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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독연 칼럼] 강성률 목사의 ‘솔로몬에게 주신 기회’
    본문: 열왕기상 11장 7-25절 솔로몬이 마음을 돌이켜 여호와를 떠났다는 뜻은 말씀을 떠났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말씀으로 나타나심이기 때문입니다(삼상3:21). 다윗과 솔로몬의 차이는 크게 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다윗은 나단이나 갓과 같은 선지자와, 사독과 아비아달 같은 제사장을 가까이했지만, 솔로몬이 선지자나 제사장을 가까이하였다는 내용은 거의 보기 힘듭니다. 다윗이 선지자를 가까이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귀중히 여겼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제사장을 가까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씀은 우리 자신의 허물을 보게 하여 어린 양의 피, 곧 보혈공로를 힘입지 않을 수 없게 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아마도 자신의 지혜를 너무나 믿었는지 연설도, 기도도, 축복도 선지자나 제사장을 통하지 않고 자신이 모두 다 하였습니다. 그 마음속에는 모름지기 ‘내가 선지자나 제사장보다 나아’ 하는 마음이 깔려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말씀을 받아서 행동하지 않고 자신의 두뇌를 철저히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외교를 한다며 이방 여인과 연혼정치를 하더니 마침내 그들에게 빠지고 말았습니다. 마음이 여호와를 떠난 솔로몬에게 하나님께서는 두 번이나 나타나셔서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입니다. 대개 선지자를 통하여 회개를 독촉하셨는데 솔로몬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독촉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빠져나오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들과 이미 깊은 관계가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솔로몬, 비록 내가 당신의 아내가 되었어도 종교에 대해서만큼은 불간섭주의로 해요.” “솔로몬, 내가 고국을 떠나 얼마나 외로운지 몰라요. 신전 하나만 세워주세요. 그러면 그것으로 나의 외로움을 달랠 수 있을 것 같아요.” “솔로몬, 내가 섬기는 신을 섬기라고는 하지 않아요. 그래도 가끔씩 예배에는 동참해주셔야죠.” “솔로몬, 나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어찌 그리도 나의 신에게는 절을 하지 않습니까?” 이런 식으로 점점 강도가 세지는 여인들의 말을 한 발 한 발 들어주다가 수렁에 푹 빠져들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정에 얽히고설키는 관계가 되면 빠져나오기 힘듭니다. 그럴 때는 하나님께 합당하게 해결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가장 유익하다는 것을 새겨야 합니다. 회개할 기회를 주시면 그 기회를 붙잡아야 합니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넘겨준 후에도 회개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기한은 아버지가 축복하기 전까지입니다. 하지만 그는 장자의 명분을 넘겨준 일에 대하여 전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동생 야곱에게 축복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창27:27-29). 느부갓네살왕이 한 꿈을 꿉니다. 다니엘이 그 꿈을 해석하였습니다. 장차 느부갓네살왕이 소처럼 풀을 먹고 밤이슬에 젖을 터이니, 온 천하를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임을 믿고, 겸비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단4:26-27).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 왕에게 회개할 기간을 1년이나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회개하지 않았고, 열 두 달이 지난 후에 그 꿈대로 되고 말았습니다(단4:29).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경고를 주시고 바로 징계를 내리시는 분이 아니라 회개할 기간을 주십니다. 기회를 주실 때 빨리 붙잡아야 합니다. 에서나 사울왕, 느부갓네살왕은 기회를 붙잡지 않아 낭패를 당하였지만, 회개할 기회를 붙잡고 회생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간음하고 그것을 감추기 위하여 살인까지 저질렀던 다윗왕이 대표적입니다. 나단 선지자가 책망하였을 때 중심으로 회개하였습니다(삼하12:13). 그 결과 원수의 조롱을 받았지만, 죽음은 면하게 되었고 왕의 지위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가장 악한 왕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아합왕은 엘리야가 책망하였을 때 베옷을 입고 행보도 천천히 하여 겸비한 모양을 보였습니다(왕상21:27-29). 그러자 그에게 내릴 형벌이 아들 대로 옮겨졌습니다. 우리에게도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아직 재림하시지 않는 이유가 아무도 멸하지 않고 회개함에 이르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하였습니다(벧후3:9). 각자가 자신만 아는 죄들이 있을 것입니다. 양심을 통하여 “너 그렇게 하면 안 되지”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 빨리 회개해야 합니다. “너 그렇게 빈둥빈둥하면 안 되지” “너 빨리 술에서 벗어나야지.” “너, 언제까지 그 여자 가까이할 거야? 빨리 헤어져.” 등 각자에게 요구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돌아서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책망하시는 것과 같이 심판이 따라옵니다. 솔로몬에게 내린 심판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라를 빼앗아 신복에게 주리라는 말씀입니다(왕상11:11). 하지만 다윗과 한 약속 때문에, 솔로몬 당대에 그 일을 행하시지 않고 아들 대에서 하시겠다는 것과 한 지파를 남겨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직접 징벌도 내리셨습니다. 사방에 에돔사람 하닷과, 소바사람 르손과, 그의 신복 여로보암과 같은 대적을 일으킨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대로는 멸망 받아 마땅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진노를 내릴지언정 영혼까지 멸망시키시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순전히 예수님의 공로 때문입니다. 그러니 보답하는 마음으로 지금이 회개할 기회라고 생각하고, 행동을 바로 고쳐야 합니다. 자신과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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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02
  • [웨이크 칼럼] 강성률 목사의 ‘돌 위에 떨어지는 사람, 사람 위에 떨어지는 돌’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마21:44).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 말씀이 예수님의 구원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곧 이어지는 본문은 예수님의 심판에 대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첫째는 ‘돌 위에 떨어지는 사람’이며 둘째는 ‘사람 위에 떨어지는 돌’입니다. ‘돌 위에 떨어지는 사람’에서는 ‘사람이 돌을 공격하는 모습’이며 ‘사람 위에 떨어지는 돌’에서는 ‘돌이 사람을 공격하는 모습’입니다. 어떤 사람이 산에 올라갔습니다. 거기서 단단히 박혀있지만, 모양은 보잘것없는 바위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바위가 싫고 미워졌습니다. 게다가 돌부리에 치여 넘어지기까지 하였습니다. 화가 난 그는 바위를 깨부술 생각으로 바위 위 높이 솟은 봉우리로 올라갔습니다.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바위에 충격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더니 “바위야 부서져라” 외치면서 용감하게 뛰어내렸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물어보나 마나 바위를 부서뜨리기 위하여 뛰어내린 사람의 온몸이 깨어지고 뼈가 으스러져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바위를 깨뜨릴 생각으로 산꼭대기에서 뛰어내릴 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위와 같은 사람입니다. 돌은 반석이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을 대적하는 것은 산 위에 올라 깊이 박힌 바위를 깨뜨리려고 뛰어내리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곧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나 다를 바 없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찾아, 동방에서 별을 보고, 예루살렘으로 온 동방박사들에게 헤롯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마2:8).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은 아기 예수에게 인사하는 척 하면서 죽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동방박사들이 그의 말을 듣지 않고 고국으로 돌아가자, 화가 난 헤롯은 동방박사들이 말한 때를 기준으로 그 지경 안 두 살 아래 사내아이를 모두 죽이도록 하였습니다(마2:16). 물론 아기 예수는 주의 사자의 분부를 받고 애굽으로 피하여 죽음을 면하였습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헤롯은 그 후 B.C. 4년 3월경에 추하고 심한 질병에 걸려 고생하다가 죽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예수님이 B.C. 5년 말이나 B.C. 4년 초에 나신 것이 확실하다면 예수님 탄생 후 얼마 못 되어 죽은 것입니다. 바위를 깨뜨리려 하다가 자신이 깨어진 것입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 중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나일강 하수에 던지고, 여자 아이가 태어나면 살리라고 했습니다. 그들 나라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영원히 노예 삼아 민족을 파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모세를 보내셨고 그 모세를 통하여 애굽을 거의 초토화하다시피하고 그들 땅에서 나왔습니다. 이스라엘을 공격했던 애굽이 도리어 망할 직전까지 간 것입니다. 성경 ‘에스더’에서 아말렉 사람 하만은 모르드개로 인하여, 모르드개는 물론 모르드개가 속한 민족 유대인까지 모조리 멸하려고 계획하고 아하수에르 왕의 허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하만의 계획을 방관하실 분이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아하수에르 왕에게 하만의 가족과 아말렉을 진멸하도록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하나님 믿는 사람을 박해하는 사람은 스스로 죽음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다음은 ‘사람 위에 떨어진 돌’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꾸고 잊어버렸는데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에게 그 꿈과 해석을 알리셨습니다(다니엘 2장).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왕은 꿈에 큰 신상을 보았습니다. 머리는 정금으로 되어 있고, 가슴까지는 은으로 되어 있고, 허벅지까지는 동으로 되어 있으며 종아리는 철로 되어 있고 발은 얼마는 철이며, 얼마는 진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뜨인 돌을 던져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리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서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었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신상을 심판합니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 자리에 서 있는 제국들을 심판하십니다. 앗시리아 제국이 멸망했고, 바벨론 제국 역시 멸망하였습니다. 페르시아제국이 멸망하였고, 헬라제국 역시 멸망했습니다. 로마제국이 멸망하였고, 왕을 천황이라고 하며, 신의 위치에 올려놓았던 제국주의 일본 역시 멸망하였습니다. 근래에는 무신론이며 유물론 위에 세운 소련(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하고 높은 마음을 가루로 만드십니다. “너의 넘치는 노를 쏟아서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낱낱이 낮추되 곧 모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낮추며 악인을 그 처소에서 밟아서 그들을 함께 진토에 묻고 그 얼굴을 사서 어둑한 곳에 둘지니라. 그리하면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욥40:11-14). 교만은 하나님의 대적입니다(욥15:25).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예수님을 대적하거나 신앙인을 박해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멸을 택한 사람입니다. '사람 위에 떨어진 돌'은 국가든 개인이든 교만하여 하나님 자리에 오른 자들을 심판하신다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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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13
  • [웨이크 칼럼] 강성률 목사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건축자들의 버린 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본 일이 없느냐.”(마21:42). 왕명에 의하여 그 나라에서 가장 좋은 대리석을 골라 궁궐을 짓는 건축자가 있었습니다. 돕는 자가 끙끙거리며 돌 하나를 주워 왔습니다. 그러자 건축자는 버럭 화를 내면서 말하였습니다. “이봐. 지금 우리는 임금님의 전을 짓고 있는 거야. 여긴 아름답고 멋진 돌이어야 해. 이따위 돌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돌이야. 당장 버리도록 해” 그러자 돌을 지게에 지고 왔던 사람은 절벽이 보이는 곳에 그 돌을 내동댕이치고 말았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절벽 위에 간신히 걸쳐 있는 한 돌을 발견하였습니다. ‘오! 훌륭한 산 돌인걸. 이렇게 좋은 돌을 버리다니. 이 돌을 주춧돌로 삼아 언젠가 잠시 머무를지 모를 왕의 처소를 마련해야지’라고 하며 여러 해에 걸쳐 사람들을 동원하여 집을 지었습니다. 몇 년 후, 왕은 자기의 궁궐을 짓도록 명했던 건축자를 찾아갔습니다. 건축자는 매우 화려하고 빛나는 궁전을 임금님께 보였습니다. “음, 훌륭하군!” 임금님은 아주 흡족한 표정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표정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미세하지만 한쪽으로 기울고 있는 기둥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임금님이 준엄하게 건축가에게 말하였습니다. “이 집은 궁전이라고 할 수 없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겠구나.” 임금님은 몹시 실망한 표정을 지으면서 궁내로 들어왔습니다. 어느 날 신하 한 사람과 함께 잠행하였습니다. 어떤 한적한 곳에 이르자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비록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매우 견고해 보였고, 주변 경관과 잘 조화된 운치 있는 집이었습니다. 주춧돌과 기둥을 보았는데 어떤 바람이 불어도, 비가 억수로 쏟아져도 무너지지 않을 튼튼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남루한 차림의 선비로 변장한 임금님은 건물주에게 그 집에 관하여 물었습니다. 그러자 건물주는 자기가 임금님을 사모하는데 언젠가는 자신의 집에 머물 거로 생각하여 직접 설계하고 지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임금은 감격하였지만, 이내 모르는 척하고 궁궐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동행하였던 신하를 보내어 건물주를 데려오게 한 후 큰 포상과 함께, 많은 돈을 들여 그 집을 샀습니다. 이 글은 본문과 연결 지어 만들어 본 이야기입니다. 본문에 나온 건축자들은 그토록 훌륭한 산 돌을 왜 버렸을까요? 성경에서는 건축자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고전3:10). 여기 ‘지혜로운 건축자’로 표현된 것처럼 본문에서 나오는 건축자는 ‘지혜로운 자’입니다. 유대인들 가운데서 지혜로운 자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지혜로운 자가 아니라,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세상 지혜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의 관원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지혜로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고전3:19-20).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지혜로 예수님을 버렸고 자기 꾀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지금도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버립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자 예수님을 가까이 따르는 무리가 많았습니다. 그들은 마치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도 아끼지 않는 사람들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들에게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6:63)라고 말씀하시자 말씀에 걸려들고 말았습니다. 육신적인 것을 추구하며 살았던 그들에게 육은 무익하다는 말씀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열두 제자들 외에 예수님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하였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요6:67-68). 육신은 무익하다는 말씀에 모두가 예수님을 버리고 떠날 때 제자들은 거기 남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보이는 것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영적인 것을 추구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버리는 사람들은 영적인 것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육적인 것을 추구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적인 성공, 물질적인 복, 건강, 명예 영광 등 보이는 것을 추구하다가 그런 것들이 차지 않았을 때 실망하여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예수님을 버리지 않았던 이유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안 것은 혈육의 가르침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마16:17). 혈육의 가르침을 받아 살아가는 사람은 예수님을 버립니다. 혈육이란 친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혈과 육, 곧 육신을 의미합니다. 육신의 생각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예수님을 버리게 되지만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 살아가는 사람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마16:16). 이상을 통하여 유대인들의 관원들이 왜 예수님을 버렸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스스로 지혜롭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지 아니하고 혈과 육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는 악을 선으로 선을 악으로 분별하게 됩니다(사5:21).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모르는 것뿐입니다. 더욱 겸손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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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01
  • [웨이크 칼럼] 강성률 목사의 ‘점점 빛나는 의인의 길’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잠4:18). 가끔 동이 터 오르기 전에 제가 사는 곳에 있는 산에 올라 아침을 맞이합니다. 태양이 떠오르는 순간부터는 태양은 거침없이 어둠을 삼키고 새로운 세계를 펼칩니다. 그렇다면 태양은 지난 밤 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잠자고 있었을까요? 그 시간 동안 단절 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기나긴 밤에도 그들은 모태에 있는 어린 아이가 아무도 보지 않는 사이에 점점 자라고 있듯 끊임없이 아침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임계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리학에서 액체가 기체로 변화하기 직전 상태로 물질이 구조와 성질을 다른 상태로 변화할 때의 온도와 압력을 말합니다. 가령 물일 때는 온도는 섭씨 100도가 임계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00도가 되기 전까지는 계속 액체 상태로 있다고 해서 그 물은 기체로 변화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끊임없이 변화되고 있지만 표면에 드러나지 않을 뿐입니다. 일단 100도가 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변화의 속도가 달라집니다. 우리는 기도를 해도, 전도를 해도, 노력을 해도 진척이 없다고 생각하고 ‘나는 안 돼’ 하면서 포기할 때가 있습니다. 성공하는 자와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 가운데 하나가 임계점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습니다. 태양이 떠오르기 전 긴 시간동안 정체 되어 있는 듯 하지만 태양은 그 순간에도 끊임없이 왔던 곳으로 돌아가고 있듯이(전1:5), 우리의 기도와 수고와 땀이 헛된 듯 하지만 단지 보이지 않을 뿐 솥뚜껑 안에 있는 물은 기체가 되기 위하여 달궈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임계점이 되기 전까지는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의 활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무로 말하면 뿌리 영역이라고 할 수 있고, 신앙으로 말하면 가장 기본적인 것, 실제 삶에서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영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요셉은 비록 그가 형님들에 의하여 애굽에 노예로 팔려 나갔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가정 총무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보디발 아내의 모함으로 감옥 생활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꿈으로 그가 형님들을 다스리게 될 것을 약속 하셨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점점 꿈과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그러나 그가 30세 되던 해 바로의 꿈 해석으로 말미암아 그는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13년의 기간 자칫 슬픔과 탄식의 시간이 될 수 있었지만 그것은 헛된 시간이 아니라 임계점에 도달하기 전의 시간일 뿐이었습니다. 모세 역시 미디안 광야 40년 기간 그는 죽은 사람처럼 보였지만 양을 치면서 이스라엘 목자가 되는 훈련을 단단히 받았을 것입니다. 다윗 역시 사울에게 쫓겨다니는 날들이 기약 없어 보였지만 그 날들은 헛된 것이 아니라 그가 왕이 되기 위한 준비기간이었습니다. 그 기간을 다 채우자 그는 거침 없이 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신앙인 모두에게는 임계점이 있습니다. 그 점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우리는 죽은 자 처럼 지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그것을 박차고 영적인 성숙이 이루어질 때가 있습니다. 임계점은 거기서부터 가시적인 성공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고자하는 임계점이란 신앙의 성숙 영적인 성숙 속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도달하기 전까지 우리 모두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주님께 매달려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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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18
  • [국독연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하나님과 화합’
    “그런즉 너희 마음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와 화합하여, 완전케 하여, 오늘날과 같이 그 법도를 행하며 그 계명을 지킬지어다.”(왕상8:61).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친구가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지만(잠27:17),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방죽을 흐리게 하는 것처럼 연합이 잘못되면 함께 망하는 길로 가기도합니다. 우리는 지난 1980년대 구소련에 연합된 나라들의 종말을 보면서, 잘못된 연합의 해악을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심지어 우크라이나처럼 해악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나라가 있습니다. 복되게도 지금 우리 앞에는 하나님과 연합하는 길이 펼쳐 있습니다. 화합이란 화동하여 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앙인들의 평생소원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과 연합함’일 것입니다.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은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빌2:5).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품은 사람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은 비느하스입니다.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민25:10-11). 하나님께서는 비느하스에 대하여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과 같은 질투심’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연합하려면 주님과 같은 마음이어야 합니다. 주님과 같은 마음을 품은 사람은 주님이 보시는 대로 봅니다. 주님이 싫어하면 자신도 싫어하고, 주님이 기뻐하면 자신도 기뻐합니다. 주님이 아파하면 자신도 아파하고, 주님이 만족하면 자신도 만족합니다. 주님과 같은 마음을 품으려면 주의 영이신 성령님을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빌1:8). 이스라엘의 남북 시대에 북왕국 이스라엘의 초대왕 여로보암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왕상12:25-33).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가까이 사는 벧엘에 있는 선지자를 보내시지 않고 멀리 있는 유다 선지자를 보내셔서 금송아지에게 제사를 지내는 여로보암을 책망하도록 하셨습니다(왕상13). 왜 가까이 사는 벧엘에 있는 선지자를 사용하지 않았을까요? 그가 비록 선지자라는 명칭은 있었지만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느끼지 않았고, 하나님과 같이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쓰신 이유는 하나님과 마음이 합하였기 때문입니다(행13:22). 사울은 하나님과 전혀 다른 마음을 썼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대로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게 한 것입니다(삼상15:22-23). 성경에서 에녹은 하나님과 300년간 동행하였습니다(창5:22).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품은 비느하스에게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나의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그와 그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민25:12-13). 평강의 언약을 주신 것입니다.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을 주었습니다. 다윗도 하나님께 합한 마음을 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이스라엘 왕으로 삼아서, 다윗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행하였던 히스기야왕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습니다(왕하18:6-7).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품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 안에 거하여야 합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15:5). 우리가 주님 안에 있을 때 주님과 연합하게 됩니다. 주님 안에 들어가려면 주님의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요15:10). 지킨다는 것은 순종을 의미하며, 순종은 믿음을 전제로 합니다(롬1:5).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 순종하는 사람은 주님 안에 거하게 되며, 주님 또한 순종하는 사람 안에 거하십니다. 하나님과 연합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믿어 거듭났다고 하여도 여전히 믿지 않는 사람들과 같은 마음이라면 아직 마음이 새로워지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들의 영은 새로워졌지만 마음까지는 새로워지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몸을 드려야 합니다(롬12:1-2). 하나님께서는 몸 드리는 사람의 마음을 새롭게 변화시켜 주십니다. 몸 드리는 것은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롬6:16). 하나님은 몸 드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청컨대 너는 그 입에서 교훈을 받고 그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고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버리면 다시 흥하리라.”(욥22:21-23).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서는 교훈을 받고 말씀을 마음에 두며,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버려야 합니다. 보배를 진토에 버려야 하고, 하나님보다 더 귀중하게 여기는 것들, 우상을 멀리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연합” “예수님과 하나 됨”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차오르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연합한 성도가 되어 예수님과 사귀고 예수님의 기쁨을 함께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요일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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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04
  • [국독연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잘못된 사랑’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10:1-3). 어떤 할머니가 젊었을 때 남편하고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이 분의 남편은 몸이 약해 직장을 쉬고 있었고, 대신 아내가 나가서 일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보통 가정들과는 다르게 남편이 가정주부가 된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몹시 사랑했습니다. 아내가 밖에서 일하는 것이 안타까웠던지 남편은 언제부터인가 가물치를 푹 고아서 즙을 만들어 아내가 출근하기 전에 한 잔씩 주었습니다. 오랫동안 아내는 그렇게 한 잔씩 마시며 다녔는데, 하루는 가물치 맛이 이상하여 ‘양념을 첨가했나 보다’ 하고 지나쳤습니다. 그 맛도 며칠 동안 계속되다 보니 적응이 되었습니다. 아내는 이렇게 자신을 생각해주는 남편이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얼마간 마신 후에 남편이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요 며칠 마신 것이 무엇인지 알아요?” 그러자 아내가 대답하였습니다. “가물치라고 했잖아요?” 남편이 다시 말하였습니다. “음........실은 그것 구렁이지요.” 깜짝 놀란 아내는 기겁하며 “뭐라고요? 그게 사실이란 말에요?” 하며 재차 물었습니다.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하자 모두 게워내고 싶었지만 이미 흡수된 상태라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그 어르신의 남편은 아내를 무척 사랑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잘못된 사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내의 뜻이 무엇인지 아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였기 때문입니다. 구렁이를 끔찍이 싫어하는 아내는 구렁이의 몸이 자신의 몸 조직 일부분이 되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꽤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입니다. 기독교의 정신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4:16). 사랑은 가장 중요한 계명이며(마22:37-40), 사랑은 온전하게 매는 띠입니다(골3:14). 하지만 사랑에는 지식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지식 없는 사랑은 잘못된 열심이요, 정욕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10:1-3). 신약 당시에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은 있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지 않았고, 자신이 옳게 여기는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려 하였습니다. 바울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회심하기 전까지 잘못된 열심 때문에 핍박자가 되었고 훼방자가 되었고 폭행자가 되었습니다(딤전1:13).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지식을 따르지 않은 결과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간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행13:36). 참으로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상대방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찾아서 행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관점이 자신이 아니라 상대방이기 때문입니다. 장모를 사랑하는 사위라면 자신이 좋아하는 돼지고기를 사서 자신만 실컷 먹고 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장모가 쇠고기를 좋아한다면 쇠고기를 들고 갈 것입니다. 굴비를 좋아한다면 굴비를 사서 갈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지를 구체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말씀을 알지 못하면 어르신의 남편과 같은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을 섬기니까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의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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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11
  • [국독연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시기와 때’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니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유력자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라고 식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기능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라.”(전9:11). 올 봄에 옥상에 식물들을 심었습니다. 상추와 가지와 고추는 직접 모종을 하였고, 들깨와 백일홍 맨드라미는 작년에 꽃이 피고 열매가 맺은 후 화분에 떨어진 씨가 새싹이 돋고 자라서 핀 꽃과 잎들입니다. 봄에 가장 늦게 싹이 돋고, 늦게 자라고, 늦게 꽃이 핀 것은 맨드라미입니다. 다른 식물들이 앞다투어 새싹을 돋고 열매를 맺어갈 때, 맨드라미는 싹 돋을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작년에도 경험한 바여서 늦게라도 나오리라 생각은 하였지만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하나도 안 돋을 수 있다는 생각도 간혹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역전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가장 늦게 세미하게 싹이 돋더니 계속 위로 솟아오르면서 제일 큰 꽃나무가 되었습니다. 꽃 역시 두 손바닥만 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전도서는 솔로몬이 인생 막바지에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와 사람들이 기뻐하는 모든 부귀영화를 다 누리고 느낀 바를 쓴 책입니다. 내린 결론 가운데 하나는 빠른 경주자라고 해서 그보다 늦은 경주자보다 우월감을 가져서는 안 되며, 다른 사람보다 많이 처진다고 해서 열등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이 시기와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각자의 때와 시기가 있는데 이를 무시하면 엉뚱한 일을 저지르거나 시기를 놓치고 맙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굳게 믿지 못하고, 여종 하갈을 통하여 대를 이을 아들을 낳은 결과,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중동 분쟁의 씨앗이 되고 말았습니다(창16:15-16). 사울은 사무엘이 올 때까지 이레를 충분히 채우지 못하여 제사장만 드릴 수 있는 번제를 자신이 직접 드린 결과 그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는 사무엘의 경고를 들어야 했습니다(삼상13:14). 둘 모두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기다리지 못한 결과입니다. 반면 부주의 방심하다가 기회를 놓친 예도 있습니다. 에서는 사냥놀이에 빠져서 동생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빼앗기더니(창25:33), 아버지의 축복까지 도둑맞고 말았습니다(창27:30). 그가 울면서 후회를 하였지만 회개할 기회를 놓쳤습니다. 등을 가진 열 처녀 가운데 미련한 다섯 처녀는 기름을 제때 준비하지 않은 결과 신랑을 맞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기름을 사 왔을 때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신랑을 맞이하여 이미 문이 닫힌 후였습니다(마25:10). 노아의 방주 때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노아는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큰 홍수를 내려 사람들을 땅과 함께 모두 멸망시킨다.’라고 전파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가장 친했던 친구들조차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는 방주를 예비하는 데 참여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조차도 자신들이 참여한 방주에 들어가지 못하고 홍수에 의하여 멸망 당하고 말았습니다. 허우적거리며 애원할 때는 이미 문이 굳게 닫힌 후였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합2:3). 정한 때가 있습니다. 그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때를 흘려보내서도 안 됩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에 집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다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24:42-44). 깨어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깨어 있는 것은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고전15:34). 깨어 있는 것은 근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벧전5:8). 깨어 있는 것은 기도와 감사를 의미합니다(골4:2). 이렇게 깨어 있는 사람은 조급한 자를 기다리는 자로 만들고 나태한 자를 근신하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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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27
  • [국독연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양보할 때와 해서는 안 될 때’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13:9). 얼마 전 경의선 숲길을 산책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제가 가는 길목에 어떤 어르신과, 이제 40대 정도 되는 남성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다투고 있었습니다. 젊은 사람이 말하였습니다. “당신 같은 사람 때문에 공원 문화가 망가지는 거야” 그러자 어르신이 때릴 듯이 덤비며 말하였습니다. “뭐라고? 내가 할 소리를 네가 하는구나.” 그러자 젊은 남성의 부인인 듯한 여성이 젊은 남성을 잡아끌며 사태를 수습하였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공원길을 마주하며 걷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팔이 닿을 만큼 가까이 왔을 때, 그들은 서로 길을 양보하지 않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서로가 얼마든지 피해갈 수 있는 길인데도 자존심 때문에 양보하지 않다가 그런 사고가 난 것입니다. 다른 분들도 그러하겠지만 이런 경우 저는 멀리서부터 아예 한쪽으로 비켜섭니다. 좁은 골목에서의 운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피할 길이 있다면 먼저 피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달고 사는 제가 그런 일들로 굳이 사람들과 마찰을 빚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그가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부터 조카 롯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들은 서로가 자신의 소유를 지니고 있으면서 한 집안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한 가족 두 세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가난할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서로의 소유가 많아지자 아브라함의 종과 롯의 종 사이에 소유권 분쟁이 있었습니다. 때로는 큰 소리까지 나갔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조카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13:9). 당연히 롯은 이렇게 말해야 했습니다. “삼촌, 제가 삼촌을 떠나다니요, 그럴 수 없습니다. 제가 우리 목자들에게 단단히 일러두겠습니다.” 그러나 롯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겼습니다. 그곳은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도 같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선택권을 롯에게 양보하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곳을 네게 주리라.”(창13:14b-17). 자신의 유익을 따라 먼저 선택한 롯은 고작 자신이 선택한 곳과 그 주변에 머물 수밖에 없었지만, 양보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그가 바라보는 모든 것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양보한 사람에게 넓은 곳을 허락하십니다. 우물들을 블레셋 사람들에게 양보한 이삭에게 장소가 넓음이라는 뜻의 르호봇을 주셨던 것과 같습니다(창26:22). 하지만 신앙인들이 결코 양보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될 것들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배필을 위하여 충성된 종 엘리에셀을 하란으로 보낼 때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엘리에셀에게 그의 고향, 그의 족속에게서 이삭의 아내 택할 것을 구하였습니다. 그러자 종이 말하였습니다. “여자가 나를 좇아 이 땅으로 오고자 아니 하거든 내가 주인의 아들을 주인의 나오신 땅으로 인도하여 돌아가리이까?”(창24:5).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습니다. “삼가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말라.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본토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 만일 여자가 너를 좇아 오고자 아니하면 나의 이 맹세가 너와 상관이 없나니 오직 내 아들을 데리고 그리로 가지 말지니라.”(창24:6b-8). 종이 ‘만일 여인이 가나안 땅으로 가려 하지 않을 때는 이삭을 데리고 돌아가야 하느냐’고 묻자 아브라함은 깜짝 놀라며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이유로는 ‘하늘의 하나님께서 그를 그 고향과 본토에서 떠나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에게만 적용시키는 것이 아니라, 아들에게까지 자기에 관한 말씀을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이처럼 결코 양보해서는 안 될 부분 첫째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삭의 아들 ‘에서’는 야곱보다 더 사내답고 너그러운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양보해서는 안 될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판 결과 하나님의 자녀의 명분이 야곱에게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후회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히12:16-17). 신앙인들은 범사에 관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며, 본질적이지 않는 것이라면 양보하는 것이 덕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의 명분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자녀의 명분이 가져오는 은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몇 가지만 나열한다면 하나님 나라의 상속(골1:12, 히6:17)과 기도(마7:11)와, 찬미(눅10:19)입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며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3:17-18). 여기서도 화평과 관용이 중요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화평의 순서는 성결 다음이며, 관용 역시 성결과 화평 다음입니다. 신앙인들이 화평과 관용을 핑계로, 성결을 양보하는 것 또한 결코 안 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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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12
  • [국독연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내 몸의 브레이크’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얼마 전 심방을 마치고 예배당으로 가는 골목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다세대 주택 담을 지나려고 하는데 응달진 구석에 한 분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얼굴은 피범벅이 되어 있었고, 일어나려고 몸부림쳤지만 일어날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자전거에 그분의 다리가 엉켜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르신이 넘어졌던 곳 맞은편은 승용차 한 대 겨우 다닐 수 있는 좁지만 가파른 골목이었습니다. 심방을 함께 하셨던 분들은 구급차를 부르고, 저는 자전거에 엉켜있는 부분을 우선 풀어드렸습니다. 알고 보니 자전거 브레이크가 갑자기 고장 난 바람에 내리막에서 전속으로 달려와 그대로 담벼락과 부딪혔다고 합니다. 그나마 일찍 우리 눈에 띄어서 과다출혈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운행 중인 차들에 있어서, 브레이크 고장만큼 사고 위험이 큰 것도 드물 것입니다. 제어되지 않는 자전거, 제어되지 않는 오토바이, 제어되지 않는 승용차는 아무리 값진 것이라 할지라도 사용할 수 없습니다. 대부분은 고칠 수 있지만 만일 고칠 수 없는 차가 있다면 그 차는 존재 자체가 화근이 되는 것들입니다. 과감히 버려야 할 것입니다. 차의 브레이크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의 브레이크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왕 솔로몬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16:32). 자신의 마음을 잘 제어 하는 사람은, 성벽에 올라가 적군을 쫓아내고 성을 차지한 용사보다 낫다는 의미입니다. 그만큼 자기 마음을 제어하기가 어렵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다윗이 성령 충만할 때는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무서워 벌벌 떠는 블레셋의 영웅 골리앗을 죽였습니다(삼상17:49-51). 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 그가 왕이 된 후에,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한 후 그것을 감추기 위하여 요압에게 충신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게 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삼하11:1-27). 그 결과 다윗의 가정은 물론 이스라엘 전체에 어둠이 덮쳐 자신은 한때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다니는 치욕을 겪었고, 총 네 명의 자녀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실 때는 싸움에서 그를 이길 자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방심하여 정욕이라는 행인(삼하12:4)을 제어하지 못하였을 때 참혹한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면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까지 어렵게 만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자신을 제어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성령을 따라 살아갈 때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됩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마귀를 다스리고 우리를 다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들은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몇 가지만 들어보겠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은사를 주시며, 보호하시며, 인도하시고, 책망하시며, 위로해주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과 마귀를 제어해주시는 브레이크 역할까지 해주십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험이 오면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고 번번이 무너지고 맙니다. 이유는 방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라고 말합니다(벧전5:8-9). 김현봉 목사님은 자주 “방심할 때가 죄짓는 때라”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방심 후에 죄 짓는다는 것이 아니라, 방심하는 순간 죄짓는다는 뜻으로 방심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방심의 반대는 근신인데 솔로몬은 “내 아들아 완전한 지혜와 근신을 지키고….”라고 하면서 근신이 지혜 가운데 하나임을 강조합니다. 방심하면 일이 생길 때 주님을 부르짖을 생각도 못 하고 사건에 자신이 빨려 들어가고 맙니다. 하지만 근신하고 깨어 있으면 유혹이 역사할 때 주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주님을 바라보면 위로부터 성령의 능력이 임하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자신과 마귀를 제어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부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부요하다는 뜻은 넉넉히 이길 힘을 받는다는 뜻입니다(롬10:12). 아무리 강력한 마귀 세력이 있다 해도 우리 주님보다는 강하지 않습니다. 근신하여, 죄가 우리를 유혹할 때, 마음으로부터 주님을 부르짖어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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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06
  • [국독연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마21:4-5) 예수님께 대한 아버지의 뜻은 이미 창세기에서부터 정해져 있었습니다(창3:15). 모든 성경이 예수님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5:39). 예수님은 임의대로 사시지 않고, 아버지께서 이미 정해 놓으신 그 길을 가셨습니다. 본문 역시 예수님의 대속 여정 가운데 정해진 내용으로 주님은 아버지께 순종하여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정하신 대로 세상에 오셨고, 예정대로 병자들을 고치셨으며, 예정대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임의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대속사업을 종종 제자들에게 알리셨습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마16:21). 그 외에 갈릴리에 모였을 때에 말씀하셨으며(마17:22-23),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또 말씀하셨습니다(마20:18-19). 이미 아버지께서 정해 놓으신 길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 중 한 사람이 그를 팔아넘길 것을 예고하시면서 그것 역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요13:18,21). 이처럼 예수님은 자신의 기쁨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사셨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신앙인들은 어떠할까요? 예수님은 부활하신 주일 저녁때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처럼 예수님도 제자들을 보내셨고, 오늘날 신앙인들을 보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도들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듯이 정해진 길이 있고 또 순간, 순간 보내심을 받습니다. 형님 속이고, 아버지 속이고 에서의 보복이 두려워 도저히 가나안 땅에서 살 수 없었던 야곱은 형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가는 도중에 벧엘에서 노숙하게 되었습니다. 꿈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28:15).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욥도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 욥에게도 자신이 가는 길이 있었습니다. 선지자들도 사역의 목표와 방향성은 대개 비슷하였지만 살아가는 방식에 있어서는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아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너는 이 땅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며 자녀를 두지 말지니라.”(렘16:2). 반면에 이사야 선지자는 아내를 두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 아들의 이름을 하나님께서 친히 정하여 준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내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 하라. 이는 이 아이가 내 아빠, 내 엄마 할 줄 알기 전에 다메섹의 재물과 사마리아의 노략물이 앗수르왕 앞에 옮긴바 될 것임이니라.”(사8:3).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길과 삶의 양식까지도 정해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같이 예수님도 사도들에게 각자의 정하신 곳으로 보내셨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으로 베드로와 바울을 들 수 있습니다.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갈2:7-8). 제자들을 보내셨던 예수님께서 지금 신앙인 모두의 길을 정해 놓고 보내십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만 보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먼저는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가 보내신 곳입니다. 보냄 받은 사람은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부름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골3:23-24). 그러므로 신앙인들은 보내신 이의 뜻을 잘 헤아려서 나타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성경은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잠25:2)라고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너는 어디로 가서 무슨 일을 하라.”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위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각자의 길을 숨기시는데 우리가 더듬어 찾아야 합니다. 지각을 사용해서 찾아야 합니다. 기도로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우리의 길을 알리시는데 지체하지 않습니다(렘10:23). 기억하십시오.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정하신 길로 보내신 것처럼 예수님도 우리를 보내셨고 또 보내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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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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