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칼럼
Home >  칼럼  >  WAIC 칼럼

실시간뉴스

실시간 WAIC 칼럼 기사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예수님을 결박하는 사람들’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니라.”(마27:1-2) 새벽이란 ‘아주 일찍’을 의미합니다. 중요한 것일수록 일찍 행동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모리아 산에 바치라고 하셨을 때, 아침에 일찌기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서 떠났습니다(창22:3). 또 다윗도 가드왕 아기스가 블레셋 장관들이 다윗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윗이 이스라엘과 싸우러 함께 가지 못한다고 하였을 때, 다음 날 일찍 시글락으로 갔습니다(삼상29:11). 그는 가드왕이 막는 것을 하나님께서 막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일찍은 중요한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중요하게 여긴 사람들은 일찍 가장 중요한 첫 시간을 드립니다. 그런데 여기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일에 일찍 나서게 됩니다. 그만큼 그들은 예수님을 없애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일곱 마귀가 들어가면 이렇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에 일찍 나서게 됩니다. 하나님을 제일 앞장서서 섬긴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이토록 하나님의 대적이 되었을까요? 그것은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행23:1). 성령은 우리의 양심과 더불어 말씀하시는데(롬9:1), 대제사장은 전혀 양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신들의 욕심을 따라 살았습니다. 예수를 판 유다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은 삼십을 가져다 주었을 때의 그들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래? 예수가 무죄한 자라고? 우리가 너무 빨리 사형 판결을 하였구나. 빨리 다시 돌리자.”라고 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마27:3). 그들이 사실상 예수님을 죽게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가룟 유다에게 모든 책임을 떠 넘기면서 가룟 유다의 마지막 말에 대하여 자신들은 책임 없다고 시치미를 뗀 것입니다. 그것이야 말로 욕심이 양심을 눌러버린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양심을 쓰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대적이 되고 맙니다.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해서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에 합당한 양심을 쓰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입니다(행23:1). 대제사장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빌라도에게 넘긴 이유가 양심을 쓰지 않고 욕심을 따라 살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거울입니다. 우리가 거울 앞에 서면 다른 사람의 얼굴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얼굴이 보입니다. 성경을 읽거나 들을 때 다른 사람들의 죄가 생각난다면 거울을 보면서 다른 사람의 티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거울은 오직 우리 자신을 위하여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합당하게 살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대제사장처럼 예수님을 결박하는 행위들이 신앙인들에게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결박하는 행위는 이론입니다. 말씀을 결박하는 것은 이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하여 사울에게 이레를 기다리도록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론으로 결박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왕의 행한 것이 무엇이뇨. 사울이 가로되 백성은 나에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은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치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 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삼상13:11-12). 이처럼 부득이하게 느껴지는 이론이 예수님을 꽁꽁 묶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못하도록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유, 변명, 이론, 까닭 등과 같은 것들입니다. 신앙인들은 이러한 것들을 깨뜨려야 합니다(고후10:3-6). 그것이 복종입니다. 이론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견고한 진이라면 복종은 그 진을 깨뜨리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신앙인들은 예수님 당시 대제사장이 예수님을 결박하여 빌라도에게 넘겨준 것처럼, 여러가지 믿지 아니하는 이론으로 예수님을 결박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주님의 말씀에 더욱 복종하여, 말씀을 대적하는 모든 이론을 파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4-01-16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사나 죽으나 주님을 위하여(롬 14:6-9)’
    신앙생활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동기에서 이루어져야지 자기 체면이나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해서 하면 안 됩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8절).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 구원받은 성도의 삶의 목표요 방식인 것입니다. 고후 5:15에서도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삶의 목적을 바로 깨닫고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으로 성령의 은혜와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갑시다. 인생의 성공여부는 신앙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삶의 목적을 분명히 하여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는 삶의 원리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8절). 6-12절을 보면 ‘위하여’라는 말이 8번 나옵니다. 이것은 목적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삶의 목적이요, 내용이며 중심임을 깨달아 우리의 인생을 보람 있고, 유익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삶의 목표가 오직 예수님일 때, 오직 믿음으로 생각하고, 결단하고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으로 대표되는 구속사역은 우리를 주님의 소유로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9절).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었다는 것은 주님의 통치권이 지금 살아서 움직이는 자들뿐만 아니라 이미 죽은 사람에게까지 그 효력을 미치게 되는 우주적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어떻게 시작을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위해 사느냐’하는 문제 역시 중요합니다. 목적의식, 방향의식이 분명해야 하겠습니다. 모든 사물에는 그 본래의 목적이 있습니다. 인간은 본래 자기를 위해 살도록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예배자로,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존재 의미와 가치가 있습니다. 여기에 나의 나 됨이 있습니다. 우리가 후회 없이 사는 길은 주님을 위해 살다가 주님을 위해 죽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주님께 헌신한 사람입니다. 주님께 헌신한 사람이란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 생명까지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린 사람을 말합니다. 세상일을 하느라 좌로 뛰고 우로 뛰다보면, 때로는 실망과 낙심이 찾아오기도 하고, 허망한 생각이 들 때도 없지 않으나, 주님을 위해 일하다 보면 힘이 생기고 용기가 나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사는 삶은 절대로 후회하지 않습니다. 성도란 주님을 높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기중심으로 살면서 자신을 높이지 말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서 하나님을 높여야 하겠습니다. 어렵더라도 주님 중심으로, 말씀으로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채워주십니다. 나는 보잘것없어도 말씀이 내 길을 지도해주십니다. 갈 길을 인도해주십니다. 말씀을 따라가면 반드시 복된 길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떠나면 고통스런 일들이 생깁니다. 말씀을 떠나면 사탄이 들어오고 역사합니다. 우리는 삶의 목적을 분명히 하여 사나 죽으나 다 주의 것으로 주님을 위해 살고, 주님을 위해 죽고자 다짐하며 승리의 삶을 사십시다.
    • 칼럼
    • WAIC 칼럼
    2024-01-09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논평] 강성률 목사의 ‘셈하자’(눅 16:1-13)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청지기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허비한다는 것은 조금만 소비해도 되는데, 많이 소비하거나 소비해서는 안 될 곳에 소비한다는 것입니다. 청지기가 가지고 있는 것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것같이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공금횡령이 됩니다. 그러자 평소에 청지기를 믿고 일을 맡겼던 주인은 그러한 청지기가 의심스러워서 장부를 정리해서 넘겨달라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썼는지 감사가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신앙인들에 대한 비유입니다. 신앙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그 어느 것도 자신의 것이 없습니다. 모두 받은 것입니다.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 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고전4:7). 우리는 모두 받았습니다. 우리의 몸도, 두뇌도 받았습니다. 재물도 받았습니다. 직업도 받았습니다. 은사도 받았습니다. 그 어느 것 하나 우리가 만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셨으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랑하는 자는 받았다는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간도 받았습니다. 우리의 삶이 연장되는 것 역시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허비하고 있습니다. 허비란 무엇일까요? 주님을 위하여 쓰지 않는 것은 모두가 허비입니다. “셈하자.” 하는 것은 주인의 소유가 허비되니 그것이 사실인지 조사해 보자는 것입니다. 나아가 소문대로 허비하였다면 허비했던 것들에 대하여 보상을 요구할 것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것들을 어떻게 사용하였습니까? 하나님을 위하여 쓰셨습니까? 아니면 자신을 위하여 쓰셨습니까. 하나님을 위하여 쓰지 않았다면 그것은 허비되는 삶이었습니다. 허비하고 사는 사람과 주인의 것을 합당하게 쓰는 사람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택하여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울이 왕이 된 것은 자신 스스로 잘 나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직접 다스리는 대신, 사울에게 위임하신 것입니다. 사울이 오직 할 일은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보다 사람들의 인기에 연연하였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진멸하라고 하신 아말렉을 진멸하지 않고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겼습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을 두고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삼상15:11).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셨지만, 사울이 세움 받은 왕으로서 합당하게 하지 않고 제 뜻대로 행동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파면당하고 다윗을 세운 것입니다.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행13:22). 다윗을 왕으로 세운 것은 다윗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합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말씀을 버리고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삶이 헛된 삶입니다. 그렇게 될 때 주님은 “셈하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전 생애를 보면 많은 능력을 가진 분이지만 자신을 위하여 신적인 능력을 하나도 사용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만일 자신을 위하여 사용하셨으면 돌이 떡이 되게 하실수도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하나도 아프지 않게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열 두 군단도 더 되는 군대를 불러 올 수도 있었습니다(마26:53).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실 때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 구름 위로 가실 수도 있었습니다(요4:3,4).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도 자신을 위하여 신적인 능력을 사용하시지 않고 사람들이 당하는 모든 고통들을 당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앙인들을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사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자신의 영광을 위하고 임의대로 살아가는 삶은 모두 헛된 삶입니다. 반면에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영광을 주십니다. 그 영광은 세상이 주는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마귀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자기를 이길 수 있는 영광의 힘입니다. 새해에는 자신에게서 나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전심전력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4-01-02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사 40:31)
    인생의 어두움은 누구에게나 있게 마련입니다. 이러한 어두운 문제를 만날 때 누구나 불안과 무력감과 절망감에 휩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현실 앞에 무능한 모습이 아니라 능치 못하심이 없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가능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지금의 나의 현실의 장벽 앞에서 무엇을 보아야 하고, 무엇에 기대를 걸고 새 힘을 얻으려고 하는지에 대해 자신을 깊이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신앙인의 시선은 하나님께 고정이 되어 있어야 시험에 들지 않고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주바라기’가 되십시다. 고통의 절벽만 바라보지 말고, 그 고통 너머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 볼 때에 어둡고 힘든 일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앙망하다’란 ‘참을성 있게 기다리다’, 혹은 ‘위를 쳐다보면서 대망하다’는 뜻입니다.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 위를 쳐다보며 큰 소망을 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위기, 원수, 한계를 만날 때 낙심하고 불안에 떨어서는 안 됩니다. 그럴수록 하나님을 의지하여 영광을 나타내십시다. 고통 중에서 세상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앙망함으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시험이 오더라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해야 하는 자가 신앙인인 것입니다.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소망을 잃고 미친 듯이 방향을 잃고 목표를 잃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참된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며, 그들이 참된 소망을 붙잡고 살아가도록 기도해주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가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그 소망은 미래를 바꾸는 그림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있는 영안과 영의 귀를 가지고 있는 한 어떤 위기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우러러보는 신앙의 힘은 이처럼 위대한 것입니다. 위로부터 오는 힘은 죽음까지도 넘어설 수 있는 힘입니다. 그 힘은 어떤 바람이 불어도, 어떤 박해가 와도, 어떤 환경에 접어들어도 독수리처럼 올라가게 할 수 있는 힘입니다. 은혜가 떨어지면 깨닫지 못하고 원망과 불평의 소리가 납니다(고전 10:10), 또한 인생이 답답하고, 지루하고, 재미없게 느껴지고 살맛이 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주저앉지 마시고, 하나님을 우러러 바라보셔서 새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새 힘을 받으면 원망도 불평도 사라집니다. 그리고 어떠한 역경과 시련 중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즐거움과 원동력은 바로 여호와를 기다리고 의지하고 신뢰하고 순종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힘든 문제가 산처럼 둘러싸고 있을지라도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앙모하는 자에게 새 길을 주시고 새 방법을 주십니다.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않게 해주십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십시다.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날마다 새 힘을 주셔서 어떤 역경에서도 승리하게 하십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3-12-28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불 말과 불 수레’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왕하2:11). 이스라엘의 대 선지자 엘리야가 등장하는 곳에 불에 대한 말씀이 세 번 등장합니다. 첫째는 여호와께서 참 하나님이시라는 증거로 제물을 사른 불입니다(왕상18:38). 이 일로 인하여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 450인을 기손 시내에서 죽입니다. 둘째는 엘리야를 잡기 위하여 이스라엘 왕 아하시야가 보낸 두 오십부장과 각각 오십인 씩 100명의 군사를 사른 불입니다(왕하1:9-12). 세 번째는 본문에 등장한 불말과 불병거입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응답을 의미하고, 두 번째는 징벌을 의미하며, 세 번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의미합니다. 제가 군에 입대하여 자대배치를 받고 일병으로 있을 때였습니다. 연대 종합훈련을 처음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선임들은 이구동성으로 그 훈련이 고되다는 것과, 단단히 마음먹지 않으면 자칫 낙오할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기간에 정기휴가가 있는 병사들을 모두 부러워할 지경이었습니다. 이때 제가 있던 소대에 전역을 앞둔 선임 병사가 있었습니다. 박 병장이었습니다. 소대는 물론 전 중대원이 존경했으며 심지어 장교나 하사관들까지 함부로 대하지 못할 만큼 실력이나 인격적으로 훌륭한 선임이었습니다. 박 병장은 훈련 기간이 전역하는 날이어서 훈련을 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훈련을 즐기는 모범 사병들도 있었겠지만, 당시 대부분의 병사들은 전역을 앞둔 박 병장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훈련 날이 다가오자 우리는 박 병장이 전역을 위하여 당연히 사단본부로 떠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대대장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알다시피 오늘은 박 병장과 김 병장의 전역 날이다. 그런데 이들은 전역을 미루고 자원하여 훈련에 참여하기로 하였다. 우리 대대에 이런 훌륭한 사병들이 있다는 것을 대대장은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모두가 박수를” 그렇게 박 병장 김 병장은 우리와 함께 5일여간 훈련에 참여하였습니다. 박 병장은 나와 같은 화기분대 선임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훈련 내내 분대원들과 무거운 M60을 나눠 매면서 이동하였습니다. 모든 훈련을 마치고 자대에 돌아와 연병장에 모였을 때였습니다. ‘붕!’ 하고 사단에서 지프차 한 대가 달려왔습니다. 사단장이 탑승한 차였습니다. 하늘 같은 사단장의 차를 보고 우리는 잔뜩 긴장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단장은 박 병장과 김 병장을 호명하더니 지프차 뒷좌석에 승차시킨 후 곧장 사단으로 갔습니다. 본문의 불말과 불병거는 저에게 오래 전의 군대 일을 소환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단지 엘리야를 엘리사에게서 떨어뜨려 놓기 위하여 보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지프차가 다른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려고 전역까지 연기하였던 배려 깊은 두 병사의 영광스러운 전역을 의미하듯이, 불병거와 불말은 하나님께 충성한 엘리야의 아름다운 인생 전역에 대한 면류관이며, 천군 천사의 출동입니다(왕하6:17). 사람들이 얼마나 세상 영광에 힘을 쓰는지 모릅니다. 어디에서든 감투 하나 써보려고 애를 쓰는지 모릅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사40:6-8).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이유는 자기 영광을 위하라고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라고 만드셨고 구원하여 주셨습니다(사43:21, 고전6:19).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도덕적인 죄는 죄로 여기지만, 명예 영광 허영심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지를 자각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성군 다윗이 저지른 두 가지 큰 죄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우리아의 아내와 간음한 후 그것을 덮기 위하여 우리아를 죽게 한 살인 죄입니다(삼하11장). 이 죄는 오늘날에도 도덕적으로 가장 큰 죄일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인구조사입니다. 인구조사는 큰 죄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전자의 죗값으로 네 사람이 죽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아니하고 자신의 주권을 과시하려 했던 인구조사의 결과 7만 명이 죽습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이스라엘이 인구 조사를 할 때 생명의 속전을 내야 하는데 다윗이 속전을 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출30:11-16). 그러나 이면에는 명예영광심이 깊이 박혀 있습니다. 안병모 목사님은 이에 대하여 간음과 살인죄는 육적인 죄인데 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자신의 영광을 나타낸 것은 영적인 죄이기 때문에 그 죗값이 더 큰 것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바울은 세상 영광을 배설물처럼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반면에 그는 위로부터 오는 상급을 바라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노년에 그는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였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7-9). 우리에게도 세상 영광이든지 하나님의 영광이든지 두 가지 갈림길이 있습니다. 신앙인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을 소망하고 살아가면 세상 것도 필요한 것 만큼 주시지만, 세상 영광을 소망하고 살아가면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고 자녀 삼아주신 하나님을 변함없이 사랑하여 엘리야나 바울처럼 영원한 영광에 동참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3-12-18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네 마음을 지키라’(잠 4:23)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인간의 마음의 중요성을 아시기에 “나는 인간의 중심, 마음을 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그만큼 인간에게 마음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신앙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마음을 잘 지키고 관리하는 일이 철저히 요구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최우선적으로 지켜야 할 것은 우리의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나기 때문입니다(23절). 마음은 우리의 모든 언어와 행동이 시작되는 곳이기에, 중생한 우리는 거룩하고 선한 마음을 지켜서 거룩하고 선한 행실과 입술의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악한 마음에서 악한 행동이, 선한 마음에서 선한 행위가 나오고(눅 6:45), 말 역시도 마음에서 나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5:18). 마음에서 나오는 것 가운데 아름다운 것들도 있지만,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더 많습니다.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음란, 도적질, 거짓 증거, 훼방 등은 모두 마음에서 시작되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입니다(마 15:19). 그러므로 더욱 마음을 잘 지켜나가야 하겠습니다. 마음은 생각, 사고, 의식의 원천이며, 그 사람의 중심이 되고, 그 사람의 삶을 지배하기에 마음에서 이기면 다 이기는 것이고, 마음에서 지면 이미 다 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을 잘 살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을 잘 관리해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행복 하느냐, 불행 하느냐’는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그 마음속에 증오, 슬픔, 불안, 불평으로 가득 차면 그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지만, 반면에 마음이 사랑과 기쁨으로 가득 차고, 평안하고 감사로 가득 찰 때에 행복한 삶을 살며 마음의 천국을 이루어지 때문입니다. 렘 17:9절 이하에 보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말씀과 성령으로 지배를 받아 변화를 받지 못하면 마음을 잘 관리할 수 없고, 온전히 지켜 나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과 그 말씀으로 채워지고, 성령으로 충만하면 우리의 삶 속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받은 마음, 사랑의 마음, 자비의 마음, 화평의 마음은 덕을 나타냅니다. 사람은 마음에 무슨 생각을 품느냐에 따라 인격이 결정됩니다. 롬 8:5-6에 보면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면 주님의 꾸중을 받게 될 것입니다(마 16:23). 하나님께서도, 마귀도 우리의 마음을 통해서 역사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기 마음을 지킴으로서, 성령님의 끊임없는 역사와 인도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일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잘 지키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행 13:22)고 하신 말씀과 같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인생이 되십시다.
    • 칼럼
    • WAIC 칼럼
    2023-12-15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의뢰하는 양식’
    “그가 또 기근을 불러 그 땅에 임하게 하여 그 의뢰하는 양식을 끊으셨도다.”(시105:16). 제가 집에서 사용하는 의자는 등받이가 탄력이 있어서 제가 끝까지 누우면 140도는 기울어집니다. 여간 편리한 게 아닙니다. 그래서 때로는 마음 편안히 기대고 있다가 거기서 잠들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여느 때처럼 등을 기대는데 의자가 그만 바닥으로 쿵 하고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지나치게 세게 기댄 나머지 무게 중심이 등받이로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지만, 하나님의 보호가 없었더라면 무슨 일을 당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기대면 그런 일이 없을 터인데 제가 지나치게 의자를 믿은 나머지 몸무게에 속도까지 첨가하다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그 아들들이 의뢰하는 양식을 끊으셨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제가 전적으로 의자를 믿고 있다가 그만 넘어지고 말았듯이 이스라엘과 그의 자손들은 하나님을 의뢰하지 못하고 양식을 믿고 있다가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고 만 것입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중동 전 지역의 현상이었으므로 이스라엘도 여기에서 비켜 나갈 수 없었던 일이지, 그것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의뢰하는 양식을 끊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없어” 그야말로 믿지 아니하는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양털에게만 비를 내리게 하시고, 사방에는 마르게 하실 수 있고, 양털만 마르고 사면 땅에는 비를 내리게 하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삿6:36-40). 430년 후 애굽에 재앙이 내릴 때, 이스라엘 백성이 거하는 고센 땅만 안전했던 것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다른 것을 의지하고 살아가면 그것이 우상이 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들은 그들이 무엇을 의지하던 하나님은 그냥 두십니다. 여러분이 남의 자녀가 잘못해도 간섭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그대로 두시지 않습니다. 근실이 채근하십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들을 의지하면 의뢰하는 것들을 끊으십니다. 돈을 의지하면 돈이 궁색해집니다. 자녀를 의뢰하면 자녀 때문에 실망하는 일이 생깁니다. 권력을 의지하면 권력에 대항하는 사람들이 일어납니다. 검을 의지하면 검으로 망하게 됩니다. 다리가 들노루처럼 빨랐던 아사헬은 자기 다리를 믿고 아브넬을 추격하다가 아브넬의 역공에 죽임 당하고 말았습니다(삼하2:23). 뛰어난 모사가였던 아히도벨은 압살롬이 자기의 모사를 받아들이지 않자 고향으로 내려가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삼하17:23). 자기의 지혜를 지나치게 의지한 결과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의뢰하는 것들을 끊을 뿐 아니라, 그것들을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것으로 파멸의 결과를 낳게 합니다. 하나님을 의뢰하지 아니하고 다른 것들을 의뢰하는 것이 미혹입니다. 제가 초중고 시절에는 권투의 인기가 최고였습니다. 그래서 노는 것도 동네에서는 권투 시합하며 놀았습니다. 나보다 세 살 많은 동네 골목대장은 동년배 친구들뿐 아니라, 하급생들을 모아 놓고 권투를 가르쳤습니다. 산에 올라가면 잔디가 넓게 깔린 묘지로 데리고 가서 경기하게 하였습니다. 그 당시 온 동네의 우상은 한국인 세계 챔피언이었습니다. 저는 그 선수는 절대 패하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패하는 것을 보고 사람에게 있어서 영원한 승자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람은 결코 믿을 존재가 못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신앙인들이 믿어야 할 분이 하나님입니다. 의뢰해야 할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의뢰함은 말씀을 의뢰하는 것입니다. 약속을 의뢰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의뢰하려면 시험이 따라옵니다. 도저히 말씀대로 되지 않을 것 같은 시험이 따라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넘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꿈으로 보여주신 말씀이, 노예로 팔려 간 요셉에게 이루어질 가능성이 보였을까요? 현실성으로 따지면 1%도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그는 히브리인 노예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하나님의 약속을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옥중에서조차도 그의 믿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에게 총리대신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가능성을 믿으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여도 하나님이 역사하시기만 하면 변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는 사람이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시37:3-6).
    • 칼럼
    • WAIC 칼럼
    2023-12-04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김찬양 목사의 ‘주님은 나의 안식처’(삼상 19:18~24)
    성경은 이 험한 세상 속에서도 ‘안전한 곳’ ‘피난처’가 있다고 약속하십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요”하면서 노골적으로 다윗에게 많은 박수를 보냈습니다. 이에 사울왕은 다윗을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사울왕은 다윗을 없애려고 계속 살해위협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왕의 아들이면서 다윗의 친구인 요나단은 사울의 위협으로부터 다윗을 보호했습니다(삼상 19:1-7). 그리고 사울왕의 딸이면서 다윗의 부인인 미갈의 도움을 받아 다윗은 도피생활을 했습니다(삼상 19:8-17). 그러자 이를 알게 된 사울왕은 이번에는 세 차례에 걸쳐 자객을 보내 다윗을 살해하려고 합니다. 그래도 다윗이 죽지 않자 이번에는 직접 사울왕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 다윗이 있는 곳으로 찾아갑니다. 그런데 거기서 해프닝이 벌어집니다. 사울왕은 다윗을 해하려고 다윗이 있는 곳까지 쫓아갔지만 결국에는 자기옷을 벗은 채로 사무엘 앞에서 하루 종일 누워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24절입니다. “그가 또 그의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하루 밤낮을 벗은 몸으로 누웠더라” 사울 왕이 옷을 벗었다는 말은 그가 왕위에서 폐위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 말씀입니다. 아무리 사울 왕이 다윗을 살해하려고 했지만 하나님이 다윗을 지켜주시니까 사울왕의 광기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윗은 손상을 입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질문이 있습니다. 다윗이 어디로 피신하였기에 안전했습니까? 본문 18절입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다윗이 도피하여 라마로 가서 사무엘에게로 나아가서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다 전하였고” 라마가 어디입니까? ‘라마’는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도망간 곳인데, 사무엘의 출생지이며 주거지이고 매장지입니다. ‘라마 나욧’도 같은 단어입니다. 라마와 라마 나욧이란 단어는 본문에서 총 7차례 등장합니다. ‘나욧’이란 ‘처소, ‘거처’를 의미합니다. 라마 나욧은 라마 지역에 있는 처소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사무엘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던 장소입니다. 사무엘 상 7:17입니다. “라마로 돌아왔으니 이는 거기에 자기 집이 있음이라 거기서도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 또 거기에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은 곳, 하나님께 예배하면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 즉 ‘하나님의 품’을 상징하는 곳입니다. 다윗은 도피하면서 이 라마라는 곳을 안식처로 삼았습니다. 피난처로 삼았습니다. 왜요? 하나님이 계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편 46: 1-3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피난처, 힘, 큰 도움 다 비슷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환란이나 어려움을 당했을 때 우리를 절대적으로 보호해주시는 피난처요, 힘 이시요. 그리고 큰 도움이 되십니다. 아무리 인생의 지진이 일어나고, 고난의 해일이 덮쳐도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은 사람은 두려워할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은 세상적인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매우 많습니다. 우리의 상식을 초월합니다. 맞습니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우리의 생각보다 하나님은 정말 위대하시고, 은혜로우시며 저와 여러분을 늘 보호하시는 피난처요, 힘이시며, 환란 중에 만날 큰 도움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단지 우리가 한계 상황을 만날 때마다 전능하신 하나님만 바라보고 그분께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환란 중에 만날 큰 도움이 되어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찾아오는 고통과 시련과 상처와 환난이 저와 여러분을 넘어뜨리려고 수시로 찾아옵니다. 그러나 넘어지지 않고 일어설 수 있는 비결은 바로 ‘한분’을 처음부터 끝까지 바라보는 것입니다. 아무리 인생의 고통과 환란 때문에 내 인생이 고달프다 할지라도 ‘우리주님’만 지속적으로 바라보시면 우리주님은 저와 여러분의 피난처가 되시고, 힘이 되시며, 특별히 환란 중에 만날 큰 도움이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주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어지시길 축원합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3-11-20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환난이 주는 유익’(롬 5:3-4)
    우리의 삶에는 기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슬픔도 있습니다. 행복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불행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통과 아픔과 눈물을 주신 까닭은 바로 더 큰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고무나무에서 고무액을 받을 때는 나무껍질을 찢어놓는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우리 인생을 더욱 복되게 하시기 위해 우리 마음을 찢어놓으실 때가 있습니다. 즉 고통의 눈물을 흘리게 하실 때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럴 때 우리는 인내해야 하겠습니다. 참는 것은 귀한 축복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기도하며 끝까지 참고 기다리는 신앙자세가 중요한 것입니다. 시 40:1-2에 보면 다윗은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라며 절망적인 상황에서 구원받은 사실을 고백하였습니다. 참되고 올바른 신앙은 고통 중에서도 나의 조급한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기다리는 신앙입니다. 오늘 우리는 인스턴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과 욕구가 지금 당장 만족되어야 하기에 인내하며 기다리지 못합니다. 지금 당장 원한다며 안달을 부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고 가르쳐주십니다. 우리는 인내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영적 지혜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이나 십자가상에서 고뇌가 계속 되었는데도 끝가지 참으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진주를 만들기 위해 아픔과 고통의 과정을 겪는 조개처럼, 우리도 어려움을 참고 견뎌야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축복의 그릇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참 신앙은 고난으로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고난은 우리의 자아를 깨뜨립니다. 그래서 고난이 귀한 것입니다. 우리가 약해지는 것은 고난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달콤하고 수지맞는 일을 통해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스럽고 손해나는 쓰디쓴 고난을 통해서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때때로 쓰디쓴 고난을 주심으로 더 큰 은혜를 받게 하고 더 귀한 그릇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영적 성장을 가져오고, 겸손하게 되며(사 57:15), 연약함과 죄를 깨닫게 되는 유익을 얻게 됩니다(고후 12:9). 고난의 환경은 우리를 만드시는 하나님의 말씀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난을 바라보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환난 중에 기도하면 응답하셔서 환난 중에 내가 너를 건지고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시 91:15)”고 말씀하셨고,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낳고,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롬 5:3-4)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고난만 바라볼 때,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인내로 고난 다음에 올 소망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고난 다음에 주실 은혜와 축복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때문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 덕분에’라고 말할 수 있는 신앙으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3-11-13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적극적인 순종’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가니라.”(마26:30). 감람산은 올리브 산입니다. 거기에는 겟세마네 동산이 있습니다. 얼마 안 있으면 제자로 택함을 받았던 가룟 유다의 배반과 대제사장들의 하속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러 올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 역시 한 사람도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고 달아날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자들과 함께 습관을 따라 기도드렸던 곳, 척하면 예수님이 계시는 위치를 짐작할 만한 곳, 그러기에 유다가 대제사장의 하속들과 함께 올 수 있는 곳입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있는 힘을 다하여 피하고 싶은 곳이겠지만, 앞으로 벌어질 모든 일들을 미리 아시는 주님께서는 찬미하며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에 올라가십니다. 올라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뜻에 맞지 않아도 아버지의 뜻이기에 찬미하며 올라가십니다. 순종은 적극적인 순종과 소극적인 순종이 있습니다. 찬미는 적극적인 순종을 드러냅니다. 소극적으로 순종하면 시험이 올 때 돌아서기 쉽습니다. 작은 일에도 유혹을 받아 넘어가고 맙니다. 소돔성이 악하여 하나님께서는 소돔을 멸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소돔에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롯을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통하여 소돔성을 멸할 계획을 말씀하시고 그 처와 두 딸이 성 밖으로 나와 산으로 도망할 것을 말합니다. 롯이 산보다 가까운 소알성으로 가겠다고 하자 그것까지 허락하십니다. 순전히 삼촌 아브라함 때문이었습니다. 소돔에 유황불이 쏟아질 때 롯의 처는 성안에서 나와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창19:23-29). 롯의 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은 하였지만 그 말씀을 자기의 말씀으로 받지 못하고 억지로 소극적으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아본 것입니다. 소극적인 순종은 이처럼 실족하기가 쉽습니다. 여로보암이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여로보암은 그가 다윗같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집을 세워주시겠다는 약속을 굳게 믿지 않았습니다. 행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서 마음이 르호보암에게 돌아가 그를 죽이고 그 나라를 다윗왕조에게 돌릴까 봐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세웠던 것입니다(왕상12:29). 이 소식을 멀리서 들은 유다에 사는 선지자는 매우 탄식하였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벧엘에 사는 늙은 선지자를 쓰시지 않으시고, 멀리 유다에 사는 선지자를 벧엘에 보내어 여로보암을 책망하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보내실 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도로 가지도 말라.”(왕상13:9). 이 말씀에 유다에 사는 선지자는 ‘말씀을 받아 전하면 그만이지 왜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고 하셨을까? 왜? 가던 길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실까?’ 하는 의문이 들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가 돌아올 때는 쉬면서 음식도 보충하고 이미 익숙한 길로 오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니 순종하지 않을 수도 없었습니다. 억지로 소극적으로 순종하다가 그만 벧엘에 사는 늙은 선지자의 속임에 넘어가고 만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 속에 오던 길로 다시 가지 말라는 말씀,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는 말씀이 마음에 걸렸는데 자신보다 한참 선배 선지자가 “하나님께서 물과 떡을 주라고 하셨다.”는 말에 그만 마음이 녹아들고 만 것입니다(왕상13:19). 이처럼 순종에 소극적인 자세를 취할 때 마귀는 그 틈을 노립니다. 그리고 넘어뜨리고 맙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을 성경에서뿐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종종 보았습니다. 억지로 순종하는 사람, 마음이 상하여 순종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이 하지 말라고 그랬어.” “아버지께서 보지 말라고 그랬어.” 물론 소극적인 순종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그런데 소극적인 순종 속에는 자신은 하고 싶은데, 하지 말라고 하는 사람에 대한 다소 섭섭한 감정과 원망 섞인 감정이 들어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순종할 내용에 대하여 다소 왜곡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런 순종을 피해야 합니다. 어차피 순종할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찬미하면서 해야 합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내 복음(롬2:16)이라고 말한 것처럼 말씀을 내 말씀으로 받아서 행하여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자에게 성령도 함께 주십니다(행5:32).
    • 칼럼
    • WAIC 칼럼
    2023-11-07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