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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복 받는 길을 택함’ (수 8:24~35)
    “그 후에 여호수아가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 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 모세가 명령한 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온 회중과 여자들과 아이와 그들 중에 동행하는 거류민들 앞에서 낭독하지 아니한 말이 하나도 없었더라” (33-35절) 오늘 말씀의 내용은 아이 성을 정벌하는 구체적인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광야 벌판에서 아이 성 사람들을 끝까지 뒤쫓아가서 칼로 모두 무찌릅니다. 성 안팎에 있던 모든 아이 성 사람들이 죽게 됩니다. 그 날 아이 성에서 죽은 사람은 남자와 여자를 모두 합해 만 이천 명입니다. 이 전투 동안 여호수아는 손에 든 창을 높이 치켜든 채 내리지 않았습니다. 아이 성의 모든 백성이 완전히 멸망할 때까지 그는 그 자세를 유지하며 전투를 지휘했습니다. 한편 이스라엘 백성은 사람들은 모두 진멸했지만, 짐승들과 아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물건들은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신 대로 전리품으로 취했습니다. 전리품을 취할 때가 있고 취하지 말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하심과 그 선포하신 말씀을 그대로 따라서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에서 실패한 사람이 아간입니다. 아간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큰 위험에 처할 뻔했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간의 범죄는 하나님의 명령을 경시하고 탐욕과 사리사욕에 사로잡힌 결과로 나타난 사건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잃고 눈에 보이는 재물에 마음을 빼앗겼으며, 공동체 안에서의 거룩성보다 자신의 이익을 앞세우는 태도를 드러냈습니다. 여호수아 시대에 그렇게 멸망한 아이 성은 오랫동안 폐허의 상징처럼 남아 있었습니다. 이후 여호수아는 전쟁에서 승리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해 에발 산에 제단을 쌓습니다. 그 제단은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미 율법책에 명령해 둔 방식 그대로, 쇠 연장으로 다듬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돌들로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제단 위에서 여호와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자신들을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예배를 올리게 됩니다. 에발산에 쌓은 제단을 자연 그대로의 돌들로 만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출애굽기 20장 25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네가 내게 돌로 제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 가나안 지역의 제단과 신전들은 종종 정교하게 다듬은 돌, 조각, 상징적 문양들로 장식되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자연 그대로의 돌을 사용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이방의 종교나 문화와는 다르게 하나님 앞에 “성별(聖別)”하라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보이는 것의 화려함보다는 말씀과 언약, 순종이라는 보이지 않는 중심을 중요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부분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떠나 자기의 욕심을 따라갈 때 교회와 공동체에 물의를 일으키게 됩니다. 그날 장로들, 지도자들, 재판관들, 레위 제사장들, 그리고 온 백성이 언약궤를 가운데 두고 에발 산과 그리심 산 앞에 나뉘어 서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뿐 아니라 여자와 아이들, 함께 사는 이방인들까지 모두 모였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가 전해 준 율법에 기록된 복과 저주의 말씀을 빠짐없이 낭독하여, 전쟁의 승리 뒤에 온 백성이 다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게 하였습니다. 신명기 27–28장에 따르면, 그리심 산 쪽에서는 순종할 때 주어질 복에 대해서, 에발 산 쪽에서는 불순종할 때 임하는 저주에 대해서 선포했습니다. 레위 사람들은 큰 소리로 조목조목 복과 저주의 말씀을 선포했고, 그때마다 백성은 “아멘”으로 응답했습니다. 이들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같습니다. 인생을 살아갈 때, 우리 앞에도 언제나 복과 저주의 길이 놓여 있습니다. 우리에게 선포된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따라감으로써 축복의 자녀가 모두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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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08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하나님의 형상대로’(창 1:26-27)
    주님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임을 보시고서,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습니다.(창 6:5-6) 이처럼 사람이 태초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모습은 사라지고, 죄악으로 가득 차 마귀의 종노릇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의인은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고 알려주었습니다.(롬 3:10-11) 본문을 보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우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창조 사역에 동참하셨음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른 생물들과는 달리 사람을 인격적이고 영적인 존재로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하는 대상으로 지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형상은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 의지, 공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형상은 영혼육의 전인적인 인격과 성품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본질입니다. 예수께서는 능력의 말씀으로 피조물을 주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모든 죄를 없애심으로써 이 세계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야 하는데, 사람은 스스로 죄와 사망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라고 탄식하였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이후 한 사람도 사망의 몸에서 스스로 벗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태초에 당신의 형상으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의 형상으로 태어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아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이십니다.”(골 1: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망의 몸에서 벗어나는 길은 마귀의 형상을 벗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길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목적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 따르는 삶이 마땅합니다. 아담이 사탄의 유혹으로 죄를 지음으로써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새롭게 창조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세상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 전부터 계신 성자로서 하나님이신 것을 믿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모양으로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을 닮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성령님의 도움으로 우리의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합니다. “여러분이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롬 8:13)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롬 8:14) 하나님의 영은 우리를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 안으로 인도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야 합니다. 우리는 전인격적으로 우리의 영혼육의 온 형태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도록 날마다 성령님과 인격적으로 교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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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30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이 시대, 하나님을 소유한 백성’(계 2:8~11)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9-10절) 예수님께서 요한을 통해 계시를 주셨습니다. 특히 일곱 교회를 향한 말씀이 계시록의 초반에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은 서머나 교회의 지도자에게 이 편지를 써서 보내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일곱 교회 가운데 두 교회, 즉 서머나교회와 빌라델비아교회만이 책망 없이 칭찬과 격려만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처음과 마지막이며 죽었다가 살아난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시며 모든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서머나교회와 지도자가 겪고 있는 고난과 가난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9절). 그렇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사실 서머나교회와 그 지도자는 부요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난은 우리에게 어떠한 상황을 제공합니까? 가난하면 불편함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가난하면 쉽게 업신여김을 받게 됩니다. 저절로 낮은 자리가 되어집니다. 볼품없고 빈약해보이는 자리에 앉게 됩니다. 그러하기에 여러 핀잔과 아쉬운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런데 가난한 가운데서 느끼는 처절함과 불편함과 박대 속에서 더욱 필요하고 요긴해지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믿는 일입니다. 가난함은 어려움의 대명사입니다. 각종 고통의 중심에 처해있을 때 우리는 간절해지고 이때 예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픈도어 선교회는 매년 세계에서 기독교로 인해 박해받는 50대 국가를 선정해서 발표하고 있습니다. 올해 들어와 아프리카의 수단과 나이지리아 지역은 수천명의 기독교인들이 살해당하는 일이 있어서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수단은 박해받는 국가들 중 5위에, 나이지리아는 7위에 올라있을 정도로 기독교 탄압과 핍박이 심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박해받는 국가 50개국 중에서 주로 1위에 많이 올라있는 나라가 있습니다. 바로 북한입니다. 우리나라와 가장 근접한 나라, 북한입니다. 형제의 나라이기도 합니다. 이들 국가들은 가난한 중에 신앙으로 인해 핍박까지 받고있는 실정입니다. 이들 국가를 위한 지원과 기도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특히 가난하고 위협받는 처절함 중에도 예수님을 믿고자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아프리카 지역이 특히 그러합니다. 나이지리아는 인구의 약 46%가 기독교 신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안전할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불안에 떨며 지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도 결코 안전한 시대에서 산다고만은 볼 수 없습니다. 반기독교인들로 인한 위험도 크지만, 자칭 유대인이라는 사람들로 인해 성도가 겪는 고난도 큽니다. 자칭 유대인이라는 의미는, 자신들이 선택받은 유대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멀리하며 신앙인들에게 무거운 굴레를 씌우거나 박해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성경은 그들이 유대인이 아니라 실상은 사탄의 집단이라고 말씀합니다. 서머나교회에 하신 말씀은 오늘날 우리와 우리의 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음을 제대로 가다듬지 않고 방종하게 되면 자칫, ‘자칭 유대인’처럼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죽기까지 충성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생명의 면류관을 우리에게 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소유한 자로서 그야말로 부한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과 말씀으로 고난을 이겨내며 끝까지 충성하셔서 최고의 은혜를 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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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24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올바른 금식’(마 6:16-18)
    예수께서는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시며 기도하심으로써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모세도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받을 때 40일 동안 금식하였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 집중하기 위해서입니다. 금식은 단순히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식은 영적인 힘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삶의 금식입니다. 평상시에도 문제가 있든 없든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연약함과 악의 공격으로부터 승리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금식할 때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먼지와 재 등을 뒤집어씀으로써 자신이 금식하는 것을 알렸습니다. 위선적인 금식을 한 것이지요. 그들은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의 눈을 의식하며 금식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금식은 모든 것을 제쳐 두고 삶의 원점으로 돌아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삶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기도와 금식은 오직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행위이지 사람들 앞에 자신의 경건함을 나타내 보이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억압받는 자들에게 관심 두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약한 자와 가난한 자들에 대한 폭력을 멈추고 그들에게 자유를 주며 주린 자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는 행위가 동반될 때 진정한 금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사 58:6-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을 하면 어떤 복을 주실까요?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사 58:8-9a)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수시로 가정, 교회, 나라를 위해 금식기도를 해야 합니다. 에스더는 하만의 음모로 동족인 유다 백성이 멸망하게 되었을 때 모르드개에게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라고 전했습니다. 3일 동안 주야로 금식한 것을 볼 때 그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 민족 말살정책은 무산되고 오히려 이틀 만에 대적들이 전멸하는 대역전을 경험했습니다. 금식기도의 힘입니다. 요나서 3장을 보면, 니느웨 사람들이 금식하며 하나님께 함께 부르짖어서 재앙을 면한 말씀이 나옵니다. 요나는 니느웨 성읍으로 가서 하룻길을 걸으며 사십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니느웨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모두 굵은 베 옷을 입었습니다. 이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전해지자 왕도 임금의 옷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잿더미에 앉았습니다. 왕은 백성에게 “왕이 대신들과 더불어 내린 칙명을 따라서, 사람이든 짐승이든 소 떼든 양 떼든, 입에 아무것도 대서는 안 된다. 무엇을 먹어도 안 되고 물을 마셔도 안 된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굵은 베 옷만을 걸치고, 하나님께 힘껏 부르짖어라. 저마다 자기가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고, 힘이 있다고 휘두르던 폭력을 그쳐라.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리고 노여움을 푸실지 누가 아느냐? 그러면 우리가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7-9절)라고 선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는 것을 보시고, 뜻을 돌이켜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뉘우치는 것, 곧 그들이 저마다 자기가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는 것을 보시고, 뜻을 돌이켜 그들에게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10절)라고 알려주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함께 금식하며 하나님께 함께 부르짖어서 재앙을 면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공동체 금식의 힘입니다. 함께 기도하며 함께 금식할 때 주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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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16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같은 마음을 품으라’ (빌 4:1~9)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2-3절) 바울이 그러했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사모하며 서로의 기쁨이 되고 면류관이 된다는 것이 서로 간에 얼마나 큰 힘과 능력과 삶의 기쁨이 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따라다니면서 증오하고 혐오하며 핍박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형제자매로 부를만한 기쁨과 소망과 힘이 되는 많은 성도와 동역자가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와 같은 사랑과 힘이 되는 성도들을 자신의 면류관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하는 성도들이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기를 권면하였습니다. 그 권면의 중심된 내용은 주님 안에서 서로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름이 명명된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모두 여인이었습니다. 빌립보교회가 자색 옷감 장사인 루디아에 의해서 설립되었기에 상대적으로 여인들이 많았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동역자들에게 이 두 여인을 도와줄 것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으로 볼 때 유오디아와 순두게 사이에는 다소 어려운 관계전선이 형성돼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여인들은 글레멘드와 그 밖의 바울의 동역자들과 더불어, 복음을 전하는 일에 함께 애쓴 사람들이었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니는 일반적인 교회 안에도 이러한 상황들은 즐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교회 안에서 열심을 내는 성도들 간에 발생하는 심각한 감정의 깊은 골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다 할지라도 각자 부족한 부분이 있기에 곧잘 트러블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점점 시험에 들게 되면 교회 전체에 어두운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면서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이야기 한 것입니다. 각자 자기 마음이 있고, 자기의 삶의 방식이 있으며, 자기만의 유전된 감각과 방식이 있기에 서로 같은 마음을 품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도 이와 유사한 내용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즉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 1:10)고 강조한 것입니다. 제각각 특성과 기질이 다른 사람으로서 어떻게 하면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뜻을 가질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온전히 합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일을 감당하려면 먼저 주님 안에서 일을 해야 합니다. 주 안에서 관계하고 주 안에서 협력해야 하며, 주 안에서 모두의 목적을 두고 일치시키며 주님의 길을 따라가야만 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바울은 서로의 관계로 인해 침체의 늪에 빠진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우리도 교회 안에서 이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기뻐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관용하며, 오직 기도로 간구하고 염려치 말며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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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10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하미자 목사의 ‘5대 확신’(요일 5:11~12 외)
    5대 확신은 신앙의 뿌리입니다. 5대 확신은 구원의 확신(요일 5:11-12-“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기도응답의 확신(요 16:24-“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승리의 확신(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사죄의 확신(요일 1: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인도의 확신(잠 3:5-6-“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입니다. 5대 확신을 구체적으로 살펴봅니다. 1. 구원의 확신: 구원에 대한 질문과 답을 풀어봅니다. 첫째, 어떻게 죄를 용서받을 수 있나요? 예수님을 믿으면 됩니다.(요 3:16) 영생은 무엇입니까?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 17:3) 둘째, 왜 구원받아야 하나요?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입니다.(롬 3:23)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자녀는 어떻게 될 수 있나요? 예수님을 영접하면 됩니다.(요 1:12) 영접은 예수님 믿지 않는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내 마음의 주인으로 믿는 것입니다. 넷째, 어떻게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나요? 누구든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마음의 문을 열면 됩니다.(계 3:20) 2. 기도응답의 확신: 쉬지 말고 기도하면 항상 기뻐할 수 있고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기쁨이 충만하면 기도응답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면, 주 안에서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회복할 수 있습니다.(욥 33:26)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알지 못할 때 성령께서 친히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주십니다.(롬 8:26)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어야 그대로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막 11:24) 우리가 새벽에 기도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시 46:5b) 우리를 일생동안 즐겁고 기쁘게 해주십니다.(시 90:14) 내가 다닐 길을 알려주십니다.(시 143:8) 새벽기도는 무기입니다. 3. 승리의 확신: 고린도전서 10장 13절 말씀은 내가 감당할 만한 시험만 주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당하는 고난은 세상 사람들도 당하는 고난이며, 그 고난을 믿음으로 견뎌내면 승리한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충만해도 고난 당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고난받는 까닭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 가운데서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가 당하는 시험은 우리의 믿음을 성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고난 당할 때 말씀을 굳게 붙잡아야 힘써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위로를 통해 고난을 견디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고후 1:6) 4. 사죄의 확신: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가 아무리 많을지라도 우리가 회개하면 그 죄를 용서해 주시고 다시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다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주님의 발로 밟으셔서 깊은 바다로 던지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미 7:19) 우리가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입니다.(벧전 1:18-19) 그래서 주님의 보혈은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5. 인도의 확신: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신뢰하고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앞길을 알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합니다.(잠 20:24) 출애굽기 13장 17-22절을 보면, 하나님의 인도 방법은 가까운 길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안전하게 인도해주십니다.(17절) 믿음의 선배가 인도하게 하십니다.(19절) 앞서 인도하십니다.(21절) 하나님은 앞서 우리를 보호하시며 계획하시고 인도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 영원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업어서 인도해주시고(출 19:4), 우리를 안아서 인도해주십니다.(신 1:31) 그렇게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시 48:14) 말세에 세 가지 악이 있는데, 방탕함, 술취함, 생활의 염려입니다.(눅 21:34) 그만큼 염려는 큰 죄악입니다. 신앙의 반대는 염려입니다.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25)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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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3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라’(갈 5:13~14)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키셔서 우리는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율법의 종이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할례를 받고 다시 율법으로 돌아간다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구약 시대처럼 율법 전체를 지켜야 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면,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끊어지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게 될 것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 이 소망을 간절히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다면,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 인해 나타나는 믿음뿐입니다. 우리의 달려가는 믿음의 길을 누군가가 막아 진리를 따르지 못하게 한다면, 그런 유혹은 하나님이 아닌 어둠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성경은 우리에게, 적은 누룩이 반죽 전체에 퍼져서 부풀게 만든다는 경고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누룩은 어떤 것을 변화시키거나 부패시키고, 점진적인 작용을 통해서 전체를 변화시키기 위해 쓰이는 혼합물을 비유적으로 나타내는데 사용하는 말입니다. 이 누룩은 천국 비유를 설명할 때를 제외하곤 대부분 성경에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누룩 역시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본질적인 사랑과 믿음이 아닌, 율법주의자들의 거짓된 종교심과 위선으로 가득한 실상을 숨긴 채 어두운 마음이 사방에 번지도록 하는 죄악성을 누룩에 비유한 것입니다. 성도와 교회 안에서 교회와 말씀의 순수성과 거룩함과 진실된 열심 위에 누룩과 같은 죄와 욕심이 사방으로 퍼져서 개인이나 온 성도들을 혼란하게 하는 사람은 심판을 받을 것에 대해서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즉 개인의 율법적인 성향과 회개되지 않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더럽고 추악한 인간의 정욕과 교만함이 묻어있는 교회와 개인의 빗나간 잘못된 전통을 가르친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일인 것이며 이는 세상이 좋아하는 일이 되는 것임을 성경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희생과 십자가 사랑이 아닌, 빗나간 종교성을 주장하는 이른바, 할례를 주장하면서 혼란만 일으키는 사람들은 할례의 대상이 되는 그 지체를 아주 잘라 버리기를 바란다고 성경은 강력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거세를 뜻하는 것으로, 차라리 연자맷돌을 매고 물속으로 빠지는 게 낫다는 표현과 동등한 내용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과 그 사랑에 누가 되고 역행하는 어둠의 마음이 되지 않기를 하나님은 바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셔서 자유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를 자기의 욕망을 채우는 기회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겨야 합니다(13절). 성경의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고 말씀하신 한 가지 계명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14절). 그러므로 성도는 자기 우세함을 보이기 위해 서로를 해롭게 하는 마음이 아닌,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의 마음으로 서로를 대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주의 사랑으로 가득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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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8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오직 한 길’(요 14:6)
    세상에 많은 길이 있으나 그 길이 모두 옳은 길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가야 할 길은 의의 길로 나아가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죄인 된 백성을 구원하려고 찾아오셔서 만백성이 따라야 할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길은 누구나 갈 수 있는 길이지만 쉽지 않은 좁은 길입니다. 주님 안에 거하지 않는 사람은 알 수 없는 신비한 길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을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나님 아버지께로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이르는 길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 없이는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주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실제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탄의 종노릇하며 죽음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 길, 그들로 하여금 진리와 생명의 길을 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을 수 있도록 전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멸망의 길과 생명의 길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비좁아서 찾는 사람이 적습니다.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널찍하여서 그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널찍하여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길이 비좁아서, 그것을 찾는 사람이 적다.”(마 7:13-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에는 곁길도 있습니다. 우리가 곁길로 가면 길 잃은 양떼처럼 방황하며, 쉬던 곳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나의 백성은 길 잃은 양 떼였다. 목자들이 그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여, 그들이 산 속에서 헤맸다. 양떼가 산과 언덕에서 방황하며, 쉬던 곳을 잊어버렸다.”(렘 50: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만 똑바로 바라보고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9:23) 그 길은 고난의 길이 아니라 영광의 길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귀는 아담을 유혹하여 죄를 범하게 함으로써 하나님과 단절되게 하였습니다. 아담은 진리와 생명의 길을 택하지 않고 거짓과 죽음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 타락 이후에 많은 사람이 생명의 길을 찾으려 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 길을 제시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모든 노력은 헛수고였습니다.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 없이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주님만이 진리와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도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이 늙어도 그 길을 떠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걸어야 할 그 길을 아이에게 가르쳐라. 그러면 늙어서도 그 길을 떠나지 않는다.”(잠 2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9장을 보면,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우선순위를 두는 가치관을 가져야 하며, 자꾸 세상을 돌아보면 안 된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62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밭을 가는 농부는 앞만 보고 달려가야 합니다. 뒤를 돌아보면 밭이랑이 굽어지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는 세상 관심을 가지고 따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제자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공의를 실행하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9장을 보면, 베드로가 주님께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는데 무엇을 얻을 수 있느냐고 말하였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28-29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따르면서 보상을 기대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물려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공로와 노력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주어지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롬 3:22) 주님을 따라가는 것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 그리고 나의 십자가의 길 뒤에는 부활이 있고, 하나님 나라의 영생이 있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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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0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시 112:1~6)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의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한 자들의 후손에게 복이 있으리로다. 부와 재물이 그의 집에 있음이여 그의 공의가 영구히 서 있으리로다”(1-3절) 하나님 모시기를 진정으로 귀히 여기며 주님을 존중하고 두려워할 줄 알며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기를 기뻐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는 이러한 마음과 자세로 사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하나님을 자기 정욕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은 이런 두 부류의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게 됩니다. 각자 자기를 중심으로 사는 경향이 많다 보니 세상살이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분명한 기준과 지침이 있으니 바로 성경,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을 가지고서도 신학적인 노선이 나뉘거나, 혹은 자기중심적인 해석이나 적용을 하는 위험도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환경과 마음 밭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세상에 볼거리가 많고 할 거리가 많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뒷전으로 여기기 쉽지만, 무엇보다도 주님의 말씀을 자기의 것으로 삼고, 마음 판에 새기며, 그 말씀대로 적용하며 사는 일은 매우 귀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10월은 종교개혁이 진행되었던 달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 교회의 문에 면죄부 판매에 대한 95개조 반박문을 붙였습니다. 즉 개혁의 주된 배경이 된 것은, 교황청이 성 베드로 성당 건축 자금을 위해 면죄부(indulgentia)를 판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면죄부 판매를 반재하고 95개조 반박문을 교회 문에 붙인 이 사건으로 인해 루터는 로마 교황권에 정면으로 도전한 인물로 주목받게 되었고, 교황인 레오 10세는 루터에게 칙서를 보내 이단 혐의를 경고했습니다. 루터는 보름스 회의에 소환됐지만, 자신의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붙들려 있음을 선포했습니다. 결국 루터는 교황으로부터 파문당했고,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무법자로 선포됩니다. 루터는 처형당할 위험에 처하자 약 10개월간에 걸쳐 이름도 가명을 사용한 채 한 성에 숨게 됩니다. 이 은신기간 동안 루터는 거기에서 신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게 됩니다. 복음증거와 진리의 선포를 위해 핍박받는 기간은 고통의 기간이지만, 이 기간이 중요한 시간입니다.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시간이며, 개인적인 은신기간이고, 우리 삶의 미래를 준비하며 하나님과의 약속을 이뤄나갈 중요한 시간인 것입니다. 루터는 모든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읽고 이해해야 한다는 믿음으로 성경번역 작업을 했습니다. 이에 따라 그동안 알 수 없는 말(라틴어)로 거행되는 장면을 보는 예배가 아니라, 민중의 언어인 독일어로 성경이 번역되어 민중들의 손에 하나님의 말씀이 쥐어지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1절). 하나님의 복된 말씀을 귀히 여기고 즐거워하며 지혜를 얻기 바라는 진정어린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사람의 자녀들은 땅에서 부강할 것이며, 정직한 자의 후손들이 복을 받으리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그의 집에는 부요와 재물이 있을 것이며 그의 의로운 행위는 영원히 남는다는 것입니다. 정직한 사람은 흑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비추시는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3-4절). 하나님 앞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남에게 아낌없이 은혜를 베풀며 꾸어주는 사람과 자기 일을 정직하게 수행하는 자에게는 모든 일이 잘 될 것임(5절)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한 사람은 결코 흔들리지 않으며, 그러한 사람은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6절).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며 주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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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13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다윗의 선택’(삼하 24:18-21)
    오르난은 아라우나의 또 다른 이름이며, 여부스 사람으로서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진 모리아 산에 타작마당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르난의 타작마당은 일찍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린 모리아 산입니다. 그 땅은 하나님의 성전이 들어설 거룩한 장소로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대하 3:1) 본문을 보면, “이 날에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그에게 아뢰되 올라가서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으소서 하매 다윗이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바 갓의 말대로 올라가니라 아라우나가 바라보다가 왕과 그의 부하들이 자기를 향하여 건너옴을 보고 나가서 왕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이르되 어찌하여 내 주 왕께서 종에게 임하시나이까 하니 다윗이 이르되 네게서 타작 마당을 사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아 백성에게 내리는 재앙을 그치게 하려 함이라 하는지라.”라고 다윗은 말하였습니다. 이 타작마당의 배경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다윗 왕이 인구 조사를 하고 나서, 하나님 앞에서 죄를 용서하여 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다윗이 백성을 조사한 후에 그의 마음에 자책하고 다윗이 여호와께 아뢰어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삼하 24:10)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갓을 보내 세 가지 벌 중 하나를 택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7년 기근을 당하든지, 원수에게 쫓겨 3개월 동안 도망다니든지, 3일 동안 전염병을 당하든지 선택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아뢰어 이르되 왕의 땅에 칠 년 기근이 있을 것이니이까 혹은 왕이 왕의 원수에게 쫓겨 석 달 동안 그들 앞에서 도망하실 것이니이까 혹은 왕의 땅에 사흘 동안 전염병이 있을 것이니이까 왕은 생각하여 보고 나를 보내신 이에게 무엇을 대답하게 하소서.”(삼하 24:13)라고 말하였습니다. 다윗이 갓의 말을 듣고 전염병을 택하자 이스라엘에 3일간 전염병을 내리셔서 7만 명이 죽었습니다. “이에 여호와께서 그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전염병을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 명이라.”(삼하 24: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일 후에 다윗은 갓의 지시에 순종하여 하나님께 제단을 쌓아 백성에게 내리는 재앙을 그치게 하려고 아라우나로부터 타작마당을 샀습니다. 그러자 아라우나는 모든 것을 다윗에게 다 드리겠다고 하였습니다.(삼하 24:22-23) 그러나 다윗은 내가 값없이 얻은 것으로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지 않겠다며 은 오십 세겔을 주고 타작마당과 소를 샀습니다.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다윗이 은 오십 세겔로 타작 마당과 소를 사고.”(삼하 24:24) 이 값은 금 600세겔에 해당됩니다.(대상 21:25) 다윗이 엄청난 금액을 주고 타작마당을 산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해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께 번제 드리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주님께 온 마음을 드렸습니다. 그렇게 오르난의 타작마당을 산 다윗은 그곳에 하나님을 위한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번제단에 불이 임하였고, 그 땅을 위한 회개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의 재앙이 그치도록 해주셨습니다.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삼하 24:2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땅에서 하나님은 불로 현현하셨고, 다윗의 회개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에 내린 전염병을 그치게 하시고 그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천사에게 명하셔서, 그의 칼을 칼집에 다시 꽂게 하셨습니다.(대상 21:27) 다윗은 회개하는 왕이었습니다. 나단이 다윗에게 죄를 지적했을 때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솔직하게 죄를 고백하였습니다. “그 때에 다윗이 나단에게 자백하였다.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임금님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임금님은 죽지는 않으실 것입니다.”(삼하 12:13)라고 알려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바로 회개의 눈물입니다. 우리가 후회하면서 살면 과거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회개하면서 살면 현재와 미래의 삶을 열어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 사함을 받으려면, 회개하고 돌이켜서, 하나님 앞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회개하고 돌아와서, 죄 씻음을 받으십시오.”(행 3:1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죄를 회개하면 용서해 주시는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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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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