자기 이름을 알리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자기가 택하신 자의 하나님 이신 것을 온 천지에다 선포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그리고 그들과 거하시겠다고 언약을 맺으시고 성막을 짓게 하십니다. 보편적인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 함께 사는 것, 그것은 놀라운 일이며 엄청난 사건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연합한 생명체가 될 수 있는 것은 모든 피조물 중에서 가장 탁월 하고 비교할 수 없는 영광 입니다.(고전 15:41)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이후에 나는 지구상에서 가장 놀라운 축복의 생명체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며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같이 살려면 먼저 나와 함께 거하실 하나님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분이 나에게 뭘 원하시는 지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맞출 수가 있겠지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레 11:45)” 하나님이 거룩 하시니 우리도 거룩해야 같이 살 수 있습니다. 같이 살려면 서로 수준이 맞아야 겠지요,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불완전한 허물 덩어리인 내가 완전하신 그분과 어떻게 함께 살라고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신 걸까요? 예수님 자신이 어린양 제물이 되셔서 짐승의 피가 아니라 하나님의 피를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 하다고 하십니다. 그것을 근거로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보혜사 성령을 너희에게 보내었다! 그 성령님과 함께 거하라,” 이렇게 다 입증되고 통과되어서 하나님의 실제이신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 실제화 된 것, 이것이 보혜사 성령님입니다. 십자가의 모든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서 그 결과로 받은 가장 큰 축복의 사건이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나는 그분의 백성이 되는 언약이 성취되었습니다.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요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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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11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기준점’
    “여러 성으로 다녀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의 작정한 규례를 저희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니라”(행16:4~5). 이 말씀을 ''작정한 규례를 지키게 하여 믿음을 굳게 한다.''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학교나 군대에서 훈련받았던 사람이라면 "헤쳐 모여"라는 말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말이 모두가 아닙니다. 그 앞엔 반드시 기준점이 있습니다. 선생님이나 교관이 "전방 50미터에 있는 ()()를 기준으로 오른(왼)쪽 3열 종(횡)대 헤쳐 모여" 그러면 우린 그곳까지 헐떡거리며 뛰어가다가 줄을 섭니다. 그곳까지 달리는 순간 모두가 제각기 길을 가지만 기준점이 정해져있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흐트러지지 않는 줄이 됩니다. "헤쳐 모여!" 우리가 살아가는 곳이 항상 반듯하게 정렬되어 있는 줄이라면 좋으련만 가끔씩 흩어지고, 혼잡 되는 순간들이 찾아옵니다. 그토록 고요한 바다라도 사나운 바람이 불면 집채만 한 파도가 일어나 바다를 뒤집어 놓을 수가 있습니다. 평화로웠던 교회, 집안, 사회가 어수선해지고 요란스러워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준점이 있다면 흩어졌을지라도 다시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2000년이 넘도록 이민족의 압제를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이 정도 되면 이미 사라졌을 민족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겐 기준점이 있었습니다. 모세 오경이 기록 된 토라였습니다. 자신 안에 하나님이 계시는 한 아무리 흐트러진 환경일지라도 한 데 모아질 때가 있습니다. 마음이 안정이 되지 않고, 어두워질 때 우린 처음에 확실한 말씀을 기준점으로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우선 신앙생활부터 점검해봐야 합니다. '주일을 얼마나 거룩하게 지키고 있는지' '매일 빠뜨리지 않고 작정한 말씀을 읽고 있는지' '새벽 기도는 변함없이 하는지' '자고 깨는 시간은 일정한지' 등 믿기 시작할 때 작정한 규례를 되돌아 봐야 합니다. 신앙에 있어 기준점이 없으면 결코 믿음의 진보가 없으며 교회에 있어 기준점이 없으면 서로의 목소리만 높아지게 됩니다. 어려운 일들이 닥칠 때마다 처음 믿을 때 확실한 것을, 작정했던 기준점을 찾아 흔들림 없이 나가야 합니다(히3:14) 그래야 일어설 수 있으며 회복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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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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