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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진정한 독립과 광복 쟁취해야/홍 성 표 목사
    분단과 광복 72주년 다시 8월 15일을 맞는다. 일제의 식민지와 분단과 해방공간에서의 분열 된 민족구성원들은 민족세계전쟁을 통해서 치유하기 힘든 깊은 상처와 아픔을 여전히 지나고 있다. 해방 후에도 친일세력과 군부독재, 왜곡된 역사를 만들고자 했던 불의한 세력을 거치며, 민중은 분노했고, 추위를 무릅쓰고 피곤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광화문과 전국에서 정의와 생명의 촛불을 높이 들었다. 이로 인한 역사적 혁명은 정치인이나 지식인이 아니며 자본과 권력에 타협하는 종교인들도 아니다. 남녀노소 신분여하를 막론하고 역사를 바로 세우며 하늘과 민중의 뜻이 합일된 새로운 역사를 갈망하는 민중들의 기도와 행동의 실천이었다. 정말 이름도 없고 어떤 부귀영화를 바라지도 않는 민중들의 간절한 소망이 오랫동안 인내한 후에 역사현장에 몸과 마음을 던진 것이다. 지금의 한반도는 구한말과 20세기 초의 대한제국의 혼란의 위기와는 비교가 되지 못한다. 2차 대전 이후의 미소의 냉전체제로 인한 민족의 분단과 민족세계 전쟁을 통한 숱한 고난과 고통의 세월은 심화 확대되어만 간다. 일제에 민족과 조국을 팔아 추악한 삶을 살았던 민족반역자들의 후손들은 큰소리치며 당당하게 산다. 일제와 투쟁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며 생명까지를 민족재단에 바친 애국자들은 여전히 가난과 생사의 삶을 넘나들며 살고 있다. 매국의 후손들은 임시정부를 부인하고 헌법을 부인하며 이승만의 반쪽 건국을 대한민국의 출발로 주장한다. 이들은 기업과 경제, 정치와 사회 문화와 종교 전 영역에서 중심을 살고 있다. 이승만과 박정희와 짝을 같이하며 아직도 민족과 민중을 속이며 민족정기를 흐리게 하고 역사를 혼돈속에 몰아가고 있다. 정의와 진실을 왜곡하며 무참히 짓밟고 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한 선열들을 욕되게 하며 그들의 애국애족의 참뜻을 무참하게 짓밟고 있는 것이다. 분단은 계속되고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남북이 함께 사는 민족생명의 길은 첫째는 평화통일이다. 이 평화와 통일의 길은 남북이 조건 없이 만나는 길이다. 조건이 없으려면 서로를 협박하거나 통제하는 어떤 것도 버려야 한다. 이제 한반도의 문제는 거의 한계의 임계점 앞에 서 있다. 이것은 소위 동맹국인 미국이 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패권을 꿈꾸는 중국이 당사자가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이 말은 우리민족끼리의 6.15정신과 개성공단을 열어 간 10.4 남북정상회담의 합의 정신을 자주적으로 결연하게 실천해 가는 것이다. 트럼프가 말한 어떤 전쟁도 배격하며 규탄한다. 단 한명의 생명이 희생되는 그 어떤 전쟁도 거부하고 규탄하며 규탄한다.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운운하는 자와 한반도의 현재와 미래를 함께 해서는 안 된다. 전쟁을 전제하는 어떠한 협상과 타협을 단호히 거부하며 그러한 세력에 종속되거나 동맹의 길을 걷는 것을 거절한다. 지금이야말로 외세와 불의한 세력들에게 타협하는 비굴한 자세나 비겁은 역사와 하는 민중과 국민에게 씻을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게 됨을 명심해야 한다. 그것은 촛불이 바라는 땅과 하늘의 뜻이 결코 아니다. 촛불로 태어 난 문 정부의 5년은 민족사에게 있어서 너무도 중요하다. 우리의 희망과 생명의 역사를 담보하는 역사적 과정이다. 불의하고 거짓된 역사들의 적폐를 청산하고 탈 원전을 시행하여 생태계를 보전하며 양극화와 비정규직 등 불평등 구조를 근본적으로 치유하며 진정한 독립과 광복을 쟁취해야만 한다. 평화협정을 반드시 체결하여 한반도의 평화공존을 확립하고 외세의 간섭을 완전히 배제하여 자주적인 민족공동체의 길을 열어가야 한다. 여기에 진정한 용기와 결단을 요구하는 역사적 지혜와 슬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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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8-11
  • 한국 기독교 미술사를 개척한 크리스천 화가
    만약 2000년 전의 ‘예수사건’이 우리나라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런 물음에 답한 한국기독교 미술사를 개척한 김준근과 김학수, 김기창, 박수근 화백 등은 독특한 화폭으로 미술사에 기여하였다. 1895년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게일선교사가 번역, 출판할 때 당대 최고의 화가 기산 김준근 화백이 한국적 예수와 기독도를 그려내며 기독교미술의 새 장을 열었다. 1919년생인 혜촌 김학수 화백은 어린 시절부터 기독교 전파의 역사를 직접 체험한 산 증인이다. 초창기의 한국기독교의 중요한 교회들과 기독교 기관들의 건물을 화폭에 담기도 했고, 또한《예수의 일대기》,《순교와 박해》시리즈를 남겼다. 특히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박해의 모습을 담은 그림들은 지금도 보는 이를 섬뜩하게 한다. <김기창 = 십자가상의 예수>그 이후 운보 김기창 화백은 《예수의 생애》를 한국적 화폭에 담아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예수의 생애》연작은 운보가 한국전쟁으로 인해 가족과 함께 아내의 고향 군산에 피난에 있던 시절에 그린 독보적 작품이다. 예수의 고난이 우리 민족의 비극과 유사하다고 생각한 운보는 한국적인 표현의 성화를 제작하기로 하고 이에 몰입했다. 1년 여 만에 이 연작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운보는 백주 대낮에도 예수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고 할 정도로 이 작업에 빠져들어 있었다고 한다. 김기창의 모든 연작의 배경은 조선시대. 갓을 쓰고 흰 두루마기를 입은 예수, 초가, 기와집이 세필의 한국화적 기법으로 표현되어 있다. 기독교의 토착화, 한국적인 정서, 이당 김은호의 제자로서 그만의 운필과 구성 등에 있어서 특별한 작품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일종의 미술과 기독교의 ‘토착화’ 실험이었다. 그러나 기독교 화가라고 그림이 기독교 성화만 그리는 것이 아니었다. 고난속에 있는 민족을 따뜻하게 품고 그들의 삶을 진솔하게 드러내고 표현하여 대중적으로 사랑받게 한 민족화가가 바로 박수근 화백이다. 1914년 강원도 양구(楊口) 출생에서 출생한 박수근 화백은 교회에서 은혜를 받고 목회자가 되기를 소원했던 12세 때 밀레의 '만종'을 보고 자신도 그와 같은 화가가 되어 그림으로 복음을 전하고자 결심하게 된다. 그후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계속하여 18세인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수채화 <봄이 오다>로 입선을 하게 되었고 이후 거듭 선전에서 입선하였다. 화가로서 그의 삶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박수근 = 소> 밀레가 <만종>을 그렸다면 박수근의 대표작에〈빨래터〈소와 유동〉〈노상의 소녀들〉〈할아버지와 손자〉등이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고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물론 어린아이들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린다." 이것은 박수근 자신의 철학과 그림에 대한 생각이 담긴 유일한 말로 여기에서 그의 작품의 주제와 특징의 근간을 엿볼 수 있다.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근대사를 산 소박한 우리네 서민의 일상적인 모습이다. “혼자서 밀레와 같은 훌륭한 화가가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드리며 그림그리는데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최근 35억에 판매된 이중섭의 <소>와 박수근의 <소>는 대비되며, 농촌 화가의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게 한다. 박수근의 생활 속에서 외면할 수 없는 동물이 소였다. 소를 무리지어 그리기도 하고 단독으로 그리기도 하고 앉아있는 소, 서 있는 소, 왼쪽을 바라보는 소, 오른쪽을 바라보는 소를 그리기도 했다. 수근은 어릴 적부터 소의 적합한 형태를 찾기 위해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종이가 귀하던 시절, 나무에 기름을 먹인 분판에 먹으로 그림을 그리고 지웠다. 갱지나 타자용지에 몽당연필로 소를 그리기도 했다. 여러 번의 드로잉을 거쳐 ‘박수근의 소’가 탄생했다. 그의 예술이 농익은 무렵 내놓은 회심의 작품에 소가 등장한다. 소는 휴식을 하고 있다. 편안하고 여유롭다. 자신의 삶에 묵묵히 소처럼 살아가는 작품<소>에서는 숭고한 기운마저 느끼게 한다. 이렇게 표현된 그의 작품은 수근 자신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인지 '선함과 진실함'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박수근의 <소>는 화강암의 거친 질감을 화폭에 옮겨왔고 그 위에 공간감을 무시하고 극히 단순한 형태와 선묘를 이용한 평면화된 대상을 모노톤의 색채로 그려내어 마치 바위에 각인된 듯한 이미지로 표현했다. 평생 가난에 시달렸으며 자신의 화실조차 가지지 못했고, 개인전은 꿈도 꾸지 못했던 화가 박수근. 목회자의 심정으로 평생 그림을 그리며, 그 그림에 일생을 바친 화가였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들은 인위적이지 않으며, 진실하고 다정다감하여 그속에 서민들의 사랑이 흐르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사랑받고 있다. 성직자가 되지 않고 화가가 되어 그린 그의 작품들은 오늘날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으며, 가장 인기있는 화가이자 그림의 호당 가격이 3억에 이르는 가장 비싼 작품값을 기록하고 있음은 우연일까? 한국의 기독교 미술의 새 장을 연 김준근, 김학수 그리고 한국의 미켈란젤로 김기창, 한국의 밀레 박수근, 이렇게 4인은 서민의 일상을 소박하게 담아낸 향토성 짙은 작품들로 가장 한국적인 기독교 현대 회화를 한 단계 끌어올린 최고의 화가들로 기억되어야 한다. 기독교 미술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평가가 필요한 시점이다. 복음의 본질은 시대와 장소를 달리하고, 문화와 문화가 충돌하는 속에서도 결코 변하지 않는 진리이다. 변하는 것은 다만 그 복음의 진리를 담아내는 문화적 용기(容器)라는 외형일 뿐이다. 이와 같이 진리의 본질은 결코 변하지 않지만 그 외형은 다양한 문화 속에서 각기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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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6-07
  • 존 번연의 ‘천로역정’과 게일선교사/이 효 상 목사 / 교회건강연구원
    문화재청은 지난 20일 존 번연의 천로역정(합질) 게일선교사 번역 초판본 2종을 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천로역정’(天路歷程,ThePilgrim’s Progress)은 영국의 청교도 작가 존 번연(1628〜1688)의 소설로 1678년 초판이 나왔다. 꿈의 형식을 빌어 이야기를 풀어낸 책으로 ‘기독도’이라는 남자가 ‘장차 멸망할 도시(장망성)’를 떠나 ‘천성’을 향해 가는 과정을 그렸다. 크리스천이 인생의 여정에서 욕망과 싸우며 사탄의 도전 앞에서 거룩함을 이뤄간다는 이야기로 구원과 성화의 여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천로역정’의 출판과 게일 선교사국내에는 1895년 장로교 선교사 제임스 스카스 게일과 부인 깁슨이 공동 번역해 소개했다. 당시 한글로 번역된 ‘텬로력뎡’은 평양 장대현교회 길선주 목사가 읽고 감명을 받음으로써 1907년 평양 대부흥을 이끌어낸 원동력이 됐다. 성결교의 이성봉 목사도 전국을 다니며 천로역정 부흥회를 개최할 정도로 이 책을 높게 평가했다. 이 목사는 ‘멸망의 도시’를 장차 망할 성이란 의미의 ‘장망성’으로 표현했다.초판은 소설의 제 1부를 2책으로 나눠 목판으로 인쇄하였으며 미려한 한지를 사용하여 한 장 제본으로 만들어졌다. 책 중 삽화는 총 42장으로 당대 풍속화가 기산(箕山) 김준근의 삽화도 수록돼 있다. 기산의 이 그림은 외래종교인 기독교를 주체적으로 수용해 토착적인 전통을 반영한 한국 개신교 미술의 효시로 평가받고 있다.텬로력뎡은 개화기 번역문학의 효시로 국문학사적으로도 당시 한글보급과 한글문체를 보여주는 중요한 책자다. 최초로 번역된 텬로력뎡 초판본은 현대식 인쇄출판을 통해 초기 대중에게 복음을 전하는 통로로 사용되었고 한국의 기독교 신앙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1895년의 초판에 이어 1910년에 나온 재판은 연활자로 인쇄되었는데 기일목사 역 이창직 교열로 바뀌었으며 장로교서회(Presbyterian Publication Funds)의 발행이다. 3판은 한국종교서적소책자학회 (Korea Religious Book And Tract Society)의 발행으로 1919년 요코하마에서 인쇄되었다. 재판과 3판의 삽화는 초판을 축소하여 동판으로 인쇄했으리라고 추정한다.1920년에 나온 텬료력정 3판 끝에는 ‘본셔의 뎨이편 텬셩려행기가 츌판되었는데 그 내용은 긔독도의 쳐자가 그 남편을 따라 멸망의 셩에서 행한 것이라. 특별히 녀자와 아해의게 자미가 잇슬것이니 한번보시기를 바라옵’이라는 광고가 나와 있다. 텬료력졍 뎨이권은 ‘긔독도 부인 려행록’이라고 부제를 붙여서 1920년 8월 10일 신문관 인쇄 조선 야소교서회 이름으로 발행되었다. 언더우드부인 (Mrs .H. G. Underwood ) 이 번역한 이 책에는 제1부와 화풍이 다른 삽화 10장이 게재되어 있다.게일과 언더우드목사부인의 번역본에 이어 1936년 조선기독교서회에서 오천영의 번역으로 제 1부가 번역되었다. 이 책에는 삽화 10장이 수록되어 있다. 해방 이후 1949년부터 조선기독교서회의 오천영 번역의 재판에 이어 많은 번역본이 현재까지 나오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천로역정》 재조명과 게일선교사 연구 시급게일 부부에 의해서 번역된 텬료력뎡 초판본은 한국 기독교 복음전파와 책의 역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희귀본이며, 철저한 연구와 고증이 필요한 책이다.기독교신앙이 한국에 상륙한 19세기 한국은 열강의 간섭에 국기가 흔들리고 부패와 혼란이 극도에 달하여 민중의 생활이 참으로 어려웠던 때이다. 그러한 시대에 오늘의 고통과 유혹을 이겨내고 구원의 길을 걸어가 내세의 행복을 접하게 되는 천로역정의 이야기가 이 땅에 소개되었다. 일제의 기독교신앙 탄압에 대항하여 집단순교로 맞선 민중들의 꿈은 번연의 천로역정과 어떤 연관이 없는 것일까?《천로역정》이 소개되고 130여 년이 넘은 오늘 한국교회는 천성을 향해 건강한 신앙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인가? 기복주의와 개인주의 신앙이 열병처럼 번지고 극심한 자본주의의 유혹앞에 오염되고 있지는 않은지 묻게 된다.세계문학사의 불후의 명작으로, 또한 한국기독교 신앙 초기에 큰 영향을 미쳤을 존 번연의 사상과 천로역정에 대한 재조명작업과 더불어 최초로 번역, 소개하여 이방인으로서 한국의 영혼구원과 근대화, 그리고 문화개척에 일생을 바친 게일선교사의 사역에 대한 깊은 연구와 재평가가 하루빨리 이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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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5-02
  • 특별칼럼
    박근혜 대통령이 우리나라 헌정 사상 처음으로 파면됐다. 헌법재판소는 10일 오전 11시 대심판정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의 선고 재판에서 재판관 8명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 박 대통령 파면을 결정했다. 지난해 12월 9일 국회 탄핵소추 의결로 시작한 탄핵심판은 92일 만에 파면으로 결론을 내린 것이다. 대통령 탄핵심판은 2004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에 이어 두 번째이지만 현직 대통령이 파면되는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이번 결정으로 선고와 동시에 효력이 발생해 직무정지 상태의 박 대통령은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대통령직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은 결정문을 통해 “공무원은 국민전체에 대한 봉사자다. 하지만 피청구인은 최순실의 이익을 위해 대통령의 권한을 남용했고 기업의 재산권 침해, 기업경영의 자유를 침해했으며 직무상 비밀에 해당하는 많은 문건을 누출한 것은 국가공무원법의 비밀엄수 의무를 위배한 것이다”며 “대통령은 헌법과 법률에 따라 권한을 행사해야 함에도 최순실의 국정개입 사실을 철저히 숨겼고 의혹 제기에 대해 부인하고 비난하며 국회 등 헌법기관의 견제나 언론의 감시기능이 제대로 작동 못하게 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재임기간 전반에 걸쳐 지속적으로 국회 및 언론의 지적에도 사실을 은폐한 것은 대의민주주의 원리와 법치주의 정신을 훼손한 것이며 진상규명을 위해 최대한 협조하겠다고 밝혀놓고 검찰 특검조사에 응하지 않고 청와대 압수수색도 불허, 헌법수호의지를 보이지 않았고 국민의 신임을 배반, 헌법수호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어 만장일치로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고 선언했다.우리는 이러한 헌법재판소의 8인 전원합의 만장일치로 박대통령의 파면한 결과를 겸허히 수용하고 승복해야만 한다. 이것이 법치주의의 기본이며 근간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해 여야 정치인들과 종교인, 시민사회 모두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무조건 승복하는 민주시민의 모범을 보여야 하며 국민모두도 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에 수용하고 승복해야 한다. 대한민국헌법 제1조 제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하고 있는 자랑스런 법치국가 대한민국의 국민임을 인식하고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한 단계 더 성숙시키는데 앞장서야 한다. 무엇보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국민들 간에 탄핵심판으로 가는 과정에 치열한 대립이 있었지만 이제는 보다 나은 대한민국을 함께 만들어 가기 위해 교계지도자는 물론 성도들 모두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이 땅에 실현하는데 노력해야한다. 더불어 우리사회의 공공성과 거룩성 회복을 교회와 사회에서 실천해 나가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도록 더욱 말씀으로 돌아가 참된 예배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탄핵 심판은 이제 한반도의 복음 통일을 준비하며 정의롭고 공정한 대한민국의 미래를 여는 힘찬 출발이 되어야 하며, 정치, 이념, 지역, 세대 등의 갈등을 봉합하고 국민대통합을 이루는 단초가 되어 선진 대한민국을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특히 사순절 기간에 한국교회와 온 성도들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고 묵상하면서 이번 탄핵결정이 국론 분열 종식과 화합과 치유 밑거름 되어 우리 사회의 화합과 통합을 위한 마중물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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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3-17
  • 그리스도 강림 이후 부흥과 복음 29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심으로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왕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지상명령으로 받고 있는 것이며, 이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아야 한다. 지상명령의 본질: 제자 삼음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상 명령은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전도 명령과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세례 명령과,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교육 명령이 있다. 여기에서 지상명령의 본질적 내용은 너희는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데 있다.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았기 때문에(행 11:26),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말은 모든 민족을 그리스도인으로 삼으라는 전도 명령과 양육 명령 곧 선교 명령이다. 그리하여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이 지상명령의 내용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창세기의 문화 명령의 내용과 같은 의미이고, 또한 예수님께서 포도나무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요 15:8)라고 하신 말씀과 같은 뜻이 된다.지상명령의 내용; 파송 명령, 세례 명령, 교육 명령예수님께서는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지상명령을 주시고, 그 명령을 수행하기 위하여 파송 명령과 세례 명령을 주셨다. 그러나 세례 명령과 교육 명령은 제자를 삼은 후에 해야 할 일이지만, 파송 명령(가는 것)은 제자를 삼기 전에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지상 명령의 본질적 내용이 나오기 전에 먼저 ‘너희는 가서’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면서 먼저 ‘가라’라고 하시면서 파송 명령을 하신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고서 다시 보내신 것이다.그리고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 28:19)라고 말씀하시면서 세례 명령을 주신다. 우리는 물세례가 죄씻음과 구원을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할 뿐, 그것이 구원을 이루는 요건이 된다고는 생각하지 아니한다. 우리는 구원의 요건이 되는 세례의 본질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 가르쳐 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려야 한다. 사도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롬 6:4)이라고 하면서 세례가 그리스도와 합하여 받는 것, 즉 세례를 받아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가르친다.예수님께서는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 15:4)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위와 같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세례를 받는 것이다.우리는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셨으며,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로 옷 입은 것이다(갈 3:27). 따라서 우리가 받는 세례는 우리가 예수님 안으로(헬; eis, 영; into) 들어가서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이고,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 세례는 우리가 성령님 안에서(헬; en, 영; in 또는 with) 성령을 마시면서 성령님 안으로(drink into)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즉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간다는 뜻이어서 결국 셰례와 믿음은 사실상 같은 것임을 알수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롬 6:3)라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합하여(into Christ) 세례를 받는 것은,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into his death) 즉 그리스도의 죽음 속으로 들어가는 세례를 받는다는 것이다. 또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롬 6:4)라고 하여, 우리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는 것이 그와 함께 장사되는 것을 뜻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또한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 6:5)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세례를 받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서 그의 죽으심과 연합한 자가 되면 우리는 또한 그의 부활에 연합한 자가 된다는 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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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3-03
  • 그리스도 강림 이후 부흥과 복음 28
    이와 같이 혼의 몸(soma psushikos)은 혼의 지배를 받는 몸이고, 영의 몸(soma pneumatikos)은 영의 지배를 받는 몸을 말한다. 그렇다면 육의 몸 곧 육신(히;basar, 헬;sarx, 영;flesh)은 영이나 혼의 지배를 받지 아니하는 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글성경이 혼의 몸을 육의 몸이라고 번역한 것은 잘못이다.그리고 사람이 생혼(living soul, 생령)이었는데(창 2:7), 타락한 후에 육신이 되었다(창 6:3). 이 육신은 몸(히;gewiya, 헬;soma, 영;body)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옛 성품 곧 옛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생혼은 혼이 주체가 되어 살면서 몸을 지배하는 사람을 말하는데, 육신은 몸이 혼을 지배하는 사람을 말한다. 따라서 육신은 몸의 욕구에 따라 사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이 된 사람은 다시 혼이 주체가 되어 몸을 지배하는 생혼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에덴으로의 복귀이다. 그러나 에덴은 천국 곧 하나님나라가 아니다. 우리가 구원을 이루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부할체 곧 영의 지배를 받는 영의 몸을 가지게 된다. 이것이 생령이 되는 것이다.전인치유: 영성치유와 현대의학우리의 몸의 구원도 ‘이미와 아직’의 성격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몸의 부활(아직)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할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의 몸의 구원(이미) 곧 건강과 치유에 대해서도 잘 알고 이를 누려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마태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하여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마 4:23, 9:35)라고 하시며, 예수님께서 행하신 세 가지 큰 사역이 가르치심, 전파하심, 고치심(치유)이었음을 가르쳐 준다. 예수님께서 하신 치유는 죄 사함까지 포함하기 때문에 전인치유이며, 교회는 예수님께서 하신 이 치유사역을 이어받아 행하여야 한다.또 선지자 이사야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라고 한 대로, 이 치유는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고, 또한 성도들이 이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사도 바울은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라고 한다. 이는 우리의 구원이 영과 혼과 몸을 포함한 전인적인 것이고, 지와 정과 의를 포함한 전인격적인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현대는 병의 치유는 병원이라는 전문적인 기관이 있어서 교회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나 병의 원인은 모든 것이 육체(물질)적인 것만이 아니고, 오히려 정신적 심리적인 원인과 영적인 원인이 더 많다. 따라서 그러한 부분에서는 오히려 교회의 할 일이 더 많은 것이다.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치시기 전에 죄 사함을 선언하시기도 하고(마 9:2), 병을 고쳐주신 후에는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눅 5:14)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사도 요한이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라고 기원한 대로, 전인적인 건강은 실제로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이다.수평선교: 지상명령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으나, 다시 부활하시고서 40일 동안 이 세상에 계셨다가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8-20)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서의 신적인 권위를 회복하시고자 하신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특별히 제자들에게 제자의 사명(비전)으로 주신 말씀인데, 우리는 이것을 가장 큰 명령이라는 뜻으로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이라고 부른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지상명령을 주시면서 ‘그러므로’라는 말로 그 말씀을 시작하셨다. 따라서 바로 그 말씀 앞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하신 말씀에 주의를 기울려야 한다. 여기에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그 권세로 우리를 도와주시고 그 권세를 우리에게도 주시겠다는 약속이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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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2-24
  • 그리스도 강림 이후 부흥과 복음 27
    몸의 구원: 몸의 부활과 부활의 몸사도 베드로가 “에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souls)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라고 한 대로, 우리가 믿음으로 받는 구원은 우리 영혼의 구원을 말함이다. 여기서 말하는 영혼은 혼(soul)을 말한다. 물(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난 우리의 새 영(spirit)은 이미 구원받은 영으로서 성령님이 함께 계시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에는 이미(영)와 아직(혼)의 성격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의 구원도 아직 완전하게 아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루는 새 사람을 입으면서 영의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한다.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은, 요셉이 자기를 판 형제들에게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창 45:7)라고 한 말에서 보듯이 이 세상의 생명을 포함하고, 다윗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란에서 구원하셨도다”(시 34:6)라고 한 대로, 이 세상에서 환란으로부터의 구원도 포함한다.그리고 사도 바울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bady)도 살리시리라”(롬 8:11).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롬 8:23)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은 영혼만이 아니라 영혼과 몸을 포함한 전인적인 구원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우리는 몸의 부활과 부활의 몸에 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부활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전 15:42-44)라고 말하고,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9)라고 했다. 따라서 세상에서의 사람의 몸은 썩을 것이고, 욕된 것이고, 약한 것이고, 육의 몸으로서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이다. 그러나 부활한 사람의 몸은 썩지 아니할 것이고, 영광스러운 것이고, 강한 것이고, 신령한 몸 곧 영의 몸으로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이다.한글성경이 ‘영의 몸’(새번역) 또는 ‘신령한 몸’(개역), ‘영적인 몸’(공동번역)으로 번역한 말은 같은 헬라어 ‘소마 프뉴마티코스’(soma pneumatikos)를 번역한 말이다. 이를 영어에서는 ‘spiritual body, 영에 의해 살아있는 몸’으로 번역했다. 이에 대조되는 ‘육의 몸’은 ‘소마 프쉬키코스’(soma psuchikos)로서, 영어로는 ‘soulish body, 혼에 의해 살아있는 몸’이다. 따라서 우리가 부활해서 가지는 ‘영의 몸’(spiritual body)은 ‘혼적인 몸’(soulish body)에 대조되는 것이지, ‘물질(육체)적인 몸’(physical body)에 대조되는 것은 아니다.그러므로 이 ‘영의 몸’은 천사와 같이 ‘영으로 이루어진 몸’(영체)이라는 말이 아니라 ‘성령의 다스림에 온전히 순종하는 몸’이란 뜻이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부활의 상태를 성령이 지배하는 상태라고 특징 지우고 있다. 따라서 ‘영의 몸’은 ‘육의 몸’과 같이 ‘몸’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영적 존재인 천사의 몸과 같은 ‘영으로 된 몸’(영체)은 육의 몸과 같은 몸(soma, body)이 없다. 그리하여 영의 몸(부활체)은 영으로 된 몸(영체)과는 서로 다르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육의 몸’을 벗고 ‘영의 몸’으로 부활하는데,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고전 15:55)고,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으로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고전 15:53)는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러한 우리 몸의 부활을 산 소망으로 가지고, 부활에 대한 믿음을 신앙으로 고백한다.육의 몸에 대비되는 영의 몸인 부활체는 썩지 않음, 영광, 능력(고전 15:42)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 부활의 몸을 예수님의 부활의 몸을 생각해 봄으로써 어느 정도 알 수가 있다. 그것은 사도 요한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안다(요일 3:2)라고 말했고, 사도 바울은 우리의 낮은 몸을 그의 영광스러운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21)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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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2-10
  • 그리스도 강림 이후 부흥과 복음 26
    또한 사도 베드로는 산 소망에 대하여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벧전 1:4,5)라고 말하지만, 또한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선생들에 대하여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져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리라”(벧후 2:20,21)라고 하여, 신자는 구원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지만, 다시 세상의 더러움에 얽매이면 차라리 구원을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낫다는 것이다. 영성훈련의 방법:덕을 세움교훈이 지적인 훈련이고 책망이 정적인 훈련이고 바르게 함은 의지적인 훈련으로서 이것들이 하나님의 사람 곧 인격(성품)을 온전하게 하는 훈련이라면, 의로 교육 곧 파이데이아는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 다시 말하면 삶을 온전하게 하는 훈련이며, 동시에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을 모두 포함하는 사람의 삶에서 일어나는 전인적인 훈련이라고 볼 수 있다.참된 영성을 이루는 파이데이아는 덕을 세우는 훈련으로서 거룩하게(성화) 되는 훈련을 말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훈련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시지만(고전 3:6,7), 또한 사람은 경건에 이르도록 연단(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딤전 4:7). 따라서 파이데이아(징계, 훈육)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영적으로 성장하게 하시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지만, 여기에는 사람의 훈련도 필요한 것이다.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훈련은 지적인 훈련과 정적인 훈련 그리고 의지적인 훈련이 포함되어 있는데, 첫째로 예수님께서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라고 말씀하신 대로,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을 거룩하게 하기 때문에 사람에게는 먼저 지적인 훈련인 말씀훈련이 필요하다. 둘째로 바울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딤전 4:4,5)라고 한 대로, 기도가 사람을 거룩하게 하기 때문에, 사람에게는 정적인 훈련인 기도훈련이 필요하다. 셋째로 바울이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라고 한 대로, 사랑 안에 즉 의지적인 섬기는 아가페 사랑으로 사람이 거룩하게 되기 때문에, 사람에게는 의지적인 훈련인 사랑 훈련이 필요하다. 그것은 지식은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우기 때문이다(고전 8:1). 사실 사랑함은 앎과 행함 사이의 본질적인 연결점이다.또한 히브리서 기자는 “에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히 13:12)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에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신 십자가와 거기서 흘리신 보혈이 사람을 거룩하게 하기 때문에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파이데이아에는 십자가 훈련이 있는 것이다.그리고 히브리서 기자가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훈육)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0,110라고 하여, 십자가 훈련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징계(paideia)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것은 곧 교육하기와 같은 것이다.따라서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서 거룩하게 하심을 받기 위하여, 파이데이아(영성훈련)로 하나님과의 만남 곧 하나님 아버지와의 만남,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 보혜사 성령님과의 만남이 있어야 한다. 사람은 이 하나님과 만나는 임재훈련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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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2-03
  • 기 고 / 김남희(수원기독호스피스 9기 미용6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봉사의 현장에서 감사의 삶이 어언 17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2016년 12월 21일 내 사랑하는 벗, 하늘 시민 이융재 사모의 천국 환송예식을 눈물로 마치고 돌아왔다. 새벽 2시에 잠이 깨어 이런저런 생각들이 나를 흔들어 내 머리 속에서 대화의 장이 벌어졌다. 잠은 멀리멀리 달아나고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벌떡 일어나 내 가슴속 눈 속의 앨범에 한 장의 그림과 같이 또 넣어 두었다. 사랑하는 벗 나의 친구 이융재 사모의 이야기다.너무 반듯하고, 똑똑하고, 재치 있고, 야무지고, 자신만만하고, 무엇이든지 완벽하여야 하고, 검소하고, 힘든 일이라면 자기가 먼저 하여야 하고, 조금은 촌스럽고, 조금은 똑똑함이 샘도 났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 추억 속의 앨범이 되었다.2016년 11월 7일 월요일 센터에서 만나 다른 때와 같이 수다를 떨며, 깔깔대며 점심을 먹었다. 그러나 융재는 밥을 먹지 않았다. 소화가 되지 않아 밥도 못 먹고, 죽도 소화가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오늘은 꼭 내가 다니는 병원에 가자고 했더니 순순히 따라나섰다. 유** 내과의원이 보통 한두 시간은 기다려야 할 정도로 용하다고 이름이 났다. 기다리는 동안 혈압도 재어보고 이런저런 이야기, 우린 만나기만 하면 할 이야기가 너무나 많았다. 얼마를 기다렸나 차례가 되어 들어갔다. 갈비뼈 옆이 아프다고 하니 초음파를 찍자고 한다. 약 1시간 후 판독 결과 당장 CT를 찍어보자고 했고, 2일 만에 담도 담낭암 말기로 림프샘까지 퍼졌다며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고 야단도 맞았다. 그리고 곧바로 성빈센트병원으로 가, 며칠 만에 가족들의 동의로 1차 항암을 하기로 했다. 딸을 천국으로 보낸 나는 항암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터라 단단히 무장을 하여야 한다고 말해 주었다. 항암 다음 날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초죽음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한 번은 더 맞아야 한다고 했다. 두 번째는 조금 약하게 또 한 번 싸워야 했다. “이제는 내 인생의 항암은 끝이야, 케모포트(중심정맥관)도 뚫었으니, 나 호스피스로 갈래.” 사실 우리는 지난 15년이란 세월을 호스피스밖에 몰랐다. 어깨 너머 들은 서당개 풍월같이, 자기 병이 어느 정점에 와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손쓸 겨를도 없이 그 나쁜 놈이 도적같이 쳐들어와 자리를 잡아 쫓아낼 방법도 없이 그만 지고 말았다. 나는 억장이 무너졌다. 사랑하는 사람을 또 이렇게 보내야 하나, 융재만 생각하면 눈물이 끝도 없이 나와 울고 또 울었다. 나뿐 아니라 우리 모두 충격 속에 12월은 악몽! 꿈이라면 깨기라도 하지.호스피스병원으로 오기 전 나를 자기 집으로 불렀다. 자기가 아끼던 수품을 주면서 받으라고 했다. “이걸 나보고 받으라고,” 나는 울면서 소리를 버럭 질렀다. “빨리 나아서 주면 그때 받을게.” 하면서 둘이 펑펑 울었다. “권사님, 그만 울어. 나는 괜찮아, 만일 내가 치매라서 권사님도 몰라보면 어떻게 해, 또 다른 병으로 가족들을 힘들게 하면 안 되잖아. 암은 로또복권이야. 준비할 시간이 있잖아. 내 나이 72살이 되었는데 살 만큼 살았어. 미련도 후회도 없어. 내가 먼저 천국에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 어차피 누구나 가는 길 그 분이 부르시면 어쩔 수 없잖아.” 하면서 오히려 나를 위로했다. 얄미운 사람, 정말 미워. 호스피스병원으로 오기까지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닌데 여러 가지 생각 끝에 자기가 애착을 가지고 봉사하던 이 곳, 호스피스병원으로 결정하고 나니 조금은 편해 보였다. 며칠을 지나 병동에 갇혀있으니 미칠 것 같은 모양이다. 월요일에 원장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 최인례 기사, 미자, 융재, 그리고 남희 우리 넷은 의왕호수로 향했다. 융재는 나보고 무슨 말이든지 수다를 떨라고 했다. 자기는 말할 기운이 없으니 무슨 말이든 들려 달라고 했다. 호수에 도착, 물가 평상에 걸터앉아 늘어진 소나무 사이로 햇볕을 쬐며 옛날 노래도 부르고, 찬송도 불렀다. 또 우리는 마음을 합하여 통성기도를 하나님께 드렸다. “하나님, 사모님을 데려가시면 하나님 손해잖아요. 아직은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는데 살려주세요.”라며 엉엉 울었다. 그 후 두 번째 소풍은 광교산, 그리고 바울기도원 낙엽 냄새를 차창 문을 열어 놓고 흠뻑 마셨다.세 번째 소풍은 12월 15일 목요일. 내가 침대 옆 손을 잡으니 “권사님 내 머리 잘라줘” “응 알았어.” “ 짧게 잘라줘.” “아니 내 마음대로 자를게.” “응 알아서 마음대로 해. 미용사 마음대로니까.”이것이 마지막 미용이 되었다. 목욕 후 오후 시간 소풍을 가자고 나를 졸랐다. 다시 원장 선생님 허락 후 최인례 기사와 보디가드 유덕준 권사님, 융재 그리고 나, 우리는 왕송호수로, 이것이 마지막 소풍이 될 줄이야.12월 19일 아침에 가보니 너무 힘들어 보였다. 하루 종일 둘째 아들과 지켜 보았다. 악몽 같은 하루였다. 그날 오후 6시 48분. 인생 고작 70평생에 희로애락을 다투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그는 순종하고 우리 곁을 떠났다. 사랑하는 친구(수원샘내교회 최건차 목사님의 사모), 이융재여! 천국에서 편히 쉬소서. 슬픔이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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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2-03
  • 그리스도 강림 이후 부흥과 복음-25
    그런데 진(참됨)은 하나님의 영적 성품을 나타내고, 선(착함)은 하나님의 도덕적 성품을 나타내고, 미(아름다움)는 하나님의 예술적 성품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진은 사람의 영적 삶으로 나타나야 하고(영), 선은 사람의 도덕적 삶으로 나타나야 하며(혼), 미는 사람의 예술적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육).그리고 이 진선미는 인생의 목적이 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이다(사 43:7).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첫째 방법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다(사 43:21). 이것은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을 말한다.(요 4:24). 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둘째 방법은 빛을 비추는 착한 행실이다(마 5:16). 그리고 셋째 방법은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이다(요 15:8). 그렇기 때문에 참된 예배 곧 ‘진’과, 착한 행실 곧 ‘선’과, 아름다운 열매 곧 ‘미’는 인생의 목적이 되는 것이다.성도의 견인과 배교예정에 관한 확신으로 최초로 성도의 견인 교리를 분명하고 상세하게 설명한 사람은 아우구스티누스였지만, 그도 어떤 초기 사상과 같이 후기의 신학은 은혜로부터 떨어질 가능성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루터는 은혜와 율법에 대한 긴장 때문에 성도의 견인에 대해 모호한 입장이었지만, 칼뱅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교리를 명백하게 설명하고 더욱 강화하였다.그리하여 칼뱅주의자들은 고전적 칼뱅주의지이든, 온건 칼뱅주의자이든 모두 성도의 견인을 주장한다. 그러나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성도의 배교 가능성을 인정한다. 그리고 개혁주의적 알미니스주의자들은 배교만을 인정하는데, 웨슬리주의적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고백하지 아니한 고의로 범한 죄로 인하여도 구원울 잃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차이는 칼뱅주의 관점은 구원의 소유가 하나님의 작정(예정)의 토대에 의존한다고 보는데 반해, 웨슬리는 이 소유가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와는 달리 알미니안주의자들은 타락한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믿고자 선택할 능력이 없다는 점을 확인한다. 그럼에도 개혁주의 입장과 달라지는 지점은 성령님께서 선행 은총을 베푸셔서 죄인들도 내적 균형 상태를 가지게 하시는데, 이 내적 평형 상태에서 죄인들도 복음을 받아들이거나 거절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도르트 신조(5대 교리로 지칭되는 Tulip) 가운데 ‘저항할 수 없는 은혜’를 인정하지 아니하는 것이다.성경에는 많은 구절들이 성도의 견인을 말하지만, 또한 성경의 상당한 구절들이 구원에서 떨어질 수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으며, 특히 히브리서에는 배교에 대한 말씀들이 많이 있다(히 3:6, 12-14, 6:4-6, 10:23, 39). 이에 대하여 성도의 견인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구절들은 문맥에서 피상적인 기독교적 신앙에 대한 경고로서, 혹은 논적의 상대를 향하여 순전히 가정의 논증으로서, 혹은 신자의 안전을 위하여 더욱 확실한 거룩을 요구하는 권고로서 설명될 수 있다고 말한다.사도 요한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라고 하고,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요 3:18)라고 말한다. 사도 요한은 구원을 영생으로 말하는데, 영생은 말 그대로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에 없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요한에 의하면 성도의 견인이 인정된다.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히 3:6),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히 3:12)라고 말한 후,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 6:4-6)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히브리서 기자는 신자들에게 배교를 여러 차례 경고한다.예수님께서도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또한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마 7:19)라고 하시고,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마 24:10)지만,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3)라고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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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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