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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기도의 결국은 감사와 유익입니다’(골 4:2)
    성도라면 누구나 기도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기도해야 한다는 대해서 모두가 공감하며 총론적으로는 다 그렇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각론에 들어가면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는 말이 있듯이, 어떤 이유로든 자기를 합리화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옳지 않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항상 기도에 힘써야 하겠습니다(시 72:15, 시 141:5, 눅 18:1, 눅 21:36, 행 10:2). 기도는 영적 호흡이요, 영적 생명줄과 같습니다. 또 기도는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이며,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길이고, 삶에 활력을 얻는 은혜의 근원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이 아닙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고 명하셨습니다. 좋을 때나, 괴로울 때나, 슬플 때나, 즐거울 때에나 어떤 처지와 형편이든지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소망이 생기고, 환경도 상황도 인생도 바꾸어 놓습니다. 환경과 현실만 보고 구하지 말고, 앞을 바라보며, 입을 크게, 넓게 열어야 합니다(시 81:10). 저희 교회 집사님 중 한 분이 8년 전에 아내가 병으로 위경에 처했을 때, 담당의사가 장례준비를 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낙망이 되어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2년만 더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2년만 더 살아도 어디 입니까? 그 후 정확하게 2년을 더 사시고 하나님나라에 가셨습니다. 장례를 치루고 나서 집사님께서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까 ‘그때 5년만 더 살게 해달라고 기도할 껄’ 후회가 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이성으로, 자기 판단으로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현실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들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히 11:1)? 믿음으로 확신을 갖고 담대하게 구해야 할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역사해주십니다(약 5:15). 그런데 기도의 응답이 더디거나, 간구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실망하며 시험에 들거나 낙심될 때가 있습니다. 저 역시 열심히 기도했는데, 정반대의 결과를 마주칠 때, 혼란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기도자로서 옳지 않은데 말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이루시니, 우리는 기도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간구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실망하거나 무력감에 빠지지 않아야 하며, 시험에 들거나 낙담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기도자는 하나님의 뜻을 기다릴 줄 알고, 소망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진정한 기도는 감사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간구보다 높으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으면 감사할 일이 아닙니까? 또 기도에 열중하며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갔고, 그 만큼 신앙의 성장과 진전을 이루었잖습니까? 기도의 응답이 있기까지 기다리는 인내의 훈련도 받지 않았습니까? 이런 유익을 놓치고 탄식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는 어떤 결과가 나와도 감사와 유익뿐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도로 이끄시어,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굳건하게 세워나가시는 선하시고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응답이 되지 않았다고 해서 낙망해서는 안 됩니다(눅 18:1). 오히려 하나님의 더 큰 사랑과 계획을 알게 되었기에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며, 하나님의 뜻을 존중해야 하겠습니다. 기도는 도깨비 방망이가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항상 온전히 기도에 힘쓰고, 기도할 때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다(골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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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09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감찰하시는 하나님’(잠 16:2)
    우리가 어느 곳을 가든지 눈에 띄는 것이 있는데 바로 CCTV입니다. 그러나 CCTV가 아무리 많이 설치되었더라도 촬영범위를 넘어서면 촬영이 불가능합니다. 설치되지 않는 곳은 더욱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세상 어느 곳이든지 감찰하지 못하는 곳이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높은 하늘에 계실지라도 땅에 있는 모든 사람을 감찰하시되 마음까지도 감찰하십니다. 그러기에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감찰하사 모든 인생을 보실 뿐(시 33:13)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의 생각과 뜻을 다 아시고(히 4:12: 계 2:23), 그들의 모든 말과 행위를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139:3-4).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자신의 행위는 깨끗하고 양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께서는 겉으로 들어난 행위뿐 아니라 마음속까지 파악하시기에, 사람의 숨은 마음까지, 곧 그의 마음의 생각과 감정과 의향 그리고 행동의 동기까지 살피시고 그것이 과연 깨끗하고 선한지 혹은 불결하고 악한지 평가하십니다. 인간의 육신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또한 인간의 마음을 지으신 분이시기에(시 94:9) 마음속에 있는 생각과 의도를 속속들이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피할 곳이 없고(시 139:7-9),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하나님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습니다(히 4:13).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선한 행위도 감찰하시고, 인간의 악한 행위도 감찰하시니, 하나님의 전지성 앞에서 경외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요셉은 아무도 없는데서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할 때 하나님께 득죄할 수 없다며 그 자리를 뛰쳐나왔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을 보십니다(삼상 16:7). 그러기에 마음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하나님께서만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귀도 역사하기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분별을 통해 마음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특히 마음의 급속한 요동을 가져오는 기분 감정에 지배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말씀과 성령의 지배를 받아 사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기분 감정에 사로잡히면, 마귀에게 마음을 내어주는 게 됩니다.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이루어가야 합니다(롬 12:2). 마음이 바뀌면 행동이 달라집니다. 즉 내 마음이 변하면 삶의 모습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마음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나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바로 정립해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절망에 억눌려 한숨으로 살았다면, 그 절망을 끄집어내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원망과 불평이 내 생애를 지배했다면 그것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게으름과 나태와 미움과 증오도 못 박아야 합니다. 주님보다 이 세상의 다른 것들을 더 사랑하고 귀하게 여겼다면 그것 역시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순간 새로운 자아가 탄생합니다. 그것은 신비로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순수한 마음과 순수한 신앙을 가진 사람을 들어 쓰십니다. 하나님도 믿고, 재물도 믿고, 권력도 지식도 명예도 믿는다면 그것이 바로 혼합주의 신앙입니다. 혼합주의 신앙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깨끗하고 순결하여 하나님께만 충성하는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십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감찰하시되, 사람의 마음도 감찰하시니,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의 눈은 속일 수 없습니다. 코람데오 신앙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살아서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온전한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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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29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있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왕상19:13)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나 사무엘을 불렀을 때는 단지 “아브라함아” 혹은 “사무엘아”라고 하시며 그들의 이름만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창22:1, 삼상3:4). 아브라함은 자신이 이삭에 푹 빠져 있는 상태를 알렸고, 사무엘은 자신이 하나님의 전을 가까이하고 있음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하시며, 엘리야를 부르실 뿐만 아니라 장소 곧 ‘여기’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시험에 들어 영적으로 어두워진 엘리야 스스로 자신의 상태를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기란 육신에 갇힌 ‘굴속’을 의미합니다. 이세벨에게서 도망 나온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자 엘리야가 대답합니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왕상19:14). 엘리야는 자신이 하나님을 위하는 열심이 특심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하나님을 위하였을까요? 하나님이 엘리야를 위하셨을까요? 아합 때에 이스라엘은 바알과 아세라 우상이 사방에 퍼져 있었습니다. 왕과 왕후가 그러하니 신하들도 자연스럽게 미혹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법인데, 백성들도 우상을 섬기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엘리야는 미혹에 빠지지 않고 신앙을 지켜나갔습니다. 자신이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남기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극심한 가뭄 중에서도 엘리야에게는 그릿 시냇가를 지정하여 숨게 하셨고, 까마귀에게 명하여 떡과 고기를 가져다주도록 하셨습니다(왕상17:5-6). 또 그릿 시냇가 물이 마르자 시돈 땅 사르밧 과부에게 명하여 그를 공궤하도록 하였습니다(왕상17:9). 엘리야가 까마귀에게 명한 것도 아니고, 사르밧 과부를 스스로 찾아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까마귀와 이방 여인 사르밧을 통하여 그를 섬기도록 한 것입니다. 엘리야 스스로는 통 속의 가루 한 움큼과 병 속에 있는 적은 양의 기름으로 몇 년을 버틸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끊이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만일 엘리야가 백성들을 많이 모아 놓고 바알 선지자와 경쟁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불을 내려주셔서 단 위의 제물과 단을 태워주시지 않았다면 엘리야는 거기서 살아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엘리야 자신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그를 위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위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신앙인들은 감사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항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지 않고, 자신이 하나님을 위한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엘리야처럼 시험 들기 쉽습니다. 아마도 엘리야는 이렇게 시험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나의 열심이 이렇게 특심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바알 선지자들을 없앴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아합과 이세벨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게 하시는 걸까?’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열심 있는 나를 잠시도 쉬지 못하게 여기까지 도망 나오게 하시는 걸까?’ 부언하지만 사람들이 하나님께 시험 드는 이유는 엘리야처럼 자신이 하나님을 위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렇게 하나님을 위하는데 하나님은 왜 나를 위해 주시지 않지?’ 사람에게 시험 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그에게 얼마나 잘했는데 고작 내게 돌아오는 것이 이거야?’ 사랑의 채권자 곧 “나는 사랑을 받아야 하고” “나는 대접을 받아야 하고” “나는 인사도 받아야 하고” “나는 섬김을 받아야 할 사람이야.” 이런 태도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반면 사랑의 채무자는 “나는 사랑에 빚진 자야. 그러니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보답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해” “나는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나는 대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해” 이런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세상 삶에 있어서 채무자가 된다면 상당히 괴로운 일입니다. 하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채권자가 아니라, 채무자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빚을 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빚진 사랑을 우리는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보답의 표시는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몸을 드리고, 사랑하고, 경외함으로 표시할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웃을 섬김으로 표시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야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똑같이 여러분에게 “K야 어디 있느냐?”라고 묻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 자신의 위치를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에 빚진 자로서, 보답하는 자세를 가지고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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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26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엘리야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있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왕상19:11-12). 이 내용은 엘리야가 그를 죽이겠다는 이세벨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도망쳤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이시고 듣게 하신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세미한 음성으로 나타나시기 전에 산을 가르는 크고 강한 바람에도, 지진에도, 불 가운데서도 계시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모습을 엘리야에게 보이셨을까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뜻 없는 일이 없습니다. 분명히 엘리야나 후대에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교훈하시기 위함입니다. 산을 가르는 크고 강한 바람, 지진, 불 이러한 표적들에도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이러한 표적 등은 하나님의 웅장함, 엄위, 권능 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적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의 외적인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그동안 하신 일은 이러한 외적인 표적과 기사 등이었습니다. 3년 6개월 가뭄 기간 중에 한 번도 훈련해보지 않은 까마귀가 그에게 떡과 고기를 가져다 준 일, 통에 가루가 한 움큼밖에 남지 않았고 병에 기름이 조금 밖에 남지 않았었지만 남은 가뭄 기간 동안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와 그의 아들이 먹을 수 있도록 통의 가루와 병에 기름이 다하지 않은 일, 이스라엘 왕과 왕후, 신하들이 지지하는 450명의 바알 선지자를 홀로 상대하여 죽인 일 등은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나타내신 강한 바람과 지진과 불과 같은 일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일을 맛 본 엘리야는 이세벨이 그를 죽이려 했을 때,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그런 기적들을 나타내 주시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큰 이적들을 통하여 엘리야에게 자신을 알리는 차원을 지나, 이제는 인격체이신 하나님 자신을 알리기를 원하셨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들의 수준이 표적이나 기사 등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려고만 한다면, 종교성은 그에게 있을지 모르지만 인격적으로 성장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께 합당한 사람으로 만들어지고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으며 교제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신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엘리야 이전에 이미 이러한 신앙적인 수준에 도달한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에녹은 무려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5:21-24). 에녹은 육신의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하늘로 오른 최초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특별한 업적이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또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하여 세속을 떠나거나 특별한 고행을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평범한 사람처럼 자녀를 낳고 길렀으며 보통 사람들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가 달랐다면 보통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점입니다.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며 교제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뜻에 합하였기 때문입니다(암3:3). 자신의 뜻보다 길이요 진리이신 하나님의 뜻을 더 추구하였기 때문입니다. 다윗 또한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심장이 나를 교훈하도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시16:7-8). 다윗은 밤마다 그의 양심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들었고, 무슨 일을 할 때 항상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그가 흔들릴 때는 하나님의 현존을 감각하며 위로를 받았고 힘을 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시16:9). 주님의 임재 가운데 사는 그 자신이 항상 기뻤으며 육체까지도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가끔씩 ‘하나님께서 나에게도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나타내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고 믿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보지 못하고 믿는 것입니다(요20:29). 보지 못하고 믿는 사람은 양심을 통하여 성령께서 하시는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그 음성이야말로 지각을 사용해야 들을 수 있는 장성한 자의 몫입니다(히5: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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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20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김원중 목사의 ‘교회사로 보는 박조준 목사의 설교와 목회신학’
    본고는 지난 5월 22일 열린 '제2회 웨이크신학포럼-교회사로 보는 박조준 목사의 설교와 목회신학'를 참관한 김원중 목사의 소감 전문이다. <편집자 주> 정일웅 목사는 ‘교회사로 보는 박조준 목사의 설교와 목회신학’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의 사회변화와 한국교회의 역할을 대비하며 한국교회가 시대적부름에 부응하여 나라와 민족의 발전에 이바지해왔음을 적시하고, 다만 제5공화국 들어 군사쿠데타의 시기에 교회가 침묵함으로써 선지자적 역할을 도외시한 것이 흠이었음을 지적한다. 이 시기에 박조준 목사는 교회의 개혁을 설교하고 행동하는 목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신군부의 요구를 거절하여 교회의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하였다고 분석한다. 또한 박조준 목사가 교회공동체의 책임을 일깨우고 교회 연합의 정신을 고취한 것들이 마치 17C 코메니우스가 동유럽 보헤미아에서 형제연합교회의 목사와 감독으로서 유럽의 교회를 새롭게 세우려 한 것에 비견하며 개혁과 연합의 선구자로서의 모습을 부각시켰다. 코메니우스가 사회, 교육, 정치영역까지 망라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실현되는 완전한 개혁을 추구한 것처럼 박조준 목사도 교회개혁이 사회, 정치, 현 시대를 망라해야 한다는 정신이 같다고 보았다. 임승안 나사렛대 전 총장은 박조준 목사의 삶을 세 편의 이야기로 나눠서 풀어갔는데, 전기적이고 교회역사적인 것으로서 이북의 선조들의 삶과 박조준 목사의 청소년기, 학교와 교회 생활 그리고 담임목회 기간이 그것들이다. 한국 교회의 현실에 대한 박조준 목사의 진단과 처방을 요약하면, 나라가 살려면 교회가 살아야 하고 교회가 살려면 목회자가 살아야 하고 목회자가 살려면 회개해야 한다. 결국 하나님과 목회자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이 골자이다. 아신대 신대원장 박응규 교수는 ‘박조준 목사의 목회 사역과 한국 교회사’를 논하였다. 국가적 혼란기에 하나님의 종으로서 최선을 다하셨으며, 인간의 내면변화에 주력하고 사회 참여와 변화에 적극적이셨으며, 박정희 정권과 신군부 앞에서 강직하고 예언자적 설교를 주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복음적이고 예언자적인 설교를 통해 한국교회의 귀감이 되신 것이다. 박조준 목사의 한국교회사적 공헌을 살펴보면, 첫째 복음전도의 우선성을 기반으로 사회적 기여를 하였으며, 둘째 복음적 예언자적 설교를 통해 한국교회의 귀감이 되었으며(타협하지 않고 권력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으며 정의와 개혁을 외침), 셋째 교회개혁과 교권적 장로교의 개혁과 연합운동에 대한 기여를 했으며, 넷째 목회자와 설교자의 교육과 갱신을 위해 헌신하였고, 다섯째 목회자로서의 자세와 취해야 할 태도를 분명히 하여 후대에 귀감이 되어 준 바른 목회자상을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박종구 목사는 월간목회와 박조준 목사의 관계를 소개하며, 2016년 9월호에 실렸던 박조준 목사의 설교의 핵심을 ‘1)쉽다 2)대중적이다 3)본문에 충실하다 4)위로와 새 힘을 준다 5)전달이 역동적이다’의 다섯 가지로 요약했다. 그리고 더불어 박종구 목사는 웨이크 포럼의 의의를 ‘1)설교연구의 인프라가 구축되었다 2)비평문화가 성숙되면 좋겠다 3)목회쟝르별 접근이 필요하고 다각적인 방면으로 조명되어야 한다 4)개혁의 지평을 확대하자 예컨대, 신학윤리, 실천윤리, 선교전략 정책, 문화예술 개혁 등‘으로 요약하고 설명했다. 이러한 신학적 포럼을 통해 AI시대에 과거의 공부를 통해 어떻게 미래를 열어갈지를 고민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위와 같은 여러 분들의 발제와 정리를 통해 박조준 목사님의 목회와 한국 교회에 기여하신 역할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으며, 근현대사를 사시며 행동으로 우리에게 훌륭한 귀감이 되신 모습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이런 훌륭하신 목사님과 같은 시대를 사는 것이 큰 영광이다. 그리고 목회자의 한 순간의 선택이 한국 교회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새삼 깨닫게 되는 계기였다. 교회들이 신군부의 서슬퍼런 권력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바른 자세를 취했더라면 작금의 한국 교회의 위상은 지금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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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18
  • [국독연 칼럼] 강성률 목사의 ‘그루터기’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사6:13). 작년 늦가을 교회 건물 옥상에 방수를 하였습니다. 준비단계에서 그곳 화분에 있는 식물들을 모두 처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화초들은 대부분 시들거나 그 생명이 다하여 가고 있었지만, 맨드라미는 그 때에도 수명이 한 달은 남아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남겨 놓을 수 없었기 때문에 모두 없애고 단 한 그루만 씨받이로 남겨 두었습니다. 방수를 모두 한 후 겨울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 한 그루도 처리하였습니다. 방수를 깨끗하게 페인트칠을 해놓고 보니 더 이상 식물로 옥상을 더럽힐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올 해는 화분들에게 안식을 주기로 했습니다. 어떤 식물도 뿌리거나 심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과 다르게 봄이 되니 식물들이 쏙쏙 올라왔습니다. 작년에 자랐던 식물들의 씨들이 떨어져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맨드라미 싹은 화분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비교적 다른 씨앗들에 비하여 늦게 발아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하였지만 오랜 시간에도 나오지 않자 더 이상 기대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옥상에 있는 화분을 보니 맨드라미가 화분 여기저기에 모종 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제가 기대를 포기하고 있었을 때 한 포기 남아있던 맨드라미에서 씨가 떨어져 한 화분 가득 싹이 돋아 자랐는데 그것을 자매 한 분이 모종한 것입니다. 한 그루의 맨드라미가 이곳에서 그들의 역사를 계속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그루터기가 나옵니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사6:13). 남유다가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거룩한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겨두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만큼 거룩한 삶은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일까요? ‘거룩’이란 성스럽고 위대함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거룩한 백성으로 만드시기 위하여 속 된 것을 멀리하도록 하셨습니다.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바 기어다니는 것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레11:44). ‘거룩’이란 몸을 구별하여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속 된 것으로부터 구별하는 것, 사치 세력, 음란 세력으로부터 구별하는 것 등을 말합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신앙인들이 불신자들처럼 속되게 살아가지 아니하고 거룩한 백성으로 구별 된 생활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18:4). 이와 같이 성도들은 거기서 나와야 합니다. 거기는 바로 자신을 영화롭게 하는 곳, 사치의 세력이 있는 곳, 자신을 여황이라고 하고, 과부가 아니라고 하는 곳입니다. 그런데서 부터 나와 따로 있는 것이 거룩한 삶입니다. 그러면 성도들은 모두 세상 사람들과 어울러서는 안 되고 산속이나 숲속이나 사람들의 인적이 드문 곳에서 살아야 합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 속에서의 구별입니다. 고기가 바다 속에 살지만 짠물이 들여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기름이 비록 물속에 있지만 물과 섞이지 아니하고 구별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은 거룩한 영입니다. 거룩한 생활을 적극적으로 하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거룩한 생활의 소극적인 면은 육체의 정과 욕심을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4).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으면 속 사람이 나옵니다. 속 사람 따라 살아가는 것이 거룩한 생활입니다. 자기 생각을 좇아 살아가는 것은 속된 생활입니다. 만물보다 거짓 되고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렘17:9). 자기 생각을 따라 살아가지 않는 생활이 순종하고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1:14-15). 순종하는 것이 거룩한 생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맨 처음 이스라엘 민족 모두를 제사장 나라로 삼으셨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출19:5-6). 하지만 그들이 타락하여 금송아지를 섬기자 레위 지파만 제사장 지파로 삼았습니다(출32:28-29). 그러다가 이스라엘 족속들이 발람에게 속아 모압의 신들에게 제사하고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는 사건이 생겼습니다(민25:12). 그 때에 제사장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미디안 여인과 그와 함께 온 시므온 지파의 족장을 창으로 찔러 죽게 하였습니다. 그 일로 하나님께서는 비느하스 족속을 영원한 제사장 지파로 삼을 것을 약속하였습니다(민25:11-13). 나중에 비느하스 족속도 타락하자 사독의 후손이 남습니다.솔로몬 왕 때부터 사독의 후손이 제사장 집안이 됩니다(겔44:15).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타락하면 거기서 솎아내고 또 타락하면 계속 솎아내어 거룩한 백성들을 그루터기로 삼습니다. 거룩한 생활은 순종하는 생활이며 거룩한 생활은 성령의 열매 맺는 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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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17
  • [국독연 칼럼] 강성률 목사의 ‘무엇을 바라볼까?’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왕상19:3). 18장에서는 엘리야 홀로 바알 선지자 450명을 상대하여 승리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살아계셔서 능력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굳세게 붙들었습니다. 만일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힘을 의지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답은 뻔합니다. 혼자서 450명을 상대로 이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였기 때문에 450명의 바알 선지자를 없앨 수 있었습니다. 바알 선지자는 여러 가지를 의미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죄의 세력을 뜻하기도 합니다. 죄는 세력입니다. 힘입니다. 엘리야가 자신의 힘으로 450명을 이길 수 없었듯이 신앙인들이 죄의 세력을 이기려 하는 것은 홀로 450명을 이기려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번번이 실패하는 것은 자신이 할 수 있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엘리야가 만일 하나님께 “하나님, 저를 도와주실 필요가 없습니다. 저 혼자의 무술로 450명의 바알 선지자를 해치울 수 있습니다.”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말리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래라. 너 혼자 한 번 해봐라.” 신앙인들이 자기 힘으로 죄와 싸우려 하는 것은 거대한 군대와 홀로 싸우려는 것과 같습니다. 술이나 담배 게임 등에 빠진 사람이 종종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술, 이것 내가 끊으려고 마음만 먹으면 끊을 수 있어” “담배, 언제든지 끊을 수 있어. 하지만 지금은 필요성을 못 느낄 뿐이야.” 그 말은 곧 “나는 홀로 18만 5.000명의 군대를 이길 수 있어.” “450명의 바알 선지자를 이길 수 있어.”라고 자신하는 것과 같습니다. 일 년 전에도 패하고, 한 달 전에도 패하고, 어제도 패했으면 자신은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솔직하게 하나님께 고백해야 합니다. 엘리야는 어떻게 바알 선지자를 물리칠 수 있었을까요? 그는 먼저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제물을 받으셨다는 증거로 불을 내리셨습니다(왕상18:30-38). 그 후에 그는 바알 선지자 450명을 해치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죄와 싸우고 습관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길은 자신에게는 없습니다. 그것들은 세력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야처럼 전적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일이 우선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순종을 의미합니다(롬6:13). 자신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증거로 불을 내리십니다. 그 불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고 성령의 불을 받는 것 사이에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엘리야는 비교적 빨리 응답을 받았지만 우리는 늦게 내릴 수도 있습니다. 불은 뜨겁게 달아오르는 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제물을 태우는 불입니다. 자신을 모두 태우는 불, 자기가 조금도 남지 않고 오로지 구속한 주만 보이게 하는 불입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기도드리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왕상18:36-38). 그 때 비로소 불이 임하게 됩니다. 엘리야는 그렇게 능력을 받아 바알 선지자를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용감했던 엘리야가 이세벨로부터 그를 죽이겠다는 통보를 받은 후에는 마음이 물처럼 녹았습니다. 그 형편을 보고 도망을 갔습니다. 이전까지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그가 형편을 보자, 환경을 보자, 상황을 보자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없이 나약해졌습니다. 신앙인들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환경을 바라보면, 형편을 바라보면 한없이 나약해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지금 환경을 보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바라봅니까?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새 힘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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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03
  • [국독연 칼럼] 이상길 목사의 ‘두려움은 금물’(시 27:1-2)
    성도라고 고난과 어려움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인생살이가 너무나 힘들고 고달플 때가 있습니다. 이유 없이 우리를 괴롭히는 못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업하시는 분들은 사업이 잘못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이 늘 있습니다. 건강한데도 몸에 병이 생기면 어떻게 하나 불안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분명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데, 세상에 대해서, 미래에 대해서, 물질에 대해서, 성공에 대해서, 자녀에 대해서 염려하고 근심하며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그 무엇도 우리에게는 두려움이나 고통,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는 이상,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괴롭힐 수 없습니다. 다윗은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나의 대적, 나의 원수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하나님께서는 빛이시오, 구원이시오, 능력이시므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성도는 고난 중에서도, 두려움 중에서도 모든 고통과 두려움을 극복하고 찬송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담대한 신앙이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지키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고난 중에 찬양으로 시작하여 기도로 끝나는 것이 시 27편의 내용의 흐름입니다. 고난 중에 드리는 찬양처럼 향기로운 찬양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빛이시고, 구원의 산성이시며, 사랑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면 모든 고난을 극복하며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확신을 갖고, 올바른 신앙고백을 한 성도라면 슬픔의 밤이 아주 깊을 수 없고, 죄악의 세력이 공포의 대상이 되어, 우리를 파멸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은 지금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곧 아주 급박한 위기 상황에 처하여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이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어떤 어려움이 와도 여기에 굴복하지 않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사모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면 우리에게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서 승리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급박한 위기 상황에 처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극복할 방안이 있으면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다윗에게 방안이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닌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절제)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딤후 1:7).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이 이 세상을 살 때 염려하며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담대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험한 세상이지만 믿음을 가지고 기쁨과 평안으로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 무서워하지 말라, 현실이 아무리 어둡고 캄캄할지라도 내가 너의 구원이요, 능력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 아무리 어둡고 캄캄해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환경이 아무리 어렵다고 하더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윗에게 역사하셨던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눈동자처럼 보호하시며 지켜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난의 문제, 자녀의 문제, 질병의 문제, 사업실패의 문제를 다 물러가게 하시므로, 새로운 축복의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우리에게 아무리 큰 시련과 환란이 있다고 할지라도 여호와께서 우리의 구원이 되시기에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여 하나님 한분의 도움을 받아 날마다 승리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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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01
  • [국독연 칼럼] 이상길 목사의 ‘교회의 본질과 복음 진리’(딤전 3:14-16)
    하나님의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 위에 세워진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진리를 떠난 교회는 교회일 수 없습니다. 물을 떠난 배가 아무 쓸모가 없듯이 진리를 떠난 교회 역시 아무런 존재 가치가 없습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진정한 교회의 으뜸가는 표지는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의 말씀에 충성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땅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교회는 진리의 터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그리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침이 없이 바르게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진리의 말씀으로 시작된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를 진리의 전파자로 세우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게 진리를 수호하는 귀중한 사명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참된 교회를 이루기 위하여 진리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여야 합니다. 지금은 말세라고 합니다. 혼돈의 시대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거짓되고 가증한 것들이 거룩한 곳에 선다고 했습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막 13:4). 진리에 이탈하는 배도하는 일이 더 많이 일어날 것이고. 거짓 선지자들이 더 많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진리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강해져야 합니다. 진리는 생명력에 있어서 영원하고 그 효력에 있어서는 보편적이며 무한합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교회는 진리를 떠받치는 토대이고, 진리를 세우는 기둥입니다. 성전의 두 기둥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교회는 가장 순수한 진리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거짓의 광기로 피폐해진 그 누군가가 와도 진리로 말미암아 완전히 깨끗하게 정화되고, 진리의 안전한 갑옷으로 무장되는 곳이어야 합니다. 본문에서는 복음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부활과 승천에 이르는 전 과정을 매우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라는 말씀은 성육신하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멸시와 버림을 당하셨고, 아무런 죄가 없으셨으나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나, 성령으로 부활하셔서 무죄하심을 증거하셨고, 의롭다 하심을 입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의로우신 자로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대속제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수호하는 기관으로 근본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역의 중심이 되는 교회의 본질과 복음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비밀에 관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모여 진리의 기둥과 터를 이룬 모든 성도는 온 우주보다 크신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전해야 할 사명이 있음을 교훈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장엄하고 거룩한 복음의 진리를 마음에 새기고 전함으로서 이 땅에 그리스도의 진리와 영광이 해와 같이 빛나도록 해야 합니다. 진리의 기둥으로 역할을 다한 자에 대한 영광을 계3:12에서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 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기둥의 사명을 감당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사용되어질 새이름이 기록되어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진리를 파수하고 진리만을 외치며, 진리를 고집할 때 수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하나님나라가 크게 확장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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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21
  • [국독연 칼럼] 강성률 목사의 ‘그 통’과 ‘통’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왕상17:14). 아합의 죄로 인하여 이스라엘 땅에 기근이 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시돈 땅 사르밧에 사는 과부에게 보내어 과부에게 엘리야를 공궤하도록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사르밧에 보내실 때, 사르밧의 어느 지역이나 사르밧 과부의 용모나 그가 어느 때에 외출할 것이라는 말씀 등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니 따를 뿐이었습니다. 무작정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갔는데 마침 사르밧에 나무를 줍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여인이 바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과부였습니다. 엘리야가 그녀를 만나 떡을 좀 달라고 하자, 그녀는 떡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통에 가루가 조금 있고, 병에 기름이 조금 있는데 그것으로 자신과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은 후에 죽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엘리야는 그녀 말대로 하려니와 그것으로 먼저 그를 위하여 떡을 만들고 후에 그녀와 그녀의 아들을 위하여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본문 말씀 ‘그 통’과 ‘그 병’을 말한 것입니다. ‘그 통’과 ‘그 병’은 먼저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위한 통과 병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위한 것은 곧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의 지시대로 그 가뭄 때에 먼저 엘리야를 위하여 떡을 만들었습니다. 그랬더니 과연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다 소비되었다고 하는 순간 그 통과 그 병의 바닥을 보면 또 채워져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가뭄 기간에도 세 명의 사람들은 무사히 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처음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의 말대로 그 통의 가루와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자,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말할 수 없이 감격하였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방인인 자신에게까지 이런 은혜가 임함을 알고 하루하루가 기뻤고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적도 매일 반복 되면 자연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향하던 때에 하늘에서 만나가 매일 내리자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지 못하고 좀 더 자극적인 음식 타령을 한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민11:4-5). ‘그 통의 가루’와 ‘그 병의 기름’이 ‘일상적인 통과 병’이 된 것처럼 말입니다(왕상17:16). 그 결과 그 집에 큰 사건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과부의 아들이 죽었습니다. 오늘날 신앙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후, 처음에는 사랑을 깨닫게 되고 감사 감격하게 되지만 그 마음을 계속 쓰지 못하면 감각이 둔해집니다. 그리고 우연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과 멀어지고 타락의 길을 가게 되기 쉽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시 회복시키기 위하여 환경을 허락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아들을 바치라는 환경이었고, 사르밧 과부에는 아들이 죽는 환경이었습니다. 죽음이란 육신의 목숨을 의미하는 것만 아닙니다. 자녀들의 타락과 방탕한 생활도 거기에 포함됩니다. 이 때 영적으로 민감한 성도들은 ‘하나님이 나를 재촉하시는 구나. 다시 힘을 쓰자.’하며 떨어진 믿음을 회복하기 위하여 애를 쓸 것입니다. 하지만 육체가 예민해진 반면 영적으로 둔해진 성도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여러 인간적인 방법을 모색하려고 할 것입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일은 세상일이며, 육적인 일이며, 당장 잘 되는 일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관심사는 일이 아니라 우리 자신입니다. 자신의 영적인 상태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얼마나 본받아 가는 것인가에 있습니다. 어려움이 임할 때 첫사랑과 첫 은혜를 되새기며 믿음으로 돌아와서 다시 힘을 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도록 하기 위하여 때로는 재앙 같은 복을 허락하시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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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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