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Home >  칼럼 >  WAIC 칼럼
실시간뉴스
실시간 WAIC 칼럼 기사
-
-
[특별 기고] 북한 노동당 당비서에서 목사로 거듭난 복음 역경
- 다음은 지난 4월 7일,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제23회 목사안수식에서 안수자 대표로 인사를 건넨 노희창 목사의 메시지 전문이다. <편집자 주> 존경하는 사단법인 국제독립교회연합안의 목사님들과 함께하시는 모든 참가자 여러분, 그리고 오늘 함께 안수를 받는 동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먼저 이런 귀한자리를 마련해주신 명예회장이신 박조준 목사님, 총회장이신 림택권 목사님, 사무총장이신 임우성 목사님, 그리고 이 자리에 함께해 주신 모든 목사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 귀한 자리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인하며, 북한 복음통일을 준비하는 종으로서 저의 다짐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북한의 ‘정치적 난’으로 치부되었던 장성택사건의 측근으로 낙인되어 해외출장시에 북한을 이탈하여 대한민국으로 망명한 전 북한노동당 중앙당 행정부 대외건설지도국의 당비서 였습니다. 북한에서 노동당은 종교를 탄압하는 최고의 정치기구이며 저는 바로 그 기구에서 일하면서 종교박해와 탄압을 일삼으며 많은 죄를 지은 자 였습니다. 그랬던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오기까지에는 저를 이끄신 주님의 크신 뜻과 크신 노력과 은혜의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매 시대마다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종들을 세우셨고, 오늘 이 시간 저희를 주님의 일꾼으로 세우셨습니다. 이는 단순한 직분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위해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을 각오로 임해야 할 거룩한 부르심입니다. 특히, 우리가 서 있는 이 시대는 하나님께서 한반도의 복음 통일을 위해 일하시는 중요한 시기이며, 북한 땅에 갇힌 수많은 영혼들이 주님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때입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우리에게 주어진 이 소명을 깊이 새깁시다. 이 자리에서 제가 맡은 소명은 북한에로의 복음전파이며 이루어내야 할 결과는 복음통일입니다. 저는 현재 북한선교실천연합 회장으로서 북한선교를 실천함에 있어서 북한선교의 기본을 올바로 이해하고 북한선교에 대한 중심을 올바로 세우고, 북한선교에 대한 방향을 올바로 선택하고 북한선교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북한선교의 중심은 요한복음 8장32절··· 진리를 너희가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의 말씀을 북한에 그대로 알리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반대쪽 땅에서 사는 북한주민들은 세상속의 순리와 진리가 모두 하나님에게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북한 땅과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오직 복음으로 이 민족을 하나 되게 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철저히 기도하며, 말씀으로 무장하며,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저는 오늘 하나님과 동역자들앞에서 다짐합니다. - 어떤 환경에서도 복음의 진리를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 오직 주님의 뜻을 따라 한반도의 영적 회복을 위해 헌신하겠습니다. - 북한과 열방의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며, 복음이 전파되는 그날까지 달려가겠습니다. 이 길이 쉽지 않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 28:20) 하신 주님의 약속을 붙들고, 두려움 없이 나아가겠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저희를 위해 노력해 오신 사단법인 국제독립교회연합안의 모든 목회자분들과 함께 안수를 받는 동역자 여러분, 그리고 기도로 함께하는 모든 참가자분들께 부탁드립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 되어 주님의 뜻을 이루는 길에 끝까지 함께 서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를 세우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올려 드리며,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합니다.
-
- 칼럼
- WAIC 칼럼
-
[특별 기고] 북한 노동당 당비서에서 목사로 거듭난 복음 역경
-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논평] 하미자 목사의 ‘보혈의 능력’(벧전 1:18-19)
- 우리 신앙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은 죽음의 세력을 쥐고 있는 자 곧 마귀를 멸하시고, 한평생 죽음의 공포 때문에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히 2:14-1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져 주시려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바치셨습니다.”(갈 1:4) 그 보혈로 예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의 멍에를 다시는 메지 않도록 믿음으로 굳게 서서 보혈의 능력을 전해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의 지배하에 있던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보배로운 피를 값으로 지불하시고 우리를 죄에서 대속하셨습니다. 예수의 보혈로 말미암은 구원은 영원하며 사람의 영혼육 전 존재를 구원하는 것이기에 더욱 보배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죄에서 자유케 해주셨습니다. ‘구속하다’는 ‘전쟁 포로나 노예를 돈을 주고 사서 다시 해방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보혈, 즉 몸 전체를 대가로 지불하여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5b)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하나님과 사람을 화목하게 해주셨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 2: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셋째, 죄를 깨끗하게 해주셨습니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넷째, 거룩하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히 13: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섯째, 영생을 얻게 해주셨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 6:5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의 피를 마신다는 말은 보혈의 능력을 우리의 마음속에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혈의 능력을 찬송해야 합니다. 구약시대 드린 동물의 피는 부정하게 된 사람의 몸을 의식적으로 정결하게 하였으나 양심을 씻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죄로 인해 더러워진 사람의 양심을 정결하게 하고, 죽은 심령을 살려 살아 계신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였습니다. 주님의 보혈은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죽은 행실에서 떠나 하나님을 섬기게 해주셨습니다. “하물며 영원한 성령을 힘입어 자기 몸을 흠 없는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바쳐진 그리스도의 피야말로, 더욱더 우리들의 양심을 깨끗하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죽은 행실에서 떠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않겠습니까?”(히 9: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린양의 피로써 속죄함을 얻은 그 기쁨을 영원히 찬송해야 합니다. 찬송가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268장)의 가사를 봅니다.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하는 것은 보혈의 능력입니다. 육체의 정욕을 이길 힘도 보혈의 능력입니다. 눈보다 더 희게 맑히는 것은 보혈의 능력입니다. 구주의 복음을 전할 제목도 보혈의 능력입니다. 주의 보혈은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의 보혈을 믿어야 합니다. 스가랴 13장을 보면,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1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샘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죄와 더러움을 씻어준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계획을 실행하시기 위해서 대제사장으로 오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대제사장으로서 단 한 번에 지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의 피로써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히 9:11-12) 주님의 보혈이 아니고서는 그 무엇으로도 죄에서 떠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사람의 죄를 대속하실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이신 것을 믿기 바랍니다. 바울은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여,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이었습니다.(빌 3:10)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고백하였습니다.(갈 6:14)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나를 따라오려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눅 9: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지금까지는 자신이 주인이었으나 이제는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평생 주님을 따라가기 바랍니다.
-
- 칼럼
- WAIC 칼럼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논평] 하미자 목사의 ‘보혈의 능력’(벧전 1:18-19)
-
-
[국제교회논평회 논평] 탄핵 기각으로 이 땅의 민주주의를 증명해야
- 오늘날 대한민국 대통령의 탄핵 여부는 우리나라 국민은 말할 것 없고 전 세계의 관심이 모인 최대 이슈입니다. 탄핵의 기각과 각하, 혹은 인용의 여부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꿀 숨막히는 결정이 될 것입니다. 제 개인적인 견해를 감히 밝히자면, 이번 탄핵이 반드시 기각 내지 각하될 것을 기대합니다. 이는 어느 개인을 지지하거나 지키고자 하는 것이 아닌 이 나라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하는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법의 상식을 기대하는 당연한 바람입니다. 한 가지 더 기대하는 것은 이번 기회를 통해 새롭게 각성한 우리나라가 부정선거 이슈를 완전히 정리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현재 다수의 국민들이 부정선거에 대한 의혹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의혹이 짙어지면 짙어질수록 더욱 감추려는 듯한 그들의 행태는 오히려 국민들의 의심을 증폭시키고 이 나라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먼저 선거관리위원회를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기관으로 재편해야 합니다. 그 어디보다 신뢰와 공정을 담보해야 하는 선관위가 가족회사라는 비아냥을 듣고 있는 것 자체가 우리 대한민국이 처한 불행이자 국민들의 수치입니다. 미개한 나라에서 존재할 이런 일이 어떻게 대한민국에서 가능할까요? 과연 이런 체제 속에서 당선된 국회의원들은 떳떳할 수 있습니까? 의혹 앞에 당당하다면 오히려 감추지 말고 더욱 적극적으로 모든 것을 공개해야 할 것입니다. 선거는 국민들의 대표를 뽑는 국가의 가장 큰 중대사입니다. 국가의 미래와 다음세대의 운명이 선거에 달린 셈입니다. 그렇게 중요한 선거가 굳이 편리만을 추구하는 것이 과연 옳을까요? 좀 더 번거롭더라도, 혹여 고생스럽더라도 한 점 의혹 없는 공명성을 취할 수 있는 길이라면, 결코 마다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논란 많은 사전선거를 없애고, 개표는 선거함을 이동하지 않은 상태에서 수작업으로 해야 합니다. IT산업 선진국인 대만도, 세계 최고 선진국 중 하나인 독일도 수작업으로 하는 것은 전자개표가 편한 것을 몰라서일까요?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요 기본입니다. 그렇기에 이번 탄핵이 기각되면 먼저 이 부분부터 바로 잡아주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만에 하나 탄핵이 인용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는 굳건히 지켜질 것입니다. 그 어떠한 시련과 폭압 속에서도 국민들이 자유민주주의를 갈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유를 달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달라”라고 말한 패트릭 헨리의 절규가 우리의 부르짖음과 같습니다. 지금 광화문을 위시하여 전국 각지에 그 많은 국민들이 모여 우리 대통령을 돌려달라 부르짖고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를 갈망하는 국민들이 스스로 거리로 나와 정의를 외치고 있습니다. 국민의 소리는 하나님의 소리입니다. 우리 민족은 그 심성이 착하나, 불의 앞에 결코 주저하지 않는 뜨거움 가슴을 갖고 있습니다. 3.1운동의 치열한 외침과 4.19혁명의 목숨 건 투쟁은 이 나라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위대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 자랑스러운 역사를 만들어 낸 이들이 바로 우리 대한의 민족입니다. 지금 대한의 민족이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염려하며, 대통령 탄핵 기각을 간절히 부르짖고 있습니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은 “저항할 줄 아는 국민이 있는 나라는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는 말씀으로 자신을 하야케 한 4.19혁명을 오히려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셨습니다. 우리 국민들은 지난 역사 속에서 불의 앞에 단 한 번도 타협하지 않았듯 이제 그 어떤 시련이 밀려와도 더 푸르른 저항으로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지켜낼 것을 믿습니다.
-
- 칼럼
- WAIC 칼럼
-
[국제교회논평회 논평] 탄핵 기각으로 이 땅의 민주주의를 증명해야
-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완전한 구원자 예수’(눅 9:28-36)
- 예수께서는 변화산 사건 직전에 베드로에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신앙고백을 들으셨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가 바로 메시아이신 것을 드러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과 부활을 함께 드러낸 것이지요. 예수께서 우리 각자를 향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실 때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예수님에 대한 개인적인 고백을 해야 합니다. 의심 많던 도마는 마침내 부활하신 예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도마의 고백이 우리 각자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알려주신 수난 예고로 사기가 크게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께서는 영원한 천국의 영광을 미리 보여주심으로써 십자가 수난이 과정이지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렇게 제자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셨습니다. 본문은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무서워하더니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기도하시러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게 되었습니다. 문득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더니 예수님과 말하고 있었습니다. 예수의 영광을 본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짓겠다고 말할 때에 구름이 그들을 뒤덮었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예수께서 변화산상에서 그 모습이 변모된 사건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즉 메시아라는 사실과 장차 수난을 받으실 것과 다시금 주님의 영광을 회복하실 것을 알려주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여기서 모세는 율법을, 엘리야는 예언을 말합니다. 즉 구약의 율법과 예언을 이루는 길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변화산 사건은 예수님은 완전한 구원자이심을 알려주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우주적인 사건입니다. 기도하시던 예수님이 변화되시어 옷이 희어지고 광채가 났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한 것입니다. 기도할 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주님과 함께한 제자들은 그 기도의 능력을 경험한 것이지요. 그때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영적인 눈이 열려 보지 못한 것을 보게 되었고, 귀가 열려 듣지 못한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때의 체험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벧후 1:16-18)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서 별세는 ‘출발, 밖으로 나가다, 어디로 향하는 길’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영어성경에서 별세는 출발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별세는 예수님이 돌아가신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가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죽음을 출애굽으로 보았습니다. 애굽은 하나님 통치 없는 곳으로 하나님 없이 사는 세상을 말합니다. 그래서 출애굽은 죽을 자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구원의 은혜를 절대로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다음날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께서는 귀신들린 아이 아버지의 간청을 들으시고 그 소년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악한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셔서 그 아버지에게 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보고 놀랐습니다.(눅 9:37-43) 구약의 가장 큰 부분이 이스라엘이 기적적으로 구출된 출애굽입니다. 신약은 십자가 사건입니다. 즉 출애굽과 십자가는 하나입니다. 출애굽 사건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죄 용서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사랑을 어떻게 보답할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신 24: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믿기 전 사탄의 종노릇한 것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죄 사함 받은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과 부활을 전하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
- 칼럼
- WAIC 칼럼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완전한 구원자 예수’(눅 9:28-36)
-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김호연 목사의 ‘이 시대의 사무엘들을 찾음’
-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 성경은 그 시대를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던“ 시대라고 기록하고 있다(삼상 3:1). 그 시대는 사사 엘리가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로서 마지막을 보내던 시대였는데, 성경에 의하면 그는 눈이 어두워져 처소에 누워있기를 밥 먹듯 했던 것으로 보인다(삼상 3:2). 그는 육신적으로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분별력을 잃어 가고 있었고, 따라서 자신의 아들들의 비리조차 꾸짖지 못하는 그러한 상태였다. 과연 이러한 시대에 이스라엘의 소망은 무엇이며, 누가 하나님의 뜻을 저들에게 전하여 이 민족을 바로 인도할 것인가?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고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워 있었다”고 했다(삼상 3:3). 하나님은 그런 사무엘을 불렀다(삼상 3:4).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점을 발견한다. 그것은 첫째, 이 민족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이상이 희귀한 시대라도 하나님의 등불이 남아있는 한 소망은 있다. 하나님은 이 민족을 버리지 아니하고 사무엘과 같은 사람들을 통해 이 민족을 각성시키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 둘째, 하나님은 사무엘과 같은 사람들을 예비하여 훈련시키시고 그들을 불러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게 하리라는 사실이다. 사무엘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손에 맡겨져 훈련받은 사사요, 선지자였다. 그는 항상 하나님의 장막, 여호와의 궤 앞에서 잠을 청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늘 하나님과 가까이하기를 힘썼던 것이다. 그는 거기서 무엇을 했겠는가? 말씀의 훈련을 받았을 것이고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종으로서 훈련받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이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 줄 몰랐다. 그는 선생 엘리가 부른 것으로 착각하고 두 차례나 선생에게 가서 “부르셨냐?”고 물었다. 엘리도 얼마나 영안이 어두워졌던지 두 차례나 그것이 하나님의 부름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가서 자라” 했다. 그리고 세번 째서야 비로소 하나님이 그를 부른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부르시거든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하라 했다(삼상 3:9). 비록 노쇠한 엘리였지만 사무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를 이어 하나님의 종으로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데 마지막 소임을 다 한 셈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하나님이 사무엘을 불러 하신 말씀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엘리의 두 아들의 불의함을 보았고 그들을 심판하리라는 말씀이었다. 엘리는 사랑하는 제자 사무엘의 입을 통해 이 말을 다시 듣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미 엘리에게 이 뜻을 전했지만, 그는 아들들에 대한 저주를 자청하면서도 정작 그 자신이 나서 아들들의 비리를 금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삼상 3:13). 부정(父情)에 끌려 아들들을 망친 셈이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가 이와 같이 되지 않았는가? 영안이 어두워져 이상이 희귀한 시대가 되지 않았는지? 인간적 정리(情理)에 휘둘려 스스로의 죄조차 씻어내지 못하고 있는 처지에 빠져 있지 않은지? 최근 일부 모범이 되어야 할 위치에 있는 교계 인사들의 메시지나 행태를 보면서 과연 이 시대가 엘리의 시대와 같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불의한 세력이 나라를 뒤 흔들고 무도한 행위를 서슴지 않는 것을 보면서도 그들은 어째서 비겁하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말씀 뒤에 숨는가? 이 말씀은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할 것을 말한 것이지 네 자신이 심판의 위치에 서라는 말은 아닐 터다. “용서하고 화합하라”는 메시지를 듣기 좋으나 그것을 사단마귀의 세력에까지 확대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을 말씀에 근거하여 영적으로 분별하여 선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무분별하게 섞어 얼버무리는 것은 옳지 않다. 한 때 존경받는 위치에 있던 분들이 이로 인하여 삯군이라는 소리를 듣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다. 현 시국 한국교회는 사무엘의 영성으로 무장돼야 하리라. 그는 이스라엘 민족을 위로하면서도 경고했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고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치 않겠다 했다(삼상 12:20-25). 그래도 박조준 목사님이나 김진홍 목사님 같은 원로들이 계신 것에 감사한다. 전광훈 목사님이나 손현보 목사님 같은 분들이 주동이 되어 교회를 일깨우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함에 감사한다. 주류 신학교 교수들이 좌경화 되어 대통령 탄핵을 외치는 와중에도 학생들이 일어나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함에 감사한다. 한국교회는 쇄신되어야 한다. 나라와 민족을 살리고, 장차 하나님이 이 민족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비전을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 이 시대의 사무엘들을 찾음. 하나님의 부름에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성심으로 응답하는 종들이 더 많아지기를 기도한다.
-
- 칼럼
- WAIC 칼럼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김호연 목사의 ‘이 시대의 사무엘들을 찾음’
-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하미자 목사의 ‘중보기도의 힘’(출 32:11-14)
- 우리나라는 대한민국입니다. 대한(大韓)은 고종이 최초로 호칭하였고, ‘세상을 밝히는 큰 지도자’라는 의미입니다. 대한민국의 호칭은 매우 중요합니다. 2008년 8월 8일부터 24일까지 중국 베이징에서 올림픽이 개최되었습니다. 그때 204개국이 출전했는데, 대한민국은 17번째 들어가는 순서였습니다. 그러나 중국이 한국으로 격하시켜서 179번째로 입장했습니다. 전 세계 사람들이 20위까지만 관심을 두고 본다고 하는데, 대단한 홍보 효과의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세상을 밝히는 큰 지도자의 사명이 있는 자랑스런 나라입니다. 그 대한민국은 지금 위태위태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를 위해 간절히 중보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무엇이든지 우리가 주님의 뜻을 따라 구하면 우리의 청을 들어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일 5:14) 그래서 악한 세력이 떠나 이 땅이 고침 받고 주님께서 다시 대한민국을 번영시켜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출애굽한 모세는 백성의 우상 숭배로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때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주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11-13절)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뜻을 돌이키시어 말씀하신 재앙을 백성에게 내리지 않으셨습니다.(14절) 이처럼 기도는 주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백성이 금 신을 만들어 큰 죄를 범하였을 때도 모세는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1-32)라고 목숨 걸고 기도했습니다. 모세는 기도를 들으시고 인도해주시는 주님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대한민국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굳건하게 서도록 주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창세기 18장을 보면, 주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에 대한 부르짖음을 듣고 그 안에서 사람들이 엄청난 죄를 저지르는 것을 알고 내려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주님께서 하실 일을 알고 주님께 가까이 가서 의인이 악인과 더불어 멸망하는 것은 정의롭지 않다고 아뢰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곳의 실상을 다 아시지만 그들에게 회개하여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을 의지하여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간절히 중보기도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공의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의인 50명만 있으면, 45명, 40명, 30명, 20명, 10명만 있으면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의인 열 명이 없어서 소돔과 고모라는 유황과 불로 멸망했습니다.(창 19:24) 그럼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는 응답 안 된 것일까요? “하나님은, 들에 있는 성들을 멸하실 때에, 아브라함을 기억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롯이 살던 그 성들을 재앙으로 뒤엎으실 때에, 롯을 그 재앙에서 건져 주신 것이다.”(창 19: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생각해서 롯을 재앙에서 건져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보기도의 힘입니다. 에스더 4장을 보면, 에스더는 하만의 음모로 동족인 유다 백성이 멸망하게 되었을 때 모르드개에게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16절)라고 전했습니다. 그렇게 금식하며 기도할 때 주님께서는 유다 사람이 대적들을 진멸하도록 인도해주셨습니다. 금식하면 기도에 더 집중할 수 있습니다. 에스더는 사람의 힘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위기에 직면하자 많은 사람에게 중보기도를 요청하였습니다. 3일 동안 주야로 금식한 것을 볼 때 그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에스더의 고백은 동족을 위해 자신이 죽을지라도 왕 앞에 나가겠다는 결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겠다는 신앙의 결단이지요. 그런 용감한 결단으로 유대 민족 말살정책은 무산되고 오히려 이틀 만에 대적들이 전멸하는 대역전을 경험했습니다. 기도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입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
- 칼럼
- WAIC 칼럼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하미자 목사의 ‘중보기도의 힘’(출 32:11-14)
-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 지금은 사순절입니다. 사순절은 예수께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기억하며, 그 은혜를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사순절은 우리의 무거운 짐을 예수께 내어 맡기고 구속한 주만 바라보는 절기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잠 8:17) 사순절에 주님을 간절히 찾아서 뜨겁게 만나기 바랍니다. 본문을 보면,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계시자이시며, 인간의 연약함을 돕는 중보자이신 것을 알려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려면, 경건 훈련을 해야 합니다. 경건 훈련은 모든 면에 유익합니다.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의 생명을 약속해 주기 때문입니다.(딤전 4:7-8) 경건은 사랑 실천을 전제로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약 1:2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순절 경건 훈련으로 회개, 절제, 기도 순으로 말씀을 살펴봅니다. 회개는 신앙생활의 출발점입니다. 우리는 회개해야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회개는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겠다고 결단하는 행위입니다. 회개하는 날은 새롭게 되는 날, 편히 쉬는 날, 상쾌하게 되는 날입니다.(행 3:19) 우리는 회개를 통해 구원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하는 것은, 회개를 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일로 마음 아파하는 것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고후 7:1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죄인이기에 항상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그것은 심판받을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죄 용서받을 기쁨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더욱 회개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죄를 더 짓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가 생각나는 대로 더욱더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면 우리의 상한 마음을 아물게 해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사 57:15b) 그것이 바로 회개하는 자에게 주시는 놀라운 은혜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열심히 내어 노력하고,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계 3:19) 회개는 오늘 바로 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히 3:7-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된 자유는 성숙한 절제에서 오는 것이지요. 절제하면 낭비하지 않고 목표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절제는 이웃과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면 모든 것에 절제할 수 있습니다. 절제하는 사람은 성령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갈 5:22-23) 사순절에 무엇을 절제해야 할까요? 첫째, 음식 절제입니다. 에스겔 16장을 보면, 소돔성이 멸망한 다섯 가지 이유가 나옵니다. 교만, 음식물의 풍족함, 태평함, 가난한 사람 돕지 않음, 우상 숭배입니다. 음식물의 풍족함은 너무 먹는 것이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과식은 질병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요. 사순절에 음식을 절제하고 영의 양식인 말씀으로 배부른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말의 절제입니다. “말을 조심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지만, 입을 함부로 여는 사람은 자신을 파멸시킨다.”(잠 13: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분노의 말과 부정적인 말을 삼가야 합니다. “속된 잡담을 피하십시오. 그것이 사람을 더욱더 경건하지 아니함에 빠지게 합니다.”(딤후 2: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쓸데없이 지껄이는 잡담은 시간만 낭비할 뿐입니다. 침묵도 중요한 말입니다. 침묵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며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를 맺게 해줍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게 해주는 침묵 훈련을 해보기 바랍니다. 셋째, 시간 절제입니다. “세월을 아끼십시오. 때가 악합니다.”(엡 5: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시며 기도하심으로써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새벽에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 없이 아무 일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열두 제자를 택하실 때도 밤을 새워 기도하셨고, 오병이어로 수많은 무리를 먹이실 때도 먼저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도 저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께서는 쉬지 않고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해 주시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삶의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면, 말씀으로 우리를 고쳐주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끌어내어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시 107:20)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붙잡고 확신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눅 21:3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내 안에 기쁨이 충만하면 기도응답이 된 것을 믿기 바랍니다.(요 16:24)
-
- 칼럼
- WAIC 칼럼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주님의 뜻을 이해하는 삶’ (엡 5:17~21)
-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어리석은’이라는 단어는 매우 좋지 않은 단어입니다. 꼭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는 상태나 어른으로서, 성도로서 반드시 당연히 갖춰야 할 조건들을 갖추지 않았을 경우에 주로 사용하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사전적인 의미로 어리석음은 슬기롭지 못하고 둔한 경우를 말하기도 합니다. 어리석음의 반대는 지혜로움입니다. 사람이 지혜롭게 되는 것은, 그것을 원한다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만 되지는 않습니다.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지혜도, 사랑도, 은사도, 믿음도, 아름다운 소망도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귀한 은혜요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따라, 지혜를 주실 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믿음을 줄 만한 자에게 더 큰 믿음을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달란트를 주실 때도 그 사람의 재능대로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마태복음은 이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마 25:15). 각 사람의 재능에 따라 소유를 맡겨주셨다는 의미 속에는 사람마다 각각 고유한 인격과 역할이 있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인 각각의 인격과 역할을 중요하게 여기시지만, 사람에 따라서 일의 운용방식이나 책임과 인품은 제각각 다를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분이시지만, 받는 사람의 마음과 자세는 사뭇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말씀대로 사람은 결코 어리석은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면 어리석은 결정을 하게 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귀하게 생각하시는 것은 막상 눈이 감기고 귀가 닫혀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며, 자신이 스스로 귀하다고 생각하는 일만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 7:6) 돼지에게 진주를 주어도 그것을 알아볼 수 없는 것처럼, 영혼이 잠자고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귀한 자원이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한, 본문 말씀은 술 취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술 취함은 방탕한 것이라 했습니다. 술은 일반 음식이나 음료와는 달라서 그것을 섭취함으로 끝나지 않고, 다른 어둠의 경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오직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또한, 성도는 서로 화답하며 지내야 합니다. 시와 찬미와 영적인 노래로 서로 이야기하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19절). 교회 안팎에서 성도들이 만나면 주로 어떤 대화를 나눌까요? 사람 이야기, 목사 이야기, 어느 성도 이야기, 사건 이야기 등 다양할 것입니다. 물론 필요한 말을 해야 함이 당연하지만, 기본적이고 근본적으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이야기나, 은혜받은 이야기, 하나님의 전적인 역사하심 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즐거워해야 할 것입니다. 대화를 하면서 서로 간에 영적인 은혜를 누릴 수 있을 만한 주제와 내용이 오가야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계절, 새로운 시절을 맞이하면서 우리에게 주신 삶을 사는 동안, 우리나라와 교회와 각 개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지혜를 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 칼럼
- WAIC 칼럼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주님의 뜻을 이해하는 삶’ (엡 5:17~21)
-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3.1 운동은 아직 미완료다
- 저는 지난 금요일 국회박물관에서 있었던 3.1운동 유네스코 기념 등재 추진위원회에서 주최한 3.1절 기념식에 가서 환영사를 하고 왔습니다. 사실 3.1운동을 유엔 유네스코에 등재하는데 우리 교회가 종잣돈을 만들어 준 것입니다. 절차적 과정이 남아 있지만, 이 일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나이가 먹을수록 3.1운동의 정신과 가치가 얼마나 위대한가를 깨닫게 됩니다. 3.1운동은 상해의 신한청년단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이 우리나라의 애국지사들에게 전이가 되고 동기부여가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서울에서 일어났던 3.1운동은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져갔습니다. 그리고 3.1운동을 전후로 해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수고를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기록이 명확하게 안 되어서 그렇지, 3.1운동의 배후에는 선교사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당시 미국 장로교 선교본부에서는 정교분리원칙을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정치적인 이슈에는 거리를 두면서 순수한 선교활동만 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장에서 일하는 선교사들이 볼 때는 일제의 만행이 너무나 반민주적이고 반휴머니즘적이며 반근대적으로만 보였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자신의 신앙양심과 소신을 갖고 미션스쿨과 교회에서 성경이 말씀하는 진정한 자유와 평화, 박애, 인권, 민주주의를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인과 기독학생들로 하여금 3.1운동을 일으키게 하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기폭제가 되게 한 것입니다. 사실 당시 10대 소녀들은 집에서 밥이나 하고 빨래나 하고 허드렛일이나 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당시 미션스쿨에 다니던 10대 소녀들이 대부분 다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선교사들의 영향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선교사들이 세운 미션스쿨은 기독교 교육뿐만 아니라 서양의 문화와 민주주의를 가르쳤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신앙교육을 받은 유관순이나 윤형숙 열사 같은 여학생들이 거리로 나가 태극기를 흔들며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외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3.1운동은 한국교회와 미션스쿨을 통해서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사실 한국교회가 아니면 3.1운동은 장롱 속 고서가 될 뻔 했습니다. 특별히 스코필드 선교사 같은 경우는 파고다 공원에서 만세를 외치는 사진을 비롯해서 제암리 사건 사진 등을 직접 찍어서 외신기자회견까지 해서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가 다녔던 군산제일고등학교(당시 영명학교) 교장을 하셨던 린튼 선교사님은 군산제일고등학교 학생들이 3.1운동을 주도하였다고 교장에서 잘려서 미국으로 추방을 당했습니다. 그러자 미국 애틀랜타에서 열린 남부지역 평신도대회에 참석하여 3.1운동의 참상을 알리고 우리 조선을 도와야 한다고 미국 전역에 알리고 다녔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미국에 있는 가족, 친지들에게 일제의 만행을 알리는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더구나 소안련 선교사는 3.1운동에 대한 사건을 미국 백악관에까지 보냈습니다. 제가 필라델피아의 장로교 선교 역사박물관에 가서 보니까 그런 편지들이 수두룩 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3.1운동의 정신과 목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민족의 자주독립을 세우는 것이고 이 땅에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인류공영과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비폭력 무저항 정신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됐습니다. 물론 3.1운동은 아직 미완으로 남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우리나라는 여전히 국론이 분열되어 있고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3.1운동을 하고 독립운동을 할 때는 진보와 보수도 없었습니다. 그냥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러시아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분들은 그 차이는 좀 달랐지만, 다 우리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희생한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남북의 분단도 안타깝지만, 지금 우리 대한민국 국민끼리도 이념과 정파, 어떤 주의에 빠져서 대립하는 것을 보면 정말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3.1절을 보내면서 적어도 이 정도는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저는 2018년에 KBS 3·1절 특집 다큐 '이방인과 3·1운동'을 2부작으로 제작하여 방영하기도 하였습니다. 106년 전 3.1운동도 한국교회가 주도하고 이끌어갔다면 오늘날 미완의 3.1운동도 한국교회가 완성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
- 칼럼
- WAIC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3.1 운동은 아직 미완료다
-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신앙의 발견’ (막 10:17~22)
- 본문에 등장한 이 사람은, 본문 후반에 가면 재물이 많은 사람이라고 나오며, 마태복음에는 재물이 많은 ‘청년’으로, 누가복음에는 ‘어떤 관리’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부유하고 안정된 직업을 가진 젊은 사람은 아마도 자신의 신변이 남부러울 만큼 갖춰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안한 마음과 알 수 없는 미래와 당면하고 있는 현실의 한계상황을 느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이미 예수님을 만날 결심을 하고 기회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가장 겸손해 보이는 자세를 취하며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 또한 가장 예수님께서 듣기 좋아하실 것 같아보이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이 젊고 부유한 청년은 하나님과 진정으로 소통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으로 보아 더욱 그러함을 알게 됩니다. 이 젊은 청년의 모습으로 볼 때, 그는 사실 주님과의 깊은 만남이나 하나님 말씀의 본질을 깨닫지도, 실천하지도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본다면 온전하지 못한 성도,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는 있지만, 마음 중심에서 허무함과 허탄함을 갖고 하나님과 긴밀한 대화가 진행되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일반적인 현대 교인의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묵상해보면서, 나 자신은 이러한 사람이었거나, 현재 이러한 삶을 사는 자는 아닌지 무거운 고민을 해보게 됩니다. 이와 같은 고민은 사람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의 말씀과 음성을 통해 더욱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18절 말씀(“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은 얼핏, 예수님조차도 선하지 않은 분인가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는 질문자가 어떤 마음으로 질문했는지에 따른 예수님의 반응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칼뱅(John Calvin)은 18절, 예수님의 답변에 대해 “내가 하나님에게서 온 사실을 너는 인정하지 않으면서, 거짓으로 나를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있구나”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진심에서 나온 표현이 아닐 경우에는 상대방을 괜히 띄워주고 바람잡으려는 역할처럼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언제나 진정한 마음을 갖고 순수하고 진실되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젊은이가 평소 계명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젊은 부자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십계명 중 사람과의 관계에 해당하는 대인(對人) 계명 여섯 가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십계명 중 하나님과의 관계를 강조하는 제1~4계명을 생략한 이유는, 여섯 가지 대인 계명이 제1~4계명의 실천적인 방안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을 제대로, 진정으로 잘 섬기는 사람이라면, 사람을 향한 관계 또한 제대로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역순으로 적용할 할 경우, 즉 가까이 있는 보이는 사람들을 향한 진정한 사랑의 행위를 실천하는 자라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공경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제시한 계명들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는 젊은 부자의 대답(20절,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은 단지 본인의 생각이었을 뿐입니다. 그는 겉보기에는 흠이 없을 정도로 계명을 지킨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 그는 하나님과 사람보다 더 사랑하고 아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그의 신앙적 열심을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말씀을 이어가신 것입니다(21절). 그 젊은 부자가 놓친 것은 자기가 그토록 아끼고 좋아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과는 물론 하나님과도 나눌 수 없었던 것이었고,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주신 주님의 말씀은, 비단 돈을 아까워하지 말고 어려운 자를 도우라는 단편적인 의미만은 아닙니다. 그런 의미보다는, “너가 진정 원하고 바라고 사랑하는 바가 무엇이냐?”라고 물어보시는 의미가 더 강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계명의 중심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인데, 예수님께서는 그에 대한 최종적인 결론으로써 우리 삶의 실천적인 부분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을 터치하시고 점검하신 것입니다. 2천 년 전 젊은 부자에게 말씀하셨던 그 말씀은 오늘 이 시간 우리 각자에게 주신 예수님의 음성인 줄 믿습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 말씀을 진정으로 가장 소중히 여기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
- 칼럼
- WAIC 칼럼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신앙의 발견’ (막 10:17~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