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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천국은...’(마 25;14~30)
- 천국은 어떤 곳일까? 막연하게 상상은 할 수 있지만 직접 눈으로 본 것도 아니고 가본 것도 아니기 때문에 느끼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비유로 말씀 하셨습니다. 비유를 깨닫는 만큼 천국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천국이란,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외국으로 떠나면서 자기 종들을 불러 자기 돈을 맡기는 것과 같다고 하십니다. (마 25:1, 14) 주인이 집을 비워도 종은 계속해서 주인을 위해서 일을 해야 합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자기의 비즈니스를 맡기고 떠납니다. 그래서 자기 돈을 종들에게 맡겼는데 각 사람 에게 모두 똑같은 액수를 맡긴 게 아니라, 종의 재능대로 1억, 1000만원, 100만원..을 맡겼습니다. 주인의 공평한 계산입니다. 종들은 자기가 받을 만큼 잘 받았습니다. 종들이 재능대로 받은 것은 자기가 주인이 아니고 맡긴 분이 주인입니다. 왜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인지 말씀대로 이유가 분명합니다. (마25:14~15) 자기 돈을 맡기고 떠나는 주인이 종들에게 원하는 것은 단 한가지입니다. 자기가 맡긴 돈을 불려서 이익을 남기는 것입니다. 그것을 목적으로 종들에게 돈을 맡긴 것 아니겠습니까? 주인이 원하는 것은 종들이 많은 이익을 남기는 것입니다. 착한 종은 주인이 집을 비운 사이에도 변함없이 주인을 위해 열심히 일합니다. 주인이 종에게 구하는 것은 충성입니다. (고전 4:2) 충성은 성실함이 있어야 나옵니다. 성실함이란 지금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 내게 맡겨진 일을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못하면 더 큰 것을 맡아도 못합니다. (마25:21) 성실함이 대상이 있을 때 충성이 됩니다. 교회를 섬기면서 많은 사람들을 대하다 보니 잘 되는 사람과 안 되는 사람은 성실함과 충성으로 구별이 됩니다. 성실함이 있는 사람은 충성도 같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믿음생활이나 직장에서나 무슨 일을 해도 다 잘합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성경의 원리이며 심은 것의 결과는 거짓이 없이 정확하게 받습니다. 성실함과 충성이 없다면 탁월한 재능과 능력도 별 의미가 없습니다. 충성이 있어야 재능과 능력이 이익을 남깁니다. 주인은 재능과 능력을 보고 사명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충성된 사람에게 맡깁니다.(딤전 1:12) 드디어 주인이 돌아오셨습니다. 주인의 돈을 맡은 종들은 모두 주인 앞으로 나와 그동안 자기가 남긴 이익의 결산을 보고합니다. “주인님, 제가 주인님께 10억을 받았지요, 보세요, 그 돈으로 열심히 장사를 해서 10억을 남겼습니다.” 주인은 기뻐하면서 말씀하십니다.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했으니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길 수 있겠구나,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거라” 결산의 날 주인께 받은 돈으로 이익을 남긴 종들에게는 칭찬도 받고 승진도 하는 기쁨과 흥분의 자리였지만 그렇지 않은 종도 있었습니다. “주인님, 당신은 심지도 않은데서 거두고 뿌리지도 않은 곳에서 모으는 분이 아니셨던가요? 제가 받은 게 뭐가 있다고 달라고 하십니까? 여기 당신의 원금만 그대로 돌려드립니다. (마 25:24~25)“ 주인의 것을 받고도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종에게 주인은 ‘악하다’ 라고 하십니다. 그 결산의 결과는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쫒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마25:30)” 불타는 지옥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고 천국일까요? 바깥 어두운 데가 어딘지는 잘 모르겠지만 천국문 안으로 들어간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은 불신자에게 하는 게 아니라 더 심각합니다. 달란트의 비유는 예수님이 천국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서 충성 하면서 살았던 삶의 열매가 천국을 결정하는 것에 포함된다는 말씀이 엄중하게 다가옵니다. 오늘 내가 사는 하루는 계속 결산 되고 있습니다. 인생은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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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천국은...’(마 25;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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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죄인 여자’(요8:1~11)
-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가 예수님의 발 앞에 끌려 나와서 내던져 졌습니다. 증거는 현장에서 걸렸으니 충분합니다. 법대로 하면 죽여도 되는 여자입니다. 법은 증거만 확실하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응해서 정확하게 갚아야 하기 때문에 죄인에게 베풀 자비가 없습니다. 법대로 죽을 일을 한 이 죄인여자에게 긍휼과 자비를 강연하던 예수님은 뭐라고 하실까... “이 여자를 어떻게 할까요?” 예수님은 현장에서 잡혀 끌려온 죄인 여자를 바라보십니다. 수치감과 죄책감과 두려움으로 벌벌 떨고 있는 죄인여자는 끌려오느라 헝클어진 머리와 찢긴 옷 사이로 잡아 뜯겨진 살점들에서 스며나오는 피와 눈물이 먼지와 뒤범벅이 되어 처참한 몰골입니다. 그야말로 죄인의 참혹한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눈길을 돌려 둘러선 무리들을 바라보십니다. 죄인을 심판하는 자리에 있으니 의롭다고 착각하면서, 명백한 증거로 잡힌 죄인을 살기등등하게 노려보는 심판자의 모습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이것이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의 선포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의 죄가 낱낱이 보여 지니 자기도 죄인이라는 사실을 거부할 수가 없는 사람들은 슬그머니 하나씩 하나씩 그 불편한 자리를 피합니다. 양심이 법을 능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현장입니다. 결국 그 자리에는 다 가고 예수님과 그 가운데 있던 죄인여자 둘만 남았습니다. 죄인여자는 자기 앞에 계시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아직 모릅니다. 예수님이 누군지도 모르고 모르는 그분을 만나려고 애쓴 것도 아닙니다. 자기가 원해서 온 것도 아닙니다. 그냥 죄짓다 끌려온 것입니다. 간음죄로 비참하게 멸시받는 처참한 자리에서 죽기 직전에 죽음 앞에서 만난 분입니다. 죄인여자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뭔가를 잘한 것이 아닙니다. 잘할 힘도 없습니다. 오직 긍휼함 하나만을 바라는 죄인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죽을 길 밖에는 없어서 예수님이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곳은 높고 존귀한 자리가 아니라 내가 죄인인 것이 명백하게 드러난 자리입니다. “사람도 네 죄를 정죄하지 않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요 8:10~11)” 자기가 죄를 지은 것이 명백한데 자기의 죄를 비판하면서 따져 묻지 않고 죄를 단정하지 않겠다고 하시는 이분은 누구십니까?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8:12)” 생명의 빛을 만난 여자는 그분이 심판주 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심판주가 죄의 종결을 선언하셨습니다. 죄인여자의 죄를 심판주가 용서하시는 것으로 그 죄가 종결되어 다 끝났습니다. 죄는 정말로 용서받았습니다. 죄가 드러나는 자리에는 하나님의 용서가 있습니다. 용서에는 댓가를 치르는 보상이 있어야 합니다. 심판주께서는 자기가 친히 십자가에서 간음한 여인이 돌을 맞아 죽어야 할 죽음을 대신 당하시고 댓가를 치르심으로 그 사실을 근거로 합법적으로 용서하신 것입니다. 심판주의 이유가 있는 용서입니다. 그 용서는 나를 사랑해서 대신 죽어주신 지극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주님 이십니다. 죄인여자는 죄가 아니면 예수님과 관계없는 사람입니다. 죄인여자는 죄 때문에 예수님과 관계가 맺어졌습니다. 그 관계 안에서 간음한 죄인여자가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요 8:11)” 이제는 더 이상 간음한 죄인여자로 살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존재대로, 거룩한 사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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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죄인 여자’(요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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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나사로 이야기’(요 11:37~44)
- 베다니에 나사로라는 병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나사로에게는 두 여동생이 있었는데 우리도 잘 아는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입니다. 그중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던 그 유명한 여인입니다. 어느 날 나사로가 병이 위독해 져서 죽을 것 같습니다. 두 여동생은 예수님께 급히 사람을 보내서 도움을 청했습니다. 빨리 오셔서 오빠가 죽기 전에 병을 고쳐 달라는 내용이었겠지요, 절박합니다. 두 자매는 예수님이 모든 병자들을 다 고치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오빠의 병을 고치시면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틀을 지체하시는 바람에 결국 나사로가 죽고 말았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 (요 11:21, 32)” 병을 고치시는 예수님이 죽은 사람도 살리실 것이라고는 믿지 못했습니다. 죽기 전에 오셔서 막아 주셨어야지 이제 오빠가 죽었으니 예수님이 오셨어도 이제는 다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같은 마음입니다. 죽은 지 나흘이 지나서 시체에 썩은 냄새가 나는데 다시 살 수 있는 것은 불가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네 오빠가 다시 살아나리라” 예수님이 말씀하셨지만 마르다는 그 말씀을 마지막 날 부활 때 다시 살 걸 로 알아들었습니다. (요 11:2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요 11:25~26)” 죽어도 살고 살아서는 영원히 죽지 않는 부활생명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의 무덤 앞으로 가셨습니다. 무덤 앞에 입구를 막은 돌을 치우라. “죽은 지 나흘이 되어서 벌써 썩은 냄새가 납니다.” 설마 저 시체가 걸어 나오기라도 할까요?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요 11:40)” 예수님은 무덤 바깥쪽에서 큰 소리로 나사로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그때 도저히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 일어납니다. 죽은 시체였던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묶인 채 얼굴까지 꽁꽁 싸놓은 상태로 무덤 문에서 성큼성큼 걸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에게 믿게 하시려는 증거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요 11:42) 부활 생명입니다. 부활이고 생명이신 예수님이 이름을 부를 때 그 음성을 듣고 죽었던 육체까지 일으켜집니다. 부활의 생명이 육체까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부활생명을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는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마지막날 다시 사는 사람은 오늘 여기서 부터 삽니다. 부활의 생명은 지금 여기서 부터 일어나는 현재의 생명입니다. 그 생명의 능력은 죽은 몸까지 일으킬 만한 에너지가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생명의 힘이 보이는 물리적인 힘까지로 이어집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면 그의 죽었던 육체의 삶도 살아납니다. 다 죽은 썩은 시체 같은 소망 없는 인생이 생명의 삶으로 변화됩니다. 부활이고 생명이신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살았고 그 앞에서 어둠이 물러갔습니다. 부활생명 이신 예수님 앞에서 어둠이 물러갈 때 어두움에 속한 모든 일들도 함께 물러갔습니다. 다 죽어서 시체 같은 가망 없는 삶이 생명의 삶으로 살아납니다. 할렐루야! 왜 이런 불치병이 걸렸는지, 장애가 왔는지, 망했는지, 깨졌는지... 부활생명이신 예수님을 받은 사람에게는 그런 것들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 앞에서 어둠의 일들이 스스로 물러갑니다. 저는 부활생명 앞에서 해결 받지 못할 인생 문제는 없는 것을 믿습니다. 교회는 그 생명을 받았습니다. 부활생명이신 예수님, 내게 오셔서 이곳에 임재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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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나사로 이야기’(요 11:3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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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한’을 품은 기도’(삼상 1:1~11)
- 에브라임에 사는 엘가나 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엘가나는 성품도 좋고 재력도 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좋은 사람입니다. 엘가나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습니다. 두 아내 중 브닌나에게는 자식들이 있었고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브닌나는 자식이 있다는 우월함으로 자식 없는 한나의 상처를 건드리면서 고통을 주었습니다. 한나는 적이 된 브닌나 때문에 심하게 격분하고 괴로웠습니다. 마음이 힘들면 그 마음이 고통에 묶이게 됩니다. 남편의 지극한 사랑, 맛있는 음식들과 충분한 재물들이 있어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받은 축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원인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삼상 1:6)” 하나님이 주시지 않아서 생긴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태를 열어주셔야 문제가 해결됩니다. 인생문제는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한나에게는 두 갈래 선택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안주셨으니 하나님을 원망할 것인가? 주실 수 있는 하나님께 구할 것인가? 한나는 마음에 심한 격분과 괴로움으로 한을 품고 일어났습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삼상 1:10)” 마음에 한을 품고 기도로 통곡하면서 토해 냅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풀어질 수 없는 문제를 하나님 앞에 놓고 해결 하려는 것입니다. 한을 품은 기도는 아무나 할 수 없는 결단을 하게 만듭니다. 아들을 주셔서 원을 풀어 주시면 그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것입니다.(삼상 1:11절) 한나의 태의 문을 닫으신 하나님은 이 기도가 나오기를 원하셨을 지도 모릅니다. 이 기도가 확실히 응답될 것을 믿으니 일상에 평안이 찾아왔습니다.(삼상 1:18) 여전히 적수 브닌나는 가까이 있지만 그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한나의 한을 품은 기도에 하나님은 응답하셔서 사무엘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으셨으니 나도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겠다’는 결단을 실행한 것입니다. (삼상 1:27~28) 사무엘이 젖을 떼자 엘리 제사장에게로 데려갔습니다. 자기의 생명 같은 아직 어린 아들을 남겨 두고 혼자 내려오면서 피눈물을 흘렸을 아이 어머니의 마음이 전해져서 울컥합니다. 하나님 믿고 섬기는 것을 쉽게 생각할 게 아닙니다. 믿음의 선진들과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들은 그들이 탁월하고 잘나서 쓰임 받은 게 아닙니다. 이런 피눈물을 흘리면서 은혜에 반응할 줄 아는 신실한 마음을 쓰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능력을 쓰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마음을 쓰십니다. 한나는 사무엘을 받으면서 아들을 주신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우해 드렸습니다. 사람과의 약속도 중요하게 지키는데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길 수 없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겠다는 신실한 한나의 결단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졌습니다. 한나는 이제 갓 젖 뗀 어린 아들을 떼어서 엘리의 손에 맡겨 두고 피맺힌 마음으로 혼자 집에 돌아와서 평생 사무엘을 위해서 한을 품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약속한 것을 지키기 위해 이를 악물고 아들을 드린 한나의 신실한 마음을 하나님이 쓰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져서 가장 어두운 시대에 미스바에서 성회를 열어 온 민족이 함께 회개하고, 전국을 두루 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한 시대를 살린 위대한 사무엘을 내었습니다. 엘가나 가정의 이름 없는 한 여인의 신실한 결단이 조국 이스라엘을 살렸습니다. 하나님이 한나의 태를 닫아 아들을 주시지 않았지만, 한나는 마침내 사무엘을 받았습니다. 한을 품은 기도는 분명히 응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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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한’을 품은 기도’(삼상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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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하나님이 뽑은 사람들’(고전 1:24~31)
- 세상에서는 사람을 뽑을 때 소위 잘난 사람을 뽑습니다. 지혜와 지식이 있고 권력 있고 집안 좋은 사람을 선호합니다. 강하고 자신감 있는 사람을 뽑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뽑는 사람은 좀 다릅니다. 하나님이 뽑는 사람은 약하고 비천하고 멸시받고 자신감 없는 사람이 많습니다.(고전 1:26) 이런 선택은 세상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탁월한 지혜입니다.(고전 1:25)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런 사람들을 뽑으실까요?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9)” 자랑할게 많은 인생은 우월하고 자랑 할 게 없는 인생은 열등감으로 위축되지만 이것은 상대적입니다. 이렇게 뽑으시는 하나님 앞에 오면 우월감도 없고 열등감도 없습니다. 자기 것으로는 자랑할 게 없는 육체, 이것이 진리입니다. 사람의 것으로는 자랑할 게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으로 부터 나온 다는 것을 아는 게 축복입니다. 전능자는 온 우주만물을 뛰어넘는 창조주 하나님의 탁월하심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 그 자체로만 인정하면 그분의 존재는 뛰어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그렇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무시하는 것입니다. 자기 수준의 눈높이로 밖에는 이해 할 수 없는 인생의 한계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니 하나님을 의지 할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내 힘으로 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해서 자기 열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나보다 못한 존재로 무시하고 마음에서는 버려 버리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실은 수많은 인생문제들은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나보다 좀 더 힘이 센 사람이 도우면 되려나, 생각하지만 그것도 착각입니다. 인간관계, 돈 문제, 건강문제, 죽음의 문제 .... 막상 닥치면 사람 중에는 해결할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자랑 할 것이 없는 인생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렘 9:23~24)” 하나님은 자랑 할게 없는 인생들을 위해서 예수님을 우리의 자랑으로 주셨습니다. (고전 1:30) 자랑 하는 사람은 주 안에서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고전 1:31)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이 너무 낮추어 나에게 오시니 저런 분이 하나님일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전능자가 나를 대신 해서 죽으실 리가 없다고 합니다. 죽으신 예수님이 부활로 하나님이신 것을 증거 하셨는데도 못 믿습니다. 무당이 신을 받는 것은 믿으면서 내안에 임재하신 하나님의 신은 못 믿는 것입니다. 자기 수준만큼 밖에는 볼 수 없는 인생의 한계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그분이 내안에 들어오시면 회복되지 못할 육체가 없습니다. 죽은지 나흘 되어 시체가 다 썩은 나사로가 무덤에서 걸어 나오면서 그것을 증명했습니다. 다 썩어서 냄새나는 가망 없는 시체인생, 그 분 앞에서 얼마나 만신창이로 무너졌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이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질서가 잡히면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온 세상을 향하여 자기 것으로 자랑하는 육체들에게 모든 것을 능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탁월하심을 나타낼 때 피조 세계는 질서가 회복됩니다. 이 질서 안에서 진정한 예배가 드려집니다. 그때 인생문제의 질서도 회복되어 그 안에서 풀어집니다. 하나님이 약하고 없는 사람을 뽑으신 것은 그분의 지혜입니다. 육체로는 아무것도 건질게 없는 인생을 써서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십니다. 저의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저의 가장 약한 그 때 하나님이 비로소 전능자로 바로 보였습니다. 그분을 나의 하나님, 나의 주인으로 대우해 드리니 내 삶에서 하나님으로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무능하지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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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하나님이 뽑은 사람들’(고전 1:2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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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영생과 영원한 불’(눅 16:19~31)
- 예수님을 처음 믿기 시작했을 때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는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세상성공을 목적으로 하던 저는 부자의 대문 앞에 늘어지게 누워서 그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얻어먹고 사는 거지 나사로가 한심했습니다. ‘왜 한번 사는 인생을 나사로는 저렇게 살까?’ 그런데 반전입니다. 둘 다 죽었는데 한심한 거지 나사로는 천국에 갔고 매력 있는 부자는 음부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믿는 것이 이런 것인가? 그때 더 충격적인 말씀이 또 있었습니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 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 보다 나으니라(마 18:8)” 영생에 못 들어가는 것 보다는 불구가 되는 게 더 낫다니... 도대체 영생이 무엇이고 영원한 불이 무엇이길래 불구와 바꿀 수 있는 가치가 있는가? 저는 고민하다가 본문에서 진리를 찾고, 세상성공을 좇던 길에서 돌아서 목회의 길로 인생의 진로를 바꾸었습니다. 본문에서 첫째, 천국과 지옥은 분명히 있고 그곳은 ‘영원한 곳’이라는 것입니다. 그곳이 ‘영원한 곳’이라면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영원하지 않은 곳’이며 둘은 함께 이어져 있었습니다. 영원한 그곳, 천국과 지옥에는 누가 들어가는가?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눅 16:24)” 지옥에 간 부자는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는 둘 다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면 천국과 지옥으로 나눠지는 기준은 무엇인가? “너는 살았을 때 너의 좋은 것을 받았고 거지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다.. (눅 16:25)” 살았을 때 좋은 것을 받은 사람은 자기의 육체의 좋은 것을 받아 누리면서 육체를 위해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육체가 다 무너져 버리면서 가난하고 병들고 버림받은 거지 나사로는 고난 받으면서 살다가 자기의 영혼을 보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육체에서는 아무것도 건질 게 없었으니 눈을 돌려 영혼을 위해 살았겠지요, 그렇다면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어 지는 기준은 이 땅 에서 살면서 ‘육체를 위한 삶’인가, ‘영혼을 위한 삶’인가로 나누어집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8)” 예수님 믿고도 계속해서 나의 육체를 위하여 사는 삶은 이렇게 말이 안되는 불일치입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예수님 믿는 것은 그 삶이 ‘무엇을 위해 사는 가’로 증명됩니다. 부자는 영원하지 않은 세상에서 자기의 육체를 위해서 잘 살아서 육체의 좋은 것들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아도 영원한 세상과 이어지지 않으면 결국 다 헛된 것들이었습니다. 부자가 이 세상에서 살았던 인생의 시간들은 하나님 앞에 서니 아무것도 남길 게 없는 삶이었습니다.(고전 3:12~15) 헛된 인생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헛된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심판 받게 됩니다.(마 25:30) 우리가 이 땅 에서 살아온 시간들은 내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분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았는가 아닌가를 스스로 증명합니다. 그리고 그 증명된 시간들로 심판 받게 됩니다. 진리는 결코 허술하지 않습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퍼즐을 맞추듯이 들어맞아서 반박할 수 없는 명확한 논리로 주장 합니다. 이 진리가 드러났습니다. 영원하지 않은 이 세상에서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좋은 것은 죽음을 생각하고 영생의 가치를 깨닫고 그 가치를 향하여 사는 시간 들입니다. 그러면 예수님 믿고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가 답이 나옵니다. ‘나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삶!’ 저는 그렇게도 동의하기 어려웠던 말씀이 진리로 강력하게 드러나니 거부할 수가 없었습니다. 진리의 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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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영생과 영원한 불’(눅 16: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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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이영은 목사 ‘깨어질 수 없는 사랑’(겔 16:1~22)
-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바벨론에게 멸망당하여 포로로 끌려갑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왜 이런 이를 당해야 하는가?하나님이 그렇게 무능력하신가?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돕지 않으시는 분이신가? 이스라엘의 이 질문은 오늘 우리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에스겔이 받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 질문이 풀어집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수많은 사람 들이 있지만 오직 한 사람만이 눈에 크게 들어와 사랑을 하고 청혼을 하듯이 많은 민족 중에 오직 하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눈에 들어와 하나님이 사랑하십니다. 무슨 조건이 있어서 사랑한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눈에 들은 처음 만남은 천하게 버려진 피투성이에 벌거벗은 몸 이었습니다.(겔 16:6~7) “내 옷으로 너를 가리고 물로 씻기고 기름을 바르고.. (겔 16:8~9)” 수놓은 옷에 물돼지 가죽신, 가는베와 명주, 패물과 온갖 보석장식의 면류관을 씌워 주셔서 왕후의 지위에 올랐습니다. (겔 16:10~13) 하나님을 잘 만나서 왕후의 명성과 영화로 온 세상 중에서 높아졌는데 오히려 그것을 가지고 사랑을 배신합니다. 이런 배신은 어디에 있을 수도 없는 전무후무한 사건입니다.(겔 16:15~16) 배신당한 사랑! 이것은 인간 사랑의 모형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사랑하기에 얼마나 미성숙하고 불완전한가, 사랑은 마음에 한 사람만을 담아야 그 사랑이 진실합니다. 그러나 진실이 없으니 정한 마음이 안되어 조금만 속이면 유혹에 빠져 헛된 것들을 마음에 담는 배반과 반역의 본성을 가진 사람과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애초에 불가능한 사랑 이었습니다. 진실한 사랑이 어려운 대상과의 사랑은 사랑하는 쪽이 아픕니다. 하나님의 진실한 마음이 아픈 것은 하나님을 버리고 배반해서만이 아닙니다. 유혹에 빠져 부서지고 비뚤어진 곳을 길이라고 가고 있으니 결과는 파멸인데 그것을 지켜보는 마음이 더 아픈 것입니다. 속아서 눈에 좋은 대로 가다 보면 영혼이 끌려갑니다.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세상의 속임에는 잘도 속아 따라갑니다. 고귀한 왕후가 사창가의 창녀가 되어 버렸습니다. 사랑인줄 알고 속아서 갔는데 현실은 고통 속에서 착취와 파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신부에서 마귀의 노예가 되어 버렸습니다. 마귀의 노예로 존재가 변하니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던 귀한 왕후였는가를 잊어 버렸습니다.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줄 알라 (렘 2:19)“ 하나님을 반역하여 떠난 배신당한 사랑도 아픔이지만 사랑하는 자들이 파멸해 가는 것을 눈앞에서 보는 것이 더 아프지 않겠습니까? 아픈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놓아 버리시면 이 사랑은 깨어집니다. 진실하신 하나님은 그분의 마음에 한번 담은 그 사랑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불가능한 사랑을 지키시려는 하나님 때문에 이 사랑이 깨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랑을 목숨 걸고 지키십니다. 한쪽에서 죽기 살기로 놓지 않으면 사랑은 깨지지 않습니다. 사랑은 양쪽이 함께 반응하는 마음으로 이루어지는데, 일방적으로 한쪽이 놓지 않고 붙들고 있으면 놓지 않는 쪽이 아플 수밖에 없습니다. 아픈 사랑의 모든 고통을 다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목숨 걸고 지키신 그 사랑으로 그분의 책임을 다하셨습니다. 목숨 걸고 지키신 그분의 사랑 때문에 이 사랑은 깨질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해서 그 사랑을 끝까지 지키시려는 하나님의 절규가 심판입니다. 돌아올 수만 있다면, 자신의 이름을 땅에 떨어뜨리시고 온 세상에 무능력한 하나님으로 오해받으시는 것도 하나님은 괜찮습니다. 그 사랑 앞에서 우리는 ‘왜’ 라고 질문 할 수 도 없고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없습니다. 심판은 그 사랑을 놓지 않으시려는 하나님의 아픈 사랑의 사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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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이영은 목사 ‘깨어질 수 없는 사랑’(겔 16: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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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이영은 목사 '증거를 가진 자들' (요일 5:1~12)
- 세상 살다보면 문제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이 문제를 안고 저마다 살아가기 위해서 발버둥을 칩니다. 부서지고 찢어지고 깨지고 죽이고 .... 잘살고 싶은데 그게 안되니 힘든 것입니다. 전쟁터 속에서 건질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와중에도 잘 사는 부류들이 항상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예수님 안 믿고도 더 잘삽니다. 이게 뭘까? 예수님 믿는 나는 뭐지? 날마다 치열하게 실제적으로 사는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방법은 풀리지 않는 어려운 문제 같습니다.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요일 5:19)” 하나님께 소속되어 있는 그분의 자녀들이 악한 자가 권세를 잡고 있는 세상에서 그 흐름 따라 잘 살아가려면 세상과 타협해야 합니다. 그러면 악한자의 수하에 들어가야 하는데 영원한 생명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갈등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에서 사는 게 당연히 힘들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알고 살면 훨씬 수월합니다. 그렇다고 세상에서 지면 폐인이 되니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반드시 이겨야만 합니다. 누가 세상을 이길 수 있을까요? 세상을 이기는 자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난자들 ”입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승리합니다. (요일 5:4) 하나님으로 부터 난자들... 즉 교회만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요일 5:5)” 세상을 이기는 교회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는 자들입니다. 오직 예수께서 하나님이신 것을 믿는 교회만이 세상문제, 인생문제를 온전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요일 5:6)”라고 말씀하십니다. 물과 피!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요 19:34)” 예수님의 몸을 창으로 찌르니 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기록하면서 하나님이 분명한 인간의 몸으로 임하신 것을 증명합니다. 인간으로 임하신 예수님의 흘리신 피는 같은 몸을 가진 인간의 죄를 대신할 뿐만 아니라 모든 어둠의 저주에서 실제적으로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피는 하나님의 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그것이 하나님의 피라는 것을 증명하셨습니다. 죄와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신 분이 하나님이 아니면 누구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온 세상을 향해 물과 피로 그 아들을 증거 하셨습니다. 하나님 그분이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는데 해결 못할 인생문제가 뭐가 있겠습니까? 이 모든 증거는 역사를 통해 이루어진 사실로 증거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이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누가 악한 자에 처한 세상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의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것이니라 (요일 5:9) 하나님은 그의 아들에 대한 증거를 우리에게 분명히 주셨습니다. 이 증거를 믿지 않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가장 큰 죄입니다. 이 증거를 믿지 않는 자들은 십자가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큰일을 믿지 않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증거를 믿는 자들의 모임이 교회이며 성도만이 오직 세상문제 인생문제를 제대로 풀어낼 수 있는 자들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신 하나님의 증거를 가진 자들입니다. 돈, 학벌, 성공, 외모...세상이 만들어 놓은 기준이 있는데 교회는 그 기준과 상관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증거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세워 놓으신 기준이 교회의 기준이 됩니다. 세상이 갈수록 아무리 악하고 소망 없는 곳이라도 하나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은 세상을 이기고 승리합니다. 교회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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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이영은 목사 '증거를 가진 자들' (요일 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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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이영은 목사 '주인되심'(롬 14:7~9)
- 저의 지인의 이야기입니다. 한 인도 여자가 길에서 떨어진 꽃을 줍고 있었습니다. ‘주변에 저렇게 꽃들이 많은 데 그냥 꺾어가지 왜 힘들게 저럴까...‘ 궁금해서 물었더니 그 인도여자의 대답이 “우리신 에게 가는데 꽃을 드리고 싶어서요, 그런데 우리신은 생명을 일부러 꺾어 죽여서 가져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떨어진 꽃을 줍고 있답니다.” 신을 살아있는 존재로 저렇게 가깝게 느끼면서 그 신이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으려는 인도 여자를 보면서 자기는 예수님의 임재를 얼마나 느끼고 있는지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았다고 합니다. 성경도 많이 알고 묵상도 하지만 아는 그것을 이론으로 정립시켜서 종교가 되어버린 지식의 기독교는 주님의 임재를 느낄 수가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이 땅에 와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본문은 그 결과로 우리의 주님이 되셨다고 합니다. 주님의 임재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것의 결과는 나의 주인이 되신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그러니 내가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주를 위해서 하는 것이며 내가 주의 것이라고 합니다. 이 진리는 어느 특정한 사람만이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그분을 영접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이야기입니다. 좀 더 잘 살아보려고 교회를 다니는 건데 주를 위해 살고 주를 위해 죽으라니 짐을 하나 더 지고 가는 구나... 꼭 저렇게 까지 심하게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가... 마음에 부담이 된다면 우리의 믿음을 다시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을 진리로 믿는 다면 주를 위해 살고 주를 위해 죽으라는 그 말씀이 맞습니다. 그러면 그 말씀이 이해 될 때 까지 깊이 씨름하고 고민해 봐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이 “나는 너의 하나님이라”는 구약의 약속을 목숨을 걸고 지키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해서 대신 죽으시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이심을 입증하시면서 그 부활하신 하나님이 나의 안에 들어오셔서 나의 주님이 되심으로 그분은 나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가 나와 함께 하시는 실제입니다. 그분의 숨결, 향기, 같이 있는 그 느낌... 그분이 그렇게 나의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하나님이 내안에 계신다면 그것은 나의 주인으로 임재 하시는 게 맞는 것입니다. 목숨 걸고 다 이루어 놓으신 그 약속을 받은 우리가 주님이 나의 주인이 되는 것이 싫다고 그 약속을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죽음을 이기시고 마귀를 이기시고 나의 주님이 되셔서 나의 안에 임재하십니다. 마귀를 이기신 주님의 능력이 나와 함께 하셔야 마귀가 권세 잡은 세상을 이기고 살 수 있습니다. 나 혼자는 못삽니다. 어느 권사님의 남편이 갑자기 쓰러지셨습니다. 병원에 입원하고 재활하면서 고생하시다가 지극정성으로 살아났는데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입니다. 어느 날 한 여자가 남편을 찾아왔습니다. 전부터 알던 사이로 병간호를 해주러 왔다는데 남편은 그 여자에게 돈을 뭉치로 쥐어 줍니다. 며칠 후 또 한 여자가 찾아 옵니다. 전에 남편에게 도움을 받은 게 고마워서 병간호를 하러 왔다면서 남편에게 재산을 물려달라고 조른답니다. 뻔뻔한 두 여자는 돈 때문에 남편에게 붙어서 혼이 빠질 정도로 잘해주는데 미련한 남편은 권사님에게 너는 필요 없으니 나가라고 한답니다. 참 기가 막힐 일입니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비상식적인 사건이 살다보면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인생문제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풀어낼 수 있겠습니까?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주인이 되어 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풀어집니다. 주님이 권사님의 주인이 되셨으니 그분을 주인으로 의지하고 끝까지 주인을 믿고 의지하면서 기도하시면 분명히 주인의 방법대로 해결할 것입니다. 마귀를 이기신 주님의 능력만이 마귀가 권세 잡은 세상의 인생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우리의 승리입니다. 주님의 주인 되심의 결과는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심히 큰 능력입니다. 축복입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후 4:8~9)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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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이영은 목사 '주인되심'(롬 1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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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이영은 목사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 21:15~19)
- 베드로는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의 손을 잡고 물위를 걸었던 적도 있었고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믿음을 고백하면서 예수님이 구원자이시고 하나님이심을 알았습니다. 십자가 사건 전날에는 주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그날, 닭이 우는 새벽에 베드로는 예수님 때문에 목숨을 버릴 위기 앞에 섰습니다. 베드로는 죽음의 위기 앞에서 나는 그분을 모른다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고 했던 말은 진심이었습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이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도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불치병 환자들을 고치시고 죽은 사람도 살리시며, 물위를 걸으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는 것을 보면서는 할 수 있었던 고백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힘없고 무력하게 맞으시면서 한마디 말도 못하고 수치 당하시는 모습을 보면서는 두려웠습니다. 그날 저항도 못하고 맞고 계시는 예수님의 눈과 마주치면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베드로의 믿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웠을까요, 믿음은 위기 앞에서 시험을 받게 됩니다. 그때 믿음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지만, 베드로는 그토록 사랑하던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눈앞에서 보고도 부활의 기쁨을 충만하게 누리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버리고 나 살겠다고 도망간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이 말밖에는 할 수 없는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사랑하는 예수님을 버리고 갔다는 눌려 있는 마음, 밤새 고기 잡다가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지친 마음, 그런 베드로에게 갑자기 찾아오신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놀라서 반사적으로 바다로 뛰어 들어간 피하고 싶은 마음, 부서지고 무너져 내린 베드로 앞에 조반을 차리시고 함께 계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침묵...이 모든 과정은 마음이 눌려있던 베드로의 회복을 위해 필요합니다. 조반 후,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가 주님을 위해 죽을 수 있다고 할 때 “네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구체적으로 미리 알고 계셨던 주님이 무엇을 모르시겠습니까,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할 것을 아셨던 주님은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도 아셨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고 도망갈 것을 미리 아시고도 베드로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런 주님 앞에서 무엇을 숨기고 감출게 있겠습니까? 나의 약함을 인정합니다. 나는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눌려 있던 베드로의 마음은 회복이 됩니다. “내양을 먹이라” 부활하신 예수님은 주님을 배신한 자격 없는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사역은 자격을 보고 맡기시는 것이 아닙니다. 처참하고 무력한 십자가 죽음 앞에서 믿음의 시험을 받았던 베드로는 십자가의 죽음도 하나님의 뜻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기적의 능력뿐만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무능력함도 하나님의 뜻을 이룹니다. 인생에는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습니다. 좋은 것만 취하고 나쁜 것은 버리고 싶지만 때로는 나쁜 것을 통해서 좋은 것이 박차고 나오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순리입니다. 주님 안에서는 나쁜 것도 잘 지나가면 합력해서 좋은 것이 됩니다. 부활의 영광을 위해서 저주받은 십자가의 죽음을 잘 지내가야 합니다.믿음의 시험을 받고 도망갔던 예수님의 저주받은 십자가도 하나님의 뜻인 것을 알아야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의 하나님 되심의 언약을 성취하신 분이라는 확신 있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성령 받은 후에 베드로는 두려워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갔던 그들 앞에서 담대하게 설교합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행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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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이영은 목사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 21:1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