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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김인수 박사(1943년-)
    섭리사관에 바탕한 ‘한국기독교 역사’ 저술 교회와 국가 관계… 교회일치와 에큐메니칼 운동에 깊은 관심 최근에 간행된 장로회신학대학교 교회사 교수 임희국 박사(2021.2. 은퇴) 은퇴기념논문집에서 동 대학의 서원모 박사는 김인수에 대하여 그는 역사신학이나 교리사 보다는 교회사 영역에서 장신신학(長神神學)을 발전시켰다고 평가하였다. 서원모는 같은 글에서 김인수는 이형기와 같은 시기에 가르치고 연구하면서 장신신학에서 섭리사관 혹은 섭리적 역사이해를 제시하였고, 한국교회사의 여러 분야에서 장신신학을 확장시켰다. 또한 김인수는 한걸음 더 나이가 아시아교회사와 남미교회사를 번역하여 한국에 소개함으로써 장신신학의 영역을 더욱 확장시켰다고 했다. 김인수(金仁洙)는 이형기 교수와 연구 주제나 방법이 상당히 다르지만, 한국교회 안에서 교회일치와 에큐메니칼 운동을 연구하고 비서구권 교회사 연구에 관심을 두었다는 점에서 이형기 교수의 문제 의식을 공유하고 있다고 보여진다(같은 책 p.82). 김인수의 섭리사관 김인수는 한남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장로회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마친 후,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에서 본격적인 교회사 연구에 관심을 가졌다. 그 후 해외로 나가 메코믹신학대학원을 거쳐 듀북신학대학원에서 신학 석사(S.T.M) 학위를 받고, 버지니아에 있는 유니온신학대학원에서 철학 박사(Ph.D.) 학위를 마치고 귀국하여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교회사와 역사신학을 교수하다가 은퇴했다. 은퇴 후 지금은 통합측 교단 총회에서 설립한 미국 LA 오렌지 카운티의 미주장신대학교 제5대 총장으로 부임하여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그가 쓴 주 저서로는 <한국기독교회의 역사>(2003), <일제하의 한국교회 박해사>(2006), <예수의 양 주기철>(2007), <인튼 의사의 선교 편지>(2013), <섭리사관의 창에서 본 한국교회의 역사>(2017)가 있고, 한국교회사를 영문으로 쓴 <History of christianity>(2017)가 있다. 그의 <한국기독교의 역사>는 1994년의 개론서를 확대 개편 보완한 저서로 김인수는 백낙준의 선교사관, 민경배의 민족사관, 이만열의 민족교회사관, 주재용의 민중사관을 뛰어 넘어 일반적으로 알려진 구속사관 혹은 섭리사관의 입장에서 한국기독교의 역사를 기술하였다고 천명하고 있다. 하지만 김인수는 구속사관이나 섭리사관의 구체적인 내용이나 방법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또 그가 실재적인 역사 서술에서 구속사관을 어떻게 적용했는지 파악하기도 쉽지 않다. 다만 결론 부분에서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다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예를 들면 한국교회사에 대하여 하나님의 섭리로 우리 민족이 기독교 복음을 받게 된 것이 벌써 2세기가 지나가고 있다고 진술한 후, 기적과 같은 교회 성장에 관해서는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사랑하셔서 수천년동안 참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거짓된 신을 섬기면서 어두움에 살아오던 우리 민족에게 복음을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가 살아계신 참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소유할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기인한 것임을 고백할 수 밖에 없다(김인수, 한국기독교회의 역사, 머릿말)고 했다.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에 관심 기울여 역사신학자와 교회사가라면 당연히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고 고백할 것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서술이나 평가에서는 하나님의 섭리를 말하기 어려울 때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역사는 사료(史料)에 기초해야 하고, 한 사건이나 인물의 활동 또한 복합적이고 가변적인 요인들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의 섭리라는 표현이 자칫하면 특정 당파나 집단의 관점과 입장을 초월적으로 정당화 하는 위험을 내포할 수 있기도 하다. 김인수가 자기의 주저 속에 교회사 전체를 회고하고 미래를 전망하면서 하나님의 섭리를 말하고 있는 것은 적절한 표현이라 보인다. 이러한 시도는 엄밀한 의미에서 사관(史觀)인 섭리사관이란 말을 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섭리적 관점이라 보아야 하겠다. 그는 섭리사관을 제시하고 역사신학과 교회사 연구와 서술에 있어서 또 하나의 기초를 놓았다고 할 것이다. 그의 저서 <한국기독교의 역사>는 경교(景敎; Nestorianism)의 동양선교에서부터 남북 교회의 만남까지 한국교회사를 객관적으로 다루고 있다. 원래 신학생들을 가르치며 강의에 필요한 교재로 집필하여서 특정사관에 의해서 저자의 주장을 하기보다 한국교회 역사를 통시적으로 아우르는 사안을 중심으로 소개하며 기술함으로 저자의 관점에서 비판 및 평가를 곁들이고 있음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내용은 이야기체로 정보제공과 독자들에게 친화성을 제공하고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하겠다. 김인수는 특별히 교회와 국가 관계에 관심이 있는 것 같다. 그는 교회와 민족주의 관계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Union Theological Seminary, 1993). 교회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와 관계(교회와 신학 vol.27), 일제하 지도자들의 나라사랑 변절(교회와 신학 vol.18), 전쟁과 평화(교회와 신학 vol.53), 한국교회의 정치 참여(교회와 신학 vol.58) 등, 또 재한 선교사들의 사료 번역 작업에 관심을 가지고 마펫 선교 일기(장신대 2000), 언더우드 선교 편지(장신대 2002), 편하설 선교 일기(쿰란출판사 2009), 배위량 선교 일기(쿰란출판사 2004) 등이 있다. 교단의 여성안수 문제에 공헌 김인수는 강의실에서는 제자들에게 정직과 성실, 특히 순교신앙을 강조하였다(정신대 서원모 증언). 더 나아가서 언더우드나 김인서와 같이 초기 선교사들과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교회일치운동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장신신학이 에큐메니즘에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에게 또 하나 특이한 연구 주제로는 여성안수 문제를 다루는데 앞장 선 것이다. 그는 교회사적 고찰을 통하여 예장 통합 총회에서 여성안수를 이끌어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김인수의 교회일치와 여성에 대한 관심은 그의 제자들에게 이어지고 있다. 그의 또 다른 교단과 장신대에 끼친 공헌은 장로회신학대학교 100년사를 집필했다는데 있다. 개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본교의 역사를 잘 압축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요 사료들을 일목요연하게 분석하고 정리하여 장신대의 역사적 신학적 방향을 정리했다(2002. 장신대출판부). 김인수의 또 하나의 한국교회 공헌은 아시아교회사와 남아메리카교회사 영역으로 넓혔다는데 있다. 한국교회 역사 속에 아시아교회의 역사는 생소하다 못해 연구의 불모지요 관심 밖의 이야기였다. 이 방면에 처음 언급한 학자로는 아시아교회사란 이름으로 한신대학교의 이장식과 장신대의 김광수가 있고, 김인수가 사무엘 마펫이 쓴 아시아교회사 두 권을 번역하므로 본격적인 아시아교회 역사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하였고, 이 분야에서 관심을 환기시키는 선구자의 사명을 다 하였다. 김인수의 교회사학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아직 미결된 채로 남아 있는 한국교회의 역사를 한 차원 더 높여 기초를 놓아야 할 책무가 있다고 보여진다.
    • 칼럼
    • 박정규 목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2021-06-15
  • [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매산 김양선 목사
    매산 김양선 목사와 숭실대 기독교박물관 한국교회 해방 10년사 등 다양한 교회사 관련 자료도 남겨 매산 김양선 목사 매산 김양선( 梅山 金良善) 목사는 1907년 2월 22일 평북 의주군 피현면 상두동에서 김관근 목사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913년 1월 26일에 부친이 별세하고, 양선은 1922년 중원학교, 1926년 선천에 있는 신성중학교를 졸업하고 숭실전문학교 문과로 진학하였고, 그 사이 1928년 11월 광주학생 사건으로 투옥되어 1년 6개월의 감옥살이 이후, 1935년에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1938년 33회로 졸업해 목사가 되었다. 그리고 1945년 해방되던 해 미 군정의 배려로 서울 남산 조선신궁 터에 적산 가옥을 이양 받아 한국 최초의 이름도 생소한 기독교박물관을 개원하였다. 매산의 가문은 한국 제1세대 기독교 가문이다. 한국 장로교 최초 7인 목사 중 백홍준 목사가 매산의 외조부였고, 아버지 김관근 목사에 이어 자신이 목사가 되었으니 3대 목사 가정을 이루었다. 그가 기독교박물관을 생각한 것도 외할아버지와 선친이 지녔던 한국교회 초기 성경과 찬송가 및 각종 기독교 문헌을 자연스럽게 접했던 데 연유하고 있다.(한국기독교대사전, 박용규 편, 1978. 성은출판사 p.175 이하). 한국교회사 관련 자료 수집 및 연구 1945년 해방이 되자, 매산은 대학에 강사로 출강하며 고고학을 가르치고, 신학교에서는 한국교회사를 가르치면서 교회를 맡아 섬기고 있었다. 그의 주된 관심은 교회 목회보다 고고학과 국학연구, 한국교회 관련 유물 및 문헌 자료의 귀중성과 수집에 있었다. 그의 이런 노력은 24세 때부터 역사의식에 눈을 떠 관심을 두기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가 한국교회사 관련 자료 수집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숭실전문학교 3학년 때 양주동 박사의 서재에서 국문학에 대한 고서(古書)들을 보고서였다. 국문학과 영문학의 대가였던 양주동 박사가 선조들의 얼이 담긴 노래를 살려 민족의 얼을 찾아내고 국문학 연구에 전력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자신은 한국교회사와 관련된 자료들을 모아 연구하고 정리해 보아야겠다는 역사의식을 가지게 되었다고 후일 고백한 적이 있다. “나는 한국교회 최초의 신앙가정에서 태어나서 손으로 만져 보고 귀로 들은 이야기들을 기록하고 정리해 연구해야겠다는 자의식이 싹튼 것이다. 내 주위에 흩어져 있고 널려져 있는 초기 자료들을 모으고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 기독교박물관의 정신적 신앙적 뿌리가 되었다. 여름방학 때에 고향에 내려가서는 외할아버지 백홍준 조사의 집에 가서 여기저기 널려져 있는 문서들과 서책들을 모아 깨끗하게 정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외할아버지가 만주에 있는 존 로스 목사로부터 전해 받았던 성경과 기독교 관계 문헌과 아버지가 소유하고 있던 문헌들을 모아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외할아버지 백홍준이 로스 선교사와 교제하면서 취득한 성경과 찬송가와 신문 등 중국 문헌까지 정리해보니 500여 종이나 되었다. 이렇게 하고 나니 속으로 흐뭇하고 기쁘기 그지 없었다. 이렇게 시작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을 고고학 자료들까지 수집하다 보니 8.15 해방 당시까지 약 5000여 종이나 되었다.” (같은 책 p.176 참조). 김 목사는 자료를 모으고 수집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모은 자료를 토대로 <한국선교 80년사><한국교회 해방 10년사><한국기독교 연구><한국성서번역사><간추린 한국교회사><장로교회 여전도대회 소사><이수정과 성서번역사><세계선교사><6·25 사변과 기독교 문화재의 수난><고고학 개론><한국기독교사 연구> 등 여러 종의 한국교회사 연구 저서를 남겼다. 이들 저서 중 한국교회 해방 10년사는 간행 직후 총회적인 비난이 쇄도해 고난을 겪기도 하였다. 왜냐면 해방 10년사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생존해 있다보니 사학자의 평가에 피해의식이 발로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총회종교교육부장 안광국 목사는 이 책을 출판한 후 책임론과 구설수에 휘말려 모든 책임을 지고 사퇴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저자 김양선은 한 발자욱도 물러서지 아니하고 사가(史家)의 소신을 끝까지 지켰다. 매산이 한국교회에 남긴 가장 큰 선물은 기독교박물관 오늘날 한국교회사를 연구하는 후학들은 1950년대의 한국교회 분열사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당시에 발표된 성명서 내용과 김양선 목사의 평가를 외면하고서는 이후 예장합동과 통합 뿐만 아니라 고려파와 기장파의 분열 요인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필자의 생각으로도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김 목사가 원래 계확했던 1955년 이후, 1960-1970년대의 한국교회 역사를 끝내 정리하지 못하고 1963년 10월 11일 작고 한 것이다. 또 한 가지 매산 김양선 목사의 한국교회사적 공적은 위에 언급한 저서들만이 아니라, 현재 숭실대학교 부설 <한국기독교박물관> 설립의 실체가 바로 매산의 유산이요, 한국교회 과거를 오롯이 담고 있는 한국기독교의 산 역사를 눈으로 보고 배울 수 있는 유물과 문헌과 아울러 매산의 연구 범위가 조선조의 역사 문헌 및 고고학과 국학관계와 과학기구들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박물관의 핵심 콘텐츠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매산의 꿈이 바로 이 기독교박물관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독교박물관이 숭실대학교에 설립되기 전(1967. 10.10 기증)에 실은 국학자료가 이미 신촌의 연세대학교로 많은 양이 옮겨가 있었다. 숭실대와 함께 연세대도 기독교박물관 설립에 관심이 있어 매산과 협의한 결과 현재의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에 있는 유물이 연세대로 가기로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김 목사가 연세대에 내세운 조건이 세 가지였다. 첫째, 캠퍼스 내에 박물관 건물을 먼저 세워줄 것, 둘째, 내가 교수 할 수 있도록 배려할 것, 셋째, 자신의 생존시 박물관장으로 임명해 줄 것이었다. 그런데 연세대 측에서 박물관 건축에 착수하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었다. 이유는 당시(1960년대) 연세대 측은 박물관 건물 건축보다 이공대 건물 신축이 급한 때였기 때문이었다. 학교 측이 이공대 건물 신축 후 박물관을 짓겠다고 하자 김목사는 약속 위반이라면서 연세대와 맺은 약속을 파기하고, 자신의 모교요, 자신이 교수로 있었던 숭실대가 같은 조건을 수락하자 연세대에 넘어가 있던 유물이 숭실대로 옮겨가게 된 것으로 후일 밝혀졌다. 기독교박물관 유물은 우리나라 운명이 일제의 침탈과 6.25라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부산으로, 일본으로, 미국으로 피난을 가야 하는 상황에서 유물이 여러 곳으로 흩어지고, 또 3·8선이 갑자기 막히자 북한에 있는 유물을 남으로 옮기는 과정에 한필려 사모가 서해상에서 인민군에 의해 순직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필자는 1958년 3월부터 신학교에 다니면서 틈 날 때마다 남산자락에 있던 기독교박물관을 수 차례 방문해 관람했다. 일본식 적산가옥 2층 건물을 드나들 때마다 마루바닥이 삐거득 삐거득 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관람했던 기억이 새롭다. 신학교에서 교회사 강의를 할 때, 신학생들 졸업여행 가이드를 몇 차례 하면서 상도동의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을 방문하여 학생들에게 남산 시절의 박물관 이야기를 하는 나를 바라보며, 어찌 학예사인 자신들보다 내가 더 잘 해설한다고 할 때는 자부심이 있어 내 어깨가 나도 모르게 으슥했던 기억도 난다. 매산 김양선 목사가 한국교회와 기독교회사에 남기고 간 가장 큰 선물은 이 기독교박물관이라고 필자는 평가하고 싶다. 이 박물관 설립자 김양선 목사의 조카 되시는 김광수 박사의 강의를 듣고 필자가 한국교회사 교수가 된 것도 주님의 섭리가 있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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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정규 목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2021-06-15
  • [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용재 백낙준 박사(1895-1985)
    “한국교회사 연구 1세대 선두 주자” 미 예일대 박사학위 논문 ‘한국개신교사’저술 연재를 시작하면서 필자는 본지에 2017년 1월부터 만 3년 동안 예장(합동) 역대 총회장 열전을 연재하면서 독자들의 사랑과 성원을 입은 바, 늘 감사하게 생각하던 차에 본보로부터 한국교회 안에 있는 교회사가(敎會史家)들의 열전 의뢰를 받고 1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첫째는 자료 수집의 문제요, 둘째는 집필대상 선정의 문제요, 셋째는 집필대상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의 문제로 자문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이미 중견 학자들과 고인(故人)이 된 분들은 본인들이 남긴 1차 자료와 후학들이 남긴 기념논총이나 학회지나 연구지에 발표된 글들을 모아 기술하기로 하였다. 또 신진 학자들에게는 설문지를 발송해 회수하여 정리하기로 하였다. 이 외에도 기존에 간행되어 있는 교회사 관계 사전과 기독교백과사전 등을 참고하고, 또 각 학회에서 간행한 자료를 참고키로 하였다. 이 교회사가 열전의 중요 핵심 인물에 관하여는 우리 기독교 학자들 뿐만 아니라, 한국 천주교 측의 학자들까지 아우르는 시야를 확대하였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는 국내 각 신학대학들과 일반대학에 적을 두고 있으면서도 여러 학회지나 대학교수 논문집 등에 교회사에 관한 글을 발표한 연구자들과 또는 지방에 거주하면서 각기 처한 지역교회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책을 간행했거나 관련 논문이나 글을 쓰는 분들까지 소개해야겠다는 생각이다. 다행하게도 대전에는 한국침례교사학회(회장 임공열 목사), 부산에는 부산.경남교회사연구회(회장 박기영 목사), 대구에는 대구.경북교회사연구회(회장 손산문 목사)가 있고, 서울에는 각 신학대학 교수 중심의 한국교회사학회(회장 박창훈 박사), 한국기독교역사학회(회장 송현상 박사), 한국기독교사학회(회장 박용규 박사), 현대교회사연구소(소장 박명수 박사) 등과, 천주교 측에는 한국교회사연구소(소장 조한건 신부) 등의 관계자들의 성원에 감사드린다. 현재 약 100여명의 자료가 확보되어 있다. 용재 백낙준박사 필자가 용재 백낙준(庸齋 白樂濬) 박사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은 1958년 서울에 신학공부를 하기 위해 상경했을 때, 그 해 가을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주최로 새문안교회에서 열린 신학공개강좌 모임에서였다. 용재는 1895년 3월 9일 평북 정주군 관주면 관변동에서 백영순(白永淳)의€4형제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그는 평생동안 교육과 종교 및 정치 분야에서 한국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는€한국 최초의 참의원 의원과 의장으로 31개월간, 또 문교부 장관직을 제외하고는 생애 대부분을 대학과 국학(國學)운동과 기독교교육과 인물양성에 큰 업적을 쌓았고, 오늘의 연세학원의 주춧돌과 기둥을 세웠다. 기독교대학인 연세대학을 한국의 국학연구 중심대학으로 손색이 없게 만든 것은 당대의 유명한 최현배 김윤경 정비석 홍이섭 등 쟁쟁한 학자들을 연세동산으로 불러 오늘의 연세국학연구원이 있게 만든때문이다. 본고에서는 한국교회사 연구 제1세대 학자로써 용재가 어떻게 기여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는 한국교회사를€오늘의 학문 수준으로 발전시키는데 단단한 기초석을 놓았다고 할 수 있다. 미국 예일대학교에 수학하고 작성한 논문이 <한국개신교사>(A History of Protestant in Korea, 1832-1910)이다. 이 논문은 평양숭실대학에서 영어 원문이 간행되었고, 1960년대에 들어와서 연세대학교 출판부에서 영어논문이 재간행된 바 있다. 이 원서를 필자인 용재가 1973년 여름에 후학들을 위해€ 한글국역으로 개정 보완하여 츨간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의 제자 민경배 박사가 지적했드시 용재의 <한국개신교사>는 선교사 중심 일변도로 쓰여졌고, 참고도서 역시 한국 측의 자료를 전혀 참고하지 아니하고, 미국 측의 영문 자료에 기초한 소위 선교사관(宣敎史觀)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기독교회사의 기초 ‘한국개신교사’ 여기에 덧붙여 필자의 입장에서는 한국선교의 발단으로부터 일본제국주의자들이 한국을 합방한 1910년까지만 서술되고 그 이후의 역사를 기술하지 못하였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생각은 비단 필자만이 아니고 당시 시대상이 용재가 국내에 자유로이 오갈 수 없는 미국 현지에 머물고 있어서 불가항력적이기도 하지만, 6.25 전쟁 후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에 몸담아 있으면서도 1910년 이후 그가 소천하기 전의 한국교회사를 마무리하지 못한 것은 크다란 아쉬움으로 남았다. 연세대학교 총장에서 물러난 후 그의 연구 진척을 위해 대학당국에서는 명예총장실을 중앙도서관에 마련해 주었지만, 민의원(현 국회의원)과 참의원 등 여러 곳에서 그를 책상 앞에서만 앉아 연구에 몰두할 수 없도록 한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겼다 하겠다. 그의 학위 논문을 지도했던 예일대학의 Keneth S. 라토렛 교수는 용재의 논문을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서양사학가의 방법 응용에 능숙할€만큼 훈련을 받았음으로 지구력을 가지고 자료를 수색 모집하였고, 그 자료의 비판과 해석에는 객관성을 견지할 줄 아는 기술을 소유하였다.(한국개신교회사 1973, 연세대학교 출판부 p.IV 서문). 용재가 한국개신교사를 쓰면서 밝힌 그의 역사관을 보면, 기독교는 그 본질에서 선교사(宣敎史)이다. 또한 반드시 선교사(史)가 되어야 한다. 지상의 교회는 기독교 사상(史上)의 한 중간적 존재이다. 우리 주님이 죽으심으로부터 다시 오실 때가지만 존재하게 되어 있다(고전 11:26). 이 중간적 존재체인 교회의 철두철미한 사명은 복음선포이다. 기독교사는 시작부터 오늘까지€선교사로 되어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우리 한국개신교사도 선교사(史)가 되어야 한다. 선교사(史)를 외인(外人) 선교사에 의한 피선교의 과정으로 해석하여서만은€아니된다. 기독교 2천년사에서 교회의 흥쇠는 교회에서 행한 전도활동의 消長에 있었고 전도활동의 消長은 신도들의 신앙 허와 실에 좌우되어 왔다. 전도는 교회의 지상명령이다.(백낙준, 한국개신교사 서문 같은 쪽 V-ii 참조). 그의 입장과 논지는 분명하다. 기독교 역사는 마땅히 선교의 역사이고, 또 선교사(史)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용재의 지론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한국기독교회사도 당연히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기독교 2천년 선교역사의 선상에서 기술되어야 하고, 이런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선교사관(宣敎史觀)에 대하여 민경배 박사는 시각이 다른 견해를 피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선교사(史)는 저자 자신이 시인하고 있는 바와 같이 순전히 기독교 선교의 확장 역사이며, 따라서 관심의 테두리나 사료의 대부분이 선교사를 파송한 나라의 교회와 인사들에게서 수집되었다고 하는 일방성을 가진다. 즉 한국교회 쪽의 고백과 증언이 전혀 고려되고 있지 못한 것이다(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개정판) CLS 간행, 1982. p.20)라고 지적하고 있다. 선교사관(宣敎史觀)이란 비판도 있어 그러나 필자의 입장에서 볼 때는 용재가 그 글을 쓰고 있었던 시대적인 상황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이해되어야 한다고 보여지며, 또 역사란 집필자의 사관에 따라 견해의 차이가 있음을 고려하지 않은 입장에서 보는 견해의 차이일 뿐, 절대적인 사관이 따로 없기 때문이다. 소위 선교사관은 선교사관대로, 민족교회사관은 민족교회사관대로 장단점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사료수집과 이용이 오늘날에 비해 현저하게 불리했던 1920년대에 그것도 우리 땅이 아닌 미국에서 이렇게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객관적으로 분석하려고 노력하였고, 분명한 자신의 사관을 가지고 서술하였다는 점은 높이 평가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조선이란 모국이 일본제국주의 체제하 병합되어 자유로이 오갈 수 없는 상황€아래서 외국에서 조국의 광복과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는 그 날을 기대하면서, 또€오직 교육입국, 자유민주입국을 생각하면서 서양역사를 탐구하여 클라크대학과 예일대에서 역사학을 연구한 토대 위에 한국개신교사라는 대작을 학위 논문으로 완성한 그의 의지와 학문적인 완성은 대한민국의 역사가 존재하는 한 한국기독교 역사에 뜻을 두고 연구하고자 하는 후학들에게는€한국교회사 기초자료에 근접할 수 있고, 한국교회 역사 정립에 귀중한 공헌임을 인식할 수 밖에 없는 연구 결과물이며, 그의 지도교수 K.S 라트렛의 말대로 한국교회사 연구자들이 큰 빚을 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이러한 공헌을 하였음에도 용재의 선교사관이 당대에 그치고 그의 사관을 이어받은 학자들이 나타나지 않고 있음은 앞으로 한국교회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 나갈 후학들에게 주어진 과제라고 생각하여 그의 뜻을 이어 1910년 이후의 결여된 <한국개신교사> 속편을 기록해야 할 책임이 한국교회 사학계에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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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정규 목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2021-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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