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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창조의 안식일’(창 2:1-3)
    안식일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날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휴식하신 하나님의 안식은 훗날 모세에게 주신 제4계명인 안식일 제도의 근거가 되었습니다.(신 5:15) 하나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 것을 기억하는 방법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안식”이 두 번 나오고 “복”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은 안식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엿새 동안 창조 사역을 마치신 후 일곱째 날에는 안식하시고 이날을 복되고 거룩한 날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피로 회복이나 휴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종교적 의미가 담긴 것으로 안식일 제정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도 신의 안식은 제사와 관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안식이 안식일 제정과 관계가 있는 것을 출애굽기 31장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일곱째 날에 일을 마치고 쉬었음이니라 하라.”(16-17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에서도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2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일곱째 날을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날에게 복을 주신 것은 일곱째 날이 유일합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보시며 기뻐하시고 피조물에게 복을 주셨지 날 자체에 복을 주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일곱째 날은 다른 날과는 다른 특별한 날입니다.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이자 복 받는 길입니다. 거룩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는 사건이 있습니다. 레위기 10장을 보면,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성막의 분향단에서 첫 번째 향을 피우던 중 금지된 불을 사용해서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께서 규정하신 거룩한 불이 아닌 속된 불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즉시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해쳤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해치는 일은 큰 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신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지키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안식일이 거룩한 것은 그날에 죄인인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잔치 자리에 초대를 받아 주님과 함께 안식의 은혜를 누리기 때문입니다. 그날에는 나그네도 과부도 고아도 집안에 있는 육축도 주님이 주시는 평안으로 안식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출 20:8-11) 우리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보다는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사랑하는 선한 마음이 중요합니다. 안식일의 근본정신은 죽어 가는 생명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예수께서는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양 한 마리가 있다고 하자. 구덩이에 빠지면, 그것을 잡아 끌어 올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은 괜찮다.”(마 12:11-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날에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을 죽음 가운데서 구원하셨듯이 영적으로 죽은 자를 살리는 예배는 무척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나를 드리기를 원하십니다.(시 40:5-8) 예배는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은혜의 자리,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출애굽기 8장을 보면, 개구리 떼가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들이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은 것이 재앙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예배해야 합니다. 예배하는 삶은 죄를 회개하는 삶입니다. 말씀을 깨닫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예배드리지 않았다면, 진실로 하나님을 예배한 것이 아닙니다. 일주일 동안 죄를 짓고 살다가 회개 없이 주일에 교회 가서 예배를 드리면 주님이 기뻐하실까요? 바울은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롬 1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적 예배는 합당한 예배, 즉 합리적인 예배를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말씀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영과 진리로 예배드려야 합니다.(요 4:23) 즉 성령님을 모시고, 하나님께 생각을 집중하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발을 금하고, 오락을 금하고,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않고 거룩하게 지키면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사 58:13-14)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서 즐거운 삶이 되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집중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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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0-07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고전 11:1)
    사람에게 좋은 본이 된다는 것은 매우 귀한 일입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모범적인 삶을 살아왔기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1절; 빌 3:17)고 권면합니다. 이러한 권면은 절대로 교만이나 우월감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자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으라는 말도 결코 아닙니다. 바울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전심전력을 기울였던 자신의 신앙의 삶의 전체를 본받으라고 한 것입니다. 아무리 말을 잘해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므로 영향을 끼칠 수 없습니다. 행위나 실천은 신앙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우리는 믿음과 행위의 일치를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본받는 것은 육신의 생각대로 살지 않고 날마다 죽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가 부인되지 않고 죽지 않으면 본받는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삶은 자신이 원하는 삶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심중에 새기고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한 것만을 추구하며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만 살고자 소원하며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삶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본을 보이시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 지고 따라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사랑과 순종 온유와 희생과 겸손 섬김 용서에서 모범이 되셨기에 우리는 주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이 세상을 본받아도 예수님을 본받으려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본받으려는 신자도 드물다는 것입니다. 유행과 관습과 쾌락을 따르고 명예 영광심을 따르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세상의 영광과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고 교훈을 주신 것입니다. 에녹은 사악한 세대를 본받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입니다(창 5:24). 노아 시대 역시 가인의 후손들의 악한 행실이 계속되고 사람들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하였으며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악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음에도(창 6:5) 노아는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노아는 할아버지 므두셀라로부터 증조할아버지 에녹에 대한 신앙교육을 받았기에 그의 마음속에는 금보다 귀한 믿음이 싹 트기 시작했고 증조할아버지 에녹을 본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멸망당하는 자리에서 새로운 시조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은 땅엣 것을 생각지 않고 위엣 것을 생각하고 찾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나 본받아서는 안 됩니다. 올바른 본은 받아들이고 잘못된 본은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본받고 성령을 좇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신령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참된 제자의 길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요 순종하는 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자신을 깨뜨리지 못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육성과 아집이 깨어지고 부스러져야 합니다. 깨어질 때 향기를 발합니다. 옥합의 딱딱한 껍질이 깨어질 때 향기를 발한 것처럼 육성과 고집이 깨어질 때 영적인 향기를 발하게 되고 주님을 본받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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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0-04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올바른 비판’(마 7:1-2)
    사람이 살면서 남의 말을 빼면 별로 말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이처럼 사람이 살면서 남 이야기 안하고 산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겁니다. 그런데 남의 말도 좋은 뜻으로 하기 보다는 비판하고 안 좋게 말하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무 쉽게 남을 정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병폐를 바로 잡기 위해서 “비판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다고 해서 모든 비판을 금하신 것은 아닙니다. 다른 복음서를 통해서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눅 12:57) “공의롭게 판단하라”(요 7:24)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린지 사실과 거짓이 무엇인지를 반드시 분별하고 판단해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오늘날처럼 가짜 뉴스가 범람하는 시대에서는 더욱 그러한 것입니다. 바리새인처럼 자기가 재판장 격이 되어 남을 정죄하는 것을 금해야 합니다. 지금도 신앙생활을 오래한 교인들 중에서도 이런 허물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자기 자신이 하나님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신이 심판하는 권세를 가진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행위를 심판하고 정죄하고 그들의 마음과 생각까지도 심판하곤 합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제일 많이 짓는 죄 중의 하나가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죄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정확하게 판단하기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남을 비판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요 잘못된 죄입니다. 흔히 우리 인간은 내 잘못은 못 보고 남의 잘못만 찾아내는 수가 많습니다(마 7:3-4 ; 롬 2:1). 우리는 남이 잘못할 때 비판하기에 앞서 내게는 저런 잘못이 없나 살펴보고 삼가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고전 10:21). 남을 가혹하게 비판하는 삶은 반드시 자기도 가혹하게 비판을 받게 되고 남에게 너그러운 사람은 자기도 너그러운 판단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되로 주면 되로 받고 말로 주면 말로 받고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이처럼 심는 대로 거두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위해서도 비판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억울한 욕을 받으셨지만 같이 욕하거나 저주하지 않으시고, 공의로 판단해주실 하나님께 맡겼다고 했습니다(벧전 2:23). 모든 옳고 그른 것을 올바르게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 한분뿐이시기에 우리가 조급하게 남을 비판하지 않도록 신중해야 하겠습니다(시 37:7-8). 아무래도 우리가 교만해질 때 다른 사람을 날카롭게 비판하게 됩니다. 겸손한 사람은 함부로 남을 비판하지 않습니다. 내 입에서 너무 날카로운 비판이 나올 때 내 영적 상태가 병들거나 잘못되지 않았나? 깊이 반성해 보고 하나님 앞에 회개할 필요가 있습니다(갈 6:1). 비판하는 즐거움은 깊은 내면의 더 큰 즐거움을 빼앗아 간다는 서양의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향해 돌을 집어든 사람들처럼 남의 허물을 향해 돌을 집어들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를 받으려면 긍휼히 여기고 관용하는 사랑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약 2:13).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준다고 하셨습니다(벧전 4:8). 우리는 다 허물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실수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흠밖에 없음. 그러므로 남을 비판하거나 손가락질하기 이전에 자기 자신을 살피며 올바른 판단으로 공의로운 사회를 이루고 건강한 영적인 삶을 살아감으로 화평을 이루는 일꾼들이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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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19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그리스도인이 제사 음식을 먹어도 되나?’(고전 8:1-13)
    바울은 고린도전서 8장부터 10장까지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우상과 우상의 제물에 대해 반복하여 “우상 숭배를 멀리하십시오.”(고전 10: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이 우상과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이렇게 경계하는 것은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가 우상 숭배로 끊임없이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우상 숭배는 하나님께만 마땅히 돌릴 영광을 헛된 우상들에게 돌리기 때문에 가장 큰 죄악입니다. 우상은 인간이 물질로 만든 생명 없는 피조물 곧 돌과 나무에 불과한 것입니다. 바울은 “우상에게 바친 고기에 대하여 말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모두가 지식이 있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1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우상의 제물도 단지 음식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먹는 사람들에게 자기중심적인 지식을 앞세우지 말고 절제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남을 배려하지 않는 지식은 교만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우상 숭배를 뒷받침하고 있는 만유신론을 가리킵니다. 그리스 스토아 철학의 자연학자들은 만유신론을 주장하며 만물에는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하여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철학적 지식은 인간을 교만하게 만들어 결국 우상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러한 지식은 힘들고 어려운 사람을 사랑하는 데 전혀 쓸모없이 우상 숭배의 죄만 짓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은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만물은 그분에게서 낫고, 우리는 그분을 위하여 있습니다. 그리고 한 분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만물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습니다.”(6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주님은 오직 한 분뿐이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신 6:4) 바울은 자신의 잘못된 신에 대한 지식으로 약한 형제자매를 실족하게 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지식이 있는 당신이 우상의 신당에 앉아서 먹고 있는 것을 어떤 사람이 보면, 그가 약한 사람일지라도, 그 양심에 용기가 생겨서,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그 약한 사람은 당신의 지식 때문에 망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약한 신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렇게 여러분이 형제자매들에게 죄를 짓고, 그들의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10-12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음식 자체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는 것은 음식이 아닙니다.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해서 손해볼 것도 없고, 먹는다고 해서 이로울 것도 없습니다.”(8절) “그러므로 음식이 내 형제를 걸어서 넘어지게 하는 것이라면, 그가 걸려서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나는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습니다.”(13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책임감 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바울은 비록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4절) 아니지만,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은 귀신과 교제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8-21절을 보면, “육신상의 이스라엘 백성을 보십시오. 제물을 먹는 사람들은, 그 제단에 참여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러니 내가 무엇을 말하려는 것입니까? 우상은 무엇이고, 우상에게 바친 제물은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방 사람들이 바치는 제물은 귀신에게 바치는 것이지,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귀신과 친교를 가지는 사람이 되는 것을 나는 바라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잔을 마시고, 아울러 귀신들의 잔을 마실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식탁에 참여하고, 아울러 귀신들의 식탁에 참여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우상 제물에 참여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귀신과 사귀게 되는 것입니다. 이 교제는 서로 인격적인 만남과 나눔이기에 단순한 제사 참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숭배자 자신이 숭배의 대상에게 종속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우상의 제물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은 우상과 교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0:20) 우상의 제물과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베풀어지는 성찬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성찬은 예수님의 죽음을 단지 기념하는 제사 의미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하나님 나라의 식탁 곧 미래의 종말론적 식탁의 의미입니다.(막 14:25) 예수님의 몸과 보혈에 참여하는 성찬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신령한 몸에 연합되는 것을 고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우상의 제물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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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09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믿음의 능력’(막 9장23절)
    성도는 믿음으로 위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눈을 들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성공적인 삶에 이르는 첩경입니다. 성경을 보면 믿음이 지닌 놀라운 능력에 깊은 감명을 받고 또한 힘을 얻게 합니다. 언약궤를 짊어진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이 물이 잔뜩 불어 있은 요단강에 믿음으로 첫발을 내딛는 순간 흘러내리던 강물이 멈추어 섰고 이스라엘 백성은 강바닥에 드러난 길을 지나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수 3장). 그뿐이 아닙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순종하여 군사들로 하여금 견고한 여리고 성을 엿새 동안 돌게 한 뒤, 마지막 일곱째 날에는 같은 방식으로 일곱 번을 돌며 큰 소리로 외치게 하자 성이 무너져 내렸습니다(수 6장). 다윗은 블레셋의 거인 용사 골리앗에 맞서 매끄러운 돌멩이로 그를 제압했습니다(삼상 17장). 열두 해를 혈루병으로 고생하던 한 여인이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자 즉시 고침을 받았습니다(마 9:20-22). 한 어머니가 예수님에게 귀신들린 딸을 고쳐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어머니의 믿음으로 딸은 즉시 고침을 받았습니다(마 15:28). 우리의 삶 가운데에도 많은 문제와 역경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현실이 아무리 답답하고 어려워도 두려워하지 마시고 믿음으로 물리치시고 용기를 가지고 승리하십시다. 어려울 때일수록 담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인간의 생각을 창조적으로 바꾸고, 사회를 변혁하며, 역사의 방향을 바꾸어 놓는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위대한 신앙은 하나님께서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는 확신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환경과 상황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보십니다. 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고백이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할 수 없다는 말은 불신앙인 것입니다. 렘 32:27에서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셨고 막 9:23에서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에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환난이 가득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은 오히려 믿음의 훈련장인 것입니다. 믿음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환난은 스스로를 문제로 위장한 채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믿음의 눈으로 그것을 오히려 기회로 포착하시기 바랍니다. 삶을 비관적이거나 절망적으로 보지 마시고,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과 뜻이 있음을 믿읍시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믿음의 분량대로 역사하십니다. 믿음은 생명력이 있고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합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있을 때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주님의 능력을 믿고 강하게 매달리는 것이 최고의 방법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안 되는 일도 주님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전능하심을 확신해야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의 말에는 역사가 나타나고, 확신 있는 기도는 그대로 받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11:23-24). 언제나 믿음으로 살아서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를 체험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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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05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의 반응’(사 6:5-8)
    하나님의 백성은 주님을 만났을 때 떨면서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인 우리는 주님 앞에서 두려운 마음으로 엎드려야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에 대한 회개 없이 주님의 임재 가운데로 경솔하게 들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은 노력으로 청결해지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주님을 만날 때 경험하는 고백과 회개를 통해 깨끗해집니다. 그럼 주님을 만난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이사야는 거룩하신 주님을 뵈었을 때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 뵙다니!”(사 6:5)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이사야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죄뿐이었기 때문에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죄를 고백했습니다. 그때 한 천사가 제단에서 타고 있는 숯을 부집게로 집어 이사야의 입에 대며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악은 사라지고, 너의 죄는 사해졌다.”(7절)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입술의 죄는 우리의 죄악 중 대부분이지요. 생각으로 짓는 모든 죄가 입술을 통해 밖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마 15:18) 그래서 “누구든지,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 몸을 다스릴 수 있는 온전한 사람”(약 3:2)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입술이 부정한 우리도 이사야처럼 죄를 회개하여 주님의 음성을 듣고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8절)라고 순종하기를 바랍니다. 에스라는 주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 너무나도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하나님 앞에서 차마 얼굴을 들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은 죄는, 우리 스스로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불어났고, 우리가 저지른 잘못은 하늘에까지 닿았습니다. 조상 때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저지른 잘못이 너무나도 큽니다.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의 왕들과 제사장들까지도, 여러 나라 왕들의 칼에 맞아 죽거나 사로잡혀 가고, 재산도 다 빼앗기고, 온갖 수모를 겪었습니다. 이런 일은 오늘에 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스 9:6-7)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어서 에스라는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 주님은 너그러우셔서 우리를 이렇게 살아 남게 하셨습니다. 진정, 우리는 우리의 허물을 주님께 자백합니다. 우리 가운데서, 어느 누구도 감히 주님 앞에 나설 수 없습니다.”(15절)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죄인인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은 오직 너그러우신 주님의 은혜인 것을 기억하며 항상 감사해야 합니다. 하박국은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그 소리를 듣고 나의 창자가 뒤틀린다. 그 소리에 나의 입술이 떨린다. 나의 뼈가 속에서부터 썩어 들어간다. 나의 다리가 후들거린다. 그러나 나는, 우리를 침략한 백성이 재난당할 날을 참고 기다리겠다.”(합 3:16)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어서 하박국은 “무화과나무에 과일이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지라도, 올리브 나무에서 딸 것이 없고 밭에서 거두어들일 것이 없을지라도,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련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련다.”(17-18절)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도 하박국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죄인인 나를 구원하신 그 구원의 은혜로 말미암아 항상 즐거워하고 기뻐하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5장을 보면,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아라.”(4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시몬은 “선생님, 우리가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겠습니다.”(5절)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대로 하니, 많은 고기 떼가 걸려들어서,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자기들을 도와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히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예수의 무릎 앞에 엎드려서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6-8절)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엎드렸습니다. 베드로는 죄인으로서 감히 거룩하신 주님 앞에 마주 대할 수 없어서 주님이 떠나 주시기를 간청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낮에 깊은 물 속에 그물을 던져서 고기를 잡는 것이 비효율적인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베드로는 말씀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이처럼 주님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는 주님의 일하심을 놀랍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도 귀로만 듣던 주님을 눈으로 뵙고 주님을 만난 주인공들이 되어 우리를 통해 많은 사람이 살아 계신 주님을 뜨겁게 만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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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26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무엇을 탐구하며 생각하십니까’(골 3장1-4절)
    우리가 무엇에 마음을 기울이고, 무엇을 찾고 탐구하는가는 우리의 삶의 목표 설정과 함께 우리의 삶에 직접 관계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주된 관심과 목표를 땅에 둘 것이 아니라 위엣 것에 두어야 하겠습니다. 땅의 것은 현세적이며, 자기중심. 세상 중심. 물질중심의 삶을 뜻하는데 이러한 삶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에 방해가 되고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자들이기에 위엣 것을 찾고 생각해야 합니다(1-2절).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늘 하늘나라를 생각하며 살아야지 이 복잡하고 사악한 세상에 붙들리면 안 됩니다. 위에 것을 생각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의 관심과 마음과 생각 모두가 하나님 중심. 그리스도 중심, 말씀 중심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생각이 주님께서 계신 하늘나라에 집중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고 신분적으로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올라가 있는 자들입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5-6).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함께 다시 살아난 새 생명의 소유자이기에 우리의 삶이 영광의 그리스도를 삶의 모든 것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실제로 성도에게 있어서 모든 것의 근원이시오 지혜와 능력과 지식과 힘과 진리와 복의 근원이십니다(고전 1:24 ; 골 2:3). 이 모든 것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소유한 성도의 바람직하고 합당한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 마음과 정신은 여전히 세속적인 것들에 열중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헌신한 이후에도 이전과 동일한 신념이나 욕망 그리고 태도를 계속 지속하며 개인적인 목적과 계획 그리고 자기 자신의 우선순위에 따라 계속 살아가는 이러한 태도의 근본적인 전환과 가치관의 재정립이 요구되었기에 위엣 것을 찾고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을 찾고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땅에서 살지만 우리의 생각과 목적과 뜻이 모두 위에 속한 것들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도 사랑도, 소망도 소원도 자랑도 기쁨도 다 위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항상 그리스도 중심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권자이지만 현재는 세상에 몸담고 있으므로 세상의 일에 대해서는 ‘나 몰라라’하고 그리스도만을 위해 하늘만 바라보면서 마치 구름 위에 떠서 다니는 것처럼 살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과 마귀가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도록 모든 생각과 관심의 초점을 이 세상이 아닌 하늘나라의 일, 즉 보좌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맞추어야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 지상에서 우리들이 주님과 동행하는 삶은 현재 보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숨겨져 있는 삶입니다(4절). 숨겨져 있는 삶이 주님 재림하실 때, 모두가 주님의 영광중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주된 관심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에 두며 하나님의 영광과 천국에 두며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집중하여 힘써 나갑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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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21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요 14:27)
    재난의 징조로서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눅 21:10-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쟁, 지진, 기근, 전염병이 계속되는 상황 속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마음의 평안일 것입니다. 우리에게 마음의 평안을 주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으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모든 근심과 두려움을 뛰어넘는 내적이며 절대적인 평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죄인인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골 1:21-22) 주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이웃과도 평화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께서 주시는 평강을 확장시켜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닫아걸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평강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강은 영적인 평안입니다. 그 평안을 얻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에게 평안이 없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평안을 주시고,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십니다.(요 14:26)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먹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영이 건강하고 얼굴에 빛이 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내려올 때 그의 얼굴에는 빛이 났습니다. 주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었기 때문입니다.(출 34:29) 우리가 주 안에서 기뻐하면,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면, 모든 일에 염려 없이 기도로, 감사로 주님께 아뢰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빌 4:4-7) 주님은 백성의 심지가 견고하여 요동함이나 치우침이 없이 그 은혜를 의존할 때에 그들의 보호자가 되셔서 평강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사야 26장 3절을 보면,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한결같이 주님을 신뢰하는 자에게 평강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변함이 없으시고, 인간은 불안전하기 때문입니다. 유다 왕 아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일, 올바른 일을 하였습니다.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애고,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율법과 명령을 실천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나라는 조용하였고 주님께서 그 나라와 아사에게 평안을 주셨습니다. 아사 왕은 백성에게 우리가 주 하나님을 찾았으므로 평안을 주셨다고 말했습니다.(대하 14:1-7) 우리도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을 때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평안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0:13)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전도해야 합니다. 전도는 나의 지혜의 설득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는 것이기에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해야 합니다.(고전 2:4) 예레미야 29장 11절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평안이요, 미래와 희망을 주시는 것을 기억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갖고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저는 『천로역정』 책을 읽었을 때나 <천로역정> 영화를 보았을 때 가장 감동적인 언어가 ‘희망’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간 존 번연은 소망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알았기 때문에 환경을 넘어 희망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천국으로 가는 여정 속에서 모든 것이 평탄하기만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셨기에 우리도 이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평안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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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13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범사에 감사하십니까’(살전 5:18)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신과 가족과 타인에게 그리고 자신이 속한 직장과 사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산다는 것은 매우 행복한 일입니다. 감사는 고마운 마음을 상대에게 전하는 아름다운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감사를 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감사는 자신에게나 상대에게 즐거움을 주고, 서로의 관계를 끈끈하게 맺어주는 아름다운 행위인데 말입니다. 우리는 감사에 인색해서는 안 되며 매사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감사할수록 유대관계가 좋아지고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감사는 단지 고마움에 대한 마음의 표현이 아니라 서로를 단단하게 동여매주는 수단이고 건강한 삶도 가져다줍니다. 감사의 말 속엔 따뜻한 긍정의 에너지가 들어 있고, 무엇이든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지만 감사를 잘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매사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비관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십니다(18절).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사의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다. 범사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다 포함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불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상태에서 보면 무엇 하나도 눈물 흘리며 감사하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고난도 환란도 유익합니다(욥 23:10; 시 119:67, 71).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지금의 상태가 최고이고 최적의 상태라는 것이지요. 다니엘은 왕의 칙령이 내려졌으므로 자신이 기도하면 사자굴에 들어갈 것을 알면서도 집에 돌아와 모든 문을 열어놓고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크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단 6:10). 다니엘은 상황을 원망하거나 하소연하지 않았습니다. 그 상황을 바꾸어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처해있는 그 상황에 감사하였던 것입니다. 감사는 환경이나 조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과 생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합 3:17-18에서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을 보면 감사는 신앙의 문제이지 환경의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은혜를 받는 비결은 감사이며, 은혜를 받은 결과도 감사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해 감사하는 삶이 바로 신앙의 생명이요 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복된 생활인 줄로 믿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 믿음은 대단히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성도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지금까지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가게 된다는 믿음의 확신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말세에는 더욱 감사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감사’는 헬라어로 ‘유카리스테오’입니다. 이 말의 뜻은 마음 중심에서 가식이나 부담 없이 자원하여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감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감사는 자원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신앙의 표현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늘 감사로 표현했습니다(시 95:2 ; 100:4). 감사는 단순히 인간의 의지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감동과 감화의 결실입니다. 이러한 감사는 궁극적으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고후 4:15) 우리의 전 생애를 하나님께 위탁하며 충성하는 적극적인 신앙의 행위와 태도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감사가 있는 곳에 기적이 있고, 기쁨과 사랑과 믿음이 있습니다. 모든 것, 모든 순간, 모든 사건, 모든 시간을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선물로 여기며 범사에 감사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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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09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자족 신앙’(빌 4:12-13)
    현대는 불만족의 시대라고 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만족하다는 소리를 듣기가 어렵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풍요한 삶을 누리는 것 같으나 실상은 모두가 불만의 포로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모르거나 곡해함으로서 불평과 불만에 사로잡혀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영적 피조물입니다(창 1:27). 전 3:11에서는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다만 흙으로 빚어진 물질적인 존재인 줄로 착각하여 지식이나 재물로 그 공백을 메꾸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의 행복은 바람과 같아서 아무리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습니다. 잡았다 생각하지만 빈손입니다. 그래서 전 1:14절에서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물질제일주의로 물질을 추구하면서 물질로 행복을 사겠다고 하지만 도리어 그 물질 때문에 불행해졌습니다(딤전 6:10). 세상은 자족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여기지 않고 더 가져야 한다고 아우성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우리에게 자족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2절).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라”(딤전 6:8)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족이란 자기만족이 아니라 부단히 싸워서 이겨야 하는 즉 자기와 싸워서 이겨야 하는 바로 그런 것임. 자족은 스스로의 체념에서 오는 자기 비하나 자기 포기가 아니라 어떤 도전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용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신자는 가난하고 비천한 환경에서도 결단코 실망과 낙담하거나 열등감에 빠져 자포자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자족과 감사의 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족하는 생활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니 경험을 통하여 자족하는 비결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형편에든지 불평이나 불만은 배우지 말고 자족하기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남의 것을 보고 비교하지 말고, 내 입장과 환경을 바라보며 만족합시다. 세상에는 가만히 있어도 알아지는 것이 있고, 배워야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본능적인 것은 누구나 배우지 않아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부단히 본능적인 욕구들로부터 자족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고후 3: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우리의 만족은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충족시켜 주십니다(시 23:1, 약 1:17). 세상의 만족, 육신의 만족이 아니라, 주님을 신뢰하는 데서 오는 만족인 것입니다. 우리는 환경에 의해 자기의 행불행을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행복은 자기가 처한 환경에 달린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에 내 자신을 굴복시킬 때 우리는 어떠한 환경에서도 자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13절)는 말씀은 ‘세상의 성공’에 초점을 맞추지 있지 않고, ‘자족하는 삶’에 초점을 두고 있는 말씀입니다. 나는 어떤 상황 속에서라도 믿음을 지키며 그 어려운 환경을 극복할 수 있다는데 메시지가 있는 것입니다. 자족은 능력주시는 주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어떤 환경이나 생활 속에 처할지라도,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만족하면서 영적 부요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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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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