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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버릴 권세’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10:17~18). 선거 때가 가까워짐에 따라 몇 몇 국회의원들은 젊은 세대에게 양보하겠다며 출마포기를 선언합니다. 그거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위와 명예를 버릴 힘이 있어야 합니다. ‘권세’ 하면 얻고 누리고 부리는 것을 생각하기 쉬우나 버릴 수 있는 것도 큰 권세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낭패를 당하고 멸망당하는 이유들은 대부분 얻지 못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버리지 못해서 생깁니다. 소돔성이 멸망할 때 롯의 가족들은 그동안 일구어 놓은 살림과 명예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여 지체하고 있었습니다. 그것들을 버릴만한 힘이 약한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들이 롯과 그 아내와 두 딸의 손을 잡고 인도하여 성 밖에 두었습니다. 그들의 약함을 천사가 도운 것입니다. 하지만 롯의 아내는 끝내 미련을 포기하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다가 그만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창19:26). 사울은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하나님께서 모두 멸하라고 한 우양을 멸하지 않고 가장 좋은 것들을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하여 끌어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변명합니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삼상15:24). 그가 왕이었지만 백성들의 잘 못된 말을 뿌리칠 힘이 없었던 것입니다. 영생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께 왔던 부자청년은 가진 것을 버릴 힘이 없어 버리지 못하고 주님을 떠나고 맙니다(마19:21). 이처럼 버리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 힘은 영적인 힘입니다. 어떻게 해야 버릴 힘을 얻을 수 있습니까? 창14장에는 롯이 사는 소돔 땅에 전쟁이 일어납니다. 결국 소돔을 포함한 연합국이 패하고 그들의 재물과 양식은 빼앗겼으며 롯도 포로로 잡힙니다. 이 소식을 접한 아브라함은 평소 잘 훈련 된 318명의 용사를 데리고 밤에 습격하여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조카 롯과 또 부녀와 백성을 다 찾아왔습니다(창14:1-16). 아브람이 승전하고 돌아올 때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아브라함을 축복하였습니다.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러자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습니다. 소돔 왕도 그에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 그러자 아브람이 대답하였습니다.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 하리라.”(창14:17-23). 그가 소돔왕의 호의 아닌 호의를 거절할 수 있었던 것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이 준 떡과 포도주를 먹었기 때문입니다. 떡과 포도주는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과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생명을 먹고 거절할 힘이 생긴 것입니다. 이처럼 거절할 힘, 거절할 능력은 성령의 감동된 말씀을 먹을 때 생깁니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집 풍성한 문화 유적지인 메소포타미아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행7:2-3). 바울 역시 그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들을 버릴 수 있었던 것이 영광의 예수님이 나타나 주셨기 때문입니다(행26:19). 인도의 성자 썬다싱이 그와 조상들이 섬기던 힌두를 버릴 수 있었던 것 역시 하나님께서 나타나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버릴 힘은 영광의 하나님을 볼 때 생깁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선한 형상입니다(출33:19).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는 것은 꼭 꿈이나 환상 등을 통하여 무엇을 체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움을 살면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함입니다. 그러한 영광은 말씀을 믿을 때 체험하게 됩니다(요11:40). 히11:24이하는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라고 말합니다. 바라보는 것은 생각하는 것입니다(히12:2-3).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거절할 수 있었던 것, 명예 영광을 버릴 수 있었던 것은 믿음이었고 또한 바라봄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거절의 힘은 믿음과 소망에서 나옵니다. 얻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버리려면 권세, 곧 힘이 있어야 합니다. 버릴 권세는 말씀을 먹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믿음과 소망에 힘을 쓸 때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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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17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이삭의 우물’(창 26:26~33)
    이삭은 흉년의 때에 블레셋의 그랄로 이사를 갔습니다. 거기서 블레셋왕 아비멜렉의 호의를 받고 잘 지냈습니다. (창 26:11) 하나님이 이삭과 함께 하시니 농사를 지어도 백배나 번창하고 양과 소들도 떼를 이루고 종들도 많아졌습니다. 마침내 생활이 창대하고 번성하여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때 부터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을 질투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는 무엇을 해도 복을 받고 잘됩니다. 승승장구하는 사람을 눈 앞에서 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의 성공이 자신을 더욱 초라하게 하고 패배자로 느끼게 하기 때문에 눈앞에서 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자기와의 간격을 좁힐 수만 있다면 자기가 있는 곳까지 아니 더 아래까지 끌어 내려 놓아야 마음이 편합니다. 잘나가고 성공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을 질투하는 부류들이 함께 따라옵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 사는 곳에는 항상 있는 일 입니다.(전 4:4) 보다 못한 아비멜렉은 이삭에게 떠나 달라고 말합니다. 이유는, 당신이 우리보다 강성하니.... 이삭이 탁월하게 뛰어나니 공동체가 이삭 한 사람 때문에 시끄럽기 시작합니다. 이삭은 조용히 짐을 꾸려 그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로 갔습니다.종들은 그곳에서 우물을 파기 시작합니다. 우물은 먹고사는 가장 중요한 근거지입니다. 그래서 우물을 발견하여 파는 것은 행운이며 축복입니다. 겨우 우물을 파고 자리를 잡을까 했더니 그곳의 목자들이 와서 자기들 것이라고 내놓으라며 시비를 걸어옵니다. 경쟁입니다. 먹고살기 위해서 빼앗기도 하고 안 뺏기려고 몸부림치면서 때리고 싸우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삭은 함께 대응하지 않고 달라고 하니 그냥 줘버립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우물을 팝니다. 어떤 사람은 몇 년을 파도 파도 나오지 않는 우물이 이삭은 손만 대면 터집니다. 그런데 또 와서 판 우물을 빼앗아 갑니다. 이삭은 그것도 또 내어 줘 버립니다. 그리고 다시 거기서 옮겨서 가다 보니 더 넓은 곳이 나타났습니다. 그곳에서 우물을 파자마자 바로 터집니다. 이제는 이삭의 우물 파는 실력 때문에 빼앗는 사람도 질렸는지 더 이상 시비가 없습니다. 이삭이 어디를 가든지 우물이 터지고 손을 대는 것 마다 백배의 결실을 맺는 것을 보니 어느 누구도 상대가 안됩니다. 이제는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 탁월하게 강성해져 버리니 질투하던 경쟁자도 도움을 받으려고 와서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동역자가 됩니다.(창 26:28) 이삭은 나약 하고 힘이 없어서 우물을 빼앗긴 게 아닙니다. 그냥 달라고 하니 내어준 것입니다.(눅 6:29) 이삭은 자기 우물도 지키지 못한 약자가 아니라 큰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와는 흉년이 와서 길을 떠나는 이삭에게 축복을 약속하면서 그랄 땅으로 가라고 보내셨습니다. (창 26:3)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랄에 거하면 하나님이 복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삭은 믿음대로 하나님의 축복을 넘치게 받았습니다. 이삭은 복 주실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주님으로 믿었기 때문에 내어 쫒으면 나가고 빼앗으려 달려들면 주어 버렸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이 또 채우시고 넘치도록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우물에 목숨을 걸고 빼앗으려 달려 들었지만 이삭은 그깟 우물 하나 가지고 싸우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블레셋에게서 맞서 싸워 빼앗아 오지 않아도 땅을 팔 때 마다 우물이 터지게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이삭의 주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당당하고 여유가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기품 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과 구별됩니다. 세상은 무한 경쟁 시대에서는 살아남기 위해서 치열하게 싸우고 강해지기 위해서 독해지면서 작은 것에는 움켜쥐고 벌벌 떨지만 그리스도인은 그들 앞에서 하나님을 가진 의 여유를 부려도 됩니다. 삭은 그랄 골짜기에서 다시 브엘세바로 올라갑니다, 거기서 예배를 드리고 종들은 우물을 파기 시작하니 얼마 안가서 또 우물이 터집니다. (창 2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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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12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사울에게 회개할 기회를 준 다윗’(삼상 26:6-16)
    사무엘상 24장에 이미 다윗이 엔게디 황무지에서 사울이 택한 군사 삼천 명의 수색을 피하여 굴속에 숨어 있을 때 용무차 들어온 사울을 죽이지 않고 그의 옷자락만 베어 보낸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울은 그런 사건이 있은 후에도 회개하지 않고 다윗이 십 황무지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또 다시 그를 잡기 위하여 직접 삼천 명을 거느리고 온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이 그를 죽이러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숫자상 삼천 대 육백은 싸움이 되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살기 위해서는 어찌하든지 사울이 못 미치는 곳으로 피하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연유에서인지 그는 아비새와 함께 직접 사울이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비록 사울이 누워있다고는 하지만 겹겹이 둘러싼 보초병이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을 잡아 왕의 총애를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아비새와 함께 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위험천만한 행동이었습니다. 다윗은 이 사건이 있기 전에 벌어졌던 사울의 엔게디 황무지 사건과 나발의 사건을 통하여 큰 교훈을 얻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결코 사울의 손에 붙이지 않으신다는 것과 악인은 하나님께서 직접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아8:5a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고.” 다윗이 거친 들에서 사울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었던 힘은 바로 ‘하나님께서 나를 결코 사울의 손에 붙이시지 않으신다.’는 믿음일 것입니다. 그의 믿음대로 사울은 진 가운데 누워 자고 군사들 역시 하나님께서 깊이 잠들게 하셨기 때문에 다윗은 사울의 머리 곁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삼상26:12). 그러면 왜 다윗이 그런 행동을 했을까요? 다윗은 자신이 사울을 죽이고 왕을 차지할 마음이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알리고 싶었을 것이며, 그의 선을 악으로 갚는 사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로 있을 때 자신들을 애굽에 팔아넘겼던 형님들이 곡식을 사기 위하여 그곳으로 온 것을 알았습니다. 형님들에 대한 미움과 원망 섭섭한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았던 것은 그를 애굽으로 보낸 분이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형님들을 마음으로부터 이미 용서하였지만, 회개할 기회는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흘 동안 그들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사흘 후에 요셉의 형님들은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창42:21)라고 말하였습니다. 요셉은 그들이 회개하는 것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래서 시므온만 그들의 목전에서 결박하고 다른 형제들은 곡식과 함께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시107:10이하에는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그러므로 수고로 저희 마음을 낮추셨으니 저희가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라고 나옵니다.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으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 얽은 줄을 끊으셨도다.”라고 나옵니다.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으니 그 근심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만일 엎드러졌을 때 돕는 자가 있었다면 회개하며 부르짖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럴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무조건 돕는다고 해서 좋은 것은 아닙니다. 햇빛도 좋지만 무조건 햇빛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회개하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 더 좋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것을 더 기뻐하십니다(눅15:7). 그러므로 복 중에서 큰 복은 회개의 복입니다. 회개는 생명을 얻게 합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행11:18). 회개하게 되면 진리이신 예수님을 알게 되며, 마귀 올무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딤후2:25-26). 회개는 하나님께서 주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회개할 마음이 생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입니다. 회개할 마음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회개할 마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께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신자들이 하나님께 사로잡히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유는 마귀 올무에 걸려있기 때문입니다. 올무에 걸린 자는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무엇인가에 중독된 상태입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고자 하였지만, 사울은 진정한 회개를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점점 심한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자신이 이스라엘 땅에서 없앴던 신접한 여인을 찾아 죽은 사무엘을 불러오라고 합니다(삼상28:8-9). 그 결과 블레셋의 침입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회개할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기회는 착한 양심을 쓰는 사람이 포착합니다. 착한 양심을 쓰는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기 때문에 통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57:15). 다윗이 사울에게 회개할 기회를 준 것은 양심 쓸 기회를 준 것입니다. 신자들이 어떤 죄를 짓더라도 회개하면 사해주십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 회개는 생명을 얻게 하고, 진리를 알게 하며, 마귀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히는 사람이 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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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07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삼손’(삿 17:28~30)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블레셋이 관할하던 시대에 단지파에 마노아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식이 없던 마노아 부부를 선택하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아이를 보내십니다. 그 아이는 뱃속에서부터 죽는 날까지 세상사는 날 동안 특별히 구별된 나실인입니다. 때가 이르러 마노아의 아내는 아들을 낳았고 이름을 삼손이라고 했습니다. 삼손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머리털을 자르지 않는 행동으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구별된 자로 지켰습니다. 삼손은 자라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하나님의 영을 받았습니다. 그 능력으로 블레셋에 악명을 떨치고 유명한 자가 되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삼손은 블레셋 여자 들릴라를 만났습니다. 들릴라와 사랑에 빠졌지만 결국은 자신이 사랑한 것으로 파멸하게 됩니다. 하나님 없이 사랑한 것의 댓가는 만족이 없는 게 진리입니다.(전 5:10) 삼손이 들릴라 에게 자기의 모든 비밀을 다 털어놓는 순간, 그곳은 구별된 나실인의 축복을 빼앗기는 자리였습니다. 들릴라와 나실인의 축복이 비교할 수 없는 가치라는 것을 삼손이 뒤늦게 깨닫게 되기 전까지 어리석음은 눈을 가리고 이성을 마비시켜 죽는 길인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길을 가게 합니다. 들릴라에게 폭로한 비밀 때문에 삼손은 잠든 사이에 머리털이 다 밀려버렸습니다. 하나님은 나실인 삼손과 그의 머리를 자르지 않는 것으로 언약을 맺었습니다. 삼손이 어떤 방법으로든 머리가 잘려지면 그것은 하님과의 언약을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그 언약을 무시한 것이지요, 에덴동산의 선악과는 하나님과의 언약이 있기 때문에 그 나무가 먹으면 죽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삼손이 머리를 자르지 않는 구별된 행동을 할 때 하나님은 그에게 언약을 이루셔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은 그가 머리를 자르지 않기로 약속한 구별된 행동을 함으로써 그를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특별히 구별하여 대우 하십니다. 머리를 자르고 언약을 깬 삼손에게서 하나님은 떠나가십니다. 삼손의 힘은 머리털에 있었던 게 아니라 머리를 자르지 않을 때 언약대로 임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능력에 있었던 것입니다. 거룩하게 구별한 택하신 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떠나신 삼손은 평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에게는 특별하게 구별된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무 힘도 없는 삼손은 옥중에서 맷돌을 돌리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합니다. 그동안의 삼손이 받은 찬사와 영광은 하나님의 임재하심 때문에 거룩하게 구별된 나실인 이었기 때문에 누리던 것이었습니다. 삼손 자신의 것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런 삼손에게 기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삼손, 이제 그는 더 이상 소망이 없이 끝난 인생이야’ 블레셋 사람들조차도 더 이상 삼손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삼손의 이름은 이제 손가락질과 조롱을 받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구절이 놀랍습니다. “그의 머리털이 밀리운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삿 16:22)” 하나님은 삼손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상한 갈대 같고 꺼져가는 등불 같은 삼손을 다시 세우시는 그분이 하나님 이십니다. 머리가 자라나면서 삼손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구별된 자로서의 언약이 회복되었을 것입니다. 그 회복 중에 진정한 회개가 터져 나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은 삼손에게 임재 하셨겠지요. 가장 밑바닥의 처참한 곳에서 보니 삼손에게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들릴라도 삼손 자신도 없었습니다. 오직 삼손을 구원하신 여호와, 그분 한분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삼손은 마지막 온 힘을 다하여 절규합니다.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마지막 주를 향해 죽기를 원하는 삼손의 인생을 다시 쓰신 하나님이 잡고 계시면 다 부서진 인생이라도 영웅이 됩니다. (삿 16:30) 마노아 부부는 삼손의 소원대로 삼천명의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그들과 함께 죽은 아들의 시체를 가지고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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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06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과 부인하는 것’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10:32-33). 오늘날엔 예수님을 믿는다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셨던 당시에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공개석상에서 말하거나 심지어 개인끼리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는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자 시기심이 가득한 바리새인들이 소경되었던 자에게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그는 “선지자니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의 답변이 자신들의 원하는 것이 아니었던지 바리새인들은 다시 그의 부모에게 묻습니다. “이는 너희 말에 소경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되어 보느냐?” 그러자 그 부모는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어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라고 하며 직답을 회피합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라.”(요9:17-22). 출교란 회당에서 쫓겨나는 것을 말합니다. 곧 유대인의 공동체에서 쫓겨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분임을 용감하게 고백했던 그의 아들은 쫓겨나고 말았습니다(요9:34). 얼마나 두려웠으면 베드로조차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겠습니까? 그만큼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물론 지금도 이슬람권 나라에서나 공산권에서 예수님을 입으로 시인하는 것 역시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신앙의 자유가 있는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자신을 크리스천이라고 담대히 말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물론 주님이 부끄러워서 말 못하는 것이 아니라, 좋지 않은 기독교 이미지 때문에 말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은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위로 시인한 것이 있습니다.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딛1:16). 입으로 시인하지만 행위로 부인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행위로 부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기 말씀처럼 가증한 행동을 하고, 복종하지 아니하며, 선한 일을 저버리는 행동입니다. 가증한 행동이란 하나님이 밉게 여기는 행동입니다. 마7:21은 말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주여” “주여” 하는 것은 입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간다면 행위로 부인하는 것입니다. 입만 크리스천이지 손과 발은 크리스천이 아닌 것입니다. 행위로 시인하는 증거가 주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벧후2:1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 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멸망케 할 이단은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셨으니 우리는 예수님의 종, 더 강하게 말하면 예수님의 노예입니다.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고 자기 뜻대로 살아간다면 예수님을 행위로 부인하는 것입니다. 오늘 많은 신앙인들이 입으로는 예수님을 시인하고 있지만 정말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자신의 뜻이 아닌 예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지 못합니다. 아니, 살아가려는 뜻조차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행위로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입으로 시인할 뿐 아니라 행위로도 시인해야 합니다. 요일2:20은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라고 말합니다. 기름부음은 성령입니다. 자신 안에 계신 성령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것 또한 예수님을 시인하는 행동입니다. 반대로 의식하지 않고 무시하고 살아간다면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느낌, 성령의 감각은 우리 안에서 평안으로 역사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게 행할 때 양심이 편안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치 못한 일을 할 때 양심이 불안합니다. 이처럼 성경 안에서 양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예수님을 시인하는 행동입니다(잠3:6). 그것은 마치 요셉이 형님들에 의하여 애굽에 팔려나간 사건을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고 인정하고(창45:8), 다윗이 시므이가 그에게 한 저주를 하나님의 허락하심으로 받은 것과 같습니다(삼하16:11). 이와 같이 일어나는 사건들 모두를 하나님의 허락하심으로 인정하는 것이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시인하는 행동입니다. 신자들이 모든 일을 하나님의 허락하심으로 인정하면 사람과 일과 사물을 대할 때 태도가 달라집니다. 드러나는 환경이 아니라 배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환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읽으려고 애를 씁니다. 사건을 해석하기 위해 기도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습니다(고전8:3).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알아주시고 하나님의 아신 바 되면 하나님나라에서는 물론,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을 받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시인하는 것은 입으로 시인하고, 행위로 시인하며, 양심을 통하여 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의식하고,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하나님의 허락으로 인정하며,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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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03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택하신 자들’(요 6:60~71)
    사람들은 건강하게 잘사는 것을 원합니다. 잘살 수 있게 해준다면 그것이 선이고 진리이며 종교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의 병도 고치시고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시는 것을 보고 큰 무리들이 따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이 이상합니다. 오히려 그들에게서 피하여 산으로 떠나십니다. 왜 굶주리고 병든 큰 무리들을 버리고 도망치다시피 떠나시는 것일까요? “이분을 붙잡아야 우리가 먹고 살겠구나” 오병이어를 보고 눈이 뒤집혀 예수님께 집요하게 따라 붙는 무리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까닭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예수님은 무리들을 먹일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실 수 있어야 하나님이시지요, 그런데 무리들은 하나님이 안보이고 오천명에게 떡을 먹이시던 그 매력에 감동을 받은 것이지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찾으러 이땅에 오셨습니다. 아무리 병들고 굶주린 자들이라도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니 그들에게 피해서 조용히 떠나가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미리 택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구인가? 큰 무리들 중에서 누가 하나님의 자녀인지는 앞으로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걸러질 것입니다.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양식이 필요합니다. 그들이 절박하게 요구하는 것은 떡입니다. 예수님은 먹고 살기 위해서 떡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살기위해서 먹는 양식은 그들이 생각하는 떡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결코 주리지 않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떡을 소개하십니다. 그 떡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고 하십니다. (요 6:48) 여기까지 들은 무리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합니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알고 있던 생각과 너무 다르니 충돌하면서 반발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예수는 내가 알고 있는 목수 요셉의 아들인데...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니..” 창조주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인간으로 내려온 사실 만큼 믿기 어려운 사건입니다. 계속해서 선포되는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은 수군거리는 그들을 뚫고 지나가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 이니라” 진리가 사람들 사이를 뚫고 지나갈 때 모두 진리에 부딪쳐 걸려 넘어지면서 부서지고 깨어집니다.(마 21:44) 그중에 진리 안으로 들어와 안전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시지 않으시면 누구든지 내게로 올 수 없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자 들이 올 수 있습니다. 생명의 떡이 예수님 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의 살을 먹고 예수님의 피를 마셔야 살 수 있다고 하시는 어마어마한 진리의 선포 앞에서 모두 등을 돌리고 떠나 가버릴 때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진짜 생명이 무엇이며 진짜 사는 것이 무엇인가? 영원한 생명을 잃으면 다 잃는 것입니다. 그 생명을 얻어야 다 얻게 됩니다. 오병이어는 영원한 생명 안에 들어있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먹고 사는 문제를 능히 해결하시고도 남을 하나님이십니다. 오병이어에서 체험했던 분량의 떡을 가져도 다 얻을 수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을 가져야 다 얻게 됩니다. 이 진리를 누가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 큰 무리들이 다 떠나버린 빈자리에 예수님이 택하신 12명의 제자들이 남아있습니다. 아! 이래서 예수님이 그들을 택하셨군요?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면서 마음이 뭉클해집니다.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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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29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하나님께서 붙드는 사람’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지팡이니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것을 땅에 던지라.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된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어 잡으니 그 손에서 지팡이가 된지라.”(출4:2-4).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이끌어내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자 모세는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애굽으로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려해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의 말을 듣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손에 있던 지팡이를 던지도록 하여 뱀이 되게 하시고, 뱀의 꼬리를 잡게 하여 다시 지팡이로 회복시키는 이적을 행하게 하십니다. 또 그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하여 그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람임을 알리도록 명하십니다. 모세는 당시 나이 80이었기 때문에 보통 사람이라면 지팡이를 의지할 나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앞으로 40년을 더 살면서 기력이 쇠하지 않고 눈도 흐리지 않았다고 했습니다(신34:7). 아마도 그 지팡이는 모세가 양을 치는데 필요한 지팡이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요긴하게 쓰던 지팡이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땅에 던지자 뱀이 된 것입니다. 사람도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면 지팡이처럼 요긴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버림받게 되면 뱀처럼 사악하게 됩니다. 1. 그러면 하나님이 누구를 지팡이처럼 붙드십니까? 사42:1이하에는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부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라고 나옵니다. 하나님이 붙드는 사람은 하나님의 종 된 사람입니다. 종이란 자신의 뜻이 없고, 오직 주인의 뜻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만 생각하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애쓰는 사람을 붙드십니다. 산 나무는 지팡이로 쓸 수 없습니다. 죽은 나무를 지팡이로 사용합니다. 주님이 붙드는 사람은 십자가로 자기를 처리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 주십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하십니다. 모세의 말에 권위가 있었고, 여호수아에게 능력이 있었으며, 바울을 통하여 많은 역사가 일어난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붙잡힌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붙잡힌 바 되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의 뜻만 추구하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2. 주님이 누구를 버리십니까? 주님은 결코 먼저 버리시지 않습니다. 사람이 먼저 하나님을 버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버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리는 것은 말씀을 버리는 것입니다(삼상15:26b). 말씀을 버리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도 버리십니다. 마음에 하나님 모시기를 싫어하면 하나님이 버리십니다(롬1:28). 노골적으로 마음에 하나님 모시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하지만 우리 자신도 모르는 새 하나님 모시기를 싫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과, 기도드리는 것과, 주일 지키기를 싫어하는 행동입니다. 마음에 하나님 모시기를 싫어한 결과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됩니다(롬1:29). 교만하면 하나님이 물리치십니다(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약4:6). 하나님의 버림을 받지 않기 위하여 겸손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종, 곧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을 붙드십니다. 그러나 말씀을 버리고, 마음에 하나님 모시기를 싫어하며, 교만한 사람은 물리치십니다. 하나님께 붙잡힌바 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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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29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만남’(요3:1~6)
    유대인의 지도자이며 이스라엘의 선생인 니고데모는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율법의 선생이었지만 그가 아는 지식의 한계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을 보면서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부터 오셨다는 것을 알고 그 분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대화를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여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십니다. 거듭남이 무엇인가? 거듭남은 예수님과 따로 떼어서 설명할 수 없는 의미입니다.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선생이었지만 거듭남이라는 것은 배워 본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늙으면 노인이 되는 것이지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자기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요3:4)” 니고데모는 물리적인 생명 외에는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육체의 순리대로 지성인답게 냉철하게 반문합니다. 자기가 아는 것 이상은 이해할 수가 없는 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누구든지 물과 영으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유대민족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 아니었던가요.. 니고데모는 여호와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걸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물과 영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그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고 말씀 하십니다. 그러면 물리적인 생명이외에 다른 생명이 있다는 말씀 아닙니까? 다른 생명은 물과 영으로 나는 생명, 즉 죄가 씻겨 성령으로 태어나는 생명 입니다.(행 2:38) 이 생명은 살면서 하나님께 직접 받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이 생명은 더러운 것과 함께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죄를 회개하고 받을 수 있는 생명입니다. 이 생명을 받으면 물리적 생명을 가진 사람에게 존재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새로운 생명이 내안에 들어와 잉태되어 자라는데 어떻게 아무 변화가 없을까요? 생명이 역동적으로 움직이면서 존재가 변화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말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육의 생명과 영의 생명이 있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요 3:6) 육의 생명과 영의 생명은 다른 생명입니다. 동일한 종이지만 존재는 다릅니다. 어떤 생명이 있느냐에 따라서 육체의 사람과 성령의 사람으로 구별합니다. 그들은 존재가 다르기 때문에 사는 것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육체의 사람은 물리적인 생명만 있습니다. 그는 영의 생명이 없으니 육체의 생명의 한도 안에서 살다가 죽는 거기까지만 됩니다. 영이 죽어있어 영의 생명이 없으니 보이는 육체가 즐거워하는 것으로만 만족해합니다. 육체의 사람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최고의 가치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은 다릅니다. 물리적인 생명에 또 하나 성령의 생명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있는 자는 영원까지 이어집니다. 그에게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육의 생명과 영의 생명을 듣고 거듭남의 의미에 대해서 놀랍니다.(요3:7)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그러면 영원한 생명을 어떻게 하면 받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부터 원인이 되어 발생한 유일한 분이십니다. (요3:13)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로 믿고 영접하면 그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요 3:15) 그 외에는 천국을 볼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물리적인 생명만 가지고 교회를 다니는 것으로는 안됩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만으로도 안 됩니다. 물과 영으로 거듭난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요 3:5) 영원한 생명이 있는 자는 이 증언을 받은 자들입니다.(요 3:11) 그 생명을 받은 자에게는 하나님이 성령으로 임재하십니다. 그날 밤 집에 돌아가는 니고데모를 상상해 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들에 대한 새롭게 알게 된 지식이 충격이었겠지요, 자기가 알고 있는 메시야의 자료들을 뒤져보고 연구해 보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하지 않았을까요? 고민하던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증언을 받고 영의 생명으로 거듭났을 것입니다. (요19:39) 유대인의 종교지도자인 바리새인 중에서도 하나님의 자녀가 있었습니다.(요 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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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21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말씀을 지키며 간직하라’
    “내 아들아 내 말을 지키며 내 명령을 네게 간직하라. 내 명령을 지켜서 살며 내 법을 네 눈동자처럼 지키라. 이것을 네 손가락에 매며 이것을 네 마음 판에 새기라. 지혜에게 너는 내 누이라 하며 명철에게 너는 내 친족이라 하라. 그리하면 이것이 너를 지켜서 음녀에게,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 빠지지 않게 하리라.”(잠7:1-5) 말을 지킨다는 것은 말을 빼앗으려 하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씨 뿌리는 비유가 있습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 돌밭에 떨어진 씨, 가시밭에 떨어진 씨, 옥토에 떨어진 씨, 그 중에 가장 좋지 않는 상태는 길가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씨들은 그래도 싹이라도 틔우지만 길가는 싹을 틔우기도 전에 새가 와서 먹어버리기 때문입니다.(눅8:11) 새는 곧 마귀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지키고 간직하기 위하여 가장 우선해야 할 것은 자신의 마음이 길가와 같은 것인지 아니면, 옥토와 같은 것인지 살펴야 할 것입니다. 만일 길가와 같은 마음이라면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간직할 수 없고 간직할 수 없기 때문에 지킬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면 왜 길가와 같은 마음이 됩니까? 길가는 사실 밭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밭이라면 우선 갈아엎어야 하고 돌멩이를 추려 내야하며 때때로 잡초를 제거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거름도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길가는 갈아엎을 필요가 없습니다. 갈아엎는다면 오히려 다니는데 불편한 것입니다. 이처럼 길가는 한 번도 갈아엎어보지 않는 마음입니다. 호10:12는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묵은 땅을 갈아엎으라고 하십니다. 묵은 땅은 딱딱하게 굳은 땅입니다. 누구 밑에도 있지 못하고, 순종해보지 않은 자기 뜻, 자기 고집, 자기 마음대로 살아간 완고한 마음입니다. 이런 사람이 길가인 것입니다. 그래서 옥토가 되기 위하여 먼저 땅을 갈아엎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내 고집, 내 생각 부인하고 순종하는 것이 갈아엎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에게 순종할 수 있는 환경을 주십니다. 갈아엎도록 할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가정에는 남편, 아내를 주셨고 자녀들에게는 부모님을 주셨으며 회사에는 상관과 동료들을 주셨습니다. 경작된 밭 곧 순종적인 마음밭에 성령께서 말씀의 씨를 뿌려주십니다. 그러면 마음이 그 씨를 간직하게 됩니다. 간직하기 위하여 두 번째 해야 할 일은 말씀을 눈동자처럼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 신체 구조에서 가장 예민한 부분이라면 눈일 것입니다. 손이나 발에 티끌이 묻으면 예민한 사람이라면 바로 느끼겠지만 보통은 모르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치아에 음식찌꺼기가 있으면 다소 불편하겠지만 그래도 말을 할 수 있고,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또 코에 먼지가 조금 끼면 딱지가 생기고 불편하겠지만 그런대로 숨을 쉽니다. 그런데 눈동자 안에 먼지나 작은 티끌이 들어가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몹시 불편하여 온갖 수단을 사용하여 어떻게 하든지 그것을 빼내려 애를 쓸 것입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지체한다면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릴 것입니다. 그것은 눈동자가 그만큼 예민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눈동자처럼 지키십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신32:10). 신앙인들을 눈동자처럼 보호해주시고 지켜 주신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주님이 신자들을 사랑하셔서 눈동자같이 보호하시니 우리도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말씀을 눈동자처럼 지키려고 애를 써야합니다. 눈동자처럼 말씀을 지키지 못하여 망한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말씀을 지키지 못하여서 에덴 낙원을 잃어버렸고(창3:24), 사울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고 오히려 버렸으므로 왕으로서의 권위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삼상15:22-23). 아버지 다윗을 저주하였던 시므이에게 솔로몬은 그가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날에는 정녕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하지만 시므이는 삼 년 째 되는 해에 가드왕 아기스에게 달아난 종을 잡으러 기드론 시내를 건너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는 죽음이었습니다(왕상2:36-46). 이처럼 말씀이 곧 예수님이며 우리가 말씀을 놓치면 곧 생명을 놓치는 것입니다. 어찌하든지 눈동자 같이 지키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눈동자처럼 말씀을 지킬까요? 요14:15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의 영, 곧 성령을 풍성하게 주시고 그 성령께서 지키게 해주십니다. 자신이 지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지키고 행하게 하십니다. 말씀을 지키기 위하여 세 번째 할 일은 손가락에 매며 마음 판에 새기는 일입니다. 손은 우리가 행동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밥 먹을 때 손이 필요하고 일을 할 때 손이 필요하며 몸을 씻을 때 필요합니다. 사람과 교통할 때 손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손가락에 말씀을 매라고 합니다. 그런 일들을 할 때 무작정하지 말고 먼저 말씀에 합당한지 그렇지 못한지 살피라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이라도 행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말씀이 마음에 새겨지고 우리의 피가 되고 살이 되기 위해서는 지식을 넘어서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에 새기려면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행한 그 말씀이 우리 마음 판에 새겨집니다. 새겨질 뿐 아니라 점점 자라서 열매를 맺게 됩니다. 말씀을 지키기 위하여 마음 밭을 살피고, 눈동자처럼 지키며, 행함으로 마음 판에 새기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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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20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우물가의 여인’(요 4:10~17)
    예수님은 유대를 떠나서 갈릴리로 가시는 중에 사마리아를 통해서 지나가십니다. 해가 쨍쨍 내리쬐는 한낮 12시경입니다. 여행길에 지쳐서 야곱의 우물이 있는 우물가에 그대로 앉으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거기서 만나셨습니다. 여인은 물을 길러 나왔습니다. 그 여인은 뭔가 사연이 있어 보입니다. 인생의 낙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입니다. 게다가 아무도 물을 길러 나오지 않는 시간에 저런 모습으로 나온걸 보니 사람들과 마주치는 게 싫어서 스스로 고립되어 살아가는 여인인 것 같습니다.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물을 좀 달라’고 먼저 말을 건네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녀는 알고 보니 심히 목마르고 허기진 여자였습니다.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심한 공허함과 무엇으로도 가시지 않는 목마름으로 결핍된 여자였습니다. 목마르고 심하게 굶주린 상태를 상상해 봅시다. 고통스러운 목마름에 모든 에너지를 다 쏟고 있으니 자기의 허기와 목마름을 채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눈에 보이는 게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존재 자체가 결핍되어 있으니 잘해줘도 고마운 줄도 모르고 가진 게 있어도 좋은 줄을 모릅니다. 누가 무엇으로 이런 여자를 만족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다보니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치운 여자입니다. 평범한 여자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잘사는 일상을 사는 게 어려운 여자입니다. 여인의 목마름은 남편이라는 대상으로 무너지고 부서져 버린 삶으로 나타났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너무나 목이 말랐지만 여인의 목마름을 채울 수 있는 물은 없었습니다. 그것은 존재적인 목마름이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목마름입니다. 존재적인 목마름은 내 안에서부터 해결되어야 한다. 속으로부터 채워져야 합니다. 근원자만이 해결하실 수 있는 문제입니다. 존재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는 목마름입니다. 어떤 다른 피조물로도 대체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인생문제는 방법이 없다고 그럭저럭 체념하고 삽니다. 해결할 수 없는 곳에서 찾으려고 헤매다 찢기고 상처받고 아프니 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는 물이 있다고 말씀 하십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네게 물 좀 달라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요 4;10)” 주실 수 있는 분에게 와서 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분은 분명히 주십니다. 그물이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여인은 자기가 목마른 사람이라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이 주시는 물을 간절히 구했습니다. ‘그런 물이 있다면 내게도 주소서’ 물을 달라는 여인에게 예수님은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십니다. 왜 이런 아픈 부분을 건드리시는가, 피하는 게 예의인데... 물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여인에게 자신의 가장 부서지고 무너진 부분을 직면하고 인정하게 하십니다. 그것은 남편이었습니다. 여인은 자기의 심한 결핍을 해결할 수 있는 게 남편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직면하니 남편은 자기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애통의 과정을 지나서 비로소 여인은 고백합니다.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 여인은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죽어서 바싹 말라 비틀어져서 목마르고 굶주린 여인에게 예수님으로 부어졌습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창조주 하나님이 부어질 때, 그 생명이 닿으면서 영혼이 살아났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성령이 나에게 부어질 때 그때 비로소 다시는 목마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구하는 자에게 분명히 주시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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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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