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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독연 기고] 김미혜 사모의 ‘물 위에 떠 있는 방주’
    본고는 지난 5월 23일 국민일보가 주관한 ‘국민미션어워드’에서 제1회 존경받는 원로목회자 대상을 받은 박조준 목사의 수상소감에 대한 김미혜 사모의 감상이다. <편집자 주>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11:1)” 국민일보가 주최하는 ‘국민 미션 어워드 시상식’이 올해로 2회를 맞이하면서 제1회 존경받는 원로 목회자 대상을 박조준 목사님께서 수상하시게 되어 수상소감을 말씀하셨는데 그 짧은 수상소감이 내 마음에 잘 박힌 못과 같이 박혀버렸다. 목사님은 60여년을 목사로 지내시고, 40여년을 목회를 하신 분인지라 원로목사와 담임목사의 관계에 대한 언급하시면서 후임목사에게 짐이 되지 않을 것과 목회 하실 때는 교회에 마음을 쏟으시고, 내려놓고 보니 한국교회가 보이시고 많은 목회자들이 보이신다고 하셨다. 그리고 퇴임식 이후 한 번도 갈보리교회를 가신 적이 없으시며, 도미하셔서 10여년을 그곳 목회자들을 위한 교육에 전념하신 것을 말씀해 주셨다. 나도 곧 대학교수로써 현직에서 물러나야 할 시간이 다가오는데 퇴임 후 어떻게 해야 할지를 가르쳐주신 것 같다. 그리고, 종교개혁은 마틴루터에서 끝난 것이 아니고 지금도 계속되어야한다는 말씀과 함께 한국교회의 문제점들을 정확하게 지적해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이 세상에서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물 위에 떠 있는 방주의 표현으로 명확하고 간결하게 알려주셨다. 영혼의 방주인 교회가 물 위에 떠 있는데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과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명을 다하지 못할 때 그 물이 방주로 침범하여 방주는 가라앉게 되고 말 것이며 그것은 목회자도 결코 예외일수 없음을 아주 강조하셨는데, 그냥 예외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외” 라는 두 글자를 각각 힘주어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당부하시고자 하시는 간절한 마음을 잘 전달해 주신 것 같았다. 상(賞)의 이름처럼 존경받는 원로목회자의 삶 전체를 아우르는 간절함을 보면서 나는 내 노년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도 생각해 보게 되었고, 60여년 목사로 살아오신 삶에서 진하게 베어 나오는 간절함이 보여서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래서 목사님과 인사를 하면서 나는 “물 위에 떠 있는 방주, 잊지않겠습니다” 라고 말씀드렸다.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내지 못하고 내 뜻이 앞서고, 내 생각이 앞서며,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들 때문에 많은 것에 속고 사는 인생은 아닌지 내 삶을 돌아다보며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했던 말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11:1)”을 떠올리며 다시금 내 신앙의 옷깃을 여며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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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24
  • [국독연 칼럼] 강성률 목사의 ‘은혜의 말씀’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고하되,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왕상17:1). 하나님의 말씀이 엘리야를 통하여 아합에게 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어둠이 조금도 없으십니다(요일1:5). 하나님께서 아합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은혜입니다. 은혜가 아니라면 아무런 경고도 없었을 것입니다. 아합에게 이 말을 한 것은 아합이 하나님께 돌아와 회개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합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회개하지 않은 까닭은 첫째, 시돈 여인 이세벨이 끌고 들어온 바알 우상의 영향이었을 것입니다. 바알은 곡물들을 생산하게 한다는 우상으로서, 당시 그를 믿는 사람들은 풍작이나 흉작은 전적으로 그에게 달렸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아합이 엘리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던 것은 되고 안 되고, 번성하고 망하고, 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바알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둘째로 아합은 엘리야를 무시했습니다. 엘리야의 외모는 초라했습니다. 그는 길르앗 사람으로서 므낫세 지파에 속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이었고, 허리에는 가죽 띠를 띠었습니다(왕하1:8). 세례요한은 엘리야의 심령으로 온 사람이었는데 세례요한의 행동에서 엘리야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마3:4). 약대 털옷, 가죽 띠, 메뚜기와 석청이 주는 공통점은 가공되거나 꾸밈이 없이 자연 그대로의 상태입니다. 왕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아합이 보기에는 초라하기 그지없었을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을 소개할 때 누구의 자녀라고 소개하는 것이 습관화 되었는데 엘리야는 그러한 소개마저 없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유력한 가문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아합으로 하여금 엘리야를 무시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아합은 엘리야를 붙들고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 물어야 했습니다. 그러면 엘리야는 분명 모세의 말을 들려주었을 것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삼가라. 두렵건대 마음에 미혹하여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그것에게 절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여 땅으로 소산을 내지 않게 하시므로 너희가 여호와의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속히 멸망할까 하노라.”(신11:16-17).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않게 하는 것은 다른 신을 섬길 때 그렇게 됩니다. 아합은 그들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긴 것을 회개해야만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 기갈은 환경의 기갈을 불러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이 가지고 있어도 타락하지 않을 정도는 주십니다. 그런데 그것마저 빼앗아 갈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인들이 우상을 섬길 때입니다. 신앙인들이 오늘날 보이는 우상을 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전처럼 불상이나 큰 바위 큰 나무를 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보이지 않는 우상입니다. 돈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명예가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권력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자녀가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외에 우리 자신의 마음을 온종일 묶거나 끄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우상입니다(고전12:2).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의 은혜의 비가 멈추게 됩니다. 아합 시대에 가뭄이 들기 전 전조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저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문을 세울 때에 말째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왕상16:34). 이 일이 일어나기 500여 년 전,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여리고 성을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여호수아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로 무리를 경계하여 가로되 이 여리고 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 계자를 잃으리라 하였더라.”(수6:26). 히엘이 여리고를 재건한 것은 여호수아를 통하여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몰라서 그렇게 했을 수 있습니다. 알고도 당시 바알 신이 그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어찌 되었던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한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터를 쌓았을 때 맏아들이 죽었으면 이스라엘의 누군가는 그 사실을 알렸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것을 무시하고 계속 쌓아나갔습니다. 그러다가 말째까지 죽고 만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것입니다. 당시 히엘의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상태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그러한 기근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아모스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면 영적 기갈이 임하고 영적 기갈이 오면 환경의 기갈이 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람의 특징은 여러 가지로 나타납니다. 말씀을 들을 때 졸리거나, 지겹게 느끼거나, 거꾸로 듣는 현상입니다. 거꾸로 듣는다는 것은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자신을 콕 찍어서 이야기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반드시 환경에 기갈이 임합니다. 말씀이 안 들리는 사람은 은혜받을 기회가 적어집니다. 반드시 들리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회개해야 합니다. 영적인 말씀은 영으로라야 들을 수 있습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롬7:21-22). 속 사람이라야 들을 수 있습니다. 평소에 겉 사람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주일에 영적인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은혜가 되는 것은 귀를 즐겁게 하는 말씀, 예화나 세상 이야기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안 들리면 겉 사람 따라 살아간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셔서 용서해주시고 귀를 열어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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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12
  • [국독연 칼럼] 강성률 목사의 ‘성령을 소멸치 말라’
    “성령을 소멸치 말며”(살전5:19). 성령은 영원토록 소멸되지 않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령을 소멸치 말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2:4-5). 촛대를 옮기는 것은 예수님께서 촛대에 기름을 부어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기름을 부어주지 않는다면 촛불은 꺼지고 말 것입니다. 기름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이 소멸 되는 것은 처음 사랑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소멸치 않으려면 어디서 떨어진 것을 찾아 그것을 회개하고 처음 행위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촛대를 옮깁니다. 성령이 교회에서나 사람에게서 떠나고 맙니다. 성령을 소멸치 않으려면 어떻게 받았는지 어떻게 들었는지 더듬어 찾아 회복해야 합니다(계3:3). 주일성수, 예배, 말씀을 읽고 기도생활, 주님께 드리는 일, 이웃 간의 문제를 다시 점검해봐야 합니다. 첫 사랑 때 어떻게 믿어 섬겼는지 생각하고 행하면 성령의 불이 다시 타오르기 시작합니다. 두 번째는 성령으로 시작된 말씀을 끝까지 지키라는 뜻입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3:3).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복음의 터를 잘 닦아 두었습니다. 그 터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 개종자들 가운데는 믿음으로 구원 받는 말씀에 대하여 깊이 있는 이해가 부족하였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갈라디아를 떠난 후에 율법을 행하고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는다고 전하여 이방인 기독교인들까지 혼미케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미혹된 사람들에게 성령으로 시작 된 말씀을 끝까지 지키라고 합니다. 다음은 안병모 목사님의 부인 정귀남 사모님(1997년 소천)의 간증을 요약한 내용입니다. 한 때 하나님의 은혜로 세상을 초월하는 사람같이 살았습니다. 0시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는데 전혀 피곤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는지 몰랐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열심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한번은 잠자는 가운데 주님께서 로마서 “1장 29절” 하시더랍니다. 깜짝 놀라서 그곳을 펴서 읽었습니다. 읽어보니 자신과 상관없는 말씀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세어 보니까 죄가 21가지나 되었습니다. ‘누구더러 하시는 말씀일까?’ ‘왜 나에게 읽어 보라고 하셨을까?’ ‘나는 아니겠지.’ 하며 그날은 그냥 잤습니다. 하지만 그 말씀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나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아.’ ‘나는 얼마나 열심을 내는 사람인데 이 말씀이 나하고 상관되는 말이야?’ 그러나 그 말씀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서 평소에 자주 들렀던 계명산 수녀원에 갔습니다. 그리고 기도드렸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꽝”하고 포탄 소리가 났습니다. 보통 큰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깜짝 놀라서 “어떤 빌어먹을 XX가 여기에 포탄을 터뜨려?”했습니다. 그리고 창문을 열고 보니 차가 오다가 자신이 머무는 기도실 굴뚝과 부딪혀서 그렇게 난 소리였습니다. 이때가 1970년도에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순간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보여주셨습니다. ‘아차, 내가 욕을 하다니, 내 속에 안 믿던 모든 성질이 가득 들어 있구나. 그래서 욕이 저절로 나오는구나. 참 나쁘다. 남은 다쳐서 죽을지 살지 알지 모르는 지경인데 그 소리에 놀랐다고 죽일 것처럼 욕을 해?’ 물론 밖으로 욕을 한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욕을 한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거봐라 너 악하지 않느냐?’ 그 후로 매일 매일 악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말씀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고 예수님의 보혈이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임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깨닫게 해주셨던 것은 처음 자신과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말씀을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소멸시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양심에 합당하고 성경에 합당한 말씀이면 성령의 음성입니다. 그 말씀을 무시해버리면 안 됩니다. 세 번째는 받았던 은사를 그냥 두지 말고 불일 듯 일으키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 일 듯하게 하려고 너로 생각하게 하노라.”(딤후1:6). 받은 은사일지라도 사용하지 않으면 꺼지고 맙니다. 사용할지라도 자신의 영광을 도모한다면 역시 꺼져버리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신앙인들에게 주신 은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성도들을 위하라고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지 아니하고 성도를 위하지 않으면 그것은 마치 금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땅 속에 은사를 파묻어 둔 것과 같습니다. 불 일 듯 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은사를 하나님과 성도 섬기는 일에 사용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처럼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시39:3). 마지막으로 받은 바 말씀을 잘 간직해야 합니다.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딤전4:14). 말씀을 간직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을 소멸하면 어떻게 됩니까? 히6:6 이하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타락한 성도가 되고 맙니다. 이런 자는 타락했어도 자신이 타락하였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떤 죄라 할지라도 회개하면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사함을 받지 못할 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구가 탄생 된 이래로 가장 값지고 좋은 선물은 진주와 보석 같은 선물이 아닙니다. 온 천하를 다 소유한들 주님을 잃는다면 모든 것을 잃은 것과 같습니다. 죽은 자에게 온 천하는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선물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임마누엘 하나님이십니다.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마28:20).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고맙고 감사함으로 끝까지 섬기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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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05
  • [국독연 설교] 장금오 목사의 ‘주인에게 맡기는 삶이란’(삼상 23:1-5)
    1 사람들이 다윗에게 전하여 이르되 보소서 블레셋 사람이 그일라를 쳐서 그 타작 마당을 탈취 하더이다 하니 2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들을 치리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하시니 3 다윗의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치는 일이리이까 한지라 4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 5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크게 쳐서 죽이고 그들의 가축을 끌어 오니라 다윗이 이와 같이 그일라 주민을 구원하니라 우리가 만약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으로 전문 관광안내자 없이 자유여행을 가게 된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뭘까요?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먼저 여행자 안내소를 찾아 가든지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여행 할 지역에 대해서 알아보고 물어 보는 것이 우선순위 일 겁니다. 그것이 바로 가장 안전하고, 쉽고, 빠르게 여행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죠. 그렇지 않고 혼자의 생각으로 길을 찾아서 여행을 다닌다고 생각하면 동행자들이 보기에 얼마나 답답하고 불안할까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지역에 오랫동안 살아서 그 지역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이든지, 전문적인 관광 가이드의 안내를 받는 것이라 할 수가 있겠습니다. 전문가의 안내를 받게 될 때, 우리는 안전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시간과 힘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면서 여행을 즐길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인생에서 우리가 길을 찾아야 할 때 가장 안전하고, 쉽고, 빠른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오늘의 말씀에 등장하고 있는 다윗과 같이 주님께 여쭤보는 것입니다. 온 우주에서 가장 뛰어난 전문가이시며, 완벽한 인생의 가이드가 되시는 하나님께 조목조목 여쭤보면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 동안 다윗은 양떼들을 지키면서 훈련된 목동으로 여러 가지 위험한 환경 속에서 자기 자신의 지혜와 방법으로 그 모든 것을 극복해 보려고 노력하였지만 때로는 지혜롭게 양떼들을 공격하는 맹수들로부터 양떼들을 보호하기도 했고 양떼들을 잃을 때도 있었을 겁니다. 결국 사울에게 쫓기면서도 반복되는 인생의 절망에 처하게 되었던 다윗의 삶은 비로소 아둘람 굴에서 완전히 새로운 걸음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무엘기상 23장의 말씀을 통해서, 다윗이 그일라 처서 타작마당을 탈취한 블레셋 사람을 보고 의분함을 금치 못하고 다윗의 주인 되신 주님께 블레셋 사람들을 치리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즉시 응답을 하시며 블레셋사람들을 치고 그일라를 구하라고 하셨을 때 즉시 하나님께 순종하여 블레셋 사람들을 다위에 손에 붙이시겠다는 응답을 듣게 되는 다윗의 모습을 보며 어떤 도전을 받으셨나요? 하나님께 합한 자로서 여쭙고 가는 길이 얼마다 복된 길인지 그때 그때 하나님께 묻고 웅답받는 방법을 살펴볼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의 삶이 어떻게 변하게 되었는지 살펴볼 것입니다. 외적인 환경을 볼 때, 다윗의 삶에서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습니다. 사울 왕은 여전히 그의 생명을 찾아다녔고, 다윗은 여전히 죽음과 한 걸음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다윗처럼 하나님께 묻고 기도하는 방법 1) 다윗은 모든 일의 시작과 결정하기 전에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왜 이런 기도를 해야 하는가? 블레셋사람들을 치는 것이 옳은 일인가? 하나님의 뜻인가? 나의 명예를 위한 나의 욕심 때문인지? 선택하기 전에 만일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 아닌 일을 했다면 하나님의 뜻을 끝까지 물어야 합니다. 매사에 주님께서 응답하시기 전에는 하나님의 뜻을 확실히 하고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진로, 취업, 직장을 구하는 것까지 섬세하게 묻고 응답을 받을 때는 어려움이나 힘든 일이 닥친다 해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믿음과 능력을 공급받게 되고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책임지시고 인도해 주신다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2)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3) 결정권이나 계획까지 모두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 어떻게 할까요? 그리하면 모든 환경과 조성을 사람을 통해서 응답하십니다. 혹시라도 내 뜻을 하나님께 반영하였는가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4) 모든 위기 속에서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구할 때 말씀으로 응답하십니다. 다윗은 모든 환경 속에서 오직 주님께 마음의 초점을 고정할 때 다윗에게 임하는 응답의 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처럼 삶의 주인되신 하나님께 모든 일을 묻고 맡기고 나아가는 승리의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한편, 장금오 목사는 아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을 전공하고 최근 국제독립교회연합회(총회장 정인찬 목사, 설립자 박조준 목사, 사무총장 임우성 목사)의 제19회 목사안수식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높은뜻숭의교회, 높은뜻광성교회 등에서 스리랑카 및 영어권 이주민 사역팀장을 역임했고, 현재는 양주진리교회(담임 채하경 목사)에서 캄보디아 이주민 전문 사역자로 시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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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7
  • [국독연 칼럼] 강성률 목사의 ‘무엇을 회복하기 원하는가?’
    “유다 왕 아사 제 이십 칠년에 시므리가 디르사에서 칠일 동안 왕이 되니라. 때에 백성들이 블레셋 사람에게 속한 깁브돈을 향하여 진을 치고 있더니”(왕상16:15). 우리는 남왕국 유다는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할 때까지 350여 년간 한 왕조로 이어지지만,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멸망할 때까지 200여 년간 9왕조가 쿠데타에 의하여 바뀌는 것을 보게 됩니다. 새 왕조가 들어설 때마다 그들 나름대로 부국강병을 모색하지만, 대부분 4대를 더 채우지 못하고 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선왕의 잘못을 간파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시므리는 바아사 왕의 아들 엘라를 모반하고 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그 사실을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상태에서 계속 블레셋에 속한 깁브돈을 빼앗기 위하여 싸우고 있었습니다. 깁브돈은 본래 단 지파에 속한 도피성이었습니다(수19:44, 21:23). 그런데 블레셋에게 빼앗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셨을지라도 지키지 못하면 빼앗기고 맙니다. 하지만 그곳이 전략적인 요충지였기 때문에 새 왕조가 들어서면 왕들은 그것을 되찾기 위하여 애썼습니다. 그들은 이처럼 전략적 요충지를 되찾기 위하여 싸웠지만, 하나님께 등불을 돌려받기 위하여 마음 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한 등불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왕상11:36, 왕하8:19). 등불은 생명의 연속성을 의미하며, 형통을 의미합니다(잠21:4). 하나님께서는 북왕국의 시조 여로보암에게도 그가 만일 다윗처럼 행하기만 하면 그 가족을 세워주실 것을 약속하셨지만(왕상11:38), 여로보암이 죄악을 행함으로 등불은 바아사 왕조로 옮겨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여로보암과 그의 후손에게 기름을 부어주실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등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윗이 어떻게 행하였는지 살펴서 그것을 유지해 나가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몽둥이가 되어 여로보암을 친 바아사 역시 다시는 여로보암처럼 행하지 않기로 뜻을 정하고, 그 뜻을 위하여 애를 써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관심도 이전 악한 왕들처럼 전략적 요충지만 찾으려 애썼지, 하나님의 등불을 유지하려 힘쓰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 아들 엘라시대에 시므리에 의하여 왕조가 무너지고 맙니다(왕상16:10). 촛대를 옮기는 것은 그야말로 비극입니다. 하나님의 생명, 영광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찾으면 다른 것도 회복이 됩니다. 다윗 시대에 여호와의 등불이 활활 타올랐습니다. 그러자 그 나라의 영토가 확장되었고 군인이 130만이나 되었습니다(삼하24:9). 후손들 가운데 선한 왕도 있었지만 대부분 악한 왕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시겠다는 등불 약속 때문에 그 왕조가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신앙인들이 보이는 것에만 관심을 둔다면 결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며, 오히려 더욱 깊은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요사이 북한이 핵무기를 만들고 이제 7차 핵실험을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들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핵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것도 방법의 하나이겠지만, 신앙인들은 더욱더 영적인 것에 마음을 써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등불이 한국에 머물도록, 옮기지 아니하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등불이 머물도록 하겠습니까? 촛대를 옮기지 아니하도록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소아시아지역의 일곱 교회 가운데 에베소 교회에 책망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2:4-5) 위의 말씀처럼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초대교회시절 조선을 뜨겁게 달구었던 회개 운동이 다시 한번 일어나야 합니다. 한국교회적으로, 각 교회적으로, 개인적으로 어디서부터 타락했는지 찾아서 회개해야 합니다.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주일 지키는 정신부터 회복되어야 합니다. 다음은 대한 예수교 장로교 헌법 제 7항 예배모범편 1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제 1장 주일을 거룩히 지킬 것 1. 주일을 기념하는 것은 사람의 당연한 의무이니 미리 육신의 모든 사업을 정돈하고 속히 준비하여 성경에 가르친대로 그 날을 거룩함에 구애가 없게 하라. 2. 이 날은 주일인즉 종일토록 거룩히 지킬지니 공동 회집으로나 개체로 예배하는 일에 씀이 옳으며, 종일토록 거룩히 안식하고 위급한 일 밖에 모든 사무와 육신적 쾌락의 일을 폐할지니, 세상 염려와 속된 말도 금함이 옳다. 3. 먹을 것까지라도 미리 준비하고 이날에는 가족이나 집안 사환으로 공동 예배하는 일과 주일을 거룩히 함에 구애가 되지 않도록 함이 옳다. 4. 주일 아침에는 개인으로나 혹 권속으로 자기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되 특히 저희 목사가 그 봉직하는 가운데서 복 받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하며 묵상함으로 공동 예배에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을 준비하라. 5. 개회 때부터 일심 단합함으로 예배 전부에 참여하기 위하여 정한 시간에 일제히 회집함이 옳고 마지막 축복 기도할 때까지 특별히 연고 없이는 출입함이 옳지 않다. 6 이와 같이 엄숙한 태도로 공식 예배를 마친 후에는 이날 남은 시간은 기도하며 영적 수양서를 읽되 특별히 성경을 공부하며 묵상하며 성경 문답을 교수하며 종교상 담화하며 시편과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를 것이요, 병자를 방문하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며 무식한 자를 가르치며 불신자에게 전도하며 경건하고 사랑하며 은혜로운 일을 해함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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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3
  • [국독연 칼럼] 임현주 목사의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창 39:2) 형통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형통한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원하는 일이, 내 마음의 소원이 이루어지길 원합니다. 그것이 형통이라 생각 합니다. 집에서 직장에서 세상에서 형통을 이루기 위한 온갖 수고를 쉬지 않습니다. 쉽지 않습니다. 무엇이 형통일까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요셉이 형통한 자가 되었다’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우리들에게 형통은 여호와께서 함께하심입니다. 팔려온 요셉이 살게 된 곳은 이집트 사람의 집입니다. 네, 열 명이나 되는 형들이 아버지를 속이고 요셉을 상인들에게 팔아 넘깁니다. 순식간에 노예가 됩니다. 시위 대장 이집트 사람 보디발을 주인으로 밤낮 섬기게 됩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게 될까요 평생을 노예로 살다 죽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을 겪고 있는 요셉에게서의 형통은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놓여나는 것입니다. 밤이나 낮이나 어떤 기도를 할까요? 하루속히 형들에게 속고 있는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노예가 될 사람이 아닙니다. 가족이 아버지가 집이 있는 멀쩡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습니다. 노예가 된 요셉의 이런 기도는 응답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형통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함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잘됨이 못됨이 형통이 아닙니다. 이런 요셉의 상황은 우리가 생각하는 형통과 거리가 먼 일입니다. 요셉이 주인공이 아닙니다.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이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창 39:23) 이 노예청년 요셉이 계속 형통하여 일어난 다음 일입니다. 이번에는 감옥에 갇힙니다. 주인마님을 성희롱한 죄입니다. 적반하장입니다. 오히려 유혹하는 마님을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겠으며 하나님께 득죄할 수는 없다’며 단연코 거절한 요셉입니다. 억울하고 억울합니다. 누구하나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하나 나는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나서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나의 결백을 들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하늘만 땅만 알겠습니다.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한 요셉은 밤낮없이 또 무엇을 기도하겠습니까? 억울함이 밝혀지기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시고 아신다면 반드시 이 누명은 밝혀 주어야합니다. 이 감옥에서 풀려 나가야 형통입니다. 그래야 형통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잘되고 저것이 잘되는 형통을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넘어지지 않고 잘 달려 원하는 목표를 성취하는 것을 형통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처음부터 언제나 이미 형통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인공입니다. 그래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일이 내 삶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모든 억울함이 풀려 감옥에서 나간들 요셉은 여전히 노예입니다. 보디발을 섬기며 변함없이 전과 같은 종의 생활을 계속해야 합니다. 요셉의 형통은 아닙니다.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형통은 이 요셉을 어느 날 때가 되었을 때 왕 앞에 세우는 것입니다. 왕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왕에게로 인도할 사람을 요셉이 있는 곳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주님의 나라, 주님의 백성들을 먹여 살리고 번성케 하고, 지키기 위한 하나님의 형통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형통입니다 여호와께서 함께하심이 형통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오늘 이 하나님의 영을 받고도 여전히 다른 형통을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언제가 되어야 여기저기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서 구하던 형통이 멈추어질까요 인정해주고 마음을 채워주고 나를 세워 줄 세상을 여전히 구하고 다니기에 오늘도 분주한 우리들입니다. 이미 함께하고 계신 그에게 무릎 꿇음이 먼저입니다 그래서 여전한 하나님의 형통을 보게 되길 기도합니다. <항상기쁜교회는 현재 서울 강서구 개화동에서 예배를 드리며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유튜브에서 ‘항상기쁜교회’로 검색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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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15
  • [국독연 칼럼] 강성률 목사의 ‘자기를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다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 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마23:29-3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을 선지자와 의인들을 죽인 조상들보다 의로운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 자신이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마귀가 들어갑니다. 욥에게 사탄이 들어가서 그의 재산을 다 잃게 하고, 자녀를 모두 잃게 하였으며, 욥 자신에게는 온 몸에 악창이 나게 하였습니다. 사탄이 욥에게 들어왔던 이유는 그가 자신을 너무 옳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욥32:1). 서기관과 바리새인도 분명히 마귀가 들어간 사람들입니다(눅18:9).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이려 한 것입니다. 왜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할 때 마귀가 들어갈까요? 영적인 원리가 이렇습니다. 마귀가 하나님께 욥을 참소했듯이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사람에 대하여 하나님께 아룁니다. “하나님 아무개가 자신을 옳다고 여기는데 그 사람이 진짜 옳은 사람인지 틀린 사람인지 한 번 시험해보겠습니다.” 합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마귀를 허락하셨듯이 그 사람에게 마귀를 허락하십니다. 한 번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의 하속들이 그들에게로 왔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어찌하여 예수님을 잡아오지 않았는지 물었습니다. 하속들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요7:45-46). 자신을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지 않은 하속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스스로 의롭다고 믿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보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하속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도 미혹 되었느냐?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요7:47-49). 당국자들은 관원들을 뜻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왜 잘못 된 것인지는 말하지 않고 단지 “유대 지도층이 믿지 않는 것만 봐도 잘 못되었다는 뜻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유대 지도층에 속한 자신들의 분별력은 평민들의 분별력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하는 오만함이 깔려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이 배우고, 지위가 높으면 스스로 분별력도 좋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바리새인들 가운데는 간혹 정신이 바로 박힌 사람도 있었습니다. 니고데모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 그러자 다른 바리새인들이 말합니다.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하여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요7:51-52). 같은 바리새인 니고데모는 그래도 사람의 말을 듣고 행한 것을 알고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하속들에게 말한 것 ‘관원들과 바리새인들 가운데 믿는 이가 있느냐?’의 부정이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지역 탓합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사람이기 때문에 메시아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사셨지만 태어난 곳은 유대 땅 베들레헴이었으며, 예수님께서 사신 곳 갈릴리 역시 선지자가 나지 못하는 곳이 아니라 요나 같은 선지자는 갈릴리 가드헤벨 출신이며, 호세아, 나훔, 아모스, 엘리야, 엘리사 등도 갈릴리 출신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왕하14:25). 그들의 큰 소리는 사실에 기반을 두지 않고 지역감정에 기반을 두고 있었습니다. 선지자와 의인을 죽인 조상들보다 자신들이 의롭다고 생각한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한 후 총독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사형시켜달라고 청구하였으며, 그 외에도 사도들과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습니다(마23:34-36). 이처럼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것은 영적인 암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것이 교만이며, 교만한 자에게 사탄이 들어가며, 사탄은 하나님의 대적입니다(벧전5:5). 모든 일에서 “하나님은 옳으시다.”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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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13
  • [국독연 칼럼] 임현주 목사의 ‘와서 아침을 먹으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것을 알았기 때문에 당신은 누구십니까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요21:12)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났습니다. 무조건 뛰어야 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겨우 몸을 피할 수 있었지만 선생님은 잡혀서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모든 재판 과정을 몰래 따라다니며 숨죽여 보았습니다. 우리 선생님이 법정 최고형, 1급 사형수들이 받는 십자가형을 선고받아 나무에 못 박혀 높이 매달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시체가 무덤 속으로 넣어지는 것도 보았습니다. 이 모든 일이 한 순간에 끝나버렸습니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가실 수는 없습니다. 물 위를 걸었던 분입니다. 폭풍을 꾸짖던 분입니다. 죽은 사람도 살려낸 분입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로마제국으로부터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예루살렘 입성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드디어 우리 왕이 왔습니다 수많은 군중들이 앞에서 뒤에서 따르며 환호했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막11:7~10) 우리는 그 환호성의 한가운데에 있었습니다. 나라를 되찾는데, 내 집이, 내 하는 일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모든 것을 다 던질 수 있었습니다. 가는 곳곳마다 나아와 호소하는 이들의 문제를 해결해 준 선생님입니다. 그러나 그 선생님의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날아갔습니다. 우리는 무섭고 두려워 그 밤에 다 도망쳤습니다. 두르고 있던 겉옷도 버리고 알몸으로 도망쳤습니다(막14:51,52) 모든 것이 다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그가 지금은 다시 우리들을 바닷가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처음으로 우리를 불렀던 곳입니다. 허기진 우리들을 위해 숯불을 피우고 생선과 떡을 준비합니다. 그런 줄 알고 따랐던 그 선생님이 그 선지자가 아닙니다. 창세 이후 사람이 무덤에서 살아나올 수는 없습니다. 그를 하나같이 버렸던 우리를 다시 찾아 올 수는 없습니다 그의 죽음 앞에서 그를 ‘모른다‘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던 우리들입니다. 그가 재판받을 때, 악한 일을 도무지 한 적 없는 분임을 증명해 줄 증인들이 우리였음에도, 나서지 못한 우리들입니다. 홀로 죽음의 길을 가게 한 그 분입니다. 그러나 지난 3년 동안 같이 먹고 자면서, 한 사람 한 사람 우리 발을 손수 닦아주신 그 분이 맞습니다. 이 바닷가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지금 눈앞에 서 계십니다. 처음에 무덤을 찾아갔던 마리아가 그가 살아계심을 보았다고 했을 때 도무지 믿지 않았습니다(막16:11) 엠마오시골로 다시 돌아가던 두 제자도 자신들에게 나타나셨다고 말하였을 때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눅24:13~35) 그러고 보니 살아생전 몇 차례나 이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막9:31) 왜 말씀하신 그대로의 일이 일어나도 그 때나 지금이나 믿을 수 없을까요? 지금도 사실 새까맣게 모르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몇 차례나 우리의 믿음 없음을,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살아난 후에 우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겠다(막14:28,16:7), 여기서 만나자 하신 곳, 이 곳입니다. 왜 다시 이런 우리를 찾아 오셨을까요. 그 선생님, 우리들의 주 앞에 다시 섰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사람들 앞에서 왜 모른다 했는지, 왜 저주까지 했는지, 왜 버리고 도망했는지,그것부터 먼져 따져 묻겠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도 서운한 기색, 실망한 기색이 없습니다. 야단할 기색이 아닙니다. 다만 숯불을 피워 아침을 준비 했습니다. 역시나 밤을 새워 일하고도 물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만남을 준비 했습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다시 주 예수님과 함께 먹는 아침입니다. 그러나 전처럼 신나게 웃고 떠들고 할 수 없습니다. 도대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행동 할 수 없습니다. 귀신도 쫓아내며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도 행한 우리였지만(마10:1), 선생님의 십자가형 죽음 앞에서는 모두 도망쳤던 우리입니다. 어떤 얼굴을 해야 합니까? 이럴 줄은 몰랐습니다. 차라리 왜 그랬냐, 왜 못 깨닫느냐, 또 다시 야단이라도 맞고 싶은데 이젠 눈도 마주칠 수 없습니다. 무어라 말씀하실지 귀만 기울 일 뿐입니다. 다시 살아나신 그 분 앞에서 더 이상 감출 것도 숨을 곳도 없습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아침 먹을 시간이라도 주어진 것이. 먹으며 생각을 해 보아야겠습니다. 입으로 떡은 생선은 들어가지만 도무지 생각이 멈추었습니다. 지난 3년이, 처음부터가 내 생각이었습니다. 끝이 내 생각이었습니다. 그것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내 생각대로가 아니었습니다. 내 눈앞에서 일어날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분만 우리의 생각들에 개의치 않고 하실 일을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하고 있습니다. 이제야 내 생각을 멈춥니다. 분주한 나를 멈춥니다. 내 안의 모든 시끄러움과 다툼이, 모든 의문, 모든 억울함, 울음과 두려움이 멈춥니다. 오직 그 분 앞입니다. 온 세상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앞입니다. 그는 이렇게 다시 살아나 있습니다 우리 앞에 이렇게 있습니다 다 먹은 후에 드디어 베드로에게 말씀 하십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다만 사랑을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21:15~17) 사랑이 아닌 그 모든 것은 십자가 죽음 앞에서 남김없이 모조리 도망쳐야 하는 것임을. . . 죽음을 넘은 사랑으로만 세워 가는 주님! 오직 사랑이길 원하는, 사랑이신 주님! <항상기쁜교회는 현재 서울 강서구 개화동에서 예배를 드리며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유튜브에서 ‘항상기쁜교회’로 검색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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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03
  • [국독연 칼럼] 강성률 목사의 ‘사랑을 깨닫는 날부터’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 도다.”(골1:6). 얼마 전에 제가 사는 빌라 3층과 2층 사이 계단에 반려견 한 마리가 묶인 채로 있었습니다. 아랫집 청년이 그 옆에 앉아 지키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왜 강아지가 그곳에 있는지 몰랐습니다. 11세대 가운데 그런 강아지를 기르는 집은 없었습니다. 분명 누군가 그곳에 버리고 간 것으로 보였습니다. 강아지는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그를 만지는 사람들에게 몸을 맡기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버려진 상태가 아니고 분명 주인이 자신을 데리러 올 줄 굳게 믿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모습으로 보아 주인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강아지로 보였습니다. ‘이런 강아지를 누가 왜 버렸을까?’ 의문이 들었는데 다음 날에야 풀렸습니다. CCTV 확인 결과 버려진 강아지가 아니라, 주변에 연로하여 정신적인 장애가 생긴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길을 지나다가 강아지가 밖에 나와 있는 것을 보고, 노끈으로 목에 채운 후에 끌어다가 매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만일 주인이 그를 학대하였다면, 그는 사람을 경계하거나 심하게 짖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전혀 불안한 기색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던 강아지, 누가 봐도 사랑스러운 강아지였습니다. 알고 보니 어떤 목사님 가정에서 기르는 반려견이었는데, 주인이 잠시 한 눈판 사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주인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강아지가 낯선 환경에서 조금도 요동도 없이 평온하게 지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의 사랑을 듬뿍 받은 사람들입니다. 임금이나, 주인을 위하여 대신 죽은 사람들에 대하여 우리는 종종 들은 바가 있지만, 왕이나 주인이 종의 죗값을 죽음으로써 대신 치러 주었다는 말은 결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온 우주를 만드시고 주관하시는 주님께서 저 같은 죄인을 위하여 대신 돌아가신 것입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하여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7-8). 그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다면 감사 감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다면 보답하는 마음을 가지고 형제들에게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을 깨닫는 것, 사랑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 수 있을까요? 본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 도다.”(골1:6). 듣는 사람은 깨달을 수 있습니다. 다윗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묵상할 때에 화가 발하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시39:3). 묵상하는 것은 읽고 듣고 기억하고 있는 것을 대상으로 합니다. 묵상할 때 감사 감격으로 뜨거워집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읽고 들을 뿐만 아니라 묵상해야 깊게 깨달아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기 위해서는 겸비한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가 내게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들으신 바 되었으므로 내가 네 말로 인하여 왔느니라.”(단10:12). 겸비케 하기로 결심만 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성경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마음이 둔해지는 것은 겸비치 못하고 높은 마음을 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현자도, 철학자도 아닌 겸비한 마음을 가지고 배우려 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기 위해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7-8).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작은 것부터 사랑을 실천해 나갈 때 사랑이신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회개한 것만큼 주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눅7:47). 자신의 죄악을 깨달은 사람은 죄 문제는 보혈공로 아니면 해결될 방법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보혈을 흘려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감사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은 보답하는 자세입니다. 그 보답하는 자세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우리에게 사랑받는 사람에게 어떤 인심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주님께 받은 사랑을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마음입니다. 그것이 바로 열매입니다. 저를 비롯하여 이 글을 읽는 모든 성도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그 넓이와 깊이와 높이와 길이가 어떠한 것임을 알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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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15
  • [국독연 칼럼] 강성률 목사의 ‘기도의 능력’
    “이 밤에 왕이 잠이 오지 아니하므로 명하여 역대 일기를 가져다가 자기 앞에서 읽히더니 그 속에 기록하기를 문 지킨 왕의 두 내시 빅다나와 데레스가 아하수에로왕을 모살하려 하는 것을 모르드개가 고발하였다 하였는지라.”(에6:1-2). 에스더서는 ‘하나님’ ‘여호와’라는 단어가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책입니다. 하지만 총 10장까지밖에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곳곳에 하나님의 숨결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책입니다. 오늘은 본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기도한 백성들에게 어떤 은혜를 베푸시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여기 나오는 ‘이 밤’은 아말렉인 하만이, 자신에 대하여 신임이 두터운 페르시아 제국의 대왕 아하수에로왕에게 모르드개의 목을 구하고자 왕궁 바깥뜰에 나선 날 밤이었습니다. 하만은 한갓 궁지기 신분의 모르드개가 제국 서열 두 번째인 자신에게 절은커녕 무릎도 꿇지 않는 것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22.5미터 높이 되는 나무에 그를 달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이미 그는 아하수에로왕 12년 12월 13일에 모르드개를 포함하여 유대인을 전멸시키도록 왕으로부터 허락 받았지만(에3장), 아직 1월이었기에 당장 모르드개를 처형하지 않는다면 11개월 만큼 더 자신 앞에서 미동도 없는 모르드개를 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왕과 하만은 왕후 에스더가 유대인이며, 모르드개가 딸처럼 양육하였던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왕의 어인이 찍힌 조서대로 한다면 에스더도 유대인이기 때문에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에스더는 그 점을 파고들었습니다. 유대인을 멸하면 자신도 유대인이기 때문에 도매금으로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왕에게 호소하면서 하만의 만행을 고소할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나라 법은, 왕이 부르기 전에 궁전 안뜰로 들어가 함부로 왕에게 나아가면, 남녀노소 누구든지 죽음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한 가지 살길은, 왕이 자기 앞으로 나아오는 자를 향하여 금으로 만든 홀을 직접 내밀어 주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때 아하수에로왕은 한 달 동안 왕후 에스더를 부르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에스더는 유대인 모두가 죽게 된 상황에서 마냥 있을 수 없었습니다. 모르드개를 통하여, 도성 수산궁에 있는 유대인들이 사흘간 그녀를 위하여 금식하도록 청하였습니다. 자신도 시녀들과 함께 금식한 후 “죽으면 죽으리라.” 결심하고 왕 앞으로 갔습니다(에5:16-17). 하나님께서 아하수에로 왕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셨습니다. 왕의 눈에 에스더를 무척 사랑스럽게 보이도록 한 것입니다. “왕후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본즉 심히 사랑스러우므로 손에 잡았던 금홀을 그에게 내어미니 에스더가 가까이 가서 금홀 끝을 만진지라.”(에5:2). 에스더가 금홀을 만지자 왕이 말하였습니다.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이뇨.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 그러자 에스더는 왕이 하만과 함께 에스더가 베푼 잔치에 참석하기를 청하였고, 왕과 하만은 에스더의 요구대로 하였습니다. 타이밍이 있는데 에스더는 지나치게 심사숙고한 나머지 잔치 첫날에는 왕을 청하였던 목적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잔치 첫날부터 다짜고짜 사정을 말하여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을 것이고, 왕이 에스더의 소원을 마음으로부터 준비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에스더는 다음 날도 자신이 베푼 잔치에 왕이 하만과 함께 참석하기를 청하였습니다(에5:8). 하지만 늦은 결정이 하마터면 큰 화근이 될 뻔하였습니다. 이후 하만은 에스더가 베푼 2차 연회 전에 모르드개를 죽이기 위하여 22.5미터나 되는 나무를 준비하였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에 수양대군은 왕이 되어 조카 단종을 강원도 영월에 유배시켰습니다. 이에 분개한 신하들이 단종 복위 운동을 벌였습니다. 명나라 사신이 오는 날에 거사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거사를 모의했던 사람 가운데는 무사였던 유응부와 문인이었던 성삼문이 있었습니다. 유응부는 이 일이 새어 나가기 전에 바로 거사를 해야 한다고 서둘렀지만, 문인이었던 성삼문과 다른 사람들은 때가 아니라고 하면서 다른 날로 미루었습니다. 그 결과 김질에 의하여 일이 탄로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옥에 갇혔을 때 유응부는 고문을 당하면서 “군인이 입만 산 서생들과 같이 계획을 짜면 안 된다더니 과연 그 말이 맞더라.”고 한탄하였습니다. 이처럼 거사는 머뭇거리거나 미루면 화근이 될 수 있습니다.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던 에스더는 자칫 모르드개가 하만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후에야 하만을 죽여달라고 왕에게 요청할 뻔하였습니다. 모르드개가 죽은 상태라면 에스더는 비록 하만과 그의 가족, 아말렉인을 멸절시킨다고 해도 슬픔이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만이 모르드개를 나무 위에 달기 위하여 바깥뜰에 대기하던 날 밤, 아하수에로 왕은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잠들기 위하여 엎드려 자거나 숫자를 거꾸로 세는 대신, 신하에게 왕들의 일기를 펼쳐 읽게 하였습니다. 마침 두 내시 빅다나와 데레스가 왕을 모살하려고 했던 것을 모르드개가 발견하여 고발하였던 장면을 폈습니다. 왕은 모르드개에 대하여 어떤 상급도 내리지 않았던 것을 알고, 하만을 불러 왕이 존귀케 하려는 자에게 어떤 상을 내려야 할지 물어보았고, 하만은 왕이 입는 의복을 입게 하고, 왕이 쓰는 관을 쓰게 하며, 왕이 타는 말을 타게 하여 왕의 방백 중 존귀한 사람의 손에 붙여서 성 중 거리로 다니며 “왕이 존귀케 하기를 기뻐하는 사람에게 이같이 할 것이라 하게 하소서.”(에6:9내용). 말하였습니다. 왕은 그가 한 말대로 모르드개에게 행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께서는 모르드개에 대하여 하만이 입도 벙긋 못 하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더와 수산성에 사는 유대인들의 기도로 인하여 다음과 같은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첫째, 왕으로 하여금 에스더를 사랑스럽게 보게 하였습니다. 둘째 에스더가 비록 잘 못 판단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에스더의 실수까지도 하만이 모르드개를 왕에게 참소하지 못하도록 입을 막음으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하신 점입니다. 셋째는 화가 복이 되어 그들을 멸망시키려고 하였던 유대인의 대적 하만과 그의 가족 그의 민족이 모두 멸망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모르드개는 왕의 다음이 되어 유대인의 유익을 도모하였던 점입니다. 이처럼 기도는 성도들에게 좋은 일들을 가져다줄 뿐만 아니라 화가 복이 되게 하며 또 보이지 않는 재앙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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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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