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0-07(월)

기고
Home >  기고  >  기고

실시간뉴스

실시간 기고 기사

  • 기고 '추석에 고향교회 찾아가는 문화 만들자'
    오늘날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병폐를 꼽으라고 할 때 어김없이 제시되는 것이 ‘양극화’의 문제이다. 양극화문제는 단순히 부의 양극화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사회적으로 그 병폐가 확산되고 있다. 최근 ‘롯데’라는 기업을 향한 국민들의 시선이 안좋다. 일본기업이 국내에서 기여한 것이 없는 정도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기업의 재산권 분쟁과 비자금 의혹 등과 더불어 골목상권까지 집어삼키며 사회적 책임부분에서 무책임하기 때문이다. 기업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그 양극화의 문제가 한국교회 안에서도 이미 치유 불가능한 고질병처럼 여겨지며, 그 병폐가 갈수록 더욱 심화되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현재 국내 기독교 신교는 4만 8천여 교회인데 그 중 80% 정도가 100명 미만의 작은 교회이며, 이 가운데 절반이 청·장년 신자가 50명 미만인 미자립 개척교회이다. 지금 대형교회는 몸집이 커지고, 작은교회는 힘을 잃어가고 있다. 농·어촌교회나 작은교회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이 양극화를 극복하고 함께 더불어 살 수 있는 상생의 길은 없는 것인가? 진정 양극화를 극복할 해답은 있는가? 건강한 한국교회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길이 없으면 길을 찿고 만들어가야 한다. 그런 대안 중 하나가 일명 ‘고향교회, 작은교회’방문이라고 본다. 방문을 통하여 고향교회, 미자립교회를 자립할 수 있도록 부축하고 건강한 교회를 세워가는 일이다. 이런 작업의 일환으로 미래목회포럼은 지난 11년간 매년 추석과 설 명절에 ‘고향교회, 작은교회 방문하기’캠페인을 전개해왔다. 이 캠페인을 매년 전개하여 이미 1천여 교회가 참여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교회가 캠페인의 실천을 통해 교회마다 은혜와 감동의 사례와 간증들이 넘치고 있다. 농수산물을 직거래하거나 자매결연을 맺어 여름과 겨울에 자원봉사를 떠나기도 한다. 이처럼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것은 중·대형교회의 중직자들도 늘 마음 한 구석에는 고향교회에 ‘사랑의 빚’을 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향교회는 한국교회의 신앙의 못자리이다. 신앙의 뿌리는 시골의 농·어촌교회와 작은 개척교회였다. 작은 시골교회에서 신앙을 시작한 사람들이 참 많다. 신앙의 뿌리는 농·어촌 고향교회나 작은교회에서 시작해 도시에 나와 신앙생활을 한 경우가 많아 ‘언젠가는 은혜를 갚아야지’ 하면서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고향을 방문했다가도 주일을 지킨다고 그냥 올라오게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 캠페인은 자립교회 정도의 수준이라면 충분히 어느 교회나 시행할 수 있다. 목회일정에 1년 52주 중에 추석과 설만이라도 고향교회, 작은 교회로 성도들을 파송하는 캠페인과 실천주일을 정할 수 있다. 이런 교회들이 많아질 때 한국교회의 미래는 밝아질 것이다. 경제적으로나 인적으로 어려움을 당한 농어민들과 교회가 일어설 힘이 도저히 없을 때, 스스로 일어서거나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없을 때, 그들을 일으켜 세워주는 격려와 배려, 이것이 이 시대 교회와 목회동역자들이 함께 감당해야 할 몫이다. 성경에 보면 보아스가 곡식을 벨 때에 룻을 위하여 이삭을 주울 수 있도록 배려하므로 그 한 에바로 룻과 나오미가 생계를 유지한 것을 볼 수 있다. 이제는 관심을 가지고 돌아보고 찾아가자. 한국교회가 건강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농·어민과 그들을 돌보는 시골 농·어촌의 고향교회, 그리고 작은 개척교회 목회자들에게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배려하고 격려하는 넉넉한 마음이 절실하다. 설이나 추석명절에는 고향교회에서 방문하는 명절문화를 만들면 어떨까 싶다. 이 시대에 농어촌의 작은교회, 특별히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고향교회와 목회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한국교회가 함께한다는 자부심을 불어넣는 일이다. 이 귀하고 복된 배려와 나눔의 사역을 통하여 한국교회에 희망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 기고
    • 기고
    2016-09-02
  • 그리스도 강림 이후 부흥과 복음-11
    선지자 요엘은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 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 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욜 2:28,29)라고 예언했다. 그리고 그 모형에 따라 예수님 자신의 성령세례가 이루어졌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라고 하신 말씀에 따라 오순절 날 성령님이 오신 것임을 알 수 있다.성령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획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우리의 구원을 우리에게 이루어주신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은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딛 3:5) 이루어지므로 우리가 성령님을 받아들여 영접해야 중생하게 된다.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라고 하시고,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라고 말씀하셨다.우리는 성령님의 중생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새 영으로 거듭난 새 영을 새 사람(엡 4:24) 또는 속사람(롬 7:220, 엡 3:16)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성령님의 임재 보혜사는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parakletos)이다. 이는 ‘부르다’라는 뜻의 ‘칼에오’(kaleo)와 ‘곁에’라는 뜻의 ‘파라’(para)가 합성된 말로서, 옆에 같이 있도록 부름받은 사람, 또는 어떤 사람을 돕거나 변호하기 위해서 부름받은 사람을 뜻한다. 이를 보혜사로 번역하였는데, 이는 보전할 보(保) 은혜 혜(惠) 스승 사(師)를 써서 보전하시고 은혜를 주시며 가르치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즉 성령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이며 변호인이다.예수님께서는 “내가 아버지게 구하겟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헬, mrta)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헬, para)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라고 성령의 임재를 약속하셨다.여기에서 성령님의 우리와 ‘함께 계심’(meta)은 성령님의 임재를 말하고,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거하심’(para)은 성령님이 동거 곧 성령님께서 우리의 집이나 교회나 일터에도 함께 계신다는 것이고, 우리 ‘안에 거하심’은 성령님의 내주(Indwelling)를 말하는 것이다.또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눅 24:49)라고 하시고,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라고 말씀하셨다.성령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으로서 본체적으로는 하늘(영적 세계)에 계시지만(초월성), 우리는 우리와 함께 계시고(meta), 우리의 곁에(para) 계시는 성령님과, 우리 위에 계시고(epi) 우리 안에 계시는(내재성) 성령님을 잘 알아서 성령님의 임재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성령 충만:외적 충만(은사)과 내적 충만(열매)“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라는 명령을 받은 초대교회 제자들은 모시지 않은 영을 기다란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미 모시고 있는 영을 더 간구한 것이다.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충만함을 간구했다는 뜻이다.성령님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는 능력으로 옷 입게 될 뿐만 아니라(눅 24:49),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해지게 된다(엡 3:16).성령 충만에는 능력 충만 곧 은사 충만인 외적 충만과, 생명 충만 곧 열매(사랑) 충만인 내적 충만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의 열매는 목적이 되지만, 성령의 은사는 수단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성령의 충만에 대하여 사도 누가는 '핌플레미'(pimplemi)라는 말을 사용하였고, 사도 바울은 '플레로오'(pleroo)라는 말을 사용하였는데, '핌플레미'는 공간적으로 '채우다'는 의미이고, '플레로오'는 내용으로 '채우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는 성령님께서 공간적으로도, 영적으로도 충만하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 기고
    • 기고
    2016-09-01
  • 그리스도 강림 이후 부흥과 복음-10
    영어로는 예배를 ‘워쉽’(worship)이라 하는데, 이 말은 ‘가치 있는’, ‘가치를 지닌’이라는 의미의 라틴어 ‘weorthscipe’에서 유래된 말이다. 그것은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제물을 들고 그 앞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대상16:29). 또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시 29;2)라는 말씀과 같이,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에 상응하는 가치를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유럽의 기독교는 기독교 예배를 ‘리투르기’(Liturgie)라는 말로 표현했는데, 그 뜻은 섬김과 봉사의 예전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그러므로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을 중심으로 한 하나님과 인간 간의 계시와 응답의 사건이요 만남이다. 따라서 예배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비로우신 하나님 체험에 있으며,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의 신비한 영적 만남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인격과 그의 사역을 찬양하고 찬송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인 것이다. 참된 예배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라고 말하고, 또 사도 베드로는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라고 예배에 대해 가르친다.따라서 참된 예배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창조하신 목적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드리며, 우리의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영적 예배를 말한다.예수님께서 수가성 여인에게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3,24)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영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고, 동시에 우리가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 신령한 제사(spiritual sacrifice)를 드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그리고 진리로 예배를 드린다는 말은 진리(truth) 안에서 예배를 드린다는 말인데,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이므로(요 17:17), 이것은 곧 말씀 안에서 예배를 드린다는 뜻이다.그러므로 참으로 예배하는 자는 성령 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난 새 영으로,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이신 예수님 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자이다. 영으로(in spirit)는 예배의 영적인 면을 말하고, 진리로(in truth)는 말씀에 나타난 예배의 형식적인 면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참된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를 드린다는 것, 즉 예배의 대상이다. 예수님께서는 수가성 여인에게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 4:21)라고 하시면서, 예배의 대상 즉 ‘아버지께 예배’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예수님과 성령님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에 의하여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으로 예언되었고(마 3:11), 또한 제자들에게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게 있게 하리니”(요 14:16),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 16:7)라고 말씀하셨다.또한 에수님께서 수가라는 동네의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에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라고 하셨고, 사도 요한은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7:37-39)고 하여,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은 곧 성령님을 가리키시는 것을 알 수 있다.
    • 기고
    • 기고
    2016-08-18
  • 그리스도 강림 이후 부흥과 복음-9
    히브리서는 완전하고 영원한 ‘새 언약’을 말한다. 즉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히 10:1).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히 10:4)라고 하고서, “위에 말씀하시기를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하지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8-10)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여기에서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잘 알 필요가 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으로서 제사를 드린 장소이다. 히브리서는 예수님께서는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히 9:11),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히 9:24) 우리를 위하여 제사를 드렸다고 한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하여 피를 흘리신 것의 영적 의미를 말하는 것이다.둘째는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으로서 제사를 드리신 제물이다. 예수님께서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히 9:12). 이는 갈보리에서 흘리신 보혈로 제사를 드리신 것이다. 히브리서는 이것을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라고 한다.셋째는 예수님께서 드리신 제사의 의미이다. 히브리서는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19,20)라고 가르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마 27:51). 히브리서는 이것을 예수님께서 자기 육체를 상징하는 휘장을 찢으시고, 우리가 성소로 들어갈 새로운 살 길, 곧 ‘생명의 길’을 열어놓으신 것이라고 말한다.넷째는 예수님께서 드리신 제사의 효력이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2)고 한 히브리서의 기자는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 9:26)라고 한다. 그리고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10)라고 말한다. 이는 예수님께서 드리신 제사가 영원한 효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참 사람이자 참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갈보리에서 십자가를 지신 사건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적으로 참 하늘에 들어가셔서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드리는 제사가 될 수 있고,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한 효력을 가지는 것이며, 예수님께서 ‘새 언약의 중보’가 되시는 것이다.예배의 의미:계시와 응답기독교 예배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안에서 자신을 보여 주신 하나님의 계시와 그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고, 따라서 기독교 예배에 대한 중심 개념은 하나님의 계시(Revelation)와 인간의 응답(Response)이다. 그리하여 예배는 자신을 사람에게 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축복)와 그에 반응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의 응답에 있다.예배에 대한 용어로는 구약 히브리어는 ‘샤하’(shachah)와 ‘아바드’(abad)이다. 샤하는 ‘엎드리다, 경배하다, 다르다’는 뜻이고, 아바드는 ‘섬기다’라는 뜻이다. 신약 헬라어는 ‘프레스쿠네오’(proskuneo)이다. 이 말은 ‘고개를 숙이다, 입을 맞추다’라는 뜻이다. 이는 자기가 존경하고 숭배하는 대상을 만났을 때, 존경의 표시로 무릎을 꿇고 고개와 허리를 숙이고 상대방의 손에 입을 맞추는 것을 말한다.우리말 성경이 프로스쿠네오를 ‘예배’로 번역한 것은 그 의미를 잘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예배는 성도들이 은혜(축복)를 주시려고 임재하신 영이신 하나님을 만나 뵙고(계시), 예의를 다하여 영(마음)으로 절(반응)을 하는 것이다.
    • 기고
    • 기고
    2016-08-12
  • 허원배 목사(부천성은교회)
    성직자의 윤리적 타락이 16세기 종교개혁 원인의 하나였습니다. “성직자의 삶은 평신도의 복음이다”(Vita clerici est vangelium laice) 극심한 성직자의 타락으로 인하여 종교개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500년 전 신자들 사이에서 흔히 오가던 경구입니다. 신자들은 평신도만도 못한 윤리적 삶을 사는 타락한 성직자들에 대한 실망감을 이런 경구로 표현한 것입니다. 종교개혁을 불러일으킨 16세기 교회의 타락은 곧 성직자들의 타락이었습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는 가증할만한 폐습이 많이 있으며, 이러한 병폐들은 교황을 포함하여 성직자들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각자는 자신의 잘못을 자각하고 반성해야 한다.”고 했던 교황 아드리아누스 6세의 훈령에서도 확인됩니다. 종교개혁 전야, 성직자의 타락은 늘 돈 또는 성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중세기 성직자들의 성적 타락은 극에 달해, 성직자들의 사창가 출입이나 축첩이 난무했지만 가톨릭교회의 대응은 사창가 이용 빈도나 축첩 기간, 자식의 유무와 숫자에 따라 정교하게 분류하여 소위 창녀세로 불리는 벌금을 부과하는 것에 그쳤습니다. 이로 인해 성직자의 성적 타락에 대한 문제의식은 사라지고 오히려 1415부터 1517년까지 재임한 교황 중 절반 이상이 사생아를 두었고, 15세기말 콘스탄츠 교구에서만 성직자에 의해 출산된 사생아가 1500명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성직자의 타락은 늘 돈과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16세기 유럽 토지의 3분지 1이 교회의 소유라고 할 정도로 교회는 부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 중 일부는 뇌물을 주고 교황에 선출되고, 돈과 권력을 얻기 위해 8살 혹은 11살짜리 꼬마를 추기경으로 임명하고, 한 사람이 4개 도시의 대주교직을 독점하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재산과 땅을 사유화했으며, 더 많은 치부를 위해 종교세를 미납한 신자의 세례와 성만찬 등 성사 참여를 금지시키고, 죄를 면해 주는 대가로 면죄부를 판매하기도 했습니다. 바울이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딤전 6:10)라고 하셨듯이 성직자의 돈 사랑이 중세교회를 심각하게 타락시켰습니다. 일부 목회자의 타락이 한국교회의 쇠퇴를 재촉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한국 교회는 개신교 역사상 가장 타락했다”고 한탄했던 한 교계 원로의 지적처럼 현재 한국교회의 타락은 극에 달해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타락은 종교개혁 전야의 중세와 마찬가지로 목회자의 타락에 기인하고 있고, 목회자의 타락은 주로 돈과 성 문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경찰청의 성범죄자 검거현황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성범죄로 검거된 성직자는 총 464명으로 전문직종 중에서도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목회자가 저지르는 성범죄 관련 기사가 하루가 멀다고 언론에 보도되어 교회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급격히 하락시키고 있습니다. 실제로 한국교회의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목회자가 불륜과 관련하여 형사 처분을 받고, 최근만 해도 신학대학교 교수의 제자 성추행, 인천 A교회 청년 담당 부목사의 신자 성폭행, 경기도 B교회 담임목사의 미성년자 성추행, 자신이 위탁 보호 중인 10대 소녀 상습적 성추행한 C목사 사건 등이 언론에 보도되어 사회적 분노와 반기독교적인 분위기를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권사가 되기 위해서는 수백만 원, 장로가 되기 위해서는 수천만 원을 헌금해야 한다는 의미의 ‘권수백’, ‘장수천’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금품과 향응제공이 난무하는 교단장과 교회연합단체 회장 선거에 드는 돈이 수십억 원에 이른다는 말이 공연히 회자되고 있습니다. 교회 세습과 더불어 은퇴목사에게 과도한 은퇴비를 지급해 문제가 되고, 은퇴하는 목사에게 은퇴비를 지급할 여력이 없는 교회는 후임자에게 은퇴비를 부담시키는 일이 관행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교회개혁의 핵심은 목회자 윤리의 강화입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웅덩이를 흐린다.”는 속담처럼 일부 목회자의 타락이 교회의 타락을 부추기고, 교회의 타락이 급격한 교회의 쇠퇴를 초래합니다. 따라서 무너져 가는 한국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먼저 목회자의 윤리를 강화해야 합니다. 목회자의 윤리 강화는 처벌만으로는 가능ㄹ하지 않기에 처벌 강화와 아울러 신학교육의 강화, 인성검사 강화 등 목사 안수 전 철저한 자질검증, 윤리적 삶이 가능한 환경의 조성, 목회자들의 자성과 결단 등이 함께 고려되어야 합니다. <목회자윤리지침)>을 제정하여 지침을 위반할 경우 재판법에 따른 처벌을 의무화하고, 특히 지침 위반한 자 증 일정한 규모의 재정 관련 범죄와 성범죄 위반자의 경우 즉시 목사직에서 퇴출시키는 원스트라이크 아웃제(one strike-out) 도입 등 윤리적 결함이 있는 목회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야 합니다. 신학대학교 교육과 준회원 교육 등 신규진입 목회자 교육과정에서 목회자 윤리와 관련한 교육과정을 설치하여 철저한 교육을 선행하고, 목사 안수 전에 정신과 혹은 인성검사 등을 통해 자질을 철저히 검증하여 문제 발생 소지가 있는 자의 목사 안수를 사전에 차단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재정운영의 투명성 보장을 위해 <감리회 소속기관 재정운영규정>을 제정하여 개체교회의 재정이 규정에 따라 운영될 수 있도록 하고, 재정운영의 구체적인 절차와 과정을 담은 <개체교회 재정운영 매뉴얼>을 제작하여 배포하는 것은 물론, 개체교회의 감사 기능을 강화해야 합니다. <개체교회 갈등 해결 매뉴얼>을 제작, 배포하여 개체교회에서 목회자의 윤리와 관련한 문제가 발생할 경우 합리적인 절차에 따라 갈등을 해결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준회원 또는 정회원 교육과정에서 목회자의 윤리 문제로 발생하는 개체교회의 갈등의 해결 절차와 과정에 관한 교육을 실시해야 합니다. 목회자 윤리 강화에 한국교회의 미래가 달려있습니다.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이 암살 위협에 시달리면서도 성범죄를 저지른 성직자를 가택 연금하고 성직을 박탈하는 것은 물론, 교황청의 뿌리 깊은 비리를 들춰내기 위한 직속기관 설치, 외부 회계감사제도 도입, 기득권 세력의 은행계좌 동결 등 교황청 개혁에 적극 나서고 있습니다. 언론들은 “프란치스코의 도전에 바티칸의 미래, 나아가 가톨릭교회 전체의 미래가 달려있다”며 프란치스코의 교황청 개혁을 적극 지원하고 있습니다. 500년 전, 타락과 부패로 거센 ‘항거(protestatio)’에 직면했던 가톨릭교회가 타락과 부패에 거세게 ‘항거’했던 세력인 개신교회(Protestant)보다 더 적극적으로 개혁에 나서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부패하고 타락한 교회의 상징이었던 가톨릭교회와 가톨릭교회의 부패와 타락에 저항한 종교개혁 세력인 개신교회가 정 반대의 입장에 처하는 웃지 못 할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것입니다. 일부 목회자의 일탈이 한국교회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급격히 하락시킵니다. 이를 방치할 경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사역에 전념하는 대다수 목회자에게 그 피해가 전가되고, 교회에 대한 사회적 신뢰는 더 하락할 것이며, 교회의 사회적 신뢰 하락은 교회의 선교를 더욱 힘들게 할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교회의 희망 있는 내일을 열기 위해서는 안수 전 목회자의 철저한 자질검증, 목회자의 일탈과 타락에 대한 일벌백계, 목회자가 윤리적 삶을 살 수 있는 환경조성, 목회자 자질 향상에 한국교회가 온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 기고
    • 기고
    2016-08-01
  • 그리스도 강림 이후 부흥과 복음-8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 충만하여 성령의 모든 역사가 이루어지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교회에는 성령님의 성화를 위한 가르치심(요 14:26, 요일 2:27)과 책망하심(요 16:7-11)과 인도하심(요 16:13,14)이 풍성하게 있어야 하고, 또 성령님의 성화를 위한 세가지 힘(능력), 즉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부어주심(롬 5:5)과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심(엡 3:16)과 성령의 은사를 나누어주심(고전 12:7-11)이 있어야 한다. 그때 교회에는 성령의 열매(갈 5:22,23)가 풍성히 맺게 된다.예수님과 예배예수님께서는 수가라 하는 동네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3, 24)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옛 언약의 제사가 폐하여지고 새 언약의 예배가 시작될 것을 선언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예배는 하나님 아버지께 영 곧 성령과 진리 곧 예수님(말씀)으로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예수님께서는 또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3)라고 하시면서, 구약의 호세아 선지자의 말(호 6:6)을 인용하셨는데, 여기에도 제사가 폐지될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렇다면 구약에서 제사의 폐지가 예언되고, 예수님께서 이것을 이루신 것이다.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께서 영원한 제사를 드렸다고 가르친다. 히브리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히 5:6, 7:17)고 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냐”(히 9:11-14)라고 한다.그리고는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유언은 그 사람의 죽은 후에야 유효한즉 유언한 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느니라”(히 9:15-17). “이르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두루마리와 온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또한 이와 같이 피를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18-22)라고 했다.즉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이 없기 때문에’ 모세가 하나님과 첫 언약을 맺을 때에도 송아지와 염소의 피가 뿌려졌으며, 예수님께서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시는 것도 예수님께서 죄를 위하여 피를 흘려 죽으심으로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것이다.또 히브리서는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하게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히 9:23)라고 하고서,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 9:24-26)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셔서,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었다는 것이다.
    • 기고
    • 기고
    2016-07-29
  • 허원배 목사(부천성은교회)
    우리는 사도신경을 통해 “거룩한 공교회”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늘 사도신경을 통해 감리교회가 “거룩한 공교회”임을 고백합니다. 감리교회가 공교회임을 우리가 고백한다는 말은 바울이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12:50)고 하셨듯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리스도의 몸인 하나 된 교회를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모든 역사적 교회와 지역적 교회는 우주적인 보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교회는 형제교회와 연합해야 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사도 베드로가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할지어다.”(벧전1:15)하신 것처럼 교회가 거룩한 공동체임을 고백하는 것이며, 사도들의 가르침에 기반하여 존재하는 공동체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마다 사도신경을 통해 ‘거룩한 공교회’를 믿고 고백한다는 말은 교회가 사도적 가르침을 따라 통일성과 보편성, 그리고 거룩성과 사도성을 유지되어야 함을 고백하며, 이를 위해 헌신하겠다고 다짐한다는 말입니다. 지금, 감리교회의 공교회성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감리교회의 공교회성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2014년 목회사학연구소의 조사에 의하면 전체 목회자의 66.7%는 정부가 정한 최저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급여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목회자의 37%는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교회사역 이외에 다른 경제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또 목회자의 73.9%는 가정과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목회자의 이중직이 필요하다고 응답했습니다. 실천신학대학원 조성돈 교수는 "직업이 두 개인 목회자가 적지 않은 현실에서 교단들이 묵인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지적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서 일하는 목회자들을 비판하는 것은 비겁한 일입니다. 오히려 지금 필요한 것은 십일조를 바치지 않아 “레위 사람들이 받을 몫을 주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자기 밭으로 도망”하자 “하나님의 전이 어찌하여 버린바 되었느냐?”고 꾸짖고, 레위 사람을 불러 모아 다시 제자리에 세우고, “온 유다가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드렸던 느헤미야의 개혁을 구현해야 합니다.(느13장) 모든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이고, 보편적이며, 하나라고 고백하는 상황에서 교회 사이의 심각한 양극화는 우리의 신앙고백에 반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감리교회가 통일성, 보편성, 거룩성, 사도성을 지닌 ‘거룩한 공교회’임을 우리가 믿는다면 개체교회를 개인이나 신자들의 소유로 인식하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감리교회 내에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교회의 양극화를 외면해서도 안 됩니다. 특히 기독교대한감리회는 미국연합교회의 전통을 이어받은 감독교회로서 본래 감독이 담임목사를 파송하는 등 연회를 중심으로 하는 교구 목회자의 생활은 감독이 책임져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리교회에서 교회의 규모에 따른 교역자의 심각한 생활 양극화를 방치하는 것은 감리교회답지 않습니다. 때문에 감리회교회 내에 존재하는 심각한 교회 양극화와 목회자들의 생활 양극화는 반드시 극복되어야 합니다. 감리교회의 정체성 회복이 바로 교회의 공교회성 회복입니다. 요한 웨슬리는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든 것은 마태복음25장에 나오는 소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라며 평생 자신을 위해서는 28파운드만 사용하고 나머지는 이웃을 위해 사용했으며, 가난한 이웃을 위해 자신의 옷을 또 노예소녀를 돕기 위하여 값비싼 그림을 팔기도 했습니다. 때문에 요한 웨슬리가 죽은 후 남겨진 그의 재산은 오직 은수저 한 벌과 몇 페니의 동전뿐이었습니다. 또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종교라며 기독교를 사회와 격리된 고독한 종교로 바꾸는 것은 참으로 기독교를 파괴시키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오늘의 감리교회에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 요한 웨슬리가 심고 힘써 가꾸었던 감리교회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 웨슬리의 감리교회에서 어떤 교회는 너무도 가난해서 교회를 유지하기조차 힘들고, 어떤 교회는 부유함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교회를 외면하는 일은 발생할 수 없습니다. 또 어떤 목회자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밤에는 일하고 낮에는 목회하는 반면, 어떤 목회자는 수억 원의 연봉을 받으며 귀족과 같은 생활을 하는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또 감리교회에서 교회의 양극화 혹은 목회자의 생활 양극화를 외면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감리교회의 공교회성 회복은 감리교회 정체성 회복으로부터, 감리교회의 정체성 회복은 교회의 양극화와 목회자 생활의 양극화 회복을 위한 노력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감리교회의 정체성과 공교회성 회복을 위해 제안합니다. 감리회에서 정상적으로 목회하는 목회자의 최저생활은 감리회가 보장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감리회는 목회자의 사역 상황을 철저히 점검하여 재도가 악용되는 사례를 방지하는 것을 전제로 <목회자생활보장법>을 제정하여 정상적으로 사역하는 목회자의 최저생활은 감리회가 책임져야 합니다. 목회자 급여호봉제 도입을 통하여 감리회 목회자의 급여를 표준화해야 합니다. 목회자의 환경과 부양가족 등을 감안하여 감리회 차원의 목회자 급여를 표준화 하고, 호봉제를 도입하므로 개체교회에서 목회자 급여책정과 관련한 시비를 없애되 이는 제도화를 통해 모든 개체교회에서 시행될 수 있도록 합니다. 목회자가 은퇴 후 생활에 대한 걱정 없이 목회에 전념할 수 있도록 은급제도를 제도운영을 위해 사용하는 비용은 줄이고 보장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획기적인 개혁을 추진하되 그 과정에서 현재 가장 안정적이고 보장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되는 국민연금과의 연계를 적극 고려해야 합니다. 자녀의 부모 부양의무가 점점 흐려지는 상황에서 은퇴 목회자의 주거문제를 감리회 본부차원에서 해결하지 않는 한 소위 교회매매와 세습, 후임자에게 은퇴비를 요구하는 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감리회가 소유하고 있는 유휴재산을 활용하여 <은퇴교역자마을(clergy silver village)>을 설립하여 은퇴 목회자의 주거문제 해결에 감리회 적극 나서야 합니다. 감리교회의 정체성과 공교회성 회복, 더 기다릴 시간이 없습니다. 질병의 치료시기를 놓치면 치유할 수 없듯이 병든 감리교회를 치유하는 데도 일종의 골든타임(golden time)이 있는 법입니다. 시간은 감리회를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조금만 더를 외치며 시간을 허비하다보면 감리회를 더 이상 치유할 수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습니다. 감리회의 정체성과 공교회성 회복이 그렇습니다. 매년 신자가 급격하게 감소하는 위기의 상황을 막고, 희망 있는 내일로 나아가기 위해서 감리회는 지금, 여기서 감리회의 정체성과 공교회성 회복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첫걸음은 목회자가 병들지 않도록 조치하는 것이며, 그 조치는 목회자가 돈 때문에 목회에 전념하지 못하는 현실을 개혁하는 것입니다.
    • 기고
    • 기고
    2016-07-22
  • 그리스도 강림 이후 부흥과 복음 7ㅤㅈㅠㄽ
    1. 하나님의 집사도 바울은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oikodome)이니라”(고전 3:9)라고 하고,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naos)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라고 한다. 그리고 “이 집(oiko)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딤전 3:15)라고 했다. 교회가 하나님의 집(성전)이라는 말은 교회의 목적을 나타낸다.여기서 하나님의 집이란 말은 교회가 하나님이 주인인 집으로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곳이요, 교회가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뜻을 나타내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라는 말은 교회가 하나님의 부르심과 주권적인 섭리에 의하여 이루어진 모임으로서,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역사하시는 곳, 곧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이루어지는 곳임을 나타낸다. 그리고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라는 말은 거기에서 진리이신 그리스도가 나타나야 하고, 말씀이 높이 들려서 많은 사람에게 보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즉 교회는 진리의 견지자요 수호자요 증거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2. 그리스도의 몸과 신부사도 바울은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으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 1:20-23)라고 했다. 즉 교회는 예수의 몸이고 예수님께서는 그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것이다. 이는 교회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이다.여기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soma)이라는 것은 교회가 예수님의 영적 생명을 가진 생명체로서 유기체적인 존재이고, 통일성과 다양성을 가진 존재로서 성장해 가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그리소도와 그의 몸된 교회 사이의 신비적 연합과 예수님의 영적 왕직을 나타내며,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통치하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교회가 예수님의 몸이라는 말에는 교회의 지체인 성도가 예수님과 같이 거룩하게(성화) 되어야 한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예수님과 같이 살아야 하고, 나아가 예수님을 사랑하듯이 교회를 사랑해야 하고, 예수님의 몸이 예수님을 드러내듯이 성도들이 예수님을 드러내야 한다는 의미이다.3. 성령의 전사도 바울은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naos)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고 가르친다. 그리고 “그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1-22)라고 말한다.우리 몸이 성령의 전이라는 말은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 14:16)라고 하시고, 또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7)고 하셨다. 여기에서 '너희'는 곧 제자들이요, 성도들이요, 나아가 교회공동체를 말하는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은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이루러지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는 성령님의 능력을 힘입어야 한다. 성령님께서 성도들을 위하여 교회에서 특별히 하시는 사역은 성도들을 거룩하게(성화) 하시는 것이며, 이는 곧 교회가 그리스도의 온전한 신부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그러므로 교회가 하나님의 집이라는 말은 교회의 목적(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은 교회의 정체성(그리스도의 제자)을 나타내며, 교회가 성령의 전이라는 말은 교회의 사명(성화)을 나타내는 것이다.
    • 기고
    • 기고
    2016-07-16
  • 그리스도 강림 이후 부흥과 복음-6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롬 2:13).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6)라고 하여, 오직 구원의 효력이 있는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다시 말하면 사랑이라는 행함이 있는 믿음뿐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따라서 사도 바울과 사도 야고보의 가르침은 모두 같은 것으로서, 그 내용은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지만, 그 믿음은 반드시 사랑으로 역사하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일반적으로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넓은 의미 곧 행함이 있는 믿음을 말한다. 그런데 야고보는 믿음을 좁은 의미 곧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사랑의 내용과 형식과 특성사도 요한이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16)라고 말한대로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다.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랑이 무었인지 본을 보이셨다. 사랑은 예수님의 마음이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고 했다.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라고 하셨다.이것은 곧 사랑의 본질적 내용이 온유와 겸손이요, 사랑의 형식은 곧 섬김과 주는 것(희생 곧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섬김은 곧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복종하는 것(엡 5:21)이요, 사랑으로 종노릇 하는 것(갈 5:13)임을 뜻한다. 예수님은 이 사랑을 십자가에서 완성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아(롬 8:29), 우리 안에 예수님의 형상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하여(갈 4:19), 예수님께서 끼치신 본을 따라 그 자취를 따라가야 한다(벧전 2:21).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누그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기본 요건은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에 있다. 이것이 사랑의 기초이다.“내 교회를 세우리니”예수님께서 가이샤랴 빌립보 지방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듣고,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7-19)라고 말씀하셨다.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라고 하신 말씀에서, 이 반석은 로마교회의 주장처럼 베드로가 아니라, 베드로의 신앙고백인 동시에 예수님 자신을 상징한다.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1-4)라고 했다. 반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따라서 교회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모퉁이돌이 되셔서,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세워진 신령한 집(벧전 2:5)으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이다(엡 2:22).사도 바울은 교회의 목회자들에게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행 20:28)고 하시고,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엡 5:25)고 말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자신을 희생하심으로써 세우신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세상과 구별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 또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요 15:19)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 기고
    • 기고
    2016-07-08
  • 그리스도 강림 이후 부흥과 복음-5-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1, 12)고 말하고, 이어 “염소와 황소의 피와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냐.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히 9:13-15)고 했다.결국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의 근본적인 차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속하시고 영원한 제사를 드리신 사실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옛 언약이 부족하여 흠이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흘리신 언약의 피가 없어서 동물의 피를 임시로 사용한다는 점이라는 것이다.믿음과 사랑사도 바울은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5).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을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엡 2:8)라고 하여, 우리가 이미 구원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또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5)고 하여, 우리가 아직 구원을 온전히 얻은 것은 아니라고 가르친다. 우리의 구원이 ‘이미 그러나 아직’의 성격과 같이, 의리의 믿음도 ‘이미 그러나 아직’의 성격이 있다. 우리의 믿음으로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는데, 하나님 말씀에서는 ‘이미’ 예수님 안으로 들어간 것(중생, 칭의)과 ‘아직’ 온전히 들어가지 못하여서 ‘계속하여’ 들어가야 하는 것(성화)의 두 가지가 있음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이와같이 믿음은 우리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서 예수님에 의하여 영접되는 것을 말하는데, 우리가 예수님에 의하여 영접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며 어머니이니라”(마 12:50)고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기 백성(눅 7:16, 롬 11:1), 곧 하나님의 백성(히 4:9), 주의 백성(눅 1:77)이 되는 것을 말하고,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지체(고전 6:15)가 되는 것을 말한다. 그리하여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진(빌 3:20)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 되어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다.그런데 사도 요한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1).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그가)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9-12)라고 말한다. 이것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가 그 이름을 ‘믿는 자’와 같은 것을 가르쳐 주기 때문에, 우리는 영접하는 것이 믿는 것, 다시 말하면 믿음과 영접이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우리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해야 한다(계 3:20). 그리하면 예수님께서는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 15:4)라고 약속하신 대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거하신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사도 바울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라고 했다. 그런데 사도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4, 17)고 말한다.
    • 기고
    • 기고
    2016-07-01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