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2-09(월)

기고
Home >  기고  >  기고

실시간뉴스

실시간 기고 기사

  • 북한은 임현수 목사를 정치 희생양으로 삼지 말라
    2015년 1월 30일 북한정부에 의해 억류된 캐나다 토론토 근교에 있는 큰빛교회 임현수 목사 소식을 듣지 못해 1년 가까이 애가 탄 사람은 그의 가족과 큰빛교회 성도들만이 아니라, 한국에 있는 기독교인들과 자유를 생명처럼 애호하는 세계인들이 그의 석방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필자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그런데 2015년 12월 16일 아침 뉴스가 전해온 소식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북한 사법당국이 임현수 목사에게 “국가전복음모죄”를 적용 종신징역형을 내렸다고 했다. 북한에서의 종신형은 사형선고나 다를 바 없다. 임현수 목사가 종신형 선고를 받고 수갑을 찬 채 끌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나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필자는 2014년 5월 16일부터 6월 8일까지 캐나다 토론토 근교 미시시가(Missiauga)에 살고 있는 셋째딸의 가정을 방문한 일이 있다. 딸의 가족은 캐나다에 이주하면서 10년 가까이 큰빛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딸의 가족 등과 함께 큰빛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하면서 자연스럽게 임현수 목사를 만나 뵈올 수가 있었다.필자는 그때 처음으로 임현수 목사를 만나게 되었지만 처음 만난 그의 인상은 부드럽고 겸손했다. 그는 아이들이나 노인이나 그리고 사회적 지위고하에 관계없이 누구나 쉽게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좋은 품격을 지니고 있었다.그의 설교는 보수적이면서도 논리가 정연했고 흔히 접할 수 없는 예화를 설교에 적절히 인용하여 설교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했으며 무조건 믿으라는 식으로 억압하거나 무엇을 하지 않으면 망한다는 식으로 협박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강단에서 아멘이나 할렐루야를 유도하거나 웃음을 자아내기 위해 천박한 코메디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큰빛교회의 예배 분위기는 시종 경견하면서도 장엄했고 영혼 속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와 찬송으로 분위기가 뜨거웠다.필자는 6월 8일 떠나오는 날 아침 1부 예배에 참석하고 나오다가 예배실 밖에서 목사님과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누고 비행장으로 직행했다. 그 후 몇 달 되지 않아 북한에서 억류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나는 1년 가까이 지금까지 딸과 전화할 때마다 목사님 소식을 물었으나 딸은 그때마다 쉽게 답을 하지 못하고 울먹이고 있었다.필자가 아는 임현수 목사는 1955년 서울에서 출생했고 대한신학을 졸업한 후 CCC간사로 일하다가 1985년 유학을 목적으로 캐나다에 가게 되었고 토론토대 Knox College에 입학하여 공부하면서 1986년 1월부터 큰빛교회 전도사 일을 맡아보게 되었다. 그는 1989년 9월 서울에서 (수도노회)목사 안수를 받고 1989년 12월에 큰빛교회 부목사로 청빙 받았으며 1990년 12월에 이 교회 초대목사인 박재훈 목사의 후임으로 제2대 위임목사가 되었다.임현수 목사가 이 교회에 부임할 당시 장년교인이 100여명 정도였지만 2014년 필자가 이 교회를 방문했을 당시 교인수가 3,000명이 넘었고 교회당 규모가 대규모였으며, 교회부지가 대학 캠퍼스 만큼이나 넓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서 필자는 큰빛교회야 말로 한국에서 이민한 이민자 교회 중 가장 성공한 교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그러나 큰빛교회는 자체 성장에 만족하지 않고 “세계선교에 헌신하는 교회”라고 하는 표어를 내걸고 세계 도처에 수십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었다. 필자가 이 교회를 방문했을 때도 “2014 큰빛선교한마당” 이라는 현수막을 내걸고 선교기금 마련을 위해 대규모 바자회를 열고 있었다. 이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한 지역은 경제적으로 열악하거나 정치적으로 선교가 자유롭지 못한 곳이 대부분이었다. 그중에 북한도 포함되어 있었다.임현수 목사는 1997년 7월 1일 북한을 방문한 이 후 2013년 4월 17일까지 무려 100회나 자신이 직접 가거나 대표단을 북한에 파송해서 선교사업을 독려했다고 한다. 큰빛교회가 북한에 지원한 사업을 다 열거할 수는 없으나 식량지원 사업으로 황해북도 황주시에 국수공장을 설립 운영하고 있으며, 평안북도 구장군 탄광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들에게 옥수수 600톤을 기증하는 등 수십개 처에서 식량지원을 해왔고 그밖에 병원과 고아원 양로원 등에 의료기기, 약품, 장비, 식량 등 시설자금을 지원했다.특히 교육사업으로 평양교원강습소를 설립 운영해왔다. 이 강습소는 설립을 위해 건축자금 60만불을 투입 지상4층 지하1층 건물을 2009년 11월 2일에 준공했고 2010년 4월에 개교한 후 2013년 4월까지 매년 4기로 나누어 1기에 80명씩 지금까지 12기를 거치면서 무려 900명을 배출했다. 큰빛교회 선교부는 이 강습소의 운영비를 지원해왔고 커리큘럼을 관리하고, 캐나다 미국 호주 영국 등 영어권 국가들로부터 자비로 봉사할 수 있는 교포2세들 중에서 교수단을 90여명 모집하여 분기별로 활용해왔다.이 강습소의 영어교육은 북한 내 영어교육 전문가들로부터 높이 평가를 받고 있으며 사실상 북한에서 최고수준의 영어교육기관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북한동포를 위해 위와 같은 사업을 주도하면서 자기의 삶과 열정을 모두 다 쏟아 온 성직자에게 상을 주지는 못할 망정 “국가전복음모죄”라는 죄명을 뒤집어 씌워 투옥한 것은 인간의 기본양심과 상식을 가지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가난한 국민을 도와주는 일이 죄가 된다면 처음부터 하지 못하게 하면 된다. 그리고 선교가 체제유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처음부터 종교인 출입을 막으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북한정부는 십수년간 가만히 보고만 있다가 단맛 쓴맛 다 빨아먹고 사람을 무슨 물건처럼 용도폐기하고 있으니 이같은 정부를 누가 믿을 수 있을까? 그래서 헤겔(Hegel 1770-1831)은 “국가는 윤리적 이념”이라고 했다.그리고 북한정부는 종교와 정치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부나 정치는 현실적 문제를 중요시 할 수 밖에 없지만 종교는 사람의 양심, 윤리, 영적문제를 더욱 중시하고 있다. 그래서 종교인은 정치인이나 정부의 부도덕한 처사를 보고 가만 있지를 못하는 것이다. 종교인이 정부나 정치인의 부도덕을 보고도 가만 있다면 그러한 종교인은 자기 역할을 포기한 사람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임현수 목사가 설혹 북한정부나 정치인의 도덕성을 비판하는 일이 있었다고 해도 죽을 죄를 지은 것은 아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다윗왕시대 “나단”이라는 선지자는 우리아를 죽음으로 내몰고 그의 아내를 취한 다윗왕의 파렴치한 행동을 그의 면전에서 책망한 일이 있고 다윗왕은 자기를 책망한 나단 앞에서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고 회개함으로 용서받을 수 있었다. 양심적인 정치인은 자기의 잘못을 지적하고 책망하는 성직자를 오히려 존경한다. 그래서 훌륭한 정치인은 넓은 도량을 가진 정치인이라 할 수 있다.북한정부는 현대국가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것은 자유다. 유대인 철학자 스피노자(Spinoza, Baruch De 1632-1677)는 그의 국가론에서 “자유는 국가의 목표다”라고 했다. 그는 말하기를 “국가의 궁극적 목적은 인간을 지배하는 일도 공포에 의하여 구속하는 일도 아니며 오히려 각자가 될 수 있는대로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누구를 막론하고 상처를 입히는 일 없이 생존의 자연적 권리를 가장 잘 유지할 수 있도록 개인을 공포에서 해방하는 일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공포정치를 위해서 임현수 목사를 희생양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 기고
    • 기고
    2015-12-30
  • 노벨상을 타는 인격 교육-12
    노벨상을 타는 지혜 초등학교 교육유대인들은 초등학교 산수과정에서 구구단을 외우는 일이 없습니다. 2학년과 3학년이 되면 곱셈, 나눗셈을 가르치는데 아이들에게 구구단을 외우지 않아도 모두 읽히게 됩니다. 아이들은 머릿속에서 암산을 통하여 구구단과 곱셈을 해내는 습관을 길들여 자기의 지혜를 개발하는데, 결국 4학년이 되면 곱셈 모두를 암기한 사람처럼 척척 해냅니다.3학년부터는 아이들에게 세계화 교육을 가르칩니다. 어릴 때부터 외국어를 가르치는데, 외국어는 아이 한 사람당 2~3개 국어는 자연스럽게 하도록 유도합니다. 입을 가만히 두는 교육이 아니라 입을 계속 놀리는 교육을 만듭니다. 사고(思考)의 비판적(批判的)인 교육문화를 만들어 가는 교육입니다. 자신감(自信感)에다가 자존감(自存感)을 살리는 교육의 영향을 받은 아이는 보모의 이중 언어, 자기부모의 태어난 나라의 말을 자연스럽게 하고 있습니다.학교에서는 암기(暗記) 위주의 공식(公式)을 가르쳐 주질 않습니다. 수학의 공식에서 구구단조차 가르쳐 주질 않고 아이들의 머릿속에서 암산(暗算)을 통하여 구구단의 곱셈 나눗셈을 외우지 않아도 자기 자신의 지혜를 개발해서 곱셈 나눗셈을 모두 암기한 사람처럼 척척 해냅니다.도서관(圖書館)이라고 하면 옆 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하는 것이 예의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창의교육(創意敎育)에서는 도서관에서 조차도 의자와 책상이 두 사람씩 앉게 만들어서 서로가 서로에게 질문과 토론을 끝없이 하게 합니다. 그러다 보니 도서관이 조용한 것이 아니라 시끄럽고 토론을 하는 구조로 운영되고 있습니다.4학년 때부터는 생활영어를 집중적으로 가르칩니다. 병행(竝行)하여 헬라어, 라틴어, 독일어, 스페인어 등 언어의 어휘(語彙) 등을 자연스럽게 가르칩니다.5학년부터는 아랍어를 추가로 가르치므로 초등학교를(우리의 중학교) 졸업하면 외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아이들이 많아집니다. 유대인들의 교육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어느 교육과정에서도 신앙교육은 철저하다는 것입니다. 신앙교육과 인격형성교육이 우선순위의 밑바탕에 있고, 여기에 사회교육과 인문자연을 가르치게 됨으로 공부가 지겹지 않습니다. 공부가 재미있고, 흥미를 가지게 되고, 각자 깨달은 것들을 자연스럽게 토론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남의 말도 들어주는 인격형성이 되는 것입니다.반면, 우리는 지독한 암기위주의 교육을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토론하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지를 않을 뿐만 아니라 공부도 지겨워하면서 토론은 더 지겨워하는 지극히 자기중심으로 흐르는 교육입니다.유대인의 교육에서 과외수업이라고 하면 예능계통(藝能系統)의 특기교육을 말하며 학교수업이 끝나는 오후나 저녁시간을 이용하여 교과과정 이외의 기능교육을 실시하고 있습니다.예능계통의 과외수업은 콘소바리토움이라는 공립예술학원(公立藝術學園)에서 가르치게 되어 있는데, 공립예술학원은 인구가 밀집된 도시에 세워져 있습니다. 대도시에는 여러 개가 세워져 있으나 대부분 하나의 시에 한 개씩 세워져 시에서 운영하고 있습니다.예능교사(藝能敎師)들은 대부분 전(前) 현직 음악교사들과 퇴역 연주자로 조직되어 있습니다. 대 연주실과 소 연주실이 따로 나뉘어 있고, 현악기, 관악기, 타악기 반도 따로 설치되어 있습니다. 무용, 미술 등 자기의 소질과 취미에 따라 예능계의 모든 과외반이 있어서 모든 아이들이 자기 취향에 따라 맞는 특기교육을 받을 수 있습니다.예술학원에서는 적성검사를 실시하여 적성에 맞지 않으면 애당초 입학이 허용되질 않습니다. 자기 악기는 반드시 자기 집에 갖추고 있어서 가정에서도 하루에 한 두 시간 이상 복습을 할 수 있어야만 입학을 조건부로 허락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정기적으로 주 발표회, 월 발표회 그리고 년2회 공동발표회를 통하여 학부모들과 학생들이 모여 엄숙하게 발표회를 진행합니다.과외지도(課外指導)는 학생과 학부모들에 의해 주도되고 운영비를 시 예산에서 보조하기 때문에 수업료는 매우 저렴합니다. 따라서 아이들에게 적성만 맞는다면 누구나 예능과외를 시킬 수가 있습니다.
    • 기고
    • 기고
    2015-12-30
  • 개혁주의 성경적 상담의 목회적 적용-4
    2) 상담목회의 가능성그스타프손(J. Gustafson)은 “목회사역이 사회정치에서 제시하고 있는 정치의 총체적 모델과는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헌신적 사역인 목회사역을 담당한 사람들의 세상 정치적 모델과 동일하다고 잘못 이해하고 있다. 오늘의 교회 지도자들이 세상 정치의 인상을 짙게 주기 위해서, 여론을 형성시키고 재능의 다양성을 최대한도로 고려하고 있다. 막스 베버(Max Weber)는 「소명으로서의 정치」 (Politics as a Vocation)라는 글에서 정치인의 첫 자질은 천명(天命)에 의한다는 소명감이 있어야 함을 강조했다. 그는 정치인의 자질로서 책임감과 균형감 등을 주장하였다.이와 마찬가지로 총체적 사역자인 목회자는 목회 기반을 튼튼히 하며 일치감을 형성시키며, 목회사역을 원활하게 할 수 있는 계획의 수립을 잘해야 한다. 사실 목회사역은 성도들, 성도의 가정, 아동과 청소년들, 장년층과 노인들, 교단 관계, 신학교, 이웃, 지역사회, 그리고 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 총체적 조절이 계속되는 실제사역이다. 총체적 목회사역의 개념은 이러한 실제적 사역을 위하여 이미 있었던 목표와 앞으로 있어야 할 목표에 대한 기대와 관련되어 있는 것과 앞으로 있어야 할 것을 정기적으로 모여 토론하고 상담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상담목회는 총체적 모델로서의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상담을 통해 교회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발굴하고 치유하는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보다 조직화하고 구체화하여 상담목회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상담목회는 현대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사역으로서의 기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문제를 안고 있는 인간들의 구성체인 교회 안에서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며 치유하는 과정을 통해서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하나의 방안이기 때문이다. 상담목회는 인간의 근원적 문제 해결의 길이며, 현대교회가 추구해야 할 목회적 대안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상담목회는 교회사를 통해서 그 역사적 모델을 찾을 수 있고 오늘의 현실교회에서도 적용 가능하며 그 열매를 거둘 수 있다.2. 상담목회의 역사적 사례상담목회는 오늘에 와서 갑자기 제기된 것이 아니라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이미 실천되어 왔다. 그 중 중요한 사례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1) 개신교 목회자들의 상담목회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목회자들 가운데서 상담을 목회사역에 적용한 사람들이 나타났고, 이들을 통하여 목회상담의 새로운 영역이 확장되었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몇사람을 고찰하면 다음과 같다.(1) 리챠드 백스터의 목회영국의 청교도 목사였던 리챠드 백스터(Richard Baxter)는 개신교의 상담이 무엇인지를 밝혀주었다. 그는 1656년에 출간한 그의 대표적 저서인 Reformed Pastor에서에서 신자 개개인을 돌아보는 목회의 중요성과 가치를 강조하였다. 그는 목회사역을 통하여 그의 주장들을 실천하였다. 그는 목회자로서 인간의 회심에 관심을 기울였고, 여기서 생기는 문제와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마련하였다. 그는 교구(敎區) 안에 있는 모든 가정들과 최소한 일 년에 한 시간씩 대화하는 방법을 활용했다.백스터는 목회상담의 영역을 확장시켜서 매주 목요일에 가정 단위로 성도들을 초청하여 상담하는 일을 했으며, 그 외에도 사모와 부교역자를 동원하여 월요일과 화요일에도 교인들과 대화하였다. 그는 이렇게 하여 일 년에 800 세대의 성도들을 만나서 개인적 신앙문제에 대해서 상담하였다. 그는 이외에도 목회지에서 환자를 돌보았고, 서신상담(書信相談)도 하였다. 그는 개인적으로 한 평생 질병으로 육체적 고통을 겪으면서도 교인들을 돌아보았다.(2) 죤 웨슬리의 목회감리교회의 창시자이며, 세계 선교의 역동적인 사역을 감당한 웨슬리(John Wesley)는 죄악과 부패로 가득한 영국사회를 향하여 복음의 메시지를 강하게 전파하는 동시에 새로운 사역들을 시작하였다. 웨슬리의 설교는 새 생활과 새 경험을 강력하게 요청하는 것이었고, 인간의 영혼 속에 내제하는 신성을 강조했다. 그는 가난한 자, 병든 자, 죄수들을 방문하여 힘 있게 설교하였다.그는 아무리 회개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옛날의 관계와 환경이 변화되지 않는 한 새 사람이 되는 길이 차단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새로운 시도를 하였다. 이 새로운 시도가 바로 “클래스 모임”(Class Meetings)인데 이것이 나중에 ‘속회’로 발전되어 오늘날 까지도 존속되어 오고 있다.웨슬리는 이러한 소집단 뿐만 아니라 개개인에게도 관심을 가졌다. 그는 가난하고 병든 자를 치유하였고, 그들을 위한 각종 프로그램을 개발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이 최고의 양약이며, 사람들에게 건강한 삶을 주는 원동력이라고 강조하였다.(3) 죤 오벨린의 목회프랑스의 복스(Vosges)라는 산간 지방에서 다섯 개의 작은 마을을 교구로 하여 50년 이상 목회한 오벨린(John Frederick Oberlin) 목사의 사역은 상담목회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성도들의 가계(家系), 신앙의 경향, 행동, 성격 등을 세밀하게 기록하였고, 말을 타고 교구를 순회하며 교인들을 돌보았다. 백스터의 경우처럼 교구에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성도들을 치료하였고, 사모를 훈련시켜서 간호사의 역할을 하게 했었다.그는 이외에도 인간의 환경이 효과적으로 개선되지 않으면 개인의 삶이 효과적으로 보호 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사회개선과 사회개발을 추진하였다. 또 교구민들을 교육하였고, 새로운 영농법(營農法)도 개발하였다.(4) 헨리 드루몬드의 목회 목회 사역에서 상담을 실천한 또 다른 예는 스코틀랜드 자유교회에서 사역했던 드루몬드(Henry Drumond) 목사이다. 그는 설교만으로는 교인들을 효과적으로 돌볼 수가 없기 때문에 개개인을 돌봐야 한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가 이러한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은 1893년에 ‘영적 진단’(Spiritual Diagnosis)이란 글을 읽고 임상적 상담훈련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면서 부터이다.그는 건강과 질병 속에서 고통 받는 영혼에 대한 탐구는 육체의 건강과 질병에 대한 치료처럼 과학적으로 연구되어야 하며, 의사들이 육체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목회자는 영적인 충고자로서 인간의 영혼에 대해서 포괄적으로 알아야 한다는 그 글의 내용에 전폭적으로 찬동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부흥사 무디(D. L. Moody)의 요청에 의하여 상담 사역을 감당하였으며, 설교와 개인상담을 통하여 문제해결의 균형을 잡아 나갔다.2) 현대 목회에서의 상담목회현대교회는 현대인들이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설교와 심방만이 아닌 돌봄과 치유가 필요하게 되었다.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설교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상담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문제 해결을 시도하게 되었다. 이것을 위하여 목회자들이 영적 치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육적 치유도 하기 위하여 돌봄의 사역을 시작하고, 목회자를 훈련하는 과정으로 1930년대부터 많은 신학대학대학원에서 신학생들에게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며 상담 훈련을 하는 임상교육이 구체화되었다. 이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1) 목회자들의 상담목회 목회현장에서 상담을 활용하는 대표적 사례가 미국과 영국에서 일어났다. 이들은 교회 안에서 상담을 시작하고 상담을 통하여 성도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돌보는 사역을 시작했다.미국의 포스딕(Harrry Emerson Fodsick, 1878-1969) 목사는 1903년에 침례교 목사로 안수받고 뉴욕의 유니온(Union) 신학교에서 가르치며, 리버사이드 침례교회(Riverside Baptist Church)에서 20년 동안 설교한 유명한 복음적 자유주의자였다. 그는 당대의 유명한 설교가였으나 고민하고 방황하는 개인을 돌아보는 일에 관심을 가지다가 ‘고백적 의논’(Confessional Conferences)이라는 형태의 상담목회를 시작하였다.그가 이러한 목회적 응답을 한 것은 당시의 교인들이 안고 있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개인적 문제에 대한 자신의 제약성을 절감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친구이며, 정신위생의 선구자인 샐몬 박사(Dr. Thomas W. Salmon)의 도움으로 치료이론, 진단방법, 환자들의 종교적 태도와 영적인 차원을 연구하였다. 그는 사실상 신학생 시절에 극도의 육체적 질병과 신경쇠약으로 고통을 겪는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 분야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영국의 경우를 보면 런던의 씨티 템플(City Temple in London)의 웨더헤드(Lelie Weatherhead) 목사가 상담목회를 실천하였다. 그는 심리치료소를 개설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상담하였다. 그는 이 분야에 관한 많은 논문들을 발표하여 상담목회에 대한 관심을 진작시켰다. 그의 상담목회 사역의 특성은 의사와 협력하여 치료하였다는 점이며, 의사의 도움 없이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심한 증상을 일으키는 환자들을 치료하지 않았다.
    • 기고
    • 기고
    2015-12-30
  • 노벨상을 타는 인격 교육-11
    노벨상을 타는 지혜 초등학교 교육유대인 부모는 하나님의 은혜(恩惠)로 자녀를 낳게 되면 자녀에게 밥 먹이고 옷 입히고 세상의 좋은 학교에 보내어 출세시키는 것보다도, 조상에게서 전수(傳授)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수하는 것을 가장 큰 의무(義務)로 여깁니다.조상으로 받은 613개의 율법(律法)을 가르쳐 자식에게 전수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성(人間性)이 살아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야지,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役事)도 끊이지 않고 대(代)를 이어 가는 것으로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생의 근본으로 가르치기 때문에 이 단계가 끝나면 세상경험의 교육은 3~4년만 집중적으로 가르치면 모두 소화해 내는 것입니다.유대인은 만6세가 된 어린이들은 ‘간호바’를 거쳐 모두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9년동안 초등교육(初等敎育)이 실시됩니다. 유대인의 초등교육은 우리의 중학교(中學校) 과정까지 모두 9년으로 모든 국민이 교육받아야 하는 의무교육입니다. 이때의 학교 이름은 ‘베일하세펄아마밑’이라는 보통교육(普通敎育) 기관입니다.초등학교도 대부분 소규모로 농촌에는 3~4개 마을에 1개의 학교가 설립되어 있고, 도시에는 도보로 5분 이내의 거리에 학교가 설립되어 있습니다. 평균 학급 수는 9학급 내지 18학급으로 되어 있습니다. 한 학급당 학생 수는 30명입니다. 30명에서 2명만 넘어도 분반을 하여 가르칩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면 교과서는 물론이요 노트, 연필, 크레파스, 도화지, 지우개에 이르기까지 수업할 수 있는 모든 도구들을 학교가 무료로 공급합니다. 완전한 의무교육입니다.특색(特色)을 가르치는 교육을 통해서 소학교 1학년 때의 교육은 경영 능력을 가르치기도 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해보는 쪽으로 아이들을 교육할 때에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일을 아주 자연스럽게 합니다. 공공청소를 한다든지, 자원봉사나 선행을 하는 일에 재미를 느끼게 합니다. 소방서, 파출소, 동사무소, 보건소, 병원 등 집에서 느끼지 못했던 호기심을 충족시켜 줍니다.체험교육을 통해서 경영의 능력을 기르게 합니다. 이때부터 국민의 기본이 되는 글자와 숫자를 가르치고, 하나님의 말씀 중에 율법(律法)을 가르칩니다. 율법을 통해 선(善)과 악(惡)을 분명하게 가르치는 것입니다.이때의 아이들은 선(善)은 기를 쓰고 할려고 합니다. 반면에 악(惡)은 기를 쓰고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문화적인 특성을 살려주는 교육을 합니다.이스라엘에서 어린아이들에게 최고(最高)의 대접을 해주는 날이 있습니다. 부림절입니다. 부림절은 성경 에스더서의 이야기로 아하수에로 통치시대에 하만이라는 총리가 유대인 말살 정책을 만들어서 유대인 전체가 몰살할 처지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에게 이 정신을 이어지게 하고, 어린이들에게 이 나라와 이 민족에게 희망이 있는 것을 알고, 우리들의 어린이날과 같이 지켜지게 하는 날입니다.이를 통해 어린이들에게 꿈을 심어 줍니다. 어린아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주는 날입니다. 왕, 왕비. 공주, 장군, 황제, 호민관, 모든 복장까지도 다 해줍니다. 이 날을 유대인들은 '요덴하만'의 날이라고 합니다. 하만의 귀 같은 만두같이 생긴 음식을 만들어 먹게 하고, 미래의 비젼을 세워주는 날입니다. 한국의 어린이날과 같은 행사를 하면서 애국 애족을 심어주는 절기입니다. 온가족이 포도주로 건배를 드는 날이요, 어린이를 위한 가족의 날입니다. 이 날만은 어린아이의 분장대로 어른이 복종을 해주는 날 입니다. 곧 어린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날 입니다.초등학교 2학년부터는 음악, 미술, 공작, 무용, 체육 등을 가르칩니다. 예능계 과정을 가르치는 교사가 별도로 있어서 담임 외에 전문교육 과정으로 선생님들이 소질(素質)이 있는 학생을 가르쳐 줍니다. 아이들에게 호기심(好奇心)을 유발 시켜주고 왜? 라고 하는 끝없는 질문을 많이 하는 교육을 가르칩니다.이렇게 기초가 튼튼한 교육을 가르치기 때문에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글자교육과 숫자교육을 굉장히 빨리 끝냅니다. 그러므로 공부를 지겨워하는 아이는 하나도 없습니다.학교에서는 암기식 주입교육을 철저하게 배제하여 지능개발을 위한 교육방법이 전체 초등학교의 교과과정에서 뚜렷하게 반영되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자기만의 생각을 끝없이 발표합니다.
    • 기고
    • 기고
    2015-12-19
  • 개혁주의 성경적 상담의 목회적 적용-3
    우리는 여기서 선택의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된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과 하나님을 떠난 자의 삶이라는 두 가지 선택의 길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러한 근거에서 기독교적 진리를 바탕으로 하는 상담신학이 연구되어야 한다. 비기독교적 원리를 바탕으로 한 논리적 도적에 대해서 성경적 응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많은 성경적 상담자들이 신학적 훈련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비기독교적 원리를 수용하거나 타협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음을 감안할 때 상담신학의 원리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3. 개혁주의 성경적 상담과 신학의 관계그렇다면 ‘개혁주의 신학과 성경적 상담학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규명할 필요가 있다. 신학이란 여러 가지 주제에 관해서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조직적으로 이해하는 학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신학이란 어떤 주어진 교리나 가르침에 관하여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를 체계화시키는 작업이다.상담학은 실천신학의 한 분야로서 성경이 인간과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문제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교훈하고 있는가를 규명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으로 변화된 삶을 살아가도록 돕는 학문이다.성경적 상담학이란 신학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성경은 인간들의 사고와 행동원리를 제시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궁극적 변화를 도모하려는 상담에서 신학적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상담과정에서 피상담자를 잘못 인도하는 것을 피하고, 피상담자의 사고나 실제 삶에서의 오류를 피하기 위해서,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진리를 권위있게 전달하기 위하여 성경을 신학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성경적 상담학이란 성경 해석학적 작업인 동시에 실천적 작업이다. 이것은 성경 해석을 바로 하여 삶의 정황(context)에 적용하는 일련의 신학행위이다. 개혁주의 신학과 성경적 상담학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신학의 틀 안에서 상담학적 적용을 함으로써 성경이 추구하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개혁주의 성경적 상담학은 개혁주의 신학의 원리를 통해서 상담의 원리와 방법을 개발해야 한다.지금까지 성경적 상담학을 신학과 연관이 없는 심리학적 영역으로 이해하는 경향들이 많았던 데에 비하여 ‘개혁주의 상담신학’이라는 신학과 상담학의 연관을 시도하는 일련의 연구들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이렇게 신학과 상담학의 관계는 유기적인 관계이다. 상담은 신학이 없이는 불가능하며, 신학적 연구는 상담학의 연구를 증진시키는 촉진제 구실을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필자의 이러한 탐구는 필자의 신학적 입장이 개혁주의 신학이라는 점을 전제하고 시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바른 원리의 정립을 통한 방법론의 개발을 추구하는 순서를 택하는 것이다. Ⅲ. 개혁주의 성경적 상담의 목회적 적용개혁주의 성경적 상담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 적용되는 ‘현장화의 상담’이다. 특히 개혁주의를 신봉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절대권위에 따라 성경적 상담을 실천해야 한다. 이것을 위해 우리의 목회 모델은 ‘상담목회’가 되어야 한다.삶의 현장에서 여러 가지 문제들로 인하여 고민하고 방황하는 많은 성도들을 돕기 위한 성경적 상담의 실천을 통해 성경적 목회를 도모하는 목회 풍토가 조성되어야 한다. 이 사역을 위해 우리 모두의 헌신이 요구된다.상담목회는 교육목회와 함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며 치유하는 선포와 교육과 치유의 예수님의 삼중사역을 집약한 총체적 치유사역의 한 분야로 조명되어야 하며, 여기에 대한 연구가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상담목회의 필요성과 가능성, 역사적 사례, 현실적 전략 등을 탐구하려고 한다.1. 상담목회의 필요성과 가능성우리에게 상담목회가 왜 필요하며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라는 문제는 많은 논란을 가져오게 한다. 이것을 필요성과 가능성의 측면에서 고찰하려고 한다.1) 상담목회의 필요성오늘날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상담목회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나름대로 상담목회를 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교회 안에 상담실을 두고 전문가들을 직원으로 근무하게 하여 교인들의 문제를 치유하려고 노력하는 대형교회들이 있고, 결혼예비학교와 아버지학교, 부부대학, 자녀학교를 개최하고 주말이나 방학을 이용한 치유프로그램을 시도하는 대형교회도 있다. 이러한 노력들은 반가운 일이고 환영해야 할 일이지만 그 프로그램들을 총괄하는 목회자들의 상담목회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고, 그 프로그램의 내용이 성경적인지, 그 프로그램에 참석한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변화되었는지에 대한 점검과 습관화를 위한 후속조치가 있어야 되는데 외국의 프로그램을 소개하는데 급급한 현실이라고 보여진다. 따라서 효과적인 상담목회를 위해서는 목회자들이 성도들을 잘 돌보고 치유하는 목회자를 위하여 성경과 철학, 성경과 심리학, 성경과 교육학, 성경과 사회학, 성경과 의학, 성경과 약학, 성경과 음악, 성경과 미술등의 주변학문들을 어떻게 접목시킬 것인가에 대해 연구가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에 상담목회가 필요한 몇가지 이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1) 반기독교적 사고와 확산한국교회 안에는 세속화와 유교적인 영향 뿐만 아니라 반기독교적인 양상들이 오염되어 나타나고 있다. 한국 교회 안에서 활기를 띠고 있는 상담이론과 목회적 적용 가운데는 반기독교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 것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면 한국교회에 만연되어 있는 프로이드(S. Freud)나 스키너(B. F. Skinner), 로저스(C. Rogers)의 이론들이다. 프로이드의 이론은 반기독교적 사고의 발단이다. 프로이드는 “종교야말로 심적인 문제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일시적인 안정감을 가져다 줄뿐 일종의 마취제와 같은 하나의 환상(illusion), 또는 망상형 신경증의 보편적인 한 형태이다”라고 말한다. 또한 스키너의행동주의 심리학이나 로저스의 비지시적 상담 등은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기본진리를 오도하는 이러한 이론들이 아무런 여과도 없이 그대로 활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들의 도전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상담목회를 발전시키며, 이것을 목회의 현장에 적용하는 노력을 하여야 한다.(2) 비성경적 상담이론들의 활기한국교회와 여러 신학교와 기관에서 이러한 비성경적인 상담이론들이 ‘기독교 상담’이라는 이름으로 가르쳐지고 적용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 상담이론들을 세밀히 관찰해 보면 인본주의적 상담이론을 ‘기독교화’한다는 미명아래 ‘기독교 상담’이라고 포장한 것들이 많다. 연구자는 이것을 ‘비성경적’이라고 규정하며, 이러한 이론들을 활기를 띠는 것에 대하여 우려하고 있다.기독교 상담은 심리학적 용어나 체엄에 성경 구절을 첨가한 것이 아니라 성경을 모든 학문의 근거로 삼고, 성경적 세계관을 통해서 문제에 접근하는 상담을 의미한다. 기독교 상담학은 성경의 원리와 방법을 토대로 하여, 신학적 바탕이 바로 형성되어야 한다. 이것을 ‘상담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정립되지 못하면 성경적인 상담목회가 불가능하다.우리는 피상담자들을 변화시켜서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일꾼들로 양육하기 위하여 비성경적 상담이론이 확산되는 것을 막고 성경과 바른 신학의 토대 위에 ‘기독교상담학’이 발전되어 나가도록 해야 하며 이것을 목회 현장에 적용하여야 한다.(3) 성경적 세계관의 확산의 필요상담목회는 성경적 세계관을 확산시키는 한 영역이다. 신앙과 학문을 별개의 영역으로 생각하는 인본주의적 사고에서 탈피하고, 성경적 배경을 가진 학문의 정립과 확산을 도모해야 한다.상담목회의 필요성은 반기독교적 혹은 비성경적 상담 이론의 확산을 막으려는 소극적 대응책만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성경적 학문세계의 확산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종합학문으로서의 기독교 상담학을 바탕으로 한 상담목회를 통해서 현대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도구로서의 사명을 다해야 하며, 성경적 원리에 따른 학문의 증진과 확산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2) 상담목회의 가능성그러면 성경적 기독교상담학을 기초로 한 상담목회가 가능한가?를 물어야 한다.여기에 대해서 여러 가지 방안이 제시될 수 있으나 우리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전제에서 그 가능성을 찾으려고 한다.목회사역에서 상담사역은 총체적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총체적 사역이란 영혼과 육체, 가정과 사회, 나아가서 삶의 전영역에서의 사역을 의미하며, 이것은 전인치유라는 개념과도 연결된다. 허드슨(W. Hudson)은 총체적인 목회사역을 자발적인 신앙생활의 기본적인 성격을 지는 것의 하나로, 특히 불신자들을 찾아 새신자로 이끄는 일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 기고
    • 기고
    2015-12-19
  • 개혁주의 성경적 상담의 목회적 적용 2
    Ⅱ.개혁주의 성경적 상담의 특성개혁주의 (혹은 칼빈주의)의 근본원리가 하나님의 주권인 것처럼 성경적 상담의 근본 원리도 하나님께 있다. 개혁주의 성경적 상담이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상담자의 능력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으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는 해결자이심을 믿는다. 상담자는 하나님의 능력과 말씀에 의지하여 피상담자의 문제 해결을 위하여 돕는 하나님의 도구로서 사용될 뿐이다. 이것은 가장 단순한 것 같으나 상담의 기본 원리를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는 것으로서 주요한 의미를 갖는다. 개혁주의 사상에 의하면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은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신다. 에베소서 1장 11절에서 이것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의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역사 세계를 주관하심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 그리고 인간의 예정과 기업되심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 하나님의 주권은 성경적 상담의 기본이다. 하나님의 계획을 무시하고 인간의 뜻대로 문제를 풀어나가려고 하는 것은 성경적 상담이 아니다. 피상담자의 문제가 아무리 심각하고 이런 일이 왜 일어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경우에도 상담자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하심으로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는 것을 믿고 상담에 임해야 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느니라”는 로마서 8장 28절 말씀을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혁주의적 상담자들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모든 것을 합력케 하시고 선을 이루신다는 것을 믿어야 하고 우리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종국에 가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을 목적으로 상담을 해야 한다. 또한 상담과정에서 죄와 죄책감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점진적으로 성화되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성경적 상담은 실천적 칼빈주의의 한 영역이며 학문이다. 인간의 죄로 인하여 타락하게 되고, 이 땅에 하나님을 거역하는 불 신앙적 역사가 가득한데 이것을 인간의 지혜가 방법으로 고치기는 불가능한 일이다. 여기에 필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이다.“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 8-9).이러한 원리 속에서 성경적 상담은 인간의 삶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인간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를 인간의 이론이나 지혜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풀어나가며, 하나님의 역사로 고치는 것을 추구한다. 이렇게 성경적 상담은 개혁주의의 원리를 바탕으로 하여 인간이 안고 있는 문제들을 삶의 현장에서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이다. 1. 개혁주의 성경적 상담과 기독교 상담학계의 현실한국교회와 기독교 상담학계에서는 ‘기독교 상담’ 혹은 ‘성경적 상담’이라는 이름의 상담운동이 넘쳐나고 있다. 우리 주변의 상담이론들 가운데 ‘기독교 상담’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이 많은데, 그것을 세밀히 관찰해 보면 인본주의적 상담이론을 ‘기독교화’한다는 미명아래 ‘기독교 상담’이라고 포장한 것들이 많다. 필자는 이것을 ‘비성경적’이라고 규정하며, 이러한 이론들이 활기를 띄는 것에 대해서 우려하고 있다. 여기서 ‘성경적’이라는 개념과 ‘상담’이라는 두 가지 개념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기독교의 핵심적 기준은 성경이기 때문에 기독교 상담 혹은 성경적 상담의 기준은 심리학이 아니고 반드시 성경이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기독교 상담’이 안고 있는 문제는 한국이나 미국을 막론하고 매우 심각하다. 이런 명칭을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상담들은 성경적이 아니고 실천적 칼빈주의 혹은 개혁주의가 아니다. 필자는 이 문제에 대해 명칭은 기독교 상담이나 성경적 상담이라고 사용하고 있으나 내용은 성경과는 거리가 먼 기독교 상담들이 추구하는 것은 심리학 중심주의, 자아중심주의, 비기독교적 사고 때문이라고 이미 여러 책이나 논문에서 지적한 바 있다. 이 세 가지 문제들은 한국 기독교계에서 하나의 조합을 이루어 기독교 상담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실정이다.성경을 바탕으로 한 기독교 세계관의 관점에서 상담사역을 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개혁주의적 성경적 상담이기에 우리는 이 원리를 더욱 확산시키고 기본적으로 성경적 신앙의 적용을 무시하고 심리학적인 이론과 방법론에 치중하는 비성경적 상담을 하는 목회자와 평신도들이 범람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 상담학계를 휩쓸고 있는 인본주의적 상담이론은 심리학중심주의, 자아중심주의, 반기독교적 사고라고 할 수 있다. 이것들의 출발점과 중심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다.2. 개혁주의 성경적 상담의 이해 그렇다면 개혁주의(혹은 실천적 칼빈주의)의 관점에서 말하는 성경적 상담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고찰해 보자. 많은 사람들이 상담에 대한 정의를 말하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다양한 정의가 나올 수 있다. 상담에 관한 정의는 정의를 하는 사람 관점과 사상의 발로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기독교 상담분야에서도 아담스 (Jay E. Adams)는 상담을 “성령의 중생케 하시는 사역과 성화시키는 사역의 조화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면서 성경적 상담이란 ① 성경에서 그는 동기를 찾으며 ② 성경을 그 전제 조건으로 하며 ③ 성경의 목표를 뼈대로 삼아 ④ 성경에 모델로 주어지고 명령된 원리와 실천에 따라서 조직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라고 하였고, 왈레스 카(Wallacd Carr)는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도록 돕는 것”(벧후 3:18)이라고 주장하면서 에베소서 4:13-15을 제시하였다.이러한 정의 들은 각기 특성과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필자는 성경적 상담을 실천적 칼빈주의적 관점에서 “상담자와 피상담자의 대면관계에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고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비성경적 사고, 감정, 행동, 성품을 성경적인 사고와 감정과 행동으로 변화시키기 위하여 재교육 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따라서 필자는 성경적 상담의 목적에 대해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는 것(골 1:28) 즉 사람을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돕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이것이 개혁주의적 관점의 성경적 상담이라고 주장한다.이렇게 성경적 상담이 목적하고 있는 인간의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 상담의 근거에 대해 고찰하여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상담의 기초를 심리학이나 정신병리학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데, 이러한 견해는 눈에 보이는 현상에 집착하면서 인간의 근원에 대하여 무시하는 경향에서 온다. 상담에 관한 기독교적 토대는 신구약 성경이다. 성경은 상담의 근거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인간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성경은 인간을 변화시켜서 그리스도를 닮아 가도록 만드신다.상담이란 말씀 사역(事役)의 일부이다. 성경이 성경적 상담의 토대라는 것은 기독교 상담의 본질상 그럴 수밖에 없다. 성경의 가르침을 통하여 인간의 가치관, 사고(思考), 관계(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 성품, 행동 등을 바꿀 수 있으며, 이것은 피상담자의 문제 해결뿐만 아니라 삶을 변화시킨다. 이러한 변화의 필요와 방법을 추구하고, 그 변화를 통해서 실질적 열매를 추구하는 기독교 상담은 성경의 원리에 따라서 고찰해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고, 하나님을 의존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이다(롬 11:36). 그러므로 인간은 자율적 존재가 아니다.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처음부터 필수적 요소이다. 이것은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 아니라 창조의 원리이며, 근원이다. 말씀이 없이는 자신의 존재 의미나 삶의 방향을 알 수 없고, 이 세계를 이해할 수 없으며,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사는 방법도 알지 못한다.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이 세상에서 바른 삶을 영위할 수가 없다. 원래는 선하고 완전한 존재로 창조 받은 인간이 타락하므로 그 선함과 완전함을 상실하고 말았다.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정상화가 최대의 명제이며, 죄에서의 해방을 추구하여야만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존재로 지음을 받았으나 범죄함으로 인해서 저주의 자리에 이르렀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게 되었다.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위치로 돌아가도록 변화시켜야 하는데 이것은 성경 말씀의 역사를 통해서만 가능하게 된다.시편 1편이 제시하는 모델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악과의 타협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즉 ‘악인의 꾀’(‘꾀’란 ‘상담’이란 뜻이다)를 따라 죄인의 길에 서게 되고, 오만한 자리에 않게 된다.
    • 기고
    • 기고
    2015-12-11
  • 노벨상을 타는 인격 교육 ❿
    노벨상을 타는 지혜교육(知慧敎育)의 실제“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賞給)이요.”인격에서 하나님을 닮은 인격이 태의 상급이로다(시 127:3). 유대인들에게 자식은 하나님이 그 부모에게 상급으로 값없이 주신 선물이라는 것입니다.하나님의 선물로 번역된 기업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나할랏’( nachalah)입니다. 이 뜻은 재산, 소유, 유산의 뜻이 있으며, 동사로는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재산을 할당해주다’란 뜻이 있습니다. 즉 자식은 하나님이 나에게 하나님의 재산을 부모에게 맡겨놓은 재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형상(形狀)을 닮도록 키워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지금 우리들도 어머니가 불러주던 자장가는 머리가 희끗희끗 세어진 지금도 아련히 가슴에 남아있는 것처럼, 유대인들에게 무궁무진하게 어머니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 성경은 인격형성의 근본을 만들어 줍니다. 잠들 때 마다, 깰 때 마다, 반드시 기도를 해주는 것은 아이가 혼자가 아닌 항상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을 심어주고 있습니다.사람은 태어나서 인격이 형성되는데 제일 처음 관여하는 사람이 어머니입니다. 자식은 내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품을 잠시 나에게 맡긴 것입니다. 아이에게 무슨 교육이나 당부를 하더라도 똑바로 눈을 보고 이야기를 합니다.어린 아기들에게 잠에서 깨어 의식이 돌아오는 시간에는 어머니가 아기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해줍니다. 아기들이 잠들 때도 머리 위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해줍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 의식이 있으면 하나님의 사랑과 그 은혜(恩惠, , 헤세드)에 대해 생각하게 하되,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 홍해 바다의 기적을 베푸신 하나님,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하나님, 유대인의 대적 불레셋을 무찔러주신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치고,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고 하나님을 사모하게 하는 등 유대인의 정체성 교육을 어머니가 담당합니다.신기하게도 하나님의 말씀은 들어도, 들어도, 은혜가 더해 집니다. 이렇게 3세가 되기까지 인격형성의 기초가 되는 시기에 세상교육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누구인가? 내가 가장 귀한 존재라는 것을 귀가 따갑도록 듣게 되는 것입니다.이렇게 스스로를 확인하고 다짐하는 인성교육은 가정에서 어린 유아시절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 말씀을 계속 들려주면 아이에게는 정체성 교육이 됩니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하나님이 나를 지키신다’라는 확신을 갖게 합니다.그렇다고 우리들의 어머니들처럼 조기교육은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글자 교육을 가르치지 않고, 인생은 하나님이 주신 행복이라는 것만 가르칩니다.이처럼 아이들의 인격형성은 이미 어머니가 담당하고 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3개월이 지나면 눈이 밝아지고, 6개월이 지나면 귀가 열립니다. 그리고 1년이 지나면 말이 열립니다. 인격교육은 이맘 때에 하는 것이 사람의 평생을 좌우합니다. 특히 아이에게 기도를 반복적으로 해주면 그 아이는 자기도 모르게 선한 것을 구별할 줄 압니다.기도는 양심을 회복하게 하고 성장시킵니다. 인격이 달라지고 사람이 달라집니다. 어머니의 교육이 제대로 되어있으면 희생이 근본이요 봉사와 헌신이 살아있습니다.세상교육 치열한 경쟁교육에서 탈락하면 사기꾼이 양산되고 사회문제를 만듭니다. 내 자식을 리더나 지도자로 만들고 싶으면 희생과 헌신이 많은 사람이 되도록 하세요? 그래야 지도자로 성장합니다.한국의 어머니들이여! 자녀들에게 기독교 근본교육을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당신의 자녀가 미래의 지도자가 됩니다. 자신이 잘못된 길로 나갔다가도 어머니의 기도(祈禱)가 생각이 나면 잘못된 그 길에서 돌이키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기도보다도 잔소리부터 합니다. 거기다가 아이들에게 별별 공갈(恐喝)을 다 치고 있습니다.어머니 들이여! 우리 꿈인 아이들에게 어머니의 교육을 제대로 시키시고 인격형성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쳐 우리의 자식들이 세계의 석학, 세계의 박사, 세계의 작가, 세계의 기술자, 세계의 지도자들이 많이 나오고, 노벨상 수상자들이 많이 나오는 길로 어머니들이 솔선수범하시기 바랍니다.
    • 기고
    • 기고
    2015-12-11
  • 정정숙목사-개혁주의 성경적 상담의 목회적 적용 -1
    서론한국교회의 목회형태는 시대에 따라 변천되어 왔다. 한국의 초대교회는 사경회 중심의 목회모델이었고, 1960년대에는 은사 중심의 목회모델, 1970년대 이후는 교회성장 중심의 목회모델, 2000년대부터는 제자훈련 중심, 가정사역 중심, 선교사역 중심의 목회모델, 2010년대는 웰빙 중심의 목회모델 등의 다양한 모델들이 있어 왔다. 이러한 모델들의 장점과 한계성을 체험한 한국교회는 그 종합적 대안으로 기독교교육과 상담목회를 접목한 상담모델을 논의하고 시도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삶의 현장에서 여러 가지 문제들로 인하여 고민하고 갈등하고 방황하는 성도들이 많이 있다. 교회는 이러한 성도들을 위하여 바른 목양 방안이 제시되어야 하며, 대안적인 방안으로 상담목회를 목회현장에서 구체화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상담목회는 교육목회와 함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며 치유하는 것으로 예수님의 삼중사역인 선포와 교육과 치유사역을 집약한 총체적 치유사역의 한 분야로 조명되어야 한다. 그러한 이유로 본연구의 목적은 개혁주의 신학의 특성은 무엇이고, 개혁주의 성경적 상담의 특성은 무엇이며, 구체적으로 이것을 어떻게 목회에 적용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Ⅰ. 개혁주의 신학의 특성개혁주의 신학과 성경적 상담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학문의 전제론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학문의 전제를 하나님에게 두고 있다. 기독교 전제론적 지식체계는 우리의 관심을 우리의 모든 사고에서 하나님의 절대적 필수성에 초점을 맞추게 한다. 출발점이신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단지 우리의 제한되고 유한한 전망에 기초한 지식에 대한 상대적 의미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우리는 하나님 없이는 이성이나 감각적 경험이나 지식을 위한 어떤 방법들도 신뢰할 수 없다. 우리가 이성으로 어떤 것을 알고, 어떤 것은 감각 경험을 통해 이해하며, 어떤 것은 직감으로 알고, 또 다른 어떤 것은 권위로 알게 된다. 그러나 이런 방법 자체로는 모든 지식의 충분한 기초가 될 수 없다. 이성이나 감각적 경험이나 직감이나 권위로 그 자체를 정당하다고 입증하지 못한다. 모든 지식의 방편은 자체 밖에 있는 전제에 달려 있다. 예를 들면, 이성과 직관은 하나의 전제에 의존하는 전적으로 다른 방법으로 사용될 수 있다. 오직 하나님이 계시고 그 자신을 주권적으로 계시하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우리의 지식에 대해서 확실성을 가질 수 있다.성경이 말하는 초월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셔서 권위의 말씀을 하셨을 때 우리들의 지식의 다른 양상들을 신뢰할 보증을 갖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언제나 바르게 생각하고 과오 없이 우리의 감성을 해석하고 우리의 느낌은 절대로 바르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자아 계시는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권위의 진리를 받을 수 있게 하고 알게 한다. 하나님의 진리는 모든 지식을 감소하지 않고 모든 방법을 사용할 수 있게 한다.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학문적 전제로 생각하고 여기서 학문적 작업을 시작한다.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바른 응답을 하는 자세가 바른 학문의 길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학문적 탐구를 하고 여기서 우리의 궁극적 목적을 성취하게 된다. 인간의 지식이 아닌 성경을 학문함의 전제로 삼아야 한다.학문의 기독교적 체계화는 학문의 ‘정체성 회복’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기독교의 본질을 분명히 하고 학문의 영역에 적용하자는 취지이다.또 교회는 학문적 사유나 사유체계를 신앙과 무관한 것 내지 비신앙적, 반신앙적인 것으로 치부하면서 학문을 배격하든지, 아니면 학문을 하되 자신의 신앙과 일치되지 않게 수행해 왔다. 그러므로 학문을 통하여 지성의 영역이 새롭게 되어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 되어 자기모순과 갈등을 극복함은 물론 나아가 참된 학문을 해보려는 기독교 학문운동이 경건한 그리스도인 학자들에 의하여 추진되고 있다.상담학도 이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상담학을 하나님 중심적 학문으로 만드는 것이 시급한 상황이다. 많은 비성경적인 상담이론과 방법이 팽배하는 여건 속에서 개혁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하는 성경적 상담이 ‘대안적 방안’이라는 사실을 탐색하며, 본 연구에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성경의 권위를 신봉하는 우리의 신앙적 입장이 상담학에도 그대로 적용되도록 성경적 상담을 학문화하는 방안을 모색하려고 한다.1. 하나님 중심의 신학개혁주의 신학의 첫째 특성은 하나님 중심의 신학이다. 즉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 of God)을 철저히 인정하는 신학이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 중심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개혁주의 신학은 성경이 제시하는 하나님의 개념을 믿는다.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 개념을 통해 하나님은 이 세상의 주권자이시며 왕이심을 믿는다. 그리하여 개혁주의 신학은 ‘하나님으로 하나님 되게’(let God be God)하는 일에 충실하다.B.B.워필드의 말처럼 ‘칼빈주의자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뵈온 사람들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들이고 순복하는 삶을 살게 된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대한 순복은 개혁주의 신학의 기본적 출발점이다. 여기서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라는 관계성이 시작된다. 우리들의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성이 강조되면 바른 관계성이 파생된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주권성에서 시작하여 관계성으로 연결되고 종국에 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으로 표현된다.개혁주의 신학은 모든 사유의 출발을 하나님께 두며 그 귀착점도 하나님으로 삼는다. 즉 하나님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으로 끝나는 하나님 중심주의가 개혁주의 신학의 첫 번째 특성이다.2. 성경중심의 신학개혁주의 신학은 계시의존의 신학이다. 모든 사유의 근거를 성경에 두며,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계시의존의 원리를 지킨다. 그리하여 개혁주의 신학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원리를 강조하며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범’으로 믿는다. 이러한 성경관이 개혁주의 신학의 특성이기 때문에 성경의 유오성을 주장하는 것은 개혁주의 신학에서의 이탈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성경을 단순히 ‘예배용 경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생활의 기본적 전제로 보아야 하며, 모든 신학적 사유와 학문적 탐구의 원리를 성경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신학은 이것을 추구하는 신학이다. 여기에 대하여 김재성은 칼빈의 예를 빌어 신학과 성경주석 및 설교의 상호연결을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칼빈은 자신의 최대의 임무가 성경의 충실한 해석 작업임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신학자로서 교리적 주제들을 설명하면서도 또한 자신이 주석가로서 성경해석자임을 잊지 않고 함께 이 두 가지 임무를 접목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신학과 성경 전체 주석이라는 두 가지의 비전을 하나로 통합하고자 노력하는 독특한 연구 자세를 보여 주었다. 칼빈의 신학적인 체계화 작업은 방대한 설교와 성경 강해라는 기초 연구에서 피어난 산물이기도 했다.”3. 교회중심의 신학개혁주의 신학은 교회중심의 신학이다. 이것은 신학을 연구하는 목적을 제시하는 말이다. 신학을 연구하는 목적은 주님께서 피흘려 사신 몸된 교회를 섬기는 데 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신학은 ‘교회를 위한 신학’이다.교회 중심의 신학이기 위하여 성경이 가르치는 바른 교회관의 정립이 필요하다. 교회란 하나의 사회조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며 부름 받은 성도의 공동체이다.오늘의 교회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른 교회상을 회복하여야 한다. 글렌 와그너(E. Glen Wagner)는 진정한 교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교회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가장 중요한 성경본문 가운데 하나는 에베소서 3:1-13이다. 바울은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수천 년 동안 간직해 온 신성한 비밀을 밝힌다. 바울은 이 비밀을 “신비”라고 불렀다. 이 비밀은 저에는 숨겨져 있었지만 지금은 밝히 드러난 상태다. 수천 년 동안 오직 하나님만이 이 비밀을 알고 계셨다. 이는 족장들도, 제사장들도, 선지자들도, 심지어 천사들도 알지 못했던 비밀이다. 이제 이 비밀이 온전히 드러났다. 그 비밀이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실 것”이라는 사실이다.바울은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셨다”고 말했다(엡 3:3). 그는 또한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엡 3:4-5)라고 했다. 이런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바울 당시에 나타난 비밀이 전에는 감추어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러므로 우리는 개혁주의 신학의 특성이 ‘교회를 위한 신학’임을 분명히 하고, ‘교회의 교회됨’을 강조해야 한다. 개혁신학은 하나님 중심의 신학이며 성경의 원리대로 믿고, 사유하며, 행동하는 신학이다. 그러므로 학문과 생활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신봉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한다.이렇게 개혁주의 신학의 특징과 장점은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그리고 교회 중심이라는 명제로 크게 요약할 수 있다.
    • 기고
    • 기고
    2015-12-04
  • 노벨상을 타는 인격 교육 -9
    노벨상을 타는 지혜교육(知慧敎育)의 실제유대인들의 교육형성 과정유대인들은 2000년이나 나라 없이 지내다가 1948년 나라를 세웠습니다. 전 세계의 유대인들을 불러 모으는 역(逆)이민 세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대대로 살고 있던 나라에서 모진 서러움을 받고 이제 자신들의 나라를 건설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왔으나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황무지와 같았습니다. 땅은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자랄 수 없는 사막이요, 물 한 방울이 생명과 같은 환경이었습니다.역이민 세대에게 필요한 것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미래의 희망을 안고 시온주의(Zion主義)를 만들고 실수를 줄이는 교육이었습니다.특히 남자 아이들은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습니다. 할례 받을 때의 준비와 의식의 절차가 매우 특이하면서도 진지합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言約)이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징표(徵標)니라”(창 17:10-11).유대인들은 남자 아기가 태어 난 후 가장 먼저 행하는 것은 하나님과 그들 사이의 계약(契約)을 몸에 표시하는 일입니다. 이 예식을 히브리 말로 ‘브리트밀라’(הלימתרב)라고 하며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 예식을 행할 때는 열명 이상의 성인이 참여해 공식적인 구속력(拘束力)을 갖습니다.이렇게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부심 교육이 시작됩니다. 할례식 전날 밤은 온 식구들과 가까운 친지들이 모여서 다과를 베풀며 축하파티 ‘살롬자코르’(רוכזמולש)를 열어줍니다. 이렇게 모인 부모들은 밤을 새워 성경공부를 합니다.하나님과 계약(契約)을 맺을 아이에게 마귀의 방해가 없이 하나님의 전적인 보호(保護) 속에서 자라나도록 온 가족이 아이를 지키는 밤으로 보냅니다. 유대인들은 이 밤이야 말로 아이가 할례를 받아 하나님의 백성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밤이기에 사단의 공격도 마지막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이 사단의 공격을 이기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뿐이기 때문에 밤을 새워서 성경공부를 하고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며 기도 속에 온 밤을 지셉니다.유대인 혼을 불어넣는 어머니들의 교육유대인들의 교육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유대인의 의식교육(意識敎育)입니다. 이스라엘은 철저한 부계사회(父系社會) 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유대인으로 인정하는 데는 어머니가 유대인이어여만 하는 실정법(實定法)을 아주 중요하게 여깁니다. 곧 유대인의 어머니의 아들만이 자동적(自動的)으로 유대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의 혼을 불어넣는 것은 어머니의 교육으로부터 시작되고 어머니의 교육으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이것은 사람의 인격형성은 어머니의 유아교육에서부터 시작되고 완성됨을 뜻합니다. 유대인 어머니들은 어린 아기를 안고 젖을 먹이면서 우리들의 어머니들이 불러주던 자장가처럼, 아기가 알아 듣든지 못알아 듣든지 아랑곳 하지 않고 자기들의 조상들의 이야기, 아브라함 이야기, 이삭 이야기, 야곱 이야기, 사라 이야기, 리브가 이야기, 라헬 이야기, 요셉 이야기, 수산궁 이야기, 모세 이야기, 여호수아 이야기, 삼손 이야기, 드보라 이야기, 미리암 이야기, 아론 이야기, 다윗왕 이야기, 솔로몬 이야기, 성경의 믿음의 영웅(英雄)들의 이야기들을 계속해서 들려줍니다. 이것이 의식화 교육입니다.아무 것도 아닌 것 같으나 말을 알아듣기 이전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말씀교육은 사람의 인격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교육은 반복적인 훈련입니다. 성경은 인격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가져옵니다. 유대인들은 자녀에 대한 개념을 유산(遺産)으로 표현합니다. 우리는 자식들에게 재산(財産)이나 지식(知識)을 유산(遺産)으로 물려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재산 보다 더 크고 위대한 하나님의 지혜(知慧)를 물려 줍니다. 유산은 돌아가신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물질적 재산을 말합니다.유대인들에게는 자녀가 가장 가치 있는 유산이며 복의 상징입니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여기에서 기업이라고 할 때에 재산도 포함되고 소유와 인격, 그리고 나에게 할당된 모든 것들을 포함한 것을 기업이라고 합니다.
    • 기고
    • 기고
    2015-12-04
  • 끝나지 않은 전쟁들
    지난달 11월의 둘째 금요일 13일에 프랑스의 수도 파리의 중심부에서 연쇄적인 테러로 인하여 129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는 참혹한 참변이 발생하였다.이 테러사건의 지휘자인 ‘압텔하미드 아바우드’란 이름의 27세된 청년은 벨기에 브르셀의 명문고를 졸업한 촉망받던 젊은이였다고 한다.그는 사소한 경범죄에 연루되어 수배 받던중 시리아로 건너가 지난해에 IS에 가입한 것으로 알려져 잇다.그가 자신의 페이스북 등에서 밝힌 이번 테러의 명분(?)은 900여년전 당시 프랑스가 주축이 되어 기독교의 성지회복을 위해 이스람권을 공격한 십자군전쟁에 대한 보복적 차원이라고 말하고 있어 또다른 충격을 주고 있는 것이다.천년 가까이 지난 전쟁을 현실적인 문화적 충돌과 연계시켜 참혹한 테러를 자행한 이슬람 청년의 모습에서, 불과 60년전 동족상잔의 6.25전쟁을 경험한 우리 민족에게 주는 강력한 메시지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집권초기부터 연일 호전적 협박성 언행으로 남쪽 국민들을 겁박하던 김정은 정권은 자신이 발표했던 전쟁 발발일시가 무산되자, 요즘은 숨고르기에 들어간 듯 유화정책 등을 제시하며 강온 양면책을 구사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정치적인 사상이나 이념을 넘어서서 김일성 부자를 하나님으로 섬기는 우상종교 집단으로 진화하여 모든 인민들을 ‘아바우드’와 같은 광신도로 세뇌하여 무장시키고 있는 중인 것이다.그들은 틈만 보이면 남쪽 동족들을 향해 갖가지 테러를 자행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들의 왜곡된 신념에 조금이라도 배치되는 자는 같은집안의 고모, 고모부라할지라도 가차없이 숙청하고 참혹하게 처단하는 인간의 잔인성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미국 명문 하버드대학의 전설적 명강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마이클샌델’이라는 석학은 고대부터 근·현대의 모든 사상과 철학을 총망라하여 인간들의 진정한 정의의 본질을 찾아보려 하고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도 백만부이상 팔린 그의 저서에서도 인간의 정의란 시대와 문화적 환경과 처한 상황에 따라 상대적으로 유동적인 ‘이기적인 정의’라는 결론 아닌 결론밖에는 찾지 못하고 있는 현실인 것이다.이와같이 인간들은 애초부터 하나님이 주신 에덴의 평화보다는 사탄의 선악과를 선호하여 할수만 있다면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자신들의 정의를 실현코자 하는 것이다.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집단 어느 국가간의 분쟁과 전쟁은 한결같이 자신들의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강력한 욕구의 실현과정에서 발생하였다. 불완전하고 유한한 인간이 자신들의 이기적 가치관을 정의라고 착각하는 순간부터 불신과 분쟁은 시작되고 결국은 파멸로 가는 전쟁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왜곡된 이기적 정의관에 눈이 먼 인간들은 끝없이 전쟁을 만들고 있으며 그렇게 시작된 전쟁은 정의의 본질을 바라볼 수 있는 진실의 눈이 떠지지 않는한 계속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다시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을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 14:16~17)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말씀 하셨듯이 진리의 영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복음을 온세상에 선포하고, 땅끝까지 진리의 복음이 전해 질때 비로소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인간들의 전쟁도 끝날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라”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세상적 이기적 정의로는 도저히 실행할 수도 실행 될수도 없는 너무 먼 이상적 진리로 보일수도 있다. 다만,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스스로 희생양 되심을 본받아 우리들의 이기적 정의를 십자가에 못박고 먼저 희생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복음을 이땅 위에 세운다면 인간들의 끝없는 전쟁도 막을 내리기 시작할 것이다.따라서 하나님의 정의를 이 땅위에 실현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할 한국교회는 먼저 우리자신부터 세상의 이기적 정의로부터 해방되어야 할 것이다.세상의 정의는 실현과정에서 무고한 희생이 따르고 힘없고 소외된 자들은 억울한 일이 생겨도 대의를 위한 희생으로 치부되지만, 하나님 나라의 정의실현은 세상에서 환난 당한 모든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들의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한”(계 21:4) 이타적 십자가의 사랑을 완성하는 일일 것이다.이제 한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헌신적 희생정신을 본받아 형제끼리도 반목하고 분열하는 이기적 정의에서 벗어나 화합하고 통합하여서 아직도 휴전이란 딱지가 선명한 민족상잔의 6.25전쟁과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정의를 독점한냥 한국교회를 능멸하는 거짓종들과 이단들과의 끝나지 않은 전쟁을 승리로 종식시켜야 할것이다.
    • 기고
    • 기고
    2015-12-03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