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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김찬양 목사의 ‘주님은 나의 안식처’(삼상 19:18~24)
    성경은 이 험한 세상 속에서도 ‘안전한 곳’ ‘피난처’가 있다고 약속하십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요”하면서 노골적으로 다윗에게 많은 박수를 보냈습니다. 이에 사울왕은 다윗을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사울왕은 다윗을 없애려고 계속 살해위협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왕의 아들이면서 다윗의 친구인 요나단은 사울의 위협으로부터 다윗을 보호했습니다(삼상 19:1-7). 그리고 사울왕의 딸이면서 다윗의 부인인 미갈의 도움을 받아 다윗은 도피생활을 했습니다(삼상 19:8-17). 그러자 이를 알게 된 사울왕은 이번에는 세 차례에 걸쳐 자객을 보내 다윗을 살해하려고 합니다. 그래도 다윗이 죽지 않자 이번에는 직접 사울왕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 다윗이 있는 곳으로 찾아갑니다. 그런데 거기서 해프닝이 벌어집니다. 사울왕은 다윗을 해하려고 다윗이 있는 곳까지 쫓아갔지만 결국에는 자기옷을 벗은 채로 사무엘 앞에서 하루 종일 누워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24절입니다. “그가 또 그의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하루 밤낮을 벗은 몸으로 누웠더라” 사울 왕이 옷을 벗었다는 말은 그가 왕위에서 폐위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 말씀입니다. 아무리 사울 왕이 다윗을 살해하려고 했지만 하나님이 다윗을 지켜주시니까 사울왕의 광기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윗은 손상을 입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질문이 있습니다. 다윗이 어디로 피신하였기에 안전했습니까? 본문 18절입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다윗이 도피하여 라마로 가서 사무엘에게로 나아가서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다 전하였고” 라마가 어디입니까? ‘라마’는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도망간 곳인데, 사무엘의 출생지이며 주거지이고 매장지입니다. ‘라마 나욧’도 같은 단어입니다. 라마와 라마 나욧이란 단어는 본문에서 총 7차례 등장합니다. ‘나욧’이란 ‘처소, ‘거처’를 의미합니다. 라마 나욧은 라마 지역에 있는 처소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사무엘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던 장소입니다. 사무엘 상 7:17입니다. “라마로 돌아왔으니 이는 거기에 자기 집이 있음이라 거기서도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 또 거기에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은 곳, 하나님께 예배하면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 즉 ‘하나님의 품’을 상징하는 곳입니다. 다윗은 도피하면서 이 라마라는 곳을 안식처로 삼았습니다. 피난처로 삼았습니다. 왜요? 하나님이 계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편 46: 1-3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피난처, 힘, 큰 도움 다 비슷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환란이나 어려움을 당했을 때 우리를 절대적으로 보호해주시는 피난처요, 힘 이시요. 그리고 큰 도움이 되십니다. 아무리 인생의 지진이 일어나고, 고난의 해일이 덮쳐도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은 사람은 두려워할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은 세상적인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매우 많습니다. 우리의 상식을 초월합니다. 맞습니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우리의 생각보다 하나님은 정말 위대하시고, 은혜로우시며 저와 여러분을 늘 보호하시는 피난처요, 힘이시며, 환란 중에 만날 큰 도움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단지 우리가 한계 상황을 만날 때마다 전능하신 하나님만 바라보고 그분께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환란 중에 만날 큰 도움이 되어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찾아오는 고통과 시련과 상처와 환난이 저와 여러분을 넘어뜨리려고 수시로 찾아옵니다. 그러나 넘어지지 않고 일어설 수 있는 비결은 바로 ‘한분’을 처음부터 끝까지 바라보는 것입니다. 아무리 인생의 고통과 환란 때문에 내 인생이 고달프다 할지라도 ‘우리주님’만 지속적으로 바라보시면 우리주님은 저와 여러분의 피난처가 되시고, 힘이 되시며, 특별히 환란 중에 만날 큰 도움이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주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어지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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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0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환난이 주는 유익’(롬 5:3-4)
    우리의 삶에는 기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슬픔도 있습니다. 행복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불행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통과 아픔과 눈물을 주신 까닭은 바로 더 큰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고무나무에서 고무액을 받을 때는 나무껍질을 찢어놓는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우리 인생을 더욱 복되게 하시기 위해 우리 마음을 찢어놓으실 때가 있습니다. 즉 고통의 눈물을 흘리게 하실 때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럴 때 우리는 인내해야 하겠습니다. 참는 것은 귀한 축복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기도하며 끝까지 참고 기다리는 신앙자세가 중요한 것입니다. 시 40:1-2에 보면 다윗은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라며 절망적인 상황에서 구원받은 사실을 고백하였습니다. 참되고 올바른 신앙은 고통 중에서도 나의 조급한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기다리는 신앙입니다. 오늘 우리는 인스턴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과 욕구가 지금 당장 만족되어야 하기에 인내하며 기다리지 못합니다. 지금 당장 원한다며 안달을 부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고 가르쳐주십니다. 우리는 인내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영적 지혜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이나 십자가상에서 고뇌가 계속 되었는데도 끝가지 참으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진주를 만들기 위해 아픔과 고통의 과정을 겪는 조개처럼, 우리도 어려움을 참고 견뎌야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축복의 그릇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참 신앙은 고난으로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고난은 우리의 자아를 깨뜨립니다. 그래서 고난이 귀한 것입니다. 우리가 약해지는 것은 고난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달콤하고 수지맞는 일을 통해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스럽고 손해나는 쓰디쓴 고난을 통해서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때때로 쓰디쓴 고난을 주심으로 더 큰 은혜를 받게 하고 더 귀한 그릇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영적 성장을 가져오고, 겸손하게 되며(사 57:15), 연약함과 죄를 깨닫게 되는 유익을 얻게 됩니다(고후 12:9). 고난의 환경은 우리를 만드시는 하나님의 말씀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난을 바라보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환난 중에 기도하면 응답하셔서 환난 중에 내가 너를 건지고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시 91:15)”고 말씀하셨고,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낳고,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롬 5:3-4)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고난만 바라볼 때,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인내로 고난 다음에 올 소망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고난 다음에 주실 은혜와 축복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때문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 덕분에’라고 말할 수 있는 신앙으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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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3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적극적인 순종’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가니라.”(마26:30). 감람산은 올리브 산입니다. 거기에는 겟세마네 동산이 있습니다. 얼마 안 있으면 제자로 택함을 받았던 가룟 유다의 배반과 대제사장들의 하속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러 올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 역시 한 사람도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고 달아날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자들과 함께 습관을 따라 기도드렸던 곳, 척하면 예수님이 계시는 위치를 짐작할 만한 곳, 그러기에 유다가 대제사장의 하속들과 함께 올 수 있는 곳입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있는 힘을 다하여 피하고 싶은 곳이겠지만, 앞으로 벌어질 모든 일들을 미리 아시는 주님께서는 찬미하며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에 올라가십니다. 올라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뜻에 맞지 않아도 아버지의 뜻이기에 찬미하며 올라가십니다. 순종은 적극적인 순종과 소극적인 순종이 있습니다. 찬미는 적극적인 순종을 드러냅니다. 소극적으로 순종하면 시험이 올 때 돌아서기 쉽습니다. 작은 일에도 유혹을 받아 넘어가고 맙니다. 소돔성이 악하여 하나님께서는 소돔을 멸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소돔에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롯을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통하여 소돔성을 멸할 계획을 말씀하시고 그 처와 두 딸이 성 밖으로 나와 산으로 도망할 것을 말합니다. 롯이 산보다 가까운 소알성으로 가겠다고 하자 그것까지 허락하십니다. 순전히 삼촌 아브라함 때문이었습니다. 소돔에 유황불이 쏟아질 때 롯의 처는 성안에서 나와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창19:23-29). 롯의 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은 하였지만 그 말씀을 자기의 말씀으로 받지 못하고 억지로 소극적으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아본 것입니다. 소극적인 순종은 이처럼 실족하기가 쉽습니다. 여로보암이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여로보암은 그가 다윗같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집을 세워주시겠다는 약속을 굳게 믿지 않았습니다. 행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서 마음이 르호보암에게 돌아가 그를 죽이고 그 나라를 다윗왕조에게 돌릴까 봐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세웠던 것입니다(왕상12:29). 이 소식을 멀리서 들은 유다에 사는 선지자는 매우 탄식하였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벧엘에 사는 늙은 선지자를 쓰시지 않으시고, 멀리 유다에 사는 선지자를 벧엘에 보내어 여로보암을 책망하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보내실 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도로 가지도 말라.”(왕상13:9). 이 말씀에 유다에 사는 선지자는 ‘말씀을 받아 전하면 그만이지 왜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고 하셨을까? 왜? 가던 길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실까?’ 하는 의문이 들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가 돌아올 때는 쉬면서 음식도 보충하고 이미 익숙한 길로 오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니 순종하지 않을 수도 없었습니다. 억지로 소극적으로 순종하다가 그만 벧엘에 사는 늙은 선지자의 속임에 넘어가고 만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 속에 오던 길로 다시 가지 말라는 말씀,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는 말씀이 마음에 걸렸는데 자신보다 한참 선배 선지자가 “하나님께서 물과 떡을 주라고 하셨다.”는 말에 그만 마음이 녹아들고 만 것입니다(왕상13:19). 이처럼 순종에 소극적인 자세를 취할 때 마귀는 그 틈을 노립니다. 그리고 넘어뜨리고 맙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을 성경에서뿐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종종 보았습니다. 억지로 순종하는 사람, 마음이 상하여 순종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이 하지 말라고 그랬어.” “아버지께서 보지 말라고 그랬어.” 물론 소극적인 순종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그런데 소극적인 순종 속에는 자신은 하고 싶은데, 하지 말라고 하는 사람에 대한 다소 섭섭한 감정과 원망 섞인 감정이 들어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순종할 내용에 대하여 다소 왜곡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런 순종을 피해야 합니다. 어차피 순종할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찬미하면서 해야 합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내 복음(롬2:16)이라고 말한 것처럼 말씀을 내 말씀으로 받아서 행하여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자에게 성령도 함께 주십니다(행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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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07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복음과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교회’(살전 1:1-10)
    오늘날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을 전파하는데, 그 열정과 수고에 비해 열매가 빈약하다는 사실을 모두가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와 그 일행은 데살로니가 지역에 대략 3주에서 한 달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 거하면서 복음을 전했는데 놀라운 복음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어떻게 이 같은 역사가 일어났을까요? 복음이 단지 말로만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파되었고,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사람 앞에 보이는 외식적인 일이 아니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 이루어진 진실한 일이었습니다.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렘 17:9)의 마음에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이었기에, 이러한 이유로 바울은 지금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아닌 하나님께 감사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의 감사는 근본적으로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덕행과 미덕으로 인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데살로니가 교회에도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적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권면을 받기도 했기 때문입니다(4:1 ; 5:14). 그럼에도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했다는 것은 현상적인 면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 자신과 교회를 지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더욱 큰 소망을 두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그 말씀이 살았기 때문에 반드시 역사하게 될 것입니다(2:13, 히 4:12). 바울 사도는 복음을 전할 때 말과 성령의 능력(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했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힘은 성령의 능력밖에 없습니다. 성령의 강한 능력이 내 안에 더러운 것들, 추한 것들, 냄새나는 것들 쏟아내고 심령을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영적변화를 이루게 합니다. 성령의 능력만이 우리를 강하게 하고, 우리를 은혜의 길로, 축복의 길로 인도해주십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복음의 말씀을 들을 때에 성령의 내주를 체험하였고, 성령의 한량없이 부어주시는 영적 기쁨으로 인해 어떠한 환난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환난을 당할 때마다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는 성령을 바라보며 담대한 마음을 가지며(요 17:22, 33), 성령의 기쁨으로 복음의 말씀을 듣고 고난 중에 하나님을 믿는 일과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려고 애쓰는 순종의 생활을 하십시다. 바울사도와 동역하는 전도자들이 주님을 닮아가는 삶을 산 결과 너무나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의 훌륭한 신앙의 본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진실한 성도들의 말과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복음이 주위에 저절로 퍼져나갔습니다. 또 데살로니가 교인은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소망 역시 오직 재림의 주님이십니다. 이것을 빼놓으면 우리의 신앙은 확신도 없고, 소망도 흐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막연히 수동적인 자세로 재림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고난과 역경 가운데서도 자기의 신앙을 굳게 하며 기쁨으로 환난을 견뎌내는 적극적인 자세로 주님의 날을 예비하여야 하겠습니다. 신앙생활의 승패는 영적 분별력에 달려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여 살아간다면 확신과 함께 온전한 믿음으로 설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능력과 성령의 역사로 참된 교회를 이루어 각 사람의 믿음의 확신과 소망이 분명해지며 사랑이 뜨거워지는 교회를 만들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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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31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목표를 분명히 합시다’(빌 3:12-14)
    무슨 일이든지 목적이나 목표가 확실해야 합니다. 목표가 없거나 목표를 상실하면 그 때부터 방황하며 전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가운데 유혹과 시험에 자주 넘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목표가 없거나 목표가 있어도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향하는 자가 쟁기를 잡고 뒤돌아다보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눅 9:62). 쟁기를 잡은 자가 앞을 보지 않고 뒤를 돌아다보면 밭고랑이 갈지(之)자로 파이지 똑바로 파일 수가 없습니다. 목표를 향해 분명히 견고히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목표를 향하는 사람은 온전히 그 목표를 바라보고, 온전히 달려가야 승리의 인생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였다”(고전 9:26)고 선언하였던 것입니다. 경주자에게 목표가 중요한 이유는 목표가 노력을 크게 증대시키고, 노력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스티븐 코비가 쓴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란 책에 보면 시간관리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관리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오늘날 같이 정신없이 살아가는 이 시대에서는 어느 방향으로 목표를 향해서 뛰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성을 향해 가는 순례자로서 천성이란 이 목표가 희미하거나 확정되지 않는다면, 이 세상 물결에 휩싸이거나 표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조금만 어려움이 와도 우왕좌왕하게 되고, 또한 세상의 화려한 유혹에 빠지게 되어 깊은 은혜의 생활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가나안이라는 인생의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살았기에, 백성들이 늘 비판하고 반대하고 원망하는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이 모든 것들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바울도 자만하지 않고 설정한 목표를 향해 질주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12절)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만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앞으로 달려가되, 계속해서 추구하고 노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단 한 가지 목표를 위해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쫓아갔습니다. 이것이 곧 우리가 취해야 할 목표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삶의 자세입니다.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쫓아간다고 하였습니다.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손을 내뻗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경주하는 사람이 잡념에 시달리거나 얽매이는 장애물이 있으면 달려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의지하여 온전히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기대하지 못했던 새로운 길들도 열리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사 43:18-19). 바울이 달려가는 목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었습니다(14절). 우리의 관심을 세상에 두지 말고 하나님의 부르심의 상을 향해 열심히 달려갑시다. 하나님께서 주실 칭찬과 위로와 영광이 분명히 있음을 확신하며 승리의 삶을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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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16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존귀한 자’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49:20). 인류 역사상 가장 불행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히틀러? 네로? 김일성? 이런 사람들도 당연히 후보 가운데 한 사람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특별히 택함을 받은 제자였지만, 그리스도를 팔아넘김으로 가장 파렴치하고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그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배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다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마26:24). 조선인보다 더 조선을 사랑한 미국인 조선 독립운동가 헐버트(1863-1949)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1886년 그의 나이 23세 때 선교사로 조선에 왔습니다. 헐버트는 여느 선교사처럼 조선에서 고생할 각오를 하고 왔지만, 막상 와보니 조선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열악했습니다. 그는 ‘선교사라면 자신이 선교하는 나라의 지리 역사 문헌 등에 대하여 특별히 공부하고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적극적으로 조선을 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나흘 만에 한글을 깨우쳤습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언어 자질이 남달랐기 때문이라기보다, 익히기 쉬운 한글의 특징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그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훌륭한 글자를 만들 수 있는 민족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부터 조선에 애정을 가지고 조선을 위하여 열정을 불태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훈민정음을 보고 세 가지 면에서 놀랐습니다. 첫째는 매우 과학적인 것에 놀랐고, 둘째는 가장 익히기 쉬우면서도 사용할 수 있는 범위가 매우 넓은 점에서 놀랐고, 셋째는 이런 글자를 국민들이 무시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매우 귀중한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익히고 발전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천시하는 것을 보고 만일 조선이 훈민정음을 중요시 여겼다면 그토록 낙후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가룟유다는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택함을 받은 제자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제자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19:29-30).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주신 약속은 위임 받은 심판의 권세와 영생 상속이었습니다. 계시록에는 열 두 사도에게 주어지는 다음과 같은 상급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성에 성곽은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 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계21:14). 그들은 하나님 나라 성벽의 주춧돌이 되는 영광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가룟유다는 자신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서 그런 영광을 받지 못하고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현 위치가 어떤 상황인지 안다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나의 형편 나의 처지는 존귀한 위치입니다. 우리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 끝날 까지 항상 함께 계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우리는 복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니 때로는 시험들 일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유익하게 하시고 모든 것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실 줄 믿고 감사함으로 주님을 영화롭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한 가룟유다는 결국은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에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장자의 명분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몰라서 야곱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고라는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는 레위 지파에 속한 것에 대하여 귀중함을 모르고 제사장 직분을 탐내다가 결국 망하고 말았습니다(민16:9). 우리가 가진 명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분입니다. 우리가 가진 지위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자신의 자리가 얼마나 존귀한지 깨닫고 더욱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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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10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치료의 하나님’(출 15:22-27)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늘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힘들고 어렵고 낙심되는 일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이때 이 어려운 과정을 어떻게 통과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홍해를 건너 3일 동안 수르 광야를 지나는 동안 마실 물이 없어 큰 고통을 당했습니다. 다행히 마라에 이르러 물을 발견했으나, 그 물이 써서 마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진퇴양난에 처하며 위기를 만났습니다. 애굽의 병사들의 추격을 뿌리치고 홍해를 건넜던 3일 전의 감사와 감격, 기쁨과 찬양은 온데간데없고, 모세를 원망하고 낙심하며 좌절했으며, 백성들의 불평은 극에 달했습니다. 그때에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절실한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25절상). 하나님께서는 쓴 것을 달게도 만드십니다. 이 같은 이적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치료자가 되심을 계시해주셨습니다(26절).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성도의 아픔을 치료하십니다. 깨어지고 불행한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쓴물을 단물로 바꾸는 역사를 나뭇가지가 일으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모세가 믿음으로 그대로 순종했을 때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나 사이에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지 않으면, 그 말씀이 내게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합니다. 우리는 불신의 마음을 떨쳐버리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 굳게 서야 하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며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서,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 은혜와 축복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불신의 마음을 떨쳐버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인생에서 만나는 마라의 쓴물(재물, 건강, 각종 문제들)을 단물로 바꾸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들이니,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 원망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시고 지금도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제일 바라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는 것입니다. 욥은 수많은 고난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감사했습니다. 그럴 때 갑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롬 8:28). 마라의 쓴물을 달게 한 나무는 물가 가까이에 있었듯이, 이 세상 마라의 쓴물 때문에 고생하는 우리 곁에도 성령님이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마라에서 붙든 나뭇가지는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의 생존을 지켜주는 비결이 무엇인지를 다짐하게 합니다. 우리의 인생길에도 힘들고 어려운 마라를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치료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치료의 말씀을 듣기를 기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능력이며, 역사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마라를 지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두신 엘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27절). ‘엘림’이란 오아시스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라’라는 고통과 고난을 잘 이겨내고 통과했을 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출애굽 역사는 하나님께서 하신 놀라운 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 출애굽의 역사가 우리의 삶에서 구현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며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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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04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겸비함’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저가 내 앞에서 겸비함을 인하여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왕상21:29). 동서를 막론하고 하나님께도, 사람에게도, 결코 용서 받을 수 없는 사람으로 보이는 포악한 군주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로마의 네로, 조선의 연산군, 독일의 히틀러,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등입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북왕국 아합이었고, 남왕국의 므낫세였습니다. 아합은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우상을 이스라엘에 들여놓고 아무 거리낌 없이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습니다. 그것을 반대하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자기의 나물 밭으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아합의 삶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저가 그 아내 이세벨에게 충동되었음이라.”(왕상21:25). 곧 아합은 이세벨에게 팔려 살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며, 충동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의 죄악에 대한 결과로 하나님의 종 엘리야는 아합에게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재앙을 네게 내려 너를 쓸어버리되 네게 속한 남자는 이스라엘 가운데 매인 자나 놓인 자를 다 멸할 것이요, 또 네 집으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처럼 되게 하고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처럼 되게 하리니 이는 네가 나의 노를 격동하고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까닭이니라 하셨고”(왕상21:22). 이 말을 들었을 때 아합은 다음과 같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행보도 천천히 한지라.”(왕상21:27).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아합에 대하여 엘리야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저가 내 앞에서 겸비함을 인하여,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왕상22:29). 이러한 말씀을 볼 때, 하나님은 어느 누구든지 회개하고 돌이키면 사해주시는 분이며, 겸비함을 보이는 자는 내리기로 한 재앙까지 돌이키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히틀러같이 악한 자라도 돌이키기만 하면 사해 주시는 분이며, 자기 고모부를 죽이고, 이복형까지 죽인 김정은이라 할지라도 회개하여 합당한 열매를 맺으면 용서해 주시는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에 속아 죄를 지었을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자백하면 긍휼을 베푸시고 사해주시는 주님 앞에 담대히 나가야 할 것입니다(히4:16). 하나님께서는 아합의 겸비함을 들은 것이 아니라 보았습니다. 입으로 겸비를 외친 것이 아니라 직접 겸비한 행동을 한 것입니다. 우리도 겸비를 외치기는 쉽습니다. 겸비함을 좋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직접 겸비를 보여주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겸비함을 보십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함을 보이는 것 가운데 하나는 겸비이기 때문입니다. 아합이 엘리야의 책망을 강하게 들었을 때 성령께서는 아합의 마음을 열어 그 자신의 죄악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가 한 행동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습니다. 선지자들을 죽이고, 나봇을 죽인 일들이 얼마나 끔찍한 죄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내가 이렇게 끔찍한 일들을 저질렀다니, 그까짓 나물이 뭐라고, 나봇의 포도원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원하는 만큼 먹을 수 있는데, 하나님께 충성된 사람 나봇을 나의 사욕을 위하여 죽였구나’ 그야말로 자신이 미웠고 한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며 굵은 베에 누운 것입니다. 너무나 마음이 아파 음식을 먹을 마음도 사라진 것입니다. 옷을 찢는 것은 통회하는 마음, 상한 마음을 의미합니다(사57:15). 신앙인들이 믿음과 착한 양심을 쓰려고 할 때 자신이 착한 양심을 못 쓰는 사람임을 보게 됩니다. 그럴 때 중심에서 통회가 나옵니다. 제가 저를 볼 때 매일 매일 탄식하게 됩니다. 특히 하나님의 영광은 말 뿐이고, 저의 영광을 나타내려 하는 마음이 가득 찬 모습을 볼 때 탄식하게 됩니다. 식탐으로 인하여 탄식하게 됩니다. 게으름으로 인하여 탄식하게 됩니다. 저 실제 모습보다 그 이상 되게 보이려하는 외식하는 모습을 볼 때 탄식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한 후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세마포로 시체를 쌌듯이(눅23:53), 베로 몸을 동인다는 것은 자신을 죽은 자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금식은 식물을 금하는 것을 뜻하는데 영적인 금식은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대로 살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굵은 베에 눕는다는 것은 편안한 생활을 추구하지 않고 고난 받을 각오를 하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말로만 하는 겸손이 아니라, 통회하는 겸손, 죽은 자 곧 십자가 지고 살아가는 겸손, 자신의 기쁨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기쁨만을 추구하는 겸손, 주님을 위하여 고난 받을 각오로 살아가는 겸손, 의복과 삶에 있어서 검소하고 소박한 생활의 겸손을 보이기를 우리 주님께서는 원하십니다. 이러한 겸손을 보일 때 주님은 “아무개가 내 앞에서 겸손함을 보느냐?” 하시며 은혜를 내려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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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5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하나님만 의뢰합시다’(잠 22:19)
    사람의 관계가 사랑의 관계에서 미움의 관계로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항상 한결같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지 못한 것은 만물보다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렘 17:9) 하신 말씀과 같이 사람의 마음이 타락하고 부패하고 교만하고, 악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환경이 아닙니다. 그 어떤 사람도 아닙니다. 그 어떤 사건도 아닙니다. 내 마음의 문제요, 내 믿음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남의 탓, 환경 탓, 무슨 탓으로 돌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들의 어떤 행동도, 환경도 모두 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므로,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보고, 사랑으로 보며, 은혜로 보아야 합니다. 좋은 쪽으로 해석하고, 좋은 결과를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좋으신 하나님이시니 좋은 것으로 주실 것이며,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범사에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뜻’을 깨닫고, 하나님을 인정하면 적대감, 불평불만, 변심들이 살라질 것입니다.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시 37:8)고 하셨습니다. 분을 내고 불평을 하면 이것이 습관이 되어 악한 길에 빠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정로로 가는 것입니다. 분노와 불평을 하다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지 못하고, 도리어 마귀가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불평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도 감사하는 사람은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자신은 어떻게 되든지 하나님만 영광을 받으시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훌륭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삶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그 앞에서 잠잠히 바라는 삶입니다(시 62:5). 사람 앞에서, 환경 앞에서 잠잠한 사람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사람에게 실망하고, 속고, 세월에 속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만 의뢰해야 합니다. 신령한 계시의 정신을 받아 마음눈이 밝아지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그 영광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엡 1:18). 우리는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람은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주고 사랑하시면 됩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단순한 구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냈다는 것은 그때부터 사는 목적이 달라지고, 가치관이 달라지며, 사는 방향도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불러주셨기 때문에 나의 소중한 가치를 깨닫게 되고, 나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미래 지향적인 삶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진리를 주신 목적은 여호와를 믿고 의뢰하게 하는데 있습니다. “여호와를 의뢰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깨닫는 대로 그 결과를 하나님의 손에 맡긴 채, 어떤 어려움과 희생이 따르더라도 그것을 지키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뢰하며 맡기고 나가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화가 변하여 복이 되게 하시며, 그 믿음의 분량대로 채워주십니다. 그리고 그 거룩한 사역을 완수하도록 필요한 지혜와 물질과 건강을 주십니다. 지난 날 우리가 살아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내 힘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일뿐입니다. 지금까지의 체험을 통해 현재와 앞으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은혜로 이끌어주실 것을 확신하며, 하나님께 더욱 의뢰하여 의지하는 삶을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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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19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형편에 따른 치료’
    “창세 이후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요9:32-33). 소경으로 태어나 구걸하며 지내던 사람이 예수님께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시기하던 사람들이 그 사실을 믿지 못하고 ‘예수님이 어디 계시는지’ ‘그가 어떻게 고침을 받았는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예수님이 어디서 왔는지’ 한두 번도 아니고 반복해서 물어왔습니다. 이에 대하여 고침받았던 사람은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 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요9:30-33)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요9:34)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글을 통하여 소경이었던 사람의 말은 상당히 조리 있고 설득력이 있지만, 유대인들은 다소 감정적이고 억압적이며, 전혀 말씀에도 맞지 않는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소경이었던 자가 직업의 종류가 다양하지 않았던 당시 구걸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었지만, 그의 지적 소양과 인격만큼은 다른 사람에게 무시 받을 만큼 천박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년 공생기간 많은 환자의 병을 고치셨습니다. 고침을 받는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장애인들과 불치병 환자들의 병을 고쳐 주셨지만, 세부적인 면에서는 다소 차이가 있었습니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을 마치시고 산에서 내려오시자 한센병 환자 한 사람이 절하며 말하였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그러자 즉시 깨끗해졌습니다(마8:1-4). 반면 누가복음 17장에서 등장하는 열 명의 한센병 환자에 대하여는 그들이 소리 높여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했을 때 손을 대지 아니하시고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눅17:14)고만 하셨습니다. 물론 그들도 다 나았습니다. 이 외에도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에 걸렸을 때, 그것을 직접 꾸짖으셨고(눅4:39), 손 마른 사람에게는 손을 내밀도록 하였습니다(눅6:10). 귀먹고 어눌한 자에게는 예수님의 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고 손에 침을 뱉어 그 혀를 만진 후 “에바다”라고 하시며 고쳐주셨습니다(막7:31-35). 여러 방법 가운데 본문에 등장하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는 과정은 4복음서에 나타난 병 고치는 사역 가운데 가장 많은 과정을 거칩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진흙에 침을 뱉으시고 진흙을 이기셨습니다. 둘째, 그 진흙을 소경의 눈에 바르셨습니다. 셋째,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대로 순종한 소경은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단지 한마디 말씀만 하셔도 무슨 병에 걸렸든지 낫게 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뜻을 모두 헤아릴 수 없지만, 그것은 각 사람의 형편에 따른 치료였을 것입니다. 그 형편은 각 사람 인품의 정도와 믿음의 정도입니다. 이 소경이었던 사람이 바리새인과 같은 유대인 장로들을 상대한 것을 보면 상당히 똑똑하고 야무진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실 믿음에 있어서 야무지고 똑똑한 것은 썩 바람직한 것이 못 됩니다. 오히려 걸림돌이 될 때가 많습니다. 그가 알고 있는 지식들과 논리들이 믿음을 사용하지 못 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소경 되었던 사람도 그가 고침을 받기 전에는 얼마간의 변화 되는 과정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소경이라는 사실과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 있음을 깨달은 후로는 겸손과 약함을 배웠을 것입니다. 그의 본성대로라면 예수님께서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를 때,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이 사람 뭐 하는 거야? 내가 앞을 못 본다고 이렇게 더러운 흙을 내 눈에 발라? 나를 무시해도 보통이 아니구먼.” 예수님께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했을 때는 “바를 때는 언제고, 이제는 씻으라고 하는 거야? 그리고 눈을 씻기 위하여 실로암까지 갈 필요가 있어? 여기서 씻으면 되지. 참 별사람도 다 봤네.”하고 따지고 돌아섰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소경은 한 마디 대꾸하지 않고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그만큼 그가 볼 수 없는 약점을 통하여 온유하고 겸손해진 표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이었던 사람에게 이 세 과정을 통과하게 한 후 고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쓰실 때는 이전 모습대로 쓰시지 않습니다. 새롭게 고치신 후에 쓰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질까지 바꾸는 것은 아닙니다. 모세는 모세의 기질대로, 베드로는 베드로의 기질대로 쓰셨고 바울은 바울의 기질대로 쓰셨습니다.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게 하고 십자가에 처리하신 후 성령의 열매를 바탕으로 일하게 하신 것입니다. 소경의 경우 이전에는 자신을 위하여 이론이 강하고 변론적인 사람일 수 있었지만, 믿은 후에는 하나님이 주신 기질로 예수님을 위하여 유대인들 앞에서도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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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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