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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합심기도 왜 드려야하는가’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19-20). 합심 기도란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힘을 합하여 드리는 기도를 의미합니다. 악한 영들과 죄는 꽁꽁 묶도록 기도하며, 성도들은 그들로부터 자유로움을 얻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가깝게는 죄를 범한 형제가 회개하고 바른길로 들어서도록 두 사람이 합심해서 기도하라는 말씀이며, 넓게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범사에 합심 기도가 필요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두세 사람의 의미는 교회를 이루는 최소 단위입니다. 교회가 크든 작든 힘을 합하여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합심 기도와 그 능력에 대해서는 성경에 많이 나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생활 중 제일 먼저 마주한 사람들은 아말렉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섰고 여호수아는 사람들을 택하여 그들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 싸움에서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겼지만, 모세가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습니다(출17:8~16). 모세가 피곤하여 손을 내리자 아론과 훌이 돌을 가져다가 놓고 그 위에 모세를 앉게 한 후 둘이 양편에 서서 모세의 손을 붙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모세의 손은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않았고 전쟁터에 있는 여호수아와 군인들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승리하였습니다. 모세가 손을 든 것은 기도를 의미합니다. 모세 혼자서 할 수 없는 기도를 아론과 훌이 도왔습니다. 그로 인하여 아말렉을 파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최전방에 있는 사람은 현장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합심하여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사시대에 하나님보다 아들들을 더 사랑한 엘리제사장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영적 암흑기가 되었습니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삼상3:1).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이스라엘은 패하여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압제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이 사사로 있을 때 온 이스라엘을 미스바에 모이고 합심하여 금식하며 회개하였습니다. 그런 후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다시 침입했을 때 이스라엘은 그들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삼상7:11).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에서 다니엘과 세 친구는 느부갓네살왕이 꾸었던 꿈을 알 수 있도록 합심하여 기도하였습니다(단2:17~18). 그 결과 왕이 놓쳐버렸던 꿈이 다니엘에게 그대로 재현되었습니다(단2:29-35). 예수님 승천 후에 예수님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님의 아우들이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습니다(행1:12-14). 그 결과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여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게 되었습니다(행2:4). 또 헤롯이 사도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도 죽이려고 그를 옥에 가두었을 때 형제들은 마가의 집에 모여 그를 위하여 일심으로 기도하였습니다. 그 결과 천사가 베드로 곁에 와서 쇠사슬을 풀어주고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옥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마가의 집에 갈 수 있었습니다(행12:5,7). 점하는 귀신 들린 여인의 귀신을 쫓아주고도 감옥에 갇혔던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기도했더니,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 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행16:25-26). 예수님께서는 왜 합심 기도를 강조하셨을까요? 시편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133:1-3). 아론은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성령의 기름을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께 부어 주시는데 예수님을 머리로 모시고 연합하여 몸이 된 형제들에게까지 성령의 기름이 흘러 내리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은 연합한 곳에서 강하게 임합니다. 곧 교회의 최소 단위인 두 사람이 예수님을 머리로 삼고 합심하여 기도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들으시고 복을 명하십니다. 성령은 개인적으로 임하기도 하지만 가장 강하게 임할 때는 신앙인들이 교회 가운데 있을 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2:7, 11, 17, 3:29, 6, 13, 22)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오늘날에는 성령이 교회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시대입니다. 성령의 음성을 들으려면 정성을 다하여 예배에 참석할 뿐 아니라 몸의 지체로서 자신에게 주신 은사를 사용하여야 합니다. 합심 기도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뜻을 합하여 기도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합심기도는 사욕을 제어합니다. 합심 기도하면 사욕을 좇는 기도보다는 서로의 목표를 위하고 보다 더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하려고 합니다. 합심 기도는 자신을 위한 기도보다 중보기도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며 상대를 배려하고 이해하는 심정을 갖게 합니다. 성경은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 4:12)라고 말합니다.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 아닙니다. 셋이 될 수도 있고 넷이 될 수도 있습니다. 불은 혼자서는 탈 수 없습니다. 모여야 활활 타오르게 됩니다. 하나 더하기 하나는 산술적으로 둘이지만 실제는 셋도 되고 열도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합심할 때 불가능이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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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1-27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죽은 행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지니라.”(히6:1~2). 작년 봄 옥상에 고추와 가지, 맨드라미, 백일홍 등 채소와 화초를 심었습니다. 대부분은 한해살이 식물이기 때문에 지난가을 이미 시들어버린 몸을 거둬들여야 했지만 게으른 탓에 차일피일 미루다가 지금은 흙마저 꽁꽁 얼어 그들의 주검을 보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토록 화려했던 자태는 온데간데없고 하얗게 바래버린 면류관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시들고 말라버린 꽃들이 아무리 자신의 모습을 과시한들 볼품없는 형체입니다. 본문의 죽은 행실에서 죽음이란 육신의 죽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죽음, 곧 거듭나지 못했을 때를 말하고 있습니다. 거듭나지 못했어도 육신이 있으므로 행동을 합니다. 그 행동을 신앙 차원에서 죽은 행실이라고 합니다. 신앙인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과 행동이 같을 수 없습니다. 영적인 사람과 육적인 사람이 같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믿지 않는 사람들과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듭났어도 여전히 육신을 따라 죽은 행실을 하기 때문입니다. 육신은 믿는 사람들의 육신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의 육신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거듭난 것은 육신이 아니라 영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가 말도 하고, 죽은 자가 사랑도 하고, 죽은 자가 왕래하기도 하며 사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죽은 행실입니다. 좋은 열매가 없는 행동입니다. 세상이 끝날 때 사라지는 행동입니다. 시체를 오래 두면 썩어 악취가 납니다. 그 악취는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역겨움이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그 냄새를 모릅니다. 하지만 산 사람은 죽은 행실에 대한 냄새를 압니다. 죽은 행실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딤전5:5 이하는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일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일락을 좋아하는 사람은 죽은 행실을 하는 사람입니다. 과부는 남편이 없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신앙인들은 재림 때까지 신랑이신 예수님을 빼앗긴 과부들입니다. 그러므로 위 말씀이 바울 당시 과부들에 대한 말씀일지라도, 신앙인들 역시 예수님께 소망을 두지 않는다면 일락에 빠질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눅15:24은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라고 말합니다. 돌아온 탕자에 대한 비유입니다. 둘째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했습니다. 그가 죽었을 때 그는 관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그는 아버지 품을 떠나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다 허비하였습니다. 이처럼 죽은 행실은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생활이 허랑방탕한 생활이며 세상과 벗하는 것이 영적인 간음입니다. 엡2:1이하에는 죽은 행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이 말씀에서 우리는 죽은 행실을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세상 풍속을 따르는 것이며, 둘째는 마귀의 영 곧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고, 셋째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는 행위입니다. 세상 풍속은 세시 풍속과 유행 등을 말합니다. 또한 시대마다 흐르는 사상 풍조를 의미합니다. 그러한 것들을 따라 그것이 마치 진리인 양 따라 살아가는 것이 죽은 행실입니다. 신자들이 유행에 민감하게 행동하는 것 역시 세상풍속을 따름입니다. 신앙인들은 유행을 따르거나 세상 풍속을 따를 것이 아니라 변함없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요14:6). 신앙인들이 은사가 있다면, 하나님께 전심전력하기 위하여 홀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것입니다(마19:12, 고전7:34,38). 하지만 그런 뜻이 아니라면 남녀가 혼인하여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요사이 신혼부부들이 혼인신고를 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유는 살아보고 하겠다는 의미가 있고, 둘째는 재산상에 있어서 부부가 갖는 불이익을 갖지 않겠다는 의미도 있을 것입니다. 자녀를 낳지 않는 것 역시 요사이 흐르는 세상 풍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형편상 이해되지만, 자녀는 하나님의 소유라고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길러 주실 것이라고 믿는다면 기독교인들이 자녀를 갖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죽은 행실의 또 하나는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인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행위입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는 마귀입니다. 마귀는 불순종하는 사람들 가운데 역사합니다. 거역하는 사람에게 마귀가 들어갑니다. 부모님께 거역하면 마귀가 들어가고, 웃어른께 거역하면 마귀가 들어갑니다. 물론 주 안에서 순종함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엡6:1). 순종은 십자가입니다(빌2:8). 십자가는 곧 죽음을 의미하는데 순종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해야 하며(눅9:23), 자기 의견을 접는 것은 혼적인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죽은 행실은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아감입니다. 육체의 특징은 정과 욕심입니다. 자신의 기분대로 자신의 욕심대로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죽은 행실입니다. 거기에서 일락이 나오고 허랑방탕함이 나옵니다.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습니다. 하지만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삽니다(롬8:13). 영적인 삶은 거듭난 선한 양심을 따라 살아가는 행위를 말하며 선한 양심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게 살아가려는 마음입니다(히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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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1-21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창35:3). 이 말은 야곱이 그 가족들에게 한 말입니다. 이 말 전의 사건에서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에 의하여 강간을 당하고, 이에 격분한 오라버니 레위와 시므온이 세겜과 그 아버지 하몰을 비롯하여 그 성의 모든 남자를 비겁하고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그러자 야곱이 가나안 족속들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한 말입니다. 야곱이 즉흥적으로 한 말은 아닙니다. 1절에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라고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일어나......” 말씀처럼 그때까지 엎드리거나 앉아서 기도드렸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잠만 자거나 다른 방법을 모색하였다면 이런 말씀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기도드려야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기도드려야 여러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기도드리지 않으면 좋은 일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악한 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을 뜻합니다. 그가 처음 하나님을 만난 곳은 원래 루스라고 불리던 곳이었는데 그가 하나님을 만난 후 벧엘이라고 칭한 것입니다(창28:19). 이때 야곱은 아버지와 형님을 속이고 형님의 원한 때문에 아버지와 함께 살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래서 도망 나온 것입니다. 하룻길을 가다가 해가 저물었습니다. 할 수 없이 돌을 베게 삼아 노숙을 했습니다. 그와 동행했던 사람이 있다거나 나귀가 있다는 내용도 없습니다.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에 저녁이 오고 밤이 깊어졌습니다. 어둠이 임하면 동물이나 새들도 무서워합니다. 야곱인들 어찌 무섭지 않았겠습니까? 언제 강도들이 습격할지 모르고 늑대와 이리가 덤벼들지 모르는 곳입니다. 간혹 사막의 독사들에게 물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졸음 앞에서는 그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잠이 들었는데 꿈을 꾸었습니다. 하늘에 닿는 사다리가 있고 거기에 천사들이 사다리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천사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야곱을 시중하는 천사들이었습니다. 당시 야곱은 자신의 죄 때문에 떠나는 길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야곱을 꾸짖으시며 야단치는 것이 당연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꾸짖기는커녕 뜻밖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28:12~15). 책망을 들어야 마땅한 야곱인데 하나님께서는 한 마디 책망을 안 하시고 복만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불안하고 무서워하던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위로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모습은 어쩌면 불공평하게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불공평하신 분이 아닙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야곱을 책망한들 야곱이 감당할 그릇이 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대신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야곱은 오늘날 신앙인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 허물이 크고 야곱처럼 간사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허물을 그냥 놔두시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영의 성장에 따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책망하시며 만들어 가십니다. 마치 야곱에게 그보다 더 간사한 라반을 붙여 주신 것처럼 평생을 환경을 통하여 우리를 만들어 가십니다.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야곱은 그곳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과,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겠다며 서원을 합니다(창28:20~22). 그 후로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어려움을 당할 때 야곱이 기도하면, 벧엘로 올라가서 그가 약속했던 서원을 갚으라고 말씀하십니다(창31:13, 35:1). 본문은 그러한 말씀을 상기하며 야곱이 자손들에게 전하는 내용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집은 건물로서의 성전만 아니라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신앙인들 자신이 하나님의 집이기도 합니다(고전3:16,6:19). 코로나로 인하여 모이기가 힘들어진 요즈음에 예배당에서 기도하는 사람이 많이 줄어든 것도 사실입니다. 자신이 머무는 그곳에서 기도드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집안에서 기도드리다가 졸리면 누워 자기 일쑤입니다. 환난이 닥칠 때마다 신앙인들은 야곱이 “벧엘로 올라가자”라고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집으로 올라가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예배당에 가서 기도드리기 위해서는 그만큼 몸과 마음과 정성을 갖추기 때문입니다. 예배당으로 올라가는 것 자체가 힘을 쓰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벧엘로 올라가자.” 어떤 환난도 하나님의 집에서 해결 못 할 것이 없습니다. 환난이 있습니까? 어려움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집으로 올라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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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1-07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1:21). 예수님의 이름 “예수”는 ‘여호와가 구원하심’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구원하실 분은 ‘하나님’이시고, 구원받을 대상은 ‘자기 백성’이며, 구원받을 위치는 ‘그들의 죄’입니다. 죄란 히브리 원음으로 ‘핫타스’인데 이것은 본래 ‘과녁을 벗어나다.’ ‘실패하다.’의 의미가 있습니다. 과녁은 ‘하나님의 뜻’ ‘진리’ ‘의’ 등에 해당합니다. 이것을 통틀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죄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 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롬6:12) 라고 말합니다. 몸의 사욕을 순종함이 죄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신앙인의 죄는 윤리 도덕적인 차원을 포함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로, 사람들 마음에 있는 생각과 계획은 어려서부터 악했습니다(창6:5). 또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것이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렘17:9). 이러한 악과 거짓과 부패 덩어리인 자기 마음을 믿고, 그 마음대로 살아감이 죄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런 가책 없이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기를 좋아합니다. 그것을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죄를 왕으로 섬기고 살아가는 노예입니다. 따라서 폭군의 통치를 받는 주민들이 말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듯,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죄의 주관자인 마귀의 압제를 받아 흑암과 사망 곤고와 쇠사슬에 매이게 됩니다(시107:10,11). 주님께서 오신 목적은 이러한 죄의 수렁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유대인의 역사를 보면 북왕국 이스라엘이 BC723년에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하고, 137년이 지난 후 BC586년에 남왕국 유다는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70년 만에 마치리라(단9:2).’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페르시아 제국 때 예루살렘 성전이 70년 만에 재건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예루살렘은 계속 페르시아의 속국으로 있었습니다. 그 후 페르시아가 헬라에 의하여 멸망하자 예루살렘도 헬라 제국의 소유가 되고 말았습니다. 헬라 제국이 로마와 싸우며 약해진 틈을 타 이스라엘은 잠시 독립을 쟁취합니다. 이때가 바로 유대의 마카비 혁명 시대와 하스몬 왕조 때입니다. 그러나 하스몬 왕조의 내분이 결국 내전으로 소용돌이치자 하스몬 왕조의 총리를 맡고 있던 이두매(에돔) 가문 헤롯의 아버지 안티파터는 나라를 로마에 넘기고 맙니다. 이렇게 해서 다시 이스라엘은 속국이 되고 맙니다(조병호, 성경과 고대 전쟁, 통독원) p218. 이처럼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이민족의 통치를 받으면서 모세와 선지자를 통하여 약속하신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독립국이 되어 그동안 받았던 이민족의 압제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세계를 지배하는 국가가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때 바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예수님은 그들을 로마에서 해방해줄 생각도, 그들과 싸울 생각도 없어 보였습니다. 로마 정치인들을 책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유대인 기득권층만 강하게 책망하였습니다. 그래서 시기심과 실망한 마음이 합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긴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을 로마에서부터 해방해줄 정치적인 메시아가 아니라, 그를 믿는 모든 백성을 죄로부터 해방할 영적인 메시아라는 사실을 유대인들이 알 리가 없었습니다. 사실 영적인 문제가 해결되면 환경의 문제도 해결됩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면 이민족의 압제도 풀리게 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역사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특히 사사시대 이스라엘 역사의 패턴 곧 “1. 백성들의 범죄 2. 그로 인한 이민족의 압제 3. 회개 4. 구원자 사사를 보냄 5. 해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만일 죄악을 회개하였다면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 2,000여 년 전에 벌써 독립국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의 죄를 사해주실 뿐만 아니라 죄의 통치를 받는 성도들을 해방하기 위함입니다. 죄의 종에서 벗어나 주님의 다스림을 받게 하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저를 비롯한 많은 신앙인이 죄 사함을 받아 의롭게 되었지만, 아직도 여전히 죄의 수렁에 빠져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함인데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함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능히 우리를 죄의 수렁에서 건지실 능력을 갖추고 계시지만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신앙인 자신이 죄의 수렁에서 빠져나오기를 원해야 한다는 사실과(요5:6) 주님은 능히 우리를 건지실 능력이 있음을 믿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마9:28,29). 믿음과 소망은 차의 앞뒤 바퀴처럼 함께 움직입니다. 크고 강한 믿음은 절실한 소망을 낳습니다. 간절히 원하는 자의 소원을 주님은 들어 주십니다(마15:28). 미세먼지로 사방이 뿌연 하늘입니다. 2019년 말에 시작되었던 코로나19가 여러 종류의 백신이 개발되었음에도 사라지기는커녕 더욱 극성을 부리고 있습니다. ‘설마 우리에게까지….’ 라고 생각했던 그들이었지만 주변에 들려오는 소식들이 우리와 멀지 않음을 느낍니다. 코로나19를 백신으로만 해결하려 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치적인 메시아를 고대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코로나19 역시 영적인 문제입니다. 우리는 코로나19까지도 아기 예수님이 오신 목적, 죄 가운데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함인 줄 깨닫고 죄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간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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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25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다윗과 베들레헴 우물 2’
    “다윗이 사모하여 가로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 하매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충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다. 이는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던 사람들의 피니이다. 하고 마시기를 즐겨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삼하23:15~17). 성경에는 우물물에 대한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물은 그만큼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중동 지역에는 우리처럼 물이 흔하지 않기 때문에 우물은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우물을 차지하기 위하여 때로는 전쟁도 불사하였고, 그것들을 소유한 사람들은 부와 권력까지 거머쥘 수 있었습니다. 양보만 하는 이삭을 그 마음까지 르호봇(장소가 넓음)이 되도록 한 것은 우물이었습니다(창26:12~22). 야곱이 아버지와 형님을 속이고 외삼촌이 사는 하란으로 도망가서 첫사랑 라헬을 만난 곳도 우물가였습니다(창29:10~12). 모세는 스스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려다가 애굽 사람을 죽이는 실수를 범하고 미디안 땅으로 도망갑니다. 그곳에서 십보라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는데 우물이 촉매의 한 축을 담당합니다(출2:11~22). 신약으로 들어와, 어느 날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이 기피하는 사마리아로 통행하십니다(요4:5~42). 행로에 곤하여 우물곁에 앉아 계셨는데 한 여인이 물을 길으러 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다. 여기서도 이 물은 예수님과 여인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가 됩니다. 다섯 번의 혼인과 이혼을 반복했던 여인은 세상과 남편 어느 것도 그를 만족시켜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영원한 생명수인 메시아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의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생수를 주시기 전, 먼저 여인에게 있는 것을 달라고 하신 것입니다(요4:7). 이처럼 주님이 신앙인들에게 먼저 달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 부족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것을 주시고 더 많은 것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마침내 여인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자신이 사는 동네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합니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요4:29) 그동안 베들레헴 물이 블레셋 진영에 의하여 차단 된 것처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 때문에 끊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고 에덴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습니다(창3:22~24). 그뿐만 아니라 생명의 책 역시 봉인 되었습니다(계5:4). 그야말로 온 인류는 저주 가운데 탄식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기근과 질병과 전쟁과 온갖 잡신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소망 없이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할 때 우리 예수님이 한 줄기 빛으로 오셨습니다. 사람들 뿐 아니라 만물이 탄식하고 고통 하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신 성부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죄인들을 위하여 보내신 것입니다. 다윗의 세 명의 특공요원은 왕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걸고 베들레헴 우물을 길어 왔지만 예수님은 전능하신 왕이심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의 고통을 친히 담당하시고 죽으신 후 부활하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는 생명수가 터졌고, 생명나무 실과를 먹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던 원수들의 머리가 깨졌습니다. 또 봉인 된 생명책을 활짝 펴시고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를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물을 마실 때마다, 주님께서 성령을 상징하는 생수를 자기 백성들에게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처형당하시고 창에 허리를 찔리어 물과 피를 다 쏟으셨다는 것을 기억하고 몸과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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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13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전달자의 사명’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1:8). 이 말씀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편지입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아들로 여기는 제자였습니다(딤후1:2, 2:1). 이런 디모데가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을 부끄러워하고 있고, 바울은 디모데의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 보통은 모르는 척 하고 지나가기 쉬운데 바울은 여과 없이 디모데에게 그의 형편, 그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이 글을 보는 순간 ‘아이고, 들통 났구나.’ 하며 스승 바울에게 죄송스러운 마음과 부끄러움이 교차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입장에서도 디모데의 그런 태도는 다소 실망스러웠을 것이지만 여전히 바울은 디모데를 “아들 디모데야!” 하고 부릅니다. 디모데의 잘못을 직설적으로 지적해주는 바울, 그것은 바울이 디모데를 그만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의 입장에서는 순간은 아프지만 자신의 잘못을 회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믿음의 대 선배인 베드로에게도 그렇게 한 것입니다. 언젠가 베드로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 그는 할례 받지 아니한 이방인들과 즐겁게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에게서 보냄을 받은 유대인 형제들이 오자 베드로는 갑자가 태도를 바꾸더니 이방인 형제들과 식사를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습니다. 그러자 다른 형제들도 따라 하였고 심지어 바나바조차 휩쓸리고 말았습니다.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하였습니다. “당신은 원래 유대인인데도 다른 유대인들과는 달리 율법에 구애받지 않고 이방인들처럼 살아왔소. 그런데 이제 와서 이방인들에게 유대인처럼 살라고 강요할 수가 있는 겁니까?”(갈2:14, 쉬운말 성경 역). 바울의 사랑 방법은 좋은 점은 칭찬하고 격려하며, 잘 못한 점이 있으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기 전 에베소 장로들에게 고별 설교를 한 내용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가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행20:18~21). 이로 인하여 그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행20:26~27). 바울이 이 말씀을 하게 된 바탕은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하신 파수꾼의 자세, 곧 하나님께서 악인에게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악인을 깨우치면 악인이 돌이키든지 안돌이키든지 에스겔은 책임을 면하지만 만일 에스겔이 깨우치지 아니하면 악인은 자신의 죄 값으로 죽고, 그의 피 값은 에스겔이 내게 된다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겔3:16~21). 바울이 그런 피 값에 대하여 깨끗하다고 말한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파수꾼의 자세를 마음에 새기고 산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아무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말이 먹힐 수 있었던 것은 바울 자신의 삶이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살았기 때문입니다(행24:16). 모든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였기 때문입니다(행20:35). 한 편으로는 당시 베드로와 디모데의 인격을 알 수 있습니다. 대선배 베드로는 바울의 그러한 지적에 불쾌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바울에 대하여 섭섭한 감정을 드러냈다는 내용은 성경 어디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바울에 대하여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벧후3:15) 라고 하면서 “사랑하는 형제”로 말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와 베드로 모두 책망을 받을 만한 그릇이 되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거만한 사람이라면 책망을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잠9:7~9). 이처럼 책망하는 말은 아픈 것이지만 청종하는 귀에 금 고리와 정금장식입니다(잠2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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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12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의뢰의 원동력’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 넘나이다.”(삼하22:30). 삼하22:30절 이하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말씀이 여러 절에 나옵니다. ‘의뢰’(30절), ‘방패’(31절), ‘바위’(32절), ‘요새’(33절), ‘구원의 방패’(36절), ‘구원의 바위’(47절) 등입니다. 이러한 힘, 배경을 의지하고 다윗이 행동한다는 말씀이 46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47절부터 51절까지가 하나님께 대한 찬미입니다. “하나님을 의뢰하고 나갔더니 하나님께서 이기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니 이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는 내용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의뢰했을 때 하나님은 다윗을 어떻게 도우셨을까요? 적군에 달리며 성벽을 뛰어 넘도록 했습니다(30절). 다윗의 발로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34절), 그의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셨습니다(35절). 다윗의 걸음을 넓게 하셨으며, 그로 실족치 않게 하셨습니다(37절). 다윗이 원수를 따라 멸하도록 하셨으며, 저희를 무찌르기 전에는 돌이키지 않게 하셨습니다(38절). 원수들로 등을 다윗에게로 향하게 하시고, 그를 미워하는 자를 끊어버리게 하셨습니다(41절). 적군을 땅의 티끌 같이 부스러뜨리고 거리의 진흙같이 밟아 헤치도록 하셨습니다(43절). 이로 인하여 다윗은 다음과 같이 찬양합니다. “여호와는 생존하시니 나의 바위를 찬송하며 내 구원의 바위이신 하나님을 높일지로다.”(47절), “이러므로 여호와여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 하리이다.”(50절). 그러면 이제 이런 의뢰는 어디서 비롯됩니까?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하나님께 대한 의뢰는 하나님을 아는데서 시작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방법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를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그 행위를 모세에게, 그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시103:7). 하나님이 하신 일을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을 알리십니다. 만물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신 일을 알 수 있습니다. 자연에 나타난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롬1:19~20). 역사 속에서 하신 일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말 탈 자 일천도 없을 만큼 미약했던(사36:8) 히스기야 군대가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하룻밤 사이에 앗수르 군대 18만 5천을 쳐서 죽였습니다(사37:36).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아니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행하신 일입니다. 예수님 부활 후에 제자들이 갈리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밤 새 그물을 던졌으나 잡힌 것이 없었습니다. 날이 새어 갈 때에 어떤 분이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그러자 제자들이 없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분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제자들은 그 분의 말을 듣고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오른편에 던졌습니다. 그러자 고기가 들 수 없을 만큼 많았습니다. 그 때 제자들 중 요한이 말하였습니다. “주시다.”(요21:7). 누구도 주님이신 줄 모르고 말을 들었지만 고기가 많이 잡힌 것을 보고 주님이심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 때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던 주님께서 지금도 성도들에게 형편에 따라 나타나십니다. 그것이 주님의 행사를 통하여 알리시는 것입니다. 둘째는 길을 통하여 자신을 알리십니다(시25:12).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고전1:18). 십자가의 길은 말씀을 순종하는 길입니다. 왜 그렇게 하라고 하시는지 알 수 없지만 순종해 보면 알게 되는 길입니다. 안병모 목사님은 처음에는 김현봉 목사님이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김현봉 목사님이 하시는 일을 그대로 따라 하니 김현봉 목사님이 받은 성령을 자신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할 줄 알지 못하다가도 믿음의 선진들, 선배들이 어떻게 행하였는지 살피면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특징이 있습니다. 생명의 길은 좁고 협착한 길입니다. 문 역시 좁은 문입니다(마7:13~14).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기피하는 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시84:5~7) 라고 말합니다. 시온의 대로라고 합니다. 주님은 좁고 협착한 길이라고 하셨는데 고라의 자손들은 대로라고 하였습니다. 상호 모순 같습니다. 그러나 모순이 아닙니다. 좁은 문, 좁은 길 같지만 일단 순종하고 들어오면 넓은 길, 넓은 문입니다. 이유는 은혜로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좁은 문이라는 간판만 보고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들은 결코 알 수 없는 넓은 길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은 자신이 어떠한 분임을 알리십니다. 하나님 자신을 알리신다는 것은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알리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알게 되면 거룩한 교제가 되며 사귐이 됩니다. 하나님과 사귀는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과 슬퍼하시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자신도 품게 됩니다. 하나님이 악을 조금도 못하게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인격체이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양심을 쓰면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에 덕을 실행하면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벧후1:5).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고전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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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31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심은 대로 거둔다’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이다.”(삼하 22:26~27). 우리말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자연법칙이지만 이 법칙 역시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칙입니다. 식물의 씨만 아니라, 환경 또한 뿌린 대로 거둡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욥처럼 자녀들을 훈련시키기 위하여 마련 된 환경도 있지만 대부분은 자신이 심어 거둔 환경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자비를 맛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비를 심었기 때문입니다. ‘왜 나에게는 이렇게 사나운 환경만 있을까?’ 생각하지 말고 혹시 내가 사나운 씨를 뿌렸는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완전함을 거두는 것은 완전함을 심었기 때문이며, 주님의 깨끗하심을 경험하는 것은 깨끗함을 심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거스르심을 보는 것 역시 사악을 심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환경은 우리의 심은 열매입니다. 바울은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라고 말합니다(갈6:7~8). 이처럼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은 자연 법칙일 뿐 아니라 영적인 법칙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열 두 족장들이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왔을 때, 그들은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는 좋은 곳과(민13:27), 거민을 삼킬 만큼 좋지 않은 땅(민13:32)이 있음을 보고하였습니다. 사람들과 성읍에 대하여는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민13:28, 32~33) 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런 형편을 보았지만 하나님을 믿음으로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안돈시키는 족장들이 있는가 하면, 형편에 빠져 낙심하는 족장들도 있었습니다. 슬프게도 전자는 여호수아와 갈렙 뿐이었습니다. 나머지 열 명의 족장들은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민13:31). 우리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13:33).” 라고 하며 백성들의 마음을 녹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거기에 충동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곡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다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민14:2~3). 하나님께서 그들의 원망 소리를 들으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이십 세 이상으로 계수함을 받은 자 곧 나를 원망한 자의 전부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로 거하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민14:27~30).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말씀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가 애굽 땅에서나 광야에서 죽었다면 좋았을 것을........” 이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갈렙과 여호수아 외에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말이 주님의 귀에 들린 대로 주님께서 행하십니다. 믿음 안에서 “승리하리라.” 라고 말하면 승리합니다. 반면 “패하리라.” 하면 패하게 됩니다. “안 되리라.” 하면 안 됩니다. “나는 인복이 많은 사람이야.” 하면 인복이 들어옵니다. 하지만 “나는 인복이 없어” 하면 정말 인복 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말하는 소리를 주님께서 들으시고 시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도 말의 중요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입증하고 있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이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시91:9~12).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화나 재앙이 그렇게 말한 사람의 장막에 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말은 드러난 생각이며, 생각은 그 사람의 인격입니다(잠23:7).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피차에 말하는 소리를 분명하게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과 여호와의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있는 기념 책에 그들을 기록하셨습니다(말3:16). 이처럼 사람들이 심는 것이 곡식과 채소와 과일만 아니라, 말도 심고, 사랑도 심고, 미움도 심고, 감사도 심고, 헌신도 심는 것입니다. 심은 것은 반드시 거둘 때가 있습니다(전3:2). 우리의 심은 것을 세상에서 모두 거둔다면 하나님 나라에서 거둘 것이 없을 것입니다. 때때로 주님께서 우리의 선행을 세상에서 모두 갚아주지 않으시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거두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25:34~36). 이처럼 세상에 있는 시간들은 심을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심는 일에 힘을 쓰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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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26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다윗의 의’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좇아 갚으셨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을 행하여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삼하22:21,22) 다윗의 이 시에서는 그의 의로움 때문에 그가 하나님께 상을 받은 것처럼 보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어떤 아버지와 아들이 버스를 타고 여행 중이었습니다. 한참을 가다가 아들이 덥다며 창문을 열려고 하였습니다. 힘껏 당겼지만 쉽게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 때 이를 지켜본 아버지가 아들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개 힘껏 당겼습니다. 그러자 지체 없이 창문이 열렸습니다. 그 창문은 누가 연 것일까요?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 크게 감동 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삼상16:13). 성령의 감동이란 하나님의 능력이 감동을 입은 사람에게 덧입혀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기름 부음을 받은 다윗은 그 때부터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비록 아들의 손을 빌렸지만 실제 창문을 연 사람은 아버지였듯이 다윗이 의롭게 행한 것은 자신의 의가 아닌 성령의 능력이었던 것입니다.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자 그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에 이르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다고 하였습니다(왕상18:46). 이처럼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옵니다. 엘리야 같은 경우 허리를 동이고 달려갈 수 있는 능력이었습니다. 다윗에게는 육신의 지혜를 따라 살아가는 사울이, 쩔쩔매는 골리앗을 쓰러뜨릴 수 있는 능력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이었습니다. 다윗은 그를 괴롭히는 사울을 죽일 기회가 두 번이나 주어졌지만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의 사람들이 가로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그리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을 인하여 다윗의 마음이 찔려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는 자가 됨이니라 하고”(삼상24:4~7). 자신의 의로운 마음으로 그를 괴롭히는 사울을 살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울 치는 것을 금하셨기 때문입니다. 결코 그의 능력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한 번은 그가 사울을 피하여 숨어 있을 때, 나발이라는 심히 부한 사람의 목장이 다윗과 그 부하들의 도피처에 있었습니다. 도피 생활은 정착 생활에 비하여 의식주 문제 해결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음만 먹는다면 약탈도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나발의 가축에 조금도 손을 대지 아니하였고 오히려 가축들의 담이 되어 주었습니다. 이러한 점을 들어 나발이 양털을 깎는다고 했을 때(양털을 깎을 때면 잔치도 함께 있음), 다윗은 부하들을 시켜 나발에게 음식을 달라고 정중히 부탁하였습니다. 하지만 나발은 일언지하에 거절하였을 뿐 아니라, 오히려 다윗이 주인을 배반하였다며 모욕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에 화가 난 다윗은 나발과 그에게 속한 모든 남자를 없앨 작정이었습니다. 사환들과 함께 칼을 차고 나발에게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 때 나발의 부인 아비가일이 와서 다윗이 나발에게 요구한 것 이상 되게 준비하고 그의 범죄를 막았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날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케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날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보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삼상25:32~33). 아비가일이 다윗의 범죄를 막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막아주신 것입니다. 다윗이 의로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윗을 의롭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내버려 두었을 때, 그는 어느 왕보다 음란하고 교활했습니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 사건을 숨기기 위하여 우리아를 맹렬한 전쟁에 선두로 나가게 하여 죽게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또 영토가 확장 되고 인구가 많아지자 교만해졌고, 사탄은 그를 충동하여 자신의 명예를 위하여 이스라엘 인구조사를 하게 하였습니다(대상21:1). 하나님께서 잠시 다윗을 내버려둔 것입니다. 그 결과 7만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아니하고 사탄이 함께 하니까 그런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이 모든 것을 볼 때 다윗의 의로움은 그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은혜로 인한 것입니다. 성령이 그와 함께 계셔서 한 것입니다. 다윗만 아니라, 요셉 역시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결과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을 해도 죄를 짓지 아니할 수 있었고, 자기를 애굽에 팔아넘긴 형님들에게 복수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본래 훼방자요 핍박자요 폭행자였지만(딤전1:13), 예수님을 위하여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고전15:10). 이처럼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면 악을 조금도 행하지 못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고후13:7), 수고 또한 많이 하게 합니다. 요한도 이와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3:9). 하나님의 씨가 있는 사람은 죄를 범치 못합니다. 죄를 끔찍하게 생각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실족하지 않게 막아주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의가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된 것처럼, 오늘날 신앙인들의 의 역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사람이 의롭게 살아가는 것 또한 성령의 도움 없이는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혹 자신에게서 선이 나올지라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온전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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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13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땅 짚고 헤엄치는 신앙’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막9:23). 어릴 때 동네에 보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깊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서 종종 물놀이하기 일쑤였습니다. 초등학교 4학 년 때의 일인데 한 번은 저의 헤엄치는 모습을 보더니 한 친구가 “너 수영 참 잘하는 구나”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친구의 칭찬에 기분이 좋았고 그 때부터 저는 수영을 잘하는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땅을 짚고 헤엄치고 있었는데 말이죠. 그 때 저는 누구나 저처럼 하는 줄 알았습니다. 한 번은 물을 가르며 전진하는 친구에게 뒤떨어지지 않기 위하여 애써 나아가는데 그만 키보다 깊은 곳을 만나고 말았습니다. 이미 수영할 줄 알았던 친구는 유유히 다녔지만, 키보다 깊은 곳에 땅 짚고 헤엄을 치려니 머리마저 물속에 들어가고 만 것입니다. 그곳은 보 안에서도 웅덩이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한참 허우적거리는 것을 보고 모두 제가 장난치는 줄 알고 지나쳤는데, 나중에 사태가 심각한 것을 안 사촌 형이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 후 저는 수영은 땅 짚고 하는 것이 아닌 줄 알았습니다. 강도 땅 짚고 헤엄칠 수 있는 곳과 그렇지 못한 곳이 있고, 바다도 깊은 곳과 그렇지 못한 곳이 있습니다. 믿음 또한 깊은 상태와 얕은 상태가 있습니다. 땅 짚고 헤엄치는 신앙이란 이론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것만 믿는 믿음을 말합니다. 사사기 1장 19절에는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하신 고로 그가 산지 거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라고 나옵니다. 참 이상한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산지 거민 뿐 아니라 골짜기 거민들도 이겨야 하는데 그곳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어 못 이겼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능력이 철병거를 못 당한다는 말일까요? 누가복음 8장(41-56절)에는 회당장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서 죽어가는 그의 딸을 가셔서 고쳐달라고 간구합니다. 병들고 가난한 자를 위하여 오신 예수님께서는 마다하시지 않고 가십니다. 그런데 도중에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더 이상 괴롭히지 말라고 사람들이 만류합니다. 예수님께서 병자까지는 고치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죽은 자를 살리실 능력까지는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병자는 간혹 의원들도 고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은 믿음의 정도에서 나타난 현상입니다. 어떤 사람은 죽은 자도 능히 살리실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죽은 자까지는 못하고 단지 살아있는 사람 정도 회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사사시대 하나님의 능력 범위를 스스로 그어 놓고, '철병거는 도저히 하나님도 안 돼' 하고 포기했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사람이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람의 계산으로 가능한 범위는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이론을 믿고 가능성을 믿는 것입니다.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다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 약속을 믿지 못하고 '철병거는 하나님께서도 안 돼' 하는 잠재적인 불신앙이야 말로 주님의 깊은 은혜 속을 헤엄치지 못하고 얕은 물가에서 맴도는 신앙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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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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