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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부활하려면’(롬 8:11)
- 그리스 철학자들과 플라톤은 영과 혼을 하나로 묶어서 사람은 영혼과 육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이분법적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육과 영혼을 분리하여 육은 죽지만, 영혼은 불멸하여 끊임없이 윤회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것이 플라톤이 주장한 영혼불멸설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영과 혼과 육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영, 혼, 육이 다 죽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이 떠나면 다시 흙으로 되돌아갑니다. 모든 피조물 중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어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좌우됩니다. 하나님의 영이 사람의 몸에서 떠나면, 즉영이 죽으면 사람의 심장에서 나오는 혼과 육도 죽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예수님의 영, 혼, 육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렇게 죽으신 예수님의 몸에 하나님의 영이 다시 임함으로써 예수님의 영, 혼, 육이 다시 일으켜 세움을 받았습니다.(행 13:30) 어떻게 예수님의 영, 혼, 육이 죽을 수 있을까요? 예수께서 신적인 것을 비우시고 인간적인 것으로 낮아지셨기 때문에 영, 혼, 육이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빌 2:6-8) 죽음의 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열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제자들은 무서워하며 부활하신 예수님의 유령을 보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다.”(눅 24:38-3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도 제자들은 아직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눅 24:41)라고 말씀하셔서 제자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렸더니 그들 앞에서 잡수셨습니다.(눅 24:41-43) 이처럼 예수께서는 육의 몸으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의 육과 혼만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영도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영, 혼, 육이 죽고, 성령님에 의해서 영, 혼, 육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믿기 바랍니다. 사도신경을 보면,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육의 부활이 아니라 몸의 부활, 즉 영혼육이 부활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은 영, 혼, 육이 죽었다가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영, 혼, 육이 새로운 존재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런 부활의 몸을 바울은 신령한 몸이라고 말했습니다.(고전 15:44) 신령한 몸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육의 몸이 새로운 신령한 몸으로 변한다는 뜻입니다. 즉 부활한 몸은 사람의 형상과 육은 그대로 가지고 있으나 부활 이전 육의 몸에 제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 지상의 물질적 공간과 역사적 시간을 초월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한 신령한 몸도 지상의 몸과 초월의 몸이 연합된 것입니다. 즉 지상의 몸이 초월의 몸 곧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는 것이 부활입니다.예수님의 변모사건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마 17장) 우리도 부활하면 예수님처럼 지상의 몸과 초월의 몸이 연합된 새로운 몸으로 부활하게 되는 것을 믿기 바랍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영으로 일으켜 세움을 받은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죽은 몸도 성령님에 의해서 일으켜 세움을 받는 것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은 성령님에 의해서 사람이 다시 새롭게 창조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의 타락 이후 사람에게서 이미 성령님이 떠났기 때문입니다.(창 6:3) 그래서 우리는 성령님이 떠나시지 않도록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면 성령님이 임하십니다.(행 2:38) 부활하려면, “생명을 주시는 영”(고전 15:45)을 마음에 모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영, 즉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인 다른 보혜사가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도 부활합니다. 즉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을 나의 죄 때문인 것으로 시인하고 믿으면,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 곧 생명을 주시는 영이 오셔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우리는 부활신앙으로 살고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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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부활하려면’(롬 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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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삶이 곤고한 이유에 대해’(시 107:10~12)
- 사람이 흑암과 죽음의 그늘에서 살며 쇠사슬에 매여 고통하는 죄수처럼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가장 높으신 분의 가르침을 거절하였기 때문임을 본문은 말씀합니다. 성경은 사람에게 사실과 진실을 콕 집어서 이야기해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사람들은 제각각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였었거나 매여있는 처지이거나 합니다. 어디가 흑암이며, 어느 부분이 쇠사슬에 매인 것일까요? 자기의 마음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온통 마음이 흑암에 싸여있고 죽음의 그늘에 앉아있으며 곤고해하고 보이지 않는 쇠사슬에 매여있는 사람들로 넘쳐납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 환경과 삶의 터전 또한 그렇게 어두워지고 곤고해지며 매여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만드시고 바라보시며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간단하고도 명쾌하게 그렇게 곤고해지며 매여있게 된 이유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아있고 곤고와 쇠사슬에 매여서 사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감옥에 갇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울이나 베드로같이 선교와 희생, 또는 애국의 일환으로 옥중 생활을 하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옥에 갇히는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더 근원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도둑질하지 말고, 남을 해하지 말며, 살인하지 말고, 부모를 공경하며, 간음하지 말며,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것은 극히 도덕적인 내용이지만, 그 이전에 그러한 기준들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자신은 감옥에 갇힌 적이 없다고 자부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감옥은 아닐지라도 자기 마음이 이미 감옥인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바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게 되고 곤고와 쇠사슬에 매여있는 불행한 현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마음의 감옥입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에 의하면 이러한 마음의 감옥은 이미 스스로 자초했던 잘못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원인이 자기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지 못했던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나 사랑의 중요성보다는 다른 관계나 다른 것에 더 관심이 많았다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이 결코 작은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만약 사랑의 관계이어야 할 부부의 모습이, 현실을 살다보니, 배우자보다는 다른 사람이나 다른 것에 더 관심을 갖게 되고 거기에 푹 빠져있게 된다면, 이는 불륜이며 배신이고 범죄로 이어지는 상황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혈연 그 이상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멸시함에 따라 겪게 되는 고통의 과정이 있습니다. 그렇게 고통스러울 때는 엎드러져도 돕는 사람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겸손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12절).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며 어떤 상황에 놓여있습니까? 우리의 마음은 감사와 평안입니까? 흑암과 쇠사슬에 매임입니까?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곰곰이 묵상하는 가운데 진리의 말씀 안에 거하여서 참된 사랑과 행복을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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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삶이 곤고한 이유에 대해’(시 107: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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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고] 북한 노동당 당비서에서 목사로 거듭난 복음 역경
- 다음은 지난 4월 7일,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제23회 목사안수식에서 안수자 대표로 인사를 건넨 노희창 목사의 메시지 전문이다. <편집자 주> 존경하는 사단법인 국제독립교회연합안의 목사님들과 함께하시는 모든 참가자 여러분, 그리고 오늘 함께 안수를 받는 동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먼저 이런 귀한자리를 마련해주신 명예회장이신 박조준 목사님, 총회장이신 림택권 목사님, 사무총장이신 임우성 목사님, 그리고 이 자리에 함께해 주신 모든 목사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 귀한 자리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인하며, 북한 복음통일을 준비하는 종으로서 저의 다짐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북한의 ‘정치적 난’으로 치부되었던 장성택사건의 측근으로 낙인되어 해외출장시에 북한을 이탈하여 대한민국으로 망명한 전 북한노동당 중앙당 행정부 대외건설지도국의 당비서 였습니다. 북한에서 노동당은 종교를 탄압하는 최고의 정치기구이며 저는 바로 그 기구에서 일하면서 종교박해와 탄압을 일삼으며 많은 죄를 지은 자 였습니다. 그랬던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오기까지에는 저를 이끄신 주님의 크신 뜻과 크신 노력과 은혜의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매 시대마다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종들을 세우셨고, 오늘 이 시간 저희를 주님의 일꾼으로 세우셨습니다. 이는 단순한 직분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위해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을 각오로 임해야 할 거룩한 부르심입니다. 특히, 우리가 서 있는 이 시대는 하나님께서 한반도의 복음 통일을 위해 일하시는 중요한 시기이며, 북한 땅에 갇힌 수많은 영혼들이 주님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때입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우리에게 주어진 이 소명을 깊이 새깁시다. 이 자리에서 제가 맡은 소명은 북한에로의 복음전파이며 이루어내야 할 결과는 복음통일입니다. 저는 현재 북한선교실천연합 회장으로서 북한선교를 실천함에 있어서 북한선교의 기본을 올바로 이해하고 북한선교에 대한 중심을 올바로 세우고, 북한선교에 대한 방향을 올바로 선택하고 북한선교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북한선교의 중심은 요한복음 8장32절··· 진리를 너희가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의 말씀을 북한에 그대로 알리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반대쪽 땅에서 사는 북한주민들은 세상속의 순리와 진리가 모두 하나님에게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북한 땅과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오직 복음으로 이 민족을 하나 되게 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철저히 기도하며, 말씀으로 무장하며,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저는 오늘 하나님과 동역자들앞에서 다짐합니다. - 어떤 환경에서도 복음의 진리를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 오직 주님의 뜻을 따라 한반도의 영적 회복을 위해 헌신하겠습니다. - 북한과 열방의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며, 복음이 전파되는 그날까지 달려가겠습니다. 이 길이 쉽지 않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 28:20) 하신 주님의 약속을 붙들고, 두려움 없이 나아가겠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저희를 위해 노력해 오신 사단법인 국제독립교회연합안의 모든 목회자분들과 함께 안수를 받는 동역자 여러분, 그리고 기도로 함께하는 모든 참가자분들께 부탁드립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 되어 주님의 뜻을 이루는 길에 끝까지 함께 서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를 세우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올려 드리며,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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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고] 북한 노동당 당비서에서 목사로 거듭난 복음 역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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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논평] 하미자 목사의 ‘보혈의 능력’(벧전 1:18-19)
- 우리 신앙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은 죽음의 세력을 쥐고 있는 자 곧 마귀를 멸하시고, 한평생 죽음의 공포 때문에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히 2:14-1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져 주시려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바치셨습니다.”(갈 1:4) 그 보혈로 예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의 멍에를 다시는 메지 않도록 믿음으로 굳게 서서 보혈의 능력을 전해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의 지배하에 있던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보배로운 피를 값으로 지불하시고 우리를 죄에서 대속하셨습니다. 예수의 보혈로 말미암은 구원은 영원하며 사람의 영혼육 전 존재를 구원하는 것이기에 더욱 보배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죄에서 자유케 해주셨습니다. ‘구속하다’는 ‘전쟁 포로나 노예를 돈을 주고 사서 다시 해방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보혈, 즉 몸 전체를 대가로 지불하여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5b)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하나님과 사람을 화목하게 해주셨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 2: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셋째, 죄를 깨끗하게 해주셨습니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넷째, 거룩하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히 13: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섯째, 영생을 얻게 해주셨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 6:5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의 피를 마신다는 말은 보혈의 능력을 우리의 마음속에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혈의 능력을 찬송해야 합니다. 구약시대 드린 동물의 피는 부정하게 된 사람의 몸을 의식적으로 정결하게 하였으나 양심을 씻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죄로 인해 더러워진 사람의 양심을 정결하게 하고, 죽은 심령을 살려 살아 계신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였습니다. 주님의 보혈은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죽은 행실에서 떠나 하나님을 섬기게 해주셨습니다. “하물며 영원한 성령을 힘입어 자기 몸을 흠 없는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바쳐진 그리스도의 피야말로, 더욱더 우리들의 양심을 깨끗하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죽은 행실에서 떠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않겠습니까?”(히 9: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린양의 피로써 속죄함을 얻은 그 기쁨을 영원히 찬송해야 합니다. 찬송가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268장)의 가사를 봅니다.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하는 것은 보혈의 능력입니다. 육체의 정욕을 이길 힘도 보혈의 능력입니다. 눈보다 더 희게 맑히는 것은 보혈의 능력입니다. 구주의 복음을 전할 제목도 보혈의 능력입니다. 주의 보혈은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의 보혈을 믿어야 합니다. 스가랴 13장을 보면,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1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샘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죄와 더러움을 씻어준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계획을 실행하시기 위해서 대제사장으로 오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대제사장으로서 단 한 번에 지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의 피로써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히 9:11-12) 주님의 보혈이 아니고서는 그 무엇으로도 죄에서 떠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사람의 죄를 대속하실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이신 것을 믿기 바랍니다. 바울은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여,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이었습니다.(빌 3:10)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고백하였습니다.(갈 6:14)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나를 따라오려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눅 9: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지금까지는 자신이 주인이었으나 이제는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평생 주님을 따라가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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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논평] 하미자 목사의 ‘보혈의 능력’(벧전 1: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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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교회논평회 논평] 탄핵 기각으로 이 땅의 민주주의를 증명해야
- 오늘날 대한민국 대통령의 탄핵 여부는 우리나라 국민은 말할 것 없고 전 세계의 관심이 모인 최대 이슈입니다. 탄핵의 기각과 각하, 혹은 인용의 여부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꿀 숨막히는 결정이 될 것입니다. 제 개인적인 견해를 감히 밝히자면, 이번 탄핵이 반드시 기각 내지 각하될 것을 기대합니다. 이는 어느 개인을 지지하거나 지키고자 하는 것이 아닌 이 나라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하는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법의 상식을 기대하는 당연한 바람입니다. 한 가지 더 기대하는 것은 이번 기회를 통해 새롭게 각성한 우리나라가 부정선거 이슈를 완전히 정리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현재 다수의 국민들이 부정선거에 대한 의혹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의혹이 짙어지면 짙어질수록 더욱 감추려는 듯한 그들의 행태는 오히려 국민들의 의심을 증폭시키고 이 나라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먼저 선거관리위원회를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기관으로 재편해야 합니다. 그 어디보다 신뢰와 공정을 담보해야 하는 선관위가 가족회사라는 비아냥을 듣고 있는 것 자체가 우리 대한민국이 처한 불행이자 국민들의 수치입니다. 미개한 나라에서 존재할 이런 일이 어떻게 대한민국에서 가능할까요? 과연 이런 체제 속에서 당선된 국회의원들은 떳떳할 수 있습니까? 의혹 앞에 당당하다면 오히려 감추지 말고 더욱 적극적으로 모든 것을 공개해야 할 것입니다. 선거는 국민들의 대표를 뽑는 국가의 가장 큰 중대사입니다. 국가의 미래와 다음세대의 운명이 선거에 달린 셈입니다. 그렇게 중요한 선거가 굳이 편리만을 추구하는 것이 과연 옳을까요? 좀 더 번거롭더라도, 혹여 고생스럽더라도 한 점 의혹 없는 공명성을 취할 수 있는 길이라면, 결코 마다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논란 많은 사전선거를 없애고, 개표는 선거함을 이동하지 않은 상태에서 수작업으로 해야 합니다. IT산업 선진국인 대만도, 세계 최고 선진국 중 하나인 독일도 수작업으로 하는 것은 전자개표가 편한 것을 몰라서일까요?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요 기본입니다. 그렇기에 이번 탄핵이 기각되면 먼저 이 부분부터 바로 잡아주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만에 하나 탄핵이 인용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는 굳건히 지켜질 것입니다. 그 어떠한 시련과 폭압 속에서도 국민들이 자유민주주의를 갈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유를 달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달라”라고 말한 패트릭 헨리의 절규가 우리의 부르짖음과 같습니다. 지금 광화문을 위시하여 전국 각지에 그 많은 국민들이 모여 우리 대통령을 돌려달라 부르짖고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를 갈망하는 국민들이 스스로 거리로 나와 정의를 외치고 있습니다. 국민의 소리는 하나님의 소리입니다. 우리 민족은 그 심성이 착하나, 불의 앞에 결코 주저하지 않는 뜨거움 가슴을 갖고 있습니다. 3.1운동의 치열한 외침과 4.19혁명의 목숨 건 투쟁은 이 나라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위대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 자랑스러운 역사를 만들어 낸 이들이 바로 우리 대한의 민족입니다. 지금 대한의 민족이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염려하며, 대통령 탄핵 기각을 간절히 부르짖고 있습니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은 “저항할 줄 아는 국민이 있는 나라는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는 말씀으로 자신을 하야케 한 4.19혁명을 오히려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셨습니다. 우리 국민들은 지난 역사 속에서 불의 앞에 단 한 번도 타협하지 않았듯 이제 그 어떤 시련이 밀려와도 더 푸르른 저항으로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지켜낼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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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교회논평회 논평] 탄핵 기각으로 이 땅의 민주주의를 증명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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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완전한 구원자 예수’(눅 9:28-36)
- 예수께서는 변화산 사건 직전에 베드로에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신앙고백을 들으셨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가 바로 메시아이신 것을 드러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과 부활을 함께 드러낸 것이지요. 예수께서 우리 각자를 향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실 때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예수님에 대한 개인적인 고백을 해야 합니다. 의심 많던 도마는 마침내 부활하신 예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도마의 고백이 우리 각자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알려주신 수난 예고로 사기가 크게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께서는 영원한 천국의 영광을 미리 보여주심으로써 십자가 수난이 과정이지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렇게 제자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셨습니다. 본문은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무서워하더니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기도하시러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게 되었습니다. 문득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더니 예수님과 말하고 있었습니다. 예수의 영광을 본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짓겠다고 말할 때에 구름이 그들을 뒤덮었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예수께서 변화산상에서 그 모습이 변모된 사건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즉 메시아라는 사실과 장차 수난을 받으실 것과 다시금 주님의 영광을 회복하실 것을 알려주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여기서 모세는 율법을, 엘리야는 예언을 말합니다. 즉 구약의 율법과 예언을 이루는 길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변화산 사건은 예수님은 완전한 구원자이심을 알려주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우주적인 사건입니다. 기도하시던 예수님이 변화되시어 옷이 희어지고 광채가 났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한 것입니다. 기도할 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주님과 함께한 제자들은 그 기도의 능력을 경험한 것이지요. 그때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영적인 눈이 열려 보지 못한 것을 보게 되었고, 귀가 열려 듣지 못한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때의 체험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벧후 1:16-18)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서 별세는 ‘출발, 밖으로 나가다, 어디로 향하는 길’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영어성경에서 별세는 출발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별세는 예수님이 돌아가신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가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죽음을 출애굽으로 보았습니다. 애굽은 하나님 통치 없는 곳으로 하나님 없이 사는 세상을 말합니다. 그래서 출애굽은 죽을 자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구원의 은혜를 절대로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다음날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께서는 귀신들린 아이 아버지의 간청을 들으시고 그 소년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악한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셔서 그 아버지에게 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보고 놀랐습니다.(눅 9:37-43) 구약의 가장 큰 부분이 이스라엘이 기적적으로 구출된 출애굽입니다. 신약은 십자가 사건입니다. 즉 출애굽과 십자가는 하나입니다. 출애굽 사건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죄 용서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사랑을 어떻게 보답할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신 24: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믿기 전 사탄의 종노릇한 것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죄 사함 받은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과 부활을 전하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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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완전한 구원자 예수’(눅 9:2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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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김호연 목사의 ‘이 시대의 사무엘들을 찾음’
-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 성경은 그 시대를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던“ 시대라고 기록하고 있다(삼상 3:1). 그 시대는 사사 엘리가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로서 마지막을 보내던 시대였는데, 성경에 의하면 그는 눈이 어두워져 처소에 누워있기를 밥 먹듯 했던 것으로 보인다(삼상 3:2). 그는 육신적으로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분별력을 잃어 가고 있었고, 따라서 자신의 아들들의 비리조차 꾸짖지 못하는 그러한 상태였다. 과연 이러한 시대에 이스라엘의 소망은 무엇이며, 누가 하나님의 뜻을 저들에게 전하여 이 민족을 바로 인도할 것인가?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고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워 있었다”고 했다(삼상 3:3). 하나님은 그런 사무엘을 불렀다(삼상 3:4).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점을 발견한다. 그것은 첫째, 이 민족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이상이 희귀한 시대라도 하나님의 등불이 남아있는 한 소망은 있다. 하나님은 이 민족을 버리지 아니하고 사무엘과 같은 사람들을 통해 이 민족을 각성시키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 둘째, 하나님은 사무엘과 같은 사람들을 예비하여 훈련시키시고 그들을 불러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게 하리라는 사실이다. 사무엘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손에 맡겨져 훈련받은 사사요, 선지자였다. 그는 항상 하나님의 장막, 여호와의 궤 앞에서 잠을 청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늘 하나님과 가까이하기를 힘썼던 것이다. 그는 거기서 무엇을 했겠는가? 말씀의 훈련을 받았을 것이고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종으로서 훈련받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이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 줄 몰랐다. 그는 선생 엘리가 부른 것으로 착각하고 두 차례나 선생에게 가서 “부르셨냐?”고 물었다. 엘리도 얼마나 영안이 어두워졌던지 두 차례나 그것이 하나님의 부름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가서 자라” 했다. 그리고 세번 째서야 비로소 하나님이 그를 부른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부르시거든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하라 했다(삼상 3:9). 비록 노쇠한 엘리였지만 사무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를 이어 하나님의 종으로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데 마지막 소임을 다 한 셈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하나님이 사무엘을 불러 하신 말씀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엘리의 두 아들의 불의함을 보았고 그들을 심판하리라는 말씀이었다. 엘리는 사랑하는 제자 사무엘의 입을 통해 이 말을 다시 듣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미 엘리에게 이 뜻을 전했지만, 그는 아들들에 대한 저주를 자청하면서도 정작 그 자신이 나서 아들들의 비리를 금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삼상 3:13). 부정(父情)에 끌려 아들들을 망친 셈이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가 이와 같이 되지 않았는가? 영안이 어두워져 이상이 희귀한 시대가 되지 않았는지? 인간적 정리(情理)에 휘둘려 스스로의 죄조차 씻어내지 못하고 있는 처지에 빠져 있지 않은지? 최근 일부 모범이 되어야 할 위치에 있는 교계 인사들의 메시지나 행태를 보면서 과연 이 시대가 엘리의 시대와 같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불의한 세력이 나라를 뒤 흔들고 무도한 행위를 서슴지 않는 것을 보면서도 그들은 어째서 비겁하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말씀 뒤에 숨는가? 이 말씀은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할 것을 말한 것이지 네 자신이 심판의 위치에 서라는 말은 아닐 터다. “용서하고 화합하라”는 메시지를 듣기 좋으나 그것을 사단마귀의 세력에까지 확대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을 말씀에 근거하여 영적으로 분별하여 선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무분별하게 섞어 얼버무리는 것은 옳지 않다. 한 때 존경받는 위치에 있던 분들이 이로 인하여 삯군이라는 소리를 듣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다. 현 시국 한국교회는 사무엘의 영성으로 무장돼야 하리라. 그는 이스라엘 민족을 위로하면서도 경고했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고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치 않겠다 했다(삼상 12:20-25). 그래도 박조준 목사님이나 김진홍 목사님 같은 원로들이 계신 것에 감사한다. 전광훈 목사님이나 손현보 목사님 같은 분들이 주동이 되어 교회를 일깨우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함에 감사한다. 주류 신학교 교수들이 좌경화 되어 대통령 탄핵을 외치는 와중에도 학생들이 일어나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함에 감사한다. 한국교회는 쇄신되어야 한다. 나라와 민족을 살리고, 장차 하나님이 이 민족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비전을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 이 시대의 사무엘들을 찾음. 하나님의 부름에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성심으로 응답하는 종들이 더 많아지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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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김호연 목사의 ‘이 시대의 사무엘들을 찾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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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하미자 목사의 ‘중보기도의 힘’(출 32:11-14)
- 우리나라는 대한민국입니다. 대한(大韓)은 고종이 최초로 호칭하였고, ‘세상을 밝히는 큰 지도자’라는 의미입니다. 대한민국의 호칭은 매우 중요합니다. 2008년 8월 8일부터 24일까지 중국 베이징에서 올림픽이 개최되었습니다. 그때 204개국이 출전했는데, 대한민국은 17번째 들어가는 순서였습니다. 그러나 중국이 한국으로 격하시켜서 179번째로 입장했습니다. 전 세계 사람들이 20위까지만 관심을 두고 본다고 하는데, 대단한 홍보 효과의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세상을 밝히는 큰 지도자의 사명이 있는 자랑스런 나라입니다. 그 대한민국은 지금 위태위태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를 위해 간절히 중보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무엇이든지 우리가 주님의 뜻을 따라 구하면 우리의 청을 들어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일 5:14) 그래서 악한 세력이 떠나 이 땅이 고침 받고 주님께서 다시 대한민국을 번영시켜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출애굽한 모세는 백성의 우상 숭배로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때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주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11-13절)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뜻을 돌이키시어 말씀하신 재앙을 백성에게 내리지 않으셨습니다.(14절) 이처럼 기도는 주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백성이 금 신을 만들어 큰 죄를 범하였을 때도 모세는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1-32)라고 목숨 걸고 기도했습니다. 모세는 기도를 들으시고 인도해주시는 주님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대한민국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굳건하게 서도록 주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창세기 18장을 보면, 주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에 대한 부르짖음을 듣고 그 안에서 사람들이 엄청난 죄를 저지르는 것을 알고 내려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주님께서 하실 일을 알고 주님께 가까이 가서 의인이 악인과 더불어 멸망하는 것은 정의롭지 않다고 아뢰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곳의 실상을 다 아시지만 그들에게 회개하여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을 의지하여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간절히 중보기도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공의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의인 50명만 있으면, 45명, 40명, 30명, 20명, 10명만 있으면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의인 열 명이 없어서 소돔과 고모라는 유황과 불로 멸망했습니다.(창 19:24) 그럼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는 응답 안 된 것일까요? “하나님은, 들에 있는 성들을 멸하실 때에, 아브라함을 기억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롯이 살던 그 성들을 재앙으로 뒤엎으실 때에, 롯을 그 재앙에서 건져 주신 것이다.”(창 19: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생각해서 롯을 재앙에서 건져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보기도의 힘입니다. 에스더 4장을 보면, 에스더는 하만의 음모로 동족인 유다 백성이 멸망하게 되었을 때 모르드개에게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16절)라고 전했습니다. 그렇게 금식하며 기도할 때 주님께서는 유다 사람이 대적들을 진멸하도록 인도해주셨습니다. 금식하면 기도에 더 집중할 수 있습니다. 에스더는 사람의 힘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위기에 직면하자 많은 사람에게 중보기도를 요청하였습니다. 3일 동안 주야로 금식한 것을 볼 때 그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에스더의 고백은 동족을 위해 자신이 죽을지라도 왕 앞에 나가겠다는 결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겠다는 신앙의 결단이지요. 그런 용감한 결단으로 유대 민족 말살정책은 무산되고 오히려 이틀 만에 대적들이 전멸하는 대역전을 경험했습니다. 기도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입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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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하미자 목사의 ‘중보기도의 힘’(출 32: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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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 지금은 사순절입니다. 사순절은 예수께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기억하며, 그 은혜를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사순절은 우리의 무거운 짐을 예수께 내어 맡기고 구속한 주만 바라보는 절기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잠 8:17) 사순절에 주님을 간절히 찾아서 뜨겁게 만나기 바랍니다. 본문을 보면,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계시자이시며, 인간의 연약함을 돕는 중보자이신 것을 알려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려면, 경건 훈련을 해야 합니다. 경건 훈련은 모든 면에 유익합니다.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의 생명을 약속해 주기 때문입니다.(딤전 4:7-8) 경건은 사랑 실천을 전제로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약 1:2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순절 경건 훈련으로 회개, 절제, 기도 순으로 말씀을 살펴봅니다. 회개는 신앙생활의 출발점입니다. 우리는 회개해야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회개는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겠다고 결단하는 행위입니다. 회개하는 날은 새롭게 되는 날, 편히 쉬는 날, 상쾌하게 되는 날입니다.(행 3:19) 우리는 회개를 통해 구원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하는 것은, 회개를 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일로 마음 아파하는 것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고후 7:1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죄인이기에 항상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그것은 심판받을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죄 용서받을 기쁨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더욱 회개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죄를 더 짓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가 생각나는 대로 더욱더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면 우리의 상한 마음을 아물게 해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사 57:15b) 그것이 바로 회개하는 자에게 주시는 놀라운 은혜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열심히 내어 노력하고,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계 3:19) 회개는 오늘 바로 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히 3:7-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된 자유는 성숙한 절제에서 오는 것이지요. 절제하면 낭비하지 않고 목표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절제는 이웃과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면 모든 것에 절제할 수 있습니다. 절제하는 사람은 성령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갈 5:22-23) 사순절에 무엇을 절제해야 할까요? 첫째, 음식 절제입니다. 에스겔 16장을 보면, 소돔성이 멸망한 다섯 가지 이유가 나옵니다. 교만, 음식물의 풍족함, 태평함, 가난한 사람 돕지 않음, 우상 숭배입니다. 음식물의 풍족함은 너무 먹는 것이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과식은 질병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요. 사순절에 음식을 절제하고 영의 양식인 말씀으로 배부른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말의 절제입니다. “말을 조심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지만, 입을 함부로 여는 사람은 자신을 파멸시킨다.”(잠 13: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분노의 말과 부정적인 말을 삼가야 합니다. “속된 잡담을 피하십시오. 그것이 사람을 더욱더 경건하지 아니함에 빠지게 합니다.”(딤후 2: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쓸데없이 지껄이는 잡담은 시간만 낭비할 뿐입니다. 침묵도 중요한 말입니다. 침묵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며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를 맺게 해줍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게 해주는 침묵 훈련을 해보기 바랍니다. 셋째, 시간 절제입니다. “세월을 아끼십시오. 때가 악합니다.”(엡 5: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시며 기도하심으로써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새벽에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 없이 아무 일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열두 제자를 택하실 때도 밤을 새워 기도하셨고, 오병이어로 수많은 무리를 먹이실 때도 먼저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도 저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께서는 쉬지 않고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해 주시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삶의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면, 말씀으로 우리를 고쳐주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끌어내어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시 107:20)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붙잡고 확신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눅 21:3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내 안에 기쁨이 충만하면 기도응답이 된 것을 믿기 바랍니다.(요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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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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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주님의 뜻을 이해하는 삶’ (엡 5:17~21)
-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어리석은’이라는 단어는 매우 좋지 않은 단어입니다. 꼭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는 상태나 어른으로서, 성도로서 반드시 당연히 갖춰야 할 조건들을 갖추지 않았을 경우에 주로 사용하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사전적인 의미로 어리석음은 슬기롭지 못하고 둔한 경우를 말하기도 합니다. 어리석음의 반대는 지혜로움입니다. 사람이 지혜롭게 되는 것은, 그것을 원한다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만 되지는 않습니다.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지혜도, 사랑도, 은사도, 믿음도, 아름다운 소망도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귀한 은혜요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따라, 지혜를 주실 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믿음을 줄 만한 자에게 더 큰 믿음을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달란트를 주실 때도 그 사람의 재능대로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마태복음은 이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마 25:15). 각 사람의 재능에 따라 소유를 맡겨주셨다는 의미 속에는 사람마다 각각 고유한 인격과 역할이 있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인 각각의 인격과 역할을 중요하게 여기시지만, 사람에 따라서 일의 운용방식이나 책임과 인품은 제각각 다를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분이시지만, 받는 사람의 마음과 자세는 사뭇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말씀대로 사람은 결코 어리석은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면 어리석은 결정을 하게 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귀하게 생각하시는 것은 막상 눈이 감기고 귀가 닫혀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며, 자신이 스스로 귀하다고 생각하는 일만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 7:6) 돼지에게 진주를 주어도 그것을 알아볼 수 없는 것처럼, 영혼이 잠자고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귀한 자원이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한, 본문 말씀은 술 취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술 취함은 방탕한 것이라 했습니다. 술은 일반 음식이나 음료와는 달라서 그것을 섭취함으로 끝나지 않고, 다른 어둠의 경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오직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또한, 성도는 서로 화답하며 지내야 합니다. 시와 찬미와 영적인 노래로 서로 이야기하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19절). 교회 안팎에서 성도들이 만나면 주로 어떤 대화를 나눌까요? 사람 이야기, 목사 이야기, 어느 성도 이야기, 사건 이야기 등 다양할 것입니다. 물론 필요한 말을 해야 함이 당연하지만, 기본적이고 근본적으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이야기나, 은혜받은 이야기, 하나님의 전적인 역사하심 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즐거워해야 할 것입니다. 대화를 하면서 서로 간에 영적인 은혜를 누릴 수 있을 만한 주제와 내용이 오가야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계절, 새로운 시절을 맞이하면서 우리에게 주신 삶을 사는 동안, 우리나라와 교회와 각 개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지혜를 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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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주님의 뜻을 이해하는 삶’ (엡 5:1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