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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독연 칼럼] 임현주 목사의 ‘와서 아침을 먹으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것을 알았기 때문에 당신은 누구십니까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요21:12)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났습니다. 무조건 뛰어야 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겨우 몸을 피할 수 있었지만 선생님은 잡혀서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모든 재판 과정을 몰래 따라다니며 숨죽여 보았습니다. 우리 선생님이 법정 최고형, 1급 사형수들이 받는 십자가형을 선고받아 나무에 못 박혀 높이 매달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시체가 무덤 속으로 넣어지는 것도 보았습니다. 이 모든 일이 한 순간에 끝나버렸습니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가실 수는 없습니다. 물 위를 걸었던 분입니다. 폭풍을 꾸짖던 분입니다. 죽은 사람도 살려낸 분입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로마제국으로부터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예루살렘 입성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드디어 우리 왕이 왔습니다 수많은 군중들이 앞에서 뒤에서 따르며 환호했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막11:7~10) 우리는 그 환호성의 한가운데에 있었습니다. 나라를 되찾는데, 내 집이, 내 하는 일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모든 것을 다 던질 수 있었습니다. 가는 곳곳마다 나아와 호소하는 이들의 문제를 해결해 준 선생님입니다. 그러나 그 선생님의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날아갔습니다. 우리는 무섭고 두려워 그 밤에 다 도망쳤습니다. 두르고 있던 겉옷도 버리고 알몸으로 도망쳤습니다(막14:51,52) 모든 것이 다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그가 지금은 다시 우리들을 바닷가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처음으로 우리를 불렀던 곳입니다. 허기진 우리들을 위해 숯불을 피우고 생선과 떡을 준비합니다. 그런 줄 알고 따랐던 그 선생님이 그 선지자가 아닙니다. 창세 이후 사람이 무덤에서 살아나올 수는 없습니다. 그를 하나같이 버렸던 우리를 다시 찾아 올 수는 없습니다 그의 죽음 앞에서 그를 ‘모른다‘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던 우리들입니다. 그가 재판받을 때, 악한 일을 도무지 한 적 없는 분임을 증명해 줄 증인들이 우리였음에도, 나서지 못한 우리들입니다. 홀로 죽음의 길을 가게 한 그 분입니다. 그러나 지난 3년 동안 같이 먹고 자면서, 한 사람 한 사람 우리 발을 손수 닦아주신 그 분이 맞습니다. 이 바닷가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지금 눈앞에 서 계십니다. 처음에 무덤을 찾아갔던 마리아가 그가 살아계심을 보았다고 했을 때 도무지 믿지 않았습니다(막16:11) 엠마오시골로 다시 돌아가던 두 제자도 자신들에게 나타나셨다고 말하였을 때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눅24:13~35) 그러고 보니 살아생전 몇 차례나 이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막9:31) 왜 말씀하신 그대로의 일이 일어나도 그 때나 지금이나 믿을 수 없을까요? 지금도 사실 새까맣게 모르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몇 차례나 우리의 믿음 없음을,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살아난 후에 우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겠다(막14:28,16:7), 여기서 만나자 하신 곳, 이 곳입니다. 왜 다시 이런 우리를 찾아 오셨을까요. 그 선생님, 우리들의 주 앞에 다시 섰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사람들 앞에서 왜 모른다 했는지, 왜 저주까지 했는지, 왜 버리고 도망했는지,그것부터 먼져 따져 묻겠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도 서운한 기색, 실망한 기색이 없습니다. 야단할 기색이 아닙니다. 다만 숯불을 피워 아침을 준비 했습니다. 역시나 밤을 새워 일하고도 물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만남을 준비 했습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다시 주 예수님과 함께 먹는 아침입니다. 그러나 전처럼 신나게 웃고 떠들고 할 수 없습니다. 도대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행동 할 수 없습니다. 귀신도 쫓아내며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도 행한 우리였지만(마10:1), 선생님의 십자가형 죽음 앞에서는 모두 도망쳤던 우리입니다. 어떤 얼굴을 해야 합니까? 이럴 줄은 몰랐습니다. 차라리 왜 그랬냐, 왜 못 깨닫느냐, 또 다시 야단이라도 맞고 싶은데 이젠 눈도 마주칠 수 없습니다. 무어라 말씀하실지 귀만 기울 일 뿐입니다. 다시 살아나신 그 분 앞에서 더 이상 감출 것도 숨을 곳도 없습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아침 먹을 시간이라도 주어진 것이. 먹으며 생각을 해 보아야겠습니다. 입으로 떡은 생선은 들어가지만 도무지 생각이 멈추었습니다. 지난 3년이, 처음부터가 내 생각이었습니다. 끝이 내 생각이었습니다. 그것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내 생각대로가 아니었습니다. 내 눈앞에서 일어날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분만 우리의 생각들에 개의치 않고 하실 일을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하고 있습니다. 이제야 내 생각을 멈춥니다. 분주한 나를 멈춥니다. 내 안의 모든 시끄러움과 다툼이, 모든 의문, 모든 억울함, 울음과 두려움이 멈춥니다. 오직 그 분 앞입니다. 온 세상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앞입니다. 그는 이렇게 다시 살아나 있습니다 우리 앞에 이렇게 있습니다 다 먹은 후에 드디어 베드로에게 말씀 하십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다만 사랑을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21:15~17) 사랑이 아닌 그 모든 것은 십자가 죽음 앞에서 남김없이 모조리 도망쳐야 하는 것임을. . . 죽음을 넘은 사랑으로만 세워 가는 주님! 오직 사랑이길 원하는, 사랑이신 주님! <항상기쁜교회는 현재 서울 강서구 개화동에서 예배를 드리며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유튜브에서 ‘항상기쁜교회’로 검색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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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03
  • [국독연 칼럼] 강성률 목사의 ‘사랑을 깨닫는 날부터’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 도다.”(골1:6). 얼마 전에 제가 사는 빌라 3층과 2층 사이 계단에 반려견 한 마리가 묶인 채로 있었습니다. 아랫집 청년이 그 옆에 앉아 지키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왜 강아지가 그곳에 있는지 몰랐습니다. 11세대 가운데 그런 강아지를 기르는 집은 없었습니다. 분명 누군가 그곳에 버리고 간 것으로 보였습니다. 강아지는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그를 만지는 사람들에게 몸을 맡기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버려진 상태가 아니고 분명 주인이 자신을 데리러 올 줄 굳게 믿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모습으로 보아 주인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강아지로 보였습니다. ‘이런 강아지를 누가 왜 버렸을까?’ 의문이 들었는데 다음 날에야 풀렸습니다. CCTV 확인 결과 버려진 강아지가 아니라, 주변에 연로하여 정신적인 장애가 생긴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길을 지나다가 강아지가 밖에 나와 있는 것을 보고, 노끈으로 목에 채운 후에 끌어다가 매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만일 주인이 그를 학대하였다면, 그는 사람을 경계하거나 심하게 짖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전혀 불안한 기색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던 강아지, 누가 봐도 사랑스러운 강아지였습니다. 알고 보니 어떤 목사님 가정에서 기르는 반려견이었는데, 주인이 잠시 한 눈판 사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주인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강아지가 낯선 환경에서 조금도 요동도 없이 평온하게 지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의 사랑을 듬뿍 받은 사람들입니다. 임금이나, 주인을 위하여 대신 죽은 사람들에 대하여 우리는 종종 들은 바가 있지만, 왕이나 주인이 종의 죗값을 죽음으로써 대신 치러 주었다는 말은 결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온 우주를 만드시고 주관하시는 주님께서 저 같은 죄인을 위하여 대신 돌아가신 것입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하여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7-8). 그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다면 감사 감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다면 보답하는 마음을 가지고 형제들에게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을 깨닫는 것, 사랑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 수 있을까요? 본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 도다.”(골1:6). 듣는 사람은 깨달을 수 있습니다. 다윗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묵상할 때에 화가 발하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시39:3). 묵상하는 것은 읽고 듣고 기억하고 있는 것을 대상으로 합니다. 묵상할 때 감사 감격으로 뜨거워집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읽고 들을 뿐만 아니라 묵상해야 깊게 깨달아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기 위해서는 겸비한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가 내게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들으신 바 되었으므로 내가 네 말로 인하여 왔느니라.”(단10:12). 겸비케 하기로 결심만 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성경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마음이 둔해지는 것은 겸비치 못하고 높은 마음을 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현자도, 철학자도 아닌 겸비한 마음을 가지고 배우려 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기 위해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7-8).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작은 것부터 사랑을 실천해 나갈 때 사랑이신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회개한 것만큼 주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눅7:47). 자신의 죄악을 깨달은 사람은 죄 문제는 보혈공로 아니면 해결될 방법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보혈을 흘려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감사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은 보답하는 자세입니다. 그 보답하는 자세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우리에게 사랑받는 사람에게 어떤 인심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주님께 받은 사랑을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마음입니다. 그것이 바로 열매입니다. 저를 비롯하여 이 글을 읽는 모든 성도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그 넓이와 깊이와 높이와 길이가 어떠한 것임을 알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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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15
  • [국독연 칼럼] 강성률 목사의 ‘기도의 능력’
    “이 밤에 왕이 잠이 오지 아니하므로 명하여 역대 일기를 가져다가 자기 앞에서 읽히더니 그 속에 기록하기를 문 지킨 왕의 두 내시 빅다나와 데레스가 아하수에로왕을 모살하려 하는 것을 모르드개가 고발하였다 하였는지라.”(에6:1-2). 에스더서는 ‘하나님’ ‘여호와’라는 단어가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책입니다. 하지만 총 10장까지밖에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곳곳에 하나님의 숨결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책입니다. 오늘은 본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기도한 백성들에게 어떤 은혜를 베푸시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여기 나오는 ‘이 밤’은 아말렉인 하만이, 자신에 대하여 신임이 두터운 페르시아 제국의 대왕 아하수에로왕에게 모르드개의 목을 구하고자 왕궁 바깥뜰에 나선 날 밤이었습니다. 하만은 한갓 궁지기 신분의 모르드개가 제국 서열 두 번째인 자신에게 절은커녕 무릎도 꿇지 않는 것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22.5미터 높이 되는 나무에 그를 달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이미 그는 아하수에로왕 12년 12월 13일에 모르드개를 포함하여 유대인을 전멸시키도록 왕으로부터 허락 받았지만(에3장), 아직 1월이었기에 당장 모르드개를 처형하지 않는다면 11개월 만큼 더 자신 앞에서 미동도 없는 모르드개를 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왕과 하만은 왕후 에스더가 유대인이며, 모르드개가 딸처럼 양육하였던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왕의 어인이 찍힌 조서대로 한다면 에스더도 유대인이기 때문에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에스더는 그 점을 파고들었습니다. 유대인을 멸하면 자신도 유대인이기 때문에 도매금으로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왕에게 호소하면서 하만의 만행을 고소할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나라 법은, 왕이 부르기 전에 궁전 안뜰로 들어가 함부로 왕에게 나아가면, 남녀노소 누구든지 죽음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한 가지 살길은, 왕이 자기 앞으로 나아오는 자를 향하여 금으로 만든 홀을 직접 내밀어 주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때 아하수에로왕은 한 달 동안 왕후 에스더를 부르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에스더는 유대인 모두가 죽게 된 상황에서 마냥 있을 수 없었습니다. 모르드개를 통하여, 도성 수산궁에 있는 유대인들이 사흘간 그녀를 위하여 금식하도록 청하였습니다. 자신도 시녀들과 함께 금식한 후 “죽으면 죽으리라.” 결심하고 왕 앞으로 갔습니다(에5:16-17). 하나님께서 아하수에로 왕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셨습니다. 왕의 눈에 에스더를 무척 사랑스럽게 보이도록 한 것입니다. “왕후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본즉 심히 사랑스러우므로 손에 잡았던 금홀을 그에게 내어미니 에스더가 가까이 가서 금홀 끝을 만진지라.”(에5:2). 에스더가 금홀을 만지자 왕이 말하였습니다.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이뇨.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 그러자 에스더는 왕이 하만과 함께 에스더가 베푼 잔치에 참석하기를 청하였고, 왕과 하만은 에스더의 요구대로 하였습니다. 타이밍이 있는데 에스더는 지나치게 심사숙고한 나머지 잔치 첫날에는 왕을 청하였던 목적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잔치 첫날부터 다짜고짜 사정을 말하여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을 것이고, 왕이 에스더의 소원을 마음으로부터 준비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에스더는 다음 날도 자신이 베푼 잔치에 왕이 하만과 함께 참석하기를 청하였습니다(에5:8). 하지만 늦은 결정이 하마터면 큰 화근이 될 뻔하였습니다. 이후 하만은 에스더가 베푼 2차 연회 전에 모르드개를 죽이기 위하여 22.5미터나 되는 나무를 준비하였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에 수양대군은 왕이 되어 조카 단종을 강원도 영월에 유배시켰습니다. 이에 분개한 신하들이 단종 복위 운동을 벌였습니다. 명나라 사신이 오는 날에 거사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거사를 모의했던 사람 가운데는 무사였던 유응부와 문인이었던 성삼문이 있었습니다. 유응부는 이 일이 새어 나가기 전에 바로 거사를 해야 한다고 서둘렀지만, 문인이었던 성삼문과 다른 사람들은 때가 아니라고 하면서 다른 날로 미루었습니다. 그 결과 김질에 의하여 일이 탄로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옥에 갇혔을 때 유응부는 고문을 당하면서 “군인이 입만 산 서생들과 같이 계획을 짜면 안 된다더니 과연 그 말이 맞더라.”고 한탄하였습니다. 이처럼 거사는 머뭇거리거나 미루면 화근이 될 수 있습니다.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던 에스더는 자칫 모르드개가 하만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후에야 하만을 죽여달라고 왕에게 요청할 뻔하였습니다. 모르드개가 죽은 상태라면 에스더는 비록 하만과 그의 가족, 아말렉인을 멸절시킨다고 해도 슬픔이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만이 모르드개를 나무 위에 달기 위하여 바깥뜰에 대기하던 날 밤, 아하수에로 왕은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잠들기 위하여 엎드려 자거나 숫자를 거꾸로 세는 대신, 신하에게 왕들의 일기를 펼쳐 읽게 하였습니다. 마침 두 내시 빅다나와 데레스가 왕을 모살하려고 했던 것을 모르드개가 발견하여 고발하였던 장면을 폈습니다. 왕은 모르드개에 대하여 어떤 상급도 내리지 않았던 것을 알고, 하만을 불러 왕이 존귀케 하려는 자에게 어떤 상을 내려야 할지 물어보았고, 하만은 왕이 입는 의복을 입게 하고, 왕이 쓰는 관을 쓰게 하며, 왕이 타는 말을 타게 하여 왕의 방백 중 존귀한 사람의 손에 붙여서 성 중 거리로 다니며 “왕이 존귀케 하기를 기뻐하는 사람에게 이같이 할 것이라 하게 하소서.”(에6:9내용). 말하였습니다. 왕은 그가 한 말대로 모르드개에게 행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께서는 모르드개에 대하여 하만이 입도 벙긋 못 하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더와 수산성에 사는 유대인들의 기도로 인하여 다음과 같은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첫째, 왕으로 하여금 에스더를 사랑스럽게 보게 하였습니다. 둘째 에스더가 비록 잘 못 판단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에스더의 실수까지도 하만이 모르드개를 왕에게 참소하지 못하도록 입을 막음으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하신 점입니다. 셋째는 화가 복이 되어 그들을 멸망시키려고 하였던 유대인의 대적 하만과 그의 가족 그의 민족이 모두 멸망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모르드개는 왕의 다음이 되어 유대인의 유익을 도모하였던 점입니다. 이처럼 기도는 성도들에게 좋은 일들을 가져다줄 뿐만 아니라 화가 복이 되게 하며 또 보이지 않는 재앙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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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03
  • [국독연 칼럼] 강성률 목사의 ‘자존감이 아니라 주존 감’
    “그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고? 너를 인하여 네 어미가 신고한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곳 사과나무 아래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 너는 나를 인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와 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아8:5-6). 요새 자존감이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사전적인 의미는 스스로 품위를 지키고 자기를 존중하는 마음입니다. 다른 분들에게 ‘자존감’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다가오는지 모르겠지만, 저에게는 신앙적이지 않아 보입니다. 한자만 놓고 볼 때 자존감이나 자존심은 자기를 높이는 마음으로 별반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신앙인들만큼은 자존감이 아니라 주존 감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존 감을 굳이 해석하자면 신앙인들이 주님을 존중히 여김으로 생기는 긍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은 높일 것이 없지만 주님을 높임으로써 자연스럽게 생기는 마음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자존감이 하늘을 찌를 때 그것은 교만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존감이 무너질 때 열등감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자존감과 열등감은 옷만 바꿔 입은 일란성 쌍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은 날씨와 같아서 수시로 변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고, 우리에게 사랑으로 하신 약속 또한 변하지 않으며,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심도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주님을 높임으로 갖게 되는 신앙인들의 힘과 신앙인들의 긍지는 믿음을 더욱 굳게 하고 무슨 일이 잘될 때 교만하지 않은 원동력이 되며, 설령 일이 잘 안 될지라도 주님을 바라봄으로 다시 일어설 힘이 됩니다. 본문의 “그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고?”(아8:5a) 말씀은 여인들이 술람미 여인에 대하여 합창하는 내용입니다. 비록 술람미 여인은 미천한 신분의 여인이지만 왕의 힘을 의지하고 자신의 환경, 자신의 위치를 떨치고 일어섭니다. 술람미 여인에게는 주존 감이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만 바라보면 일광에 쬐어서 검고(아1:6), 오라비들의 분노로 포도원 지기 신분이었지만 자신의 신분에 낙심하지 않고 왕의 사랑을 의지하고 힘차게 솟아오릅니다.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에게 다음과 같이 청합니다. “당신은 나를 인장 반지처럼 마음에 간직하고 도장처럼 팔에 세기세요.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며 질투는 무덤처럼 잔인하여 맹렬한 불처럼 타오릅니다.”(아8:6 현대인의 성경). 아가서가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사랑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에게 인장 반지처럼 자신을 마음에 간직해달라고 하였는데 우리 주님은 이미 벌써 그렇게 하고 계십니다. 구약시대 제사장들이 입는 옷은 대략 이러했습니다. 속옷이 있고 그 위에 입는 겉옷이 있었고, 겉옷 위에 앞치마처럼 걸치는 에봇이 있었습니다. 이 에봇은 청색 자색 홍색과 가늘게 꼰 베실로 만들었습니다. 에봇의 양어깨 위에는 호마노 보석 두 개가 있었는데 한 개에 여섯씩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에봇에 부착한 흉패 역시 열두 보석으로 달려 있었습니다(출28:1-14). 제사장은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열두 지파는 주님 안에 있는 다양한 종파의 기독교인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특정 교단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 모두 가슴에 새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에게 인장 반지처럼 마음에 새겨달라고 했지만, 우리 주님은 이미 벌써 오래전에 성도들을 가슴에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약속을 하십니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네 자녀들은 속히 돌아오고 너를 헐며 너를 황폐케 하던 자들은 너를 떠나가리라.”(사49:16). 이스라엘 백성들을 손바닥에 새겼기 때문에 절대 잊어버리지 않고 다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 약속, 주존 감으로 인하여 그들은 비록 흩어졌으나 멸망하지 않고 70년 만에 포로 생활에서 귀환하게 됩니다. 우리는 바울의 말처럼 아무것도 아닌 자들입니다(고전3:7). 또 지렁이 같은 존재들입니다(사41:14). 그러한데 자신을 높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주님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보석으로 여기고 또 가슴에 새기고, 팔에 세기고 계십니다. 절대로 잊지 않으십니다. 오직 성도들의 존재 의의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높일 때 우리의 믿음이 굳어지고 거기에서 생기는 힘과 긍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존감이 아니라 바로 주존 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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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20
  • [국독연 칼럼] 강성률 목사의 ‘끝마무리’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왕하5:10). 서울 강북 경찰서는 지난달 26일 미아지구대 소속 경찰관 2명을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불구속 입건하였습니다. 해당 지구대 경찰관들은 지난해 11월 30일 서울에 한파경보가 내려졌을 당시 60대 취객을 집 문 앞까지 데려다주고 돌아갔는데, 이 취객이 약 6시간 후에 이웃 주민에 의하여 숨진 채로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경찰관이 취객을 발견하여 집 문 앞까지 데려다준 것은 잘한 일이지만, 1%의 마무리가 잘못되어 취객이 사망하였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중요한 것이 마무리입니다. 작게는 매 순간 사건 사건에서의 마무리이며, 크게는 인생의 마무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전자에 해당하는 것으로 나아만의 병을 통하여 어떻게 사건이 아름답게 마무리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아만은 비록 한센병 환자였지만 아람 왕에게는 존귀한 자였습니다. 이 전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아람을 구원케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집에는 이스라엘에서 잡아 온 포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 소녀의 소개로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나아만은 마침내 엘리사가 있는 곳까지 갔습니다. 나아만이 오자 엘리사는 나가보지도 않고 사자를 보내어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왕하5:10)라고 말하였습니다. 평생 대접만 받고 살아왔던 나아만은 엘리사의 이런 태도에 마음이 상했습니다. 노하여 그의 종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왕하5:11-12). 항상 ‘내 생각’이 문제입니다. 다윗은 상책을 좇아가다가 시글락에서 낭패를 맛보았고, 여로보암도 자기 생각 때문에 금송아지를 세워 대대로 악한 길의 전형이 되고 말았습니다. 만일 나아만이 상한 마음에 요단강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자기 생각대로 아마나나 바르발강으로 갔다면 틀림없이 깨끗하게 되지 못하였을 것이며 남은 삶도 이전 삶과 다를 바 없었을 것입니다. 다행히도 그에게는 충성스러운 종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말하였습니다.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일을 행하라 하였다면 행치 아니 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이 말은 “우리가 대접을 받으러 왔습니까? 씻어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였는데, 무엇이 문제입니까?”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충성스러운 종들 덕분에 나아만은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왕이 성군이 된 것은 자신 혼자만의 힘으로 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에게는 요나단이라는 친구가 있었고, 갓이나 나단 같은 훌륭한 선지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나아만에게도 성령의 전달자 역할을 했던 종이 있었던 것입니다. 온전케 되기 위해서는 좋은 동역자가 있어야 합니다. 혼자서는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주관에 치우칠 수 있습니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동역자가 있어야 치우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훌륭한 동역자는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항상 자신을 한 발자국 떠나 바라보게 하십니다. 엘리사의 말을 듣고 나아만은 요단강에 갔습니다. 한 번 들어갔다 나왔지만 환처는 여전하였습니다. 두 번, 세 번, 네 번…. 힘써 들어가 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어 보였습니다. 감기 환자가 있는데 일주일치 약을 조제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틀을 먹어도 아무런 효과가 없다면 다른 병원에 가서 다른 약을 타 올 것입니다. 전혀 차도가 없는데, 일주일을 참고 약을 복용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나아만도 이런 유혹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요단강에 무슨 약 기운이 있다고, 들어간다 해서 곪아 터진 환부가 사라질까?’ 하고 포기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아만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다섯, 여섯, 일곱 번째까지 들어갔다 나왔습니다. 그가 일곱 번 들어갔다 나왔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지긋지긋한 한센병 환처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온전한 순종을 원하고 계십니다. 온전한 순종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순종함을 의미합니다. “너희 복종이 온전케 될 때 복종치 않은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고후10:6). 이와같이 좋은 마무리를 위해서는 성령과 동역을 하며, 자원하는 마음과, 끝까지 순종하는 충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 위에 사랑은 온전하게 매는 띠입니다(골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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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03
  • [국독연 칼럼]전인격적(知情意)으로 감사하는 믿음 (혹은 온전한 감사)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는 네 가지 은(恩)으로 반응하여야 합니다. 즉 지은(知恩), 감은(感恩), 사은(謝恩), 보은(謝恩)이 그것입니다. 이 네 가지 은(4恩)을 동원한 골고루 갖춘 반응이 전인격적인 감사입니다. 오늘의 본문 눅17:11~19에는 예수님께서 나병환자 10명을 고치신 사역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에 나타난 한 사마리아인의 반응(4恩)을 묵상하며 전인격적 감사에 대한 교훈을 나누고 싶습니다. 1. 지은(知恩): (15절 상) “그 중의 한 사람(사마리아인)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보았다는 것은 깨달았다 뜻입니다.(지은)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 때 감사가 저절로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배은망덕한 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호 6:3) “나는···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시 136편은 창세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곰곰히 구체적으로 회상하며 감사 찬양하는 시입니다. 우리도 받은 은혜를 우리가 누리는 것들을 곰곰히 헤아려 본다면 엄청난 은혜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되고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과거/현재/미래, 섭리/사랑/능력, 구원/보호/인도/공급, 등). 하나님의 최고의 은혜는 독생자를 보내신 최고의 사랑입니다. 프랑스의 한 노인이 병원에서 코로나 치료를 받은 후 계산서를 받아들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답니다. “제가 눈물을 흘리는 것은 돈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단지 24시간의 산소 공급을 받고 50만 프랑의 돈을 지불해야 하는데, 그러나 저는 하나님께서 주신 산소를 93년 동안 마시면서도 돈을 지불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제가 하나님께 얼마나 많은 빚을 졌는지요!” 2. 감은(感恩): (15절 하)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것은 고침 받은 은혜를 느끼고 큰 기쁨으로 감격해 하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고마움을 느끼는 정서적인 감은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알고도 느낌이 없는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감사의 정서(감정)를 발달시켜야 합니다. 골 3:16은 “감사하는 마음으로(thankfulness in your hearts to God)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며(삼상 16:7), 우리가 무엇이든 전심으로(마음을 다하여) 하기를 원하십니다(시 111:1, 신 6:5, 잠 3:5) 3. 사은(謝恩): (16절)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겉치레가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존경과 깊은 감사를 겸손한 자세와 입술로 표현하였습니다. 이것은 의지적인 감사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19절)고 선언하셨습니다. 입술의 고백이 중요합니다(롬 10:10) 감사의 표현은 우선 말(言)로 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하나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는 것이 감사 기도입니다.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말미암아 배부르게 되나니 ...”(잠18:20). 감사하는 마음을 입술로 고백할 때 우리는 영혼의 만족함을 느낍니다. 감사의 또 다른 표현은 찬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13:15). 감사의 마음을 감사 예물(제물)로 표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시 76:11, 96:8, 빌 4:18, 히 11:4). 감사가 가는 곳에 물질도 따라가게 되어있습니다. 4. 보은(謝恩): 가장 높은 수준의 의지적 감사입니다. 말과 찬양과 예물의 차원을 넘어 삶으로 은혜를 갚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의 은혜에 온전히 보답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시 116:12)라며 고민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살전 3:9)라고 자문하였습니다. 보은은 은혜를 주신 하나님의 소원(뜻, 목적)을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나 자신과 삶을 드려야 합니다(롬 12:1-2, 행 20:24). 우리는 먼저 눈에 보이는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부터 실천해야 합니다(딤전 5:4, 요일 4:20). 우리 위해 생명까지 주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전인격적(知情意)으로 감사하는 믿음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4은(四恩)의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더가스펠미션/그복음선교회는 선교공동체(선교적 교회)로서 성경에 보여주신 ‘그 복음(The Gospel)’을 바로 알고 전파하는 사명과 “원주민 선교는 원주민 선교사로!”라는 전략으로 33년동안 20개 나라에 40명의 원주민(자국민) 선교사를 파송하였으며, 지금은 시에라리온에 3개의 미션학교(Christian Leadership College, 신학과 중심)와 미얀마에 2개의 고아원을 섬기는 사역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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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02
  • [웨이크 칼럼] 강성률 목사의 ‘생각지 않는 때에 오시는 주님’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24:37-39). 지난 9일 새벽 01시 30분경이었습니다. 눈을 뜬 채로 누워 있었는데 재난 문자 발송 진동이 울리는 동시에 바닥이 좌우로 두 번씩 흔들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전 포항 지진 때보다 더 큰 울림이었습니다. 저는 벌떡 일어나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고등학교 때까지 시골에 자랐던 저는, 다른 친구들에 비하여 농사일을 많이 거들지 않았지만 가끔은 부모님을 도왔습니다. 도리깨로 콩이나 깨를 떤 후, 체를 좌우로 흔들어 곡식과 쭉정이를 거르는 일도 했습니다. 오늘 새벽 작은 흔들림에, 하나님께서 지구를 흔드는 일은 우리가 체를 흔들기보다 훨씬 쉽겠다고 느껴졌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지구를 크게 흔드신다면 살아남을 자가 없을 터인데, 지금까지 주님께서 오래 참고 기다리신다는 생각에 감사드린 것입니다. 코로나가 4년째 지속되고 있습니다. 백신이 개발되었다고 하지만 코로나는 다양한 형태로 백신을 피하여 나타나고 있습니다. 가히 코로나 춘추전국시대라고 할 만합니다. 코로나가 의식이 있어서 스스로 백신을 피하여 변신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경고하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경고를 의식하지 못한다면, 노아 시대 홍수로 인하여 다 멸망당할 때까지 깨닫지 못한 것처럼, 코로나와 같은 각종 재앙으로 다 우리가 멸망당할 때까지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노아시대 사람들이 멸망 받은 이유는 살인, 강도, 강간과 같은 특별히 흉악한 죄 때문에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그 시대 사람들의 행동은 오늘날 우리와 특별히 다를 바 없었습니다.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마24:38-39).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은 노아가 살던 때뿐 아니라, 지금도 대부분 사람에게 관심 있는 일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하루는 에서가 사냥하고 장막으로 돌아왔습니다. 솔솔 팥죽 냄새가 코를 자극했습니다. 동생 야곱이 팥죽을 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잔뜩 허기졌던 차인데 냄새까지 나니 더 배가 고팠습니다. 그래서 야곱에게 팥죽 한 그릇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야곱이 에서의 장자의 명분을 팔라고 하였습니다. 에서는 “내가 죽게 되었는데 장자의 명분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하면서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팔아 넘겼습니다(창25:32-34). 그러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노아 시대에 먹고 마시며 시집가고 장가간 것처럼, 에서 역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갔습니다. 이유는 그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장자의 명분은 하나님의 백성 된 명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자녀 된 명분을 소홀히 여기고 세상살이에만 빠졌기 때문에 심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지 아니하는 사람은 관여하지 않습니다. 믿는 사람, 하나님의 자녀에게 관심을 둡니다. 그것은 마치 사람이 남의 자녀가 말을 듣거나 안 듣거나 상관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타락하면 세상에 심판을 내립니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창6:1-3).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심판이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코비드 상태는 그 서막인지도 모릅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이 가까이 오셨다는 생각으로 등불을 켜고 서 있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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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7
  • [웨이크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 2’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마22:20-21). 온 천하 만물이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골1:16-17). 로마시대 가이사는 오늘날 세상 통치자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을 따로 나누신 것은, 비록 만물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일지라도, 통치자들의 통치 행위와 거기에 따른 비용을 염두에 두셨기 때문이며, 아울러 신앙인들이 세상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 한 때 현대에서 그랜저가 최고가였을 때가 있었습니다. L씨 성을 가진 청년이 K회사에 입사하여 그 회사 사장의 기사로 발탁 되었습니다. 청년이 사장을 잘 섬기다가 여자 친구를 사귀었습니다. 어느 날 여자 친구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지, 사장 몰래 사장의 차를 가지고 약속 장소에 갔습니다. 덕분에 그들은 달콤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회사는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청년은 즉시 퇴사를 당하였습니다. 사장은 ‘공과 사가 분명하지 않은 청년이라면, 앞으로 더 큰 문제도 일으킬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회사의 것과 자신의 것에 대한 선을 분명히 해야 하는 것처럼, 신앙인들도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이 분명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수많은 하나님의 것들 가운데 중요한 몇 가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주의 날”은 명칭처럼 주님의 날입니다(계1:10). 주일은 안식일과 의미는 다르지만 행동은 안식일처럼 지켜 나가야 합니다. 그 행동은 다음과 같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20:8-11). 많은 사람들이 안식일은 구약의 것으로, 예수님이 오신 후에 폐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을 폐하였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완전케 하였다고 하셨습니다(마5:17-18).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며(롬13:8), 온전하게 매는 띠입니다(골3:14).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책망하신 것은 안식일 자체가 잘 못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형식적으로 사랑 없이 안식일을 지켰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신앙인들이 지키는 주일은 일곱째 날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매 주 첫째 날입니다. 이 날 성령의 감동을 받는 날이며(계1:10), 자기 일을 쉬는 날입니다.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주의 날을 주님께 돌려드리며 주님을 위하여 거룩하게 지켜 나가야 합니다. 이날은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한 시간만 주의 날이 아니라 온종일이 주의 날입니다. 이 날 하루도 주님과 동행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이 다스리는 천국을 소망한다는 것은 자기모순입니다. 위독한 생명과 관련 된 일이 아니라면, 이 날은 온전히 주님께 드려야 하며, 사랑으로 지켜야 합니다. 그렇게 지키는 사람은 성령의 감동을 분명히 입게 됩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비롯되었으며, 은혜로 주어진 것이지만, 90%를 우리가 이용하고 10%만 하나님께로 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이 부족하여 달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보답하는 마음을 쓰게 하여 은혜를 더 풍성하게 주시기 위함입니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사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말3:8-9).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자기의 것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반면 십일조를 드린 사람에게는 다음과 같은 약속을 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고,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말3:10-12). 신앙인들은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하나님의 것인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며,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라고 말씀하셨으니, 우리 몸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롬12:1). 또한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해야 합니다(벧전2:9).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3:21-23). 이 말씀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으로 살아가면 만물이 다 우리의 것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에게, 만물도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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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17
  • [웨이크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기이히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마22:20-21). 유대인들의 집권 세력 가운데 하나인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인기가 점점 오르자 위기의식을 느낀 나머지 “어떻게 하여야 예수님을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마22:15) 서로 의논하였습니다. 왜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지, 예수님의 말씀이 성경에, 양심에 맞는지 살피지 않고 행여나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영광을 예수님께 빼앗길까 노심초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 자신이 한 말에 걸려 넘어지도록 올무를 놓은 것입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마22:16b). 그들의 말은 맞는 말이기는 하나, 그들이 중심에서 존경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존경하는 척 하면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들에 대한 경계심을 풀고 올무에 걸리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진달래는 봄에 피는 꽃인데 종종 계절을 숨긴 늦가을에도 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머잖아 계절이 발톱을 드러내 잔인하게 서리를 쏟아붓고 맙니다. 그러면 늦게 핀 꽃은 물론이거니와 아직 싱싱하게 붙어 있는 잎사귀까지도 바짝 마르고 맙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한 나중 질문 곧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라는 질문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위장술임이 드러나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만일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라.”고 말씀하시면 세금 내는 것을 반대하는 유대인들의 미움을 사는 대답일 것입니다. 반면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지 말라.”고 하면 로마 정부를 반대하는 사람으로 낙인찍힐 수 있는 대답이었습니다. 이 대답에도 저 대답에도 빠져나갈 수 없는 교묘한 질문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몰라도 너무 몰랐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그들의 말에 속을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의도를 뻔히 알아차리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그들 속을 환희 들여다보시지만, 대답을 피하시지 않고 모두에게 교훈할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22:21)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롬13:7). 여기 공세는 조세를 말하고, 국세는 관세를 말합니다.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어야 합니다. 국가가 마땅히 받아야 할 세금이라면 기꺼이 내야 합니다. 그래야 질서와 치안, 복지를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나 연보 등도 감사함으로 드려야 합니다. 간혹 십일조나 헌금을 구제로 대신 하거나, 구제에 쓸 돈을 십일조나 헌금으로 대신 드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십일조는 십일조이며 구제는 구제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이 혼돈되어서는 안 되듯, 연보나 구제는 드리는 대상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세금이나 십일조와 같은 금전과 관련된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신앙인들은 살아가면서 육신의 것과 성령의 것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육신과 성령은 서로 원수이며 대적의 관계이지 화평의 관계는 아닙니다(갈5:17). 육신의 것이 하나님의 것처럼 등장할 때가 있고 하나님의 것이 육신의 것으로 비난 받을 때가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않는 다른 불로 하나님께 분향하려 하다가 둘 모두 하나님의 불에 의하여 살라지고 말았습니다(레10:1~2). 하나님께 분향할 때는 하나님께서 하라고 명하신 ‘단의 불’로 드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가정에서 밥할 때 사용하는 불을 사용한 것입니다. 불은 열심을 상징합니다. 육신의 열심이 하나님께 드릴 열심을 대신한 것입니다. 신약에서 단은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제단에서 하나님께 드려졌기 때문입니다. 제단에 제물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는 증거로 불이 내려진 것처럼 십자가에 우리 자신을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불을 내려주십니다. 신앙인들의 열심은 십자가를 통과한 열심이어야 합니다. 육신에서 나오는 열심은 하나님이 주신 열심이 아니라 자기 열심입니다. 이런 마음은 은혜 받은 것 같지만 어느 순간 성질을 펄펄 내는 사람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령이 주신 열심은 속에서부터 나오는 능력입니다(골1:29).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마땅히 멸할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을 취하여 하나님께 제사하러 왔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결과 사울 왕가는 멸망을 초래하고 맙니다(삼상15:17~23). 아말렉은 육신을 상징합니다. 육신의 소욕에서 나오는 것은 선한 것이 없습니다. 육신은 다 멸해야 할 것인데 멸하지 않아서 결국 사울 역시 버림을 받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것과 육신의 것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습니까? 영이 예민한 사람은 이것을 분별할 수 있지만 대개는 하나님의 것과 육신의 것이 함께 묻어 나갑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다고 하지만 거기에는 자기 영광이 섞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은 선을 행하고도 혹시 섞여 있을지도 모를 ‘자기 의’를 보혈로 씻어야 합니다. 그것은 마치 목욕탕에 다녀온 사람이 집에 들어와서 다시 발을 씻는 것과 같습니다(요13:10). 우리 모두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분별할 수 있는 눈을 달라고 기도드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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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09
  • [웨이크 칼럼] 한인수 목사의 ‘요나의 표적’(마 12:38~42)
    표적의 헬라어는 “세메이온”이다 세메이온은 어떤 것을 가르치는 표지판이다. 성경에 나타나고 있는 모든 기사와 표적과 이적은 전부 세메이온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귀신을 쫒고, 병을 고치고, 풍랑 이는 바다를 잠잠하게 하고, 물로 포도주를 만들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등등의 모든 기사와 이적과 표적은 전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리키는 세메이온이다. 히브리어로는 “오트”다. 오트 역시 기호, 증거, 표, 표식을 가리키는 단어로서 구원의 표 또는 언약의 징표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으로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준 표가 바로 십자가를 상징하고 있는 언약의 징표인 “오트 하베리트”다. 그러므로 표적인 세메이온은 하나님의 영광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나타내는 십자가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으로 압축하신다. 요나는 구약의 역사적 인물이지만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그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삼일동안 있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상징한다.(요나서 1장) 그리고 물고기가 그를 토해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미한다.(요나서 2장) 그리고 요나서 3장은 큰 성 니느웨에 십자가의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뜻하는 복음이 전해지자 왕을 비롯해서 모든 생명이 있는 것들이 다 회개를 한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사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십이만여 명이 구원을 받는다. 12는 게마트리어로 “아들”을 상징한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할 때 천은 땅의 수이고 만은 땅에서 완성된 하늘의 수다, 그러므로 십이만 명이라는 뜻은 땅에서 회개하여 하늘에 앉힌바 되는 교회를 상징한다. 본문에서 표적을 구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한다. 왜 이들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하셨을까? 약4;4절은 이렇게 말한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세상은 늘 표적을 요구한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를 대보라고 요구한다. 그 말은 자신을 굴복시킬 만한 증거나 논증을 대보라는 자기기만 일뿐 그가 자기를 설득하면 예수를 믿겠다고 한 말이 아니다. 예수는 내가 믿겠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주가 되시는 주님이 내안에 찾아와서 나를 설복하실 때 비로소 믿을 수 있는 것이지 하나님을 아는 인간의 지식과 기적과 표적을 보고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다. 표적은 그 자체로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악하고 음란 세대에게 보여주신 요나의 표적은 요나서1,2,3장을 지식과 정서적 감정으로 이해가 되어졌다고 해서 믿음이나 구원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표적은 어디까지나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 가 그 목적지를 보라고 하는 싸인보드판이다. 그렇다면 요나의 표적은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있나? 마태복음9:2절에서 중풍 병을 고쳐주시면서 주님은 “네가 죄 사함을 받았다”고 선언하신다. 죄 사함은 요나의 표적이 가리키고 있는 세메이온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죄 사함”이다. 그러므로 “회개하라”고 주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셨다.(마4:17절) 오늘 본문41절에서도 예수님께서 회개를 천명하신다.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다고 하신다. 그러므로 회개하면 하나님의 영광과 그 아들의 십자가를 비로소 알게 된다. 그래서 사도들도 행2:38절에서 회개와 죄사함의 복음을 외친다. 요나서 3장은 요나의 전도를 듣고 왕부터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다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를 했다. 그러니 우리도 회개를 해야 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복음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인간은 악하고 음란한 존재이기에 결단코 회개할 수 없는 죄인이다. 아무리 하늘에서 불이 내려온다 해도 그것으로 믿고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권한이다. 그러니 아무리 회개를 하려고 해도 회개가 내안에서 이루어지지 않음에 우리는 날마다 절망해야 한다. 그것으로 나의 본성적 자아가 얼마나 양심에 화인 맞았는지 깨달아야한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가 전한 회개의 복음을 듣고 생명가진 모든 존재가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를 했다. 그런데 나에게는 왜 이런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가? 기적을 보지 못해서도 아니다. 성경을 읽지 않고 기도하지 않아서도 아니다. 약4:4절의 말씀대로 나는 지금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삶을 돌이켜보니 정말로 나는 세상과 벗이 되어 “세상 먼저 그리고 하나님 나중의 시간표”를 가지고 오늘을 살고 있다. 복음에 관한한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첫사랑의 뜨거움을 잃어버린 것은 어디서부터일까? 그래서 성경을 대하면 울고 싶을 뿐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회개시킬 자를 불러 회개의 역사가 있게 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말씀하신다. “너는 수고도 아니 하였고 재배도 아니 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버린 이 박 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오늘도 우리는 요나가 되어 절망 앞에서 하나님을 바라본다. 그렇군요! 주님 내가 악하고 음란한 놈이네요 요나가 하룻밤에 시들어 버린 박넝쿨을 아꼈듯이 나도 그렇게 세상에서 없어질 것들을 아꼈나 봅니다. 나도 주님 앞에서 회개하고 싶습니다. 사도바울이 주님의 십자가 외에는 다 배설물로 버렸다고 외침 같이 우리 모두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한주가 되기를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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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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