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칼럼
Home >  칼럼  >  WAIC 칼럼

실시간뉴스

실시간 WAIC 칼럼 기사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지렁이 같은 야곱’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사 41:14). 야곱은 택함을 받은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야곱을 지렁이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개역개정에는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대신에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평소에는 흙 속에 숨어서 흙을 헤치며 먹이를 찾고 있다가 비가 오면 나타나는 지렁이들은 가장 약한 동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당시 이사야가 이 말씀을 선포하던 때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당하고 포로가 된 때였습니다. 스스로는 일어설 수 없는 때였습니다. “생명이 오그라들 때 목수 청년이 보이지 않는 젓가락으로 나를 집어 올렸다 그리고 질척한 흙속으로 밀어 넣고 나는 그 때 햇볕 쨍쨍한 시멘트 바닥에서 체액이 말라가는 길 잃은 한 마리 지렁이였다.” 이 시는 김영교 시인의 ‘그 젓가락’ 이라는 시입니다. 체액은 조금씩 말라가고, 까치는 부지런히 그들을 찾고 있으며, 무수히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밟힐지 모르는 그 상태가 당시 이스라엘의 상태이며, 과거 믿지 않았을 때 우리들의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지옥에서 들어 올려 생명수 강이 흐르는 하나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돌아보면 이스라엘의 삶은 그야말로 지렁이와 같은 삶이었습니다. 애굽의 노예상태에서 바로의 학정을 받으며 살아왔던 430년간의 삶, 바벨론의 포로 생활, 페르시아의 식민지, 헬라와 로마의 압제....... 이처럼 1948년 신생국가가 될 때까지 2000여 년간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로 떠돌며 나라 없는 설움을 당해야 했습니다. 다른 민족이라면 벌써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들의 잘못으로 그런 결과가 초래했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은 약속을 잊지 아니하시고(렘33:19~26) 각 시대마다 모세,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 에스라, 느헤미야와 같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보내셔서 그들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우리에게도 일제 강점기가 있었습니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목적은 자원 확보와, 시장 확대를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마구잡이로 우리의 산천을 파헤쳤으며 식량을 강탈해갔습니다. 민족말살정책을 펴서 우리말을 사용할 수 없게 하였으며, 창씨개명을 통하여 일본식 성명으로 강제 변경시키도록 하였습니다. 곳곳에 신사를 세워놓고 참배를 거부하는 기독교인들을 잔인하게 옥사시켰습니다.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해방 될 수 없는, 본문 속의 지렁이와 같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자멸의 길을 택하였습니다. 여러 싸움에서 승리하자 그 기세를 몰아 세계 최강의 미국을 기습 공격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조선 독립을 위하여 미국을 흔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두 개의 원자폭탄을 맞고 항복하기에 이릅니다. 그동안 애국지사들은 국제사회에 끊임없이 외교활동을 펼쳤고, 그 결과 2차 세계 대전 중 미국과 영국과 중국(당시 장개석 총통)이 함께한 카이로 회담(1943.11.22~26)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받습니다. 그러다가 일본이 패망하기 직전에 독일 베를린 포츠담에서 열린 포츠담 선언(1945.7.26)에서 연합국은 한국의 독립을 재확인하고, 일본에게 그것을 요구합니다. 일본이 미국을 공격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조선 독립을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부르짖음과 간구의 눈물이 하나님께 상달 된 것입니다. 비천한 자를 돌아보시는 하나님(눅1:48)께서 지렁이 같은 조선을 불쌍히 여기셔서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폭격하게 만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코로나19라는 대 재앙 앞에서 백신이 개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렁이 같은 나약함을 보게 됩니다. 2021년 7월 8일 현재 코로나19 실시간 통계사이트 ‘월드오미터’에 따르면 전 세계 코로나19 사망자는 410만 6,724명으로 집계 되었습니다. 다윗이 인구조사로 사망했던 숫자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많은 숫자입니다. 우리 역시 이날 확진자 수가 1,274명으로, 백신투입이 인구대비 30%를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전 세계가 하나님의 손에 빠졌습니다. 다윗시대에는 사흘 만에 징계를 거두셨지만 지금은 1년 6개월이 지났는데도 끝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한 후 하나님 앞에 크게 회개하자 하나님께서는 갓 선지자를 통하여 다윗이 받을 징계를 택하라고 합니다. 첫째, 삼년 기근이었습니다. 둘째, 석 달을 대적에게 패하여 쫓기는 일이었습니다. 셋째, 사흘 동안 일어날 온역이었습니다. 만일 다윗이 회개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들이 동시다발로 일어났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회개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세 가지 중 한 가지만 선택하도록 하셨습니다. 다윗은 “내가 곤경에 있도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심히 크시니 내가 그의 손에 빠지고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나이다.”(대상21:9~13). 그래서 내린 것이 온역이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7만 명의 희생자가 나왔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은 자연 발생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빠진 재앙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빠진 일은 하나님이 손을 거두실 때만 끝날 수 있는 일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기 전에 먼저 통회를 하였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용서하여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대상21:8). 다윗은 그에게 넓은 영토를 주시고, 많은 인구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고 자신이 그 영광을 가로챈 죄를 회개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통회하는 자들에게 긍휼을 베푸십니다. 백신도 중요하지만 신앙인이라면 먼저 제사장의 심정으로 하나님이 손을 거둘 때까지 회개거리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의 열매를 맺기 위하여 힘써야 합니다. 우리의 행동으로 하나님께 어떤 대가도 요구 할 수 없지만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호10:12) 라는 말씀대로 하나님께서는 지렁이 같은 성도들의 몸부림을 긍휼히 여기실 것입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1-07-09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큰 돌무더기’
    “무리가 압살롬을 옮겨다가 수풀 가운데 큰 구멍에 던지고 그 위에 심히 큰 돌무더기를 쌓으니라.”(삼하18:17). 하나님은 아버지를 반역하고 왕이 되려하였던 압살롬에 대하여 진노하셨습니다. 전쟁 중에 그의 머리카락은 상수리나무에 걸렸고, 노새는 그의 몸에서 빠져나갔습니다. 그가 공중에 매달린 채 대롱대롱 있을 때 요압이 와서 창으로 그의 심장을 찔렀습니다. 무리는 그를 데려다가 큰 구멍에 던졌고 큰 돌무더기를 쌓았습니다. 이로서 전쟁은 다윗의 군사들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돌무더기에 대하여는 여호수아 7장에도 나옵니다. ‘여리고’ 라는 큰 성과 싸워 승리하였던 이스라엘 공동체가 아이라는 작은 성과 싸워 패하게 되고 용사 36명이 전사합니다. 하나님께 바쳐야 할 물건을 아간이 훔쳤던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아간은 돌에 맞아 죽게 되고 그 자리가 큰 돌무더기가 되었습니다. 그 골짜기 이름이 ‘괴로움’이라는 뜻을 가진 아골 골짜기입니다(수7:26). 예외도 있지만(창31:46~52), 이처럼 돌무더기는 죄 값의 처절함을 보여줍니다. 아간과 압살롬의 공통점은 절도입니다. 아간은 하나님께 드려야 할 물건을 훔쳤고, 압살롬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과 왕위를 훔쳤습니다. 게다가 압살롬은 아버지를 반역하고, 아버지의 후궁들과 백주에 동침하였으며, 아버지를 살해하려 했던 천인공노할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부모님을 저주만 하여도 죽을죄라고 말합니다(레20:9, 잠30:17), 하물며 반역하여 아버지를 죽이려 하는 자의 받을 벌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압살롬이 암논을 죽였을 때 바로 징계하지 아니 하시고,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아버지 다윗이 그술왕 달매에게 도망간 그를 당장 소환 요청을 하지 않은 것이 한 예입니다(삼하13:37~38). 그러나 압살롬은 하나님의 그런 사랑에 대하여 고마워하기는커녕 회개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죄는 점점 커지고 만 것입니다. 이처럼 죄를 지은 후 회개하지 않으면 점점 더 큰 죄에 빠지게 됩니다. 이러한 죄는 다음과 같은 특징들이 있습니다. 본문에서와 같이 죄에는 성장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죄는 점점 자랍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말처럼 행하는데 있어 점점 대범해집니다. 우리는 사울에게서 그런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울은 왕으로 뽑혔을 때 짐 보따리 사이에 숨을 만큼 수줍어했고 겸비하였습니다(삼상10:21~22). 그러나 왕이 된 후에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사무엘이 정한 기한에 나타나지 않자 제사장만 할 수 있는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중심으로 회개하지 않고 변명만 늘어놓더니 그의 범죄는 점점 커지고 증가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모두 멸하라고 하셨지만 사울은 오히려 아각 왕과, 살지고 기름진 가장 좋은 우양을 남겼습니다(삼상15:9). 심지어 기념비를 세워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자신이 차지했습니다(삼상15:12). 그러다가 자신이 멸하였던 신접한 여인을 수색해서 죽은 사무엘을 불러오도록 합니다(삼상28:8).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일을 서슴지 않고 한 것입니다. 그 결과 그는 블레셋과 전쟁에서 패하여 죽고 맙니다(삼상31:4). 이처럼 죄는 회개하지 않으면 점점 자라 죄 지은 사람으로 하여금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빠뜨립니다. 압살롬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형 암논을 죽인 죄에 대하여 아무런 회개도, 징계도 받지 않았던 그는 마침내 아버지를 반역하여 왕위를 찬탈하고 죽이려는 행동까지 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각에서부터 죄는 처리 되어야 합니다. 생각을 받아들이면 눈덩이처럼 불어나 결국은 실천에 옮기게 됩니다. 둘째로 죄의 중독성입니다.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죄의 낙 때문입니다. 쥐나 물고기가 맛있는 미끼에 속아 덫이나 낚시에 걸려들듯, 죄의 낙은 신앙인들을 미혹하는 미끼입니다. 설상가상 낙은 커 보이고 죄가 가져다주는 고통은 작아 보이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걸려들고 맙니다. 어거스틴의 참회록 가운데는 그가 어린 시절 나쁜 친구들과 어울러 타인의 과수원에서 배를 훔쳐 먹었던 일이 있었는데 배가 고파서 그런 것이 아니라 훔치는 기쁨 때문에 했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죄가 주는 낙에 비례하여 중독성도 강하게 작용합니다. 세 번째로는 죄에는 사망이 작용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3). 사망이란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영적으로 죽은 상태였습니다. 하나님과 전혀 교제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후 우리는 영적으로 거듭났습니다. 다시 산 것입니다. 영적으로 거듭난 사람이 죄를 지으면 죽음의 고통과 대가를 톡톡히 맛보게 됩니다. 영적인 고통은 물론 환경으로 곤고와 쇠사슬에 매이게 됩니다(시107:10). 그러니 죄를 지은 후 속히 회개해야 합니다. 네 번째로 죄는 전염성이 있습니다(갈5:9). 다윗의 죄로 그의 온 가족이, 압살롬 한 사람으로 죄가 온 이스라엘에 퍼진 것과 같습니다. 우리 자신은 ‘나 하나쯤이야’ 할 수 있지만 우리의 행동을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으며 그들의 행동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흉년이 들어 애굽으로 갔던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내 사라가 이복누이인 점을 들어 애굽 사람들에게 누이라고 속인 결과 바로왕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 후 사라는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돌아왔지만 애굽 왕 바로에게 아브라함이 책망을 듣습니다(창12:18~19). 그런데 아브라함의 이러한 거짓말을 이삭도 그대로 써먹습니다(창26:7). 그는 자신이 존경하는 아버지의 거짓말 방법까지 배운 것입니다. 이처럼 죄는 자신은 물론 주변사람에게까지 영향을 끼칩니다. 특별히 지도자 위치에 있는 사람의 행동에 대한 파급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범위 그 이상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돌무더기의 흔적, 아골 골짜기도 소망의 문을 삼아주실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호2:15). 죄 때문에 실망할 것이 아니라 회개하여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주님의 은혜를 간구할 때 넉넉히 이기는 사람이 됩니다(롬10:13).
    • 칼럼
    • WAIC 칼럼
    2021-06-24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성령의 하나 됨을 지키라’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1~3). 최근에 모 당의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로 선출 된 분이 대표 수락 연설에서 비빔밥 원리를 강조하였습니다. 비빔밥은 갈아서 각 식물의 특색을 없애는 녹즙기나, 녹여 각각의 광물이나 금속을 새로운 모습으로 만드는 용광로와는 다르게 각 채소의 특징을 그대로 살려 하나가 되게 한다는 내용입니다. 이를테면 오이, 콩나물, 당근, 고사리, 시금치, 참기름, 계란프라이 등 각자의 특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들만의 맛을 그대로 살리고 하나가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이런 말을 한 것은 각자의 생각이 달라도 서로의 차이점을 인정하고 자신이 속한 당의 일원으로 포용하겠다는 뜻입니다. 한 편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것이 모두 각자 자신의 특색만으로는 하나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소금이 소금덩어리로 그대로 있다면 고르게 퍼지지 못하고 어떤 부분은 짜고 어떤 부분은 싱거울 것입니다. 참기름이나 들기름 역시 액체 상태가 아닌 고체 상태인 참깨 들깨로 이루어졌다면 전체를 고소하게 만들지 못할 것입니다. 고추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골고루 퍼져 맛을 낼 수 있는 것은 소금이나 참깨 들깨 고추로부터 녹여졌거나 갈아진 채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비빔밥 원리, 서로의 특성을 유지하면서 하나 됨의 원리는 교회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 됨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덕을 세우는데 있습니다(고전14:26). 하나 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던 성령의 기름부음이 예수님의 몸 된 교회를 통하여 각 지체들에게 흘러 내려오며(시133:1~3), 하나 됨으로 말미암아 기도가 응답됩니다(마18:19~20). 높은 나무는 쓰러지기 쉽지만, 높은 산은 무너지지 않으며,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습니다(전4:12).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본문 3절에는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라고 말합니다. 곡식 단을 묶는 끈이 있듯이 성도와 성도 사이에 하나가 되게 하는 끈이 있습니다. ‘평안의 매는 줄’은 ‘평안을 가져오는 줄’을 뜻합니다. 성경은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5~6) 라고 말합니다. 육신을 추구하는 자는 사망을 초래하지만 영을 따라 생각하고 살아가면 평안합니다. 영의 기능 가운데 하나는 착한 양심입니다. 성도 개개인이 착한 양심을 쓸 때 심령이 평안해지며 성도가 서로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골2:19).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각 성도들은 몸의 지체입니다. 몸이 머리의 지시를 받아서 움직이듯 성도들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뜻을 나타내며 살아야 합니다. 머리의 지시를 받지 않고 자신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간다면 결코 연합이 될 수 없습니다. 반신불수가 되고 맙니다. 성도들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머리이신 주님의 뜻을 잘 살필 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행21장 8절 이하에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중에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갔을 때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때 아가보라고 하는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신의 손과 발을 묶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11절) 그러자 바울과 함께 있던 사람들이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울면서 권하였습니다. 그들의 말에 바울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13절) 바울에게 간곡히 권했던 사람들의 말을 단호히 뿌리치고 바울은 기어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겠다고 말합니다. 바울과 만류하는 사람들 사이에 큰 언쟁이 있을 수 있었지만 그들은 언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태도에 대하여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그렇습니다. 바울의 뜻도, 가지 말라고 권하는 사람들의 뜻도 아니라, 오직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면 모든 것이 매듭지어집니다.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은, 다툼 끝의 화목은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할 때 이루어집니다. 교회에서나 집안에서나 교단에서나 분란이 일어나고 소란스럽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들의 뜻, 단체의 뜻을 이루려고 할 때 생깁니다. 하지만 자신의 뜻을 접고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가 됨은 서로 ‘먼저’가 될 때 이루어집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롬12:10). ‘서로’라는 것은 조화를 의미하며, 교통을 의미하며, 하나 됨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서로 먼저 해야 합니다. 우리는 상대가 먼저 하길 기다립니다. 사랑도 그가 먼저 하기를 바랍니다. 전화도 그가 먼저 하기를 바랍니다. 존경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면 결코 ‘서로’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모니’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자존심을 굽히고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하나가 됩니다. 어거스틴은 “본질적인 것은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은 자유함을,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본질적인 것은 예수님의 신성이나 인성, 구원론 등이 해당 되며, 비 본질적인 것은 각자의 은사적인 면이나 성경 해석상의 다양성 등을 의미합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은 온전하게 매는 띠입니다(골3:14). 하나 되게 하는 결정체입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1-06-15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압살롬의 기념비'
    “압살롬이 살았을 때에 자기를 위하여 한 비석을 가져 세웠으니 이는 저가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없음을 한탄함이라. 그러므로 자기 이름으로 그 비석을 이름하였으며 그 비석이 왕의 골짜기에 있고 이제까지 압살롬의 기념비라 일컫더라.”(삼하18:18) 인사유명(人死留名), 호사유피(虎死留皮)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몸과 머리털과 살갗은 부모님에게서 받았으니 감히 훼손하거나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요, 몸을 세워 도를 행하여서 후세에 이름을 드날려 부모님을 드러냄이 효의 끝”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입신양명(立身揚名)은 사람들의 심리 가운데 본능처럼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압살롬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은 그의 이름을 전할 아들이 없어 한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아들이 없어서 한탄한 것이 아니라, 부패한 자신의 이름을 전할 아들이 없음을 한탄한 것입니다. 원래는 아들 셋과 딸 한 명이 있었지만(삼하14:27), 아들들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기록한 비석을 세웠습니다. 3000여년이 지난 지금 그의 이름은 자신의 소원과는 달리 빛나는 이름이 아닌 가장 부끄러운 이름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는 자신의 명예를 위하고 기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결말은 결코 좋지 않게 나옵니다. 노아 홍수 이후에 사람들의 언어는 하나였습니다. 그들은 아라랏 산이 있는 아르메니아 지역에서 시날산으로 옮겨가고 있었습니다. 노아 후손들인 그들은 모두 친족이고 동족의식이 강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인구가 많아짐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흩어질 것을 염려하였습니다. 서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케 하자.”(창11:4). 땅 끝에서도 보일 수 있도록 하늘까지 닿는 대를 쌓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들 역시 하나님의 이름보다 자신의 이름 내기를 원하였고, 온 지면에 흩어져 생육하고 번성하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보다(창9:1), 자신들끼리 똘똘 뭉쳐 자신들의 뜻을 세우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뜻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끼리 지면으로 흩어졌고, 하늘 끝까지 쌓으려 했던 탑은 더 이상 오를 수 없었습니다. 그 탑의 이름은 바벨탑이었습니다. 바벨은 혼잡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명예영광심에 빠지면 그 이름은 무너지며 어려움이 반드시 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다스리도록 하기 위하여 사울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사울은 왕이 되기 전에는 겸손하였지만 왕이 된 후에는 태도가 180도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을 영화롭게 하고, 자신의 이름을 나타내는 일에 더 마음을 썼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이기게 해주셨는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 자신의 이름을 새기는 일에 마음을 썼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찌기 일어났더니 혹이 사무엘에게 고하여 가로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돌이켜 행하여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삼상15:12). 스스로 자기를 영화롭게 하기를 원하였던 사울은 전쟁에서 블레셋 군인에게 죽게 됩니다(삼상31:4~6). 하나님의 이름이 아닌 자신의 명예영광에 마음 쓰고 살아가면 그만큼 고난과 애통이 오게 됩니다. “그가 어떻게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난과 애통으로 갚아주라.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황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계18:7). 자기를 영화롭게 하는 마음, 명예영광심은 고난과 애통의 씨앗입니다. 작은 일에서부터 자신을 드러내고 나타내기를 좋아하는 마음, 칭찬 받기를 원하는 마음은 화를 불러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장 루시퍼를 영화롭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지위까지 넘보다가 그의 부하들과 함께 사탄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버릇은 사탄이 된 후에도 계속 되었습니다. 하와를 유혹할 때에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으면 하나님같이 된다.”는 말로 유혹하였습니다(창3:5). 이처럼 자신을 영화롭게 하려는 명예영광심은 사탄이 사람들에게 넣어주는 마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미혹되어 마귀의 꼭두각시놀음을 합니다. 심지어 세상에서 얻지 못한 명예영광을 교회에서 누려보려고 합니다. 바울은 사람들이 그를 보는 바와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봐 두려워하였습니다(고후12:6).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실제 모습보다 그 이상 되게 보이려고 얼마나 꾸미는지 모릅니다.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인생 최고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임을 다시 한 번 새겨봅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1-06-08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은혜의 말씀에 굳게 서자’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행20:32). 옥상에 고추모를 심고, 버팀대를 세우고 동여맸습니다. 이제 고춧대는 어지간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쓰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혹 고춧대가 쓰러지는 날이 있다면 버팀대가 쓰러지는 날일 것입니다. 고춧대와 버팀대는 이미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에게 버팀대는 말씀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든든히 세웁니다. 농작물에 바람이 불듯 성도들에게도 시험은 있기 마련입니다. 시험은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시는 것입니다(시139:23). 하나님은 우리를 알고 있지만 우리 자신이 우리를 너무 모르니 시험을 통하여 알리십니다. 시험이 올 때 결과는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시험을 통하여 버팀대를 굳게 잡고 세움을 입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둘째는 시험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는 사람입니다. 그토록 하나님을 사랑하던 솔로몬이 노년에 이방인 출신 왕비들에게 마음이 빼앗겼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신전을 세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지만 그가 돌이키지 않자 사방에 많은 대적들을 일으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솔로몬 자신이 키워낸 여로보암입니다. 배반을 심은 솔로몬이 배반의 열매를 먹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아히야를 통하여 이스라엘 열 두 지파 가운데 두 지파만 남기고 열 지파를 찢어 여로보암에게 줄 것을 약속하시며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깁니다. “내가 너를 취하리니 너는 무릇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다스려 이스라엘 위에 왕이 되되, 네가 만일 내가 명한 모든 일에 순종하고 내 길로 행하며 내 눈에 합당한 일을 하며 내 종 다윗의 행함 같이 내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가 다윗을 위하여 세운 것 같이 너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네게 주리라.”(왕상11:37~38). 하나님의 약속대로 그는 남북왕국 시대에 북 왕국 초대 왕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리라.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라.'(왕상12:26~27). 그는 처음 확실한 말씀 “네가 만일 내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가 다윗을 위하여 세운 것 같이 너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네게 주리라.”는 약속에 굳게 서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탄의 참소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금송아지를 세워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두었습니다. 그 결과 그 아들이 왕이 된 후 2년 만에 바아사에 의하여 왕위를 빼앗기고 죽임을 당합니다. 여로보암이 굳게 서지 못한 결과 그의 가정이 세움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바울이 죄수 아닌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에 압송을 당할 때 바울의 말보다 전문가의 말을 따른 백부장의 잘못된 판단으로 그들은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게 됩니다.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않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어 살아날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일 때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을 합니다.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다면 좋을 뻔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27:21~26 내용). 전혀 구원 받을 가능성이 없는 상태에서 받은 말씀이지만 바울은 굳게 믿었습니다. 버팀목인 말씀으로 일어났고 함께 승선한 사람들을 일으켰습니다. 해와 별이 보이지 않고 여전히 큰 풍랑이 일어도, 배의 기구를 버려서 키를 조정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도, 식량마저 모두 떨어지고 빈털터리가 되어도 전혀 요동이 없었습니다. 은혜의 버팀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276명의 탑승자들은 모두 무사하게 됩니다. 바울 한 사람이 말씀에 굳게 서자 남은 275명까지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행20:32).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주시는 약속입니다. 그 약속은 우리의 지주이며 버팀대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은혜의 말씀입니다. 은혜는 말씀을 굳게 믿고 그대로 순종하는 사람에게 임합니다. 말씀을 의지하고 든든히 선 사람은 어떤 풍파에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신 말씀이 우리를 붙드시기 때문입니다. 코로나라는 재앙에서 신앙인들은 조금도 흔들리지 말고 은혜의 말씀에 굳게 서서 마침내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1-05-28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예수님의 침묵’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마15:23). 본문은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담은 내용에 포함 된 말씀입니다. 이 여인은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하며 소리 질렀습니다. 여기 큰 소리란 절실함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단지 목소리만 크게 한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한 말씀도 대답지 않으십니다. 정말 대답이 없었을까요? 미국의 사회학자 앨버트 메리비언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이 상대와 얼굴을 보고 대화를 나눌 때 의사 결정에 영향을 주는 요소로 세 가지를 들었습니다. 첫 번째는 ‘말의 내용’으로 7%, 두 번째는 ‘목소리’로 38%, 세 번째는 ‘보디랭귀지’로 55%입니다. 즉 소통시 언어적인 요소는 7%이고 93%는 비언어적인 요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이 시사하는 바는 의사 결정에 있어서 표정과 태도 등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평소 사람의 의사 표시는 언어적인 요소보다 훨씬 더 비언어적인 요소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상대방의 말만 듣고 그 사람을 알려고 한다면 그야말로 센스 없고 눈치 없다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센스 있는 사람, 눈치 빠른 사람은 상대방이 말하지 않는 말을 다른 사람보다 훨씬 잘 듣는 사람입니다. 우리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응답하실 때도 있지만 때로는 이 가나안 여인에게 대하시는 것처럼 기도해도 침묵하실 때가 있습니다. 이 때 신앙인들은 주님께서 잠잠하신다고 해서 말씀이 없으신 것이 아니라, 침묵의 말씀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침묵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침묵하셨던 때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시므로”(삼상28:6b). 꿈은 사울에게 직접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의미이고, 우림은 제사장을 통해서도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뜻이며, 선지자는 글자 그대로 선지자를 통하여도 계시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사울의 응답에 침묵하신 것입니다. 왜 침묵하셨습니까? 그것은 사울이 먼저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삼상15:23b).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것이 하나님을 버리는 행위입니다. 말씀을 버린 것을 회개하고 돌이켰어야 하는데도, 그러지 않고 사울은 계속 말씀과 상반되는 행동을 합니다. 충신 다윗을 죽이기 위하여 일생을 허비합니다. 그런 사울에게 주님께서는 응답하시지 않은 것입니다. 회개를 독촉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인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8:4~5). 간교한 그들은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돌로 치라” 하시면 로마의 통치하에 피지배 국가들은 사형을 집행할 수 없기에 로마법에 저촉이 될 것이며, “돌로 치지 마라.” 한다면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침묵하시고 무엇인가 땅에 쓰시고 계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묻기를 마지않았습니다. 침묵을 깨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 이 말씀은 침묵의 말씀이 밖으로 표출 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잠잠하고 계실 때 ‘이 여인을 정죄 할 만큼 떳떳한 사람이 있느냐?’ 라는 말씀을 들어야 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직접 들은 그들은 자신들이 부끄러웠습니다. 은밀히 짓는 죄가 이 여인이 했던 것보다 더 많거나 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해도 예수님께서 침묵하시는 이유는 위의 두 사례와 같은 경우 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에게 인내를 요구하시거나,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요셉이 보디발 아내의 모함으로 무고히 옥에 갇혀 있을 때 술 맡은 관원의 꿈을 해석해주었습니다(창40:9~15). 그리고 그의 해석대로 술 맡은 관원이 석방된다면, 자신의 무고함을 풀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술 맡은 관원은 옥에서 풀려나자 요셉의 말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2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꾸고 다른 신하들이 해석을 못할 때, 비로소 바로의 술 맡은 관원은 요셉이 자신에게 베푼 꿈 해석이 생각났던 것입니다. 기다리다 지친 요셉이 더 이상 기대하지 않고 있을 때 간수로부터 소식이 전해 온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침묵은 인내하라는 말씀이거나 더 좋은 것을 위하여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환경은 하나님의 표정입니다. 사람의 말만 듣고 상대를 파악하려 한다면 자칫 오해를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환경을 통하여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하나님의 표정을 잘 읽어야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습니다. 비록 침묵 중일지라도 환경에 나타나는 주님의 표정에 귀 기울이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1-05-21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아히도벨과 후새’ (삼하17:1~23)
    다윗의 모사 중에는 아히도벨과 후새도 있었습니다. 아히도벨의 모략은 ‘하나님께 물어 받은 말씀과 일반이라.’(삼하16:23)고 할 만큼 뛰어났습니다. 반면 다윗의 친구 후새의 대하여는 어떠한 평이 없습니다. 압살롬이 반역을 하였을 때 아히도벨은 거기에 가담하였습니다. 짐작컨대 다윗이 아히도벨의 손녀 밧세바와 간음하고,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죽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일 이후 아히도벨은 다윗을 떠나 고향 길로에 머물렀습니다(삼하15:12). 이 모든 사실을 아는 압살롬이 아히도벨을 초청하여 의기투합한 것입니다.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말하였습니다. “이제 나로 하여금 사람 일만 이천을 택하게 하소서. 오늘 밤에 내가 일어나서 다윗의 뒤를 따라 저가 곤하고 약할 때에 엄습하여 저를 무섭게 한즉 저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이 도망할 것입니다. 내가 다윗 왕만 쳐 죽이고 모든 백성으로 왕께 돌아오게 하리니 무리의 돌아오기는 왕의 찾는 이 사람에게 달렸음이라. 그리하면 모든 백성이 평안하리이다.”(삼하17:1~2 내용). 압살롬은 다윗이 심어둔 첩자 후새에게도 말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상황은 매우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아히도벨의 말대로 다윗은 지쳐 있었고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요단을 아직 건너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만일 후새의 모략으로 아히도벨의 모략을 파하지 못한다면 아히도벨은 부하 12,000명과 함께 다윗의 목을 칠 기세였습니다. 이 순간 후새는 아히도벨의 모략보다 나아보이면서도 압살롬으로 하여금 치명타를 입힐 전술을 꾸며야 합니다. “이때만큼은 아히도벨의 모략이 좋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은 모두 용사들로서, 마치 새끼를 빼앗긴 야생 곰처럼 격분하였고, 왕의 부친은 병법에 익은 사람인즉 백성과 함께 자지 아니하고 숨어 있다가 무리 가운데 몇 명만 기습 공격하여 죽이면 사자처럼 용맹스러운 군사들도 겁에 질려버릴 것입니다.” 순간 압살롬과 무리들은 쥐죽은 듯 조용했을 것입니다. 계속해서 후새는 말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므로 저의 의견은 이렇습니다. 먼저 온 이스라엘 군사들을 불러 모으십시오. 그런 후에 해변의 모래알처럼 많은 군대를 이끌고 왕께서 친히 싸우러 나가십시오. 다윗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공격하여 온 대지에 내리는 아침 이슬처럼, 그를 덮쳐버리는 것입니다. 만일 저가 어느 성에 들었으면 온 이스라엘이 밧줄을 가져다가 그 성을 동여맨 후 끌어서 골짜기에 내동댕이쳐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읍이 서있던 그곳에는 돌멩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게 될 것입니다.”(삼하17:11~13, 쉬운말성경 요약). 후새의 모략에는 다음과 같은 허점이 있습니다. 그들이 온 이스라엘에서 군인을 모집할 동안 다윗으로 하여금 안전한 곳으로 피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점과, 둘째 다윗의 군사들이 주둔하는 성을 밧줄로 동여매기도 어렵거니와 그것을 끌어다가 골짜기에 내동댕이치기 전에 밧줄이 끊어질 수도 있고, 그들이 밧줄을 당길 동안 다윗의 군사들은 화살이나 창을 사용하여 공격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적처럼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후새의 모략을 택합니다. 이렇게 된 것은 순전히 다윗의 기도 때문입니다. “혹이 다윗에게 고하되 압살롬과 함께 모반한 자들 가운데 아히도벨이 있나이다. 하니 다윗이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삼하15:31).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간단한 기도 같지만 그 기도에는 엄청난 힘이 있었습니다. 그가 물매로 골리앗을 쓰러뜨리듯, 허점투성이 후새의 모략으로 완벽에 가까운 아히도벨의 모략을 깨뜨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의 기도드리는 습관 가운데 하나는 “마귀의 권세와 궤휼을 눌러 주시옵소서.” 입니다. 왜냐하면 압살롬을 위한 아히도벨의 모략처럼 곳곳에 마귀의 속임수가 있다는 것을 체감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생각을 통하여 때로는 친절한 척, 지혜로운 척, 가장 선한 모습으로 가장하고 저를 유혹합니다. 주님이 깨닫게 하지 않는다면 도저히 알아차릴 수 없는 모습입니다. 그들의 간계를 조금이나마 알기에 주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앙인들 가운데는 “마귀”라는 말을 입에 담기조차 싫어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이미 다 이기셨는데 마귀는 무슨 마귀냐고 묻습니다. 그것은 마귀가 가장 좋아하는 모습입니다. 마치 사자가 두루 다니며 삼킬 양들을 찾아다니지만 양들은 사자라는 존재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인들이 알아야 할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로 승리한 것이지 마귀 자체를 없앤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승리함으로서 마귀 권세를 깨뜨렸습니다. 신앙인들이 사탄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대적하는 한 어떤 사탄도 신자들을 괴롭힐 수 없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눅10:19). 사탄은 예수님이 그들의 권세를 깨뜨렸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난 날 자신의 종이었던 신자들을 지금도 주인인 양 속이고 있습니다. 어찌나 교묘히 속이던지 사탄의 음성인지 성령의 음성인지 모를 정도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사람의 일로 파고들기 때문입니다(마16:23). 사탄이 신앙인들을 계속 속인다면 예수님이 십자가로 그들의 권세를 깨뜨리기 전과 무엇이 다르냐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네, 완전히 다른 세계입니다. 이전에는 신앙인들이 사탄에 대하여 무방비 상태였지만 이젠 사탄을 사탄으로 인식하고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대적하는 순간 그들은 더 이상 속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앙인들이 “마귀의 권세와 궤휼을 눌러 주세요.” 라고 기도드리는 것은 보이지 않는 그들의 속임을 주님께서 막아주시고, 또한 사람의 일로 파고드는 그들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게 해달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대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적을 모른다면 아무리 좋은 무기도 사용할 수 없듯 사탄의 정체를 모른다면 그들을 대적하는데 있어서 전능한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1-05-13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한 사람’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렘5:1) 성경에서는 한 사람이 의미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한 사람으로 인하여 전체가 살기도 하고, 망하기도 합니다. 아담 안에 있는 사람은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하여 죽었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 한 분으로 인하여 영원한 생명을 받았습니다(고전15:22). 요셉 한 사람으로 인하여 7년 흉년 때 애굽 백성이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고 이스라엘과 그 후손들도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한 사람 때문에 공동체가 낭패를 본 일도 있습니다. 죄를 범한 아간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이라는 작은 성에서 패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다윗왕의 잘못 된 인구조사로 인하여 이스라엘 7만명이 죽은 일,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요나로 인하여 그가 탄 배가 파선 될 뻔 한 일, 백부장의 잘못 된 판단으로 바울과 함께 276명이 탄 배가 유라굴로 광풍을 만난 일 등(행27:37) 찾아보면 참으로 많습니다. 이처럼 한 사람의 행동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면 그 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어야 합니까? 본문에서는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성은 그 한 사람이 없어서 멸망당하였습니다. 바벨론에 의하여 짓밟혔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였습니다. 그곳에 성전이 있고, 하나님을 잘 섬기는 제사장들과 대제사장이 있는 곳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이 없어서 멸망당한 것입니다. 공의란 하나님께나 사람에게나 자신에게나 정의로운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를 구하는 일이란 예수님을 찾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찾는 것은 의를 추구하는 행위입니다. “의를 좇으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는 나를 들을지어다.”(사51:1). 하나님께서 옳게 여기시는 것을 찾아 구하는 생활이 진리를 찾는 행동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 합당하게 행동할까?’ 하는 행동입니다. 겔22:30이하는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 한고로 내가 내 분으로 그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라고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직접 행하면서 기도하는 사람을 찾다가 찾지 못하여 성을 멸하였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 한 사람은 자신이 기도하며 행하는 사람입니다. 거룩의 성을 쌓으며 멸하지 못하게 하도록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모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시내산에 있는 동안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을 반역한 사람들을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출32:9~10) 그러자 모세가 대답합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 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출32:11~12). 모세의 이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자칫 진멸당할 뻔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멸망당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금도 이 땅에는 모세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자신이 거룩의 성을 쌓으면서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거룩의 성을 쌓지 않으면서 기도만 한다면 온전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기도하고 그 기도한 바를 행하기 위하여 애를 쓰는 사람의 음성을 주님께서 응답해주십니다. ‘한 사람만 있으면 되니 나 하나쯤이야 뭐 대충 믿어도 돼.’ 그것은 참으로 위험한 생각입니다. 믿는 사람 모두는 각기 자신의 위치에서 그 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그가 탄 배에서 한 사람이었고,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한 사람이었듯이, 성도 개개인은 가정에서 한 사람이고, 직장에서 한 사람이며, 그가 맡고 있는 팀에서 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기생 라합이 하나님께 합당한 행동을 함으로 말미암아 그와 그의 집이 모두 구원을 받았듯이, 사도행전 16장의 간수 한 사람이 돌이킴으로 그의 온 집이 구원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미는 조직마다 구성마다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1-04-30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영적인 성장’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19:30). 정확한 나이는 기억할 수 없지만 이십 대 중반에 왼손을 사용하면 우뇌가 발달한다는 글을 읽고 왼손으로 젓가락질하고, 왼손으로 글자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젓가락질의 경우 비교적 쉽게 읽히고 숙달 될 수 있었지만 왼손으로 글자를 쓰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글자가 아니라 지렁이 꿈틀거리며 갯벌 진흙탕 위를 지나간 흔적처럼 보였습니다. 그나마 꾸준히 연습했다면 다소 발전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중도에 포기하다가 생각나면 다시 시작하는 정도였습니다. 시작한 지 이십 년도 훌쩍 지난 지금 가끔씩은 연습한 것이 있어 이 정도면 초등학교 오학년 수준은 되리라 생각하고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오학년 수준은 못 되고 4학년 수준이라고 합니다. 제 오른 손 필체는 비록 졸필이긴 하지만 그래도 십대 후반에 나만의 필체가 완료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왼 손 글씨는 시작한 지 이십 년 도 넘었지만 아직도 손에 힘이 없고 어색하고 느리고 제대로 된 모양이 안 나오는지 답은 뻔합니다. 그것은 동기부여가 절실하지 못했고, 꾸준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시작이 오래 되었다고 해서 무조건 잘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모태신앙이라고 해도 자신이 믿음에 힘을 쓰지 않는다면 신앙의 오랜 연조가 영적인 성장을 담보하지 못합니다. 삼십 년 사십년 지났다 한들 성령을 따라 살아가지 아니하고 여전히 육신대로 살아간다면 영적인 어린 아이 신앙일 뿐입니다. 수염 난 아이, 연세 많은 아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믿겠거니’한다면 그야말로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기를 원하고 매일 매일 갈급한 심령으로 믿음과 착한 양심을 따라 말씀에 착념치 않는다면 자신도 모르게 퇴보하고 맙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오래 되지 않았어도 한 말씀이라도 듣고 순종할 정신을 가진다면 이 사람의 신앙은 달려가게 될 것입니다. 육신의 성장은 십대 이십대가 지나면 멈추게 되지만 영적인 성장은 멈추지 않고 힘을 쓴 만큼 자라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바울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 기독교인들을 제일 박해한 사람입니다. 심성으로는 신앙인 남녀를 불문하고 옥에 가두거나 죽이는데 가편 투표를 할 만큼 잔인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메섹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후로 그의 삶은 180도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 열심을 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예수님의 제자 중 가장 신망이 두터웠던 베드로나 요한과 같은 반열에 들어가게 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19:30). 먼저 된 자라고 생각하십니까? 주님의 뜻대로 살기를 소원하고 그것을 위하여 힘쓰지 않는다면 퇴보하고 있는 것입니다. 늦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부터 시작하십시오. 주님은 당신을 불쌍히 여기실 것입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1-04-23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시험 가운데 또 다른 시험’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5:6).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난을 피하여 바후림에 도착했을 때였습니다. 설상가상 사울의 집안 시므이라는 사람이 독한 말로 다윗을 저주하기 시작합니다.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가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 대신에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너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붙이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인고로 화를 자취하였느니라.”(삼하16:8). 시므이의 이 말은 다윗과 전혀 상관없는 말이었습니다. 비록 다윗이 충성된 신하 우리아를 죽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말한 사울 왕과 그 집안에 대해서는 최고의 예우를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사울 왕과 그 아들 요나단이 블레셋과 싸우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옷을 잡아 찢었으며, 저녁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였습니다. 또한 그들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조상하였습니다. 요압이 사울의 군대장관 아브넬을 죽였을 때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윗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금식하다가 석양에 여러 백성이 나와서 다윗에게 음식을 권하였을 때 “내가 해 지기 전에 떡이나 다른 것을 맛보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삼하3:35)라고 함으로써 그의 눈물과 금식이 진실 된 것임을 입증하였습니다. 하루는 사울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이스보셋의 군대 장관 레갑과 바아나가 다윗이 기뻐할 줄 알고 그의 목을 베어 다윗에게 왔습니다. 다윗은 그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부하들을 명하여 암살자들을 처형하도록 명하였습니다(삼하4:12). 왕조가 바뀌면 이 전 왕족들은 역적으로 몰려 처형되기 쉬웠지만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결백한 다윗에게 시므이의 저주는 엉뚱한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내가 아들에게 이렇게 당하니, 이젠 멸망한 사울의 족속까지 나를 무시하는 구나’ 생각하며 아비새가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컨대 나로 건너가서 저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라고 말하였을 때 그렇게 하도록 명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시므이를 시므이로 보지 않았습니다. 악인으로 가장한 하나님의 종으로 보았습니다.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삼하16:10~14). 다윗의 이 말대로 다윗은 압살롬으로부터 어려움을 겪은 후 다시 왕의 지위를 회복하게 됩니다. 이처럼 시험 중에 있는 또 다른 시험은 설상가상이 아니라 흑암 중에 빛이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얻을 기회입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 철저히 하나님께 여쭙고 응답 받아 행하였던 그였지만 계속된 사울의 추적에 피곤한 나머지 잠시 믿음이 떨어진 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상책을 좇아 블레셋으로 피하였습니다(삼상27:1). 블레셋 왕은 시글락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하루는 블레셋 왕이 그들이 이스라엘을 치는 날 다윗과 그의 부하들도 동참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블레셋 방백들의 반대로 다윗 일행은 그들의 거처 시글락으로 삼일 만에 돌아옵니다. 와서 보니 아말렉 사람들이 그곳을 침입하여 다윗과 그와 함께한 백성들의 아내와 자녀들을 사로잡아갔고 시글락은 불태웠습니다. 다윗의 부하들은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고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위급해진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하여 “블레셋을 추격하면 다시 찾으리라.”는 응답을 받고 용기를 내어 400명의 부하들과 함께 찾으러 나섰습니다. 가는 도중 들에 있는 애굽인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자신의 코가 석자인 다윗의 부하들은 다른 사람을 돌볼 틈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흘을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애굽인을 다윗에게 데려갔습니다. 다윗은 그에게 떡과 물과 무화과와 건포도 두 송이를 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시글락을 불태우고 다윗과 그 일행의 가족들을 모두 사로잡아간 아말렉 사람의 종이었습니다. 애굽인 그가 병들자 주인이 그를 버린 것입니다. 그 애굽인은 다윗 일행을 아말렉 사람에게 인도하였고 다윗 일행은 아말렉과 싸워 사로잡힌 사람들은 물론 다른 모든 것들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과 그 부하들이 자신의 처지로 인하여 다른 사람을 돌볼 틈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애굽인에게 긍휼을 베푼 결과 그들 역시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삼상30:18). 거의 모든 소유물과 자녀마저 잃고 온 몸이 악창으로 덮인 욥을 더욱 힘들게 한 것은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욥을 위로하기 위하여 왔지만 욥이 자신을 변호하자 욥과 상관없는 말들로 그를 비난하였습니다. 그래서 욥은 그들을 “번뇌케 하는 안위자라.”고 하였습니다(욥16:2). 욥에게 찾아온 시험 못지않게 그를 괴롭힌 것은 친구들의 근거 없는 말이었습니다. 그러한 시험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만나주셨습니다. 욥은 비록 친구일망정 자신과 상관없는 말을 하는 그들이 괘씸하여 하나님께 벌주시기를 요구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벗들을 저주하는 대신 위하여 복을 빌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이전 소유보다 갑절을 주십니다(욥42:10).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시험가운데 있는 백성들에게 시험에서 벗어나게 하도록 종을 보내십니다. 다윗에게는 병든 애굽 사람과 시므이가 될 것이며, 욥에게는 벗들일 것입니다. 천사의 모습으로 온다면 기쁘게 영접할 수 있겠지만 때론 병든 자로, 때론 악인의 모습으로 옵니다. 이럴 때 우리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그들로 인하여 더욱 시험에 빠져들거나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복을 빌어주는 일입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복을 빌어줄 때,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은 우리들도 시험에서 나오게 하십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1-04-16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