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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내 앞에 계신 주를 바라봄’ (행 2:14~28)
    “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25절). 교인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말씀을 들어도 그것을 먼저 자기에게 적용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에게만 적용하기 쉽습니다. 또 예배와 교회생활에 익숙해지지만 실제로 마음은 무뎌질 수 있습니다. 외견상으로는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교만과 미움, 욕심과 나태함, 그리고 자기중심적인 마음이 가득합니다. 대개의 사람은 이런 현상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곤 합니다. 그러다가 죄가 오래도록 습관이 되면 잘못인지조차 잘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겉으로는 경건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하나님보다는 정욕에 길들여진 자기 마음을 더 따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 힘만으로는 자신의 죄를 면밀하고 정확하게 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변화와 깨달음을 얻게 될 수 있을까요?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성령의 도우심입니다. 성령께서 마음을 비춰주셔야 사람은 자기 죄를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이를 성령의 조명이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성령께서 오시면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께서 마음을 찌르실 때에야 비로소 사람은 자신의 절못을 깨닫고 돌아보게 됩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아 동침한 뒤, 그 죄를 숨기려고 우리아를 전쟁의 맨 앞에 세워 죽게 했습니다. 그때 나단 선지자는 부자와 가난한 자의 비유를 들었지요. 비유 속의 부자는 많은 양 떼가 있으면서도, 자기 손님을 대접하려고 가난한 자가 딸처럼 기르던 하나뿐인 어린 암양을 빼앗아 잡았습니다. 이 비유는 다윗의 탐욕과 불의를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곧 다윗은 그 비유 속 사람을 강하게 정죄했지만, 곧이어 나단이 “당신이 그 사람이라”라고 말하자 그 말씀이 바로 다윗 자신에게 향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다윗은 밧세바 사건 이후 하나님께 여러 가지 무거운 징계를 받게 됩니다. 칼이 다윗의 집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은밀히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은 그 일이 해 아래에서 드러나게 될 것이라 말씀하셨고, 말씀대로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다윗은 개인적으로는 용서를 받았지만, 자기 죄의 결과와 징계는 매우 혹독하게 그의 가정과 왕실 위에 이어졌습니다.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자신에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설교를 통해 오순절에 일어난 신기한 현상만을 말하지 않았으며, 그 말씀을 통해 사람들의 죄를 드러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마음을 비추고, 숨겨진 생각까지도 드러냅니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성도에게 필요한 또 하나는, 자신의 죄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회개입니다. 죄를 덮어 두면 사람은 온전한 성도로 깨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죄를 죄라고 바르게 말해 주는 것이 필요하며, 그 앞에서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사람이 자기 죄를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무지함이나 완고한 마음, 자기만 옳다고 여기는 생각, 그러한 생활에 익숙함, 그리고 계속해서 죄의 행위에 속는 마음 때문입니다. 자기의 죄를 깨닫게 하는 길은 성령의 역사하심과 하나님의 말씀, 정직한 회개, 그리고 십자가 앞에 자신을 세우는 일입니다. 사람은 남의 죄를 볼 때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 죄를 볼 때 비로소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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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14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부활하신 주님의 세 가지 부탁’(요 20:19-23)
    주님의 제자들은 3년 동안 가르침을 받고 능력도 행했지만,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실 때 모두 도망갔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야 제자들은 주님을 믿었습니다. 제자들이 증거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다가 고난당했고 순교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목격하지 않았다면, 목숨 걸고 부활을 증거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변화된 바울이 순교하기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한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께서 세 가지를 부탁하셨는데, ‘평강 있으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으라’입니다. 차례대로 살펴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닫아걸고 있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평강은 모든 두려움과 근심을 뛰어넘는 마음의 평안입니다.(요 14:27) 그 평안은 내적이며 절대적인 평안입니다. 그 평강은 예수님을 믿으면 얻을 수 있는 선물입니다. 평강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서 주어집니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욥 22: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바로 되어야 이웃 관계도 회복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예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릴 수 있을까요? 한결같이 주님을 신뢰하는 자에게 평강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사 26: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에 평강이 없는 것은 주님을 신뢰하는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a)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나라에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족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입니다. 제자로 삼는다는 것은 삶을 통해 제자를 가르치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정의롭고 정직하게 선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전도하는 데 처신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살전 2:10) 그럼 제자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주님은 네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눅 17:1-10) 첫째,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다른 사람에게 죄짓게 하는 일은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믿음의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하루에 몇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셋째,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넷째, 종의 겸손한 삶의 태도를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는 분별력 있는 삶을 살고, 용서하는 마음을 갖고,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어야 하고, 겸손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네 가지 말씀을 기억하고 실행하기 바랍니다. 제자들이 할 일은 성령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된 사명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성령을 받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 40일간 제자들과 함께하시면서 하신 말씀은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예수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 되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눅 24:46-49) 제자들은 증인되기 위해서 40일 동안 말씀을 들었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약속하신 성령님을 기다렸습니다. 오순절이 되어서 그들이 모두 한곳에 모여 있을 때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증인이 되리라.”라는 말씀은 성령께서 우리가 증인되게 해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확실하게 성령께서 임하실 때 능력을 받아서 가족부터 차별 없이 복음을 전하여 증인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도록 동행하시며 도와주시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을 찬송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산 소망을 갖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벧전 1:3) 부활은 소망이며, 기쁨입니다. 여러분은 부활신앙으로 기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된 삶을 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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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5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베드로의 고백’(마 26:69~75)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였고, 그것도 여러 제자들 중에서 수제자였습니다.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앞장서서 잘 따랐고 열심으로 자기가 맡은 일을 수행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사람이지만 평소 예수님을 수행하며 동행하다가 지금은 예루살렘 성에 와 있고, 지난밤엔 최후의 만찬에 참석해 가장 가까이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방금전에는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예수님을 잡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서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같이 모여 있을 때, 베드로는 멀찍이 예수님을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들어갔고 그 결말을 보려고 하인들과 함께 앉아 있었습니다(57-58절).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실 때 곧바로 따랐던 자였고, 갈릴리 바다에서 주의 말씀대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렸던 자였습니다. 또 제자들 가운데 가장 먼저 대표로 신앙을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는 고백은 예수님으로부터 그의 신앙적 탁월함마저 입증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신이 곧 겪으실 십자가의 길에 대해 말씀하시자 즉시 예수님을 붙들고 만류했으며, 그 일로 인해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책망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점들로 볼 때 베드로는 뜨거운 열정과 진심어린 마음은 있었지만,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 생각과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 강성이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예수님께서 붙잡히신 뒤 다른 제자들이 흩어질 때에도 그는 “멀찍이”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까지 들어갔던 이 장면은 그의 특별한 추종과 함께 자기 내면의 모순성을 잘 보여 줍니다. 그는 다른 제자들과는 다른 열정과 담대함이 있었지만, 그 안에는 연약함과 불완전함이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베드로의 “세 번 부인”을 예고하셨을까요?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의 사건은 처음엔 “왜”보다는 “어떻게”에 더 큰 관심이 가기 마련입니다. 부인할 것을 예언하기도 쉽지 않은데 정확히 세 번 부인할 것을 어떻게 예언할 수 있는가 하는 인간적인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을 보면 볼수록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베드로가 자신을 세 번 부인할 것을 아셨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공회의 뜰 안에 들어올 것도, 연거푸 두 명의 여종들과 또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세 번이나 질문을 받을 것도 다 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 자신의 잘못과 죄악의 근원과 그동안 놓쳤던 것에 대해 흐느끼며 슬피 울게 될 것도 아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이 사건은 아직 불완전하고 주님의 품성에 이르지 못한 미성숙하고 원초적인 불신과 함께 베드로 자신의 영적 원시성을 드러냈지만, 동시에 그러한 것들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이 확실한 죄인이었음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회개하기까지 그 상황 가운데 역사하시고 주관하셨던 분이 계셨던 것을 직감할 수 있습니다. 그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본인은 지금 거짓과 악이 가득한 자들에게 조롱당하고 계시지만, 베드로가 겪게 될 장면들을 미리 아시고 그 상황들을 파노라마처럼 통과하게 하심으로써 죽어도 고치지 못할 베드로의 인성과 영성을 고치도록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예수님을 부인하던 그 장면이 생생합니다. 그것은 죽어도 변화되지 않는 우리의 모습, 나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자기에게서 떠나시고 나서야 자기의 진실을 발견했습니다. 고난주일을 맞이하고 부활절을 향해 가면서, 베드로가 그동안 꺽지 못했고, 깨닫지 못했던 자신의 아집과 빗나간 열심과 참되지 못했던 믿음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가진 누추하고 사악한 숨은 심령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회개하며 온전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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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31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하나님 나라는’(마 4:17)
    하나님께서는 세상 창조 때부터 하나님 나라를 예비하셨습니다.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마 25:34b)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으며 미래에 완성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시간적으로 세상의 마지막 날이거나 공간적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이 없는 곳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본문을 보면,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 나라 곧 천국을 전파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교인들이 이 세상을 떠나면 자동적으로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천국을 준비하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회개하는 사람이 갈 수 있는 곳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열심을 내어 회개해야 합니다. 오늘이 회개의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히 4: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회개하는 자, 즉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변화산에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엘리야와 모세와 이야기하는 모습을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 광경을 본 베드로는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마 17:4)라고 말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천국보다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더 좋아한 것이지요. 이 세상의 욕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관심 없고 믿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를 얼마나 갈망하고 있습니까? 천국은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고통도 없는 영원한 나라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려고 오셨습니다.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요 12:4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악인이라도 죽는 것을 원치 않으시는 생명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겔 33: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죄인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를 믿고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요 12: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고 따르는 자만이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자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이 세상은 죄악으로 가득하여 멸망할 수밖에 없는 곳입니다. 사람들은 마음이 완악해져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합니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마 13: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우리를 생명이 있는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불바다에 던져지기 때문입니다.(계 20:15)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언제 임하느냐고 바리새인들이 물었을 때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의 마음속에 임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회개하면 항상 즐겁고 상쾌하게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영원한 나라로서 하나님의 통치는 끝이 없습니다. “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이다.”(시 145: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며 영원히 설 것입니다. “이 여러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영원히 설 것이라.”(단 2:4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는 정의와 공의를 견고하게 세우시고 행하시는 거룩한 나라입니다. 이 땅에도 하나님 나라가 굳건하게 세워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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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23
  • [국제교회논평회 칼럼] 박조준 목사의 ‘교회가 어떻게 이렇게 됐지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들은 정한 시간에 예배당에 모여서 예배를 드립니다. 세상에서는 이것을 종교 행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 영혼이 구원받았으나 육신은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습니다. 여기에 크리스천의 갈등이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한다”고 하면서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악을 행하는데,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내 지체 속에서 다른 한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본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크리스천의 갈등입니다. 신앙인에게 갈등이 없으면 사실 신앙인이 아닙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이지 않는 천국 교회는 완전합니다. 그러나 보이는 세상 교회는 불완전합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문제가 많이 일어나고,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하나씩 해결해 나가는 것이 보이는 세상 교회의 과제입니다. 교회가 지향해야 하는 것은 언제나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생각하며 주님의 뜻을 따르려고 애써야 하고, 주님이 이미 주신 말씀에 기초해서 생활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시지 않고 그 속사람을 보셨습니다. 교회도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사람의 외모를 보기가 쉽습니다. 더구나 자본주의 체제의 시장 경제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가령 권력이 있는 사람, 재력이 있는 사람, 학력이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그렇지 않으면 서운해 합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VIP(?)로 대한다고 합니다. 물론 교회가 세상에 있기 때문에 세상적인 것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교회라는 단체를 운영하기 위해 재정이 필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앞세우면 안 되지요. 헌금을 많이 한 사람은 VIP이고 적게 한 사람은 제외된다면 교회의 모습이 아니지요. 야고보서에도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고 하면서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올 때,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보고 말하기를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기를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했습니다. 오늘 어느 교회의 모습과 너무 닮지 않았습니까? 교회는 교회다워야 합니다. 성도의 수가 얼마나 많으냐 적으냐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기업화하여 목회자가 기업화된 교회의 CEO가 되면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다. 교역자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파에 전무하고 재정에는 손대지 않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교회 살림은 교인에게 맡기고 그 재정이 투명하게 운영되어야 합니다. 교역자가 재정에 대하여 손톱만큼이라도 의혹을 받게 되면 말씀의 권위가 사라집니다. 오늘 한국 교회에서 교역자의 재정 의혹이 생겨 사회적인 문제가 되는 것은 너무 유감스러운 일이고, 있어서도 안 될 일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야 산 교회, 건강한 교회가 됩니다. 교회가 살아야 사회가 살고, 사회가 살아야 나라가 삽니다. 교회의 존재 의미가 무엇입니까?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사회가 왜 이렇게 썩었습니까? 소금이 맛을 잃어서입니다. 이 세상이 왜 이렇게 캄캄합니까? 빛이 없어서입니다. 교회가 맛을 내고 빛을 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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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19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순전한 믿음을 따라감’ (마 20: 29~34)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30-31절) 여리고 길가에 앉아 있던 두 맹인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사람들은 시끄럽다며 그들을 꾸짖었지만, 그들은 오히려 더 간절하게 소리 질렀습니다. 두 맹인은 자신의 형편을 숨기지 않고, 절박한 심정을 담아 오직 주님의 긍휼을 붙드는 믿음의 태도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고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눈을 뜨도록 해 주시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으며, 그들은 곧 눈을 뜨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보게 된 뒤에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이 받은 은혜는 문제 해결로만 끝나지 않았고, 자신의 삶의 방향을 바꾸어 동행과 순종으로 이어갔습니다. 삶 속에서 예수님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 자세는 사람을 대하는 마음 자세와 매우 비슷합니다. 사람 간에도 간절함이 있거나 진실함이 있을 때 서로 사귐이 있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대하는 마음과 행동에 언제나 그러한 절실함과 온전한 순종이 베어있을 때 우리는 주님께서 가까이 와 계신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와는 대조적인 장면이 있습니다. 본문과 연결되어 앞서 제시된 부분입니다.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두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와 절하며 “주의 나라에서 한 사람은 주의 오른편에, 한 사람은 주의 왼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라고 요청하는 장면입니다. 겉으로는 공손하거나 충성스러워 보이지만, 속마음은 높은 자리와 지위를 구하는 극히 이기적인 청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그들의 속에 담긴 마음을 밝히 드러내십니다.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시며, 영광은 쉽게 얻는 자리가 아니라, 고난의 길과 연결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세상은 높은 자리가 복이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섬기는 사람이 큰 사람이며,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섬기러 오셨고, 많은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길은 권력의 길이 아닌 희생을 통한 사랑의 길이었습니다. 이 두 장면을 나란히 놓고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맹인들은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예수님께 간절하게 구했으며, 오직 주님의 긍휼에 기대었습니다. 또한, 방해가 있어도 멈추지 않았고, 은혜를 받은 후에는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반면 두 아들의 어머니의 청원은 높은 자리를 향해 있었고, 자기와 자식만을 중심에 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사람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높이려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부족함을 사실로 인정하며 주님의 긍휼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그에 대한 응답이나 은혜를 받으면, 그 은혜를 핑계로 더 높은 자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며 섬김의 길로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어떤 자리나 위치보다도 주님의 긍휼입니다. 우리 눈이 열리고, 마음이 새롭게 되어, 온전한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간절한 믿음으로 주님께 부르짖고, 은혜받은 후에 주님의 길을 따르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러한 복은 결국 섬김으로 나타나며, 십자가의 마음을 닮아 가는 삶으로 열매 맺게 됩니다. 살아있는 건강한 신앙생활과 간절함으로 주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살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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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17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영원한 속죄’(히 9:11~14)
    구원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값없이 주시는 은총으로서 사람을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시키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생명을 지불하셨습니다. 예수께서 피를 쏟는 희생을 치르시고 죄인인 우리를 구속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은 구원은 영원하며 사람의 영혼육 전 존재를 구원하신 것이기에 가장 값진 선물입니다. 본문을 보면,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장래 좋은 일은 하나님 약속의 성취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져 구원의 시대가 열리는 것을 말합니다. 대제사장은 피 없이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피는 생명을 내어주는 것으로서 속죄로 이해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죽음으로 단 한 번에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속죄입니다. 그래서 속죄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암송아지의 재는 정결예식을 말합니다. “이에 정결한 자가 암송아지의 재를 거두어 진영 밖 정한 곳에 둘지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 회중을 위하여 간직하였다가 부정을 씻는 물을 위해 간직할지니 그것은 속죄제니라.”(민 19: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결은 외형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양심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단순히 죄만 씻어지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구약시대에 드린 동물의 피는 부정하게 된 사람의 몸을 의식적으로는 정결하게 하였으나 양심을 씻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진 사람의 양심을 정결하게 하고 죽은 심령을 살려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보혈은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대한 말씀을 봅니다. 첫째, 예수의 보혈은 속죄하게 합니다.속량은 전쟁 포로나 노예를 돈을 주고 사서 해방시키는 것을 뜻합니다. 죄와 사탄의 지배로부터 해방된 것이 우리의 구속입니다. 예수께서는 몸 전체를 대가로 지불하여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예수의 보혈은 정결하게 합니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셋째, 예수의 보혈은 거룩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히 13: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넷째, 예수의 보혈은 죄로 말미암아 단절된 하나님과 사람을 화목시켰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 주셨습니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이 중요합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1-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해주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육체의 정욕을 이길 힘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시험을 이기고 승리하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찬송가 268장 1절)라고 날마다 찬송하며 영원한 속죄를 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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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09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주의 말씀을 받아 누림’(마 16:13~28)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3-16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겉으로는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는지 묻는 질문이지만, 예수님은 사실 제자들의 마음을 알고 싶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예레미야라고 말했는데, 그 말은 예수님을 위대한 선지자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다는 점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더 분명하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은 오늘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주시는 질문입니다. 신앙은 결국, 내가 예수님을 누구로 믿고 고백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고백은 지금 현재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의 모습을 나타내주는 고백이며 표지이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의 고백은 진정한 믿음의 고백이었고 예수님께서는 그 고백의 신실성을 금방 아셨습니다.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이시며 구원의 왕이시라고 인정하는 진정한 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고백이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참된 신앙고백은 하나님께서 마음을 열어 주실 때 시작됩니다. 곧이어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고난받아 죽임을 당하고, 삼일만에 살아나야 할 것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주여 그리 마옵소서”하면서 말립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메시지로 다가옵니다. 신앙이 사람의 계산과 세상적이고 정욕적인 기대에 붙잡히게 되면, 예수님께서 인도하실 진정한 길을 가로막을 수 있게 됩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고백은 우리 삶의 목표나 목적과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고백하며 주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자기의 뜻대로만 살지 않으며 귀하신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곧 자신의 마음의 왕좌에서 내려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의 욕심과 세상의 정욕, 이생의 자랑, 그리고 완고한 마음과 고집이 주인처럼 되는 자리를 내려놓고, 더 이상 내가 아닌 예수님께서 내 인생 자리의 주인이 되시도록 순종하는 일입니다. 또한,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천국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라는 그 사랑의 관계로 인해 감당해야 할 불편함이나 손해, 인내와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함께 짊어지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우리도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하지만, 고백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 고백대로 주의 말씀에 합당한 인생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이 바로 그 길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상고하며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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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04
  • [특별기고] 임승안 박사의 ‘한(恨) 많은 백성이여, 원칙(原則)으로 돌아가자’
    2026년의 입춘이 지났지만 마음은 여전히 춥다. 한(恨)으로 응어리진 국민들의 마음이 좀처럼 녹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는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다. 조선 백성의 반(半) 이상이 자손 대대로 노비로 살아야 했던 설움의 역사, 중국에 잡혀간 ‘환향년’, 일제강점기의 ‘위안부’와 ‘학도병’,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던 어머니들의 가슴은 한(恨)으로 억장이 무너졌으리라. 해방 이후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소련 공산당과 김일성의 등장, 좌우 분열과 미소 양국의 신탁통치, 두 정부의 수립과 처참했던 6·25 전쟁. 한반도 역사에 지우고픈 천추(千秋)의 한(恨)이 또다시 새겨진 시기였다. 중요한 것은 이 땅에 여전히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숱한 도발과 테러, 우리 국민의 안전을 직접 위협한 미사일 발사, 전 세계의 만류에도 끝내 손에 넣은 핵무기는 한반도의 평화가 아직 요원함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국민들의 우려 속에서 그들의 약속을 신뢰했던 대한민국의 대통령들은 번번이 쓰디쓴 배신을 경험해야 했다. 그렇다면 우리의 내부는 어떠한가. OECD 가입이라는 성과 이면에 가려진 현실은 결코 밝지 않다.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살률을 비롯해 높은 이혼율과 낮은 출산율, 낙태 문제 등은 우리가 마지막까지 숨기고 싶었던 민낯이었다. 대한민국을 이끌어온 역대 대통령들의 말로 또한 순탄치 않았다. 하야와 망명, 영부인 살해와 대통령 측근 암살, 수사 중 자살, 탄핵 수감, 뇌물 혐의 수감, 계엄령 선포와 사형 구형에 이르기까지, 한(恨)의 역사는 멈추지 않는 현재진행형이다. 오늘날 뉴스를 통해 접하는 정치 현실 역시 암울하기 그지없다. 지난 수년간 국민적 논란이 컸던 부정선거 의혹은 여전히 충분히 해소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가칭) 교회재산몰수법, 낙태법 등 이른바 ‘3대 악법’ 논란도 계속되고 있다. 소수의 인권을 내세워 다수의 권리를 짓밟는 상식적이지 않은 현실 속에 진짜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들의 절규는 또 하나의 한(恨)으로 쌓여가고 있다. 여기에 정치적 중대 사건과 관련한 일부 검사의 기소와 구형, 영장 전담 판사의 영장실질심사 결정, 재판부의 최종 판결이 과연 상식과 정의에 부합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고위직 후보자들에 대한 검증 부재와 반복되는 임명 강행 역시 우려를 낳는다. 제어 장치 없이 질주하는 기차와 같은 모습은 아닌지,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이 흔들리는 것은 아닌지 염려가 깊어진다. 오호통재(嗚呼痛哉)라. 억울한 한(恨)으로 절규하는 이들이 그 한에서 벗어나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그 길은 어디에 있는가. 해답은 원칙(原則)으로 돌아가는 데 있다. 공의(公義)와 자비(慈悲), 정직과 상식의 원칙이다. 입법·행정·사법의 삼권분립이라는 헌정 질서의 원칙이다. 미래 지도자를 바르게 양육하고 현재의 지도자를 공명정대(公明正大)하게 선출하는 원칙이다. 스스로 사고하며 행동하여 선동하지도, 선동당하지도 않겠다는 결단의 원칙이다. 대통령 중심제 국가에서 무엇보다 대통령이 가정의 부모, 학교의 교사, 사회의 시민과 함께 이러한 원칙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가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에게도 분명한 책임이 있다. 시민과 함께 이러한 원칙을 지키되, 심각하게 불의한 지도자와 정책에 대해서는 신중히 검토하고 필요하다면 책임 있게 목소리를 내야 한다. 나라와 백성의 사활(死活)이 걸린 문제라면 더욱 그러하다. 특히 다음의 영적 원칙을 되새겨야 한다. 첫째, 예수께 항상 돌아가야 한다.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예수께로 나갑니다”(찬송가)라는 고백처럼,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 갈 2:20)의 심정으로 나아가야 한다. 오직 예수만이 한(恨)의 뿌리를 근원적으로 끊어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예수께서 마귀가 준 저주와 사망의 한에서 인류를 자유케 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대속(代贖)의 죽음을 이루셨음을 믿어야 한다. 그분은 부활하셔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역사하신다. 이미 죗값을 치르셨기에 마귀는 더 이상 우리를 죄책감과 한의 올무로 붙들 수 없다. 셋째, 스스로 유혹에 넘어가 한의 올무에 걸릴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받으신 세 가지 시험(마 4:1-11)은 오늘 우리에게도 반복된다. ① 생존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는 유혹 ② 하나님의 사랑을 시험하라는 유혹 ③ 권력과 재력과 명예를 위해 타협하라는 유혹 이 모든 것은 욕망에서 비롯된다. “욕망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마귀는 결국 “빼앗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존재다(요 10:10). 넷째, 예수께서 말씀으로 대응하셨을 때 마귀는 물러갔다. 말씀만이 승리의 무기다. 다섯째,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고 천국 복음을 가르치고 전파하시며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셨다(마 4:19-25). 영적 전쟁의 승리자이신 예수께 나아갈 때, 환경이 어렵더라도 한이 우리의 심령을 지배할 수 없다. 만일 이 땅에 여전히 한이 가득하다면, 복음을 충분히 전하지 못한 우리의 책임 또한 돌아보아야 한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 마귀의 저주와 한에 눌린 사람들을 하나님의 심정으로 품자. 예수의 이름으로, 성령의 권능으로 생명을 살리자. 한국이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와 사랑의 법으로 다스려지는 거룩한 나라가 되도록, 지도자들이 예수께 돌아오도록, 우리부터 기도와 예배와 선행에 더욱 충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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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28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주님을 항상 내 앞에 모시고’(시 16:8-11)
    사람은 스스로 거룩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써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레 20:8) 다윗은 항상 주님을 앞에 모시고 신뢰함으로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게 살도록다윗은 ‘내 입술을 지키소서, 마음을 지켜주소서, 귀를 지키소서’(시 141:3-5)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항상 내 앞에 모시고 살아갑니까? 본문을 보면,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항상 앞에 모시고 사는 사람들에게 마음이 기쁘고, 영도 즐거워하게 하며, 육체도 안전하게 지켜주시고,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의 길을 보여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스올의 문턱에서라도 생명의 길을 찾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살아야 주님을 항상 내 앞에 모시고 살 수 있는지 다윗에게 배우려고 합니다. 다윗은 먼저 하나님께 여쭙는 삶이었습니다. 사무엘상 23장을 보면, 블레셋 사람이 그일라를 쳐서 그 타작마당을 탈취한 것을 사람들이 다윗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다윗은 주님께 “내가 출전하여 이 블레셋 사람을 쳐도 되겠습니까”(2절) 하고 여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고, 그일라를 구해 주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부하들은 유다에서도 가슴 졸이며 살고 있는데,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군대와 마주치면 더 위험하다며 반대하였습니다. 다윗은 다시 주님께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블레셋 사람들을 너의 손에 넘겨주겠으니 어서 그일라로 가라고 똑같이 대답하셨습니다.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무찔렀습니다. 다윗이 그렇게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이 앞서 가시면서 싸워주셨기 때문이며, 다윗이 주님께 계속 여쭈어서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주님께 모든 일을 여쭈어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말씀에 순종할 때 주님이 우리보다 먼저 가시면서 우리를 위해 싸워주시고, 우리를 끝까지 돌보아주시기 때문입니다.(신 1:30-31) 우리는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하나님께 계속 여쭙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둘째, 다윗은 찬양하는 삶이었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고서 먼저 블레셋에 빼앗긴 하나님의 궤를 모셔오는 데 집중했습니다. 그때 다윗이 직접 만든 모든 악기를 총동원하여 찬양하면서 옮겼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궤가 다윗 성에 들어올 때 온 이스라엘 백성과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하나님 앞에서 있는 힘을 다해 춤을 추며 찬양하였습니다.(삼하 6장) 다윗은 왕이 되어서도 오직 이스라엘의 왕은 위대하신 하나님이라고 찬양하였습니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시 145:1-3)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놀라운 행적을 항상 전파하겠다는 마음으로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하나님, 주님은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주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으며, 만물은 주님의 뜻을 따라 생겨났고, 또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계 4:11) 셋째, 다윗은 회개하는 삶이었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죄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나단이 다윗에게 죄를 지적했을 때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하 12:13)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 후 평생토록 죄를 회개하며 울었습니다.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시 56:8)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회개의 눈물을 기쁘게 받아주십니다. 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다윗은 살아가면서 자신의 죄에 대한 결과를 책임졌습니다. 다윗은 죄를 용서받은 기쁨과 함께 죄로 인한 고통을 감수했습니다. 그러면서 죄를 용서해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찬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죄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에 관심 두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하실 수 있는 일에 집중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윗처럼 주님을 항상 내 앞에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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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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