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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그리스도인이 제사 음식을 먹어도 되나?’(고전 8:1-13)
- 바울은 고린도전서 8장부터 10장까지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우상과 우상의 제물에 대해 반복하여 “우상 숭배를 멀리하십시오.”(고전 10: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이 우상과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이렇게 경계하는 것은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가 우상 숭배로 끊임없이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우상 숭배는 하나님께만 마땅히 돌릴 영광을 헛된 우상들에게 돌리기 때문에 가장 큰 죄악입니다. 우상은 인간이 물질로 만든 생명 없는 피조물 곧 돌과 나무에 불과한 것입니다. 바울은 “우상에게 바친 고기에 대하여 말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모두가 지식이 있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1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우상의 제물도 단지 음식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먹는 사람들에게 자기중심적인 지식을 앞세우지 말고 절제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남을 배려하지 않는 지식은 교만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우상 숭배를 뒷받침하고 있는 만유신론을 가리킵니다. 그리스 스토아 철학의 자연학자들은 만유신론을 주장하며 만물에는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하여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철학적 지식은 인간을 교만하게 만들어 결국 우상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러한 지식은 힘들고 어려운 사람을 사랑하는 데 전혀 쓸모없이 우상 숭배의 죄만 짓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은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만물은 그분에게서 낫고, 우리는 그분을 위하여 있습니다. 그리고 한 분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만물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습니다.”(6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주님은 오직 한 분뿐이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신 6:4) 바울은 자신의 잘못된 신에 대한 지식으로 약한 형제자매를 실족하게 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지식이 있는 당신이 우상의 신당에 앉아서 먹고 있는 것을 어떤 사람이 보면, 그가 약한 사람일지라도, 그 양심에 용기가 생겨서,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그 약한 사람은 당신의 지식 때문에 망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약한 신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렇게 여러분이 형제자매들에게 죄를 짓고, 그들의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10-12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음식 자체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는 것은 음식이 아닙니다.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해서 손해볼 것도 없고, 먹는다고 해서 이로울 것도 없습니다.”(8절) “그러므로 음식이 내 형제를 걸어서 넘어지게 하는 것이라면, 그가 걸려서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나는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습니다.”(13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책임감 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바울은 비록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4절) 아니지만,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은 귀신과 교제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8-21절을 보면, “육신상의 이스라엘 백성을 보십시오. 제물을 먹는 사람들은, 그 제단에 참여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러니 내가 무엇을 말하려는 것입니까? 우상은 무엇이고, 우상에게 바친 제물은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방 사람들이 바치는 제물은 귀신에게 바치는 것이지,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귀신과 친교를 가지는 사람이 되는 것을 나는 바라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잔을 마시고, 아울러 귀신들의 잔을 마실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식탁에 참여하고, 아울러 귀신들의 식탁에 참여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우상 제물에 참여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귀신과 사귀게 되는 것입니다. 이 교제는 서로 인격적인 만남과 나눔이기에 단순한 제사 참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숭배자 자신이 숭배의 대상에게 종속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우상의 제물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은 우상과 교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0:20) 우상의 제물과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베풀어지는 성찬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성찬은 예수님의 죽음을 단지 기념하는 제사 의미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하나님 나라의 식탁 곧 미래의 종말론적 식탁의 의미입니다.(막 14:25) 예수님의 몸과 보혈에 참여하는 성찬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신령한 몸에 연합되는 것을 고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우상의 제물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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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그리스도인이 제사 음식을 먹어도 되나?’(고전 8: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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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믿음의 능력’(막 9장23절)
- 성도는 믿음으로 위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눈을 들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성공적인 삶에 이르는 첩경입니다. 성경을 보면 믿음이 지닌 놀라운 능력에 깊은 감명을 받고 또한 힘을 얻게 합니다. 언약궤를 짊어진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이 물이 잔뜩 불어 있은 요단강에 믿음으로 첫발을 내딛는 순간 흘러내리던 강물이 멈추어 섰고 이스라엘 백성은 강바닥에 드러난 길을 지나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수 3장). 그뿐이 아닙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순종하여 군사들로 하여금 견고한 여리고 성을 엿새 동안 돌게 한 뒤, 마지막 일곱째 날에는 같은 방식으로 일곱 번을 돌며 큰 소리로 외치게 하자 성이 무너져 내렸습니다(수 6장). 다윗은 블레셋의 거인 용사 골리앗에 맞서 매끄러운 돌멩이로 그를 제압했습니다(삼상 17장). 열두 해를 혈루병으로 고생하던 한 여인이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자 즉시 고침을 받았습니다(마 9:20-22). 한 어머니가 예수님에게 귀신들린 딸을 고쳐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어머니의 믿음으로 딸은 즉시 고침을 받았습니다(마 15:28). 우리의 삶 가운데에도 많은 문제와 역경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현실이 아무리 답답하고 어려워도 두려워하지 마시고 믿음으로 물리치시고 용기를 가지고 승리하십시다. 어려울 때일수록 담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인간의 생각을 창조적으로 바꾸고, 사회를 변혁하며, 역사의 방향을 바꾸어 놓는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위대한 신앙은 하나님께서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는 확신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환경과 상황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보십니다. 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고백이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할 수 없다는 말은 불신앙인 것입니다. 렘 32:27에서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셨고 막 9:23에서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에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환난이 가득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은 오히려 믿음의 훈련장인 것입니다. 믿음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환난은 스스로를 문제로 위장한 채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믿음의 눈으로 그것을 오히려 기회로 포착하시기 바랍니다. 삶을 비관적이거나 절망적으로 보지 마시고,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과 뜻이 있음을 믿읍시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믿음의 분량대로 역사하십니다. 믿음은 생명력이 있고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합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있을 때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주님의 능력을 믿고 강하게 매달리는 것이 최고의 방법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안 되는 일도 주님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전능하심을 확신해야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의 말에는 역사가 나타나고, 확신 있는 기도는 그대로 받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11:23-24). 언제나 믿음으로 살아서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를 체험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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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믿음의 능력’(막 9장2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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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의 반응’(사 6:5-8)
- 하나님의 백성은 주님을 만났을 때 떨면서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인 우리는 주님 앞에서 두려운 마음으로 엎드려야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에 대한 회개 없이 주님의 임재 가운데로 경솔하게 들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은 노력으로 청결해지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주님을 만날 때 경험하는 고백과 회개를 통해 깨끗해집니다. 그럼 주님을 만난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이사야는 거룩하신 주님을 뵈었을 때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 뵙다니!”(사 6:5)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이사야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죄뿐이었기 때문에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죄를 고백했습니다. 그때 한 천사가 제단에서 타고 있는 숯을 부집게로 집어 이사야의 입에 대며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악은 사라지고, 너의 죄는 사해졌다.”(7절)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입술의 죄는 우리의 죄악 중 대부분이지요. 생각으로 짓는 모든 죄가 입술을 통해 밖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마 15:18) 그래서 “누구든지,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 몸을 다스릴 수 있는 온전한 사람”(약 3:2)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입술이 부정한 우리도 이사야처럼 죄를 회개하여 주님의 음성을 듣고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8절)라고 순종하기를 바랍니다. 에스라는 주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 너무나도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하나님 앞에서 차마 얼굴을 들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은 죄는, 우리 스스로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불어났고, 우리가 저지른 잘못은 하늘에까지 닿았습니다. 조상 때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저지른 잘못이 너무나도 큽니다.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의 왕들과 제사장들까지도, 여러 나라 왕들의 칼에 맞아 죽거나 사로잡혀 가고, 재산도 다 빼앗기고, 온갖 수모를 겪었습니다. 이런 일은 오늘에 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스 9:6-7)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어서 에스라는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 주님은 너그러우셔서 우리를 이렇게 살아 남게 하셨습니다. 진정, 우리는 우리의 허물을 주님께 자백합니다. 우리 가운데서, 어느 누구도 감히 주님 앞에 나설 수 없습니다.”(15절)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죄인인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은 오직 너그러우신 주님의 은혜인 것을 기억하며 항상 감사해야 합니다. 하박국은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그 소리를 듣고 나의 창자가 뒤틀린다. 그 소리에 나의 입술이 떨린다. 나의 뼈가 속에서부터 썩어 들어간다. 나의 다리가 후들거린다. 그러나 나는, 우리를 침략한 백성이 재난당할 날을 참고 기다리겠다.”(합 3:16)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어서 하박국은 “무화과나무에 과일이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지라도, 올리브 나무에서 딸 것이 없고 밭에서 거두어들일 것이 없을지라도,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련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련다.”(17-18절)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도 하박국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죄인인 나를 구원하신 그 구원의 은혜로 말미암아 항상 즐거워하고 기뻐하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5장을 보면,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아라.”(4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시몬은 “선생님, 우리가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겠습니다.”(5절)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대로 하니, 많은 고기 떼가 걸려들어서,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자기들을 도와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히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예수의 무릎 앞에 엎드려서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6-8절)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엎드렸습니다. 베드로는 죄인으로서 감히 거룩하신 주님 앞에 마주 대할 수 없어서 주님이 떠나 주시기를 간청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낮에 깊은 물 속에 그물을 던져서 고기를 잡는 것이 비효율적인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베드로는 말씀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이처럼 주님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는 주님의 일하심을 놀랍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도 귀로만 듣던 주님을 눈으로 뵙고 주님을 만난 주인공들이 되어 우리를 통해 많은 사람이 살아 계신 주님을 뜨겁게 만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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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의 반응’(사 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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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무엇을 탐구하며 생각하십니까’(골 3장1-4절)
- 우리가 무엇에 마음을 기울이고, 무엇을 찾고 탐구하는가는 우리의 삶의 목표 설정과 함께 우리의 삶에 직접 관계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주된 관심과 목표를 땅에 둘 것이 아니라 위엣 것에 두어야 하겠습니다. 땅의 것은 현세적이며, 자기중심. 세상 중심. 물질중심의 삶을 뜻하는데 이러한 삶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에 방해가 되고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자들이기에 위엣 것을 찾고 생각해야 합니다(1-2절).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늘 하늘나라를 생각하며 살아야지 이 복잡하고 사악한 세상에 붙들리면 안 됩니다. 위에 것을 생각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의 관심과 마음과 생각 모두가 하나님 중심. 그리스도 중심, 말씀 중심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생각이 주님께서 계신 하늘나라에 집중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고 신분적으로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올라가 있는 자들입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5-6).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함께 다시 살아난 새 생명의 소유자이기에 우리의 삶이 영광의 그리스도를 삶의 모든 것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실제로 성도에게 있어서 모든 것의 근원이시오 지혜와 능력과 지식과 힘과 진리와 복의 근원이십니다(고전 1:24 ; 골 2:3). 이 모든 것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소유한 성도의 바람직하고 합당한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 마음과 정신은 여전히 세속적인 것들에 열중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헌신한 이후에도 이전과 동일한 신념이나 욕망 그리고 태도를 계속 지속하며 개인적인 목적과 계획 그리고 자기 자신의 우선순위에 따라 계속 살아가는 이러한 태도의 근본적인 전환과 가치관의 재정립이 요구되었기에 위엣 것을 찾고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을 찾고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땅에서 살지만 우리의 생각과 목적과 뜻이 모두 위에 속한 것들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도 사랑도, 소망도 소원도 자랑도 기쁨도 다 위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항상 그리스도 중심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권자이지만 현재는 세상에 몸담고 있으므로 세상의 일에 대해서는 ‘나 몰라라’하고 그리스도만을 위해 하늘만 바라보면서 마치 구름 위에 떠서 다니는 것처럼 살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과 마귀가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도록 모든 생각과 관심의 초점을 이 세상이 아닌 하늘나라의 일, 즉 보좌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맞추어야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 지상에서 우리들이 주님과 동행하는 삶은 현재 보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숨겨져 있는 삶입니다(4절). 숨겨져 있는 삶이 주님 재림하실 때, 모두가 주님의 영광중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주된 관심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에 두며 하나님의 영광과 천국에 두며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집중하여 힘써 나갑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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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무엇을 탐구하며 생각하십니까’(골 3장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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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요 14:27)
- 재난의 징조로서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눅 21:10-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쟁, 지진, 기근, 전염병이 계속되는 상황 속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마음의 평안일 것입니다. 우리에게 마음의 평안을 주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으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모든 근심과 두려움을 뛰어넘는 내적이며 절대적인 평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죄인인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골 1:21-22) 주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이웃과도 평화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께서 주시는 평강을 확장시켜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닫아걸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평강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강은 영적인 평안입니다. 그 평안을 얻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에게 평안이 없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평안을 주시고,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십니다.(요 14:26)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먹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영이 건강하고 얼굴에 빛이 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내려올 때 그의 얼굴에는 빛이 났습니다. 주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었기 때문입니다.(출 34:29) 우리가 주 안에서 기뻐하면,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면, 모든 일에 염려 없이 기도로, 감사로 주님께 아뢰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빌 4:4-7) 주님은 백성의 심지가 견고하여 요동함이나 치우침이 없이 그 은혜를 의존할 때에 그들의 보호자가 되셔서 평강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사야 26장 3절을 보면,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한결같이 주님을 신뢰하는 자에게 평강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변함이 없으시고, 인간은 불안전하기 때문입니다. 유다 왕 아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일, 올바른 일을 하였습니다.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애고,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율법과 명령을 실천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나라는 조용하였고 주님께서 그 나라와 아사에게 평안을 주셨습니다. 아사 왕은 백성에게 우리가 주 하나님을 찾았으므로 평안을 주셨다고 말했습니다.(대하 14:1-7) 우리도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을 때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평안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0:13)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전도해야 합니다. 전도는 나의 지혜의 설득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는 것이기에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해야 합니다.(고전 2:4) 예레미야 29장 11절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평안이요, 미래와 희망을 주시는 것을 기억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갖고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저는 『천로역정』 책을 읽었을 때나 <천로역정> 영화를 보았을 때 가장 감동적인 언어가 ‘희망’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간 존 번연은 소망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알았기 때문에 환경을 넘어 희망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천국으로 가는 여정 속에서 모든 것이 평탄하기만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셨기에 우리도 이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평안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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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요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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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범사에 감사하십니까’(살전 5:18)
-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신과 가족과 타인에게 그리고 자신이 속한 직장과 사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산다는 것은 매우 행복한 일입니다. 감사는 고마운 마음을 상대에게 전하는 아름다운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감사를 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감사는 자신에게나 상대에게 즐거움을 주고, 서로의 관계를 끈끈하게 맺어주는 아름다운 행위인데 말입니다. 우리는 감사에 인색해서는 안 되며 매사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감사할수록 유대관계가 좋아지고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감사는 단지 고마움에 대한 마음의 표현이 아니라 서로를 단단하게 동여매주는 수단이고 건강한 삶도 가져다줍니다. 감사의 말 속엔 따뜻한 긍정의 에너지가 들어 있고, 무엇이든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지만 감사를 잘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매사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비관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십니다(18절).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사의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다. 범사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다 포함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불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상태에서 보면 무엇 하나도 눈물 흘리며 감사하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고난도 환란도 유익합니다(욥 23:10; 시 119:67, 71).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지금의 상태가 최고이고 최적의 상태라는 것이지요. 다니엘은 왕의 칙령이 내려졌으므로 자신이 기도하면 사자굴에 들어갈 것을 알면서도 집에 돌아와 모든 문을 열어놓고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크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단 6:10). 다니엘은 상황을 원망하거나 하소연하지 않았습니다. 그 상황을 바꾸어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처해있는 그 상황에 감사하였던 것입니다. 감사는 환경이나 조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과 생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합 3:17-18에서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을 보면 감사는 신앙의 문제이지 환경의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은혜를 받는 비결은 감사이며, 은혜를 받은 결과도 감사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해 감사하는 삶이 바로 신앙의 생명이요 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복된 생활인 줄로 믿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 믿음은 대단히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성도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지금까지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가게 된다는 믿음의 확신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말세에는 더욱 감사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감사’는 헬라어로 ‘유카리스테오’입니다. 이 말의 뜻은 마음 중심에서 가식이나 부담 없이 자원하여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감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감사는 자원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신앙의 표현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늘 감사로 표현했습니다(시 95:2 ; 100:4). 감사는 단순히 인간의 의지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감동과 감화의 결실입니다. 이러한 감사는 궁극적으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고후 4:15) 우리의 전 생애를 하나님께 위탁하며 충성하는 적극적인 신앙의 행위와 태도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감사가 있는 곳에 기적이 있고, 기쁨과 사랑과 믿음이 있습니다. 모든 것, 모든 순간, 모든 사건, 모든 시간을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선물로 여기며 범사에 감사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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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범사에 감사하십니까’(살전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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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자족 신앙’(빌 4:12-13)
- 현대는 불만족의 시대라고 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만족하다는 소리를 듣기가 어렵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풍요한 삶을 누리는 것 같으나 실상은 모두가 불만의 포로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모르거나 곡해함으로서 불평과 불만에 사로잡혀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영적 피조물입니다(창 1:27). 전 3:11에서는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다만 흙으로 빚어진 물질적인 존재인 줄로 착각하여 지식이나 재물로 그 공백을 메꾸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의 행복은 바람과 같아서 아무리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습니다. 잡았다 생각하지만 빈손입니다. 그래서 전 1:14절에서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물질제일주의로 물질을 추구하면서 물질로 행복을 사겠다고 하지만 도리어 그 물질 때문에 불행해졌습니다(딤전 6:10). 세상은 자족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여기지 않고 더 가져야 한다고 아우성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우리에게 자족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2절).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라”(딤전 6:8)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족이란 자기만족이 아니라 부단히 싸워서 이겨야 하는 즉 자기와 싸워서 이겨야 하는 바로 그런 것임. 자족은 스스로의 체념에서 오는 자기 비하나 자기 포기가 아니라 어떤 도전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용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신자는 가난하고 비천한 환경에서도 결단코 실망과 낙담하거나 열등감에 빠져 자포자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자족과 감사의 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족하는 생활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니 경험을 통하여 자족하는 비결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형편에든지 불평이나 불만은 배우지 말고 자족하기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남의 것을 보고 비교하지 말고, 내 입장과 환경을 바라보며 만족합시다. 세상에는 가만히 있어도 알아지는 것이 있고, 배워야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본능적인 것은 누구나 배우지 않아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부단히 본능적인 욕구들로부터 자족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고후 3: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우리의 만족은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충족시켜 주십니다(시 23:1, 약 1:17). 세상의 만족, 육신의 만족이 아니라, 주님을 신뢰하는 데서 오는 만족인 것입니다. 우리는 환경에 의해 자기의 행불행을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행복은 자기가 처한 환경에 달린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에 내 자신을 굴복시킬 때 우리는 어떠한 환경에서도 자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13절)는 말씀은 ‘세상의 성공’에 초점을 맞추지 있지 않고, ‘자족하는 삶’에 초점을 두고 있는 말씀입니다. 나는 어떤 상황 속에서라도 믿음을 지키며 그 어려운 환경을 극복할 수 있다는데 메시지가 있는 것입니다. 자족은 능력주시는 주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어떤 환경이나 생활 속에 처할지라도,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만족하면서 영적 부요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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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자족 신앙’(빌 4: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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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세 가지 큰 절기’(출 23:14-19)
- 구약의 절기 이해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절기를 통해 그 당시 역사와 사회법을 통합하여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절기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성령 강림의 진리가 연관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절기라는 히브리어는 ‘약속을 지키다’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일정한 때에 이스라엘 백성과 만나시기 위해서 약속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님께로 나오라고 말씀하시고 그들이 나와야 하는 날과 이 특별한 날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알려주셨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절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절기를 정하신 목적은 주님의 백성이 절기를 지킴으로써 신앙생활에 힘을 얻어 더욱 주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감사 절기에 중요한 것은 내 노력이 아닌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사는 것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살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매년 지켜야 할 세 가지 절기는 무교절, 맥추절, 수장절입니다. 이때 모든 남자는 예루살렘에 가서 절기를 지켜야 했습니다.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때에는 각자 주님께서 주신 복을 따라서 그 힘대로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땅에서 난 첫 열매 가운데서 제일 좋은 것을 하나님의 집으로 가져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첫 수확을 감사의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 중요한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새끼 염소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아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짐승의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아 먹는 것을 별미로 즐겼습니다. 이것은 생명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잔인한 행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하찮은 동물이라도 잔인하게 취급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신 22:6-7) 무교절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날에 하나님께서 이집트 땅에서 온 이스라엘 지파를 이끌어냈기 때문입니다.(출 12:17) 누룩은 부패와 죄를 상징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철저히 금지되었습니다.(마 16:11-12) 무교절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죄 된 삶에서 돌이켜 믿음으로 성숙하도록 깨닫게 해주는 절기입니다. 유월절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고난과 죽음으로 죄인 된 우리가 속죄와 구원을 받게 된 것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예수께서 유월절 만찬 이후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완전한 희생제사가 이루어졌습니다. 히브리서 9장 25-26절을 보면, “대제사장은 해마다 짐승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 몸을 여러 번 바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몸을 여러 번 바치셔야 하였다면, 그는 창세 이래로 여러 번 고난을 받아야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기를 희생 제물로 드려서 죄를 없이하시기 위하여 시대의 종말에 단 한 번 나타나셨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희생제사를 따로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생각하며 우리는 평생 감사해야 합니다. 맥추절(칠칠절, 오순절)을 지키는 목적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주위에 있는 연약한 사람들을 섬기는 데 있습니다. 신명기 16장을 보면, 칠칠절 절기를 지키라는 말씀과 곧이어 이웃과 함께 나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감사해야 할 우선 순위는 먼저 하나님입니다. 그후에 이웃을 섬기는 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섬기는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그 당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온 사람들은 교통수단이 발달되지 않아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머물기도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머물러 기도한 120명 사람들에게 성령님이 임하여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고 성령충만을 받은 때가 바로 이때였습니다.(행 2:1-4) 우리가 함께 모여 기도할 때 성령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역사하는 장소는 바로 교회입니다. 수장절(초막절, 장막절)은 “여호와의 절기”(레 23:39)라고 부르기도 했고, “명절”(요 5:1)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생활 40년 동안 초막에서 산 것을 기억하며 지키는 절기입니다.(레 23:42-43) 초막절을 지키는 것은 광야 같은 세상에서 약속의 땅인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해주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기 위해서입니다. 10월 중순경에 곡식 추수한 것을 감사하며 지키는 절기로서 수장절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절기에는 추수에 대한 감사뿐만 아니라 삶을 인도해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하였습니다. 특히 종과 이방인 과부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도 기쁨을 누리는 최대의 명절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명절 끝날 곧 큰 날”(요 7:37)에 누구든지 목마른 사람은 주님께 오라고 초청하셨습니다. 이날이 큰 구원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기 때만이라도 영적으로 목마른 사람들이 예수께 나아와 구원의 은혜를 맛보고 즐겁게 살도록 전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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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세 가지 큰 절기’(출 23: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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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생각과 말’(잠 18:21)
- 사람은 하루에도 수천수만의 말을 하고 살아갑니다. 그러한 말 가운데도 유익을 끼치는 말이 있고 그렇지 않은 말도 있습니다. 적절한 말은 유익이 되지만 넘치는 말은 오히려 해악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만큼 말은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엡 4:29). 더러운 말이란 유익이 되지 않는 말로서 남에게 시험을 주고 분노와 절망을 일으키며 상처를 주는 말입니다. 더러운 말은 신자답지 못한 말이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남에게 유익 되지 않는 말이나 남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해를 끼치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지혜요 은혜인 것입니다. 검(劒)은 사람의 육체에 보이는 상처를 주지만 간사하고 거짓된 혀는 사람의 영혼에 상처를 준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성경에서는 혀의 사용에 대해서 그토록 많은 교훈을 하고 있습니다(55:22, 57:5, 잠 18:21, 26:18). 얼마나 말이 중대한 영향을 끼치면 예수님께서 말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셨겠습니까?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마 12:36).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을 하나도 빼지 않고 다 탐지하고 평가하십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생각,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을 전부 탐지해서 다 기록하십니다. 물론 회개하면 없어지지만 그 이전에는 다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말이 중요한 것입니다. 혀가 실수를 많이 하고 실패를 많이 하고 죄를 많이 짓는 것은 왜 그럴까요? 혀가 마음에 가득한 것을 바깥으로 쏟아내기 때문입니다(잠 15:28, 마 15:18). 우리가 말에 실수가 없는 자가 되기 위해 무릇 제어할 것보다 먼저 자신의 마음과 입술을 제어해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약 3:2). 사람은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을 입으로 말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혀를 보면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혀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보면 우리 신앙의 성숙도를 측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말은 자신의 약점조차도 장점으로 바꾸어버립니다.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삶은 바뀌게 됩니다. 생각은 열쇠라는 말이 있듯이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는 긍정적인 일이 나타나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는 부정적인 일이 나타날 뿐 아니라 부정적인 생각이 사탄이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인생을 지배하는 것은 운명이 아닙니다. 생각이 인생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어제 내가 생각한 결과이고, 내일은 오늘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느냐로 결정됩니다. 변화를 가져오는 삶은 무엇보다도 생각과 말이 믿음에서 나와야 하겠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말에 달려 있습니다(21절). 누에고치의 입에서 실이 나와 집을 만들어가듯이 사람은 자신의 입으로 하는 말에 의해 인생의 집을 짓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말을 하는 사람은 믿음의 집을 짓게 되고, 소망의 말을 하는 사람은 소망의 집을 짓게 됩니다. 그러나 걱정하는 말을 하는 사람은 걱정의 집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말을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민 14:28하). 우리는 삼가 경계하여 항상 선한 마음에서 나오는 선한 말만을 할 수 있도록 힘을 쓰십시다. 원망과 불평하지 말고, 위로의 말을 하고 격려의 말을 하고 긍정의 말, 축복의 말을 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얼마나 힘이 들었냐고, 그래 같이 기도하자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해주실 것이라고 서로에게 선한 말, 감사하는 말을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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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생각과 말’(잠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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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예수님의 식탁 교제’(요 21:9-14)
- 창세기를 보면, 개인과 개인이 계약을 맺을 때도 음식을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아비멜렉이 이삭을 찾아와 언약을 맺을 때도 잔치를 베풀고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창 26장) 야곱과 라반이 언약을 맺을 때도 잔치를 벌이고 함께 먹었습니다.(창 31장) 시내산에서도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중재로 계약을 맺을 때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음식을 먹고 언약의 피를 뜻하는 포도주를 마셨습니다.(출 24장)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모일 때마다 식탁 교제를 했습니다.(행 2장) 이처럼 식탁 교제는 주님을 만나는 자리이고, 언약을 맺는 자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제자들과 하신 일은 마지막 만찬을 나누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깊은 만남도 식사 때 이루어졌습니다. 예수께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먹는 식사를 통해 그들의 눈이 열려서 예수를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식탁 교제를 하심으로써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알게 되고, 사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식탁 교제는 주님과 사랑의 관계를 위한 초대였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음식을 나누신 후부터 공동체의 식탁 교제는 주님의 임재라는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식탁에서 중요한 것은, 혼자 드시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신다는 점과 누구하고라도 함께 식사하셨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식탁의 벗으로 초청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식탁 교제를 통하여 제자들의 정체성을 깨우쳐 주시고 그들을 사랑으로 하나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식탁 교제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기쁨으로 섬겨야 합니다. 마태복음 11장을 보면,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을 절제하던 요한에게는 귀신이 들렸다고 비난했습니다. 죄인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예수님에 대해서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자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을 불러모아 그들과 함께 식탁 교제를 하셨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바리새파의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막 2: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려고 오신 것을 기억하며, 우리는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 식탁을 기쁨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잔치를 베풀 때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식사에 초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4:12-14) 우리는 갚을 것이 없는 사람들을 섬겨야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도 제자들과 함께하셨습니다.(눅 22장)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들어 감사기도를 드리신 후 그것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성찬입니다. 성찬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즉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한 것을 믿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모두 부활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 있는 사람만 부활하는 것을 믿기 바랍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신 자기의 영으로 여러분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롬 8: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없는 사람은 살아 있으나 죽은 자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마 8:22) 그래서 우리는 성령님이 떠나시지 않도록 항상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사람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이 찔려서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각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용서를 받으십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행 2:38)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때 베드로의 말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날 신도의 수가 약 3,000명이나 늘어났습니다. 이처럼 회개하면 성령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밥을 먹듯이 회개해야 합니다. 건강한 가족의 큰 힘은 식사를 함께하는 것입니다. 식탁 교제를 하려면 우선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마귀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서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것을 방해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모여서 교제해야 합니다. 식탁 교제는 주님을 만나는 중요한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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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예수님의 식탁 교제’(요 21: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