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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깨어있는 신앙’(롬 13:11-14)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재림의 때를 인식하고 영적으로 깨어 각성해야 하는데, 오히려 종말론적 긴박감이 점점 더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시대를 알지 못하고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며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영적으로 잠자는 상태인 것입니다. 또한 이 세상에 마음을 빼앗겨 영적인 일을 등한히 하고, 영적인 일을 잊어버리며 살아가는 삶 역시 영적으로 잠자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잠을 잘 때 사람은 외부의 변화에 무감각합니다. 오롯이 자신의 내적 무의식의 세계 속에만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에게 위험을 주는 것이 환경이나 고난이나 핍박이나 굶주림이 아닙니다. 육신의 연약함을 틈타서 침입해 오는 타락이나, 죄악, 영적 저하를 가져다주는 것들이 대단히 위험한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어두움 속으로 심령이 침체 되게 하여 영적인 ‘잠을 잔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잠에서 깨어나야 하고,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여야 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 분명 이 시기는 자다가 깰 때입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11절). 우리 모두가 깨어 일어나 사명에 충성하며 주님 맞을 준비를 하십시다. 지금은 깨어 일어날 뿐 아니라 어두움의 일을 벗을 때입니다.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12절하). 어두움의 일이 무엇입니까? 바로 불신앙입니다. 불순종입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더럽고 추한 일입니다. 죄는 어두움을 이용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자”(13절상)고 말한 것입니다. 빛의 갑옷은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옷을 입는다는 것은 자신은 죽고 예수님으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안에 내가 아닌 예수님으로 가득 채우는 것을 의미입니다. 외모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과 생각과 사상과 가치관과 습관뿐 아니라 심지어 무의식의 세계까지 온통 예수님으로 가득 채우라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일을 청산하고 빛 되신 주님을 본받아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행하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낮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단정하게 행해야 합니다. 낮에 속한 자가 밤에 속한 자처럼 죄의 삶을 살면 안 됩니다(살전 5:7-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그러면 빛의 자녀들이 피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방탕입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13절). 우리는 어두움의 일을 벗어야 합니다. 육신의 정욕을 이겨야 합니다. 깨끗하고 거룩한 모습으로 성별되게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한 행위는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습니다. 과도한 집착과 욕망을 가지는 것은 멸망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8:12-13). 우리는 항상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에서 거룩한 삶의 모범을 보여야 하겠습니다. 깨어나 후회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과 봉사와 선한 목적을 위해서만 열심히 일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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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6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다수의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주님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나서 가로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하여”(행12:11). 야곱과 그의 자손들이 애굽의 고센 땅에 이주해 왔을 때는 고작 70명이었습니다(창46:27). 그런데 그들이 400년이 지난 후에는 150에서 200여만 명이 되었습니다. 바로는 급성장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여자들이 태어나면 살리고 남아가 태어나면 죽이도록 산파에게 명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던 산파는 바로의 명령대로 하지 않고 남아가 태어나도 살렸습니다. 그것에 대하여 추궁하면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달라서, 그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미처 아이를 낳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바로는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그들을 나일강 하수에 던지고 여자 아이가 태어나면 살리라고 말했습니다(출1:15-22). 이처럼 바로는 이스라엘 자손이 급성장하자, 이스라엘 남자를 전멸시키려고 하였지만, 그럴수록 이스라엘 사람들은 더욱 증가하였으며 최후에는 그의 집에 애굽을 황폐시키고 그의 군대를 수장시킬 모세가 자라게 됩니다. 그의 딸이 이스라엘을 구원시킬, 애굽을 전멸시킬 모세를 입양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기대 밖의 일을 하십니다(고전2:9). 일본은 1941년 7월 인도차이나 반도를 점령했습니다. 그러자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들이 일본 경제제재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이에 일본은 1941년 12월 7일(일본시간 12월 8일) 선전포고 없이 진주만과 필리핀 · 말레이 반도를 동시에 공격했습니다. 그들은 미 태평양함대를 무력화시킴으로써 제한된 시간 내에 동남아시아 일대를 쉽게 장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그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어 연합국의 승리를 가져왔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나라와 인도차이나 반도 국가들이 독립하던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전혀 예상 밖의 방법으로 일본의 기대에서 벗어나 우리를 독립시켜 주셨습니다. 한 번은 헤롯이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죽였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그 일을 기뻐하였습니다. 이에 고무된 헤롯은 베드로까지 죽이기 위하여 옥에 가두었습니다. 4인 1조로 4개 조가 그를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월절 후에 베드로를 백성 앞에 끌어내고자 하였습니다.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었습니다. 그러자 천사가 나타나서 베드로에게 채인 쇠사슬을 풀어줍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환상을 보는 줄로 알았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그것이 환상이 아니라 실제인 줄 알고 다음과 같이 말을 합니다.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나서 가로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행12:11).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반대하는 예수님이었기에 사도인 베드로 또한 자신이 무사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감옥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행12:5). 그것은 바로 간절한 기도 때문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간절한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고, 주께서 그 천사를 보내셔서 손에 채인 쇠사슬이 풀렸고, 4인 4개조에 의하여 겹겹이 쌓인 파수꾼과 첫째와 둘째 옥문을 지나고 성으로 통한 철문까지 제지 없이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 안 있으면 총선입니다. 참으로 국가적인 행사입니다. 오직 이 나라가 헌법 전문에 나오는 것처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고, 신앙인들이 경건하고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는데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딤전2:2). 비록 다수의 기대에서 벗어난다 할지라도, 전혀 불가능하게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간절한 기도가 있다면 그 일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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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1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참된 헌신’(벧전 4:11)
    신자라면 누구나 하나님께 헌신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할 것입니다. 헌신은 자기의 생각이 아무리 옳고 자기의 방법이 편리하다 할지라도 인간적인 생각과 의지를 철저하게 배격하고 하나님 방법대로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힘으로 한다면 반드시 부작용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일하다 보면 늘 경우가 나오고 불평이 생기고 분쟁이 일어나고 갈등을 빚기에 차라리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을 때보다 못한 결과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헌신은 문제가 생기고 시험에 들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의 열심과 생각과 힘으로 주님의 일을 하면 자기 의와 공로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제사가 열납되지 않았을 때 가인이 분노한 것은 믿음으로 행하지 않았기에 자기 의가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 부작용이 생기지 않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오직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과 은혜로 해야 합니다. 벧전 4:11절에서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지만 자기를 위하여 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기가 태반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바로 그렇게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히 일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이 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일을 하러 오신 예수님을 방해하는 일을 하였지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헌신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뜻으로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모압 땅에서 온갖 풍파를 겪었고, 앞으로 당할 고통을 감수하면서 유대 베들레헴으로 향하고 있는 룻과 나오미에게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하는 헌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힘을 공급해주신 것입니다. 룻이 자기 민족을 버리고 남편의 민족에게로 갈 결심을 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헌신의 마음이 지대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어떤 조건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 자신만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룻에게는 당연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일이 그녀의 최대의 목표이었기에 그녀의 전진은 중단이 없었으며 도중에 머뭇거리거나 곁길로 나가지도 않았고 가야 할 목적지도 잊은 적이 결코 없는 헌신된 발걸음이었습니다. 또한 옥합을 깨뜨린 마리아의 헌신의 이야기는 시대를 초월해서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그녀는 오직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전폭적으로 거룩한 헌신을 한 것입니다. 은혜를 입은 자는 타산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온전히 헌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셨습니까? 헌신을 다짐하시고 온전히 실천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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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2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사탄의 유혹 ‘마침’’
    지난 시간에는 여호와 이레 ‘마침’에 대하여 글을 썼습니다. ‘마침’은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타이밍이기도 하지만, 항상 좋은 편에만 등장하지 않습니다. 사탄도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듯(고후11:14), 신앙인들이 혹할 수 있도록 적절한 때 행동을 부추기는 추임새로 ‘마침’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거짓말쟁입니다(요8:44). 그들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했지만(창3:17), 죽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창3:4-5). 아담 이후로 사람들의 두뇌가 점점 발달 된 것처럼, 사탄도 사기술이 점점 고도화되었습니다. 아담 때의 뱀이 지금은 용이 된 것입니다. 지금도 아무런 가책 없이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은 사탄의 사자임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욘1:2). 하지만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이 싫었습니다. 자기가 싫어하는 니느웨는 그대로 망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서쪽 끝에 있는 다시스로 도망을 가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마침 다시스행 배가 왔습니다(욘1:3). 그 당시 배는 지금처럼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외국행 배를 만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스행 배가 떡 앞에 나타나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배를 탔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 상태를 이해해 주신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큰 오해였습니다. ‘마침’ 다시스로 향하는 배가 나타난 것은 하나님의 보내심이 아니라, 마귀의 유혹이었습니다. 그 배와 선원과 승객들이 마귀라는 것이 아니라, 요나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 하여 다시스로 가려할 때 나타난 적절한 타이밍이 마귀 유혹이라는 뜻입니다. 거기에 넘어가서 그는 배를 탔고 배는 얼마쯤 가다가 대풍랑을 만났습니다(욘1:4). 이처럼 ‘마침’이라고 해서 항상 하나님의 이레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죄수 아닌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압송되어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들이 미항이라는 곳에 도착했을 때, 바울은 배가 더 가면 생명까지 위태하다고 권하였습니다(행27:9-10). 하지만 선장과 선원들은 그곳에서 겨울을 나기가 불편하니 뵈닉스에서 겨울을 나자고 하였습니다. 그때 ‘마침’ 남풍이 순하게 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자신들은 득의한 줄 알고 갔습니다(행27:13). 그러다가 얼마 못 가서 유라굴로 광풍이 덮쳤고(행27:14), 배에 탄 사람 모두는 죽다가 겨우 살아났습니다. 이처럼 ‘마침’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온 것도 있지만, 마귀도 그것을 활용해 적절하게 속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얼마 못 가 본색을 드러내고 맙니다. 마귀는 사람들에게 결코 복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탄의 속임수 마침’과 ‘여호와이레 마침’을 어떻게 분별합니까? 그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첫째는 말씀에 맞아야 합니다. 아무리 순풍이 불어와도 우리가 하는 행동이 하나님의 말씀에 맞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마침’이 아닌 사탄의 속임수 ‘마침’입니다. 요나는 분명히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욘1:2)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말씀에 따르지 않고 다시스로 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는 다시스로 가려고 했던 것 자체가 잘 못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을 맡았던 백부장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도 바울이 미항이라는 곳에서 떠나지 말라고 하면 그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선장과 선원들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전문가의 말입니다. 전문가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이었던 것입니다. 일례로 신앙인들 가운데 매주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지겹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때 ‘마침’ 비가 온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 하나님께서 오늘은 집에서 쉬라고 하시는 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매 주일 첫 날에 떡 떼고 말씀을 나누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행20:7). 떡을 뗀다는 것은 성찬식의 의미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말씀의 떡을 나누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주일에 말씀을 먹지 않고서는 한 주를 살아가기 힘듭니다. ‘마침’이라고 모두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말씀에 맞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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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거시적 안목을 가집시다’(창 13:14-15)
    세상을 너무 근시안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것에만 신경 쓰고, 당장의 이익에만 집착을 합니다. 그러나 멀리 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와 같은 지혜를 갖지 않고는 인생을 올바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멀리 보고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은 인생의 집(믿음의 집)을 지을 때 아주 견고하게 지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눈앞의 이익에만 연연했던 사람들이 나옵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실수는 멀리 보지 못하는 인생의 비극을 교훈합니다. 당장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서 팥죽 한 그릇에만 집착했던 에서는 장자의 축복권이라는 뒤에 것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창 13장에 보면 애굽에서 올라온 아브라함과 조카 롯이 가축이 너무 많아 목자들 간에 다툼이 일어나자 아브라함은 다투지 말고 서로 갈라서자고 하며 조건 없이 선택권을 조카 롯에게 먼저 주었습니다. 롯은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바로 눈앞에 보이는 넓은 들판을 바라본 것입니다. 그의 눈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마치 에덴동산과 같고 애굽 땅과 같이 아주 비옥하고 기름진 곳으로 보였기에 그 땅을 선택했습니다. 그곳의 환경은 생각지 않고 어디를 가든지 신앙생활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눈앞의 이익이나 모든 기득권을 조카에게 양보하며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인생을 맡기고자 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온 것입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14-15절). 사람이 눈앞에 이익을 위해 욕심의 노예가 되어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속에 더러운 탐욕과 정욕과 이기심과 명예욕과 정욕으로 가득 차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 차 있는데 어떻게 신령한 것을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겠으며, 신령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영의 귀가 열릴 수 있겠습니까? 롯은 당장 눈앞의 이익을 선택했지만 멀리 보는 지혜가 없었기 때문에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땅을 택했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롯은 편안한 날이 없었습니다.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벧후 2:7). 그 후 그곳은 죄악 때문에 유황불의 심판을 당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당하고 난 후에 롯의 두 딸들은 아버지에게 술을 잔뜩 취하게 한 뒤 번갈아 자면서 잠자리를 같이 했습니다. 그리하여 모압 족속과 암몬 족속이 나왔습니다. 그들은 항상 하나님의 백성들과 대적하는 민족으로 살았습니다. 가족의 족보를 그와 같은 방법으로 이어가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닐 뿐 아니라 그 자체가 멀리 보는 지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근시안적인 생각으로 할 일들은 후대까지 악영향이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당장 눈앞의 화려한 것에 속지 말고, 지금 당장은 서운하고 안타까워도 먼 장래를 위해 정리할 것은 정리하고 먼 곳을 바라보는 지혜를 갖아야 하겠습니다. 이제는 믿음의 눈을 들어 지경을 넓히며, 넓게 멀리 바라보아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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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9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여호와 이레 ‘마침’’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막15:21) 성경에는 ‘마침’이라는 단어가 종종 나오거나 행간에 숨어 있습니다. 여기서 ‘마침’은 부사로 가장 적절한 순간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마침을 신앙인이 아닌 사람들은 우연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크리스천들이 볼 때는 우연이 아니라 필연으로 하나님의 개입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의 마침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예수님이 자원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아들아, 세상 사람들이 모두 지옥에 가는데 너무 불쌍하구나. 네가 세상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어다오.” 그러자 예수님은 “아버지 제가 십자가를 감당하기는 너무 힘이 듭니다. 십자가 통나무는 너무 무거워서 제가 골고다 언덕으로 도저히 지고 갈 수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께서 가라고 하시니까 무조건 “예” 하고 순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순종하실 때에는 순종에 자신이 있어서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믿음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보내실 때에는 예수님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도록 하신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육체는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을 뿐 아니라 풍채 또한 기골이 장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니 “예!” 하고 순종하신 것입니다. 커다란 통나무를 지고 가시던 예수님은 몇 번 비틀거리며 쓰러지기도 하셨을 것입니다. 그 때 구레네 사람 시몬이 나타난 것입니다. 시몬은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를 지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 식민 통치를 받는 피지배인 신분으로서 억압하고 누르는 로마 군병을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할 수 없는 그것을 구레네 사람 시몬이 대신 해주신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신격을 사용하신다면 능히 감당하고 남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하는 인간의 대표였기 때문에 신적 능력을 하나도 쓰시지 않고 쓰러지신 것입니다. 더 이상 갈 수 없을 때 하나님께서는 대신 짊어질 구레네 사람 시몬을 보내신 것입니다. 많은 신앙인이 ‘마침’이라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도 하고 그러지 못하는 사람 또한 많습니다. 차이는 그들의 믿음의 정도 차이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사람은 자신이 비록 부족할지라도 무조건 “예!”하고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감당할 힘과 감당할 사람을 주십니다. 하지만 자신만 바라보는 사람은 이론의 한계에 자기 능력의 한계에 부딪혀 한 발짝도 앞으로 가지 못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마침’을 체험하지 못하고 맙니다. 계속 제자리 신앙에 머물게 됩니다. 신앙인들이 ‘마침’을 체험하려면 모든 이론, 이유 까닭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분명 하나님의 선하신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서 성막을 세울 때 하나님의 지시는 매우 정교하고 다양하고 그것을 기억하기조차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이 명령하셨을 때 그렇게 하겠다고 순종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성막을 지을 수 있는 은사를 가진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같은 사람을 만나게 하셨으며(출31:1-7), 성막을 지을 재료 또한 넘치도록 공급받게 하였습니다. 다윗은 그의 아버지가 곡식과 건포도 심부름을 군대에 가 있는 형들과 그곳의 감독자들에게 전달하라고 했을 때 다른 형들에게 시킬 것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가겠다고 순종하였습니다(삼상17:20).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는 마침 골리앗을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삼상17:23). 그는 골리앗과 싸울 것을 청하였으며 골리앗을 죽였고 그가 이스라엘의 중앙에 진출하는 계기가 됩니다. 신앙인들이 이처럼 ‘마침’이라는 ‘여호와 이레’를 체험하기 원한다면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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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사순절의 묵상’(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지금 우리는 사순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희생을 기리며 자신을 돌아보고 영적 성장과 변화를 이끌어내는 기간입니다. 이 기간에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주님의 발자취를 살펴보며,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다시 조명하고 그 발자취를 따르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을 묵상하면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며 더욱 경건한 삶을 이루어 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통은 우리가 지은 죄와 받을 고통을 대신 당하신 것이었습니다. 내가 죽을 그 십자가, 내가 매달려야 할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대신 담당하여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죄 값을 대신 담당하신 예수님께서는 내가 받을 영원한 형벌, 사망과 수치, 내가 받을 부끄러움을 다 당해주셨습니다(마 26:67, 27:30).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율법의 요구에 마침표를 찍는 위대한 사건이었으며, 우리는 이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습니다(요 1:12-13; 14:6).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은혜를 깨달아, 구원 받은 자로서 저 영원한 것을 소망하면서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고난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서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성도가 참으로 성숙한 성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십자가만 바라보고 살아갈 때, 예수님의 가신 고난의 길을 따를 수가 있습니다. 모세도 이와 같은 마음으로 고난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4-26). 우리의 자아가 죽어야 고난을 담당하고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날마다 죽노라”고 결단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고난을 피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어렵더라도 고난을 짊어지고 소망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십자가에서 이미 죽은 사람들입니다(갈 2:20). 그러므로 우리 모두에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 고백이 믿음입니다.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하면 근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십자가만 알고, 십자가만 자랑하고, 십자가만 높이고, 십자가만 믿고 나아갈 때 우리는 강해지며 힘과 능력을 얻게 됩니다. 우리도 오직 십자가만 붙들어야 하겠습니다. 십자가에는 신비한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만이 나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십자가만이 내 죄를 씻고 새롭게 합니다. 십자가만이 나를 성령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십자가를 붙들면 내 인생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드시기 바랍니다.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십자가만 믿으십시오. 사순절을 맞아 우리는 항상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묵상하며, 우리도 어떻게 하면 그 고난에 동참할 것인가를 고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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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5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억지 같은 일’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웠더라.”(마27:32) 신앙인들이 때때로 자기의 원대로 무슨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반면에 자기 뜻대로 될 때는 그것을 은혜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그것도 은혜일 수 있지만 성경에 나오는 참된 은혜는 자기 뜻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본문의 구레네 사람 시몬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몬이 어떻게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가는 곳에 왔는지 알 수 없지만,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넘어지고 일어서는 것을 반복하자, 예수님의 십자가를 시몬이 대신 지도록 하였습니다. 시몬은 처음에는 완강히 거부했지만, 로마라는 절대 권력 앞에서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기적은 그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그는 십자가를 억지로 졌지만, 그가 그것을 짊어졌을 때는 ‘짊어지기를 잘했다.’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짐으로 인하여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을 좀 더 편안히 오르실 수 있다는 성령의 위로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당시에 느꼈던 소감을 그의 아내와 아들들인 알렉산더와 루포에게 전하여 주었습니다. 그러자 온 가족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억지 같은 일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까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 것입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은 아버지 품에서 계속 사랑을 독차지 하며 살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를 시기하였던 형님들이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아 넘겼습니다(창37:27-28). 그는 형님들에게 팔지 말아달라고 애걸복걸하였습니다. 그러나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려가 노예생활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계셨기 때문에 그는 그곳에서 가정 총무가 되었습니다. 또 보디발 아내의 모함으로 감옥에서 2년 동안 있었지만, 최후에는 바로의 꿈을 해석하여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당시 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 일대에 7년 흉년이 들었지만, 애굽은 물론 가나안에 사는 아버지와 형제 가족 모두를 구원하게 됩니다(창세기43장-47장). 억지 같은 일들이 그야말로 큰 은혜가 된 것입니다. 그 외에도 성경은 그러한 많은 일들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한 번은 사울의 아버지인 기스의 집에 나귀가 도망을 갔습니다. 참 좋지 않은 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일을 계기로 사울은 사무엘을 만나게 되어 기름 부음을 받고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었습니다(삼상9:1-10:27). 그랬던 사울도 나중에는 타락하여 그의 충성된 신하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핍박을 피하여 블레셋의 시글락에 머물렀습니다. 블레셋의 가드 왕 아기스는 그가 이스라엘과 싸우러 갈 때에 다윗도 함께 하도록 명하였습니다(삼상28:1). 하지만 그를 싫어하는 방백들 때문에 싸우러 가지 못하고 시글락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돌아와 보니 그곳은 아말렉의 침투를 받아서 그의 처자식은 물론 부하들의 처자식과 재물까지도 약탈 당했지만 당황하지 않고 다시 가서 모두 회복했습니다. 그가 블레셋 방백들의 반대를 받아 이스라엘과 싸우러 가지 않게 된 것이 블레셋 방백들의 억지였지만 그 일로 인하여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처자식과 재산을 다시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삼상 27장~30장). 신약에서는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내셨다고 하셨습니다(막1:12). 예수님께서 자원하셔서 광야로 가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몰아내신 것입니다. 그곳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시고 사탄의 시험을 이긴 후 천사들의 수종을 받으셨습니다. 바울은 전도 여행을 아시아 지방으로 가려고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성령이 허락지 아니하므로 방향을 마케도냐로 돌렸고 그곳에서 루디아 같은 신앙인들을 만나서 빌립보 교회를 세웠습니다(행16).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신앙인들에게 모든 일에서 유익만 되게 해주시지만, 특별히 억지 같은 일들이 은혜로 임할 때가 있습니다. 생활 가운데, 사람과의 관계에서 원하지 않는 일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은 범사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고(잠3:6) 그 이름을 찬송하기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욥3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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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6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믿음은 행위로 나타나야’(약 2:14-18)
    믿음과 행위는 동전의 앞뒤 면과 같이 불가분의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믿음과 행위는 같이 가야 하는 것이기에 믿음은 입술로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활 속에 행위로 나타나야 참된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믿음과 행함 사이에서 많은 고민이 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고민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많은데, 정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지 알 수 없다는 말들이 들려오고 있지 않습니까?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행위로 증거 되는 믿음인 것입니다. 행위가 동반되어야 참 되고 올바른 믿음이므로 믿는 우리는 오직 행하는 믿음으로만 살아야 하겠습니다. 26절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행위가 따라가야 살아있는 믿음이라는 것이지요. 믿음이 원인이라면 행위는 결과입니다. 믿음이 나무라고 한다면 행위는 열매입니다. 믿음과 행위는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믿음이란 아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나야 생명 있는 믿음인 것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합 2:4, 롬 1:17)는 말씀은 말씀의 생활화를 말합니다. 믿음은 생각이 아니라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삶이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삶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실천하는 삶은 믿음을 활성화시켜주고, 더 큰 믿음을 낳습니다. 말씀을 실천하는데서 만족이 있고, 감사가 있고, 헌신이 있고 기쁨이 더 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나의 의지와 노력으로 율법을 잘 지켜 의에 도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믿고 감사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하시기에 말씀으로 우리의 생각, 행동을 다스리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 속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믿음을 생활화할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내게 있는 믿음이 비록 작은 믿음이라 할지라도 그 믿음을 근거로 해서 행동으로 옮길 때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믿음에 행동이 있을 때에 영력이 생겨나고,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믿음은 합당한 열매로서의 행위가 나타나야만 합니다. 우리는 입술만의 신앙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행동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입술의 신앙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신앙도 있습니다. 성경말씀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행위가 없으면 이 역시 죽은 신앙입니다. 사변적인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을 한 분으로 믿는 믿음은 바르지만 그것이 단지 지식에 멈춘다면 그러한 믿음은 헛되고 잘못된 믿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들어오기 때문에, 그 생명의 실제로 나타나게 되는데 그것이 실천이고, 그것이 실행이고, 그것이 행위인 것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지만, 행함은 눈에 보입니다. 보이지 않는 믿음은 보이는 행동으로 자신을 나타내게 됨으로 그 사람의 발자취를 통해 믿음이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행하는 믿음으로 살아서 믿음이 온전케 되고 믿음의 열매들을 풍성히 맺어 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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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19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하나님이 붙여주신 것을 누리라’
    “이에 자기 위를 이어 왕이 될 맏아들을 취하여 성 위에서 번제를 드린지라. 이스라엘에게 크게 통분함이 임하매 저희가 떠나 각기 고국으로 돌아갔더라.”(왕하3:27). 열왕기하 3장에는 이스라엘 아합왕의 아들 여호람 시대에, 모압 왕 메사가 새끼 양 십만의 털과 수양 십만의 털을 이스라엘 왕에게 조공하였는데, 아합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 왕을 배반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자 여호람 왕이 유다 왕 여호사밧과 에돔 왕과 함께 모압 왕을 치러 갔습니다. 그들이 길을 둘러 행한지 칠일에 군사와 따라가는 생축에게 먹일 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를 불러 어떻게 해야 좋을지 물었습니다. 엘리사는 그곳 골짜기에 개천을 많이 파면 물이 가득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것은 오히려 작은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큰 일은 ‘하나님께서 모압 사람도 그들의 손에 붙이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엘리사의 말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골짜기 주변에 개천을 많이 팠습니다. 그러자 아침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물이 에돔 편에서부터 흘러와서 그 땅에 가득하였습니다. 그래서 식수난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모압 사람을 쳐서 달아나게 하였습니다. 모압 왕은 그들이 이스라엘 연합국을 당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기의 맏아들을 취하여 그들의 우상에게 번제로 바쳤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에게 크게 통분함이 임하여 고국으로 철군하였습니다. 이것은 명백히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압 왕이 항복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이 다시 이스라엘을 섬겼다는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과 연합국은 그들이 그곳에 왔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철군한 것입니다. 엘리사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여호와 보시기에 오히려 작은 일이라. 여호와께서 모압 사람도 당신의 손에 붙이시리니”(왕하3:18). 길을 행하다가 물이 가득하게 된 것은 큰 은혜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본질이 아니라 과정 중에 일어난 은혜였습니다. 더 큰 일은 모압 왕이 그들에게 항복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엘리사를 통하여 모압을 이스라엘에게 붙이셨다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왕과 군사들은 모압 왕과 군대의 항복을 받기 전에는 철군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왜 돌아서고 말았을까요? 본문에 대하여 쉬운 말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모압 왕은 자신의 뒤를 이어 왕이 될 맏아들을 붙잡아 성벽 위에서 불로 태워 자기들의 신에게 제물로 바쳤다. 이를 본 모압 사람들이 큰 충격을 받고 분노심이 끓어올라 죽기 살기로 싸울 태세를 취하자, 이스라엘 연합군은 더 이상 공격하지 못하고 후퇴하여 고국으로 돌아갔다.” 모압 왕이 그의 맏아들을 불에 태워 바치자 모압 군인들에게 분노심이 폭발한 것입니다. 그 분노심에 그들은 죽기살기로 싸울 태세였습니다. 그것을 본 연합국이 겁에 질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모압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아니하고, 모압 사람들의 결사적인 항전 태도를 보고 떨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압 왕의 항복을 받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차려놓으신 밥상을 두려움으로 인하여 먹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열 지파가 가나안 땅을 정탐한 후 아낙 자손들의 강대함을 보고 마음이 녹아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다가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멸망 당한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이루셨습니다. 구속 사역을 이루셨고,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셨으며 이 세상에서부터 천국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신앙인들 가운데는 구원받은 자답지 않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고맙고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여전히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의는 예수님의 의입니다. 우리의 행위는 믿는 자 안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능력입니다. 사방팔방에서 공격하는 사탄 또한 예수님의 승리하심을 선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을 해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들이 울부짖는 것은 단지 우리 안에 갇힌 짐승의 소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은 담대하게 마귀를 대적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붙인 것을 우리가 누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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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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