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칼럼
Home >  칼럼  >  WAIC 칼럼

실시간뉴스

실시간 WAIC 칼럼 기사

  • [웨이크 칼럼] 강성률 목사의 ‘점점 빛나는 의인의 길’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잠4:18). 가끔 동이 터 오르기 전에 제가 사는 곳에 있는 산에 올라 아침을 맞이합니다. 태양이 떠오르는 순간부터는 태양은 거침없이 어둠을 삼키고 새로운 세계를 펼칩니다. 그렇다면 태양은 지난 밤 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잠자고 있었을까요? 그 시간 동안 단절 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기나긴 밤에도 그들은 모태에 있는 어린 아이가 아무도 보지 않는 사이에 점점 자라고 있듯 끊임없이 아침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임계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리학에서 액체가 기체로 변화하기 직전 상태로 물질이 구조와 성질을 다른 상태로 변화할 때의 온도와 압력을 말합니다. 가령 물일 때는 온도는 섭씨 100도가 임계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00도가 되기 전까지는 계속 액체 상태로 있다고 해서 그 물은 기체로 변화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끊임없이 변화되고 있지만 표면에 드러나지 않을 뿐입니다. 일단 100도가 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변화의 속도가 달라집니다. 우리는 기도를 해도, 전도를 해도, 노력을 해도 진척이 없다고 생각하고 ‘나는 안 돼’ 하면서 포기할 때가 있습니다. 성공하는 자와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 가운데 하나가 임계점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습니다. 태양이 떠오르기 전 긴 시간동안 정체 되어 있는 듯 하지만 태양은 그 순간에도 끊임없이 왔던 곳으로 돌아가고 있듯이(전1:5), 우리의 기도와 수고와 땀이 헛된 듯 하지만 단지 보이지 않을 뿐 솥뚜껑 안에 있는 물은 기체가 되기 위하여 달궈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임계점이 되기 전까지는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의 활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무로 말하면 뿌리 영역이라고 할 수 있고, 신앙으로 말하면 가장 기본적인 것, 실제 삶에서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영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요셉은 비록 그가 형님들에 의하여 애굽에 노예로 팔려 나갔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가정 총무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보디발 아내의 모함으로 감옥 생활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꿈으로 그가 형님들을 다스리게 될 것을 약속 하셨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점점 꿈과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그러나 그가 30세 되던 해 바로의 꿈 해석으로 말미암아 그는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13년의 기간 자칫 슬픔과 탄식의 시간이 될 수 있었지만 그것은 헛된 시간이 아니라 임계점에 도달하기 전의 시간일 뿐이었습니다. 모세 역시 미디안 광야 40년 기간 그는 죽은 사람처럼 보였지만 양을 치면서 이스라엘 목자가 되는 훈련을 단단히 받았을 것입니다. 다윗 역시 사울에게 쫓겨다니는 날들이 기약 없어 보였지만 그 날들은 헛된 것이 아니라 그가 왕이 되기 위한 준비기간이었습니다. 그 기간을 다 채우자 그는 거침 없이 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신앙인 모두에게는 임계점이 있습니다. 그 점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우리는 죽은 자 처럼 지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그것을 박차고 영적인 성숙이 이루어질 때가 있습니다. 임계점은 거기서부터 가시적인 성공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고자하는 임계점이란 신앙의 성숙 영적인 성숙 속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도달하기 전까지 우리 모두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주님께 매달려야겠습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2-10-18
  • [국독연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하나님과 화합’
    “그런즉 너희 마음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와 화합하여, 완전케 하여, 오늘날과 같이 그 법도를 행하며 그 계명을 지킬지어다.”(왕상8:61).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친구가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지만(잠27:17),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방죽을 흐리게 하는 것처럼 연합이 잘못되면 함께 망하는 길로 가기도합니다. 우리는 지난 1980년대 구소련에 연합된 나라들의 종말을 보면서, 잘못된 연합의 해악을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심지어 우크라이나처럼 해악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나라가 있습니다. 복되게도 지금 우리 앞에는 하나님과 연합하는 길이 펼쳐 있습니다. 화합이란 화동하여 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앙인들의 평생소원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과 연합함’일 것입니다.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은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빌2:5).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품은 사람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은 비느하스입니다.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민25:10-11). 하나님께서는 비느하스에 대하여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과 같은 질투심’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연합하려면 주님과 같은 마음이어야 합니다. 주님과 같은 마음을 품은 사람은 주님이 보시는 대로 봅니다. 주님이 싫어하면 자신도 싫어하고, 주님이 기뻐하면 자신도 기뻐합니다. 주님이 아파하면 자신도 아파하고, 주님이 만족하면 자신도 만족합니다. 주님과 같은 마음을 품으려면 주의 영이신 성령님을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빌1:8). 이스라엘의 남북 시대에 북왕국 이스라엘의 초대왕 여로보암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왕상12:25-33).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가까이 사는 벧엘에 있는 선지자를 보내시지 않고 멀리 있는 유다 선지자를 보내셔서 금송아지에게 제사를 지내는 여로보암을 책망하도록 하셨습니다(왕상13). 왜 가까이 사는 벧엘에 있는 선지자를 사용하지 않았을까요? 그가 비록 선지자라는 명칭은 있었지만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느끼지 않았고, 하나님과 같이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쓰신 이유는 하나님과 마음이 합하였기 때문입니다(행13:22). 사울은 하나님과 전혀 다른 마음을 썼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대로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게 한 것입니다(삼상15:22-23). 성경에서 에녹은 하나님과 300년간 동행하였습니다(창5:22).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품은 비느하스에게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나의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그와 그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민25:12-13). 평강의 언약을 주신 것입니다.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을 주었습니다. 다윗도 하나님께 합한 마음을 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이스라엘 왕으로 삼아서, 다윗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행하였던 히스기야왕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습니다(왕하18:6-7).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품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 안에 거하여야 합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15:5). 우리가 주님 안에 있을 때 주님과 연합하게 됩니다. 주님 안에 들어가려면 주님의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요15:10). 지킨다는 것은 순종을 의미하며, 순종은 믿음을 전제로 합니다(롬1:5).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 순종하는 사람은 주님 안에 거하게 되며, 주님 또한 순종하는 사람 안에 거하십니다. 하나님과 연합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믿어 거듭났다고 하여도 여전히 믿지 않는 사람들과 같은 마음이라면 아직 마음이 새로워지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들의 영은 새로워졌지만 마음까지는 새로워지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몸을 드려야 합니다(롬12:1-2). 하나님께서는 몸 드리는 사람의 마음을 새롭게 변화시켜 주십니다. 몸 드리는 것은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롬6:16). 하나님은 몸 드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청컨대 너는 그 입에서 교훈을 받고 그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고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버리면 다시 흥하리라.”(욥22:21-23).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서는 교훈을 받고 말씀을 마음에 두며,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버려야 합니다. 보배를 진토에 버려야 하고, 하나님보다 더 귀중하게 여기는 것들, 우상을 멀리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연합” “예수님과 하나 됨”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차오르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연합한 성도가 되어 예수님과 사귀고 예수님의 기쁨을 함께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요일1:3-4).
    • 칼럼
    • WAIC 칼럼
    2022-10-04
  • [국독연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잘못된 사랑’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10:1-3). 어떤 할머니가 젊었을 때 남편하고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이 분의 남편은 몸이 약해 직장을 쉬고 있었고, 대신 아내가 나가서 일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보통 가정들과는 다르게 남편이 가정주부가 된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몹시 사랑했습니다. 아내가 밖에서 일하는 것이 안타까웠던지 남편은 언제부터인가 가물치를 푹 고아서 즙을 만들어 아내가 출근하기 전에 한 잔씩 주었습니다. 오랫동안 아내는 그렇게 한 잔씩 마시며 다녔는데, 하루는 가물치 맛이 이상하여 ‘양념을 첨가했나 보다’ 하고 지나쳤습니다. 그 맛도 며칠 동안 계속되다 보니 적응이 되었습니다. 아내는 이렇게 자신을 생각해주는 남편이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얼마간 마신 후에 남편이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요 며칠 마신 것이 무엇인지 알아요?” 그러자 아내가 대답하였습니다. “가물치라고 했잖아요?” 남편이 다시 말하였습니다. “음........실은 그것 구렁이지요.” 깜짝 놀란 아내는 기겁하며 “뭐라고요? 그게 사실이란 말에요?” 하며 재차 물었습니다.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하자 모두 게워내고 싶었지만 이미 흡수된 상태라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그 어르신의 남편은 아내를 무척 사랑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잘못된 사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내의 뜻이 무엇인지 아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였기 때문입니다. 구렁이를 끔찍이 싫어하는 아내는 구렁이의 몸이 자신의 몸 조직 일부분이 되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꽤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입니다. 기독교의 정신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4:16). 사랑은 가장 중요한 계명이며(마22:37-40), 사랑은 온전하게 매는 띠입니다(골3:14). 하지만 사랑에는 지식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지식 없는 사랑은 잘못된 열심이요, 정욕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10:1-3). 신약 당시에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은 있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지 않았고, 자신이 옳게 여기는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려 하였습니다. 바울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회심하기 전까지 잘못된 열심 때문에 핍박자가 되었고 훼방자가 되었고 폭행자가 되었습니다(딤전1:13).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지식을 따르지 않은 결과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간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행13:36). 참으로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상대방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찾아서 행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관점이 자신이 아니라 상대방이기 때문입니다. 장모를 사랑하는 사위라면 자신이 좋아하는 돼지고기를 사서 자신만 실컷 먹고 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장모가 쇠고기를 좋아한다면 쇠고기를 들고 갈 것입니다. 굴비를 좋아한다면 굴비를 사서 갈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지를 구체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말씀을 알지 못하면 어르신의 남편과 같은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을 섬기니까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의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2-09-11
  • [국독연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시기와 때’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니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유력자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라고 식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기능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라.”(전9:11). 올 봄에 옥상에 식물들을 심었습니다. 상추와 가지와 고추는 직접 모종을 하였고, 들깨와 백일홍 맨드라미는 작년에 꽃이 피고 열매가 맺은 후 화분에 떨어진 씨가 새싹이 돋고 자라서 핀 꽃과 잎들입니다. 봄에 가장 늦게 싹이 돋고, 늦게 자라고, 늦게 꽃이 핀 것은 맨드라미입니다. 다른 식물들이 앞다투어 새싹을 돋고 열매를 맺어갈 때, 맨드라미는 싹 돋을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작년에도 경험한 바여서 늦게라도 나오리라 생각은 하였지만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하나도 안 돋을 수 있다는 생각도 간혹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역전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가장 늦게 세미하게 싹이 돋더니 계속 위로 솟아오르면서 제일 큰 꽃나무가 되었습니다. 꽃 역시 두 손바닥만 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전도서는 솔로몬이 인생 막바지에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와 사람들이 기뻐하는 모든 부귀영화를 다 누리고 느낀 바를 쓴 책입니다. 내린 결론 가운데 하나는 빠른 경주자라고 해서 그보다 늦은 경주자보다 우월감을 가져서는 안 되며, 다른 사람보다 많이 처진다고 해서 열등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이 시기와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각자의 때와 시기가 있는데 이를 무시하면 엉뚱한 일을 저지르거나 시기를 놓치고 맙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굳게 믿지 못하고, 여종 하갈을 통하여 대를 이을 아들을 낳은 결과,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중동 분쟁의 씨앗이 되고 말았습니다(창16:15-16). 사울은 사무엘이 올 때까지 이레를 충분히 채우지 못하여 제사장만 드릴 수 있는 번제를 자신이 직접 드린 결과 그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는 사무엘의 경고를 들어야 했습니다(삼상13:14). 둘 모두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기다리지 못한 결과입니다. 반면 부주의 방심하다가 기회를 놓친 예도 있습니다. 에서는 사냥놀이에 빠져서 동생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빼앗기더니(창25:33), 아버지의 축복까지 도둑맞고 말았습니다(창27:30). 그가 울면서 후회를 하였지만 회개할 기회를 놓쳤습니다. 등을 가진 열 처녀 가운데 미련한 다섯 처녀는 기름을 제때 준비하지 않은 결과 신랑을 맞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기름을 사 왔을 때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신랑을 맞이하여 이미 문이 닫힌 후였습니다(마25:10). 노아의 방주 때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노아는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큰 홍수를 내려 사람들을 땅과 함께 모두 멸망시킨다.’라고 전파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가장 친했던 친구들조차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는 방주를 예비하는 데 참여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조차도 자신들이 참여한 방주에 들어가지 못하고 홍수에 의하여 멸망 당하고 말았습니다. 허우적거리며 애원할 때는 이미 문이 굳게 닫힌 후였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합2:3). 정한 때가 있습니다. 그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때를 흘려보내서도 안 됩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에 집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다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24:42-44). 깨어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깨어 있는 것은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고전15:34). 깨어 있는 것은 근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벧전5:8). 깨어 있는 것은 기도와 감사를 의미합니다(골4:2). 이렇게 깨어 있는 사람은 조급한 자를 기다리는 자로 만들고 나태한 자를 근신하게 만듭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2-08-27
  • [국독연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양보할 때와 해서는 안 될 때’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13:9). 얼마 전 경의선 숲길을 산책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제가 가는 길목에 어떤 어르신과, 이제 40대 정도 되는 남성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다투고 있었습니다. 젊은 사람이 말하였습니다. “당신 같은 사람 때문에 공원 문화가 망가지는 거야” 그러자 어르신이 때릴 듯이 덤비며 말하였습니다. “뭐라고? 내가 할 소리를 네가 하는구나.” 그러자 젊은 남성의 부인인 듯한 여성이 젊은 남성을 잡아끌며 사태를 수습하였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공원길을 마주하며 걷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팔이 닿을 만큼 가까이 왔을 때, 그들은 서로 길을 양보하지 않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서로가 얼마든지 피해갈 수 있는 길인데도 자존심 때문에 양보하지 않다가 그런 사고가 난 것입니다. 다른 분들도 그러하겠지만 이런 경우 저는 멀리서부터 아예 한쪽으로 비켜섭니다. 좁은 골목에서의 운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피할 길이 있다면 먼저 피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달고 사는 제가 그런 일들로 굳이 사람들과 마찰을 빚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그가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부터 조카 롯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들은 서로가 자신의 소유를 지니고 있으면서 한 집안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한 가족 두 세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가난할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서로의 소유가 많아지자 아브라함의 종과 롯의 종 사이에 소유권 분쟁이 있었습니다. 때로는 큰 소리까지 나갔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조카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13:9). 당연히 롯은 이렇게 말해야 했습니다. “삼촌, 제가 삼촌을 떠나다니요, 그럴 수 없습니다. 제가 우리 목자들에게 단단히 일러두겠습니다.” 그러나 롯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겼습니다. 그곳은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도 같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선택권을 롯에게 양보하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곳을 네게 주리라.”(창13:14b-17). 자신의 유익을 따라 먼저 선택한 롯은 고작 자신이 선택한 곳과 그 주변에 머물 수밖에 없었지만, 양보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그가 바라보는 모든 것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양보한 사람에게 넓은 곳을 허락하십니다. 우물들을 블레셋 사람들에게 양보한 이삭에게 장소가 넓음이라는 뜻의 르호봇을 주셨던 것과 같습니다(창26:22). 하지만 신앙인들이 결코 양보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될 것들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배필을 위하여 충성된 종 엘리에셀을 하란으로 보낼 때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엘리에셀에게 그의 고향, 그의 족속에게서 이삭의 아내 택할 것을 구하였습니다. 그러자 종이 말하였습니다. “여자가 나를 좇아 이 땅으로 오고자 아니 하거든 내가 주인의 아들을 주인의 나오신 땅으로 인도하여 돌아가리이까?”(창24:5).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습니다. “삼가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말라.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본토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 만일 여자가 너를 좇아 오고자 아니하면 나의 이 맹세가 너와 상관이 없나니 오직 내 아들을 데리고 그리로 가지 말지니라.”(창24:6b-8). 종이 ‘만일 여인이 가나안 땅으로 가려 하지 않을 때는 이삭을 데리고 돌아가야 하느냐’고 묻자 아브라함은 깜짝 놀라며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이유로는 ‘하늘의 하나님께서 그를 그 고향과 본토에서 떠나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에게만 적용시키는 것이 아니라, 아들에게까지 자기에 관한 말씀을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이처럼 결코 양보해서는 안 될 부분 첫째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삭의 아들 ‘에서’는 야곱보다 더 사내답고 너그러운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양보해서는 안 될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판 결과 하나님의 자녀의 명분이 야곱에게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후회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히12:16-17). 신앙인들은 범사에 관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며, 본질적이지 않는 것이라면 양보하는 것이 덕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의 명분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자녀의 명분이 가져오는 은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몇 가지만 나열한다면 하나님 나라의 상속(골1:12, 히6:17)과 기도(마7:11)와, 찬미(눅10:19)입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며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3:17-18). 여기서도 화평과 관용이 중요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화평의 순서는 성결 다음이며, 관용 역시 성결과 화평 다음입니다. 신앙인들이 화평과 관용을 핑계로, 성결을 양보하는 것 또한 결코 안 될 일입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2-08-12
  • [국독연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내 몸의 브레이크’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얼마 전 심방을 마치고 예배당으로 가는 골목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다세대 주택 담을 지나려고 하는데 응달진 구석에 한 분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얼굴은 피범벅이 되어 있었고, 일어나려고 몸부림쳤지만 일어날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자전거에 그분의 다리가 엉켜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르신이 넘어졌던 곳 맞은편은 승용차 한 대 겨우 다닐 수 있는 좁지만 가파른 골목이었습니다. 심방을 함께 하셨던 분들은 구급차를 부르고, 저는 자전거에 엉켜있는 부분을 우선 풀어드렸습니다. 알고 보니 자전거 브레이크가 갑자기 고장 난 바람에 내리막에서 전속으로 달려와 그대로 담벼락과 부딪혔다고 합니다. 그나마 일찍 우리 눈에 띄어서 과다출혈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운행 중인 차들에 있어서, 브레이크 고장만큼 사고 위험이 큰 것도 드물 것입니다. 제어되지 않는 자전거, 제어되지 않는 오토바이, 제어되지 않는 승용차는 아무리 값진 것이라 할지라도 사용할 수 없습니다. 대부분은 고칠 수 있지만 만일 고칠 수 없는 차가 있다면 그 차는 존재 자체가 화근이 되는 것들입니다. 과감히 버려야 할 것입니다. 차의 브레이크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의 브레이크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왕 솔로몬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16:32). 자신의 마음을 잘 제어 하는 사람은, 성벽에 올라가 적군을 쫓아내고 성을 차지한 용사보다 낫다는 의미입니다. 그만큼 자기 마음을 제어하기가 어렵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다윗이 성령 충만할 때는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무서워 벌벌 떠는 블레셋의 영웅 골리앗을 죽였습니다(삼상17:49-51). 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 그가 왕이 된 후에,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한 후 그것을 감추기 위하여 요압에게 충신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게 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삼하11:1-27). 그 결과 다윗의 가정은 물론 이스라엘 전체에 어둠이 덮쳐 자신은 한때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다니는 치욕을 겪었고, 총 네 명의 자녀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실 때는 싸움에서 그를 이길 자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방심하여 정욕이라는 행인(삼하12:4)을 제어하지 못하였을 때 참혹한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면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까지 어렵게 만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자신을 제어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성령을 따라 살아갈 때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됩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마귀를 다스리고 우리를 다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들은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몇 가지만 들어보겠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은사를 주시며, 보호하시며, 인도하시고, 책망하시며, 위로해주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과 마귀를 제어해주시는 브레이크 역할까지 해주십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험이 오면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고 번번이 무너지고 맙니다. 이유는 방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라고 말합니다(벧전5:8-9). 김현봉 목사님은 자주 “방심할 때가 죄짓는 때라”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방심 후에 죄 짓는다는 것이 아니라, 방심하는 순간 죄짓는다는 뜻으로 방심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방심의 반대는 근신인데 솔로몬은 “내 아들아 완전한 지혜와 근신을 지키고….”라고 하면서 근신이 지혜 가운데 하나임을 강조합니다. 방심하면 일이 생길 때 주님을 부르짖을 생각도 못 하고 사건에 자신이 빨려 들어가고 맙니다. 하지만 근신하고 깨어 있으면 유혹이 역사할 때 주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주님을 바라보면 위로부터 성령의 능력이 임하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자신과 마귀를 제어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부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부요하다는 뜻은 넉넉히 이길 힘을 받는다는 뜻입니다(롬10:12). 아무리 강력한 마귀 세력이 있다 해도 우리 주님보다는 강하지 않습니다. 근신하여, 죄가 우리를 유혹할 때, 마음으로부터 주님을 부르짖어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2-08-06
  • [국독연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마21:4-5) 예수님께 대한 아버지의 뜻은 이미 창세기에서부터 정해져 있었습니다(창3:15). 모든 성경이 예수님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5:39). 예수님은 임의대로 사시지 않고, 아버지께서 이미 정해 놓으신 그 길을 가셨습니다. 본문 역시 예수님의 대속 여정 가운데 정해진 내용으로 주님은 아버지께 순종하여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정하신 대로 세상에 오셨고, 예정대로 병자들을 고치셨으며, 예정대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임의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대속사업을 종종 제자들에게 알리셨습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마16:21). 그 외에 갈릴리에 모였을 때에 말씀하셨으며(마17:22-23),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또 말씀하셨습니다(마20:18-19). 이미 아버지께서 정해 놓으신 길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 중 한 사람이 그를 팔아넘길 것을 예고하시면서 그것 역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요13:18,21). 이처럼 예수님은 자신의 기쁨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사셨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신앙인들은 어떠할까요? 예수님은 부활하신 주일 저녁때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처럼 예수님도 제자들을 보내셨고, 오늘날 신앙인들을 보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도들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듯이 정해진 길이 있고 또 순간, 순간 보내심을 받습니다. 형님 속이고, 아버지 속이고 에서의 보복이 두려워 도저히 가나안 땅에서 살 수 없었던 야곱은 형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가는 도중에 벧엘에서 노숙하게 되었습니다. 꿈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28:15).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욥도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 욥에게도 자신이 가는 길이 있었습니다. 선지자들도 사역의 목표와 방향성은 대개 비슷하였지만 살아가는 방식에 있어서는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아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너는 이 땅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며 자녀를 두지 말지니라.”(렘16:2). 반면에 이사야 선지자는 아내를 두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 아들의 이름을 하나님께서 친히 정하여 준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내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 하라. 이는 이 아이가 내 아빠, 내 엄마 할 줄 알기 전에 다메섹의 재물과 사마리아의 노략물이 앗수르왕 앞에 옮긴바 될 것임이니라.”(사8:3).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길과 삶의 양식까지도 정해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같이 예수님도 사도들에게 각자의 정하신 곳으로 보내셨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으로 베드로와 바울을 들 수 있습니다.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갈2:7-8). 제자들을 보내셨던 예수님께서 지금 신앙인 모두의 길을 정해 놓고 보내십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만 보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먼저는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가 보내신 곳입니다. 보냄 받은 사람은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부름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골3:23-24). 그러므로 신앙인들은 보내신 이의 뜻을 잘 헤아려서 나타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성경은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잠25:2)라고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너는 어디로 가서 무슨 일을 하라.”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위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각자의 길을 숨기시는데 우리가 더듬어 찾아야 합니다. 지각을 사용해서 찾아야 합니다. 기도로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우리의 길을 알리시는데 지체하지 않습니다(렘10:23). 기억하십시오.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정하신 길로 보내신 것처럼 예수님도 우리를 보내셨고 또 보내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 칼럼
    • WAIC 칼럼
    2022-07-28
  • [국독연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야긴과 보아스’
    “이 두 기둥을 전의 낭실 앞에 세우되 우편의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야긴’이라 하고 좌편의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보아스’라 하였으며”(왕상7:21). 솔로몬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때 전의 낭실 앞에 세운 두 기둥의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우편 기둥의 이름을 ‘야긴’이라고 하고, 좌편 기둥의 이름을 보아스라고 하였습니다. 야긴은 히브리어로 ‘저가 세우리라.’ ‘저가 확립하심’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또한 야긴은 다윗시대 족장이며 제사장이었던 인물로도 나옵니다(대상9:10, 24:17). 반면 ‘보아스’는 ‘그에게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인명으로는 룻의 남편이며 다윗의 증조부입니다. 성전의 두 기둥이 가지는 특징적인 명칭은 야긴과 보아스라는 인물보다 거기에 담긴 의미에 있습니다. 야긴의 의미를 담고 있는 ‘저가 세우리라’에서 세우는 것의 주체는 당연히 하나님이십니다. 무슨 일을 해 놓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아니하고 스스로 잘했다는 생각이 들 때 다음에 반드시 실수하게 된다는 것을 요사이 톡톡히 교훈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피조물입니다. 그러니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세우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시127:1). 성전을 짓는 것도, 나라를 세우는 것도, 가정을 세우는 것도 하나님이 세워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허사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누구를 세워주실까요?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신고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삼하7:27).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하여 집을 세워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다윗 집안에 왕이 끊이지 않겠다는 약속입니다. 솔로몬의 타락으로 그의 사후 르호보암왕 때 이스라엘은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로 분열되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시조 여로보암부터 마지막 호세아 왕까지 208년이라는 기간에 왕이 19명이 교체 되었으며 왕조(가문)는 8번이 바뀌었습니다. 반면 다윗 왕조는 시드기야 왕이 바벨론에 끌려갈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왕하25:7). 그리고 그 약속은 신약 시대 이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다윗이 어떻게 하였기에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이토록 복을 주셨을까요? 다윗은 단지 하나님께서 사방의 모든 대적을 파하시고 다윗 왕으로 궁에 평안히 거하게 하신 때에 나단에게 이런 말을 했을 뿐입니다.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도다.”(삼하7:1). 자신은 좋은 백향목 궁에 거하는데 그를 왕이 되게 하신 하나님은 장막 가운데 있는 것이 하나님께 죄송스러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을 건축하고 싶은 마음을 썼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영영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삼하7:11-13). 야긴은 이와 같이 하나님이 세우시리라는 약속의 터며, 기둥입니다. 기둥 중에 하나인 보아스는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그에게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힘으로 무엇이든지 하려하면 큰 낭패를 당합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아줄 때는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 때였습니다(창21:5). 아브라함과 열 살 아래인 사라의 나이는 90세였습니다. 이미 오십 세만 되어도 경수가 끊어지는 시기인데 90세라니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죽은 자와 방불한 사람을 통하여 한 민족을 세우는 일을 하였습니다(히11:12). 오직 능력이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을 알리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은 이스라엘에 흉년이 들자 부인과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땅으로 갔습니다(룻1:2). 그곳에서 모압 여인에게 두 아들을 장가보냈지만 엘리멜렉과 두 아들은 모두 죽고 세 과부만 남았습니다. 10년쯤 지난 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돌아보셨다는 소식을 듣고 둘째 자부 오르바는 모압에 남았지만 룻은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농사를 주업으로 하는 그 시대에 힘 있고 능력 있는 남자는 모두 죽은 상태였기 때문에 나오미와 룻은 그야말로 약한 상태였습니다. 하루는 룻이 이삭을 주우러 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이 보아스에게 속한 밭이었습니다(룻2:3). 보아스는 그 때까지 혼인을 하지 않은 노총각이었습니다. 거기서 보아스는 룻과 혼인하였습니다. 그래서 태어난 사람이 다윗의 조부 오벳이었습니다(룻4:17). 나오미와 룻은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가 되어 다른 사람의 밭에서 주운 이삭으로 연명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모두를 잃어버리고 아무 것도 의뢰할 것이 없을 때 보아스라는 유력자를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능력은 약한 자 무능한 자에게 임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고 스스로 지혜로운 자로 여기면 하나님께서 결코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성전의 두 기둥인 야긴과 보아스는 성전을 세우실 분도 하나님이시고, 세울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임을 알고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고, 하나님께 힘을 받아서 살아가야 함을 지금 우리에게도 말하고 있습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2-07-13
  • [국독연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마21:2). 나귀 어미와 나귀 새끼가 한 풀밭에 매여 있습니다. 본문 내용만으로는 나귀 새끼도 매여 있었는지 확신할 수 없지만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나귀 새끼만 매여 있다고 나옵니다. 그러므로 나귀 어미와 나귀 새끼가 모두 매여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어린 시절 염소나 소를 끌고 다녀본 적이 있습니다.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이 있는데 언덕이나 나무나 다른 짐승이 닿지 않는 곳에 매여야 한다는 원칙입니다. 만일 그들을 매고 있는 줄이 서로의 반경 안에 들어 있다면 대단히 위험한 상황이 초래될 수도 있습니다. 줄끼리 얽히고설켜 그들의 목을 조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있는 나귀도 예외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서로 마주보고 곧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었겠지만 몸이 닿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어미가 새끼를 향하여 다가오고 새끼가 어미젖을 먹기 위하여 접근하였을지라도 서로 바라만 볼 뿐 접촉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러한 나귀 어미와 새끼를 풀어 주님께로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매인 그들이 풀어졌을 때 드디어 그들은 피부를 접촉하며 그동안 못다 하였던 사랑을 나누며 예수님께로 왔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6:12-14). 신앙인들이 사욕을 좇아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은 결코 자유가 아닙니다. 죄가 왕 노릇하는 것이며, 죄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귀와 나귀 새끼처럼 매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비록 풀밭에 매여 있었지만, 우리는 사욕, 곧 죄에 매여 있었습니다. 사욕이라는 우상이 끄는 그대로 끌려 간 것입니다(고전12:2). 그런데 주님께서 나귀를 풀어주었듯이 신앙인들이 다시는 죄에 매여 있지 않도록 줄을 끊어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해서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더 흉악한 주인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더러운 귀신이 나가 물 없는 곳으로 다니다가 마땅히 쉴 곳을 찾지 못하여 이전 살았던 집으로 와서 보니 그 집이 소제 되고 수리되었던 것을 보고 전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려와서 살기 때문에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여진 것과 같습니다(마12:43-45). 우리도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해서 방심한다면 전보다 더 악한 귀신이 들어오게 됩니다. 믿는 사람이 안 믿는 사람보다 더 인색하고 더 이기적이고 더 명예영광 추구하고 더 양심 안 쓰고 더 욕심부리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거기에 해당할 것입니다. 마귀는 거듭난 신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더 이상 받지 못하도록 얼마나 노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노리는 마귀를 사전에 차단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신앙인들은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롬6:13, 12:1). 나귀 새끼처럼 자신의 몸을 예수님이 쓰실 수 있도록 드려야 합니다. 사실 예수님이 우리를 보혈로 사셨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고전6:19). 우리 임의대로 쓸 권리가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영광만 위해야 합니다. 나귀 새끼를 주님이 쓰시지 않았다면 그 나귀 새끼는 영혼 없이 죽는 한 마리의 나귀 새끼에 불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그를 만나주셨을 때 그는 주님의 나귀가 되었습니다. 주님 때문에 사람들이 그 잔등에 인간의 옷을 걸쳐주고, 그가 걷는 곳에 사람들의 옷을 펼쳐 두었으며, 승리의 나뭇가지 위에 걸으며, 존귀한 나귀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영광에 나귀도 참예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존귀하게 되려고 아니해도 주님 한 분 영화스럽게 하려는 마음을 품고 살아가면 이처럼 주님께서 곧 영광을 주십니다. 죄에 매여 죽을 인생을 주님께서 풀어주셨으니 우리 역시 고맙고 감사한 마음으로 자신을 주님께서 쓰시는 도구가 되도록 주님께 드리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딤후2:15).
    • 칼럼
    • WAIC 칼럼
    2022-07-05
  • [국독연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보냄을 받은 사람’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막11:2-3).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에 제자들을 맞은편 마을로 보내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두 제자가 예수님께 보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이시며, 사랑이시며, 덕스러운 분입니다. 세상 윤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윤리 이상의 윤리를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그런데 두 명의 제자들에게 본문의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앞 동으로 가서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새 차가 주차되어 있을 터이니 가지고 오너라.”는 것과 유사하다고 하겠습니다. 그 말씀에 선뜻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선생님, 남의 차를 어떻게 주인의 허락도 없이 타고 옵니까?”라고 되물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명령은 온 우주의 주인이신 예수님만 하실 수 있는 명령입니다. 제자들은 선생님의 그 말씀에 어떤 두려움도, 어떤 질문도 없이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순종훈련을 제대로 시키신 열매일 것입니다. 그들은 맞은편 마을로 가서 매여 있는 나귀 새끼를 풀었습니다. 그러자 거기 있는 사람 가운데 나귀 주인인 듯한 사람이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일러주신 대로 대답하였습니다. 이에 나귀 주인은 즉시 허락하였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보냄을 받아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것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두 뒷감당을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순종하고 가니까 정말로 나귀 새끼가 매여 있었고, 당당하게 풀어오려고 하자 주인은 머뭇거리거나 삯을 요구하지 않고 바로 허락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날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내로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날 텐데 그를 따라가서 그가 들어가는 집 주인에게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는지’를 묻도록 합니다. 제자들이 그대로 하자 성안에 물동이를 들고 가는 사람을 만났고, 그를 따라서 간 집이 마가의 집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최후에 만찬을 진행하였습니다(막14:12-26).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만 가라고 하시고 가만히 계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귀 주인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예수님을 위하여 나귀 새끼를 줄 마음을 불러일으켰으며, 마가의 어머니에게는 주님과 제자들을 위하여 유월절 만찬을 베풀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유월절 식사를 위하여 제자들을 보낸 성은 예루살렘 성이었습니다. 물이 흔치 않은 그곳에 평소라면 사람들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물을 들고 가는 사람 역시 한 사람뿐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제자들에게 물동이를 들고 가는 사람의 얼굴 생김새와 옷차림과 신장 등을 상세히 말씀하시지 않고 단지 물동이를 들고 가는 사람이라고만 합니다. 주님은 두 제자가 혼돈되지 않도록 제자들이 그 성내에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마가네 집식구 외에는 아무도 물을 긷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순종하는 사람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들을 준비하십니다.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는 경건한 사람으로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행10:1-2). 그런 백부장에게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청하여 말씀을 듣도록 하였습니다. 그러시면서 베드로가 있는 위치까지 가르쳐 주십니다. 고넬료는 집안 하인 둘과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베드로가 있는 곳으로 보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보내지 않으셨는데도 그들이 베드로를 찾아가서 청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베드로는 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도 이방인에 대한 선입견이 완고하였습니다. 구원은 유대인과 이방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뿐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방인과는 식사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선입견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개입하시지 않는 한 깨지기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의 선입견을 깨뜨리시기 위하여 세 번이나 똑같은 환상을 보이십니다. 보자기 같기도 한 큰 그릇이 네 귀에 줄이 달린 채로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그릇 안에는 구약 율법에서 금한 각색 짐승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일어나 그것들을 잡아먹으라고 하십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였습니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이런 일이 세 번이나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리워 갔습니다. 세 번까지 같은 일이 반복 된 것으로 보아 베드로의 선입견이 얼마나 강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환상까지 보이면서 베드로의 선입견을 깨뜨린 것은 보냄을 받아 베드로에게 가는 고넬료의 종과 부하들을 위함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보내심에 순종하고 살아가는 사람을 위해서 모든 것을 예비해주십니다. 그것은 마치 어느 대기업 사장이 사원에게 출장을 보낼 때는 여비와 가서 먹고 쓸 것을 모두 제공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내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행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스스로 책임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보냄을 받은 두 제자는 예수님의 뜻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사람은 자기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 삼을 것입니다(요7:18). 그것이 보냄을 받은 사람들의 자세이며, 보냄을 받은 사람의 표적입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2-06-28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