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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독연 칼럼] 이상길 목사의 ‘기도합시다’(출 14:15-17)
    그리스도인에게는 모든 일이 기도를 통해서 계획되고,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정로로 가게 됩니다. 기도는 내 뜻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하려고 하면 어려움이 많이 생깁니다. 때로는 기도가 힘들고 귀찮을 때도 있습니다. 특히 새벽기도는 힘들 때가 많습니다. 그래도 기도해야 답이 나옵니다. 기도에 길이 있습니다. 새벽기도는 성도들만이 힘든 것이 아니라 목회자들도 힘이 듭니다. 그러다 보니 오래 전에 어느 목사님이 저에게 ‘미국교회는 새벽예배를 하지 않는데, 꼭 새벽예배를 할 필요가 있느냐’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한인교회는 새벽예배를 드리지 않습니까? 새벽예배가 힘들거나 귀찮아서 그런 말을 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청년시절에는 ‘새벽예배는 순교다. 그러므로 새벽예배는 순교정신으로 드리는 것이라며’ 독려하시던 목사님이 생각이 납니다. 하루의 시작점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것입니다. 열심히 기도해야 힘도 얻고, 믿음이 새로워지고, 성장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도우십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출애굽하여 가나안으로 가는 중, 앞에는 홍해 뒤에는 애굽 군대가 쫓아왔습니다. 진퇴양난입니다. 그때 모세는 무엇을 했습니까? 기도했습니다. 모세는 그 어려운 상황에서 살아날 수 있는 길은 기도밖에 없다고 믿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홍해는 갈라졌습니다(출 14:15-16). 탈북여성 1호인 김영실목사님은 총살장으로 가는 길에 ‘아버지 살려주세요!’라고 간절히 기도했다고 합니다.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절규입니다.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겠습니까? 뼈가 녹는 간절함이었겠지요. 그 결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인생에 감옥과 같은 문이 가로막혀 나갈 길이 없어도, 기도하는 성도에게 문이 열려지는 역사가 일어나는 줄로 믿습니다(행 16:19-26). 에스더는 위기에 처한 자기 민족의 소식을 듣고, 사흘 동안 금식하고 기도했습니다. 간절히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담대하게 왕에게 나아갔고(에 4:16), 결국 위기에 처한 자기 민족을 구했습니다. 다윗도 여러 번의 죽을 지경에 처했으나. 그러한 위기에서 생명을 구해주시길 하나님께 기도하여,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구원하여주셨습니다.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우리에게는 좌절보다 신앙적 결단이 필요합니다. 용기를 갖고 기도할 때, 우리에게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까? 기도하십시오. 교회 성장, 교회 부흥 역시 열심히 기도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기도는 만능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고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심은 불신앙인 것입니다. 특히 영적전쟁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는 마귀가 물러가지 않습니다. 고함지른다고 물러갈 줄 압니까? 하나님의 능력으로 물리치시기를 바랍니다. 최근에 한미일 동맹관계가 강화됨으로 중국과 북한이 심한 자극을 받아 반발이 심한 상황입니다. 북한은 전술핵을 사용하여 우리나라의 주요위치를 선제공격대상으로 삼아, 연일 미사일을 쏘아 되며 불안감을 조성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가 대처해야 할 가장 우선순위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이 되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자의 편이십니다. 기도는 나를 변화시키고, 가정을 변화시키고, 사회와 국가를 변화시킵니다. 방법론에 앞서 우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기도합시다. 하나님께서 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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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4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4:26). 석수장이가 바위를 부술 때 큰 망치를 가지고 무조건 때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바위 사이에 난 틈을 찾습니다. 조그마한 틈이 보이면 쐐기도끼를 틈 사이에 끼우고 비로소 망치질을 합니다. 그러면 큰 바위라도 갈라지고 깨어집니다. 마귀가 신앙인들을 파멸시키기 위하여 틈을 노립니다. 마귀에게 보이는 틈이야 다 헤아릴 수 없겠지만 크게 두 가지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분노는 마귀에게 주는 틈입니다. 만일 분노가 오래 지체되면 마귀는 여지없이 그 틈을 뚫고 분을 품은 사람을 파멸로 몰아넣고 맙니다. 사울이 멸망하게 된 것도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라는 여인들의 춤추며 노래하는 소리에 격분하였기 때문입니다(삼상18:6-8). 압살롬이 스스로 죽음의 길로 간 것도 자신의 누이 다말을 강간한 이복형 암논에 대하여 오랫동안 분을 품은 결과였습니다(삼하13:32). 하나님을 경외하였던 아사왕은 그의 잘못을 책망하였던 선지자에게 노하다가 회개하지 않았으므로 죽게 되었고(대하16장), 매우 총명했던 웃시아 왕 역시 분노를 품다가 한센병이 발하여 여생을 별궁에서 홀로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대하26:16-23). 이처럼 분노는 마귀로 틈타게 하여 상대방보다 분노하는 자신이 더 해를 입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분을 품지 않을까요? 분노는 증상입니다. 허리가 쑤시고 아픈 것은 병의 원인이 아니라 증상이듯 분노 역시 증상입니다. 하지만 디스크가 돌출 되었거나 근육이 뭉쳤다면 그것은 허리 통증의 원인이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분노가 병의 증상이라면 병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지정의로 대표되는 자기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뜻이 가로 막히고 상처를 받을 때 분노를 발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분노를 품지 않으려면 자신의 지정의를 십자가에 처리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자신의 지정의를 무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잠3:6).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것은, 일어나는 일들마다 하나님의 허락하심임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장이 ‘쿵’ 찍혀 있음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 감람산 길로 올라갈 때, 베냐민 지파 사람 시므이가 그를 저주하였습니다.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 대신에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붙이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인고로 화를 자취하였느니라.”(삼하16:7-8). 이 말에 대하여 아비새는 격분하여 다윗이 명하기만 하면 단칼에 시므이의 목을 베어버리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삼하16:10). 이처럼 다윗은 시므이를 단순한 시므이로 보지 않고, 그를 저주하라고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사자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시므이에게 격분하지 않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긍휼히 여김을 받을 계기로 삼았습니다.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 하고”(삼하16:12). 그의 말대로 하나님께서는 시므이의 저주를 다윗에게 선으로 바꾸셔서, 다윗이 예루살렘 왕궁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은 신앙인들이 분노하지 않게하는 첩경입니다. 만일 분노하였다면 본문처럼 해가 지기 전에 화해하고 풀어버려야 합니다. 두 번째로 마귀가 신앙인들에게 노리는 틈은 그들을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마귀와 악한 자들은 강자에게는 굴욕적이며 약자에게는 한 없이 강한 특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귀에게는 두려움 없이 처음부터 강하게 나와야 합니다. 한 번은 아람왕 벤하닷이 이스라엘왕 아합에게 사자를 보내어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네 은금은 내 것이요, 네 처들과 네 자녀들의 아름다운 자도 내 것이니라.”(왕상20:3). 그러자 아합왕이 다음과 같이 응답하였습니다. “내 주 왕이여 왕의 말씀 같이 나와 나의 것은 다 왕의 것이니이다.” 아합은 이렇게 대답하면 벤하닷이 만족하게 여겨 거기서 멈출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자 벤하닷은 한 층 더 강하게 나옵니다. “내일 이맘 때에 내가 내 신복을 네게 보내리니 저희가 네 집과 네 신복의 집을 수탐하여 무릇 네 눈이 기뻐하는 것을 그 손으로 잡아 가져가리라.”(왕상20:1-6). 처음에는 신복의 집이 포함되지 않았지만, 두 번째 사자를 보냈을 때는 신복까지 포함되어 모두 가져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아합이 처음부터 약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탄의 공격은 받아주면 받아줄수록 더 큰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니 처음에 딱 거절해야 합니다. 술이나 담배 도박 마약 등은 사탄의 사자들인데 처음에 거절해야지 조금씩 양보하면 마침내 그들이 사람을 삼키고 맙니다. 처음에 항거해야 합니다. 때가 늦으면 이기기 힘듭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도 처음에 과감하게 끊어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혼미하게 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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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19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차악을 허락하신 하나님’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마19:8-9).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처녀 딸을 시집보내는 자도 잘하거니와 시집보내지 아니하는 자가 더 잘하는 것이니라.”(고전7:38). 이처럼 혼인 문제에 있어서 최선의 길은 ‘주님을 위하여 시집가지 아니하고, 장가가지 아니하고 독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 주님을 위하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둘째, 은사가 있어야 합니다. 둘 가운데 하나라도 맞지 않는 것이라면 이기적으로 되거나 탈선하기 쉽습니다. 혼인에 있어서 최선의 길은 아니지만 차선이 되는 것은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입니다. 혼인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부합한 일이며, 사회 구성원을 존속시킬 뿐만 아니라 역사를 계승 발전시키는 원동력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혼인 문제는 최선과 차선의 차이일 뿐 모두가 선입니다. 선택 문제에 있어서 최선과 차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투표를 하거나 일이 어그러질 때 우리는 ‘일단 최악만 피하자’하는 심정이 될 때가 있습니다. 차악이라도 선택할 수밖에 없는 마음입니다.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한 후에 마음에 자책하고 통회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그런 다윗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갓이 다윗에게 나아가 고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마음대로 택하라. 혹 삼년 기근일지, 혹 네가 석 달을 대적에게 패하여 대적의 칼에 쫓길 일일지, 혹 여호와의 칼 곧 온역이 사흘 동안 이 땅에 유행하며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온 지경을 멸할 일일지 하셨나니 내가 무슨 말로 나를 보내신 이에게 대답할 것을 결정하소서.”(대상21:11-12).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내리신 벌 세 가지는 모두 다윗에게 고통을 가져오는 것들이었습니다. 다윗은 모두 고통스러운 것이었지만 덜 고통스러운 것으로 온역의 징벌을 택하였습니다. 다윗은 결국 가장 지혜로운 선택을 한 것입니다. 한 번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하여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마19:3). 이 질문의 의도는 이렇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을 가리켜 예수님 앞서 보냄 받은 자라고 하신 일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가르침이 비슷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헤롯 안디바와 헤로디아의 이혼과 부정한 결혼을 반대하다가 결국 참수형을 당하였습니다(마14:3-12). 이에 바리새인들은 이혼 문제를 예수님께 질문함으로써 만일 예수님께서 이혼을 금지하신다면 이를 정치적인 쟁점으로 삼아 결국 세례 요한과 같은 운명에 빠뜨리고자 획책한 것입니다(Schaff). 이혼 문제에 대하여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19:4-6). 예수님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이혼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마19:7)라고 다시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본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마19:8-9). 예수님의 말씀은 비록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여 아내 버림을 허락하셨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본뜻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간음 외에 이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원칙이지만, 완악한 사람들에게 이혼하지 말라고 한다면 그들은 이혼하지 않는 테두리에서 이혼보다 더 심한 악행을 저지를 것입니다. 곧 아내를 학대하거나, 구타하거나, 타인하고 정을 통하거나, 아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을 맡길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자비의 하나님께서 여인들이 당할 수도 있는 최악을 피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차악(이혼)을 허락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조상들의 예를 들어 잘 알 수 있습니다. 완악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유교의 영향을 받았던 조선은 한 번 시집가면 이혼할 수도 재혼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에게나 가문에 큰 수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속아서 하게 된 혼인이더라도, 남편이 간음한 경우가 명백한데도, 심하게 구타를 당하고 살아가는데도, 시모의 시집살이가 심함에도 불구하고 참아가며 살아야 했습니다. 간혹 친정으로 돌아간다면 동네에서는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인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경우가 허다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한 자들의 이러한 일들을 막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악으로 인한 최악보다는 차악인 이혼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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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12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기도의 결국은 감사와 유익입니다’(골 4:2)
    성도라면 누구나 기도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기도해야 한다는 대해서 모두가 공감하며 총론적으로는 다 그렇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각론에 들어가면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는 말이 있듯이, 어떤 이유로든 자기를 합리화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옳지 않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항상 기도에 힘써야 하겠습니다(시 72:15, 시 141:5, 눅 18:1, 눅 21:36, 행 10:2). 기도는 영적 호흡이요, 영적 생명줄과 같습니다. 또 기도는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이며,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길이고, 삶에 활력을 얻는 은혜의 근원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이 아닙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고 명하셨습니다. 좋을 때나, 괴로울 때나, 슬플 때나, 즐거울 때에나 어떤 처지와 형편이든지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소망이 생기고, 환경도 상황도 인생도 바꾸어 놓습니다. 환경과 현실만 보고 구하지 말고, 앞을 바라보며, 입을 크게, 넓게 열어야 합니다(시 81:10). 저희 교회 집사님 중 한 분이 8년 전에 아내가 병으로 위경에 처했을 때, 담당의사가 장례준비를 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낙망이 되어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2년만 더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2년만 더 살아도 어디 입니까? 그 후 정확하게 2년을 더 사시고 하나님나라에 가셨습니다. 장례를 치루고 나서 집사님께서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까 ‘그때 5년만 더 살게 해달라고 기도할 껄’ 후회가 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이성으로, 자기 판단으로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현실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들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히 11:1)? 믿음으로 확신을 갖고 담대하게 구해야 할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역사해주십니다(약 5:15). 그런데 기도의 응답이 더디거나, 간구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실망하며 시험에 들거나 낙심될 때가 있습니다. 저 역시 열심히 기도했는데, 정반대의 결과를 마주칠 때, 혼란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기도자로서 옳지 않은데 말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이루시니, 우리는 기도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간구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실망하거나 무력감에 빠지지 않아야 하며, 시험에 들거나 낙담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기도자는 하나님의 뜻을 기다릴 줄 알고, 소망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진정한 기도는 감사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간구보다 높으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으면 감사할 일이 아닙니까? 또 기도에 열중하며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갔고, 그 만큼 신앙의 성장과 진전을 이루었잖습니까? 기도의 응답이 있기까지 기다리는 인내의 훈련도 받지 않았습니까? 이런 유익을 놓치고 탄식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는 어떤 결과가 나와도 감사와 유익뿐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도로 이끄시어,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굳건하게 세워나가시는 선하시고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응답이 되지 않았다고 해서 낙망해서는 안 됩니다(눅 18:1). 오히려 하나님의 더 큰 사랑과 계획을 알게 되었기에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며, 하나님의 뜻을 존중해야 하겠습니다. 기도는 도깨비 방망이가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항상 온전히 기도에 힘쓰고, 기도할 때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다(골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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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09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감찰하시는 하나님’(잠 16:2)
    우리가 어느 곳을 가든지 눈에 띄는 것이 있는데 바로 CCTV입니다. 그러나 CCTV가 아무리 많이 설치되었더라도 촬영범위를 넘어서면 촬영이 불가능합니다. 설치되지 않는 곳은 더욱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세상 어느 곳이든지 감찰하지 못하는 곳이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높은 하늘에 계실지라도 땅에 있는 모든 사람을 감찰하시되 마음까지도 감찰하십니다. 그러기에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감찰하사 모든 인생을 보실 뿐(시 33:13)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의 생각과 뜻을 다 아시고(히 4:12: 계 2:23), 그들의 모든 말과 행위를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139:3-4).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자신의 행위는 깨끗하고 양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께서는 겉으로 들어난 행위뿐 아니라 마음속까지 파악하시기에, 사람의 숨은 마음까지, 곧 그의 마음의 생각과 감정과 의향 그리고 행동의 동기까지 살피시고 그것이 과연 깨끗하고 선한지 혹은 불결하고 악한지 평가하십니다. 인간의 육신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또한 인간의 마음을 지으신 분이시기에(시 94:9) 마음속에 있는 생각과 의도를 속속들이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피할 곳이 없고(시 139:7-9),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하나님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습니다(히 4:13).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선한 행위도 감찰하시고, 인간의 악한 행위도 감찰하시니, 하나님의 전지성 앞에서 경외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요셉은 아무도 없는데서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할 때 하나님께 득죄할 수 없다며 그 자리를 뛰쳐나왔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을 보십니다(삼상 16:7). 그러기에 마음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하나님께서만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귀도 역사하기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분별을 통해 마음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특히 마음의 급속한 요동을 가져오는 기분 감정에 지배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말씀과 성령의 지배를 받아 사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기분 감정에 사로잡히면, 마귀에게 마음을 내어주는 게 됩니다.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이루어가야 합니다(롬 12:2). 마음이 바뀌면 행동이 달라집니다. 즉 내 마음이 변하면 삶의 모습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마음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나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바로 정립해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절망에 억눌려 한숨으로 살았다면, 그 절망을 끄집어내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원망과 불평이 내 생애를 지배했다면 그것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게으름과 나태와 미움과 증오도 못 박아야 합니다. 주님보다 이 세상의 다른 것들을 더 사랑하고 귀하게 여겼다면 그것 역시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순간 새로운 자아가 탄생합니다. 그것은 신비로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순수한 마음과 순수한 신앙을 가진 사람을 들어 쓰십니다. 하나님도 믿고, 재물도 믿고, 권력도 지식도 명예도 믿는다면 그것이 바로 혼합주의 신앙입니다. 혼합주의 신앙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깨끗하고 순결하여 하나님께만 충성하는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십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감찰하시되, 사람의 마음도 감찰하시니,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의 눈은 속일 수 없습니다. 코람데오 신앙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살아서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온전한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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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29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있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왕상19:13)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나 사무엘을 불렀을 때는 단지 “아브라함아” 혹은 “사무엘아”라고 하시며 그들의 이름만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창22:1, 삼상3:4). 아브라함은 자신이 이삭에 푹 빠져 있는 상태를 알렸고, 사무엘은 자신이 하나님의 전을 가까이하고 있음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하시며, 엘리야를 부르실 뿐만 아니라 장소 곧 ‘여기’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시험에 들어 영적으로 어두워진 엘리야 스스로 자신의 상태를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기란 육신에 갇힌 ‘굴속’을 의미합니다. 이세벨에게서 도망 나온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자 엘리야가 대답합니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왕상19:14). 엘리야는 자신이 하나님을 위하는 열심이 특심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하나님을 위하였을까요? 하나님이 엘리야를 위하셨을까요? 아합 때에 이스라엘은 바알과 아세라 우상이 사방에 퍼져 있었습니다. 왕과 왕후가 그러하니 신하들도 자연스럽게 미혹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법인데, 백성들도 우상을 섬기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엘리야는 미혹에 빠지지 않고 신앙을 지켜나갔습니다. 자신이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남기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극심한 가뭄 중에서도 엘리야에게는 그릿 시냇가를 지정하여 숨게 하셨고, 까마귀에게 명하여 떡과 고기를 가져다주도록 하셨습니다(왕상17:5-6). 또 그릿 시냇가 물이 마르자 시돈 땅 사르밧 과부에게 명하여 그를 공궤하도록 하였습니다(왕상17:9). 엘리야가 까마귀에게 명한 것도 아니고, 사르밧 과부를 스스로 찾아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까마귀와 이방 여인 사르밧을 통하여 그를 섬기도록 한 것입니다. 엘리야 스스로는 통 속의 가루 한 움큼과 병 속에 있는 적은 양의 기름으로 몇 년을 버틸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끊이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만일 엘리야가 백성들을 많이 모아 놓고 바알 선지자와 경쟁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불을 내려주셔서 단 위의 제물과 단을 태워주시지 않았다면 엘리야는 거기서 살아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엘리야 자신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그를 위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위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신앙인들은 감사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항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지 않고, 자신이 하나님을 위한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엘리야처럼 시험 들기 쉽습니다. 아마도 엘리야는 이렇게 시험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나의 열심이 이렇게 특심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바알 선지자들을 없앴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아합과 이세벨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게 하시는 걸까?’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열심 있는 나를 잠시도 쉬지 못하게 여기까지 도망 나오게 하시는 걸까?’ 부언하지만 사람들이 하나님께 시험 드는 이유는 엘리야처럼 자신이 하나님을 위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렇게 하나님을 위하는데 하나님은 왜 나를 위해 주시지 않지?’ 사람에게 시험 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그에게 얼마나 잘했는데 고작 내게 돌아오는 것이 이거야?’ 사랑의 채권자 곧 “나는 사랑을 받아야 하고” “나는 대접을 받아야 하고” “나는 인사도 받아야 하고” “나는 섬김을 받아야 할 사람이야.” 이런 태도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반면 사랑의 채무자는 “나는 사랑에 빚진 자야. 그러니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보답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해” “나는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나는 대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해” 이런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세상 삶에 있어서 채무자가 된다면 상당히 괴로운 일입니다. 하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채권자가 아니라, 채무자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빚을 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빚진 사랑을 우리는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보답의 표시는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몸을 드리고, 사랑하고, 경외함으로 표시할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웃을 섬김으로 표시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야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똑같이 여러분에게 “K야 어디 있느냐?”라고 묻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 자신의 위치를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에 빚진 자로서, 보답하는 자세를 가지고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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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26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엘리야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있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왕상19:11-12). 이 내용은 엘리야가 그를 죽이겠다는 이세벨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도망쳤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이시고 듣게 하신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세미한 음성으로 나타나시기 전에 산을 가르는 크고 강한 바람에도, 지진에도, 불 가운데서도 계시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모습을 엘리야에게 보이셨을까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뜻 없는 일이 없습니다. 분명히 엘리야나 후대에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교훈하시기 위함입니다. 산을 가르는 크고 강한 바람, 지진, 불 이러한 표적들에도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이러한 표적 등은 하나님의 웅장함, 엄위, 권능 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적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의 외적인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그동안 하신 일은 이러한 외적인 표적과 기사 등이었습니다. 3년 6개월 가뭄 기간 중에 한 번도 훈련해보지 않은 까마귀가 그에게 떡과 고기를 가져다 준 일, 통에 가루가 한 움큼밖에 남지 않았고 병에 기름이 조금 밖에 남지 않았었지만 남은 가뭄 기간 동안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와 그의 아들이 먹을 수 있도록 통의 가루와 병에 기름이 다하지 않은 일, 이스라엘 왕과 왕후, 신하들이 지지하는 450명의 바알 선지자를 홀로 상대하여 죽인 일 등은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나타내신 강한 바람과 지진과 불과 같은 일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일을 맛 본 엘리야는 이세벨이 그를 죽이려 했을 때,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그런 기적들을 나타내 주시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큰 이적들을 통하여 엘리야에게 자신을 알리는 차원을 지나, 이제는 인격체이신 하나님 자신을 알리기를 원하셨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들의 수준이 표적이나 기사 등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려고만 한다면, 종교성은 그에게 있을지 모르지만 인격적으로 성장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께 합당한 사람으로 만들어지고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으며 교제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신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엘리야 이전에 이미 이러한 신앙적인 수준에 도달한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에녹은 무려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5:21-24). 에녹은 육신의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하늘로 오른 최초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특별한 업적이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또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하여 세속을 떠나거나 특별한 고행을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평범한 사람처럼 자녀를 낳고 길렀으며 보통 사람들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가 달랐다면 보통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점입니다.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며 교제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뜻에 합하였기 때문입니다(암3:3). 자신의 뜻보다 길이요 진리이신 하나님의 뜻을 더 추구하였기 때문입니다. 다윗 또한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심장이 나를 교훈하도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시16:7-8). 다윗은 밤마다 그의 양심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들었고, 무슨 일을 할 때 항상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그가 흔들릴 때는 하나님의 현존을 감각하며 위로를 받았고 힘을 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시16:9). 주님의 임재 가운데 사는 그 자신이 항상 기뻤으며 육체까지도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가끔씩 ‘하나님께서 나에게도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나타내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고 믿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보지 못하고 믿는 것입니다(요20:29). 보지 못하고 믿는 사람은 양심을 통하여 성령께서 하시는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그 음성이야말로 지각을 사용해야 들을 수 있는 장성한 자의 몫입니다(히5: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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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20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김원중 목사의 ‘교회사로 보는 박조준 목사의 설교와 목회신학’
    본고는 지난 5월 22일 열린 '제2회 웨이크신학포럼-교회사로 보는 박조준 목사의 설교와 목회신학'를 참관한 김원중 목사의 소감 전문이다. <편집자 주> 정일웅 목사는 ‘교회사로 보는 박조준 목사의 설교와 목회신학’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의 사회변화와 한국교회의 역할을 대비하며 한국교회가 시대적부름에 부응하여 나라와 민족의 발전에 이바지해왔음을 적시하고, 다만 제5공화국 들어 군사쿠데타의 시기에 교회가 침묵함으로써 선지자적 역할을 도외시한 것이 흠이었음을 지적한다. 이 시기에 박조준 목사는 교회의 개혁을 설교하고 행동하는 목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신군부의 요구를 거절하여 교회의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하였다고 분석한다. 또한 박조준 목사가 교회공동체의 책임을 일깨우고 교회 연합의 정신을 고취한 것들이 마치 17C 코메니우스가 동유럽 보헤미아에서 형제연합교회의 목사와 감독으로서 유럽의 교회를 새롭게 세우려 한 것에 비견하며 개혁과 연합의 선구자로서의 모습을 부각시켰다. 코메니우스가 사회, 교육, 정치영역까지 망라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실현되는 완전한 개혁을 추구한 것처럼 박조준 목사도 교회개혁이 사회, 정치, 현 시대를 망라해야 한다는 정신이 같다고 보았다. 임승안 나사렛대 전 총장은 박조준 목사의 삶을 세 편의 이야기로 나눠서 풀어갔는데, 전기적이고 교회역사적인 것으로서 이북의 선조들의 삶과 박조준 목사의 청소년기, 학교와 교회 생활 그리고 담임목회 기간이 그것들이다. 한국 교회의 현실에 대한 박조준 목사의 진단과 처방을 요약하면, 나라가 살려면 교회가 살아야 하고 교회가 살려면 목회자가 살아야 하고 목회자가 살려면 회개해야 한다. 결국 하나님과 목회자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이 골자이다. 아신대 신대원장 박응규 교수는 ‘박조준 목사의 목회 사역과 한국 교회사’를 논하였다. 국가적 혼란기에 하나님의 종으로서 최선을 다하셨으며, 인간의 내면변화에 주력하고 사회 참여와 변화에 적극적이셨으며, 박정희 정권과 신군부 앞에서 강직하고 예언자적 설교를 주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복음적이고 예언자적인 설교를 통해 한국교회의 귀감이 되신 것이다. 박조준 목사의 한국교회사적 공헌을 살펴보면, 첫째 복음전도의 우선성을 기반으로 사회적 기여를 하였으며, 둘째 복음적 예언자적 설교를 통해 한국교회의 귀감이 되었으며(타협하지 않고 권력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으며 정의와 개혁을 외침), 셋째 교회개혁과 교권적 장로교의 개혁과 연합운동에 대한 기여를 했으며, 넷째 목회자와 설교자의 교육과 갱신을 위해 헌신하였고, 다섯째 목회자로서의 자세와 취해야 할 태도를 분명히 하여 후대에 귀감이 되어 준 바른 목회자상을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박종구 목사는 월간목회와 박조준 목사의 관계를 소개하며, 2016년 9월호에 실렸던 박조준 목사의 설교의 핵심을 ‘1)쉽다 2)대중적이다 3)본문에 충실하다 4)위로와 새 힘을 준다 5)전달이 역동적이다’의 다섯 가지로 요약했다. 그리고 더불어 박종구 목사는 웨이크 포럼의 의의를 ‘1)설교연구의 인프라가 구축되었다 2)비평문화가 성숙되면 좋겠다 3)목회쟝르별 접근이 필요하고 다각적인 방면으로 조명되어야 한다 4)개혁의 지평을 확대하자 예컨대, 신학윤리, 실천윤리, 선교전략 정책, 문화예술 개혁 등‘으로 요약하고 설명했다. 이러한 신학적 포럼을 통해 AI시대에 과거의 공부를 통해 어떻게 미래를 열어갈지를 고민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위와 같은 여러 분들의 발제와 정리를 통해 박조준 목사님의 목회와 한국 교회에 기여하신 역할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으며, 근현대사를 사시며 행동으로 우리에게 훌륭한 귀감이 되신 모습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이런 훌륭하신 목사님과 같은 시대를 사는 것이 큰 영광이다. 그리고 목회자의 한 순간의 선택이 한국 교회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새삼 깨닫게 되는 계기였다. 교회들이 신군부의 서슬퍼런 권력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바른 자세를 취했더라면 작금의 한국 교회의 위상은 지금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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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18
  • [국독연 칼럼] 강성률 목사의 ‘그루터기’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사6:13). 작년 늦가을 교회 건물 옥상에 방수를 하였습니다. 준비단계에서 그곳 화분에 있는 식물들을 모두 처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화초들은 대부분 시들거나 그 생명이 다하여 가고 있었지만, 맨드라미는 그 때에도 수명이 한 달은 남아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남겨 놓을 수 없었기 때문에 모두 없애고 단 한 그루만 씨받이로 남겨 두었습니다. 방수를 모두 한 후 겨울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 한 그루도 처리하였습니다. 방수를 깨끗하게 페인트칠을 해놓고 보니 더 이상 식물로 옥상을 더럽힐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올 해는 화분들에게 안식을 주기로 했습니다. 어떤 식물도 뿌리거나 심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과 다르게 봄이 되니 식물들이 쏙쏙 올라왔습니다. 작년에 자랐던 식물들의 씨들이 떨어져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맨드라미 싹은 화분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비교적 다른 씨앗들에 비하여 늦게 발아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하였지만 오랜 시간에도 나오지 않자 더 이상 기대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옥상에 있는 화분을 보니 맨드라미가 화분 여기저기에 모종 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제가 기대를 포기하고 있었을 때 한 포기 남아있던 맨드라미에서 씨가 떨어져 한 화분 가득 싹이 돋아 자랐는데 그것을 자매 한 분이 모종한 것입니다. 한 그루의 맨드라미가 이곳에서 그들의 역사를 계속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그루터기가 나옵니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사6:13). 남유다가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거룩한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겨두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만큼 거룩한 삶은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일까요? ‘거룩’이란 성스럽고 위대함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거룩한 백성으로 만드시기 위하여 속 된 것을 멀리하도록 하셨습니다.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바 기어다니는 것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레11:44). ‘거룩’이란 몸을 구별하여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속 된 것으로부터 구별하는 것, 사치 세력, 음란 세력으로부터 구별하는 것 등을 말합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신앙인들이 불신자들처럼 속되게 살아가지 아니하고 거룩한 백성으로 구별 된 생활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18:4). 이와 같이 성도들은 거기서 나와야 합니다. 거기는 바로 자신을 영화롭게 하는 곳, 사치의 세력이 있는 곳, 자신을 여황이라고 하고, 과부가 아니라고 하는 곳입니다. 그런데서 부터 나와 따로 있는 것이 거룩한 삶입니다. 그러면 성도들은 모두 세상 사람들과 어울러서는 안 되고 산속이나 숲속이나 사람들의 인적이 드문 곳에서 살아야 합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 속에서의 구별입니다. 고기가 바다 속에 살지만 짠물이 들여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기름이 비록 물속에 있지만 물과 섞이지 아니하고 구별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은 거룩한 영입니다. 거룩한 생활을 적극적으로 하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거룩한 생활의 소극적인 면은 육체의 정과 욕심을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4).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으면 속 사람이 나옵니다. 속 사람 따라 살아가는 것이 거룩한 생활입니다. 자기 생각을 좇아 살아가는 것은 속된 생활입니다. 만물보다 거짓 되고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렘17:9). 자기 생각을 따라 살아가지 않는 생활이 순종하고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1:14-15). 순종하는 것이 거룩한 생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맨 처음 이스라엘 민족 모두를 제사장 나라로 삼으셨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출19:5-6). 하지만 그들이 타락하여 금송아지를 섬기자 레위 지파만 제사장 지파로 삼았습니다(출32:28-29). 그러다가 이스라엘 족속들이 발람에게 속아 모압의 신들에게 제사하고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는 사건이 생겼습니다(민25:12). 그 때에 제사장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미디안 여인과 그와 함께 온 시므온 지파의 족장을 창으로 찔러 죽게 하였습니다. 그 일로 하나님께서는 비느하스 족속을 영원한 제사장 지파로 삼을 것을 약속하였습니다(민25:11-13). 나중에 비느하스 족속도 타락하자 사독의 후손이 남습니다.솔로몬 왕 때부터 사독의 후손이 제사장 집안이 됩니다(겔44:15).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타락하면 거기서 솎아내고 또 타락하면 계속 솎아내어 거룩한 백성들을 그루터기로 삼습니다. 거룩한 생활은 순종하는 생활이며 거룩한 생활은 성령의 열매 맺는 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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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17
  • [국독연 칼럼] 강성률 목사의 ‘무엇을 바라볼까?’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왕상19:3). 18장에서는 엘리야 홀로 바알 선지자 450명을 상대하여 승리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살아계셔서 능력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굳세게 붙들었습니다. 만일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힘을 의지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답은 뻔합니다. 혼자서 450명을 상대로 이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였기 때문에 450명의 바알 선지자를 없앨 수 있었습니다. 바알 선지자는 여러 가지를 의미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죄의 세력을 뜻하기도 합니다. 죄는 세력입니다. 힘입니다. 엘리야가 자신의 힘으로 450명을 이길 수 없었듯이 신앙인들이 죄의 세력을 이기려 하는 것은 홀로 450명을 이기려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번번이 실패하는 것은 자신이 할 수 있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엘리야가 만일 하나님께 “하나님, 저를 도와주실 필요가 없습니다. 저 혼자의 무술로 450명의 바알 선지자를 해치울 수 있습니다.”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말리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래라. 너 혼자 한 번 해봐라.” 신앙인들이 자기 힘으로 죄와 싸우려 하는 것은 거대한 군대와 홀로 싸우려는 것과 같습니다. 술이나 담배 게임 등에 빠진 사람이 종종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술, 이것 내가 끊으려고 마음만 먹으면 끊을 수 있어” “담배, 언제든지 끊을 수 있어. 하지만 지금은 필요성을 못 느낄 뿐이야.” 그 말은 곧 “나는 홀로 18만 5.000명의 군대를 이길 수 있어.” “450명의 바알 선지자를 이길 수 있어.”라고 자신하는 것과 같습니다. 일 년 전에도 패하고, 한 달 전에도 패하고, 어제도 패했으면 자신은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솔직하게 하나님께 고백해야 합니다. 엘리야는 어떻게 바알 선지자를 물리칠 수 있었을까요? 그는 먼저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제물을 받으셨다는 증거로 불을 내리셨습니다(왕상18:30-38). 그 후에 그는 바알 선지자 450명을 해치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죄와 싸우고 습관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길은 자신에게는 없습니다. 그것들은 세력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야처럼 전적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일이 우선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순종을 의미합니다(롬6:13). 자신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증거로 불을 내리십니다. 그 불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고 성령의 불을 받는 것 사이에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엘리야는 비교적 빨리 응답을 받았지만 우리는 늦게 내릴 수도 있습니다. 불은 뜨겁게 달아오르는 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제물을 태우는 불입니다. 자신을 모두 태우는 불, 자기가 조금도 남지 않고 오로지 구속한 주만 보이게 하는 불입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기도드리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왕상18:36-38). 그 때 비로소 불이 임하게 됩니다. 엘리야는 그렇게 능력을 받아 바알 선지자를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용감했던 엘리야가 이세벨로부터 그를 죽이겠다는 통보를 받은 후에는 마음이 물처럼 녹았습니다. 그 형편을 보고 도망을 갔습니다. 이전까지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그가 형편을 보자, 환경을 보자, 상황을 보자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없이 나약해졌습니다. 신앙인들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환경을 바라보면, 형편을 바라보면 한없이 나약해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지금 환경을 보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바라봅니까?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새 힘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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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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